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피터 마이클 포크(Peter Michael Falk영어, 1927년 9월 16일 ~ 2011년 6월 23일)는 미국의 배우, 가수, 텔레비전 감독 및 프로듀서이다. 그는 NBC와 ABC에서 방영된 텔레비전 시리즈 《형사 콜롬보》에서 콜롬보 형사 역을 맡아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이 역할로 그는 4번의 프라임타임 에미상과 1번의 골든 글로브상을 수상했다. 포크는 1960년 영화 《살인 주식회사》와 1961년 영화 《주머니 속의 기적》으로 두 차례 아카데미 남우조연상 후보에 올랐으며, 1962년 드라마 《딕 파월 쇼》로 첫 에미상을 수상했다. 그는 같은 해에 아카데미상과 에미상 후보에 동시에 지명된 최초의 배우로, 이를 1961년과 1962년에 두 번 달성했다.
그는 또한 영화 제작자이자 배우, 절친한 친구인 존 카사베츠와 협력하여 《허즈밴드》(1970), 《사랑의 은율》(1974), 일레인 메이의 《마이키 & 니키》(1976) 등의 영화에 출연했다. 1996년 《TV 가이드》는 포크를 '역대 가장 위대한 텔레비전 스타 50인' 중 21위로 선정했다. 2013년에는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에 사후 헌액되었다. 말년에는 알츠하이머병으로 투병했으며, 2011년 6월 23일 83세의 나이로 캘리포니아주 비벌리힐스 자택에서 사망했다. 그의 사망 이후, 후견인 문제와 관련하여 가족의 방문권을 보장하는 '피터 포크 법'이 제정되기도 했다.
2. 초기 생애 및 교육
피터 포크는 어린 시절의 시력 문제와 이를 극복하려는 노력, 그리고 다양한 학업 경험을 통해 배우로서의 기반을 다졌다.
2.1. 출생과 가족 배경
피터 마이클 포크는 1927년 9월 16일 뉴욕주 뉴욕시 브롱크스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의류 및 잡화점 주인이었던 마이클 피터 포크였고, 어머니는 매들린 호크하우저(Madeline Hochhauser)였다. 그의 부모님은 모두 유대인이었으며, 아버지는 러시아계 유대인, 어머니는 폴란드, 체코, 헝가리계 아슈케나짐 유대인이었다. 그는 뉴욕주 웨스트체스터군 오시닝에서 성장했다.
2.2. 시력 문제와 어린 시절

포크는 세 살 때 망막모세포종으로 인해 오른쪽 눈을 수술로 제거했으며, 평생 의안을 착용하고 살았다. 이 의안은 그의 트레이드마크인 찡그린 눈의 원인이 되었다. 이러한 신체적 제약에도 불구하고, 그는 어린 시절 주로 야구와 농구 같은 팀 스포츠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1997년 잡지 《시가 아피시오나도》와의 인터뷰에서 포크는 고등학교 시절 야구 경기 중 심판의 판정에 불만을 품고 자신의 의안을 빼서 심판에게 건네며 "이걸 써봐"라고 말했다는 일화를 회상했다. 이 일화는 그가 어린 시절부터 자신의 의안을 숨기지 않고 오히려 유머로 활용하며 친구들 사이에서 인기가 많았음을 보여준다. 그의 첫 무대 출연은 12세 때 뉴욕주 북부 캠프 하이 포인트에서 공연된 《펜잔스의 해적》이었다. 당시 그의 캠프 지도자 중 한 명은 훗날 배우가 되는 로스 마틴이었다. 포크는 오시닝 고등학교를 졸업했는데, 그곳에서 그는 뛰어난 운동선수이자 졸업반 회장이었다. 그는 1945년에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2.3. 교육
고등학교 졸업 후 포크는 뉴욕 클린턴의 해밀턴 칼리지에 잠시 다녔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갈 무렵 군 복무를 시도했으나, 한쪽 눈이 없다는 이유로 거절당했다. 이후 그는 미국 상선대에 합류하여 요리사이자 식사 담당 병사로 복무했다. 1997년 포크는 이 경험에 대해 "거기서는 눈이 멀었는지 아닌지 신경 쓰지 않는다. 배에서 봐야 하는 유일한 사람은 선장뿐이다. 그리고 타이타닉의 경우, 선장도 잘 보지 못했다"고 말했다. 상선대에서 1년 반을 보낸 후, 포크는 해밀턴 칼리지로 돌아왔고, 위스콘신 대학교에도 다녔다. 그는 이후 뉴욕시의 뉴스쿨 사회연구대학교로 편입하여 1951년 문학 및 정치학 학사 학위를 취득했다.
학사 학위 취득 후, 포크는 유럽을 여행하며 유고슬라비아에서 6개월간 철도 노동자로 일했다. 뉴욕으로 돌아와 시라큐스 대학교에 등록했으나, 2006년 자서전 《단 한 가지 더》에서 그는 고등학교 졸업 후 몇 년 동안 자신이 무엇을 하고 싶은지 확신하지 못했다고 회상했다. 포크는 1953년 시라큐스 대학교 맥스웰 시민권 및 공공 문제 대학원에서 행정학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이 프로그램은 연방 정부의 공무원을 양성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포크는 자신의 회고록에서 이 직업에 "관심도 없고 소질도 없었다"고 밝혔다.
2.4. 해군 복무 및 초기 경험
군 복무를 시도했으나 시력 문제로 거절당한 후, 포크는 미국 상선대에 합류하여 요리사로 복무했다. 그는 1년 반 동안 상선대에서 일했으며, 이후 대학으로 돌아왔다. 상선대 복무 경험은 그가 CIA에 지원했을 때 거절당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상선대에서 일하는 동안 해병 요리사 및 승무원 조합에 가입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이후 그는 코네티컷주 하트퍼드에 있는 코네티컷 주 예산국에서 경영 분석가로 일했다. 1997년 포크는 하트퍼드에서의 직업을 "효율성 전문가"라고 묘사하며, 첫 출근 날 보고할 건물을 찾지 못해 지각했고, 이러한 지각 습관이 역설적으로 그를 전문 배우의 길로 이끌었다고 회상했다.
3. 연기 경력의 시작
피터 포크는 연극 무대에서부터 연기 경력을 쌓기 시작하여, 점차 영화와 텔레비전으로 활동 영역을 넓혀갔다.
3.1. 연극 활동

하트퍼드에서 일하는 동안 포크는 '마크 트웨인 매스커스'라는 지역 극단에 가입하여 《케인 호의 반란》, 《시련》, 클리포드 오데츠의 《시골뜨기 소녀》 등의 연극에 출연했다. 포크는 또한 코네티컷주 웨스트포트의 화이트 반 극장에서 연기 수업을 진행하던 에바 르 갈리엔에게서 연기를 배웠다. 포크는 르 갈리엔의 수업에 "거짓말을 해서" 들어갔다고 회상했는데, 이 수업은 전문 배우들을 위한 것이었다. 그는 매주 수요일 수업을 위해 하트퍼드에서 웨스트포트까지 운전했고, 보통 지각했다. 1997년 《시가 아피시오나도》와의 인터뷰에서 포크는 르 갈리엔이 자신에게 "젊은이, 왜 항상 늦는가?"라고 물었고, 자신이 "하트퍼드에서 운전하고 와야 합니다"라고 답하자 르 갈리엔이 "하트퍼드에서 무엇을 하는가? 그곳에는 극장이 없는데, 어떻게 연기로 생계를 유지하는가?"라고 물었다고 회상했다. 포크가 자신이 전문 배우가 아니라고 고백하자, 르 갈리엔은 엄하게 "음, 당신은 배우가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포크는 하트퍼드로 돌아와 직장을 그만두었다. 그는 르 갈리엔 그룹과 몇 달 더 함께했으며, 르 갈리엔으로부터 윌리엄 모리스 에이전시의 에이전트에게 보내는 추천서를 받았다. 1956년, 그는 예산국 직장을 그만두고 연기 경력을 추구하기 위해 그리니치 빌리지로 이주했다.
포크의 첫 뉴욕 무대 역할은 1956년 1월 3일 단 한 번의 공연으로 막을 내린 몰리에르의 《돈 후안》 오프 브로드웨이 프로덕션이었다. 포크는 두 번째 주연인 스가나렐 역을 맡았다. 그의 다음 연극 역할은 그의 경력에 훨씬 더 큰 도움이 되었다. 5월, 그는 서클 인 더 스퀘어에서 호세 킨테로가 연출하고 제이슨 로바즈가 주연을 맡은 《얼음 장수 오다》의 재공연에서 로키 피오기 역으로 출연했다.
1956년 말, 포크는 알렉산드르 오스트롭스키의 《악당의 일기》에 출연하며 브로드웨이에 데뷔했다. 같은 해 말, 그는 조지 버나드 쇼의 《성녀 조안》에서 시오반 맥케나와 함께 영국 병사 역으로 브로드웨이에 다시 출연했다. 포크는 1962년 7월 앨버니 근처의 콜로니 서머 극장에서 아놀드 슐만의 《머리의 구멍》 무대 공연을 포함한 여름 극장 프로덕션에 계속 출연했다.
1972년, 포크는 브로드웨이의 《2번가 죄수》에 출연했다. 영화 역사가 에프라임 카츠에 따르면, "그의 캐릭터들은 한쪽 눈을 잃은 결과인 그의 찡그린 시선에서 추가적인 진정성을 얻는다." 그러나 이 작품은 포크에게 무대 안팎으로 많은 스트레스를 주었다. 그는 짧은 대사를 외우는 데 어려움을 겪으며 세 줄을 외우기 위해 몇 시간을 보냈다. 다음 날 리허설에서 그는 목에 이상한 "저림"을 느끼고 이상하게 행동했다고 보고했다. 이것은 무대 감독의 주의를 끌었고, 그에게 "바륨을 복용하라"고 말했다. 나중에야 포크는 자신이 불안 발작을 겪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는 이 사건과 영화 및 텔레비전 제작에서 연기하는 것을 선호한다는 이유로 다른 연극에는 출연하지 않았다.
3.2. 초기 영화 출연


무대에서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한 연극 에이전트는 포크에게 의안 때문에 영화 연기 기회를 많이 기대하지 말라고 조언했다. 그는 컬럼비아 픽처스의 스크린 테스트에 떨어졌고, 스튜디오 사장 해리 콘은 그에게 "같은 가격에 두 눈을 가진 배우를 구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또한 《마조리 모닝스타》 영화에서 두 번째 주연 역할에 대한 유망한 인터뷰에도 불구하고 배역을 얻지 못했다. 그의 첫 영화 출연은 《에버글레이즈를 가로지르는 바람》(1958), 《더 블러디 브루드》(1959), 《프리티 보이 플로이드》(1960)에서 작은 역할이었다.
포크의 연기 경력의 전환점은 1960년 영화 《살인 주식회사》였다. 그는 1930년대 뉴욕을 공포에 떨게 했던 실존하는 살인 주식회사 갱단을 바탕으로 한 이 영화에서 살인자 에이브 렐레스의 조연으로 캐스팅되었다. 《뉴욕 타임스》의 영화 평론가 보슬리 크라우더는 이 영화를 "평범한 갱스터 영화"라고 일축하면서도, 포크의 "재미있게 사악한 연기"를 특별히 언급했다. 크라우더는 다음과 같이 썼다.
"포크 씨는 지친 듯 움직이며, 눈초리로 사람들을 쳐다보고, 말론 브란도의 씹는 껌을 빌려온 듯 말하며 살인자의 패러디처럼 보이지만, 갑자기 그의 눈이 얼어붙고 주머니에서 얼음 송곳을 꺼내 누군가의 갈비뼈에 구멍을 뚫기 시작하면 사악함이 그에게서 뿜어져 나와 절망적으로 타락한 범죄자의 느낌을 준다."
이 영화는 포크의 출세작이 되었다. 그의 자서전 《단 한 가지 더》(2006)에서 포크는 수천 명의 다른 오프 브로드웨이 배우들 중에서 이 영화에 선택된 것이 "기적"이었고, 이것이 "내 경력을 만들었으며", 이 영화가 없었다면 나중에 맡았던 다른 중요한 영화 역할들을 받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포크는 1960년 TV 시리즈 《더 위트니스》에서 렐레스 역을 다시 연기했으며, 이 영화에서의 연기로 아카데미 남우조연상 후보에 지명되었다.
1961년, 여러 차례 아카데미상을 수상한 감독 프랭크 카프라는 코미디 영화 《주머니 속의 기적》에 포크를 캐스팅했다. 이 영화는 카프라의 마지막 장편 영화였고, 그가 바라던 상업적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지만, 그는 "포크의 연기에 대해 극찬했다." 포크는 이 역할로 오스카상 후보에 지명되었다. 카프라는 자신의 자서전에서 포크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전체 제작 과정이 고통스러웠다... 피터 포크만 빼고. 그는 나의 기쁨이자 현실의 닻이었다. 그 놀라운 재능을 코미디 기법에 도입하는 것은 나의 고통, 지친 피, 그리고 글렌 포드 (영화의 주연)를 살해하고 싶은 광적인 욕구를 잊게 했다. 고맙다 피터 포크."
포크는 자신이 "배우와 연기 기술에 대해 이보다 더 큰 즐거움을 보여준 감독과 일해본 적이 없다. 관객을 대변하는 유일한 사람인 감독이 당신이 하려는 일에 잘 반응하고 있다는 것을 아는 것보다 배우에게 더 중요한 것은 없다"고 말했다. 포크는 카프라가 "컷 앤 프린트"를 외쳐 장면이 확정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장면을 다시 촬영했던 일을 회상했다. 포크가 왜 다시 촬영하고 싶냐고 묻자, 카프라는 "그가 그 장면을 너무 좋아해서 우리가 다시 하는 것을 보고 싶었다고 웃으며 말했다. 이런 지지가 어디 있겠는가!"라고 답했다.
1960년대 나머지 기간 동안 포크는 주로 조연 영화 역할과 TV 게스트 출연을 했다. 포크는 1963년의 스타들이 총출동한 서사 코미디 영화 《매드 매드 매드 매드 월드》에서 탐욕의 희생양이 되는 두 택시 운전사 중 한 명을 연기했지만, 영화의 마지막 5분의 1에만 등장한다. 그의 다른 역할로는 랫 팩 뮤지컬 코미디 《로빈과 7인의 후드》(1964)에서 가이 기스본 역을 맡아 영화의 한 곡을 불렀고, 잭 레먼과 토니 커티스가 출연한 패러디 영화 《위대한 경주》(1965)에도 출연했다.
3.3. 초기 텔레비전 출연

포크는 1957년, 훗날 "텔레비전의 황금기"로 알려진 드라마 앤솔로지 프로그램에서 처음 텔레비전에 출연했다. 1957년, 그는 《로버트 몽고메리 프레젠츠》의 한 에피소드에 출연했다. 그는 또한 《스튜디오 원》, 《크래프트 텔레비전 극장》, 《뉴욕 컨피덴셜》, 《벌거벗은 도시》, 《언터처블스》, 《건맨 윌 트래블》, 《아일랜더스》, 그리고 시리즈 주연으로 첫 여성 경찰관 역을 맡은 베벌리 갈랜드와 함께 《디코이》에도 출연했다. 포크는 1960년대 초반 텔레비전에서 종종 불쾌한 캐릭터를 연기했다. 《환상특급》 에피소드 "거울"에서 포크는 권력에 취해 거울 속에서 암살자를 보기 시작하는 편집증적인 피델 카스트로 유형의 혁명가 역으로 출연했다. 그는 또한 알프레드 히치콕의 텔레비전 시리즈 두 편에 출연했는데, 1961년 《알프레드 히치콕 프레젠츠》 에피소드에서는 죽음을 두려워하는 갱스터 역으로, 1962년 《알프레드 히치콕 아워》에서는 살인적인 복음주의자 역으로 출연했다.
1961년, 포크는 ABC의 제임스 휘트모어의 단명 시리즈 《더 로 앤 미스터 존스》의 "콜드 터키" 에피소드에서의 연기로 에미상 후보에 지명되었다. 1961년 9월 29일, 포크와 월터 매튜는 스티븐 맥널리와 로버트 할랜드가 출연한 ABC 범죄 드라마 《타겟: 더 코럽터스》의 첫 에피소드 "백만 달러 덤프"에 게스트로 출연했다. 그는 1962년 《딕 파월 쇼》에서 방영된 드라마 "토마토의 가격"으로 에미상을 수상했다.
1961년, 포크는 같은 해에 오스카상과 에미상 후보에 지명된 최초의 배우가 되는 영예를 안았다. 그는 《살인 주식회사》와 텔레비전 프로그램 《더 로 앤 미스터 존스》에서의 조연 역할로 지명되었다. 놀랍게도, 포크는 1962년에 이 이중 지명을 반복하여, 《주머니 속의 기적》에서의 조연 역할과 《딕 파월 쇼》의 에피소드 "토마토의 가격"에서의 주연 배우 역할로 다시 지명되었고, 이로 인해 에미상을 수상했다.
1963년, 포크와 토미 샌즈는 ABC의 《왜건 트레인》의 "거스 모건 이야기"에 출연하여 철도 노선에 대해 의견이 다른 형제 역을 맡았다. 포크는 "거스"라는 제목의 역할을 맡았고, 샌즈는 그의 남동생 에단 모건 역을 맡았다. 에단이 산에서 왜건 마스터 존 매킨타이어가 연기한 크리스 헤일을 실수로 쏜 후, 거스는 헤일을 구해야 할지 아니면 (산소 부족으로 고통받는) 동생을 구해야 할지 결정해야 했다. 이 에피소드는 역경 속에서 자신의 생명과 동생의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 한 남자가 얼마나 멀리까지 인내할 것인지를 탐구하는 것으로 기억된다.
1960년대 초반에 많은 영화 및 텔레비전 역할을 맡았던 포크의 첫 텔레비전 시리즈 주연은 CBS의 《오브라이언의 재판》이었다. 이 쇼는 1965년부터 1966년까지 방영되었으며, 22개의 에피소드에서 포크는 미스터리를 해결하면서 의뢰인을 변호하는 셰익스피어를 인용하는 변호사 역을 맡았다. 1966년, 그는 또한 로버트 굴렛과 함께 텔레비전 제작된 《브리가둔》에도 공동 출연했다.
1971년, 피에르 코세트는 포크의 도움을 받아 텔레비전에서 첫 그래미상 시상식을 제작했다. 코세트는 자신의 자서전에서 "하지만 나에게 가장 큰 의미가 있었던 것은 피터 포크가 나를 구해줬다는 사실이다. 나는 쇼 비즈니스를 사랑하고, 피터 포크를 사랑한다"고 썼다.
4. 《형사 콜롬보》에서의 역할
피터 포크는 《형사 콜롬보》 시리즈의 콜롬보 형사 역을 통해 전 세계적인 스타로 발돋움했으며, 이 캐릭터는 그의 연기 경력에서 가장 상징적인 역할로 남아있다.
4.1. 캐릭터 및 시리즈 개요
포크는 1960년대와 1970년대에 수많은 다른 텔레비전 역할에 출연했지만, "모두가 가장 좋아하는 지저분한 텔레비전 형사"인 텔레비전 시리즈 《형사 콜롬보》의 주연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그의 캐릭터는 "한 가지만 더"라는 캐치프레이즈로 유명하며, 낡고 겉으로는 멍해 보이는 경찰 형사로, 푸조 403을 운전했다. 콜롬보 형사는 1968년 영화 《처방: 살인》에 처음 등장했다. 《형사 콜롬보》는 윌리엄 링크와 리처드 레빈슨이 만들었다. 이 쇼는 역전 추리물로 알려진 유형으로, 일반적으로 초반에 살인자를 공개한 다음, 로스앤젤레스 살인 형사가 어떻게 범죄를 해결하는지 보여주었다. 포크는 영화 역사가이자 작가인 데이비드 팬틀에게 자신의 역할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콜롬보에게는 진정한 안개 같은 면이 있다. 그것은 공중에 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그는 주의가 산만해질 수 있다... 콜롬보는 거꾸로 된 셜록 홈즈다. 홈즈는 목이 길었고, 콜롬보는 목이 없다. 홈즈는 파이프를 피웠고, 콜롬보는 하루에 여섯 개의 시가를 씹는다."
텔레비전 평론가 벤 포크(피터 포크와는 무관)는 포크가 "고통스러운 고양이와 쥐의 추적 끝에 항상 범인을 잡는 상징적인 경찰관을 만들었다"고 덧붙였다. 그는 또한 이 캐릭터에 대한 아이디어가 "도스토옙스키의 소설 《죄와 벌》에 나오는 끈질긴 경찰 조사관 포르피리 페트로비치에게서 영감을 받은 것 같다"고 언급했다.
피터 포크는 콜롬보 캐릭터를 분석하며 자신의 성격과 콜롬보의 성격 사이의 상관관계를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나는 처녀자리 유대인이고, 그것은 내가 강박적인 철저함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대부분의 세부 사항을 얻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모든 세부 사항을 얻는 것이 필요하다. 나는 완벽주의자라는 비난을 받아왔다. 루 와서먼 (유니버설 스튜디오 사장)이 포크가 완벽주의자라고 말했을 때, 그것이 애정에서 나온 것인지 아니면 내가 엄청난 골칫거리라고 느꼈기 때문인지는 모르겠다."
포크는 "일반적인 놀라움"과 함께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이 쇼는 전 세계에 방영된다. 나는 텔레비전이 한 대밖에 없는 아프리카의 작은 마을에 가본 적이 있는데, 어린 아이들이 나에게 달려와 '콜롬보, 콜롬보!'라고 외쳤다." 가수 조니 캐시는 한 에피소드("백조의 노래")에 출연했던 것을 회상하며, 자신이 경험 많은 배우는 아니었지만 "피터 포크는 나에게 잘해줬다. 나는 드라마틱한 역할을 소화하는 데 전혀 자신감이 없었는데, 그는 매일 모든 면에서 작은 도움을 주었다"고 자서전에 썼다.
시리즈의 첫 번째 에피소드는 1971년 24세의 스티븐 스필버그가 그의 초기 감독 작업 중 하나로 연출했다. 포크는 스필버그의 전기 작가 조셉 맥브라이드에게 그 에피소드를 회상했다.
"솔직히 말해서, 우리는 초기에 운이 좋았다. 1971년 우리의 데뷔 에피소드는 스티븐 스필버그라는 젊은 친구가 감독했다. 나는 프로듀서인 링크와 레빈슨에게 '이 친구는 콜롬보에게 너무 아깝다'고 말했다... 스티븐은 길 건너편에서 긴 렌즈로 나를 촬영하고 있었다. 그것은 20년 전에는 흔치 않은 일이었다. 그것이 배우로서 나에게 준 편안함은 물론, 예술적으로도 훌륭한 모습이었다. 음, 그것은 그가 평범한 감독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줬다."
콜롬보 캐릭터는 이전에 1960년 텔레비전 에피소드 《쉐비 미스터리 쇼》("충분한 밧줄")에서 버트 프리드가, 그리고 브로드웨이에서 토마스 미첼이 연기한 바 있다. 포크는 1968년 TV 영화 《처방: 살인》과 1970년 시리즈 파일럿 《죽은 자를 위한 몸값》에서 처음 콜롬보를 연기했다. 1971년부터 1978년까지 《형사 콜롬보》는 NBC 미스터리 영화의 일부로 NBC에서 정기적으로 방영되었다. 모든 에피소드는 90분 또는 120분 슬롯(광고 포함)의 TV 영화 길이였다. 1989년, 이 쇼는 ABC에서 덜 빈번한 TV 영화 시리즈 형태로 돌아왔고, 여전히 포크가 주연을 맡아 2003년까지 방영되었다. 포크는 콜롬보 역할로 4개의 에미상을 수상했다.
《형사 콜롬보》는 너무 인기가 많아서 공동 제작자 윌리엄 링크는 포크가 콜롬보로 자신을 그린 그림을 포함하는 단편 소설 시리즈 《콜롬보 컬렉션》(크리펜 & 랜드루, 2010)을 출판했는데, 표지에는 앨 허쉬펠드의 포크/콜롬보 캐리커처가 실려 있다.
콜롬보 형사는 '도그(Dog)'라는 이름의 바셋 하운드를 키운다. 원래 피터 포크는 이 쇼에 '이미 충분한 장치가 있다'고 생각하여 도그를 출연시키지 않으려 했지만, 둘이 만난 후 포크는 도그가 "정확히 콜롬보가 키울 만한 개"라고 말했고, 그래서 도그는 쇼에 추가되어 1972년 "검은 연습곡"에서 첫 등장했다.
콜롬보의 의상은 피터 포크가 직접 제공했다. 그의 낡은 레인코트와 발목까지 오는 신발을 포함하여 모두 그의 개인 옷이었다. 레인코트는 《처방: 살인》에서 처음 등장했다. 포크는 종종 자신의 캐릭터의 특이한 행동(주머니를 뒤져 증거를 찾다가 식료품 목록을 발견하거나, 연필을 빌려달라고 하거나, 용의자와의 대화 중 극적인 순간에 방의 관련 없는 것에 주의가 산만해지는 등)을 애드리브로 연기하여 동료 배우들의 균형을 잃게 만들었다. 그는 이것이 콜롬보의 기행에 대한 그들의 혼란스럽고 참을성 없는 반응을 더 진정성 있게 만드는 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다. 리처드 레빈슨에 따르면, "한 가지만 더"라는 캐치프레이즈는 그와 링크가 연극을 쓸 때 고안되었다. "장면이 너무 짧았고, 콜롬보는 이미 퇴장한 상태였다. 우리는 장면을 다시 타이핑하기에는 너무 게을렀고, 그래서 그가 다시 돌아와서 '아, 한 가지만 더...'라고 말하게 했다. 그것은 결코 계획된 것이 아니었다."
《형사 콜롬보》에는 비공식적인 시그니처 곡으로 동요 "이 늙은 남자"가 있었다. 이 곡은 1973년 에피소드 "폭풍 속의 낡은 항구"에서 소개되었고, 형사는 이후 영화에서 종종 이 곡을 흥얼거리거나 휘파람으로 불렀다. 피터 포크는 자신이 이 멜로디를 즐겼고, 어느 날 그것이 그의 캐릭터의 일부가 되었다고 인정했다. 이 곡은 시리즈의 30년 동안 오프닝 및 엔딩 크레딧을 포함하여 다양한 악보 편곡에도 사용되었다. 이 곡의 한 버전은 쇼의 작곡가 중 한 명인 패트릭 윌리엄스가 "콜롬보"라는 제목으로 만들었다.
사망하기 몇 년 전, 포크는 콜롬보 역할로 돌아오는 것에 관심을 표명했다. 2007년, 그는 마지막 콜롬보 에피소드인 "콜롬보: 악을 듣지 마라"의 대본을 선택했다고 말했다. 이 대본은 "콜롬보의 마지막 사건"으로 이름이 변경되었다. ABC는 이 프로젝트를 거절했다. 이에 대한 응답으로, 시리즈 제작자들은 이 프로젝트를 해외 제작사에 팔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포크는 2007년 말 치매 진단을 받았다.
피터 포크는 1972년, 1975년, 1976년, 1990년에 콜롬보 형사 역으로 4개의 에미상을 수상했다. 포크는 1971년 "살인을 위한 청사진"이라는 단 하나의 에피소드를 감독했지만, 그와 존 카사베츠가 1972년 "검은 연습곡"의 감독 업무를 주로 담당했다는 소문이 있다. 포크가 가장 좋아했던 《형사 콜롬보》 에피소드는 "폭풍 속의 낡은 항구", "잊혀진 여인", "이제 그를 본다", "정체성 위기"였다. 포크는 1976년 콜롬보 시즌 6로 돌아왔을 때 에피소드당 30.00 만 USD라는 기록적인 수입을 올렸다는 소문이 있었다. 이 수입은 1989년 시리즈가 다시 시작되었을 때 에피소드당 60.00 만 USD로 두 배가 되었다. 1997년, "책에 의한 살인"은 《TV 가이드》의 '역대 가장 위대한 에피소드 100선' 목록에서 16위에 올랐다. 2년 후, 이 잡지는 콜롬보 형사를 '역대 가장 위대한 TV 캐릭터 50인' 목록에서 7위에 올렸다.
5. 주요 영화 및 TV 활동
피터 포크는 《형사 콜롬보》 외에도 다양한 영화와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며 폭넓은 연기 스펙트럼을 선보였다.
5.1. 존 카사베츠와의 협업
포크는 독립 영화 감독 존 카사베츠의 절친한 친구였으며, 그의 영화 《허즈밴드》, 《사랑의 은율》, 그리고 《오프닝 나이트》의 마지막 부분에 카메오 출연했다. 카사베츠는 1972년 《형사 콜롬보》 에피소드 "검은 연습곡"에 게스트로 출연했으며, 포크는 일레인 메이의 영화 《마이키 & 니키》(1976)에서 카사베츠와 공동 주연을 맡았다. 포크는 카사베츠와 함께 작업한 경험을 설명하며, 특히 그의 연출 전략을 기억했다. "카메라가 돌아가는지 배우가 모를 때 배우를 촬영하는 것."
"카메라가 언제 돌아갈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멈춰. 컷. 다시 시작해'라는 말은 결코 없었다. 존은 장면 중간에 걸어 들어와 이야기했고, 당신은 깨닫지 못했지만 카메라는 계속 돌아갔다. 그래서 나는 그가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전혀 몰랐다. [웃음] 하지만 그는 궁극적으로 나를, 그리고 모든 배우를, 내가 함께 일했던 그 누구보다도 카메라를 덜 의식하게 만들었다."
5.2. 기타 영화 출연
1978년, 포크는 코미디 TV 쇼 《딘 마틴 셀레브리티 로스트》에 출연하여 콜롬보 캐릭터를 연기했으며, 프랭크 시나트라가 그날 밤의 희생자였다. 감독 윌리엄 프리드킨은 자신의 영화 《브링크스》(1978)에서 포크의 역할에 대해 "피터는 코미디에서 드라마까지 폭넓은 연기 스펙트럼을 가지고 있다. 그는 당신의 마음을 아프게 할 수도 있고, 웃게 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포크는 코미디 영화 《인-로스》에서 의심스러운 정신 상태의 전 CIA 요원 역을 포함하여 계속해서 영화에 출연했다. 감독 아서 힐러는 인터뷰에서 "이 영화는 앨런 아킨과 피터 포크가 함께 일하고 싶어 했기 때문에 시작되었다. 그들은 워너 브라더스에 가서 '우리가 영화를 하고 싶다'고 말했고, 워너는 좋다고 했고... 그래서 《인-로스》가 나왔다... 내가 만든 모든 영화 중에서 《인-로스》가 가장 많은 코멘트를 받는다"고 말했다. 영화 평론가 로저 이버트는 이 영화를 나중에 리메이크된 영화와 비교했다.
"이전 영화의 피터 포크와 앨런 아킨 대 이번에는 마이클 더글러스와 앨버트 브룩스... 그러나 이전 영화의 케미스트리가 더 좋다. 포크는 그의 무표정한 강사 모드로 들어가 천천히 참을성 있게 완전히 말도 안 되는 소리처럼 들리는 것들을 설명한다. 아킨은 자신이 미치광이의 손에 있다는 것을 의심할 만한 좋은 이유를 개발한다."
포크는 《위대한 머펫 대소동》, 《프린세스 브라이드》, 《명탐정 등장》, 《싸구려 탐정》, 《바이브스》, 《메이드》, 그리고 빔 벤더스의 1987년 독일어 영화 《베를린 천사의 시》와 1993년 속편 《멀리, 너무나 가까이!》에 출연했다. 《베를린 천사의 시》에서 포크는 자신을 반쯤 허구화한 버전, 즉 한때 천사였지만 지구에서의 삶을 관찰하는 것에 환멸을 느끼고 불멸을 포기한 유명한 미국 배우 역을 맡았다. 포크는 이 역할을 "내가 제안받은 것 중 가장 미친 짓"이라고 묘사했지만, 이 영화에서의 조연 연기로 비평가들의 찬사를 받았다. 일본에서는 그가 베를린 거리를 걸을 때 사람들이 "콜롬보다, 콜롬보다"라고 외치는 장면이 특히 인상적이었다고 언급된다.
1998년, 포크는 아서 밀러의 《미스터 피터스의 연결》의 오프 브로드웨이 프로덕션에 출연하기 위해 뉴욕 무대로 돌아왔다. 그의 이전 무대 작업으로는 1986년 보스턴/로스앤젤레스 프로덕션인 데이비드 마멧의 수상작 《글렌게리 글렌 로스》에서 음침한 부동산 판매원 셸리 "더 머신" 레바인 역이 있다.
5.3. 기타 TV 프로그램 출연
포크는 세 편의 홀리데이 텔레비전 영화 시리즈에 출연했다. 《크리스마스 없는 마을》(2001), 《존 크리스마스 찾기》(2003), 《천사들이 마을에 올 때》(2004)에서 그는 맥스라는 기이한 수호천사 역을 맡아 변장과 속임수를 사용하여 자신의 보호자들을 올바른 길로 이끌었다. 2005년, 그는 《내 가족에 관한 것》에 출연했다. 영화 평론가 로저 이버트는 다른 배우들의 대부분에 깊은 인상을 받지 못했지만, 그의 리뷰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 우리는 피터 포크가 얼마나 따뜻하고 매력적인 배우인지 다시 한번 발견한다. 이 영화를 추천할 수는 없지만, 포크를 보게 된 것에 감사할 수 있다." 2007년, 포크는 니콜라스 케이지와 함께 스릴러 영화 《넥스트》에 출연했다.
일본 소스에서는 그가 1965년 TV 시리즈 《오브라이언의 재판》에서 영리한 변호사 역을 맡았고, 이듬해에는 이 시리즈의 극장판도 제작되어 일본에서도 그의 얼굴이 알려지기 시작했다고 언급한다. 1968년에는 《시카고 시티 이야기》에 주연으로 출연하여 살인 청부업자 생활을 청산하고 새로운 삶을 찾아 나서는 중년 남성을 연기했다. 1981년의 《캘리포니아 돌즈》와 1988년의 《피터 포크의 사랑에 빠진 도둑》도 그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1990년대부터 2000년대에는 가족 드라마에서 고집스럽지만 인간미 넘치는 가장 역할을 맡아 대중에게 친숙해졌다. 2003년의 《와일더 데이즈》와 《25년째의 해피 크리스마스》에서는 각각 고집스러운 캐릭터와 천사라는 어려운 역할을 소화했다. 2005년 개봉한 로맨틱 코미디 《47년째의 프로포즈》에서는 78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첫 본격적인 누드 장면을 선보여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의 자서전 《단 한 가지 더》는 2006년에 출판되었다.
6. 개인적인 삶
피터 포크는 두 번의 결혼과 가족 관계, 그리고 배우 활동 외에 그림과 체스에 대한 열정 등 다채로운 개인적인 삶을 살았다.
6.1. 결혼 및 가족
포크는 시라큐스 대학교에서 만난 앨리스 메이요와 1960년 4월 17일에 결혼했다. 부부는 캐서린(훗날 사립 탐정이 됨)과 재키 두 딸을 입양했다. 포크와 그의 아내는 1976년에 이혼했다. 1977년 12월 7일, 그는 배우 셰라 대니즈와 재혼했다. 셰라 대니즈는 다른 어떤 여배우보다도 《형사 콜롬보》 시리즈에 더 많이 게스트 출연했다. 포크에게는 친자녀가 없었으며, 배우 사만다 포크는 그의 조카이다.
6.2. 예술 활동 및 취미

포크는 뛰어난 예술가였으며, 2006년 10월에는 버틀러 미국 미술 연구소에서 그의 드로잉 전시회를 열었다. 그는 뉴욕 아트 스튜던츠 리그에서 수년 동안 수업을 들었다. 그는 주로 정물화나 인물화를 그렸지만, 대상을 대담하게 데포르메한 현대 미술풍의 그림도 그리는 등 다양한 레퍼토리를 가지고 있었다. 그의 수많은 스케치들은 공개되었고, 일본에서도 여러 차례 개인전이 열렸다. 영화에서도 그의 자화상이나 포크 자신이 스케치를 그리는 장면이 등장하기도 했다.
포크는 체스 애호가였으며, 1972년 11월 산타모니카에서 열린 아메리칸 오픈과 1983년 8월 패서디나에서 열린 US 오픈의 관중으로 참여했다.
그의 회고록 《단 한 가지 더》는 2006년 8월 23일 캐롤 & 그래프 퍼블리셔스에서 출판되었다.
7. 건강 문제 및 말년
피터 포크는 말년에 알츠하이머병으로 고통받았으며, 이로 인해 발생한 후견인 문제는 '피터 포크 법' 제정의 계기가 되었다.
7.1. 건강 악화 및 후견인 문제
2008년 12월, 포크가 알츠하이머병 진단을 받았다는 보도가 나왔다. 2009년 6월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이틀간의 후견인 재판에서 포크의 개인 주치의 스티븐 리드 박사는 2007년 일련의 치과 수술 이후 그가 급격히 치매에 빠졌다고 보고했다. 리드 박사는 포크의 상태가 마취 때문인지 아니면 수술에 대한 다른 반응 때문인지는 불분명하다고 말했다. 셰라 대니즈 포크가 그의 남편의 후견인으로 지정되었다.
7.2. 피터 포크 법
포크의 딸 캐서린에 따르면, 그의 두 번째 아내 셰라 대니즈(그의 후견인이기도 했다)는 일부 가족 구성원들이 그를 방문하는 것을 막았고, 그의 상태의 주요 변화를 알리지 않았으며, 그의 사망 및 장례 절차도 알리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캐서린은 2015년에 구어적으로 "피터 포크 법"이라고 불리는 법안의 통과를 촉구했다. 이 새로운 법은 뉴욕주에서 부모의 심각한 의료 및 임종 관련 소식을 접하거나 부모와 연락하는 것이 차단된 자녀들을 보호하기 위해 통과되었다. 이 법은 무능력자의 보호자 또는 후견인이 준수해야 할 방문권 및 사망 통지에 관한 지침을 제공한다.
2020년 기준으로 15개 이상의 주에서 이러한 법률을 제정했다. 이 법안을 도입하면서 뉴욕주 상원의원 존 드프란시스코는 "모든 잘못에는 구제책이 있어야 한다. 이 법안은 노약하고 병약한 부모에 대한 정보를 받는 것이 차단된 자녀들에게 구제책을 제공한다. 또한 법원을 통해 부모와의 방문권을 얻을 수 있는 길을 열어준다"고 말했다.
8. 사망 및 추모
피터 포크는 알츠하이머병 합병증으로 사망했으며, 그의 죽음은 많은 동료와 지인들의 추모와 함께 그의 연기 유산을 기리는 계기가 되었다.
8.1. 사망 과정 및 원인
피터 포크는 2011년 6월 23일 저녁, 비벌리힐스 록스버리 드라이브에 있는 그의 오랜 자택에서 8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사망 원인은 폐렴과 알츠하이머병의 합병증이었다. 그의 딸들은 그의 "지혜와 유머"를 기억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의 웨스트우드 빌리지 메모리얼 파크 묘지에 안장되었다. 그의 묘비명에는 "나는 여기에 없다, 나는 셰라와 함께 집에 있다"고 적혀 있다.
8.2. 추모 및 유산
그의 사망은 조나 힐과 스티븐 프라이를 포함한 많은 영화계 유명인사들의 추모로 이어졌다. 스티븐 스필버그는 "내 경력의 초기 단계에서 그에게서 다른 누구보다도 연기에 대해 더 많이 배웠다"고 말했다. 롭 라이너는 "그는 완전히 독특한 배우였다"고 말하며, 포크와 앨런 아킨이 《인-로스》에서 함께 한 작업은 "우리가 스크린에서 본 가장 뛰어난 코미디 짝 중 하나"라고 덧붙였다.
피터 포크는 2013년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에 사후 헌액되었는데, 이는 1991년에 이미 헌액이 결정되었지만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마지막 영화는 2009년에 출연한 코미디 영화 《American Cowslip영어》이었으며, 이 영화는 일본에서 미공개 및 비소프트화 작품이다.
9. 수상 및 영예
피터 포크는 그의 뛰어난 연기 경력을 통해 수많은 상과 영예를 얻었으며, 특히 《형사 콜롬보》에서의 역할로 여러 차례 주요 시상식에서 수상했다.
9.1. 주요 영화 및 TV 시상식 수상
연도 | 시상식 | 부문 | 작품 | 결과 |
---|---|---|---|---|
아카데미상 | ||||
1960 | 제33회 | 남우조연상 | 《살인 주식회사》 | 후보 |
1961 | 제34회 | 남우조연상 | 《주머니 속의 기적》 | 후보 |
에미상 | ||||
프라임타임 에미상 | ||||
1961 | 제13회 | 드라마 시리즈 남우조연상 | 《더 로 앤 미스터 존스》 (에피소드: "콜드 터키") | 후보 |
1962 | 제14회 | 주연 배우 단일 연기상 | 《딕 파월 쇼》 (에피소드: "토마토의 가격") | 수상 |
1972 | 제24회 | 드라마 시리즈 남우주연상 | 《형사 콜롬보》 | 수상 |
1973 | 제25회 | 드라마 시리즈 남우주연상 | 《형사 콜롬보》 | 후보 |
1974 | 제26회 | 리미티드 시리즈 남우주연상 | 《형사 콜롬보》 | 후보 |
1975 | 제27회 | 리미티드 시리즈 남우주연상 | 《형사 콜롬보》 | 수상 |
1976 | 제28회 | 드라마 시리즈 남우주연상 | 《형사 콜롬보》 | 수상 |
1977 | 제29회 | 드라마 시리즈 남우주연상 | 《형사 콜롬보》 | 후보 |
1978 | 제30회 | 드라마 시리즈 남우주연상 | 《형사 콜롬보》 | 후보 |
1990 | 제42회 | 드라마 시리즈 남우주연상 | 《형사 콜롬보》 | 수상 |
1991 | 제43회 | 드라마 시리즈 남우주연상 | 《형사 콜롬보》 | 후보 |
1994 | 제46회 | 드라마 시리즈 남우주연상 | 《형사 콜롬보》 | 후보 |
데이타임 에미상 | ||||
2001 | 제28회 | 아동 스페셜 우수 연기상 | 《여름의 폭풍》 | 후보 |
골든 글로브상 | ||||
1961 | 제19회 | 가장 유망한 신인 배우 - 남자 | 《살인 주식회사》 | 후보 |
1971 | 제29회 | 텔레비전 시리즈 드라마 부문 남우주연상 | 《형사 콜롬보》 | 후보 |
1972 | 제30회 | 텔레비전 시리즈 드라마 부문 남우주연상 | 《형사 콜롬보》 | 수상 |
1973 | 제31회 | 텔레비전 시리즈 드라마 부문 남우주연상 | 《형사 콜롬보》 | 후보 |
1974 | 제32회 | 텔레비전 시리즈 드라마 부문 남우주연상 | 《형사 콜롬보》 | 후보 |
1975 | 제33회 | 텔레비전 시리즈 드라마 부문 남우주연상 | 《형사 콜롬보》 | 후보 |
1977 | 제35회 | 텔레비전 시리즈 드라마 부문 남우주연상 | 《형사 콜롬보》 | 후보 |
1990 | 제48회 | 텔레비전 시리즈 드라마 부문 남우주연상 | 《형사 콜롬보》 | 후보 |
1991 | 제49회 | 미니시리즈 또는 텔레비전 영화 부문 남우주연상 | 《콜롬보와 록스타 살인 사건》 | 후보 |
1993 | 제51회 | 미니시리즈 또는 텔레비전 영화 부문 남우주연상 | 《콜롬보: 게임의 모든 것》 | 후보 |
9.2. 기타 상 및 헌사
연도 | 시상식 | 부문 | 작품 | 결과 |
---|---|---|---|---|
2005 | AARP 무비 포 그로운업스 어워드 | 베스트 성인 로맨스 | 《내 가족에 관한 것》 | 후보 |
1976 | 밤비상 | 국제 TV 시리즈 | 《형사 콜롬보》 | 수상 |
1993 | 수상 | |||
1975 | 브라보 오토 | 최고의 남자 TV 스타 | - | 수상 |
2004 | 다비드 디 도나텔로상 | 황금 접시 | - | 수상 |
2005 | 플로리다 영화제 | 평생 공로상 | - | 수상 |
1972 | 골든 애플 어워드 | 올해의 남자 스타 | - | 수상 |
1976 | 골데네 카메라 | 최고의 독일 배우 | 《형사 콜롬보》 | 수상 |
1974 | 헤이스티 푸딩 시어트리컬스 | 올해의 남자 | - | 수상 |
1962 | 로렐 어워드 | 최고의 남자 신인 | - | 수상 |
2003 | 메소드 페스트 독립 영화제 | 평생 공로상 | - | 수상 |
2006 | 밀라노 영화제 | 최우수 배우 | 《내 가족에 관한 것》 | 수상 (공동 수상: 조쉬 하트넷 《럭키 넘버 슬레븐》) |
2006 | 온라인 영화 & 텔레비전 협회 어워드 | 텔레비전 명예의 전당: 배우 | - | 헌액 |
2021 | 텔레비전 명예의 전당: 캐릭터 | 콜롬보 형사 (《형사 콜롬보》) | 헌액 | |
1989 | 제16회 | 피플스 초이스 어워드 | 가장 좋아하는 남자 TV 연기자 | 후보 |
1990 | 제17회 | 후보 | ||
1974 | 포토플레이 어워드 | 가장 좋아하는 남자 스타 | - | 수상 |
1976 | 가장 좋아하는 영화 | 《명탐정 등장》 | 후보 | |
2002 | 2002년 | 최악의 남우조연상 | 《언디스퓨티드》 | 후보 |
2005 | TV 랜드 어워드 | 가장 좋아하는 "캐주얼 프라이데이" 경찰 | 《형사 콜롬보》 | 수상 |
9.3. 기타 영예
연도 | 영예 | 부문 | 결과 |
---|---|---|---|
2013 |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 | 텔레비전 | 헌액 |
10. 작품 목록
피터 포크는 그의 경력 전반에 걸쳐 다양한 영화, 텔레비전, 연극 작품에 출연하며 폭넓은 연기 스펙트럼을 선보였다.
10.1. 영화
연도 | 제목 | 역할 | 비고 |
---|---|---|---|
1958 | 《에버글레이즈를 가로지르는 바람》 | 작가 | 영화 데뷔 |
1959 | 《더 블러디 브루드》 | 니코 | |
1960 | 《프리티 보이 플로이드》 | 쇼티 월터스 | |
1960 | 《살인 주식회사》 | 에이브 렐레스 | 아카데미상 후보 |
1960 | 《퍼플 리프의 비밀》 | 톰 웨버 | |
1961 | 《주머니 속의 기적》 | 조이 보이 | 아카데미상 후보 |
1962 | 《프레셔 포인트》 | 젊은 정신과 의사 | |
1963 | 《발코니》 | 경찰서장 | |
1963 | 《매드 매드 매드 매드 월드》 | 세 번째 택시 운전사 | |
1964 | 《로빈과 7인의 후드》 | 가이 기스본 | |
1964 | 《공격과 후퇴》 | 의무병 대위 | |
1965 | 《위대한 경주》 | 막시밀리안 민 | |
1966 | 《페넬로페》 | 호레이쇼 빅스비 중위 | |
1967 | 《러브》 | 밀트 맨빌 | |
1967 | 《너무 많은 도둑들》 | 대니 | |
1968 | 《안치오》 | 잭 라비노프 상병 | |
1969 | 《기관총 맥케인》 | 찰리 아다모 | |
1969 | 《캐슬 킵》 | 로시 병장 | |
1970 | 《작전명 스나푸》 | 피터 파니 | |
1970 | 《허즈밴드》 | 아치 블랙 | |
1974 | 《사랑의 은율》 | 닉 롱게티 | |
1976 | 《그리핀과 피닉스》 | 제프리 그리핀 | |
1976 | 《명탐정 등장》 | 샘 다이아몬드 | |
1976 | 《마이키 & 니키》 | 마이키 | |
1977 | 《오프닝 나이트》 | 본인 | 카메오 출연, 크레딧 미포함 |
1978 | 《싸구려 탐정》 | 루 페킨파우 | |
1978 | 《브링크스》 | 토니 피노 | |
1978 | 《겁먹은 채로!》 | 본인 - 내레이터 | |
1979 | 《인-로스》 | 빈센트 J. 리카르도 | |
1981 | 《위대한 머펫 대소동》 | 부랑자 | |
1981 | 《...모든 대리석》 | 해리 시어스 | |
1986 | 《빅 트러블》 | 스티브 리키 | |
1987 | 《베를린 천사의 시》 | 본인 | |
1987 | 《해피 뉴 이어》 | 닉 | |
1987 | 《프린세스 브라이드》 | 할아버지 / 내레이터 | |
1988 | 《바이브스》 | 해리 부스카푸스코 | |
1989 | 《쿠키》 | 도미닉 "디노" 카피스코 | |
1990 | 《인 더 스피릿》 | 로저 플랜 | |
1990 | 《내일 듣기》 | 페드로 카마이클 | |
1992 | 《멀리, 너무나 가까이!》 | 본인 | |
1992 | 《플레이어》 | 본인 | |
1995 | 《룸메이츠》 | 로키 홀즈첵 | |
1995 | 《캅스 앤 로버츠》 | 살바토레 산티니 | |
1998 | 《머니 킹스》 | 비니 글린 | |
2000 | 《레이크보트》 | 피어맨 | |
2000 | 《웃음의 적들》 | 폴의 아버지 | |
2001 | 《휴버트의 뇌》 | 톰슨 | 목소리 |
2001 | 《메이드》 | 맥스 | |
2001 | 《코키 로마노》 | 프랜시스 A. "팝스" 로마노 | |
2002 | 《쓰리 데이즈 오브 레인》 | 왈도 | |
2002 | 《언디스퓨티드》 | 멘디 립스타인 | |
2004 | 《샤크 테일》 | 돈 이라 파인버그 | 목소리, 카메오 |
2005 | 《체킹 아웃》 | 모리스 애플바움 | |
2005 | 《내 가족에 관한 것》 | 샘 클라인만 | |
2007 | 《쓰리 데이즈 투 베이거스》 | 거스 '피치' 피츠제럴드 | |
2007 | 《넥스트》 | 어브 | |
2009 | 《American Cowslip영어》 | 랜돌프 신부 | 마지막 영화 출연 |
10.2. 텔레비전
연도 | 제목 | 역할 | 비고 |
---|---|---|---|
1957 | 《로버트 몽고메리 프레젠츠》 | 시즌 8 에피소드 36: "귀환 방문" | |
1957 | 《스튜디오 원》 | 카르멘의 조수 | 시즌 9 에피소드 35: "어머니의 조각" |
1957 | 《스튜디오 원》 | 잭 | 시즌 9 에피소드 45: "루디" |
1957 | 《크래프트 서스펜스 극장》 | 레이더 조작원 / 이지 | 시즌 10 에피소드 26: "충돌" |
1957-59 | 《카메라 스리》 | 스탕달 / 돈 추초 | 8개 에피소드 |
1958 | 《벌거벗은 도시》 | 갈취범 | 시즌 1 에피소드 11: "무당벌레, 무당벌레" |
1958 | 《크래프트 서스펜스 극장》 | 이지 | 시즌 11 에피소드 44: "밤의 비명" |
1958 | 《디코이》 | 프레드 다나 | 시즌 1 에피소드 37: "컴백" |
1959 | 《옴니버스》 | 찰리 | 시즌 7 에피소드 13: "노르망디에의 이상한 시련" |
1959 | 《브레너》 | 프레드 게인스 | 시즌 1 에피소드 4: "사각지대" |
1959 | 《데드라인》 | 앨 백스 | 시즌 1 에피소드 11: "인간의 폭풍" |
1959 | 《뉴욕 컨피덴셜》 | 피트 | 시즌 1 에피소드 11: "어디서도 오지 않은 소녀" |
1959 | 《플레이 오브 더 위크》 | 메스티조 | 시즌 1 에피소드 2: "권력과 영광" |
1960 | 《플레이 오브 더 위크》 | 메스티조 | 시즌 1 에피소드 14: "황제의 옷" |
1960 | 《벌거벗은 도시》 | 김피 (크레딧 미포함) | 시즌 2 에피소드 1: "왕자들의 죽음" |
1960 | 《아일랜더스》 | 후커 | 시즌 1 에피소드 6: "인질 섬" |
1960 | 《건맨 윌 트래블》 | 월러, 도박꾼 | 시즌 4 에피소드 9: "포커 악마" |
1960 | 《더 위트니스》 | 에이브 렐레스 | 시즌 1 에피소드 11: "키드 트위스트" |
1960 | 《언터처블스》 | 듀크 멀렌 | 시즌 1 에피소드 26: "지하 은행" |
1961 | 《언터처블스》 | 네이트 셀코 | 시즌 3 에피소드 1: "문제 해결사" |
1961 | 《벌거벗은 도시》 | 리 스턴턴 | 시즌 2 에피소드 24: "매우 조심스러운 소년" |
1961 | 《더 로 앤 미스터 존스》 | 시드니 자몬 | 시즌 1 에피소드 20: "콜드 터키" |
1961 | 《아쿠아노츠》 | 제레미아 윌슨 | 시즌 1 에피소드 20: "제레미아의 모험" |
1961 | 《아쿠아노츠》 | 엔젤 | 시즌 1 에피소드 23: "이중 모험" |
1961 | 《복수하라!》 | 신부 | TV 영화 |
1961 | 《백만 달러 사건》 | 새미 | TV 영화 |
1961 | 《알프레드 히치콕 프레젠츠》 | 마이어 파인 | 시즌 6 에피소드 28: "감사" |
1961 | 《바바라 스탠윅 쇼》 | 조 | 시즌 1 에피소드 32: "암살자" |
1961 | 《타겟: 더 코럽터스!》 | 닉 롱고 | 시즌 1 에피소드 1: "백만 달러 덤프" |
1961 | 《환상특급》 | 라모스 클레멘테 | 시즌 3 에피소드 6: "거울" |
1962 | 《벌거벗은 도시》 | 프랭키 오헤른 | 시즌 3 에피소드 25: "죽은 인디언을 위한 애가" |
1962 | 《더 뉴 브리드》 | 로페즈 | 시즌 1 에피소드 15: "작은 선을 넘다" |
1962 | 《87분서》 | 그렉 브로베인 | 시즌 1 에피소드 19: "비둘기" |
1962 | 《히어스 에디》 | 택시 운전사 | 에피소드 #1.1 |
1962 | 《알프레드 히치콕 아워》 | 로버트 에반스 | 시즌 1 에피소드 13: "모닥불" |
1962 | 《딕 파월 쇼》 | 아리스티드 프레스코 | 시즌 1 에피소드 17: "토마토의 가격" |
1962 | 《딕 파월 쇼》 | 앨런 키건 박사 | 시즌 2 에피소드 4: "둠스데이 보이즈" |
1962 | 《듀폰 쇼 오브 더 위크》 | 콜루치 | 시즌 1 에피소드 24: "사냥의 소리" |
1963 | 《딕 파월 쇼》 | 마틴 | 시즌 2 에피소드 18: "침묵의 분노" |
1963 | 《닥터 킬데어》 | 맷 건더슨 | 시즌 2 에피소드 29: "균형과 도가니" |
1963 | 《왜건 트레인》 | 거스 모건 | 시즌 7 에피소드 3: "거스 모건 이야기" |
1963 | 《밥 호프 프레젠츠 크라이슬러 극장》 | 버트 그라우만 | 시즌 1 에피소드 4: "네 명의 왕" |
1964 | 《듀폰 쇼 오브 더 위크》 | 다닐로 디아즈 | 시즌 3 에피소드 21: "대사" |
1964 | 《벤 케이시》 | 지미 레이놀즈 박사 | 시즌 4 에피소드 6: "지미를 위해, 모든 것의 최고" |
1964 | 《벤 케이시》 | 시즌 4 에피소드 12: "새벽 3시의 용기" | |
1965 | 《밥 호프 프레젠츠 크라이슬러 극장》 | 바라 | 시즌 2 에피소드 19: "위험한 시간" |
1965-66 | 《오브라이언의 재판》 | 다니엘 오브라이언 | 22개 에피소드 |
1966 | 《밥 호프 프레젠츠 크라이슬러 극장》 | 마이크 갤웨이 | 시즌 4 에피소드 7: "친애하는 공제액" |
1966 | 《브리가둔》 | 제프 더글러스 | TV 영화 |
1967 | 《레드 스켈턴 아워》 | 허쉬-허쉬 대령 | 시즌 16 에피소드 16: "한쪽 귀로 듣고 다른 귀로 흘리기" |
1968 | 《비에 젖은 모자》 | 폴로 포프 | TV 영화 |
1968-2003 | 《형사 콜롬보》 | 콜롬보 형사 | 69개 에피소드 |
1971 | 《더 네임 오브 더 게임》 | 루이스 코벳 | 시즌 3 에피소드 15: "나폴리에서 온 여동생" |
1971 | 《선을 벗어나다》 | 해리 코너스 | TV 영화 |
1978 | 《딘 마틴 셀레브리티 로스트》 | 콜롬보 | TV 스페셜 |
1992 | 《래리 샌더스 쇼》 | 본인 | 시즌 1 에피소드 8: "루프 밖으로" |
1996 | 《선샤인 보이즈》 | 윌리 클라크 | TV 영화 |
1997 | 《프론토》 | 해리 아르노 | TV 영화 |
2000 | 《여름의 폭풍》 | 아벨 섀딕 | TV 영화 |
2001 | 《잃어버린 세계》 | 테오 커 목사 | TV 영화 |
2001 | 《크리스마스 없는 마을》 | 맥스 | TV 영화 |
2003 | 《존 크리스마스 찾기》 | 맥스 | TV 영화 |
2003 | 《와일더 데이즈》 | 제임스 '팝 업' 모스 | TV 영화 |
2004 | 《천사들이 마을에 올 때》 | 맥스 | TV 영화 (마지막 TV 출연) |
10.3. 연극
연도 | 제목 | 역할 | 공연 장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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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6 | 《성녀 조안》 | 영국 병사 | 월터 커 극장, 브로드웨이 |
1956 | 《악당의 일기》 | 마마예프의 하인 | 피닉스 극장, 오프 브로드웨이 |
1956-57 | 《얼음 장수 오다》 | 로키 피오기 | 서클 인 더 스퀘어 극장, 브로드웨이 |
1964 | 《요제프 D의 열정》 | 스탈린 | 에델 배리모어 극장, 브로드웨이 |
1971-73 | 《2번가 죄수》 | 멜 에디슨 | 유진 오닐 극장, 브로드웨이 |
2000 | 《더러워진》 | 브라이언 디키 | 게펜 플레이하우스, 로스앤젤레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