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초기 생애와 제1차 세계 대전
한스 칼름은 1889년 4월 21일 리보니아 주 펠린 군 코차마 마을(현재 에스토니아 포햐사칼라 교구)의 농가에서 태어났다. 그의 성 '칼름'은 고대 핀우그리아어파 단어로 '죽음'을 뜻하는 kalma핀우고르어파 (기타)와 어원적으로 관련이 있다. 가족 전설에 따르면, 칼름의 한 조상은 흑사병이 돌 때 외딴 묘지 섬에 숨어 살아남았고, 그 후 성을 바꾸었다고 전해진다. 1914년 칼름은 러시아 제국군에 징집되어 제1차 세계 대전 중 리가만에서 복무했다. 1917년 러시아 혁명 이후 그는 핀란드로 탈출하여 우익 민병대인 핀란드 백위대에 가담했다.
2. 핀란드 내전과 전쟁 범죄
한스 칼름은 핀란드 내전 기간 동안 자신의 부대가 저지른 일련의 잔혹한 전쟁 범죄로 악명을 떨쳤다. 그의 부대는 부상병과 간호사를 무차별적으로 살해하고, 포로 특히 여성 포로들을 불법적으로 학살하는 데 연루되었다.
2.1. 백위대 가담과 하르모이넨 사건
1917년 러시아 혁명 이후 핀란드로 넘어온 한스 칼름은 핀란드 백위대에 합류하여 애흐태리와 에보의 산림감시원 학교 학생들로 주로 구성된 대대를 지휘하게 되었다. 1918년 3월, 칼름의 대대는 쿠흐모이넨의 하르모이넨 마을에 있던 적위대 야전 병원을 공격하여 11명의 부상당한 병사와 2명의 간호사를 살해하며 악명을 떨치기 시작했다.
2.2. 헨날라 수용소 즉결 처형
라흐티 전투가 백군의 압승으로 끝나고 약 3만 명의 포로가 발생했는데, 이 중 800여 명은 적위대원이었고 2만 명 이상은 자위적으로 무장한 난민들이었다. 이 포로들은 여러 수용소에 분산 수용되었는데, 칼름의 대대는 헨날라 수용소를 관리하게 되었다. 칼름의 대대는 1918년 5월 짧은 기간 동안 헨날라 수용소에서 적법한 재판 절차 없이 500명 이상의 적군 포로를 즉결 처형했다. 이 중 약 200명 이상이 여성이었으며, 이들 여성들은 처형되기 전 강간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가장 어린 피해자는 14세에 불과했다. 또한, 칼름 본인이 포로로 잡힌 적위대 지도자 알리 알토넨을 직접 사살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은 것으로 전해진다.
3. 에스토니아 독립 전쟁
1918년 7월, 한스 칼름은 핀란드 백위대에서 퇴역하고 에스토니아로 건너갔다. 그는 에스토니아 독립 전쟁에서 핀란드인 의용병들로 구성된 포흐얀 포야트 연대의 지휘관을 맡아 전투에 참여했다. 포흐얀 포야트 연대는 1919년 5월 해산되었고, 칼름은 이후 핀란드로 돌아왔다.
4. 미국 생활과 의료 활동
발트해 지역에서의 군사 복무를 마친 한스 칼름은 미국으로 건너가 의학 분야에 종사하며, 특히 대체의학 분야에 대한 관심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4.1. 의학 연구와 개업
한스 칼름은 1923년부터 1933년까지 미국에 거주하며 의학을 공부했다. 그는 뉴저지와 뉴욕주에서 의사로 활동했으며, 1930년에는 시민권을 획득했다. 1933년 미드웨스트 의과대학을 졸업한 칼름은 1934년 다시 핀란드로 돌아와 서부 핀란드의 라움에 정착했다.
4.2. 대체의학에 대한 관심
핀란드에 돌아온 후, 한스 칼름은 자연요법, 정골요법, 동종요법을 포함한 다양한 대체의학 분야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그는 실제로 스파를 운영하며 대체의학적 치료를 제공하기도 했다.
5. 제2차 세계 대전과 전후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한스 칼름의 군 경력은 짧았지만 논란이 많았으며, 이로 인해 전후에는 도피와 함께 전문 직업인으로서의 위기를 겪게 되었다.
5.1. 포로수용소 지휘와 나치 조직 활동
핀란드가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을 때, 한스 칼름은 피액새매키의 한 포로수용소의 사령관으로 잠시 복무했다. 그는 1941년 10월 수용소장 직에서 해임된 후 핀란드군을 위해 독일에서 군사 보건 문제에 대한 연구를 수행하도록 파견되었다. 전쟁 중 칼름은 핀란드의 나치 조직인 핀란드 국민사회주의 노동기구(KTJ)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5.2. 전후 도피 및 의사 면허 취소
피액새매키 포로수용소에서의 부적절한 행위에 대한 체포를 피하기 위해, 한스 칼름은 1946년 스웨덴을 거쳐 미국으로 도피했다. 그는 사우스캐롤라이나주 에이컨군에서 의사로 일했으며, 이후 멕시코에서 외과를 공부하기도 했다. 1957년 칼름은 동종요법 진료를 위해 핀란드로 귀국했다. 그러나 1974년, 핀란드 당국이 칼름이 1933년 졸업한 미드웨스트 의과대학이 미국 의학 협회(AMA)의 승인을 받지 못한 기관임을 확인하면서 그의 의사 면허가 최종적으로 취소되었다.
6. 사망
의사 면허가 취소된 후, 한스 칼름은 핀란드 이위배스퀼래에 있는 아들의 가족과 함께 여생을 보냈다. 그는 1981년 2월 1일에 9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7. 주요 저작
- 오르가노트로피아: 치료의 기초 (Organotropia as a Basis of Therapy영어, 1969)
8. 역사적 평가와 논란
한스 칼름의 생애는 군인으로서의 경력과 이후의 의료 활동으로 나뉘지만, 특히 핀란드 내전 중 저지른 전쟁 범죄와 나치즘과의 연루로 인해 극심한 비판을 받는다. 그는 하르모이넨에서 부상병과 간호사를 살해하고, 헨날라 수용소에서는 수백 명의 포로, 특히 여성과 어린이를 포함한 비무장 민간인들을 무차별적으로 즉결 처형하는 데 관여하며 반인륜적인 행위를 저질렀다. 이러한 그의 행동은 기본적인 인권과 민주주의적 가치를 심각하게 훼손한 것으로 평가된다. 또한,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핀란드 내 나치 조직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한 사실은 그의 극우적 사상과 인권 의식 부재를 명확히 보여주는 부분으로, 역사적으로 매우 부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