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초기 생애 및 배경
하이다르 칸은 러시아 제국 남캅카스에서 성장하며 교육을 받았으며, 초기부터 사회주의 운동에 참여했다.
1.1. 출생과 가족
하이다르 칸 아무오글리 타리베르디는 이란의 타리베르디예프 가문의 일원으로, 1880년 12월 20일에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이름은 알리-아크바르였으며, 어머니는 지주의 딸이었다. 그는 6남 5녀 중 둘째 아들이었다.
그의 출생지는 정확하지 않아 논쟁의 여지가 있다. 일부 자료에서는 이란 북서부 카자르 이란의 우르미아를 그의 출생지로 보며, 또 다른 이란 역사가인 압둘-하디 하이리(Abdul-Hadi Hairi)는 그가 러시아령 아르메니아에서 태어났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의 가족은 그가 6세 때 러시아 제국의 남캅카스 지역으로 이주하여 알렉산드로폴 (현재 아르메니아의 귐리)에 정착했다. "아무오글리"라는 별명은 나중에 그가 바쿠의 노동자들로부터 받은 별명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동복 형인 압바스는 나중에 하이다르와 함께 미르자 알리 아스가르 칸 아민 알-솔탄 암살에 관여했으며, 동복 동생인 술라이만은 페트로그라드 군사혁명위원회와 '아다라트'(Adalat) 중앙위원을 역임했다.
1.2. 교육 및 초기 활동
하이다르는 알렉산드로폴에서 교육을 시작하여, 예레반과 트빌리시의 고등 교육 기관에서 학업을 이어갔다. 그는 1899년에 전기 공학 학위를 받고 트빌리시를 졸업했다. 회고록에서 하이다르는 12세 때부터 정치 활동을 시작했다고 주장했다. 1898년 트빌리시에서 학생이던 시절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과 사회주의자 그룹을 접하게 되었고, 1901년에는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바쿠 지부의 정식 당원이 되었다. 그러나 그가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창립 연도인 1898년에 입당했다는 주장은 당시 다른 고참 활동가들에 비해 이례적으로 빨라, 자신의 업적을 과대평가하기 위한 창작이라는 설도 존재한다.
2. 이란에서의 활동
하이다르 칸은 이란 입헌혁명이 전개되던 시기에 이란으로 돌아와 정치적 급진화를 주도하며 주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2.1. 이란 도착 및 초기 활동
이란에 도착했을 때 하이다르 칸은 페르시아어에 대한 지식이 없고 이란 사회와 문화에 익숙하지 않은 경험 없는 젊은이였다. 그러나 그는 타고난 불안감, 사명감, 그리고 이란과 이란인들에 대한 각별한 사랑을 바탕으로 행동에 나섰다. 그는 회고록에서 호라산의 한 관리를 굴욕시킨 일에 대해 "나에게는 한 가지 목적뿐이었다. 그것은 교육과 이해가 부족한 호라산(이란) 사람들에게 [그 관리도] 평범한 인간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었다"라고 언급했다. 그는 마슈하드에서 15개월을 머문 후, 1903년 하즈 아민 알-자르브(Haj Amin Al-zarb) 전기 플랜트의 엔지니어로 테헤란에 도착했다. 이 무렵 그는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의 지시에 따라 비합법 사회민주주의 조직인 힘메트와 이란 사회민주당 지부 설립에 관여했다.
2.2. 입헌혁명 시기 활동
하이다르 칸은 페르시아 입헌 혁명이 막 시작될 무렵 테헤란에 도착했으며, 영국 대사관 부지로 피신한 첫 번째 사람들을 보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모자파르 앗딘 샤 카자르의 사망과 모하마드 알리 샤 카자르의 즉위 이후, 그는 더욱 노련하고 지식 있는 인물이 되어 이란 정치를 급진적인 방향으로 이끄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07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이란을 두 개의 영향권으로 분할하는 영국-러시아 협정이 체결되던 바로 그날, 강력한 이란 총리였던 알리 아스가르 칸이 마즐리스 앞에서 총에 맞아 사망했다. 하이다르 칸은 자신이 이 암살을 계획했음을 시인했으며, 하산 타기자데(Hassan Taqizadeh)도 이를 확인했지만, 하이다르 칸이 행동을 지시받았던 '테러 위원회'의 존재는 부인했다. 알리 아스가르 칸은 막 샤에게 의회와 협력하도록 설득했으며, 의회에서 그의 강력한 지지 기반은 협력을 보장할 수 있었다. 그의 사망으로 그가 구축했던 의회 연합은 빠르게 붕괴되었다. 더욱이 샤는 의회에 대해 더욱 의심하게 되었고, 정치화된 대중이 총리 제거의 혁명적 잠재력을 보면서 의회는 샤를 더 이상 수용하려 하지 않았다. 전선은 날카롭게 그어졌고, 폭력적인 충돌의 가능성이 증대되었다.
샤와 입헌주의자 사이의 간극을 메우려던 다른 정치 엘리트들도 하이다르 칸의 정치적 테러 대상이었다. 여기에는 미르자 아흐마드 칸 알라-알-다울라(Mirza Ahmad Khan Ala-al-Dawla)와 구 체제 인사 중 입헌주의적 동조를 표명했던 키드마트 사회(Khedmat Society)가 포함되었다. 그러나 하이다르 칸의 가장 급진적인 공격은 1908년 2월 28일에 샤의 자동차 행렬에 폭탄이 투척된 사건이었다. 당시 그의 테러 활동으로 인해 "폭탄주의자(Bombist)"라는 별명으로 알려진 하이다르 칸은 이 음모의 책임자로 지목되어 체포되었으나, 그의 사회민주당 동지들의 주장으로 곧 풀려났다. 이 단 한 번의 폭력 행위는 샤의 의회 폐쇄로 이어졌다. 샤와 입헌주의자들은 이제 서로 대치하게 되었고, 양측 모두 무장했다. 그 결과 1909년, 중동 역사상 처음으로 군주가 인민의 이름으로 폐위되었다.
2.3. 혁명 이후 활동 및 망명
입헌 혁명 당시 하이다르 칸은 먼저 캅카스로 탈출하여 혁명가들을 위한 인력과 물자 공급을 도왔다가 이란으로 돌아와 싸웠다. 샤가 폐위된 후 그는 급진적인 민주당(Democratic Party)에 가입하여 1910년 1월 입헌주의자 중 보수파를 이끌던 세예드 압둘라 베바하니 아야톨라의 암살을 조직했다. 이후 그는 대중적인 모스토피 올-맘말렉의 정부 시기에 민주당원과 정부군을 지지하며, 입헌 혁명 당시 무장 투쟁의 베테랑이자 보수파에 군사적 지원을 제공하던 사타르 칸, 바게르 칸 및 무자헤드(Mojahed) 그룹에 대한 공격에 참여했다. 하이다르 칸과 민주당원들은 예프렘 칸, 아르메니아인 경찰청장을 지지하며 그들을 무장 해제시키는 데 성공했다. 사타르 칸은 이 과정에서 입은 부상으로 곧 사망했다.
1911년 3월, 하이다르 칸은 이란을 떠나야만 했다. 보수파가 재집결했고, 이란을 침공하여 아제르바이잔을 점령한 러시아는 국경에 혁명적 이웃을 허용하려 하지 않았다. 하이다르 칸은 폐위된 샤를 다시 왕위에 오르게 돕는 척하며 러시아에 있던 샤로부터 돈을 얻어 유럽으로 떠났다. 유럽에서의 행적은 자료가 부족하지만, 1912년 프라하에서 열린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제6차 전러시아 협의회에서 블라디미르 레닌과 회견했다는 자료도 존재한다. 1915년 10월에는 베를린에서 독일 제국 외무성의 후원을 받아 망명 민주당 지도부가 결성한 '이란 위원회'에 합류했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본격화되자 이란이 중앙 동맹국과 연합국으로 분열되면서, 이란인으로 구성된 중앙 동맹국 의용군 결성을 이란 위원회로부터 지시받았다. 12월에 그는 바그다드로 가서 콜마르 폰 데어 골츠 독일-튀르크 연합군 사령관과도 회견했다. 그러나 이란 내 중앙 동맹국 세력이 독일보다 오스만 제국에 더 접근하려 했고, 하이다르가 군사적 재능이 부족하며 지휘 계통을 받아들이지 않는 등의 이유로 결국 1916년 10월 이란 위원회에서도 축출되어 베를린으로 돌아왔다. 이듬해 1917년 5월 그는 덴마크로 출국하여 스칸디나비아를 거쳐 러시아 소비에트 공화국으로 입국했다.
3. 러시아 및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활동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하이다르 칸은 러시아에서 활발한 정치 활동을 펼쳤으나, 이란인 혁명가들과의 내부 갈등에 직면했다.
3.1. 러시아에서의 정치 활동
1917년 러시아 혁명은 하이다르 칸에게 캅카스로 돌아가 활동할 기회를 제공했다. 그는 1917년 12월부터 1919년 말까지 페트로그라드와 모스크바에서 지냈다. 이 시기 그는 민족 문제 인민위원부 내 중앙 무슬림 인민위원부 국제 선전부와 무슬림 공산주의 조직 중앙 뷰로에 참여했다. 또한 모스크바에 거주하는 하층 이란인들을 위한 원조 단체의 주요 직책을 맡기도 했다.
1920년 2월, 하이다르 칸은 레프 트로츠키의 추천을 받아 반영 투쟁을 위한 러시아 내 이란인 부대 편성을 목표로 투르키스탄 자치 공화국의 타슈켄트로 파견되었다.
3.2. 이란 공산당 내 갈등
타슈켄트에서 하이다르 칸은 현지 집행부와 격렬하게 대립했다. 그는 "무슨 일이 있어도 자신이 군사 지도자가 되어야 하며, 러시아에서 트로츠키 동지처럼 페르시아에서 되고 싶다"고 주장하며 양보하지 않았다. 더 나아가 그는 집행부의 아베티스 술탄자데에 대해 그의 아르메니아계 혈통을 들어 비난하기도 했다. 결국 그는 집행부로부터 축출되었으며, 1920년 6월 술탄자데가 이란의 안잘리에서 개최한 이란 공산당 설립 대회에는 참여하지 않고 9월까지 아시가바트에 머물렀다.
같은 해 9월 1일부터 바쿠에서 개최된 동방 제민족 대회에 대의원으로 선출된 하이다르 칸은 이란 북부에 수립된 혁명 정권인 길란 공화국의 혼란과 이를 둘러싼 술탄자데를 비롯한 이란 공산당 중앙위원회의 책임을 문제 삼았다. 하이다르 칸과 그의 지지자들은 술탄자데 측에 중앙위원회 사임을 요구하고 자신들을 후임으로 선출할 것을 요구했다. 양측은 다시 격렬하게 대립했으나, 결국 이오시프 스탈린의 제안에 따라 11월 11일 볼셰비키 중앙위원회 캅카스 지국(Кавбюро) 결의를 통해 하이다르 칸을 서기로 하는 새로운 이란 공산당 중앙위원회가 발족하게 되었다.
4. 길란 공화국과 말년
이란 공산당의 지도자가 된 하이다르 칸은 길란 공화국에서의 활동을 통해 혁명 세력의 통합을 시도했으나, 결국 내부 갈등과 코민테른과의 불화로 인해 몰락하게 된다.
4.1. 길란 공화국에서의 역할
1921년 1월 26일, 하이다르 칸은 새로운 테제를 발표하며 즉각적인 공산 혁명 노선을 철회하고, 프롤레타리아트와 중소 부르주아지의 공존 및 협력 노선을 채택했다. 그는 길란 혁명에서 분열되어 있던 우파 세력인 미르자 쿠체크 칸의 군대와 좌파 세력인 에프사놀라 칸 두스트다르의 세력을 규합하기 위해 노력했다. 1921년 5월에는 양측의 대립을 해소하고 길란의 혁명 정부를 재통일하는 데 성공했다.
4.2. 체포와 죽음
그러나 코민테른 지도부는 하이다르 칸이 아닌 이란 공산당 중앙위원회에서 축출된 술탄자데 측을 지지하며 하이다르 칸을 신뢰하지 않았다. 코민테른 선전부의 미하일 파블로비치는 "하이다르 칸의 그룹은 가면을 쓰지 않고 당당히 활동하며, 공산주의자의 여름 셔츠를 입지 않기를 제안한다"고까지 언급했다. 코민테른 집행부는 하이다르 칸을 모스크바로 소환했으나, 그는 이 명령을 거부했다. 또한 하이다르 칸은 1921년 2월에 체결된 소비에트-이란 우호 조약을 무시하고, 중앙 정부와 싸우기 위한 병력을 비밀리에 길란으로 이송하기도 했다.
당 중앙을 완전히 무시하게 된 하이다르 칸에 대해 소비에트 아제르바이잔 지도부나 당 중앙 캅카스 지국에서도 더 이상 그를 옹호하는 목소리는 사라졌다. 1921년 5월 24일에는 아제르바이잔 공산당 중앙위원회가 하이다르 칸의 당원증 박탈을 결의했다. 6월 4일에는 캅카스 지국이 이란 공산당 중앙위원회 해산을 결의했으나, 하이다르 칸은 이 또한 거부하며 체포 명령을 피해 그달 말 쿠체크 칸에게로 도피했다. 하지만 그 무렵에는 쿠체크 칸조차도 조직적 뒷배가 완전히 사라진 하이다르 칸을 더 이상 돌보지 않았다.
결국 1921년 9월 29일, 쿠체크 칸 세력이 일으킨 쿠데타로 하이다르 칸은 체포되었다. 1921년 10월 15일, 그는 푸만 근교에서 살해당했다. 이는 미르자 쿠체크 칸의 지시 여부와 관계없이 장갈리스(Jangalis) 그룹에 의해 살해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의 시신은 광범위하게 방부 처리되어 프랑스로 밀반출되었다.
5. 사상 및 이념
하이다르 칸은 복합적인 정치적 사상과 이념을 지녔던 인물로 평가된다. 그는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이념을 추구했지만, 동시에 강한 민족주의적 성향을 보였다.
이란의 연구자들은 하이다르 칸을 독실한 무슬림이자 입헌혁명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민족주의자로 평가한다. 실제로 그는 볼셰비키 회의에서도 민족주의적인 연설로 인해 비난을 받기도 했다. 그의 혁명 이론은 샤리아에 기반한 이슬람 사회주의에 머무는 다소 조잡한 형태였으나, 그럼에도 그는 "민족 혁명은 사회 혁명으로 전화된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그가 사회주의적 변혁을 민족 해방 투쟁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그의 이념적 특성은 러시아 볼셰비키 중앙의 보편적 공산주의 노선과 충돌하는 지점이 되기도 했다.
6. 평가 및 유산
하이다르 칸의 생애와 활동은 그를 둘러싼 자료의 부족함과 복잡한 정치적 행보로 인해 논자에 따라 크게 다른 역사적 평가를 받는다.
6.1. 다양한 역사적 해석
이란의 연구자들은 하이다르 칸을 경건한 무슬림이자 입헌 혁명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민족주의자로 높이 평가한다. 그들은 그를 이란 민족 해방과 근대화에 기여한 인물로 기억하려는 경향이 있다.
반면, 소비에트 연방의 연구자들과 그 흐름을 잇는 투데당은 생전의 평가와는 대조적으로 하이다르 칸을 당내 좌파와 대결하는 것도 마다치 않았던 "진정한 볼셰비키"로 높이 평가했다. 아제르바이잔 정부는 그의 사망 직후부터 유족 연금 지급을 결정했고, 소련 연방 정부는 1968년에 하이다르 칸을 마찬가지로 반혁명 세력에 의해 살해된 "바쿠 코미사르 26인"과 동등한 지위로 현창했다. 실제로 하이다르 칸은 입헌 혁명기 사회민주주의 사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길란 혁명 관계자들이 대부분 사망한 후의 소련에서는 그가 이란인 볼셰비키의 선구자로서 신화적인 인물로 추앙받게 되었다. 이는 정치적 필요에 따라 역사적 인물이 재해석되고 이용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6.2. 후대에 미친 영향
하이다르 칸의 사상과 활동은 이란의 정치 및 사회 발전에 복합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의 급진적인 민족주의와 사회주의적 경향은 이후 이란 내 좌파 운동에 영향을 주었으며, 특히 이란 공산당의 초기 형성 과정에 그의 역할이 중요하게 다루어진다. 비록 그의 길란 공화국 내에서의 시도는 실패로 끝났지만, 이는 이란 내에서 공산주의 혁명이 실제로 시도된 중요한 역사적 선례로 남았다.
소련에서의 그의 신화화 과정은 한편으로 소련의 대이란 정책과 코민테른의 이데올로기적 선전을 반영하는 것이었으나, 동시에 이란 내 혁명 세력에게는 상징적인 인물로서 기억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의 이름은 이란 현대사에서 혁명적 변화와 급진주의를 상징하는 인물 중 한 명으로 자리 잡았다.
7. 관련 항목
- 이란 입헌 혁명
- 페르시아 공산당
- 길란 공화국
- 미르자 쿠체크 칸
- 아베티스 술탄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