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생애
플라키디아의 삶은 서로마 제국 멸망 직전의 격동적인 시기에 황족으로서 겪어야 했던 다양한 고난과 정치적 격변을 보여준다. 그녀는 황제의 딸이자 황후로서 제국의 운명에 직접적으로 얽혀 있었으며, 특히 반달족에게 포로로 잡혔던 경험은 그녀의 생애에서 중요한 부분이다.
1.1. 초기 생애 및 가족 배경
플라키디아는 439년에서 443년 사이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그녀는 서로마 제국의 황제 발렌티니아누스 3세와 리키니아 에우독시아의 둘째 딸로, 훈족 왕 가이세리크의 아들 훈네리크와 결혼한 에우도키아의 여동생이다. 두 자매의 이름은 각각 조모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 에우도키아는 외조모 아일리아 에우도키아의 이름을, 플라키디아는 친조모인 갈라 플라키디아의 이름을 물려받았다.
1.2. 결혼
454년 또는 455년, 플라키디아는 아니키우스 올리브리우스와 결혼했다. 올리브리우스는 아니키우스 가문의 일원으로, 이 가문은 이탈리아와 갈리아에서 활동했던 저명한 가문이었다. 올리브리우스의 부모는 명확히 알려지지 않았으며, 그들의 신원에 대해서는 여러 이론이 존재한다.
원래 황제 발렌티니아누스 3세는 플라키디아를 당시 젊고 유능했던 마요리아누스와 결혼시키려 했다. 마요리아누스는 갈리아에서 프랑크족과 싸우며 공을 세운 인물이었고, 로마의 관습에 따르면 황실과의 결혼은 그를 즉시 황실 가족과 연결시키고 발렌티니아누스 3세의 후계자 반열에 올릴 수 있었다. 그러나 플라비우스 아에티우스가 이 계획을 알게 되자, 451년 이전에 마요리아누스를 자신의 영지로 귀양 보냈고, 마요리아누스는 아에티우스가 사망한 후에야 로마로 소환되었다. 아에티우스는 또한 자신의 위치를 공고히 하기 위해 "황제에게 자신과의 우정을 맹세하고 플라키디아를 자신의 어린 아들 가우덴티우스와 약혼시키도록 강요했다."
역사가 모마에르츠와 켈리는 455년에 발렌티니아누스 3세의 뒤를 이어 서로마 황제가 된 페트로니우스 막시무스가 플라키디아와 올리브리우스의 결혼 배후에 있었다는 이론을 제안했다. 그들은 올리브리우스가 페트로니우스 막시무스 자신의 아들이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하는데, 이는 페트로니우스가 황제가 된 후에 먼 친척을 잠재적 후계자로 지명할 리 없다는 추론에 기반한다. 히다티우스에 따르면, 페트로니우스는 자신의 맏딸인 에우도키아를 자신의 맏아들인 팔라디우스와 결혼시켰다고 한다. 이들은 페트로니우스가 자신의 어린 아들 중 한 명과 플라키디아의 결혼을 주선함으로써, 플라키디아와 올리브리우스의 결혼이 같은 해에 테오도시우스 왕조 구성원과 확장된 아니키우스 가문 구성원 사이의 세 번째 결혼이 되었다고 주장한다.
1.3. 반달족 포로 생활
455년 로마 약탈 당시, 플라키디아는 반달족 왕 가이세리크에게 포로로 잡혔다. 이 사건은 그녀의 어머니 리키니아 에우독시아와 언니 에우도키아와 함께 발생했다. 연대기 작가 말쿠스에 따르면, "이 무렵, 황제 발렌티니아누스의 미망인이자 테오도시우스 2세와 아일리아 에우도키아의 딸인 황후 에우독시아는 로마에서 불행하게 지내다가, 남편의 살해 때문에 폭군 페트로니우스 막시무스에게 분노하여 아프리카 속주의 반달족 왕 가이세리크를 로마를 다스리던 막시무스에 대항해 소환했다. 가이세리크는 갑자기 그의 병력과 함께 로마로 와서 도시를 점령하고, 막시무스와 그의 모든 병력을 궤멸시킨 후, 궁전의 모든 것, 심지어 청동상까지 가져갔다. 그는 살아남은 원로원 의원들과 그들의 아내들을 포로로 끌고 갔으며, 그들과 함께 자신을 소환했던 황후 에우독시아, 당시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머물고 있던 귀족 올리브리우스의 아내 플라키디아, 그리고 처녀 에우도키아까지 아프리카의 카르타고로 데려갔다. 돌아온 후 가이세리크는 황후 에우독시아의 딸인 어린 처녀 에우도키아를 자신의 아들 훈네리크와 결혼시켰으며, 어머니와 딸 모두를 크게 존중하며 대했다" (『연대기』 366).
에우독시아는 원치 않는 결혼에 맞서 아틸라에게 도움을 요청했던 그녀의 시누이 유스타 그라타 호노리아의 선례를 따랐을 가능성도 있다. 당시 페트로니우스 막시무스는 반달족이 도착했을 때 로마에 있었으며, 그는 도시를 탈출할 수 있는 사람들을 허용했다. 그 자신도 탈출하려 했으나 황실 노예들에게 살해당했다. 그는 77일 동안 통치했으며, 그의 시신은 테베레강에 버려져 발견되지 않았다. 토넨나의 빅토르는 교황 레오 1세가 가이세리크와 도시 주민의 안전을 위해 협상했다고 덧붙인다.
페트로니우스 막시무스의 죽음에 대해서는 여러 기록이 있다. 히다티우스는 그 살인을 황제의 시도에 분노한 로마 군인들의 반란 탓으로 돌린다. 『갈리아 연대기 511』은 살인을 폭동을 일으킨 군중 탓으로 돌린다. 요르다네스는 살인자 중 한 명을 "로마 병사 우르수스"라고 밝혔다. 시도니우스 아폴리나리스는 "배신적인 지도력"이 군중을 공황 상태에 빠뜨리고 황제를 학살하게 만들었다는 모호한 언급을 남겼는데, 이는 당시 반달족에 제대로 맞서지 못한 부르군트족 장군을 암시하는 것으로 보인다. 후대 역사가들은 곤디오크와 그의 형제 킬페리크 1세를 유력한 후보로 제시했다. 이 둘은 455년 후반에 테오도리크 2세와 합류하여 히스파니아를 침공했다.
당시 올리브리우스는 로마 포위 기간 동안 요안네스 말랄라스의 기록에 따르면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있었다. 그는 포로 생활 동안 아내와 떨어져 지냈으며, 전하는 바에 따르면 다니엘 스틸리테스를 방문했는데, 그는 에우독시아와 플라키디아가 돌아올 것이라고 예언했다고 한다. 플라키디아는 카르타고에서 6년에서 7년 동안 포로로 잡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461년 또는 462년에 동로마 황제 레오 1세가 에우독시아와 플라키디아를 위해 막대한 몸값을 지불했고, 그 후 플라키디아는 남은 생애를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보냈다.
1.4. 황후로서의 삶과 말년
프리스쿠스와 안티오키아의 요안네스는 가이세리크가 461년 마요리아누스의 사망 직후부터 올리브리우스를 서로마 제국의 황제 자리에 앉히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고 전한다. 플라키디아와의 결혼 덕분에 올리브리우스는 테오도시우스 왕조의 후계자이자, 결혼을 통해 반달족 왕실 가문의 일원으로 간주될 수 있었다. 465년에 리비우스 세베루스가 사망하자, 가이세리크는 다시 올리브리우스를 서방 황제 후보로 내세웠다. 프로코피우스는 올리브리우스가 반달족의 지지자와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고 기록했다.
472년, 서로마 황제 안테미우스는 그의 마기스테르 밀리툼이자 사위인 리키메르와 내전에 휘말렸다. 요안네스 말랄라스에 따르면, 레오 1세는 개입하여 올리브리우스를 보내 적대 행위를 진압하도록 결정했다. 올리브리우스는 또한 가이세리크에게 평화 협정을 제안하라는 명령도 받았다. 그러나 레오 1세는 리키메르와 올리브리우스의 죽음을 주선해달라고 안테미우스에게 요청하는 또 다른 사절인 모데스투스를 보냈다. 하지만 리키메르는 로마와 오스티아 안티카 항구에 자신에게 충성하는 고트족을 배치하여 모데스투스를 가로채어 그의 메시지를 리키메르 자신에게 전달하게 했다. 리키메르는 메시지 내용을 올리브리우스에게 폭로했고, 두 사람은 이전의 주군들에 대항하는 새로운 동맹을 맺었다.
472년 4월 또는 5월에 올리브리우스가 황제로 선포되면서 내전이 시작되었다. 안티오키아의 요안네스는 안테미우스가 대다수의 로마인들에게 지지받았고, 리키메르는 바르바리안 용병들에게 지지받았다고 주장한다. 오도아케르를 포함한 포이데라티의 지도자들과 리키메르의 조카인 군도바트도 리키메르의 편에 섰다. 요안네스 말랄라스와 안티오키아의 요안네스에 따르면, 군도바트가 안테미우스를 살해하여 갈등을 종식시켰다. 이들은 안테미우스가 마지막 추종자들에게 버림받고 교회에 피신했으나, 군도바트가 그를 살해했다고 진술한다. 그러나 두 연대기 작가는 사건 발생 위치에서 차이를 보이는데, 말랄라스는 성 베드로 대성전을, 안티오키아인은 산타 마리아 인 트라스테베레 성당을 언급한다. 하지만 카시오도루스, 마르켈리누스 코메스, 프로코피우스는 안테미우스가 리키메르 자신에게 살해당했다고 기록한다. 『갈리아 연대기 511』은 두 가지 이론을 모두 언급하며, 어느 쪽이 실제로 행해졌는지 불확실하다고 기록했다.
안테미우스의 죽음으로 올리브리우스는 사실상 유일한 서로마 황제가 되었다. 플라키디아는 서로마 제국을 방문하지 않고도 서방의 황후가 되었으며, 딸과 함께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머물렀다. 472년 8월 18일, 리키메르가 "악성 열병"으로 사망했다. 파울루스 디아코누스는 올리브리우스가 이후 군도바트를 자신의 파트리키우스로 임명했다고 기록한다.
472년 10월 22일 또는 11월 2일, 올리브리우스 자신도 사망했다. 안티오키아의 요안네스는 그의 죽음이 부종 때문이라고 주장하지만, 카시오도루스와 마그누스 펠릭 엔노디우스는 사인을 기록하지 않고 사망 사실만을 보고한다. 모든 기록은 그의 재위 기간이 짧았음을 강조한다.
말쿠스는 478년에 "올리브리우스의 아내[즉 플라키디아]의 후견인 알렉산더가 이끄는 카르타고의 사절단이 비잔티움에 왔다"고 기록했다. 알렉산더는 이전에 플라키디아 자신의 동의를 얻어 제논에 의해 그곳으로 파견되었었다. 사절단은 훈네리크가 황제의 친구임을 성실히 자처했으며, 로마의 모든 것을 너무나 사랑하여 이전에 공공 수입에서 요구했던 모든 것과 레오 1세가 이전에 그의 아내[즉 에우도키아]에게서 압수한 다른 돈까지 포기했다고 말했다. 훈네리크는 황제가 올리브리우스의 아내를 존중한 것에 대해 감사를 표했다. 플라키디아는 484년경 마지막으로 언급된다.
플라키디아는 아마도 이름이 알려진 마지막 서로마 황후일 것이다. 글리케리우스와 로물루스 아우구스투스는 결혼했다는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 율리우스 네포스는 베리나와 레오 1세의 조카와 결혼했지만, 그 이름은 현존하는 기록에 언급되어 있지 않다.
2. 자녀
플라키디아의 유일하게 알려진 자녀는 딸 아니키아 율리아나로, 462년경 태어났다. 그녀는 유스티니아누스 1세 이전의 콘스탄티노폴리스 궁정에서 생애를 보냈다. 율리아나는 당시 "가장 귀족적이고 부유한 거주민"으로 평가받았다. 역사가 오스트는 "그녀를 통해 갈라 플라키디아(플라키디아의 할머니)의 후손들이 동방 제국의 귀족층에 속하게 되었다"고 언급했다.
3. 가계
플라키디아는 서로마 제국의 황제 가문인 테오도시우스 왕조의 일원이자 후손으로서 복잡한 가계도를 가지고 있다. 그녀의 가계는 다음과 같다.
- 부모: 발렌티니아누스 3세, 리키니아 에우독시아
- 친조부모: 콘스탄티우스 3세, 갈라 플라키디아
- 외조부모: 테오도시우스 2세, 아일리아 에우도키아
- 친외증조부모: 테오도시우스 1세, 갈라, 아르카디우스, 아일리아 에우독시아, 레온티우스, 아스클레피오도투스의 이름 없는 누이
- 친친외고조부모: 대 테오도시우스, 테르만티아, 발렌티니아누스 1세, 유스티나
- 외외증조부모: 테오도시우스 1세, 아일리아 플라킬라, 바우토
4. 역사적 위상
플라키디아는 서로마 제국이 몰락하기 직전의 혼란스러운 시기에 황제의 딸이자 황후로서 중요한 역사적 위상을 가졌다. 그녀는 455년 로마 약탈 당시 반달족에게 포로로 잡혀갔다가 동로마 제국의 황제 레오 1세의 노력으로 풀려나는 등 제국의 쇠퇴를 상징하는 사건들을 직접 겪었다. 비록 그녀의 남편 올리브리우스의 재위는 매우 짧았고, 그녀 자신은 황후가 된 이후로도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머물며 서로마 제국 서부를 방문하지 않았지만, 그녀는 이름이 알려진 마지막 서로마 황후 중 한 명으로서 역사에 기록되었다. 이는 그녀가 제국 멸망이라는 거대한 전환기 속에서 황실의 혈통을 잇는 중요한 상징적 존재였음을 의미한다. 그녀의 삶은 고대 로마 제국의 마지막 순간들을 이해하는 데 있어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