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Early Life and Background
필립 프랜시스 리주토는 뉴욕주 브루클린에서 태어나 성장했으며, 학창 시절부터 뛰어난 운동 재능을 보이며 야구 선수로서의 기틀을 다졌다.
1.1. Birth and Childhood
리주토는 1917년 9월 25일 뉴욕시 브루클린에서 이탈리아 칼라브리아 출신인 전차 운전수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출생 연도는 혼란이 있었는데, 프로 경력을 시작할 때 동료들의 조언으로 나이를 한 살 줄였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그의 생년은 오랫동안 1918년으로 알려졌으나, 후대의 자료들은 1917년이 정확하며 사망 당시 89세였음을 밝혔다. 뉴욕시 보건국에 따르면 그의 공식 출생증명서도 1917년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는 퀸스의 글렌데일에서 자랐다. 비록 작은 체구(선수 시절 168 cm, 68~72 kg)에도 불구하고 운동에 재능을 보여 야구와 풋볼을 병행했다.
1.2. Education and Early Career Development
리주토는 퀸스의 리치먼드 힐 고등학교에서 야구와 풋볼을 했으며, 1935년에는 당시 브루클린 다저스 감독이던 케이시 스텡걸로부터 "야구는 그만두고 구두닦이나 하라"는 냉담한 조언을 들었다는 일화가 있다. 그러나 그는 1937년 뉴욕 양키스와 아마추어 자유 계약 선수로 계약하며 프로 경력을 시작했다. 그의 별명인 스쿠터(the Scooter더 스쿠터영어)는 양키스 방송인 멜 앨런이 지어준 것으로 알려졌지만, 실제로는 마이너리그 팀 동료였던 빌리 히치콕이 그가 베이스를 달리는 모습을 보고 붙여준 것이라고 한다.
2. Playing Career
필립 프랜시스 리주토는 뉴욕 양키스 유격수로서 13년간의 프로 야구 선수 경력을 보내며, 팀의 전성기를 이끄는 핵심 선수로 활약했다.
2.1. Major League Debut and Early Success
1940년 캔자스시티 블루스에서 뛰면서 스포팅 뉴스 선정 올해의 마이너리그 선수상을 수상한 뒤, 1941년 4월 14일 메이저 리그에 데뷔했다. 타율이 .194로 떨어진 주전 유격수 프랭크 크로세티의 자리를 빠르게 대체하며 2루수 조 고든과 함께 뛰어난 내야 수비진을 구축했다. 1941년 신인 시즌에 1941년 월드 시리즈에 출전했으나 타격은 부진했고, 양키스는 브루클린 다저스를 꺾고 우승했다. 이듬해 1942년 월드 시리즈에서는 타율 .381, 8안타를 기록하며 양 팀 선수 중 가장 높은 타율을 기록했다. 정규 시즌에는 4개의 홈런만 기록했지만, 이 월드 시리즈에서는 1개의 홈런을 추가하기도 했다.
2.2. Military Service during World War II
당시 많은 선수들이 그랬듯이 리주토의 선수 경력은 제2차 세계 대전 참전으로 중단되었다. 그는 1943년부터 1945년까지 미국 해군에 복무하며 군 야구팀에서 다저스 유격수 피 위 리스와 함께 뛰었으며, 이 팀은 양키스 포수 빌 디키가 감독을 맡았다.
2.3. Peak Performance and Achievements
1946년 시즌에 양키스에 복귀한 직후, 리주토는 당시 양키스 단장이자 구단주였던 래리 맥페일과 얽힌 일화를 겪었다. 맥페일은 리주토가 멕시코 리그 구단으로부터 10.00 만 USD, 3년 계약 제안을 고려하고 있다는 소문에 대해, 기자 러더퍼드 "러드" 레니가 리주토와 대화하고 계약 파기를 권유했다는 이유로 멕시코 야구 리그를 고소하며 레니를 '외국인 대리인'으로 지목했다. 이 소송은 결국 맥페일의 과잉 반응으로 밝혀져 취하되었고, 리주토는 1946년 타율 .257로 부진했다. 그러나 1947년부터는 수비력이 향상되어 1947년 .969, 1948년 .973의 수비율을 기록하며 프랭크 크로세티의 팀 기록을 경신했다.
리주토의 선수 생활 최전성기는 1949년부터 1950년까지였는데, 이 시기에 그는 1번 타자로 출전했다. 1950년 MVP 시즌에는 타율 .324, 200안타, 92볼넷, 125득점을 기록했다. 수비에서는 수비율 리그 1위를 차지했으며, 238번의 연속적인 수비 기회를 실책 없이 처리하여 유격수 단일 시즌 기록을 세웠다. 1949년 9월 18일부터 1950년 6월 7일까지 58경기 연속 무실책을 기록하며 아메리칸 리그 유격수 기록을 경신했다. 또한 1950년에 123개의 더블 플레이를 기록하여 양키스 팀 기록을 세웠고, 그의 1950년 수비율 .9817은 리그 최고 기록이었다. 이 기록은 1976년 프레드 스탠리가 .983을 기록하기 전까지 양키스 구단 기록으로 남아있었다.
1950년 리주토는 테드 윌리엄스를 제치고 아메리칸 리그 MVP에 선정되었는데, 희생 번트 리그 1위가 MVP가 된 유일무이한 사례였다. 그는 1942년과 1950년부터 1953년까지 총 5번의 올스타전에 출전했다. 1950년에는 그 해 최고의 프로 운동선수에게 주어지는 히칵 벨트를 수상했고, 스포팅 뉴스 선정 올해의 메이저 리그 선수로도 뽑혔다. 또한 4년 연속(1949~1952년) 스포팅 뉴스로부터 최고의 유격수로 선정되었다.

리주토는 1951년 월드 시리즈에서 타율 .320을 기록했으며, 미국 야구 기자 협회 뉴욕 지부로부터 시리즈 최고의 선수에게 주어지는 베이브 루스 상을 수상했다. 수십 년이 지난 후에도 그는 뉴욕 자이언츠 2루수 에디 스탠키가 태그 플레이 도중 그의 글러브에서 공을 발로 차 빼내면서 경기를 뒤집었던 사건을 분개하며 이야기하곤 했다. 타이 콥은 리주토와 스탠 뮤지얼을 "옛 거장들 사이에서도 어깨를 나란히 할 몇 안 되는 현대 야구 선수"라고 평가했다.

케이시 스텡걸 감독은 1935년 브루클린 다저스에서 리주토를 테스트할 때 "구두닦이나 하라"며 거절했으나, 아이러니하게도 5년 연속 우승 시즌 동안 리주토를 감독했으며, 나중에는 "그는 내 야구 인생에서 본 유격수 중 가장 위대하다"고 칭찬했다. 그의 전성기 시절, 양키스 투수 빅 래씨는 "내 최고의 피칭은 타자가 리주토 방향으로 땅볼, 라인 드라이브, 플라이볼을 치는 것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리주토가 은퇴한 지 수십 년이 지나서도 팀 동료였던 조 디마지오는 리주토의 팬들에게 꾸준한 인기를 "사람들은 내가 야구하는 것을 보는 것을 사랑했다. 스쿠터(리주토)는 그 자체로 사랑이었다"고 묘사했다.
리주토는 '스몰볼'의 대가로, 강력한 수비와 결정적인 타격으로 양키스가 7번의 월드 시리즈 우승을 차지하는 데 기여했다. 공격적으로는 그의 시대에서 최고의 번트 선수 중 한 명으로 평가받으며, 1949년부터 1952년까지 매 시즌 아메리칸 리그 희생타 1위를 기록했다. 은퇴 후에도 그는 종종 스프링 트레이닝에서 선수들에게 번트를 가르쳤으며, 방송 중에도 다양한 상황에서 번트 기술을 설명하기도 했다. 수십 년 뒤에는 야구에서 번트의 예술이 많이 사라진 것에 대해 아쉬움을 표하기도 했다. 그는 7번이나 아메리칸 리그 도루 부문 상위 5위 안에 들었다. 수비적으로는 더블 플레이와 경기당 총 수비 기회에서 각각 3번, 수비율과 풋아웃에서 각각 2번, 그리고 어시스트에서 1번 리그 1위를 차지했다. 리주토는 월드 시리즈 최다 출전 경기, 안타, 볼넷, 득점, 도루 등 여러 부문에서 상위 10위 안에 랭크되어 있다. 그가 뛰었던 월드 시리즈 중 3번은 7차전까지 갔는데(1947년, 1952년, 1955년), 이 세 경기에서 리주토는 타율 .455를 기록했다.
뉴욕 타임스는 리주토의 부고 기사에서 1951년 9월 17일 양키스와 클리블랜드 인디언스가 공동 1위를 달리고 시즌 종료를 12경기 남겨둔 상황에서 벌어진 플레이를 회상했다.
:1 대 1 동점인 9회말, 리주토는 오른손 타석에 들어서 밥 레몬을 상대했다. 리주토는 레몬의 초구를 보크로 생각하고 보냈지만, 심판이 스트라이크를 선언하자 항의하는 척하며 3루 주자 조 디마지오에게 스퀴즈 플레이 사인을 냈다. 그러나 디마지오가 너무 일찍 뛰었고, 레몬은 이를 눈치채고 번트를 피하기 위해 리주토의 뒤쪽으로 높게 던졌다. 하지만 디마지오가 홈으로 달려드는 상황에서 리주토는 재빨리 배트를 들어 번트를 성공시켰다. 리주토는 "번트를 대지 않았다면 공이 내 머리에 맞았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디마지오는 결승점을 올렸고, 스텡걸은 "내가 본 최고의 플레이"라고 극찬했다. 승리 득점이 나오자 레몬은 화가 나서 공과 글러브를 모두 관중석으로 던져버렸다.
2.4. Later Career and Retirement from Playing
1954년부터 그의 성적은 하락세를 겪기 시작하여 타율이 .195로 떨어졌고, 1955년에는 81경기, 1956년에는 31경기 출전에 그쳤다. 양키스는 1956년 8월 25일 리주토를 방출했다. 리주토는 자신이 방출된 상황에 대해 자주 불만을 표출했지만, 그의 오랜 친구이자 전 팀 동료였던 조지 스턴와이스의 조언에 따라 양키스를 비난하는 것을 삼가고 이후 양키스에서 비선수직을 얻을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리주토는 이 조언이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잘한 일 중 하나였다고 여러 번 말했다.
은퇴 당시 그의 1,217개의 통산 더블 플레이는 루크 어플링의 1,424개에 이어 메이저 리그 역사상 2위였으며, .968의 통산 수비율은 루 부드로의 .973에 이어 아메리칸 리그 유격수 중 2위였다. 그는 또한 유격수 출전 경기 수에서 1,647경기로 아메리칸 리그 역대 5위, 풋아웃에서 3,219개로 8위, 총 수비 기회에서 8,148개로 8위, 어시스트에서 4,666개로 9위에 랭크되었다.
그가 마지막 경기를 치렀을 때, 그는 역대 최다인 52번의 월드 시리즈 경기에 출전했는데, 이 기록은 곧 5명의 양키스 팀 동료에 의해 경신되었다. 그러나 리주토는 여전히 유격수로서 월드 시리즈 최다 출전 경기, 싱글 안타, 볼넷, 출루, 도루, 타석, 풋아웃, 어시스트, 더블 플레이 등 수많은 월드 시리즈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3. Broadcasting Career
선수 생활 은퇴 후, 필립 프랜시스 리주토는 뉴욕 양키스 라디오 및 텔레비전 스포츠 아나운서로서 40년간 길고 영향력 있는 경력을 이어갔다.
3.1. Transition to Broadcasting
양키스에서 방출된 후 리주토에게는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의 선수 계약 제안과 로스앤젤레스 다저스의 마이너리그 제안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1956년 9월 뉴욕 자이언츠의 방송 진행자 프랭키 프리쉬의 심장마비로 인해 그의 자리를 임시로 채웠을 때 좋은 평가를 받자, 방송 경력을 추구하기로 결정했다. 리주토는 볼티모어 오리올스에 오디션 테이프를 제출했으나, 양키스의 스폰서였던 발렌타인 맥주가 이를 알아채고 양키스에 리주토를 1957년 시즌의 아나운서로 고용할 것을 주장했다. 당시 단장이었던 조지 와이스는 어쩔 수 없이 4년밖에 되지 않았던 기존 아나운서 짐 우즈를 해고하고 리주토를 영입해야 했다. 와이스는 우즈에게 해고를 통보하며 "이유 없이 사람을 해고한 것은 처음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3.2. Broadcast Style and Memorable Moments
리주토는 이후 40년 동안 양키스 경기의 라디오와 텔레비전 중계를 담당했다. 그의 가장 유명한 유행어는 "홀리 카우!(Holy cow!홀리 카우!영어)"였으며, 훌륭한 플레이가 나오면 "믿을 수 없어!(Unbelievable!믿을 수 없어!영어)" 또는 "방금 봤어?(Did you see that?방금 봤어?영어)"라고 외치곤 했다. 또한 마음에 들지 않는 행동을 하는 선수를 "허클베리(huckleberry허클베리영어)"라고 부르기도 했다. 중계 중에는 종종 청취자들의 생일이나 기념일을 축하해주고, 병원에 입원한 팬들에게 쾌유를 빌었으며, 자신이 좋아하는 식당이나 이닝 중간에 먹었던 카놀리에 대해 이야기하는 등 독특하고 대화적인 방송 스타일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잡담 때문에 가끔 그 자신이 경기를 놓치기도 했는데, 이를 위해 자신의 스코어 카드에 "WW"라는 독특한 표기법을 고안했다. 이는 "안 보고 있었다(Wasn't Watching워즌트 워칭영어)"의 약자였다.
그는 또한 일찍 퇴근하는 것에 대해 농담하며 "곧 집에 갈게, 코라!"나 종종 정체되는 조지 워싱턴 브리지를 언급하며 "저 다리를 건너야 해"라고 말하곤 했다. 말년에는 양키스 경기 초반 6이닝만 중계했는데, 가끔 TV 감독은 리주토가 떠난 후 양키 스타디움 상단에서 보이는 다리 풍경을 장난스럽게 화면에 비추기도 했다. 리주토는 또한 번개 공포증이 심하여 강한 천둥소리가 들리면 때때로 방송 부스를 떠나기도 했다.
리주토는 1957년에 멜 앨런과 레드 바버와 함께 방송 경력을 시작했다. 그의 경력 동안 함께 일했던 여러 아나운서 중에서는 프랭크 메서(1968~1985년)와 빌 화이트(1971~1988년)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리주토, 메서, 화이트는 양키스의 CBS 소유 시절부터 조지 스타인브레너 구단주의 우승 시즌, 그리고 고전했던 시기까지 양키스의 중요한 시기를 중계한 주요 트리오였다.
리주토는 양키스와 함께 두 번 월드 시리즈 중계를 맡았다. 1964년 월드 시리즈에서는 NBC-TV와 라디오에서 조 가라지올라와 함께 양키스 대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경기를 중계했고, 1976년 월드 시리즈에서는 NBC-TV에서 가라지올라와 토니 쿠벡과 함께 양키스 대 신시내티 레즈 경기를 중계했다. 1976년 월드 시리즈는 각 팀의 지역 아나운서가 게스트로 참여한 마지막 시리즈였다. 리주토는 일반적으로 방송 파트너들을 "화이트", "머서", "시버"와 같이 성으로 불렀는데, 선수 시절에도 팀 동료들에게 마찬가지였다고 전해진다. 그는 홈 팀을 노골적으로 응원하는 '호머(homer)' 아나운서로도 명성을 얻었다. 1978년 TV 중계 후 프로그램에서 교황 바오로 6세의 서거 소식이 전해지자 리주토는 "음, 양키스가 이겼어도 기운이 좀 빠지네요"라고 말했는데, 에스콰이어지는 이를 "1978년의 가장 신성한 황소(Holiest Cow)"라고 표현했다.
방송인으로서 리주토의 가장 중요한 순간들 중에는 1961년 10월 1일 로저 매리스가 단일 시즌 홈런 신기록을 세울 때의 중계가 있다. 그는 WCBS 라디오에서 다음과 같이 외쳤다.
:"여기 와인드업, 강속구, 우측 깊숙이 날아갑니다, 해낼 것 같아요! 저기 멀리! 홀리 카우, 해냈습니다! 매리스의 61호! 그리고 저기 공을 잡으려고 싸우는 모습들을 보세요! 홀리 카우, 대단한 샷입니다! 매리스에게 또 한 번의 기립박수가 쏟아지고, 아직도 저기서 공을 잡으려고 서로의 등 위로 올라가며 싸우네요. 여기 양키 스타디움에서 본 가장 위대한 광경 중 하나입니다!"
그는 또한 1976년 10월 14일 아메리칸 리그 챔피언십 시리즈에서 크리스 챔블리스가 우승을 결정짓는 홈런을 쳤을 때 WPIX-TV에서 이렇게 중계했다.
:"우중간 깊숙한 곳으로 쳤습니다! 공이 넘어갑니다! 양키스가 페넌트 레이스를 이겼습니다! 홀리 카우, 크리스 챔블리스가 한 번의 스윙으로! 그리고 양키스가 아메리칸 리그 페넌트를 이겼습니다. 믿을 수 없어, 정말 멋진 마무리입니다! 이 모든 지연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리텔(마크 리텔, 홈런을 허용한 캔자스시티 로열스 구원 투수)이 조금 당황했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홀리 카우, 챔블리스가 펜스를 넘겼고, 팬들에게 둘러싸여 있습니다. 이 구장은 다시는 같지 않을 것이지만, 양키스는 9회말에 7대 6으로 이겼습니다!"
리주토는 1978년 드라마틱했던 아메리칸 리그 동부 지구 타이브레이커 경기, 1983년 양키스 시즌의 파인 타르 사건, 그리고 1985년 양키스 시즌의 필 니크로의 통산 300승 경기 등도 중계했다.
3.3. Final Years in Broadcasting
1995년 8월 15일, 전 팀 동료 미키 맨틀의 장례식이 열리던 날, 양키스는 보스턴 레드삭스와의 원정 경기를 치를 예정이었다. 방송 파트너 보비 머서는 이미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떠났지만, 리주토는 컬러 해설을 할 사람이 필요했기 때문에 자리를 떠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5이닝을 마친 후 갑자기 방송 부스를 떠나며 더 이상 진행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이후 리주토는 은퇴를 발표했는데, 이 사건이 그 배경으로 지목되었다.
그는 결국 1996년 한 시즌 더 복귀하도록 설득되었고, 이 시즌에 또 다른 양키스 유격수 후배인 데릭 지터의 첫 홈런을 중계하기도 했다. 시즌이 끝난 후 그는 완전히 은퇴했다. 군 복무 기간을 제외하고, 그는 선수 생활(1941~1942년, 1946~1956년)과 방송인 생활(1957~1996년)을 포함하여 성인 생활의 첫 60년을 양키스 조직에서 보냈다. 멜 앨런이 오랫동안 "양키스의 목소리"로 알려져 있지만, 리주토는 40년간 중계하며 앨런의 30년을 넘어 양키스 역사상 가장 오래 봉사한 방송인이다.
리주토는 또한 다른 미디어에도 출연했다. 1950년 2월 2일, 그는 굿슨-토드먼 프로덕션스의 게임 쇼 왓츠 마이 라인?의 첫 미스터리 게스트였다. 그는 이 프로그램에 4번 더 출연했는데, 1956~1957년 시즌 은퇴 후 게스트 패널로 3번, 1970년에는 나중 시즌의 미스터리 게스트로 1번 출연했다. 리주토는 또한 CBS의 에드 설리번 쇼, 진실을 말하세요, 필 실버스 쇼 등 다양한 텔레비전 프로그램에도 출연했다.
양키스 중계와 더불어, 리주토는 1957년부터 1977년까지 CBS 라디오 네트워크에서 평일 저녁 5분 스포츠 쇼인 필 리주토와 함께하는 스포츠 타임을 진행했다. 그는 197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약 20년간 더 머니 스토어의 TV 광고 모델로도 활동하며 잘 알려져 있었다.
리주토는 1977년 미트 로프의 노래 "Paradise by the Dashboard Light"의 긴 대사 부분에서 야구 중계를 맡았다. 겉으로는 야구 시퀀스를 묘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가수가 젊은 여성(엘런 폴리가 목소리를 맡음)과 관계를 맺기 위한 단계별 노력을 묘사하는 것이었다. 리주토는 자신의 음성이 어떻게 사용될지 모르고 녹음했다고 전해진다. 노래가 히트했을 때, 리주토의 본당 신부가 충격을 받고 그를 불렀다고 한다. 그러나 미트 로프는 "필은 바보가 아니었다. 그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고 나에게도 그렇게 말했다. 그는 단지 신부로부터 압박을 받고 있었고 뭔가 해야 한다고 느꼈을 뿐이다. 나는 전적으로 이해한다"고 말했다. 수년 후 리주토는 미트 로프에게 속았다고 농담하며 그 이야기를 웃으며 다시 들려주곤 했지만, 그는 긍정적인 태도를 보였다. 미트 로프가 그에게 투어를 함께 하자고 제안했을 때, 리주토는 영광스러웠지만 아내 코라가 "그를 죽일 것"이라며 농담조로 거절했다. 리주토는 이 앨범으로 골드 레코드를 받았다.
4. Personal Life and Other Activities
필립 프랜시스 리주토는 대중에게 알려진 야구 경력 외에도 따뜻한 개인적인 삶과 자선 활동을 이어갔다.
4.1. Family Life
리주토는 1943년 6월 23일 코라 앤 엘렌본과 결혼했다. 두 사람은 전해에 리주토가 조 디마지오를 대신해 뉴어크 영성체 아침 식사 모임에서 연사로 나섰을 때 처음 만났다. 리주토는 "너무 사랑에 빠져서 집에 가지 않았다"고 회상하며, 그녀 곁에 있기 위해 한 달 동안 근처 호텔 방을 빌렸다고 한다. 리주토 부부는 1949년 뉴저지주 힐사이드의 먼로 가든스 아파트로 이사했고, 나중에 재정적 성공을 거둔 후에는 웨스트민스터 애비뉴의 튜더 양식 주택으로 옮겨 그곳에서 오랫동안 살았다.
리주토는 뱀을 극도로 무서워했다. 이를 알고 있던 상대 팀 선수들은 때때로 그의 야구 글러브 안에 고무 뱀을 넣어 장난을 치곤 했다. 이런 일이 일어날 때마다 리주토는 누군가가 뱀이 가짜라고 확신시켜줄 때까지 글러브 근처에 가지 않았다.
4.2. Charity Work and Public Appearances
1951년 뉴저지에서 열린 자선 행사에서 리주토는 보비 톰슨의 "세상을 울린 샷"과 같은 날 야구공에 맞아 시력을 잃은 어린 소년 에드 루카스를 만났다. 리주토는 이 소년과 그가 다니던 세인트 조셉 맹인 학교에 관심을 가졌다. 리주토는 사망할 때까지 자신의 광고 및 책 판매 수익을 기부하고, 연례 필 리주토 유명인 골프 클래식 및 "스쿠터" 시상식을 개최하는 등 세인트 조셉 학교를 위해 수백만 달러를 모금했다. 리주토와 루카스는 계속해서 친하게 지냈으며, 리주토의 영향으로 루카스의 2006년 결혼식은 양키 스타디움에서 치러진 유일한 결혼식이 되었다. 루카스는 리주토가 사망하기 며칠 전 요양원에서 그를 마지막으로 방문한 사람 중 한 명이었다.
5. Honors and Legacy
필립 프랜시스 리주토는 생전에 그리고 사후에 다양한 영예와 인정을 받았으며, 야구계에 지대한 영향을 남겼다.
5.1. Number Retirement and Stadium Tributes
1985년 8월 4일 양키 스타디움에서 열린 행사에서 양키스는 리주토의 등번호 10번을 영구 결번으로 지정했다. 이 행사에서 그는 경기장 내 모뉴먼트 파크에 설치될 명판도 받았다. 명판에는 그가 "양키스 역사상 최고의 유격수이자 위대한 양키스 방송인이라는 두 가지 뛰어난 경력을 누렸다"고 새겨져 있다. 흥미롭게도 리주토는 자신의 기념식 도중 후광을 쓴 살아있는 소(그의 유행어인 "홀리 카우"를 상징)에 의해 실수로 넘어졌는데, 리주토와 소 모두 다치지 않았다. 리주토는 나중에 이 사건에 대해 "그 큰 녀석이 내 신발을 밟고 가라데 동작처럼 나를 뒤로 밀쳤다"고 묘사했다. 이날 경기에서 미래의 방송 파트너가 될 톰 시버는 통산 300승을 달성했다.
대부분의 야구 전문가들은 데릭 지터가 1990년대 후반부터 뉴욕 양키스의 유격수로 뛰면서 리주토를 넘어 양키스 역사상 최고의 유격수가 되었다고 믿는다. 2001년 포스트시즌 양키 스타디움에서 리주토는 덕아웃으로 조깅해 돌아오며 기념 공을 백핸드로 던져 지터의 유명한 경기 구원 송구를 흉내 내며 자신의 후계자에게 경의를 표했다. ESPN은 그날 저녁 지터와 리주토가 함께 찍은 사진이 지터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소유물 중 하나라고 보도했다.
5.2. Baseball Hall of Fame Induction
1957년 봄 리주토가 은퇴한 후 볼티모어 오리올스 감독 폴 리처즈는 "내가 직접 본 유격수들 중에서 리주토가 경력 성과 면에서 단연 최고다. 5년 동안만 본다면 루 부드로를 선택할 수 있겠지만, 해마다, 시즌마다 리주토는 단연 돋보였다"고 말했다. 당시 스포츠 작가 댄 대니얼은 "리주토는 지난 5년간의 선수들 중 궁극적으로 명예의 전당에 입성할 수 있을 몇 안 되는 선수에 포함되어야 한다"고 썼다. 그러나 대니얼의 평가는 35년 이상이 지나서야 현실이 되었다.
리주토는 1994년 베테랑 위원회를 통해 레오 듀로셔와 함께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는데, 이는 양키스 팬들이 그가 오랫동안 명예의 전당에 들지 못한 것에 대해 좌절하며 벌인 오랜 캠페인 끝에 이루어졌다. 테드 윌리엄스를 포함한 리주토의 동료들 중 일부는 그의 후보 자격을 지지했다. 윌리엄스는 한때 자신의 레드삭스가 1940년대와 1950년대 양키스의 페넌트를 대부분 차지했을 것이라고 주장하며 "만약 리주토가 유격수로 있었더라면"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리주토 자신은 "내 기록들은 소리치지 않는다. 그들은 속삭일 뿐이다"라며 겸손해했다. 1984년 베테랑 위원회가 피 위 리스를 헌액한 이후 리주토의 입성 요구는 더욱 거세졌다.
야구 통계학자 빌 제임스는 이후 자신의 저서 명예의 전당에 무슨 일이 있었는가?에서 리주토의 긴 후보 자격을 반복적으로 다루며, 그의 경력과 다른 유사한 선수들과의 비교에 여러 장을 할애했다. 제임스는 리주토의 통계적 기록이 명예의 전당 기준에 미치지 못한다고 평가했지만,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놓친 연도들을 고려해야 한다고 인정했고, 그의 선정에 대한 찬반 양론의 많은 주장을 비판했다. 그는 리주토가 훌륭한 수비수이자 좋은 타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유사한 기록을 가진 너무 많은 선수들이 있어 그의 후보 자격을 지지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 책의 마지막 문단에서는 1994년 2월 리주토가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음을 언급했다. 제임스는 또한 리주토보다 못한 선수들도 명예의 전당에 많이 있다고 지적했으며, 2001년에는 리주토를 역대 16번째 위대한 유격수로 선정하며 다른 8명의 명예의 전당 헌액자들보다 앞섰다고 평가했다.
리주토는 자신의 업적에 대해 겸손하여 "나는 명예의 전당에 들어갈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 적이 없다. 명예의 전당은 160km/h의 강속구를 던지는 투수나 홈런을 많이 치고 타점을 많이 올리는 거물들을 위한 곳이다. 항상 그래왔고, 그래야만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쿠퍼스타운에서의 헌액 연설에서 귀찮게 윙윙거리는 파리들에 대해 계속 불평하며 기억에 남을 만한 어수선한 연설을 했다. 뉴욕 타임스 칼럼니스트 아이라 버코우는 리주토의 "흉내 낼 수 없고 경이로운 이야기 탈선과 두서없는 말"을 흉내 내며 그의 연설을 묘사했다.
:"어쨌든, 연설 중 어느 지점에서 (리주토는) 19살 때 처음으로 브루클린의 집을 떠나 버지니아 주 배셋이라는 마이너리그 도시에서 유격수로 뛰러 갔던 이야기를 했는데, 그는 침대칸 없는 기차를 탔고, 처음으로 남부식 프라이드치킨을 맛보았는데 정말 맛있었고, 그것은 그가 처음으로 먹어본 것이기도 했다 -- '이봐, 화이트, 오트밀처럼 생긴 게 뭐야?' -- 그리고 그의 한때 양키스 방송 파트너였던 빌 화이트는 모든 파트너들처럼 그들의 이름을 알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는 자신이 영원히 발표하는 수많은 생일 주인공들과 좋아하는 식당 주인들의 이름은 다 알고 있었고, 그 자신도 인정하듯이 그는 종종 점수나 경기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38년의 방송 경력과 우승 양키스 팀에서 13년의 선수 경력 후에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음, 화이트는 청중 속에 서서 '그리츠'라고 말했다."
1999년 마이너리그 스태튼아일랜드 양키스는 마스코트 이름을 리주토의 이름을 따서 "스쿠터 더 홀리 카우"로 지었다. 그는 2009년 뉴저지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뉴저지주 엘리자베스에는 킨 대학교 맞은편에 그의 이름을 딴 공원이 있다.
2013년 밥 펠러 용맹상은 리주토를 제2차 세계대전 중 미국 해군에서 복무한 공로로 37명의 야구 명예의 전당 회원 중 한 명으로 기렸다.
6. Death
필립 프랜시스 리주토는 만년에 건강이 쇠퇴하다가 2007년에 영면했다.
6.1. Health Decline
2005년 리주토가 연례 쿠퍼스타운 동창회와 2006년 연례 뉴욕 양키스 올드 타이머스 데이에 불참하자 그의 건강에 대한 우려가 제기되었다. 그의 마지막 공식 석상 모습은 2006년 초였는데, 눈에 띄게 허약한 모습으로 자신의 많은 기념품을 경매에 내놓겠다고 발표했다. 2006년 9월, 리주토의 1950년 MVP 명판은 17.50 만 USD, 그의 월드 시리즈 반지 세 개는 8.48 만 USD, 그리고 씹던 껌이 붙어 있는 양키스 모자는 8190 USD에 팔렸다. 수익의 대부분은 리주토가 오랫동안 후원해 온 저지시티의 세인트 조셉 맹인 학교로 기부되었다.
2006년 9월 12일, 뉴욕 포스트는 리주토가 현재 "근육 위축과 식도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사설 재활 시설"에 있다고 보도했다. 2005년 말 WFAN 라디오와의 마지막 심층 인터뷰에서 리주토는 위 대부분을 제거하는 수술을 받았으며 의료용 스테로이드로 치료를 받고 있다고 밝혔다. 그는 야구계의 경기력 향상 약물 스캔들을 언급하며 이 주제에 대해 농담을 하기도 했다.
6.2. Passing and Commemoration
리주토는 2007년 8월 13일 잠결에 사망했는데, 이는 그가 양키스 선수로서 마지막 경기를 치른 지 51주년이 되기 3일 전이자, 미키 맨틀이 사망한 지 정확히 12년 후, 그리고 그의 90번째 생일을 한 달 조금 넘게 앞둔 시점이었다. 그는 수년 동안 건강이 쇠퇴하고 있었으며, 사망하기 몇 달 전부터 뉴저지주 웨스트 오렌지의 한 요양원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사망 당시 89세였던 리주토는 야구 명예의 전당 생존 회원 중 가장 나이가 많았다.
리주토의 사망 당시 그의 아내 코라(2010년 사망), 딸 신디 리주토, 패트리샤 리주토, 페니 리주토 예토, 아들 필 리주토 주니어, 그리고 두 명의 손녀가 생존해 있었다. 양키스는 그의 죽음에 애도를 표하며 양키 스타디움에 조기를 게양하고 남은 시즌 동안 유니폼 왼쪽 소매에 등번호 '10'이 새겨진 검은색 추모 패치를 달았다.
7. Awards and Achievements
필립 프랜시스 리주토는 선수 경력 동안 다음과 같은 주요 수상 경력과 통계적 업적을 쌓았다.
연도 | 나이 | 팀 | 리그 | 경기 | 타석 | 타수 | 득점 | 안타 | 2루타 | 3루타 | 홈런 | 타점 | 도루 | 볼넷 | 삼진 | 타율 | 출루율 | 장타율 | OPS |
---|---|---|---|---|---|---|---|---|---|---|---|---|---|---|---|---|---|---|---|
1941 | 23 | NYY | AL | 133 | 548 | 515 | 65 | 158 | 20 | 9 | 3 | 46 | 14 | 27 | 36 | .307 | .343 | .398 | .741 |
1942 | 24 | NYY | AL | 144 | 613 | 553 | 79 | 157 | 24 | 7 | 4 | 68 | 22 | 44 | 40 | .284 | .343 | .374 | .718 |
1946 | 28 | NYY | AL | 126 | 518 | 471 | 53 | 121 | 17 | 1 | 2 | 38 | 14 | 34 | 39 | .257 | .315 | .310 | .625 |
1947 | 29 | NYY | AL | 153 | 623 | 549 | 78 | 150 | 26 | 9 | 2 | 60 | 11 | 57 | 31 | .273 | .350 | .364 | .714 |
1948 | 30 | NYY | AL | 128 | 539 | 464 | 65 | 117 | 13 | 2 | 6 | 50 | 6 | 60 | 24 | .252 | .340 | .328 | .668 |
1949 | 31 | NYY | AL | 153 | 712 | 614 | 110 | 169 | 22 | 7 | 5 | 65 | 18 | 72 | 34 | .275 | .352 | .358 | .711 |
1950 | 32 | NYY | AL | 155 | 735 | 617 | 125 | 200 | 36 | 7 | 7 | 66 | 12 | 92 | 39 | .324 | .418 | .439 | .857 |
1951 | 33 | NYY | AL | 144 | 629 | 540 | 87 | 148 | 21 | 6 | 2 | 43 | 18 | 58 | 27 | .274 | .350 | .346 | .696 |
1952 | 34 | NYY | AL | 152 | 673 | 578 | 89 | 147 | 24 | 10 | 2 | 43 | 17 | 67 | 42 | .254 | .337 | .341 | .678 |
1953 | 35 | NYY | AL | 134 | 506 | 413 | 54 | 112 | 21 | 3 | 2 | 54 | 4 | 71 | 39 | .271 | .383 | .351 | .734 |
1954 | 36 | NYY | AL | 127 | 369 | 307 | 47 | 60 | 11 | 0 | 2 | 15 | 3 | 41 | 23 | .195 | .291 | .251 | .541 |
1955 | 37 | NYY | AL | 81 | 181 | 143 | 19 | 37 | 4 | 1 | 1 | 9 | 7 | 22 | 18 | .259 | .369 | .322 | .691 |
1956 | 38 | NYY | AL | 31 | 65 | 52 | 6 | 12 | 0 | 0 | 0 | 6 | 3 | 6 | 6 | .231 | .310 | .231 | .541 |
통산 | 1,661 | 6,711 | 5,816 | 877 | 1,588 | 239 | 62 | 38 | 563 | 149 | 651 | 398 | .273 | .351 | .355 | .706 |
- 아메리칸 리그 MVP: 1회 (1950년)
- 베이브 루스 어워드: 1회 (1951년)
- 올스타 출전: 5회 (1942년, 1950년 ~ 1953년)
- 스포팅 뉴스 선정 올해의 마이너리그 선수상: 1회 (1940년)
- 히칵 벨트: 1회 (1950년)
- 스포팅 뉴스 선정 메이저 리그 올해의 선수상: 1회 (1950년)
- 스포팅 뉴스 선정 메이저 리그 최고 유격수: 4회 (1949년~1952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