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생애 초기 및 교육
필리프 프란츠 폰 지볼트는 1796년 2월 17일, 당시 뷔르츠부르크 주교후국에 속했으며 후에 바이에른 왕국의 일부가 된 뷔르츠부르크에서 의사와 대학교수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문은 뷔르츠부르크 대학교 의학부 교수진을 다수 배출한 명문이었다. 특히 그의 조부 카를 카스파르 폰 지볼트는 독일 근대 수술의 초석을 다진 인물 중 한 명으로 꼽힌다. 그의 아버지 요한 게오르크 크리스토프 폰 지볼트는 뷔르츠부르크 대학교 의학부 산부인과 교수였으나, 필리프가 1세 1개월이던 31세의 나이에 사망했다. 이후 그는 어머니 마리아 아폴로니아 요제파의 동생이자 하이딩스펠트(Heidingsfeld)에 살던 외삼촌의 손에서 자랐다. 어머니와의 사이에서 2남 1녀를 두었으나, 필리프를 제외한 형과 누나는 어린 나이에 사망했다.
필리프는 9세 때 어머니와 함께 마인강을 따라 반 시간 정도 떨어진 하이딩스펠트로 이주하여 1810년 뷔르츠부르크 고등학교에 입학할 때까지 그곳에서 성장했다. 12세부터는 지역 사제가 된 삼촌으로부터 개인 교습을 받았고, 교회의 라틴어 학교에도 다녔다. 1815년 11월, 그는 뷔르츠부르크 대학교 철학과에 입학했으나, 가문의 전통과 친척들의 권유에 따라 의학을 전공하게 되었다. 대학 재학 중 그는 해부학 및 생리학 교수였던 이그나츠 될링어의 집에서 기숙하며 지냈는데, 될링어는 의학을 자연 과학으로 이해하고 다룬 최초의 교수 중 한 명으로 지볼트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 될링어의 집에서는 다른 저명한 과학자들과 정기적으로 교류하며 학문적 영감을 얻을 수 있었다. 그는 특히 유명한 자연학자이자 탐험가인 알렉산더 폰 훔볼트의 저서를 읽으며 먼 나라로 여행하고자 하는 열망을 키웠다.
지볼트는 1815년 11월부터 뷔르츠부르크 대학교에서 의학을 공부했으며, 메나니아 뷔르츠부르크 코어의 일원이 되었다. 될링어 교수 외에도 프란츠 크사버 헬러 교수는 『뷔르츠부르크 대공국 식물상』(1810~1811)의 저자로 그의 학업에 영향을 주었다. 그는 1820년에 의학 학위를 취득하여 의사가 되었고, 초기에는 현재 뷔르츠부르크의 일부인 하이딩스펠트에서 의료 활동을 시작했다. 한편, 대학 시절 필리프는 명문가 출신이라는 자부심이 매우 강했으며, 33차례의 결투를 벌여 얼굴에 상처를 남기기도 했다.
2. 동아시아 부임 및 일본 첫 방문
친지의 초대로 네덜란드에 방문한 지볼트는 네덜란드 식민지로 갈 수 있는 군의관 직책에 지원했다. 그는 1822년 6월 19일 네덜란드 군 복무를 시작했으며, 네덜란드령 동인도 (현재의 인도네시아) 바타비아 (현재의 자카르타)로 향하는 호위함 아드리아나의 함선 외과 의사로 임명되었다. 1822년 9월 로테르담을 출발한 그는 5개월간의 긴 항해 동안 네덜란드어 실력을 연습하고 말레이어를 빠르게 습득했으며, 해양 동물 채집을 시작했다.
2.1. 네덜란드 동인도에서의 활동
1823년 2월 18일 바타비아에 도착한 지볼트는 벨테브레덴 포병 부대의 군의관으로 배정되었다. 그러나 질병으로 인해 네덜란드령 동인도 총독 고더르트 판 데르 카펠런 남작의 관저에서 몇 주간 치료를 받게 되었다. 그는 총독과 보거르 식물원(현재의 보고르 식물원) 책임자 카스파르 게오르크 카를 라인바르트에게 자신의 학식으로 깊은 인상을 주었다. 이들은 지볼트에게 일본의 네덜란드 상관 의사였던 엥겔베르트 캠퍼와 칼 페터 툰베리의 뒤를 이을 만한 인물이라는 직감을 받았다. 실제로 캠퍼는 『일본 식물지』의 저자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지볼트는 바타비아 학술 협회 회원으로 선출되었다. 이러한 배경에는 그가 단순한 의학 연구자가 아닌, 일본 내정 탐사를 지시받은 프로이센 스파이였다는 설도 있다. 바타비아 총독에게 보낸 서신에 '외과 소령 및 조사 임무 동반'이라고 서명했으며, 에도성 본성 상세 도면, 사할린 측량도, 무기·무구 해설도 등 군사적·정치적 자료들이 발견된 것도 이러한 의혹을 뒷받침한다.
2.2. 데지마 부임 및 역할
네덜란드령 동인도에 부임한 지 불과 몇 달 후인 1823년 6월 28일, 지볼트는 나가사키의 작은 인공섬이자 무역 거점인 데지마의 상주 의사이자 과학자로 파견되었고, 1823년 8월 11일 그곳에 도착했다. 일본으로 가는 항해 중 동중국해에서 태풍을 만나 익사 직전까지 가는 위험을 겪기도 했다. 당시 쇄국정책을 펼치던 일본에서는 극소수의 네덜란드인만이 데지마에 거주하는 것이 허용되었으므로, 의사와 과학자 직책을 겸임해야 했다. 데지마는 17세기부터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소유였으나, 1798년 회사가 파산한 후에는 네덜란드 정부가 일본과의 정치적 고려로 무역소를 운영하고 있었다.
유럽에서는 식물학 교육을 받은 의사를 일본에 파견하는 오랜 전통이 있었다. 1690년부터 1692년까지 일본에 거주했던 독일 의사이자 식물학자 엥겔베르트 캠퍼는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파견을 받아 의사이자 식물학자 역할을 결합한 이 전통을 시작했다. 그 뒤를 이어 스웨덴 식물학자이자 의사인 칼 페터 툰베리는 1775년에 일본에 도착했다. 지볼트는 일본인들에게 자신의 네덜란드어 발음이 부정확하다는 의심을 받았으나, 자신은 '네덜란드 산지 출신의 고지 네덜란드인이라 사투리가 있다'고 속여 위기를 넘겼다. 네덜란드에는 산지가 없지만, 일본인들은 이러한 지리적 사실을 알지 못했기에 그의 변명을 받아들였다. 지볼트, 캠퍼, 툰베리 세 명은 종종 '데지마의 세 학자'로 불리지만, 그들 모두 네덜란드인은 아니었다.
3. 일본에서의 주요 활동 (첫 체류)
3.1. 서양 의학의 도입과 교육
일본 학자들은 지볼트를 초청하여 서양 과학의 경이로움을 보여달라고 요청했고, 지볼트는 그들을 통해 일본인과 그들의 풍습에 대해 많은 것을 배웠다. 그는 영향력 있는 지역 관료의 병을 치료한 후, 무역 거점을 벗어날 수 있는 허가를 얻어 데지마 주변의 더 넓은 지역에서 일본인 환자들을 치료했다. 지볼트는 일본에 백신 접종과 병리학 해부학을 최초로 도입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1824년, 지볼트는 나가사키에 『나루타키 학원』(鳴滝塾나루타키주쿠일본어)이라는 의학 학교를 설립했는데, 이 학교는 약 50명의 난학자(蘭学者난가쿠샤일본어)들을 위한 학술 교류의 장으로 성장했다. 다카노 조에이, 니노미야 게이사쿠, 이토 겐보쿠, 고세키 산에이, 이토 게이스케 등 당대 난학의 선구자들이 그의 제자였다. 이들은 지볼트의 식물학 및 자연 연구를 도왔으며, 메이지 유신 전까지 약 한 세대 동안 네덜란드어가 학술적 소통을 위한 공용어가 되었다. 지볼트의 환자들은 치료비로 돈 대신 다양한 물품과 공예품을 지불했는데, 이 물품들은 나중에 그의 대규모 민족지학적 컬렉션의 기초가 되었다. 이 컬렉션은 일상생활용품, 우키요에, 도구, 일본인들이 사용했던 수공예품 등으로 구성되었다.
3.2. 일본 동식물 및 민족지학 연구
지볼트의 주된 관심사는 일본의 동식물 연구였다. 그는 가능한 한 많은 자료를 수집했다. 데지마 내 자신의 집 뒤에 작은 식물원(작은 섬이라 공간이 많지 않았다)을 조성하여 1,000종 이상의 토착 식물을 모았다. 특히 네덜란드의 기후에 적응할 수 있도록 특별히 제작된 유리온실에서 일본 식물들을 재배했다. 가와하라 게이가와 같은 현지 일본인 화가들은 이 식물들을 그림으로 그리며 식물학적 삽화를 제작했고, 일본의 일상생활 모습도 그려 그의 민족지학적 컬렉션을 보완했다. 그는 희귀 동물을 추적하고 표본을 수집하기 위해 일본인 사냥꾼들을 고용했다.
많은 표본은 그의 일본인 협력자인 이토 게이스케(1803~1901), 미즈타니 스게로쿠(1779~1833), 오코치 존신(1796~1882), 그리고 쇼군의 의사였던 가쓰라가와 호켄(1797~1844)의 도움을 받아 수집되었다. 또한 지볼트의 조수이자 후계자인 하인리히 뷔르거(1806~1858)는 일본에서 지볼트의 작업을 이어가는 데 필수적인 역할을 했다.
지볼트는 비비추와 『수국 오타쿠사』(Hydrangea otaksa하이드랜지아 오타크사영어) 같은 친숙한 정원 식물들을 처음으로 유럽에 소개했다. 일본인들에게는 비밀리에, 그는 차나무 씨앗을 바타비아의 『보이텐조르그 식물원』(Buitenzorg보이텐조르그네덜란드어)으로 밀반출하는 데 성공했다. 이 단 한 번의 행동으로 그는 당시 네덜란드 식민지였던 자바섬에 차 재배를 시작하게 했다. 그전까지 일본은 차나무 무역을 엄격히 통제하고 있었다. 놀랍게도 1833년에는 자바에 이미 50만 그루의 차나무가 자라고 있었다. 그는 또한 유럽과 북아메리카에서 매우 침입적인 잡초가 된 개미취(Reynoutria japonica레이노우트리아 야포니카영어)를 도입했는데, 이는 모두 지볼트가 수집한 단 하나의 암그루에서 유래했다.
데지마에 머무는 동안 지볼트는 알려지지 않은 수의 약초 표본 3차례를 레이던, 겐트, 브뤼셀, 안트베르펜으로 보냈다. 레이던으로 보낸 선적물에는 유럽으로 보내진 최초의 일본장수도롱뇽(Andrias japonicus안드리아스 야포니쿠스영어) 표본이 포함되어 있었다. 1825년 네덜란드령 동인도 정부는 그에게 두 명의 조수를 제공했는데, 약사이자 광물학자인 하인리히 뷔르거(그의 후계자)와 화가 카를 후베르트 드 빌뇌브였다. 이들은 민족지학부터 식물학, 원예학에 이르는 지볼트의 모든 노력에 유용하게 사용되었다. 드 빌뇌브는 가와하라에게 서양 회화 기법을 가르쳤다.
보고에 따르면, 지볼트는 다루기 쉬운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이 오만하다고 생각하는 네덜란드 상사들과 끊임없이 갈등을 빚었다. 이러한 갈등의 위협으로 인해 1827년 7월 바타비아로 소환 명령을 받았다. 그러나 그를 바타비아로 태워갈 예정이었던 배 코르넬리스 호트만호는 나가사키만에서 태풍에 좌초되었다. 같은 폭풍으로 데지마가 심하게 손상되고 지볼트의 식물원이 파괴되었다. 수리된 코르넬리스 호트만호는 다시 떠올랐다. 이 배는 지볼트가 간신히 건져낸 식물 컬렉션 89상자를 싣고 바타비아로 떠났지만, 지볼트 자신은 데지마에 남았다.
3.3. 일본인 가족
일본 체류 기간 동안 지볼트는 쿠스모토 다키(楠本滝)와 '함께 살았으며', 1827년에는 딸 쿠스모토 이네가 태어났다. 지볼트는 자신의 아내를 '오타쿠사'(恐らく 오타키상에서 유래)라고 불렀으며, 그녀의 이름을 따서 수국 종에 명명하기도 했다. 쿠스모토 이네는 결국 의학 교육을 받은 것으로 알려진 최초의 일본인 여성이 되었고, 1882년에는 일본 황후의 궁정의사가 되는 등 높은 평가를 받는 의사가 되었다. 그녀는 1903년 궁정에서 사망했다.
3.4. 에도 참부와 정보 수집
1826년, 지볼트는 에도 막부로의 참부(參府) 여행에 동행했다. 이 긴 여행 동안 그는 많은 식물과 동물을 채집했다. 또한 그는 막부의 천문학자인 다카하시 가게야스로부터 일본과 조선의 상세한 지도를 얻었는데 (이노 다다타카가 작성한 것), 이는 일본 정부에 의해 엄격히 금지된 행위였다. 이 여행 중에 지볼트는 지가쿠, 식생, 기후 등을 연구하고 정보를 수집했다. 에도에서도 그는 학자들과 교류하며, 쇼군의 의사 가쓰라가와 호켄, 난학자 우다가와 요안, 전 사쓰마번 번주 시마즈 시게히데, 나카쓰번 번주 오쿠다이라 마사타카, 에조 탐험가 모가미 도쿠나이, 그리고 천문학자 다카하시 가게야스와 친분을 쌓았다. 특히 모가미 도쿠나이는 그에게 북쪽 지방의 지도를 주었다. 지볼트는 다카하시 가게야스에게 아담 요한 폰 크루젠슈테른이 만든 최신 세계 지도를 주는 대가로 최신 일본 지도를 받았다.
3.5. 지볼트 사건과 추방
1828년, 일본인들이 우연히 지볼트가 일본 북부 지방의 지도를 소유하고 있음을 발견하면서 문제가 불거졌다. 막부 금지 지도였던 이 지도가 발각되자, 그는 대역죄와 러시아 간첩 혐의로 기소되었다. 처음에는 일본 정부에 의해 가택 연금되었으며, 1829년 10월 22일 일본에서 추방당했다. 지볼트는 그의 일본인 협력자들이 자신의 연구를 계속할 것이라고 확신하며, 방대한 동물과 식물 컬렉션, 서적, 지도를 소유한 채 호위함 자바를 타고 바타비아로 돌아갔다. 바타비아의 『보이텐조르그 식물원』(Buitenzorg보이텐조르그네덜란드어)은 곧 지볼트의 살아있는 식물 컬렉션 2,000종을 보관하게 되었다. 그는 1830년 7월 7일 네덜란드에 도착했다. 그의 일본과 바타비아 체류는 8년 동안 지속되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지도를 제공한 다카하시 가게야스는 옥중에서 사망했다.
4. 유럽 귀국 및 주요 저서 출판
4.1. 유럽 정착 및 학술 활동
필리프 프란츠 폰 지볼트는 벨기에 혁명이 발발하여 브뤼셀에서 정치적 혼란이 일어나는 시기인 1830년에 네덜란드에 도착했다. 그는 서둘러 안트베르펜의 민족지학 컬렉션과 브뤼셀의 약초 표본을 요한 밥티스트 피셔의 도움을 받아 레이던으로 옮겼다. 살던 식물 컬렉션은 겐트 대학교로 보냈는데, 이 컬렉션이 확장되면서 겐트는 원예학적 명성을 얻게 되었다. 감사의 표시로 겐트 대학교는 1841년 지볼트의 원래 컬렉션에 있던 모든 식물 표본을 그에게 돌려주었다.
지볼트는 그의 컬렉션 대부분을 가지고 레이던에 정착했다. 수많은 모식표본을 포함한 '필리프 프란츠 폰 지볼트 컬렉션'은 일본에서 온 가장 초기 식물학 컬렉션이었다. 오늘날에도 이 컬렉션은 지볼트가 수행한 연구의 깊이를 증명하며 지속적인 연구 주제로 남아 있다. 이 컬렉션은 약 12,000점의 표본을 포함하고 있었는데, 그중 약 2,300종을 기술할 수 있었다. 전체 컬렉션은 네덜란드 정부에 의해 상당한 금액으로 구매되었다. 지볼트는 또한 네덜란드 국왕 빌럼 2세로부터 상당한 연간 수당을 지급받았고 '일본 문제에 대한 국왕 자문관'으로 임명되었다. 1842년, 국왕은 지볼트를 준남작으로 승격시켜 귀족으로 대우했다.
'지볼트 컬렉션'은 1831년에 대중에게 공개되었다. 그는 1837년 자신의 집에서 박물관을 설립했는데, 이 작은 사립 박물관은 결국 레이던의 네덜란드 국립 민족학 박물관으로 발전했다. 일본에서 지볼트의 후계자였던 하인리히 뷔르거는 지볼트에게 일본에서 수집한 약초 표본 세 차례를 추가로 보냈다. 이 식물상 컬렉션은 레이던의 네덜란드 국립 식물 표본관의 일본 컬렉션 기초가 되었고, 지볼트가 수집한 동물학 표본은 레이던의 국립 자연사 박물관(Rijksmuseum van Natuurlijke Historie)에 보관되었는데, 이곳은 나중에 나투랄리스 생물다양성 센터가 되었다. 두 기관은 2010년에 합병되어 현재 지볼트가 레이던으로 가져온 모든 자연사 컬렉션을 소장하고 있다. 1845년 지볼트는 헬레네 폰 가게른(1820~1877)과 결혼하여 세 명의 아들과 두 명의 딸을 두었다.
4.2. 주요 저서
지볼트는 레이던에 머무는 동안 1832년에 『닛폰』(Nippon)을 저술했는데, 이는 일본에 대한 풍부한 삽화가 담긴 민족지학 및 지리학 저작의 첫 부분이었다. 『일본 서술 기록집』(Archiv zur Beschreibung Nippons)에는 에도 막부 궁정으로의 여정에 대한 보고서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는 6개의 부분을 더 저술했으며, 마지막 부분은 그의 사후인 1882년에 출판되었다. 그의 아들들은 1887년에 편집하여 저렴한 가격으로 재판을 출판했다. 『닛폰』의 일부인 조선('코오라이'(Kooraï코오라이독일어))에 대한 부분은 번역본으로도 존재한다.
1833년에서 1841년 사이에 출간된 『일본 도서관』(Bibliotheca Japonica비블리오테카 야포니카라틴어)은 요제프 호프만과 지볼트와 함께 바타비아에서 여행했던 중국계 자바인 쿠오 쳉-창이 공동 저술했다. 이 책에는 일본 문학에 대한 조사와 중국어, 일본어, 한국어 사전이 포함되어 있었다. 지볼트의 일본 종교와 풍습에 대한 저술은 불교와 신토에 대한 초기 근대 유럽의 개념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그는 일본 불교가 일신론의 한 형태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동물학자인 콘라트 야코프 테민크(1777~1858), 헤르만 슐레겔(1804~1884), 빌렘 데 하안(1801~1855)은 지볼트의 일본 동물 컬렉션을 과학적으로 기술하고 문서화했다. 1833년에서 1850년 사이에 출판된 일련의 모노그래프인 『일본 동물지』(Fauna Japonica파우나 야포니카라틴어)는 주로 지볼트의 컬렉션에 기반을 두었으며, 일부는 데지마에서 지볼트의 후계자였던 하인리히 뷔르거의 컬렉션에도 기반을 두어 일본의 동물상을 비유럽 동물상 중 가장 잘 기술된 동물상으로 만들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 저서에는 농어, 참돔, 닭새우 등 일본에서 친숙한 어종들의 학명이 처음으로 확정되었다.
지볼트는 독일 식물학자 요제프 게르하르트 추카리니(1797~1848)와 협력하여 『일본 식물지』(Flora Japonica플로라 야포니카라틴어)를 저술했다. 이 책은 1835년에 처음 출판되었으나, 지볼트의 사후인 1870년에 레이던의 국립 표본관장이었던 F.A.W. 미켈(1811~1871)에 의해 완성되었다. 이 저작은 지볼트의 과학적 명성을 일본에서 유럽으로 확장시켰다. 레이던 식물원을 통해 지볼트의 많은 식물들이 유럽으로, 그리고 거기서 다른 나라들로 퍼져 나갔다. 비비추와 수국, 진달래, 일본 머위와 개모밀 그리고 일본잎갈나무는 전 세계 정원에서 재배되기 시작했다.
5. 일본 재방문 및 말년
5.1. 일본 재방문과 고문 활동
1854년에 일본의 쇄국 정책이 해제되고 개항이 이루어졌으며, 1858년에는 일본-네덜란드 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어 지볼트에 대한 추방령도 해제되었다. 1859년, 그는 네덜란드 무역 회사의 고문 자격으로 나가사키에 재방문했으며, 12세의 장남 알렉산더와 동행했다. 재방문 기간 동안 일본은 국내 정치적으로 혼란스러웠고, 반외세 운동이 일어나는 시기였다. 2년 후 무역 회사와의 계약이 만료되자, 지볼트의 조언이 가치가 없다고 판단되어 관계가 단절되었다. 그는 나가사키에서 그의 여성 하인 중 한 명과 또 다른 자녀를 두기도 했다.
1861년, 지볼트는 일본 정부의 고문으로 임명되어 에도로 갔다. 그곳에서 그는 외국 대표들과 일본 정부 사이에서 중재자 역할을 하려 시도했다. 그러나 네덜란드 당국은 그가 일본에 가기 전에 정치에 간섭하지 말라고 특별히 경고했었고, 결국 일본 주재 네덜란드 총영사 J.K. 데 비트에게 지볼트의 해임을 요청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지볼트는 바타비아로 돌아가라는 명령을 받았고, 그곳에서 다시 유럽으로 돌아왔다.
5.2. 일본에서의 두 번째 활동과 귀국
재방문 기간 동안 그는 지속적으로 박물학적 수집 활동과 자연 관찰을 수행했으며, 일본의 풍속, 습관, 정치 등과 관련된 모든 종류의 기록을 남겼다. 그가 에도와 요코하마에 머무는 동안, 막부는 그에게 에도를 떠나라고 명령하고 막부 고문 및 학술 교수의 직책에서도 해임되었다. 1862년 5월, 그는 수많은 수집품과 함께 나가사키에서 유럽으로 돌아왔다.
5.3. 말년과 사망
유럽으로 돌아온 후 그는 네덜란드 정부에 일본 주재 총영사로 임명해 줄 것을 요청했으나, 그에게 지급된 대출금으로 인해 막대한 빚을 지고 있었기 때문에 네덜란드 정부는 연금 지급을 제외하고는 지볼트와의 모든 관계를 단절했다.
지볼트는 일본으로의 또 다른 항해를 계획하려고 계속 노력했다. 러시아 정부의 고용을 얻는 데 실패한 후, 그는 1865년 파리로 가서 프랑스 정부에 또 다른 일본 원정을 위한 자금 지원을 요청했으나 실패했다. 그는 1866년 10월 18일 뮌헨에서 패혈증을 동반한 감기로 사망했다. 향년 70세. 그의 묘비는 불탑 형태의 석조물이며, 뮌헨 구남부공동묘지(Alter Münchner Südfriedhof알터 뮌히너 쉬트프리트호프독일어)에 안장되어 있다. 뮌헨에는 그의 이름을 딴 거리와 식물원의 많은 명칭이 있다.
6. 유산과 영향
6.1. 학술적 유산
지볼트는 일본 연구와 자연사 연구에서 선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그의 방대한 컬렉션은 식물학, 동물학, 일본학 등 다양한 학문 분야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특히 그의 컬렉션은 많은 모식표본을 포함하고 있으며, 일본에서 수집된 가장 초기의 식물학 컬렉션이었다. 약 12,000점의 표본을 포함하며, 그중 약 2,300종을 기술할 수 있었던 이 컬렉션은 오늘날에도 끊임없는 연구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의 컬렉션을 바탕으로 작성된 『일본 동물지』는 일본의 동물상을 비유럽 지역 중 가장 잘 기술된 동물상으로 만들었다. 또한 그의 수집품들은 뮌헨과 레이던의 민족지학 박물관의 설립 토대가 되었다. 그의 아들 하인리히 폰 지볼트(1852~1908)는 아버지의 연구를 이어받아 에드워드 모스와 함께 일본 근대 고고학의 창시자 중 한 명으로 인정받고 있다.
6.2. 문화적 영향과 평가
지볼트는 서양인들에게 일본의 문화를 소개하고 이해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 특히 일본에 서양 의학을 보급하고 현대 의학의 기초를 다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는 네덜란드와 독일에서는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지만, 일본에서는 '시보루토상'이라고 불리며 학교 교과서에도 언급될 정도로 유명하다. 레이던의 레이던 식물원에는 지볼트가 일본에서 보낸 식물들로 조성된 '폰 지볼트 기념 정원'이 있는데, 이곳은 일본인 관광객들이 자주 방문하여 그를 기리는 장소가 되고 있다.
6.3. 기념 시설 및 수집품 보존
지볼트의 업적을 기리고 그가 수집한 방대한 컬렉션을 보존하기 위해 여러 기념 시설과 기관이 설립되었다.
- 일본 시볼트하우스(SieboldHuis): 네덜란드 레이던에 위치하며, 지볼트가 레이던에 처음 정착했던 집을 개조하여 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이곳에는 레이던 지볼트 컬렉션의 주요 전시품이 전시되어 있다.
- 나투랄리스 생물다양성 센터: 네덜란드 레이던에 있는 국립 자연사 박물관으로, 지볼트가 첫 번째 일본 체류 기간(1823~1829년) 동안 수집한 동물학 및 식물학 표본을 소장하고 있다. 여기에는 포유류 200점, 조류 900점, 어류 750점, 파충류 170점, 무척추동물 5,000점 이상, 식물 2,000종 및 약초 표본 12,000점이 포함되어 있다.
- 네덜란드 국립 민족학 박물관: 네덜란드 레이던에 위치하며, 지볼트가 첫 번째 일본 체류 기간(1823~1829년) 동안 수집한 대규모 민족지학 컬렉션을 소장하고 있다.
- 뮌헨 국립 민족학 박물관: 독일 뮌헨에 위치하며, 지볼트의 두 번째 일본 여행(1859~1862년)에서 가져온 컬렉션과 뮌헨에 민족학 박물관을 설립할 것을 루트비히 1세 국왕에게 촉구하는 지볼트의 편지를 소장하고 있다.
- 뷔르츠부르크 시볼트 박물관: 독일 뷔르츠부르크에 위치한 지볼트 기념 박물관이다.
- 브란덴슈타인 성 시볼트 박물관: 독일 슐뤼히테른의 브란덴슈타인 성에 위치한다.
- 나가사키 시볼트 기념관: 일본 나가사키에 위치하며, 지볼트의 옛 나루타키 저택 인근에 세워진 박물관으로, 일본에서 비일본인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최초의 박물관이다.
지볼트의 컬렉션은 뮌헨과 레이던의 민족지학 박물관 설립의 초석이 되었다. 그의 유럽인 아내에게서 태어난 아들 알렉산더 폰 지볼트는 지볼트 사망 후 뷔르츠부르크에 남아있던 자료의 상당 부분을 대영박물관에 기증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왕립 과학 아카데미는 『일본 식물지』의 채색판 600점을 구매하기도 했다.
6.4. 가계와 후손
지볼트는 쿠스모토 다키와의 사이에서 딸 쿠스모토 이네를 두었으며, 1845년에 헬레네 폰 가겐과 결혼하여 3남 2녀를 두었다.
- 장녀: 쿠스모토 이네(1827년 5월 31일 ~ 1903년 8월 26일) - 일본 최초의 서양 의학 교육을 받은 여성 의사.
- 손녀: 야마와키 다카(楠本高子, 1852년 2월 26일 ~ 1938년 7월 18일) - 쿠스모토 이네의 딸.
- 장남: 알렉산더 폰 지볼트(1846년 8월 16일 ~ 1911년 1월 23일) - 헬레네 폰 가겐과의 첫째 아들. 아버지의 두 번째 일본 방문 시 동행했다. 1859년 이래 일본에 체류하며 영국 공사관의 통변관(통역사)으로 근무했으며, 1867년 도쿠가와 아키타케 일행의 프랑스 파견(1867년 파리 만국 박람회)에 동행했다. 무쓰 무네미쓰, 이노우에 가오루 등 메이지 시대의 주요 인물들과 깊은 교류를 가졌고, 후에는 외무경 이노우에의 특별 비서가 되었다.
- 차남: 하인리히 폰 지볼트 (일명 '소(小) 지볼트', 1852년 7월 21일 ~ 1908년 8월 11일) - 1869년(17세) 형을 따라 일본에 부임하여 일본에 머무는 동안 이와모토 하나와 결혼하여 1남 1녀를 두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대사관의 통역관 및 외교관 업무를 수행하면서 고고학 조사를 진행하여 『고고설략』을 발표, '고고학'이라는 단어를 일본에서 처음 사용했다.
- 차녀: 헬레네 (1848년 ~ 1927년) - 막시밀리안 폰 울름 추 에르바흐 남작 부인.
- 삼녀: 마틸데 (1850년 ~ 1906년) - 구스타프 폰 브란덴슈타인 부인. 그녀의 아들 알렉산더는 페르디난트 폰 체펠린 백작의 외동딸 헬레네와 결혼하여, 후손들은 폰 브란덴슈타인-체펠린 가문을 계승하고 있다.
- 삼남: 막시밀리안 폰 지볼트 (1854년 ~ 1887년) - 네덜란드령 동인도 주둔 하사관.
현재 쿠스모토 이네의 후손(쿠스모토 가문), 호리우치 가문, 하인리히의 후손(세키구치 가문), 이노우에 가문 등이 일본에 남아있으며, 독일에는 차녀 마틸데의 후손(브란덴슈타인-체펠린 가문)이 이어지고 있다. 2023년 나가사키시에서 열린 지볼트 일본 방문 200주년 기념식에는 후손 대표로 세키구치 다다시(하인리히의 후손, 일본 시볼트 협회), 콘스탄틴 브란덴슈타인-체펠린(마틸데의 후손, 독일 시볼트 협회), 쿠스모토 사다오(쿠스모토 이네의 후손)가 초청되었다.
7. 대중문화 속의 지볼트
필리프 프란츠 폰 지볼트는 다양한 대중문화 작품 속에서 묘사되어 왔다.
- 소설: 알퐁스 도데의 단편집 『월요 이야기』에 수록된 「눈먼 황제」는 젊은 소설가 도데와 노년의 지볼트의 교류를 그린다. 요시무라 아키라의 『폰 시볼트의 딸』, 『조에이 도망』에도 등장한다.
- 만화: 미나모토 다로의 『풍운아들』, 마후네 가즈오의 『슈퍼 닥터 K』, 마스다 고스케의 『개그만화 보기 좋은 날』 제11권 197화, 아메 아라레의 「아지랑이 번개 물의 달」 (『나가사키 애상』 수록) 등에서 지볼트가 묘사되었다.
- 드라마: NHK의 시대극 『가쓰라 치즈루 진찰일록』(2010년)에서는 배우 에릭 보식이 지볼트 역을 연기했다.
- 연극: 「시볼트 부자전 ~푸른 눈의 사무라이~」는 2020년부터 2022년까지 쓰키지 혼간지 부디스트 홀에서 상연되었다.
8. 그를 기념하는 명칭
식물학 및 원예학 분야에서 필리프 프란츠 폰 지볼트의 업적을 기려 그의 이름을 딴 많은 식물 종들이 존재한다.
- 식물:
- 당단풍 Acer sieboldianum (Siebold's Maple): 일본 자생 단풍나무.
- 섬새우란 Calanthe striata (Siebold's Calanthe): 일본, 류큐 제도, 대만 자생 난초.
- Clematis florida var. sieboldiana: 키우기 어렵지만 인기 있는 으아리.
- 병개암나무 Corylus sieboldiana (Asian beaked hazel): 동북아시아 및 일본에서 발견되는 견과류.
- Dryopteris sieboldii: 가죽 같은 잎을 가진 고사리과 식물.
- 비비추 Hosta sieboldii: 여러 재배 품종이 있는 인기 식물.
- 함박꽃나무 Magnolia sieboldii: '오야마 목련'으로도 불리는 작은 목련.
꽃이 핀 야광나무 (Malus sieboldii) - 야광나무 Malus sieboldii (Toringo Crab-Apple): 향기로운 꽃사과, 원래 지볼트가 Sorbus toringo로 명명.
- 앵초 Primula sieboldii: 일본 산림 앵초 '사쿠라소'.
- 벚나무 Prunus sieboldii: 꽃이 피는 벚나무.
- 기린초 Sedum sieboldii: 장미 모양 잎을 가진 다육 식물.
- 솔송나무 Tsuga sieboldii: 일본 솔송나무.
- 고마목 Viburnum sieboldii: 봄에 크림색 흰 꽃이 피고 가을에 검은색으로 익는 붉은 열매를 맺는 낙엽성 관목.
- 미세바야 Hylotelephium sieboldii
- 매자나무 Berberis sieboldii
- 엉겅퀴 Cirsium sieboldii
- 족두리풀 Asiasarum sieboldii
- 참나무 Castanopsis sieboldii
- 초석잠 Stachys sieboldii
- 황철나무 Populus tremula var. sieboldii
- 줄무늬유혈목이 Enhydris sieboldii (Siebold's smooth water snake).
- 북전복 Nordotis gigantea: '지볼트 전복'으로도 불리며, 초밥 재료로 귀하게 여겨진다.
- 왕잠자리속 Sieboldius: 큰 왕잠자리 속.
- 아코메조개 Conus sieboldii: 청자고둥의 일종.
- 베니조개 Pharaonella sieboldii: 벚꽃조개에 가까운 이매패류.
- 지볼트 지렁이 Pheretima sieboldi: 대형 지렁이.
- 일본돌고기 Nipponocypris sieboldii: 잉어과 담수어.
- 붉은띠돔 Pristipomoides sieboldii: 퉁돔과 바닷물고기.
- 녹색비둘기 Treron sieboldii: 숲에 서식하는 비둘기.
- 나가사키현립 시볼트 대학 및 나가사키현립대학 시볼트 캠퍼스.
- '시볼트': JR 큐슈가 사세보역~나가사키역 구간을 운행했던 특급 열차명.

- 시볼트 거리: 나가사키 시에 있는 지볼트 저택 터에서 신다이쿠마치 상점가를 잇는 거리의 명칭.
- 시볼트 온천: 사가현 우레시노시에 있는 공중 목욕탕.
- 일본 시볼트하우스
- 나가사키 시볼트 기념관
- 시볼트 태풍
- 주하치 은행 시볼트 지점: 가상 계좌 지점으로 실제 점포는 존재하지 않는다.
- 필리프 프란츠 폰 지볼트 상: 독일 정부에서 일본인 과학자에게 수여하는 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