1. 개요
한스 큉은 1928년 스위스에서 태어난 가톨릭 사제, 저명한 신학자, 그리고 활발한 저술 활동을 펼친 작가였습니다. 그는 1995년부터 세계 윤리 재단(Stiftung Weltethos)의 회장을 역임하며 종교 간 대화와 보편 윤리 확립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1954년 사제로 서품받고 1960년 독일 튀빙겐 대학교 교수로 임용된 그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젊은 신학 자문위원(peritus)으로 활동하며 교회의 개혁적 정신에 공헌했습니다. 그러나 1970년대 후반 교황 무류성 교리에 대한 비판적인 입장을 표명하면서 바티칸 교황청과 마찰을 빚었고, 결국 1979년 가톨릭 신학 교육 자격을 박탈당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사제직을 유지했으며, 튀빙겐 대학교에서 교회 일치 신학 교수로서의 활동을 지속하며 비판적인 신학적 견해를 굽히지 않았습니다. 그는 전통적인 교의적 기독교를 비판적으로 질문하면서도 종교의 영적 본질을 옹호했으며, '그리스도인임에 대하여', '죽음과 존엄', '모든 것의 시작' 등 다수의 중요한 저작을 남겼습니다. 특히 고통받는 이의 존엄성을 강조하며 조력 자살에 대한 입장을 피력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와 교황 베네딕토 16세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유지했지만, 동시에 교황청과의 복잡하고 때로는 화해적인 관계를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큉은 교회 개혁을 위한 용기 있는 노력, 교회 일치 운동, 그리고 종교 간 대화에 대한 선구적인 기여로 국제적인 인정을 받았으며, 오토 한 평화 메달 등 다수의 명예 학위와 상을 수상했습니다.
2. 생애 초기 및 교육
한스 큉은 1928년 3월 19일 스위스 루체른주 주르제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일곱 형제 중 맏이였으며, 그의 아버지는 신발 가게를 운영했습니다. 큉은 1935년부터 1948년까지 주르제와 루체른의 초등학교와 중학교에서 공부하고 1948년에 중등 교육을 마쳤습니다.
이후 1948년부터 1951년까지 철학을, 1951년부터 1955년까지 신학을 공부하기 위해 로마의 교황청 그레고리오 대학교에 진학했습니다. 이 시기에 그는 비기독교인이나 이단자들의 구원 문제에 깊은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로마에서 공부하는 동안 큉은 매일 아침 폰티피키움 콜레기움 게르마니쿰 에트 훈가리쿰 데 우르베 신학교에서 미사에 참석하고, 성체성사 교리에 대한 명상 시간을 가졌습니다. 또한 매년 3~8일 동안 성경과 기독교의 내용을 침묵 속에서 묵상하는 '영적 수련' 활동에 참여했습니다.
큉은 신학교에서 "7년 동안 로마에서 수련 과정은 헌신과 확산을 동시에 이루어냈습니다. 저는 매일매일 진지하게 기도했으며, 라틴어 성가와 독일어 성가 속에서 교황이 집전하는 미사나 주교 미사에서 완전히 침묵하며 영적인 경험을 했습니다."라고 회고했습니다. 그는 매일 성찬식을 거행하는 것 외에도 공동체 기도실에서 아침, 저녁 기도를 하고 점심과 저녁 식사 후 성체조배를 하는 등 신학생으로서의 의무를 충실히 이행했습니다. 또한 큉은 때때로 죄스러운, 신비롭고 숭고하며 영적인 생각에 감염되어 기도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고, 심지어는 최고의 경지에 도달할 수 없어서 두려움을 느끼기도 했다고 고백했습니다.
1954년 큉은 스위스 바젤 교구의 사제로 서품받았고,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첫 미사를 집전했습니다. 로마에서의 철학 및 신학 교육을 마친 후, 1955년부터 1957년까지 소르본과 파리 가톨릭 연구소에서 학업을 이어갔습니다. 파리 가톨릭 연구소에서 그는 "정당화: 칼 바르트의 교의와 가톨릭적 성찰"(Rechtfertigung. Die Lehre Karl Barths und eine katholische Besinnung레히트페어티궁. 디 레레 카를 바르츠 운트 아이네 카톨리셰 베지눙독일어)이라는 제목의 박사 학위 논문을 완성했습니다. 이 논문에서 큉은 칼 바르트 신학과 가톨릭 신학 간의 칭의론에 대한 합의점을 찾으려 노력했으며, 종교 개혁이 교회의 본질적인 분열을 정당화할 만큼 근본적인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 아님을 주장했습니다. 이 책에는 바르트가 자신의 신학에 대한 큉의 해석에 동의한다는 편지가 포함되어 있었으나, 바르트는 종교 개혁이 과잉 반응이었다는 큉의 결론에는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큉은 바르트와 마르틴 루터가 가톨릭 교회가 비록 불완전할지라도 그리스도의 몸이었다는 사실에 대해 과잉 반응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의 이러한 노력은 이후 1999년 칭의 교리에 관한 공동 선언의 초안 작성에 기여했습니다. 박사 학위 취득 후 그는 암스테르담, 베를린, 마드리드, 런던 등 여러 유럽 도시에서 추가로 학업을 이어갔고, 특히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의 철학을 연구했습니다.
3. 신학적 경력
한스 큉은 튀빙겐 대학교에서의 교수 재직을 시작으로 제2차 바티칸 공의회 활동, 교황 무류성 논쟁, 그리고 이후 교회 일치 운동 및 세계 윤리 구상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신학적 활동을 펼쳤습니다. 그의 경력은 교황청과의 복잡한 관계 속에서도 개혁을 향한 끊임없는 노력을 보여줍니다.
3.1. 튀빙겐 대학교 교수 재직
큉은 뮌스터 대학교에서 1년 동안 강의한 후, 1960년 독일 튀빙겐 대학교의 기초 신학 교수로 임용되었습니다. 같은 해 그는 저술 활동을 시작하여, 다가올 공의회의 많은 개혁 프로그램들을 제시한 저서 '공의회, 개혁과 재결합'(The Council, Reform and Reunion더 카운슬, 리폼 앤 리유니언영어)을 출간했으며, 이 책은 여러 나라에서 베스트셀러가 되었습니다.
1963년 미국 순회 강연에서 큉은 '교회와 자유'(The Church and Freedom더 처치 앤 프리덤영어)라는 강연을 여러 대학교에서 25,000명 이상의 열정적인 청중 앞에서 펼쳤습니다. 그러나 그는 미국 가톨릭 대학교에서는 연설이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당시 가톨릭 대학교 총장은 큉을 포함한 4명의 연사 초청을 거부했는데, 이로 인해 가톨릭 언론과 세속 언론 모두에서 큰 화제를 모았고, 이는 큉의 강연 순회 성공에 기여했습니다. 같은 해 그는 예수회 소속의 세인트루이스 대학교에서 수많은 명예 박사 학위 중 첫 번째를 받았습니다. 1963년 4월, 그는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초청을 받아 백악관을 방문했습니다. 케네디 대통령은 그를 정치인들에게 소개하며 "이분이야말로 가톨릭 교회의 새로운 개척자라고 부를 수 있는 분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큉의 제안으로 튀빙겐 대학교 가톨릭 학부는 훗날 교황 베네딕토 16세가 되는 요제프 라칭거를 교의 신학 교수로 임명했습니다. 라칭거는 튀빙겐에서 큉의 동료가 되었지만, 1968년 학생 운동 이후 라칭거가 더욱 보수적으로 변하면서 두 사람의 협력 관계는 끝을 맺었습니다.
3.2. 제2차 바티칸 공의회 활동
1962년부터 1965년까지 개최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한스 큉은 당시 34세의 젊은 나이로 교황 요한 23세에 의해 신학 자문위원(peritus)으로 임명되어 공의회 폐막까지 활동했습니다. 그는 공의회의 개혁적 정신에 크게 기여했으며, 개신교, 정교회, 그리고 심지어 마르크스주의와의 대화를 추진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의 초기 저술 활동은 공의회의 개혁 방향에 많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3.3. 교황 무류성 논쟁 및 신학 자격 박탈
1960년대 후반, 한스 큉은 19세기 말 구 가톨릭교회의 교회 분열 이후 처음으로 교황 무류성 교리를 공개적으로 거부한 주요 가톨릭 신학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1971년 저서 '과연 무류인가?'(Infallible? An Inquiry인폴리블? 언 인콰이어리영어)를 통해 교황 무류성에 대한 비판적인 입장을 표명하며 큰 논쟁을 일으켰습니다. 이 책이 출간되기 3년 전, 바티칸은 이미 그의 이전 저서 '교회'(The Church더 처치영어)에 대한 비난에 답할 것을 요구한 바 있습니다.
'과연 무류인가?'가 출간된 후, 바티칸 관계자들은 그에게 로마에 출두하여 혐의에 답변할 것을 요청했습니다. 큉은 교회가 자신에게 제기한 파일들을 열람하고 자신의 작업을 평가하는 사람과 직접 대화할 것을 요구하며 자신의 입장을 고수했습니다. 그는 또한 성직자 독신주의를 비판하고, 성직자와 부제직을 여성에게 개방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사제직을 떠나려는 사제에 대한 면제 금지를 "인권 침해"라고 비판했습니다. 그는 당시 가톨릭 관행이 "복음과 고대 가톨릭 전통에 모순되며 폐지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결국 1979년 12월 18일, 그는 가톨릭 신학 교육 자격을 박탈당했습니다. 당시 60명의 미국 및 캐나다 신학자들은 바티칸의 조치에 항의하며 "우리는 한스 큉이 진정 로마 가톨릭 신학자임을 공개적으로 인정합니다"라고 선언했습니다. 튀빙겐 대학교 학생 천여 명도 촛불 시위를 벌이며 항의했습니다. 큉은 나중에 바티칸의 판결을 "나의 개인적인 종교재판 경험"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자서전 '논란의 진실'(Disputed Truth디스퓨티드 트루스영어)에서 큉은 자신에게 제기된 혐의들, 즉 독일 주교들과 바티칸 관리들의 비밀 회의, 튀빙겐 동료 11명 중 7명의 배신, 그리고 바티칸의 비난에 맞서면서도 국립대학교에서의 지위를 유지하려던 노력으로 인한 육체적, 정서적 쇠약 등에 대해 80쪽에 걸쳐 기술했습니다. 그는 사제직을 유지했으며, 튀빙겐 대학교는 큉이 설립하고 1960년대부터 이끌었던 교회 일치 연구소와 그의 교수직을 가톨릭 학부의 관할에서 분리했습니다. 큉은 1996년 은퇴할 때까지 종신 교수로서 교회 일치 신학을 계속 가르쳤습니다.
3.4. 교회 일치 운동 및 세계 윤리 구상
가톨릭 신학 교육 자격을 박탈당한 이후에도 한스 큉은 튀빙겐 대학교에서 1996년 은퇴할 때까지 교회 일치 신학 교수로서 활동을 지속했습니다. 그는 종교 간 대화와 보편 윤리 확립에 깊은 관심을 가졌습니다.
1981년, 큉은 3개월 동안 시카고 대학교의 객원 교수로 재직했으며, 이때 노터데임 대학교를 비롯한 한 곳의 가톨릭 기관에 초청받아 강연했습니다. 또한 텔레비전 프로그램 '필 도나휴 쇼'에 출연하기도 했습니다. 1986년 10월에는 인디애나주 웨스트 라파예트의 퍼듀 대학교에서 열린 제3회 불교-기독교 신학자 만남에 참석했습니다. 큉은 자신의 종교 간 연구가 "그리스도에 대한 살아있는 신앙 속에 자신의 뿌리를 굳건히 다졌다"고 말하며, "자신의 신앙에 대한 굳건함과 다른 신념을 가진 사람들과의 대화 능력은 상호 보완적인 미덕이다"라는 입장을 오랫동안 유지했습니다.
1990년대 초, 큉은 '세계 윤리 구상'(Weltethos벨트 에토스독일어)이라는 프로젝트를 시작했습니다. 이 프로젝트는 세계 종교들을 구분하는 요소보다는 그들이 공통으로 가진 점들을 설명하고, 모든 사람이 받아들일 수 있는 최소한의 행동 규칙을 마련하려는 시도였습니다. 그의 세계 윤리 비전은 '세계 윤리를 향하여: 최초 선언'(Towards a Global Ethic: An Initial Declaration투워즈 어 글로벌 에틱: 언 이니셜 디클러레이션영어)이라는 문서에 담겼고, 이 선언은 1993년 세계 종교인 회의에서 전 세계의 종교 및 영적 지도자들에 의해 서명되었습니다. 이후 큉의 프로젝트는 유엔 문명 간 대화의 해(2001년)로 이어졌고, 큉은 19명의 "저명한 인사" 중 한 명으로 선정되었습니다. 큉은 2001년 9월 11일 테러 공격 직후 완성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 언론에서 거의 다뤄지지 않은 점에 대해 불평하기도 했습니다.
3.5. 교황청과의 관계 및 비판
한스 큉은 가톨릭 교회의 개혁을 끊임없이 주장하며 교황청, 특히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와 교황 베네딕토 16세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유지했습니다.
1986년, 큉은 당시 가톨릭 신학 교육 자격 박탈 위기에 처했던 신학자 찰스 커런을 직접 만나 작업을 계속하도록 격려하고 동료들의 지지와 배신에 대한 자신의 경험을 나누었습니다. 1990년대에는 큉과 마찬가지로 교의적 구조에 도전하다가 가톨릭 신학 교육 자격을 박탈당하고 사제직이 정지된 동료 가톨릭 신학자 오이겐 드레베르만을 옹호했습니다. 큉은 1992년 튀빙겐 대학교에서 드레베르만이 교회 자유를 위한 헤르베르트 하그 상을 수상했을 때 축사를 전달했습니다.
큉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시성 가능성이 논의될 때, "그의 통치권은 여성과 신학자들의 권리를 모두 억압한 권위주의적 교황직이었다"고 반대했으며, 구스타보 구티에레스와 레오나르도 보프 같은 라틴 아메리카의 해방 신학자들에 대한 요한 바오로 2세의 처우가 비기독교적이라고 비판했습니다. 큉은 요한 바오로 2세를 단 한 번도 그의 이름으로 부르지 않고 "교황 보이티와"라고 불렀으며, 이러한 호칭은 그의 분노를 담고 있었습니다. 2005년에도 큉은 이탈리아와 독일에서 요한 바오로 2세에 대한 비판적인 글을 발표하면서 그를 "교황 보이티와"라고 지칭했습니다. 그는 요한 바오로 2세가 교회를 바티칸 공의회 이전의 상태로 되돌리고, 개혁과 교회 간 대화를 가로막으며, 로마의 절대적 지배권을 재확인함으로써 세상이 기대했던 회심, 개혁, 대화의 시대를 가로막았다고 주장했습니다. 2003년에는 교황 비오 9세의 시성을 "교회 정치적 제스처"로 보았습니다. 큉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와 만나기 위해 10여 차례 이상 시도했지만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2005년 9월 26일, 그는 카스텔 간돌포에서 교황 베네딕토 16세와 저녁 식사를 하며 우호적인 대화를 나누는 놀라운 순간을 가졌습니다. 이 자리에서 두 사람은 명백한 의견 불일치 주제를 피하고, 큉의 종교 간 및 문화적 작업에 집중했습니다. 교황은 종교 간 대화와 세속적 이성과의 만남에서 인류의 필수적인 도덕적 가치에 대한 새로운 인정을 위한 큉의 노력을 인정했습니다. 큉은 베네딕토 16세가 자신들의 만남에 대한 바티칸의 성명을 직접 작성했으며, "저는 모든 단어에 동의했습니다"라고 보고했습니다.
2009년 르 몽드와의 인터뷰에서 큉은 베네딕토 16세가 성 비오 10세회 주교 4명의 파문 조치를 해제한 것에 대해 날카롭게 비판했습니다. 그는 교황의 평생에 걸친 현대 사회와의 고립을 비난하며, 베네딕토 16세가 더 작고 순수한 교회를 지향하는 결과로 "교회가 종파가 될 위험이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의 발언은 추기경단 단장인 안젤로 소다노 추기경의 질책을 받았습니다.
2010년 4월, 그는 모든 가톨릭 주교들에게 공개 서한을 발표하여 교황 베네딕토 16세의 전례, 친교, 종교 간 문제 처리, 그리고 가톨릭 교회의 성 학대 스캔들을 비판했습니다. 그는 나아가 주교들에게 목소리를 내고 지역적 해결책을 모색하며 또 다른 바티칸 공의회를 소집할 것을 포함한 6가지 제안을 고려할 것을 촉구했습니다.
2011년 그는 가톨릭 신학 교수들이 발표한 가톨릭 교회의 개혁을 요구하는 독일어 각서인 '교회 2011, 새로운 시작의 필요성'(Church 2011, The Need for a New Beginning처치 2011, 더 니드 포 어 뉴 비기닝독일어)에 서명했습니다.
4. 주요 저작 및 사상
한스 큉은 방대한 저술 활동을 통해 교회 개혁, 교회 일치, 종교 간 대화, 과학과 종교의 관계, 그리고 임종 시 존엄성을 포함한 핵심적인 신학적, 윤리적, 철학적 사상을 체계적으로 발전시켰습니다.
4.1. 주요 저서
한스 큉은 다양한 주제에 걸쳐 심오한 통찰을 담은 다수의 저서를 출간했습니다.
- 공의회, 개혁과 재결합(The Council, Reform and Reunion더 카운슬, 리폼 앤 리유니언영어) (1960): 이 책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논의될 많은 개혁 프로그램들의 윤곽을 제시하며 베스트셀러가 되었습니다.
- 정당화: 칼 바르트 교의와 가톨릭적 성찰(Justification: The Doctrine of Karl Barth and a Catholic Reflection저스티피케이션: 더 독트린 오브 칼 바르트 앤 어 캐솔릭 리플렉션영어) (1964): 그의 박사 학위 논문으로, 칼 바르트 신학의 '칭의론'과 가톨릭 신학 간의 합의점을 탐색했습니다. 이 책은 종교 개혁으로 인한 교회 분열이 근본적인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 아님을 주장했습니다.
- 과연 무류인가?(Infallible? An Inquiry인폴리블? 언 인콰이어리영어) (1971): 이 책에서 큉은 교황 무류성 교리에 대한 비판적 입장을 공개적으로 표명하며 바티칸과의 갈등을 야기했습니다.
- 그리스도인임에 대하여(On Being a Christian온 빙 어 크리스천영어) (1974): 큉은 이 책에서 기독교의 근원을 추적하며, 현대 학문을 광범위하게 활용하여 복음서에서 역사적 예수에 대해 알려질 수 있는 것을 추출했습니다. 그는 교회 공의회의 가르침이나 인간 권위에서 파생된 고도로 발전된 신학적 명제에서 시작하는 대신, 대안이 가능한지 물었습니다. 그는 "최초의 제자들처럼 실존하는 인간 예수, 그의 역사적 메시지와 발현, 그의 삶과 운명, 그의 역사적 실재와 역사적 활동에서 출발한 다음, 이 인간 예수와 하느님과의 관계, 그의 아버지와의 일체성에 대해 묻는 것이 신약성경의 증거와 현대인의 역사적 사고방식에 더 부합하지 않을까?"라고 제안했습니다.
- 죽음과 존엄(Dying with Dignity다잉 위드 디그니티영어) (1998): 발터 옌스와 공저한 이 책에서 큉은 기독교적 관점에서 안락사와 조력 자살을 수용할 수 있음을 긍정했습니다.
- 모든 것의 시작(Der Anfang aller Dinge데어 안팡 알러 딩어독일어; The beginning of all things더 비기닝 오브 올 띵스영어) (2005): 튀빙겐 대학교에서의 강연을 바탕으로 한 이 책에서 큉은 과학과 종교의 관계를 논했습니다. 그는 양자 물리학에서 신경 과학에 이르는 분석을 통해 미국에서의 진화론 논쟁에 대해 언급하며, 진화론 교육에 반대하는 이들을 "순진하고 계몽되지 못한" 이들이라고 일축했습니다.
- 내가 믿는 것(Was ich glaube바스 이히 글라우베독일어) (2010): 이 책에서 그는 자연과의 개인적인 관계를 설명하며, 자연을 올바르게 관찰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 하느님의 창조물에서 힘을 얻되, 잘못된 광적인 자연 사랑에 빠지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고 서술했습니다.
- 경험된 인간성(Erlebte Menschlichkeit에어렙테 멘슐리히카이트독일어) (2013): 큉은 이 책에서 신체적 질병, 고통, 치매 등으로 인해 삶이 견딜 수 없게 되었을 때, 사람들이 스스로 생을 마감할 권리가 있다고 믿는다고 밝혔습니다. 그는 파킨슨병으로 고통받으며 시력과 글쓰기 능력을 잃어가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을 위해 조력 자살을 고려하고 있다고 언급했습니다. 큉은 자신이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전례를 따르고 싶지 않다고 썼습니다.
그 외 주요 저서로는 '교회 구조'(Structures of the Church스트럭처스 오브 더 처치영어) (1962), '세상이 믿게 하라'(That the World May Believe댓 더 월드 메이 빌리브영어) (1963), '살아있는 교회'(The Living Church더 리빙 처치영어) (1963), '왜 사제들인가?'(Why Priests?와이 프리스트스?영어) (1971), '하나님은 존재하는가?'(Does God Exist? An Answer For Today더즈 갓 이그지스트? 언 앤서 포 투데이영어) (1980), '기독교와 세계 종교들: 이슬람, 힌두교, 불교와의 대화의 길'(Christianity and the world religions: paths of dialogue with Islam, Hinduism, and Buddhism크리스천니티 앤 더 월드 릴리전스: 패스 오브 다이얼로그 위드 이슬람, 힌두이즘, 앤 부디즘영어) (1986), '기독교와 중국 종교'(Christianity and Chinese Religions크리스천니티 앤 차이니스 릴리전스영어) (1988, 줄리아 칭 공저), '제3천년을 위한 신학: 교회 일치적 관점'(Theology for the Third Millennium: An Ecumenical View시올로지 포 더 써드 밀레니엄: 언 에큐메니컬 뷰영어) (1990), '세계적 책임: 새로운 세계 윤리를 찾아서'(Global Responsibility: In Search of a New World Ethic글로벌 리스폰서빌리티: 인 서치 오브 어 뉴 월드 에틱영어) (1991), '유대교: 어제와 내일 사이'(Judaism: Between Yesterday and Tomorrow주다이즘: 비트윈 예스터데이 앤 투모로우영어) (1992), '위대한 그리스도교 사상가들'(Great Christian Thinkers그레이트 크리스천 씽커스영어) (1994), '가톨릭 교회: 짧은 역사'(The Catholic Church: A Short History더 캐솔릭 처치: 어 쇼트 히스토리영어) (2001), '여성과 기독교'(Women and Christianity우먼 앤 크리스천니티영어) (2001), '나의 자유를 위한 투쟁: 회고록'(My Struggle for Freedom: Memoirs마이 스트러글 포 프리덤: 메모아즈영어) (2003), '나는 왜 아직 그리스도인인가'(Why I Am Still a Christian와이 아이 앰 스틸 어 크리스천영어) (2006), '이슬람: 과거, 현재, 미래'(Islam: Past, Present and Future이슬람: 패스트, 프레전트 앤 퓨처영어) (2007), '논란의 진실: 회고록 II'(Disputed Truth: Memoirs II디스퓨티드 트루스: 메모아즈 투영어) (2008) 등이 있습니다. 한국어로 번역된 저서로는 '모차르트, 음악과 신앙의 만남', '교회란 무엇인가', '가톨릭교회', '세계윤리 구상', '문학과 종교'(발터 옌스와 공저), '음악과 종교' 등이 있습니다.
4.2. 신학적 및 철학적 사상
한스 큉의 신학적, 철학적 사상은 가톨릭 교회의 본질과 교회 개혁, 교회 일치, 종교 간 대화, 과학과 종교의 관계, 그리고 인간 존엄성 문제를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그는 전통적인 교의적 기독교에 비판적인 질문을 던지면서도 종교의 영적 본질을 지지했습니다. 특히 칼 바르트 신학과 가톨릭 신학의 칭의론 사이의 합의점을 모색하며, 종교 개혁이 교회의 본질적인 분열을 야기할 만큼 근본적인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 아님을 주장했습니다. 이러한 그의 입장은 1999년 칭의 교리에 관한 공동 선언의 초석이 되었습니다.
큉은 성직자 독신주의를 비판하고, 사제직과 부제직을 여성에게 개방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또한 사제직을 떠나려는 사제에 대한 면제 금지를 "인권 침해"로 규정하며, 당시 가톨릭 관행이 "복음과 고대 가톨릭 전통에 모순되며 폐지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교황 무류성 교리를 인간이 만든 교리이며 따라서 변경 가능하다고 보았습니다.
그의 '세계 윤리 구상'은 종교 간 대화의 중요한 부분이었습니다. 큉은 세계 종교들이 공유하는 윤리적 가치와 최소한의 행동 규칙을 모색하여, 분열보다는 화합을 강조했습니다. 이는 종교 간 신뢰를 구축하고 평화를 증진하는 데 기여하는 선구적인 시도로 평가됩니다. 그는 자신의 종교 간 연구가 "그리스도에 대한 살아있는 신앙 속에 자신의 뿌리를 굳건히 다졌다"고 말하며, 자신의 신앙에 대한 굳건함과 다른 신념을 가진 사람들과의 대화 능력이 상호 보완적인 미덕이라고 강조했습니다.
큉은 과학과 종교의 관계에 대한 깊이 있는 고찰을 통해, 양자 물리학에서 신경 과학에 이르는 다양한 과학적 발견들이 신학적 이해와 충돌하지 않고 오히려 상호 보완적일 수 있음을 역설했습니다. 그는 진화론 교육에 반대하는 이들을 "순진하고 계몽되지 못한" 이들이라고 비판하며, 과학적 진보와 종교적 진실이 양립할 수 있음을 보여주려 했습니다.
또한 큉은 인간의 존엄성과 자율성을 강조하며, 특히 임종 시 존엄성을 중요한 윤리적 문제로 다루었습니다. 그는 고통스러운 질병이나 치매로 인해 삶이 견딜 수 없게 되었을 때, 개인이 스스로 생을 마감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는 그가 파킨슨병으로 고통받으면서 조력 자살을 고려했던 자신의 경험과도 연결됩니다. 그의 이러한 입장은 생명 윤리 분야에서 논란을 불러일으켰지만, 인간의 고통과 자율성에 대한 깊은 성찰을 담고 있습니다.
5. 개인적인 삶
한스 큉은 일곱 형제 중 맏이로, 그의 아버지는 신발 가게를 운영했습니다. 2021년 10월, 큉의 절친한 친구이자 동료였던 발터 옌스의 미망인 잉에 옌스는 큉에게 평생 동반자가 있었으며, 그 동반자가 큉의 집에 함께 살았음을 확인했습니다.
6. 사망
한스 큉은 2021년 4월 6일 93세의 나이로 독일 튀빙겐에 있는 자택에서 사망했습니다.
그의 사망 소식에 교황청 생명 학술원은 "지난 세기의 위대한 신학자가 떠났습니다. 그의 사상과 분석은 가톨릭 교회, 다른 교회들, 사회, 문화에 대해 항상 성찰하게 해야 합니다"라고 트위터를 통해 애도를 표했습니다. 바티칸으로부터 비슷한 처우를 겪었던 동료 신학자 찰스 커런은 큉을 "지난 60년 동안 가톨릭 교회 개혁을 위한 가장 강력한 목소리"이자 "그가 쓴 모든 것을 읽어낼 수 있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다작한 작가"였다고 평가했습니다.
7. 평가 및 영향
한스 큉은 20세기 후반 가톨릭 신학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그의 개혁적이고 비판적인 시각은 긍정적 평가와 함께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습니다.
7.1. 긍정적 평가 및 기여
한스 큉은 그 탁월한 신학적 통찰력과 교회의 개혁을 위한 용기 있는 노력으로 폭넓게 인정받았습니다. 그는 "지난 60년 동안 가톨릭 교회 개혁을 위한 가장 강력한 목소리"로 평가받았으며, 그의 방대한 저술은 많은 이들에게 영향을 주었습니다.
큉은 교회 일치 운동과 종교 간 대화에 선구적으로 기여했습니다. 특히 '세계 윤리 구상' 프로젝트를 통해 세계 종교들이 공유하는 보편 윤리를 모색하고, 이를 국제사회에 제시함으로써 평화와 상호 이해 증진에 크게 공헌했습니다. 교황 베네딕토 16세조차 2005년 큉과의 만남에서 종교 간 대화와 세속적 이성과의 만남을 통해 인류의 필수적인 도덕적 가치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높이려는 그의 노력을 인정했습니다.
미국 방문 중 존 F. 케네디 대통령은 큉을 "가톨릭 교회의 새로운 개척자"라고 칭하며 그의 개혁적 정신을 높이 평가했습니다. 그는 가톨릭 교회의 현대화와 더 개방적인 교회상 확립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으며, 이를 통해 많은 추종자와 지지자들을 얻었습니다.
7.2. 비판 및 논란
큉의 가장 큰 논란은 1970년대 후반 교황 무류성 교리에 대한 공개적인 비판이었습니다. 이로 인해 그는 1979년 가톨릭 신학 교육 자격을 박탈당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비판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는 성직자 독신주의, 여성의 성직 참여 금지, 그리고 사제직을 떠나려는 사제들에 대한 면제 금지(이를 "인권 침해"로 보았다) 등 여러 가톨릭 교회의 관행들이 복음과 고대 가톨릭 전통에 모순된다고 주장하며 철폐를 촉구했습니다. 그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시성 논의에 반대하며 그의 교황직이 "여성과 신학자들의 권리를 모두 억압한 권위주의적"이었고, 해방 신학자들에 대한 처우는 "비기독교적"이었다고 비판했습니다. 2003년에는 교황 비오 9세의 시성을 "교회 정치적 제스처"로 보았습니다.

2009년에는 교황 베네딕토 16세가 성 비오 10세회 주교 4명의 파문 조치를 해제한 것에 대해 날카롭게 비판하며, 교황의 고립으로 인해 "교회가 종파가 될 위험이 있다"고 경고하기도 했습니다. 2010년 4월에는 베네딕토 16세의 전례, 친교, 종교 간 문제 처리, 그리고 성 학대 스캔들 대응을 비판하는 공개 서한을 모든 가톨릭 주교들에게 보냈습니다.
또한 큉은 생명 윤리 문제, 특히 안락사와 조력 자살에 대한 그의 견해로 인해 비판과 논란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1998년 발터 옌스와 공저한 '죽음과 존엄'에서 그는 기독교적 관점에서 안락사를 수용할 수 있음을 긍정했습니다. 2013년에는 자신이 파킨슨병으로 고통받으며 시력과 글쓰기 능력을 잃어가고 있었기 때문에, 스스로 조력 자살을 고려하고 있다고 밝히며, 신체적 고통이나 치매로 삶이 견딜 수 없게 된 사람들은 생을 마감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와 달리 오랜 고통 속에서 생을 마감하고 싶지 않다고 언급했습니다.
8. 수상 및 명예
한스 큉은 그의 학문적 업적과 사회적 공헌을 기리기 위해 국내외에서 수많은 상과 명예 학위, 시민 명예 칭호를 받았습니다.
- 1991년: 스위스 문화상
- 1992년: 칼 바르트 상
- 1998년: 테오도어 호이스 재단 상, 국제 기독교-유대교 협의회로부터 종교 간 금메달
- 1999년: 루터교 도시 연맹 상
- 2003년: 독일연방공화국 공로훈장 기사십자 대훈장
- 2005년: 니와노 평화상, 바덴뷔르템베르크주 메달
- 2006년: 레프 코펠레프 상
- 2007년: 독일 프리메이슨 문화상, 튀빙겐 명예 시민
- 2008년: 하인리히 하이네 친구회로부터 시민 용기 명예상, 독일 유엔 협회(DGVN)로부터 오토 한 평화 메달 수상 ("평화와 국제적 이해에 대한 탁월한 공로, 특히 인류애, 관용, 그리고 위대한 세계 종교들 간의 대화를 위한 모범적인 노력")
- 2009년: 포츠담 대학교 아브라함 가이거 콜렉으로부터 아브라함 가이거 상
- 2017년: 2005년 천문학자 빈센초 카술리가 발견한 소행성 190139 한스큉이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습니다.
명예 박사 학위:
- 1963년: 세인트루이스 대학교 명예 법학 박사
- 1966년: 퍼시픽 종교 학교 명예 신학 박사
- 1970년: 로욜라 대학교 시카고 명예 인문학 박사
- 1971년: 글래스고 대학교 명예 신학 박사
- 1984년: 토론토 대학교 명예 법학 박사
- 1985년: 케임브리지 대학교 명예 신학 박사, 미시간 대학교 명예 인문학 박사
- 1995년: 더블린 대학교 명예 신학 박사
- 1999년: 웨일스 대학교 명예 신학 박사, 라마포 칼리지 명예 인문학 박사
- 2000년: 히브리 유니언 칼리지 - 유대교 종교 연구소 명예 인문학 박사
- 2002년: 플로리다 국제 대학교 명예 신학 박사
- 2003년: 디트로이트 교회 일치 신학 신학교 명예 신학 박사
- 2004년: 제노아 대학교 명예 박사
- 2011년: 스페인 국립 원격 교육 대학교 명예 박사
9. 대중문화 속 언급
한스 큉은 문학 작품에서도 언급되며 대중문화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 줄리안 메이의 '제3바닥세 망명 연대기'(Saga of Pliocene Exile사가 오브 플리오신 엑사일영어) 시리즈 세 번째 책인 '태어나지 않은 왕'(The Nonborn King더 논본 킹영어)에서 사소한 등장인물인 설리번-톤은 한때 "포드햄 대학교의 큉 도덕 신학 교수"였다고 언급됩니다.
- 루이즈 에르드리히의 '살아있는 신의 미래 고향'(Future Home of the Living God퓨처 홈 오브 더 리빙 갓영어)에서 시더 호크 송메이커가 가장 좋아하는 신학자로 언급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