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필라레트(Філарет필라레트우크라이나어, 본명: 미하일로 안토노비치 데니센코, Михайло Анто노вич Денисенко미하일로 안토노비치 데니센코우크라이나어, 1929년 1월 23일 출생)는 우크라이나의 저명한 종교 지도자로서, 키이우 총대교구 우크라이나 정교회의 수좌주교를 지냈다. 한때 모스크바 총대주교청 소속 키이우 관구장 주교이자 우크라이나 총대주교 대리를 역임했던 그는 1992년 이후 모스크바 총대주교청과 결별하고 독립적인 우크라이나 교회를 건설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필라레트는 1995년 키이우 총대교구 우크라이나 정교회의 수장으로 선출되어 오랫동안 재임했으며, 2018년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청에 의해 러시아 정교회로부터의 성직 박탈과 파문이 무효화되며 교회 공동체로 복권되었다. 이후 우크라이나 자치정교회 및 모스크바 총대주교청 소속 우크라이나 정교회 일부와 통합하여 우크라이나 정교회가 설립될 때 "명예 총대주교"로 추대되었다. 그러나 그는 통합 이후에도 키이우 총대교구 우크라이나 정교회의 독립성을 주장하며 우크라이나 정교회와의 지속적인 갈등을 빚기도 했다. 그의 생애와 업적은 우크라이나 교회의 독립을 향한 염원과 정치적 변화 속에서 형성된 복잡한 과정을 보여주며, 우크라이나의 주권 확립과 종교적 자율성 확보에 기여한 인물로 평가받는 동시에 특정 사회적 견해로 인해 논란의 중심에 서기도 했다.
2. 초기 생애와 신앙 형성
미하일로 데니센코는 우크라이나 동부 도네츠크주 암브로시이우카 라욘의 블라호다트네 마을에서 노동자 안톤 데니센코와 멜라니아 데니센코 부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유년기는 우크라이나 동부의 노동자 가정 환경에서 형성되었다.
2.1. 신학 교육과 수도 서원
데니센코는 오데사 신학교(모스크바 총대주교청 소속)와 모스크바 신학원에서 신학 교육을 받았다. 모스크바 신학원 재학 시절, 그는 훗날 모스크바 총대주교 알렉시 1세와 긴밀한 관계를 형성했다. 1950년 그는 수도서원을 통해 '필라레트'라는 수도명을 얻었으며, 같은 해 1월에는 수도보제로, 1951년 6월에는 수도사제로 서품되었다.
신학원 졸업 후 필라레트는 1952년부터 모스크바 신학원의 교수로 재직하며 신학원 감독의 상급 보좌를 맡았다. 1956년에는 사라토프 신학교의 감독으로 임명되었고 이구멘으로 승진했다. 1957년에는 키이우 신학원의 감독이 되었고, 1958년 7월에는 대수도자로 승진함과 동시에 신학원의 학장으로 임명되며 교계 내에서 빠르게 경력을 쌓아나갔다.
3. 러시아 정교회에서의 봉직
필라레트는 러시아 정교회 내에서 다양한 고위직을 역임하며 영향력을 확대해 나갔다.
3.1. 계층 내 승진
1960년부터 필라레트는 사실상 우크라이나에서 러시아 정교회의 총대주교 대리 임무를 맡아 키이우의 성 볼로디미르 대성당에 봉직했다. 1961년, 그는 러시아 정교회 대표로 그리스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청에 파견되었다. 1962년 1월에는 레닌그라드 교구의 보좌 주교로 선출되었고, 같은 해 2월에는 피멘 관구장 주교(훗날 모스크바 총대주교) 등 다른 주교들에 의해 레닌그라드에서 주교로 서품되었다. 이후 1962년부터 1964년까지 러시아 정교회의 빈 및 오스트리아 주교로 봉직하는 등 여러 외교적 임무를 수행했다. 1964년에는 모스크바로 돌아와 드미트로프의 주교이자 모스크바 신학원 및 신학교의 학장으로 재직했다.
1966년 필라레트는 키이우와 할리치의 대주교가 되었고, 이는 그가 러시아 정교회 내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고위 성직자 중 한 명으로 부상했음을 의미했다. 이 시기 그는 러시아 정교회의 최고 의결 기관이자 모스크바 총대주교 선출을 담당하는 성 시노드의 종신 회원이 되었다. 1968년에는 키이우와 할리치의 관구장 주교로 임명되었다. 필라레트가 키이우 관구장 주교직에 오른 것은 지난 150년간 민족적인 우크라이나인으로서는 처음 있는 일로 주목할 만했다.
3.2. 키이우 관구장 주교 및 총대주교 대리
키이우 관구장 주교로서 필라레트는 우크라이나 내 러시아 정교회와 협력하기를 거부하는 우크라이나 그리스 가톨릭교회 및 우크라이나 자치정교회에 대한 탄압을 공개적으로 지지했다.
1990년 5월 3일, 모스크바 총대주교 피멘 1세가 서거하자 필라레트는 러시아 정교회의 총대주교 대행이 되었으며, 차기 모스크바 총대주교의 가장 유력한 후보로 거론되었다. 그러나 1990년 6월 6일, 러시아 정교회 지역 공의회는 레닌그라드와 노브고로드의 관구장 주교인 알렉시를 선출했고, 그는 알렉시 2세로 모스크바 총대주교좌에 착좌했다. 필라레트는 훗날 2019년에 자신이 총대주교로 선출되지 않은 것이 "우연이 아니며, 주님께서 자신을 우크라이나를 위해 준비시키셨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1990년 10월 27일, 키이우 성 소피아 대성당에서 새로 선출된 알렉시 2세 총대주교는 필라레트 관구장 주교에게 "자치 독립"을 부여하는 토모스를 전달했다. 이 토모스는 '자치정교회'나 '독립정교회'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필라레트 관구장 주교를 "키이우와 전 우크라이나 관구장 주교"로 착좌시켰다.
3.3. KGB 협력 의혹
1992년, 러시아 정교회 사제이자 소련의 반체제 인사였던 글렙 야쿠닌 신부는 필라레트가 KGB의 정보원이었다고 비난했으며, 그의 암호명이 '안토노프'였다고 주장했다. 우크라이나의 인민 대표들도 1992년 1월 20일 공식 성명에서 KGB와의 협력 사실을 언급했다. KGB 내부 문서에 따르면, KGB가 필라레트에게 할당한 임무에는 세계교회협의회와 기독교 평화회의를 비롯한 국제 기구에서 소비에트의 입장을 홍보하고 소비에트가 지지하는 후보를 옹호하는 것이 포함되었다. 또한, 1980년대에는 오랫동안 억압받던 우크라이나 가톨릭 교회가 공개적으로 존재를 되찾는 것을 막고, 글라스노스트와 페레스트로이카 시기에 종교 신자들이 자신들의 권리를 요구하는 것을 저지하려는 국가의 시도를 돕는 역할도 있었다고 한다.
필라레트는 2018년 라디오 리버티와의 인터뷰에서 공산주의 체제 하의 모든 주교들과 마찬가지로 자신도 KGB와 접촉할 수밖에 없었다고 시인했다. 그는 2019년에도 모스크바 총대주교청의 모든 주교는 주교 임명과 관련해서도 KGB와 접촉해야 했다고 밝히며, 자신은 소련 공산당 정치국으로부터, 알렉시 총대주교는 KGB로부터 훈련받았다고 덧붙였다.
4. 독립 우크라이나 교회로의 전환
우크라이나의 독립 선언 이후, 필라레트는 모스크바로부터 독립된 우크라이나 정교회를 설립하기 위한 운동의 중심에 섰다.
4.1. 우크라이나 독립 선언과 독립 정교회 요청
소비에트 연방으로부터 우크라이나가 1991년 8월 24일 독립을 선언한 직후, 같은 해 11월 1일부터 3일까지 우크라이나 정교회의 전국 종교회의(Sobor)가 개최되었다. 이 종교회의에서 모든 투표 대표단(우크라이나 정교회의 모든 주교, 성직자, 각 교구의 평신도 대표, 각 수도원 및 신학원의 대표자, 인정된 수도형제회 포함)은 우크라이나 정교회가 앞으로 자치적인 교회로 운영될 것이라는 결의안을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별도의 만장일치 결의안에서는 필라레트 관구장 주교가 이 교회의 수좌주교가 되기를 바라는 의사를 표명했다.
필라레트는 1992년 1월 키이우 페체르스크 라브라에서 총회를 소집하여 모스크바 총대주교에게 우크라이나 교회의 자치권 획득을 요청하는 결정을 채택했다.
4.2. 러시아 정교회와의 단절
1992년 3월에서 4월 사이, 러시아 정교회의 주교회의가 단 하나의 의제, 즉 4개월 전 우크라이나 정교회 종교회의에서 통과된 결의안을 심의하기 위해 소집되었다. 그러나 이 문제 자체는 논의되지 않았고, 필라레트는 사임을 요구받았다. 회의 이틀째에 필라레트 관구장 주교는 우크라이나 정교회 시노드에 사임서를 제출하는 데 동의했고, 러시아 정교회 시노드는 다음과 같은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주교회의는 교회의 평화를 위해 키이우와 전 우크라이나 관구장 주교인 필라레트 성하가 차기 우크라이나 정교회 주교회의에 수좌주교직에서 물러날 것을 요청하겠다는 성명을 고려하였다. 필라레트 관구장 주교의 입장을 이해하며, 주교회의는 키이우 교구의 대주교로서 오랜 봉사에 감사를 표하며, 그가 우크라이나 정교회의 다른 교구에서 주교 사목을 수행하도록 축복한다."
그러나 키이우로 돌아온 필라레트는 사임 의사를 철회했다. 4월 14일, 필라레트 관구장 주교는 기자회견을 열어 모스크바의 러시아 정교회 시노드에서 FSK 직원이 직접 또는 위협을 통해 부당한 압력을 가했다고 주장했다. 필라레트는 자신의 사임이 "교회에 평화를 가져오지 않고, 신자들의 뜻에 어긋나며, 교회법에 어긋나는 것"이라는 이유로 사임을 철회한다고 밝혔다.
4.3. 성직 박탈과 파문
얼마 지나지 않아 러시아 정교회는 독립 우크라이나에서 자신들이 "분리주의 교회"로 간주하는 교회의 설립을 막지 못하게 되자, 1992년 5월 하르키우에서 경쟁 시노드를 조직하는 데 일조했다。 이 주교들은 러시아 정교회의 주교인 볼로디미르(사보단)을 키이우 관구장 주교로 선출했고, 모스크바로부터 우크라이나 정교회(모스크바 총대주교청)로 인정받았다.
필라레트는 1992년 5월 27일 우크라이나 정교회(모스크바 총대주교청)에 의해 직무가 정지되었다. 이후 1992년 7월 11일 러시아 정교회에 의해 성직 박탈 처분을 받았다. 키이우 총대교구 우크라이나 정교회는 다른 정교회들에게 인정받지 못했으며, 분리주의 교회로 간주되었다.
필라레트는 1997년 러시아 정교회에 의해 파문되었다. 러시아 정교회 관계자들은 필라레트의 파문이 "콘스탄티노폴리스 교회를 포함한 모든 지역 정교회에 의해 인정되었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청 시노드는 1992년 7월 알렉시 2세 총대주교에게 보낸 서신에서 러시아 정교회의 필라레트 성직 박탈을 인정했으며, 1997년 4월 알렉시 2세 총대주교에게 보낸 서신에서도 필라레트의 파문을 인정했다. 러시아 정교회는 또한 필라레트가 아내와 세 자녀를 두었다고 비난했으나, 이는 "결코 증명되지 않았다."
5. 키이우 총대주교청 우크라이나 정교회 지도자 활동
필라레트는 새롭게 설립된 키이우 총대교구 우크라이나 정교회의 주요 지도자로 활동하며 교회의 독립성을 강화하는 데 힘썼다.
5.1. 설립과 총대주교 선출
필라레트에 충성하는 주교들과 우크라이나 자치정교회의 유사한 그룹은 1992년 6월 25일 통합 종교회의를 조직했다. 대표단은 통합 교회를 '키이우 총대교구 우크라이나 정교회'로 명명하고, 므스티슬라브를 총대주교로 선출하는 데 동의했다.
1993년 므스티슬라브 총대주교가 서거한 후, 교회는 볼로디미르 총대주교가 이끌었으며, 1995년 7월 볼로디미르 총대주교의 서거와 함께 필라레트가 160대 5의 투표로 키이우 총대교구 우크라이나 정교회의 수장으로 선출되었다.
5.2. 주교 서품과 교회 확장 활동
키이우 총대교구 우크라이나 정교회의 수장으로서 필라레트는 최소 85명의 주교를 서품했다. 그의 지도력 아래 교회는 우크라이나 내에서 구조를 확장하고 입지를 다졌다.

2018년 10월 11일,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청 성 시노드는 필라레트 데니센코와 우크라이나 자치정교회 수좌주교가 "교회 공동체로 복권되었다"고 발표했다. 이 결정은 또한 모스크바 총대주교청의 키이우 교구에 대한 관할권을 폐지했으며, 이로써 관련된 모든 주교들은 세계 총대주교청의 관할 아래에 있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세계 총대주교청은 그를 총대주교로 인정하지 않았으며, 그를 "전 키이우 관구장 주교"로 보았다.

2018년 10월 20일, 키이우 총대교구 우크라이나 정교회는 수장의 칭호를 "그의 성하이자 축복받은 (이름), 루스 도시들의 어머니 키이우와 갈리치아의 대주교이자 관구장 주교, 전 루스-우크라이나의 총대주교, 거룩한 키이우 페체르스크 라브라와 포차이우 라브라의 거룩한 대수도원장"으로 변경했다. 약식 명칭은 "그의 성하 (이름), 키이우와 전 루스-우크라이나의 총대주교"이며, 교회 간 관계에서는 "대주교, 키이우와 전 루스-우크라이나의 관구장 주교"로 사용되었다. 러시아 정교회는 이 새로운 칭호에 대해 "우스꽝스러운 일"이라며, 그들에게 필라레트는 "분리주의자로 남아있다"고 반응했다.
6. 통합과 우크라이나 정교회
필라레트는 우크라이나 정교회들의 통합 과정에서 핵심적인 인물이었으며, 새로운 우크라이나 정교회 내에서의 그의 위상은 복잡하게 변화했다.
6.1.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청에 의한 복권
2018년 10월 11일,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청 성 시노드는 필라레트 데니센코를 교회 공동체로 복권한다고 발표했다. 이는 러시아 정교회가 그에게 내린 성직 박탈과 파문이 교리적인 이유가 아닌 만큼 무효임을 선언한 것이었다. 이 결정으로 모스크바 총대주교청의 키이우 교구에 대한 관할권이 폐지되었고, 필라레트를 포함한 모든 관련 주교들은 세계 총대주교청의 관할 아래에 있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세계 총대주교청은 그를 '총대주교'로 인정한 것이 아니라, '전 키이우 관구장 주교'의 지위를 회복시킨 것으로 보았다.
6.2. 우크라이나 정교회 형성에 기여
2018년 12월 15일, 우크라이나 자치정교회와 키이우 총대교구 우크라이나 정교회는 스스로 해체를 결정했다. 이는 같은 날 통합 공의회를 통해 이 두 교회와 모스크바 총대주교청 소속 우크라이나 정교회의 일부 구성원이 통합하여 우크라이나 정교회(OCU)를 설립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로써 키이우 총대교구 우크라이나 정교회는 공식적으로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필라레트는 이 과정에서 우크라이나 정교회의 "명예 총대주교" 칭호를 부여받았다. 키이우 신학원의 블라디미르 부레가 교수는 "명예 총대주교"라는 칭호가 당시 필라레트 총대주교와의 관계를 악화시키지 않기 위한 것이었으며, 2018년 12월 15일에 채택된 우크라이나 정교회 헌장에는 이러한 지위가 명시되어 있지 않다고 설명했다.
2018년 12월 18일, 우크라이나 의회(베르호프나 라다)는 2019년 1월 23일 필라레트의 90번째 생일을 국가 기념일로 지정하는 안건을 통과시켰다.
6.3. 이후의 갈등과 키이우 총대주교청 복원 시도
2019년 1월 16일, 필라레트는 에피파니 수좌주교보다 먼저 자신을 기념해줄 것을 요청하며 "키이우와 전 루스-우크라이나의 총대주교 필라레트"라는 서명으로 문서를 제출했다. 2019년 1월 20일, 그는 인터뷰에서 자신의 우크라이나 정교회 내 역할에 대한 질문에 "나는 총대주교이며, 총대주교였고, 총대주교로 남을 것입니다. 오늘날 지역 교회의 수장은 에피파니 관구장 주교이지만, 나는 우크라이나 교회의 발전에 참여하는 것을 거부하지 않습니다. 나는 세계 정교회에게는 인정받지 못하는 총대주교이지만, 우크라이나에게는 총대주교이며 총대주교로 남아있습니다"라고 선언했다.
2019년 2월 5일, 우크라이나 정교회 성 시노드는 필라레트를 미하일롭스키 황금 돔 수도원을 제외한 키이우 교구의 교구 주교로 임명했다. 2019년 3월 1일, 에피파니 수좌주교는 BBC 우크라이나와의 인터뷰에서 필라레트와 관련된 상황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우리는 우크라이나 정교회의 세 지부를 통합했기 때문에 특별한 상황에 있습니다. 그리고 필라레트 성하께서는 25년 이상 키이우 총대교구 우크라이나 정교회를 건설해 오셨고, 그의 노력 덕분에 우리는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모스크바는 특히 필라레트 총대주교가 평생 동안 '꾸쿨리온'(총대주교가 되기 위해)을 위해 일했고, 모스크바 총대주교가 되지 못하자 키이우 총대주교가 되었으며 결코 권력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우리는 그 반대를 봅니다. 총대주교께서 포기하고 통합 공의회에 참석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그를 총대주교 자리에 앉히지 않았습니다. 어떤 이들은 필라레트 총대주교가 아예 존재하지 않도록 완전히 없애버리기를 원하지만,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는 교구 주교로 남아있으며, 계속해서 우크라이나 정교회 건설을 위해 노력할 것입니다. 지도자가 있지만, 그(필라레트)는 명예 총대주교로 남아있습니다. 그는 계속해서 자신의 교구인 키이우 시를 가질 것이지만, 전체 교회를 총괄적으로 관리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필라레트와 에피파니 수좌주교 사이에는 지배 모델, 디아스포라 관리, 우크라이나 정교회의 명칭 및 법규에 대한 이견으로 갈등이 불거졌다. 필라레트에 따르면, 통합 공의회에서 합의된 바는 "수좌주교는 우크라이나 정교회(UOC)의 대외적인 대표를 담당하고, 총대주교는 우크라이나 내 교회 내부 생활을 수좌주교와 협력하여 책임진다. 수좌주교는 총대주교의 동의 없이 교회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아야 한다. 총대주교는 교회의 단결 보존, 성장 및 확립을 위해 성 시노드와 우크라이나 정교회 회의를 주재한다"는 것이었지만, 이 합의가 이행되지 않았다고 그는 주장했다.
2019년 6월 19일, 필라레트는 "회의"를 소집하여 키이우 총대교구 우크라이나 정교회의 "복원"을 일방적으로 선언했다. 그는 이에 대해 2018년 12월 15일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청 회의에서 "토모스"를 얻기 위해 키이우 총대주교청의 존재를 형식적으로 포기해야 했으며, 이번 회의를 통해 키이우 총대주교청의 폐지를 무효화했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우크라이나 정교회는 같은 날 발표한 성명에서 필라레트가 소집한 소위 "회의"는 무의미하며 법적 효력을 전혀 가지지 않는다고 선언했다. 우크라이나 정교회는 필라레트를 우크라이나 정교회의 구성원으로 남겨두었지만, 6월 24일에는 그에게 키이우 교구를 관리할 권한을 박탈하는 결정을 내렸다.
7. 정치적 및 사회적 견해
필라레트는 우크라이나의 주권과 러시아의 침략 문제에 대해 강경한 입장을 표명했으며, 사회적 논쟁에 대해서는 보수적인 발언으로 논란을 빚기도 했다.
7.1. 우크라이나 주권과 러시아 침략에 대한 입장
2014년 3월, 필라레트는 러시아의 크림반도 합병에 공개적으로 반대했다.
2014년 9월 5일, 2014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군사 개입이 진행되는 가운데, 필라레트는 천상의 백인을 위한 추모 십자가 봉헌식을 거행했다. 그는 이 봉헌식에서 정교회 안에 "이 세상의 통치자들 가운데... 진정한 새 카인"이 나타났다고 선언했다. 이 인물은 "자신을 우크라이나인들의 형제라고 부르지만, 실제로는 그의 행위에 따라... 형제의 피를 흘리고 온 세상을 거짓으로 얽어매는 새 카인이 되었다"고 말했다. 또한 그는 "사탄이 가룟 유다에게 들어갔던 것처럼 그에게 들어갔다"고 주장했다. 처치 타임즈, 코그라이터, 에큐메니컬 뉴스와 같은 언론 매체들은 필라레트가 언급한 "새 카인"이 러시아 대통령 블라디미르 푸틴을 지칭한다고 보도했다. 필라레트는 또한 돈바스 지역 주민들이 "키이우의 권위를 거부한 죄에 대해 고통과 피로 대가를 치러야 한다"고 말했다.
7.2. 논란이 된 사회적 발언
2020년 3월, 필라레트는 한 TV 인터뷰에서 코로나19 범유행이 동성결혼에 대한 "신성한 징벌"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키이우에 본부를 둔 LGBT 권리 단체 인사이트는 그의 발언에 대해 소송을 제기했다. 2020년 9월 초, 필라레트 본인이 코로나19 양성 판정을 받아 병원에 입원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2020년 3월 우크라이나 채널 4에서 방영된 인터뷰에서 그는 성체성사가 하나의 숟가락으로 집전될 수 있다고 주장하며, 영광스럽게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부터 바이러스에 감염될 수는 없다고 발언했다.
8. 수상 및 명예
필라레트는 우크라이나의 독립을 위한 공로를 인정받아 여러 국가 및 종교적 상을 받았다.
- 독립 문화 잡지 I의 "지적 용기 훈장"(2018년)
8.1. 국가 훈장
8.1.1. 우크라이나
- 자유 훈장 멤버 (2009년)
- 야로슬라프 현공 훈장 1등급 (2008년), 2등급 (2006년), 3등급 (2003년), 4등급 (2001년), 5등급 (1999년)
- 이반 마제파 십자훈장 (2011년)
- 우크라이나 영웅 (2019년)
8.1.2. 소련
- 인민우호훈장 (1980년)
- 노동적기훈장 (1988년)
9. 주교 서품 목록
필라레트는 생애 동안 수많은 주교를 서품했으며, 이는 그의 교회 내 영향력을 보여준다.
9.1. 보조 대주교로서의 서품
필라레트가 보조 대주교로서 참여한 주교 서품 목록은 다음과 같다.
이름 | 서품일 | 직책 |
---|---|---|
블라디미르 (코틀랴로프) | 1962년 12월 30일 | 즈베니고로드 주교 |
안토니우스 (바카리크) | 1965년 2월 12일 | 스몰렌스크 및 도로고부시 주교 |
보리스 (스크보르초프) | 1965년 2월 21일 | 랴잔 및 카시모프 주교 |
멜키제덱 (레베데프) | 1965년 6월 17일 | 볼로그다 및 벨리키우스튜그 주교 |
필라레트 (바흐로메예프) | 1965년 10월 24일 | 티흐빈 주교 |
요나탄 (코필로비치) | 1965년 11월 28일 | 테겔 주교 |
요한 (스니초프) | 1965년 12월 12일 | 시즈란 주교 |
유베날리 (포야르코프) | 1965년 12월 26일 | 자라이스크 주교 |
이레네우스 (수세미흘) | 1966년 1월 30일 | 뮌헨 주교 |
디오니시우스 (루킨) | 1966년 3월 20일 | 로테르담 주교 |
볼로디미르 (사보단) | 1966년 7월 9일 | 즈베니고로드 주교 |
헤르모게네스 (오레호프) | 1966년 11월 25일 | 포돌스크 주교 |
테오도시우스 (디쿤) | 1967년 6월 4일 | 페레야슬라우-흐멜니츠키 주교 |
사바스 (바비네츠) | 1969년 3월 30일 | 페레야슬라우-흐멜니츠키 주교 |
마카리우스 (스비툰) | 1970년 6월 7일 | 우만 주교 |
막시무스 (크로하) | 1972년 3월 26일 | 아르헨티나 및 남아메리카 주교 |
빅토리누스 (벨랴예프) | 1973년 6월 3일 | 페름 및 솔리캄스크 주교 |
플라톤 (우도벤코) | 1973년 12월 16일 | 아르헨티나 및 남아메리카 주교 |
욥 (티보니우크) | 1975년 1월 3일 | 자라이스크 주교 |
키릴 (군댜예프) | 1976년 3월 14일 | 비보르크 주교 |
글렙 (스미르노프) | 1976년 5월 9일 | 오룔 및 브랸스크 주교 |
발렌틴 (미슈추크) | 1976년 7월 25일 | 우파 및 스텔리타마크 주교 |
니카노르 (유힘유크) | 1979년 11월 30일 | 포돌스크 주교 |
9.2. 주교급 대주교로서의 서품
필라레트가 주도하여 진행된 주교 서품 목록은 다음과 같다.
이름 | 서품일 | 직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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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콜라스 (비치콥스키) | 1971년 7월 28일 | 쿠르스크 및 벨고로드 주교 |
바를람 (일리우셴코) | 1972년 10월 22일 | 페레야슬라우-흐멜니츠키 주교 |
아가탕겔로스 (사빈) | 1975년 11월 16일 | 빈니차 및 브라슬라우 주교 |
세바스티안 (필립추크) | 1978년 10월 16일 | 키로보흐라드 및 미콜라이우 주교 |
이오안 (보드나르추크) | 1978년 10월 23일 | 지토미르 및 오브루치 주교 |
라자르 (슈베츠) | 1980년 4월 18일 | 아르헨티나 및 남아메리카 주교 |
안토니우스 (모스칼렌코) | 1986년 10월 13일 | 페레야슬라우-흐멜니츠키 주교 |
팔라디우스 (시만) | 1987년 2월 8일 | 페레야슬라우-흐멜니츠키 주교 |
마르쿠스 (페트로프치) | 1988년 7월 28일 | 크레메네츠 주교 |
요안니키우스 (콥지에프) | 1988년 12월 13일 | 슬로뱐스크 주교 |
요나탄 (옐레츠키흐) | 1989년 4월 22일 | 페레야슬라우-흐멜니츠키 주교 |
에우티미우스 (슈타크) | 1989년 7월 28일 | 무카체보 및 우즈호로드 주교 |
바실리우스 (바실체프) | 1989년 10월 1일 | 키로보흐라드 및 미콜라이우 주교 |
바르톨로메우스 (바슈추크) | 1990년 2월 24일 | 볼리니아 및 리우네 주교 |
니폰트 (솔로두하) | 1990년 3월 31일 | 흐멜니츠키 및 카미아네츠-포딜스키 주교 |
안드리 (호라크) | 1990년 4월 18일 | 르비우 및 드로호비치 주교 |
글렙 (사빈) | 1990년 8월 2일 | 드니프로페트로우스크 및 자포리자 주교 |
바실리우스 (즐라톨린스키) | 1990년 12월 2일 | 심페로폴 및 크림 주교 |
오누프리우스 (베레좁스키) | 1990년 12월 9일 | 체르니우치 및 부코비나 주교 |
야콥 (판추크) | 1990년 12월 14일 | 포차이우 주교 |
세르기우스 (헨시츠키) | 1991년 2월 17일 | 크레메네츠 주교 |
힐라리온 (프로치크) | 1991년 9월 29일 | 이바노-프란키우스크 및 콜로미야 주교 |
알리피우스 (포흐리브냐크) | 1991년 10월 6일 | 도네츠크 및 루한스크 주교 |
스피리돈 (밥스키) | 1992년 6월 7일 | 페레야슬라우-흐멜니츠키 주교 |
바르사누피우스 (마주라크) | 1992년 6월 8일 | 이바노-프란키우스크 및 콜로미야 주교 |
안토니우스 (마센디치) | 1992년 9월 9일 | 페레야슬라우 및 시체슬라우 주교 |
볼로디미르 (로만유크) | 1992년 9월 10일 | 빌라 체르크바 주교 |
소프로니우스 (블라소프) | 1992년 9월 15일 | 빈니차 및 브라슬라우 주교 |
로만 (블라슈추크) | 1992년 9월 16일 | 리우네 및 오스트로흐 주교 |
세라핌 (베르준) | 1992년 9월 25일 | 지토미르 및 오브루치 주교 |
네스토르 (쿨리시) | 1992년 11월 15일 | 체르카시 및 치히린 주교 |
폴리카르프 (후츠) | 1993년 4월 10일 | 도네츠크 및 루한스크 주교 |
알렉시우스 (차루크) | 1993년 7월 7일 | 미콜라이우 주교 |
볼로디미르 (라디카) | 1993년 3월 13일 | 빈니차 및 브라슬라우 주교 |
알렉산더 (레셰트냐크) | 1994년 1월 16일 | 빌라 체르크바 주교 |
다니엘 (초칼리우크) | 1994년 1월 23일 | 비슈호로드 주교 |
하드리안 (스타리나) | 1994년 2월 6일 | 자포리자 및 드니프로페트로우스크 주교 |
이쟈슬라프 (카르하) | 1994년 9월 11일 | 니코폴 주교 |
페오도시우스 (페치나) | 1994년 12월 4일 | 드로호비치 및 삼비르 주교 |
바를람 (필리피신) | 1994년 12월 14일 | 체르니히우 및 수미 주교 |
요아사프 (시바예프) | 1995년 2월 19일 | 벨고로드 및 오보얀 주교 |
바루흐 (티셴코프) | 1994년 2월 23일 | 토볼스크 및 예니세이스크 주교 |
욥 (파블리신) | 1995년 5월 11일 | 크레메네츠 및 즈바라지 주교 |
그레고리우스 (카찬) | 1995년 10월 10일 | 멜리토폴 주교 |
게론티우스 (호반스키) | 1996년 3월 24일 | 수미 및 오흐티르카 주교 |
요한 (지노비예프) | 1996년 7월 18일 | 도네츠크 및 루한스크 주교 |
안토니우스 (마호타) | 1996년 7월 21일 | 심페로폴 및 크림 주교 |
볼로디미르 (폴리슈추크) | 1997년 2월 23일 | 이바노-프란키우스크 및 콜로미야 주교 |
요아사프 (바실리키우) | 1997년 4월 6일 | 도네츠크 및 루한스크 주교 |
판크라티우스 (타르나프스키) | 1997년 7월 27일 | 빈니차 및 브라슬라우 주교 |
크리스토포루스 (시타스) | 1997년 10월 2일 | 수로즈 주교 |
니콘 (칼렘베르) | 1997년 10월 12일 | 키츠만 및 자스타우나 주교 |
다미안 (자마라예프) | 1997년 10월 19일 | 헤르손 및 타우리다 주교 |
페터 (페트루스) | 1997년 10월 30일 | 르비우 및 야보리우 주교 |
유리 (유리치크) | 1999년 5월 14일 | 도네츠크 및 루한스크 주교 게오르기 |
티모테우스 (쿠탈리아노스) | 2000년 3월 26일 | 코르순 주교 |
드미트리우스 (루디우크) | 2000년 7월 16일 | 페레야슬라우-흐멜니츠키 주교 |
클레멘스 (쿠슈치) | 2000년 7월 23일 | 심페로폴 및 크림 주교 |
미하일 (진케비치) | 2000년 10월 22일 | 수미 및 오흐티르카 주교 |
플라비안 (파시치니크) | 2000년 11월 5일 | 하르키우 및 보호두히우 주교 |
파이시우스 (드모호프스키) | 2001년 9월 30일 | 오데사 및 발타 주교 |
스테판 (빌랴크) | 2002년 5월 19일 | 보리스필 주교 |
에우세비우스 (폴리티로) | 2002년 7월 7일 | 폴타바 및 크레멘추크 주교 |
세르기우스 (호롭초프) | 2002년 12월 14일 | 슬로뱐스크 주교 |
프세볼로드 (마트비예프스키) | 2003년 3월 28일 | 루한스크 및 스타로빌스크 주교 |
요한 (야레멘코) | 2003년 3월 30일 | 체르카시 및 치히린 주교 |
키릴 (미하일류크) | 2003년 8월 3일 | 우즈호로드 및 자카르파티아 주교 |
메포디우스 (스리브냐크) | 2004년 6월 6일 | 수미 및 오흐티르카 주교 |
페오도시우스 (파이쿠시) | 2004년 7월 28일 | 체르니히우 및 니진 주교 |
크리소스토미 (바코미트로스) | 2005년 5월 14일 | 케르소네수스 주교 |
필라레트 (판쿠) | 2005년 7월 31일 | 팔레슈티 및 동 몰도바 주교 |
오누프리우스 (하브루크) | 2005년 10월 30일 | 데르만 주교 |
미하일 (본다르추크) | 2006년 1월 1일 | 폴타바 및 크레멘추크 주교 |
네스토르 (피식) | 2006년 3월 5일 | 테르노필 및 부차치 주교 |
페오도르 (부브뉴크) | 2006년 11월 12일 | 폴타바 및 크레멘추크 주교 |
세바스티안 (보즈냐크) | 2006년 12월 14일 | 체르니히우 및 니진 주교 |
마테우스 (셰우추크) | 2006년 12월 17일 | 드로호비치 및 삼비르 주교 |
힐라리온 (프로치크) | 2008년 5월 14일 | 체르니히우 및 니진 주교 |
에우스트라티우스 (조랴) | 2008년 5월 25일 | 바실키우 주교 |
페터 (모스칼료프) | 2008년 12월 13일 | 발루이키 주교 |
마르쿠스 (레우키우) | 2009년 2월 1일 | 키로보흐라드 및 홀로바니우스크 주교 |
파울 (크라우추크) | 2009년 3월 30일 | 테르노필 및 테레보블리아 주교 |
에피파니우스 (두멘코) | 2009년 11월 15일 | 비슈호로드 주교 |
시메온 (진케비치) | 2009년 11월 21일 | 드니프로페트로우스크 및 파블로흐라드 주교 |
티코 (페트라뉴크) | 2009년 11월 22일 | 루한스크 및 스타로빌스크 주교 |
10. 유산과 평가
필라레트의 삶과 경력은 우크라이나의 종교적, 정치적 격동기를 그대로 반영한다. 그는 우크라이나 교회의 독립을 향한 열망을 대변하는 상징적인 인물로 기억되고 있다.
10.1. 기여와 긍정적 평가
필라레트의 가장 중요한 기여는 우크라이나의 종교적 독립을 위해 헌신했다는 점이다. 러시아 정교회로부터의 분리라는 과감한 결정을 통해, 그는 우크라이나 내에서 독자적인 정교회 조직인 키이우 총대교구 우크라이나 정교회를 설립하고 확장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이는 우크라이나의 주권 강화와 국가 정체성 확립에 기여한 것으로 평가된다. 그가 러시아-우크라이나 분쟁에서 보여준 확고한 반러시아 입장은 많은 우크라이나인들에게 민족적 영웅으로 인식되는 배경이 되었다. 2018년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청에 의해 복권된 것은 그의 노력이 결국 국제 정교회 차원에서 어느 정도 인정을 받았음을 의미한다.
10.2. 지속적인 비판과 논쟁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라레트의 경력은 여러 비판과 논쟁으로 얼룩져 있다. 소련 시절 KGB 협력 의혹은 그의 도덕적 신뢰성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며, 그가 이 사실을 인정한 것은 논쟁의 불씨를 남겼다. 또한 러시아 정교회가 그에게 내린 성직 박탈과 파문은 그가 교회법을 위반했다는 주장을 낳았으며, 비록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의해 복권되었지만, 그의 재임 기간 동안의 "비정규적" 지위는 계속해서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2018년 우크라이나 정교회 통합 이후에도 그는 명예 총대주교로서의 지위를 인정하지 않고 키이우 총대교구 우크라이나 정교회의 "복원"을 시도하며 새로운 우크라이나 정교회 지도부와 갈등을 빚는 등 불화를 야기했다. 이는 우크라이나 정교회의 통합과 안정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비판을 받는다. 또한 코로나19 팬데믹을 동성결혼에 대한 "신의 징벌"로 언급하는 등 성소수자 혐오 발언과 같은 사회적으로 논란이 될 만한 보수적 견해는 그의 지도자로서의 포용성과 시대적 인식을 두고 비판을 받았다. 이러한 논란에도 불구하고, 필라레트는 우크라이나 현대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종교인이자 정치적 행보를 보인 인물로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