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갈라 플라키디아는 로마 황제 테오도시우스 1세의 딸로, 발렌티니아누스 3세의 어머니이자 후견인이자 고문 역할을 수행하며 생애 대부분 동안 로마 정치의 핵심 인물이었다. 그녀는 414년부터 415년까지 서고트족의 왕 아타울프의 왕비였으며, 421년에는 잠시 콘스탄티우스 3세의 황후로 재임했다. 이후 425년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서로마 제국에서 어린 발렌티니아누스 3세의 섭정으로서 국정 운영을 담당했다. 격동의 시기에 그녀는 제국의 안정과 테오도시우스 왕조의 유지를 위해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으며, 교회 건축과 복원 등 공공 사업 및 종교적 후원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2. 초기 생애와 가족 배경
갈라 플라키디아는 로마 황제 테오도시우스 1세와 그의 두 번째 아내 갈라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어머니 갈라는 발렌티니아누스 1세와 그의 두 번째 아내 유스티나의 딸이었다.
2.1. 출생과 유년기
갈라 플라키디아의 정확한 출생 연도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388년/389년 또는 392년/393년경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되며, 후자의 시기인 392년/393년이 더 유력한 것으로 보인다. 밀라노의 암브로시우스 주교가 390년에 쓴 서신에 따르면 테오도시우스에게는 유아기에 사망한 그라티아누스라는 어린 아들이 있었는데, 그라티아누스가 388년/389년에 태어났을 가능성이 높으므로 갈라 플라키디아는 392년/393년에 태어났을 가능성이 더욱 크다. 그녀의 어머니 갈라는 아마도 사산아를 낳다가 394년에 사망했다.
갈라 플라키디아는 황제 아르카디우스와 호노리우스의 이복 여동생이었다. 그녀의 이복 언니 풀케리아는 부모님보다 먼저 사망했다고 전해진다. 425년 이후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그녀를 기리기 위해 발행된 주화에는 그녀의 이름이 아엘리아 플라키디아(AELIA PLACIDIA)로 새겨져 있는데, 이는 그녀를 테오도시우스 2세의 동방 왕조와 통합하려는 의도였을 수 있다. 그러나 서방에서는 '아엘리아'라는 이름이 사용되었다거나 공식 명칭의 일부였다는 증거는 없다.
갈라 플라키디아는 390년대 초 아버지로부터 독립적인 가구를 부여받아 미성년자임에도 재정적으로 자립할 수 있었다. 그녀는 394년 메디올라눔 (오늘날의 밀라노)에 있는 아버지의 궁정으로 소환되었고, 395년 1월 17일 테오도시우스의 사망 현장에 있었다. 어린 시절 그녀는 "가장 고귀한 소녀"를 의미하는 nobilissima puella노빌리시마 푸엘라라틴어라는 칭호를 받았다.
2.2. 스틸리코 가문과의 관계
갈라 플라키디아는 유년기의 대부분을 서로마 제국의 유력한 군부 실력자였던 스틸리코와 그의 아내 세레나의 집에서 보냈다. 그녀는 직조와 자수를 배웠을 것으로 추정되며, 고전 교육도 받았을 가능성이 있다. 세레나는 아르카디우스, 호노리우스, 그리고 갈라 플라키디아의 촌수 높은 사촌이었다. 스틸리코는 394년부터 408년까지 서방과 동로마 제국 모두에서 magister militum (군 사령관) 직책을 겸임한 유일한 인물로, magister equitum et peditum (기병 및 보병 총사령관)이라는 칭호도 가지고 있었다. 이는 그가 서로마 제국의 기병 및 보병을 모두 총괄하는 위치에 있었음을 의미한다.
스틸리코의 연대기에는 갈라 플라키디아가 스틸리코와 세레나의 외동아들인 유케리우스와 약혼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결혼은 스틸리코와 세레나의 결혼, 그리고 그들의 딸 마리아와 호노리우스의 결혼에 이어 스틸리코 가문과 테오도시우스 왕조 간의 세 번째 동맹이 될 예정이었다.
408년, 아르카디우스가 사망하고 7세의 아들 테오도시우스 2세가 그의 뒤를 이었다. 스틸리코는 호노리우스에게 동방으로 직접 가지 말라고 설득하며 콘스탄티노폴리스로 가서 "테오도시우스의 국정 관리를 맡을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직후 magister scrinii인 올림피우스가 스틸리코가 사실 테오도시우스 2세를 폐위하고 유케리우스를 대신 앉히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호노리우스를 설득하려 했다. 결국 스틸리코는 408년 8월 22일 호노리우스의 명령으로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유케리우스는 로마로 피신했으나, 황제의 명령에 따라 그곳에서 체포되어 환관 아르사키우스와 타렌티우스에 의해 처형되었다. 일본어 사료에 따르면, 갈라 플라키디아는 스틸리코의 처형에 동의했거나 최소한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3. 결혼과 정치적 역할
갈라 플라키디아의 두 번의 결혼은 그녀의 인생뿐만 아니라 당시 로마 제국의 정치적 상황에도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3.1. 첫 번째 결혼 (아타울프)
스틸리코의 몰락 이후 이탈리아 도시들에 거주하던 포이데라티(동맹 부족)의 아내와 자녀들이 학살되는 혼란이 일어났다. 스틸리코에게 충성했던 대부분의 포이데라티는 서고트족의 왕 알라리크 1세의 군대에 합류했다. 알라리크는 이들을 이끌고 로마를 408년 가을부터 410년 8월 24일까지 포위했다.
조시무스의 기록에 따르면, 갈라 플라키디아는 410년 로마 약탈 당시 도시 내에 있었으며, 그 과정에서 알라리크에게 사로잡혔다. 그녀는 로마가 함락되기 전 알라리크에게 포로로 잡혔다는 기록과 로마 포위 기간 동안 도시에 있었다는 기록이 공존한다. 세레나가 알라리크와 공모했다는 혐의를 받자, 로마 원로원과 갈라 플라키디아는 그녀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플라키디아는 412년에 서고트족과 함께 이탈리아에서 갈리아로 이동했다. 알라리크의 뒤를 이은 서고트족의 통치자 아타울프는 갈리아에 주둔하던 서로마 황제 경쟁자들인 요비누스와 세바스티아누스에 대항하여 호노리우스와 동맹을 맺었고, 413년 두 사람을 모두 물리치고 처형했다. 세바스티아누스와 요비누스의 머리가 8월 말 라벤나의 호노리우스 궁정에 도착하여 카르타고 성벽에 다른 찬탈자들과 함께 전시된 후, 아타울프와 호노리우스 간의 관계는 크게 개선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아타울프는 414년 1월 1일 나르본에서 갈라 플라키디아와 결혼했다. 이 결혼식은 화려한 로마식 축제와 웅장한 선물로 치러졌다. 프리스쿠스 아탈루스는 고전적인 에피탈라미움 (결혼 축시)으로 결혼 축사를 했다. 역사가 히다티우스는 이 결혼을 기록했으며, 요르다네스는 411년 포를리에서 이루어졌다고 기록했는데, 이는 아마도 더 비공식적인 행사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플라키디아와 아타울프는 414년 말 바르셀로나에서 아들 테오도시우스를 낳았으나, 아이는 이듬해 일찍 사망하여 로마-서고트 혈통의 기회가 사라졌다. 몇 년 후 시신은 발굴되어 로마의 옛 산 피에트로 대성당 내 황실 영묘에 재매장되었다.
히스파니아에서 아타울프는 사루스의 이전 추종자였던 "두비우스" 또는 "에베르볼프"라는 인물을 무모하게 고용했다. 사루스는 요비누스와 세바스티아누스 휘하에서 싸우다 살해된 게르만족 지도자였고, 그의 추종자는 스승의 죽음을 복수하려는 비밀스러운 욕망을 품고 있었다. 415년 8월/9월, 바르셀로나 궁전에서 그는 아타울프가 목욕하는 동안 살해하여 그의 통치를 갑작스럽게 끝냈다.
아말리 왕조는 사루스의 형제인 시게리크를 다음 서고트족의 왕으로 선포했다. 시게리크는 아타울프의 전처 소생 자녀 6명을 고트족의 주교 시게사르에게서 빼앗아 살해했다. 아타울프의 미망인이었던 갈라 플라키디아는 시게리크가 말을 타고 앞서 가는 동안, 포로들 사이에서 맨발로 19312 m (12 mile) 이상을 걷도록 강요당했다. 7일간의 통치 후, 시게리크는 암살당하고 아타울프의 친척인 왈리아로 교체되었다. 왈리아는 식량 공급에 절박해 있었다. 그는 당시 호노리우스의 magister militum이었던 콘스탄티우스 3세에게 항복하여 서고트족에게 포이데라티 지위를 부여하는 조건으로 협상했고, 갈라 플라키디아는 평화 조약의 일부로 호노리우스에게 돌려보내졌다.
3.2. 두 번째 결혼 (콘스탄티우스 3세)
갈라 플라키디아는 417년 1월 1일 오빠 호노리우스의 강요로 콘스탄티우스 3세와 결혼했다. 그들의 딸 유스타 그라타 호노리아는 아마도 417년 또는 418년에 태어났을 것으로 보이며, 그녀가 결혼의 첫 번째 자녀로 언급되어 장녀였음을 시사한다. 아들 발렌티니아누스 3세는 419년 7월 2일에 태어났다.
갈라 플라키디아는 418년 12월 26일 교황 자치모의 사망 이후 발생한 교황 선출 위기에 개입했다. 로마 성직자들의 두 파벌은 각각 에울랄리우스 (12월 27일)와 보니파시오 1세 (12월 28일)를 자신들의 교황으로 선출했다. 그들은 로마에서 경쟁적인 교황으로 행동하며 도시를 혼란에 빠뜨렸다. 로마의 심마쿠스 현관장은 라벤나의 황실 궁정에 보고서를 보내 이 문제에 대한 황실의 결정을 요청했다. 플라키디아와 아마도 콘스탄티우스는 에울랄리우스를 지지하며 황제에게 청원했는데, 이는 황제가 교황 선출에 개입한 최초의 사례로 볼 수 있다.
호노리우스는 처음에는 에울랄리우스를 합법적인 교황으로 인정했다. 그러나 이것이 논쟁을 종식시키지 못하자, 호노리우스는 라벤나에서 이탈리아 주교들의 시노드를 소집하여 문제를 결정하도록 했다. 시노드는 419년 2월부터 3월까지 열렸으나 결론에 도달하지 못했다. 호노리우스는 5월에 두 번째 시노드를 소집했으며, 이번에는 갈리아와 아프리카 주교들도 포함되었다. 한편, 두 경쟁 교황은 로마를 떠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러나 부활절이 다가오자 에울랄리우스는 도시로 돌아와 "부활절 의식을 주관하기 위해" 산 조반니 인 라테라노 대성당을 장악하려 했다. 황실 군대가 그를 격퇴했고, 부활절 (419년 3월 30일)에는 스폴레토 주교 아킬레우스가 의식을 주관했다. 이 갈등으로 에울랄리우스는 황제의 호의를 잃었고, 보니파시오는 419년 4월 3일자로 합법적인 교황으로 선포되어 일주일 후 로마로 돌아왔다. 플라키디아는 아프리카 주교들에게 직접 편지를 써서 두 번째 시노드에 참석하도록 소환했는데, 그녀의 편지 중 세 통이 현재까지 남아있다.
421년 2월 8일, 콘스탄티우스는 아우구스투스로 선포되어 자녀가 없던 호노리우스의 공동 통치자가 되었다. 플라키디아는 아우구스타로 선포되었다. 호노리우스는 408년에 두 번째 아내인 테르만티아와 이혼한 후 재혼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녀는 서방에서 유일한 황후였다. 그러나 이 두 칭호는 동로마 황제 테오도시우스 2세에게 인정받지 못했다. 콘스탄티우스는 황제 직무로 인한 개인적인 자유와 사생활의 상실에 대해 불평했다고 전해진다. 그는 421년 9월 2일 질병으로 사망했다.
4. 섭정과 통치 기간
콘스탄티우스 사망 후 갈라 플라키디아는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망명했으며, 오빠인 호노리우스가 사망하고 권력 공백이 생기자 아들 발렌티니아누스 3세를 황제로 즉위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녀는 발렌티니아누스의 섭정으로서 정치적 권력을 행사했다.
4.1. 서로마 제국으로의 복귀와 섭정 시작
테베의 올림피오도로스의 기록에 따르면, 남편 콘스탄티우스 사망 후 그녀가 친오빠 호노리우스에게서 스캔들성으로 보이는 공공연한 애정 표현을 받았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대중의 의심을 샀다. 그러나 남매 관계는 돌연 적대적으로 변했고, 이 시기 갈라 플라키디아는 호노리우스에 대항하여 음모를 꾸몄을 가능성도 있다. 그녀의 병사들과 호노리우스의 병사들이 충돌한 후, 갈라 플라키디아는 자신의 자녀들과 함께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도피해야 했다. 이러한 좌절에도 불구하고 아프리카 관구의 총독 보니파키우스는 그녀에게 계속 충성했다.
플라키디아, 발렌티니아누스, 그리고 호노리아는 422년/423년경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도착했다. 423년 8월 15일, 호노리우스는 아마도 폐부종으로 사망했다. 라벤나에 테오도시우스 왕조의 일원이 없어 왕위를 주장할 사람이 없었기에, 테오도시우스 2세는 서방의 공동 황제를 지명할 것으로 예상되었다. 그러나 테오도시우스는 주저했고 결정이 지연되었다. 이 권력 공백을 틈타 파트리키 카스티누스는 킹메이커가 되기로 결심했다. 그는 primicerius notariorum (고위 서기관, 즉 공무원 조직의 수장)인 요한네스를 새로운 서로마 황제로 선포했다. 그의 지지자 중에는 플라비우스 아에티우스도 있었다. 요한네스의 통치는 이탈리아, 갈리아, 히스파니아 속주에서는 받아들여졌지만, 아프리카 속주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테오도시우스 2세는 발렌티니아누스 3세를 황제직으로 승격시키기 위한 준비에 착수했다. 423년/424년에 발렌티니아누스는 nobilissimus (가장 고귀한 자)로 지명되었다. 424년, 발렌티니아누스는 자신의 6촌인 리키니아 에우독시아와 약혼했다. 그녀는 테오도시우스 2세와 아엘리아 에우도키아의 딸이었다. 그들의 약혼 시기는 마르켈리누스 콤메스에 의해 기록되었다. 당시 발렌티니아누스는 약 4세, 리키니아는 겨우 2세였다.
요한네스에 대한 군사 작전도 같은 해에 시작되었다. 동로마군은 테살로니키에 집결하여 로마-페르시아 전쟁에 참전했던 아르다부리우스의 총지휘를 받았다. 침공군은 두 경로로 아드리아해를 건너기로 했다. 아르다부리우스의 아들 아스파르는 육로로 기병대를 이끌고 서부 발칸반도에서 북이탈리아까지 아드리아해 연안을 따라 이동했다. 플라키디아와 발렌티니아누스도 이 부대에 합류했다. 도중에 발렌티니아누스는 424년 10월 23일 테오도시우스 휘하의 magister officiorum이었던 헬리온에 의해 카이사르로 선포되었다.
아르다부리우스와 보병대는 동로마 해군 함선에 승선하여 해로로 라벤나에 도달하려 했다. 아스파르는 병력을 아퀼레이아로 진격시켜 거의 저항 없이 도시를 기습적으로 점령했다. 반면 함대는 폭풍에 의해 흩어졌다. 아르다부리우스와 그의 갤리선 두 척은 요한네스에게 충성하는 세력에게 나포되어 라벤나에 포로로 잡혔다. 아르다부리우스는 요한네스에게 좋은 대우를 받았는데, 요한네스는 아마도 테오도시우스와 협상하여 적대 행위를 종식시키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포로 아르다부리우스는 수감 기간 동안 라벤나의 궁정과 거리를 걸을 수 있는 "정중한 자유"를 허락받았다. 그는 이 특권을 이용하여 요한네스의 병사들과 접촉하여 일부를 테오도시우스 편으로 전향하도록 설득했다. 공모자들은 아스파르에게 연락하여 라벤나로 오도록 재촉했다. 한 목동이 아스파르의 기병대를 포강의 습지를 통과하여 라벤나 성문까지 인도했다. 성벽 밖의 포위군과 내부의 전향자들 덕분에 도시는 빠르게 함락되었다. 요한네스는 사로잡혀 오른손이 잘렸고, 당나귀에 태워져 거리를 행진한 후 아퀼레이아의 경마장에서 참수당했다.
요한네스가 사망하자, 425년 10월 23일 헬리온은 로마 원로원 앞에서 테오도시우스 2세의 지지 아래 발렌티니아누스를 서로마 제국의 새로운 아우구스투스로 공식 선포했다. 요한네스 사망 사흘 후, 아에티우스는 다뉴브강을 건너온 훈족 용병 60,000명을 이끌고 증원군과 함께 도착했다. 약간의 전투 끝에 플라키디아, 발렌티니아누스, 아에티우스는 합의에 도달하여 평화를 수립했다. 훈족은 돈을 받고 귀향했으며, 아에티우스는 comes와 magister militum per Gallias (갈리아 로마군 총사령관) 직책을 받았다. 이로써 갈라 플라키디아는 425년부터 아에티우스의 부상 이전까지 아들 발렌티니아누스의 섭정으로서 서로마 제국을 통치하게 되었다. 그녀의 초기 지지자들로는 보니파키우스와 펠릭스가 있었다. 아에티우스는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이들의 경쟁자였는데, 그는 서고트족의 테오도리크 1세로부터 아를을 지키는 데 성공했다. 서고트족은 조약을 체결하고 갈리아 귀족들을 인질로 받았다. 훗날 황제가 되는 아비투스는 테오도리크를 방문하여 그의 궁정에서 머물며 그의 아들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갈라 플라키디아의 동맹자였던 펠릭스는 430년 아에티우스에 의해 암살된 것으로 추정된다.
4.2. 보나파키우스와 아에티우스와의 갈등
플라키디아와 보니파키우스 사이의 갈등은 429년에 시작되었다. 플라키디아는 보니파키우스를 리비아의 총독으로 임명했다. 프로코피우스는 아에티우스가 이 둘을 이간질했다고 기록한다. 아에티우스는 플라키디아에게는 보니파키우스를 경고하며 그를 로마로 소환하라고 조언했고, 동시에 보니파키우스에게는 플라키디아가 별다른 이유 없이 그를 소환하여 제거하려 한다고 경고하는 편지를 썼다.
보니파키우스는 아에티우스의 경고를 믿고 소환을 거부했으며, 자신의 위치가 위태롭다고 판단하여 히스파니아의 반달족과 동맹을 맺었다. 이후 반달족은 그와 합류하기 위해 히스파니아에서 리비아로 건너왔다. 로마에 있던 보니파키우스의 친구들에게는 이 명백한 제국에 대한 적대 행위가 보니파키우스답지 않은 행동으로 보였다. 그들은 플라키디아의 요청으로 카르타고로 가서 그와 중재하려 했고, 보니파키우스는 그들에게 아에티우스의 편지를 보여주었다. 음모가 드러나자 친구들은 로마로 돌아와 플라키디아에게 진실을 알렸다. 플라키디아는 아에티우스가 막대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고 제국이 이미 위험에 처해 있었으므로 그를 상대로 움직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녀는 보니파키우스에게 "로마 제국이 야만인의 손에 놓이지 않도록" 로마로 돌아올 것을 촉구했다.
보니파키우스는 이제 반달족과의 동맹을 후회하고 그들을 설득하여 히스파니아로 돌아가게 하려 했다. 그러나 가이세리크는 대신 전투를 제안했고, 보니파키우스는 누미디아 해안의 히포 레기우스에서 포위되었다. 히포의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도시의 주교였으며 이 포위전 중에 사망했다. 도시를 함락시키지 못한 반달족은 결국 포위를 풀었다. 로마군은 아스파르의 증원군과 함께 전투를 재개했으나 패배하여 아프리카를 반달족에게 빼앗겼다.
보니파키우스는 그 사이 로마로 돌아왔고, 플라키디아는 그를 파트리키 지위로 승격시키고 "로마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했다. 아에티우스는 "야만인" 군대를 이끌고 갈리아에서 돌아왔고, 피비린내 나는 432년 라벤나 전투에서 보니파키우스와 맞붙었다. 보니파키우스는 전투에서 승리했지만 치명상을 입고 며칠 후 사망했다. 아에티우스는 판노니아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4.3. 아에티우스의 부상과 영향력 감소
갈라 플라키디아에게 충성하던 장군들이 사망하거나 아에티우스에게 전향하자, 플라키디아는 아에티우스의 정치적 역할을 합법적으로 인정했다. 433년, 아에티우스는 magister militum과 "파트리키" 칭호를 받았다. 이러한 임명으로 아에티우스는 사실상 서로마군 전체를 통제하게 되었고, 황실 정책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아에티우스는 이후 아틸라에 대항하여 서방 제국을 방어하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플라키디아는 437년까지 섭정 역할을 계속했지만, 그녀의 직접적인 의사결정 영향력은 줄어들었다. 그녀는 450년 사망할 때까지 정치적 영향력을 계속 행사했지만, 더 이상 궁정의 유일한 권력자는 아니었다.

이 시기 갈라 플라키디아는 교회 건축에 대한 공통된 관심을 가지고 있던 페트루스 크리솔로구스 주교와 친분을 맺었다. 그녀는 또한 로마에서 만난 바르바티아누스와도 친해졌다. 그는 그녀의 고해신부가 되기 위해 라벤나로 왔다. 그의 후대 전기(傳記)에 따르면, 그의 중재를 통해 그녀는 복음사가 요한을 기리기 위해 자신이 지은 교회에 요한의 샌들을 기적적으로 얻었다고 한다. 바르바티아누스가 사망하자 플라키디아와 크리솔로구스는 그의 매장을 주선했다.
450년 봄, 갈라 플라키디아의 딸 유스타 그라타 호노리아가 로마 원로원 의원과의 원치 않는 결혼에서 자신을 구해달라고 아틸라에게 보낸 편지 때문에 아틸라는 콘스탄티노폴리스 대신 이탈리아로 방향을 돌렸다. 이 편지에는 약혼 반지가 함께 들어있었다. 호노리아가 결혼을 제안할 의도는 아니었을 수도 있지만, 아틸라는 그녀의 메시지를 그렇게 해석하기로 선택했다. 그는 제안을 수락하며 서방 제국의 절반을 지참금으로 요구했다. 발렌티니아누스가 이 계획을 알게 되었을 때, 플라키디아의 영향력만이 그를 설득하여 호노리아를 죽이지 않도록 했다. 발렌티니아누스는 아틸라에게 결혼 제안의 정당성을 부인하는 편지를 썼다. 아틸라는 설득되지 않고 사절을 라벤나로 보내 호노리아가 무고하며, 제안이 합법적이었고, 자신이 정당한 몫을 주장하러 올 것이라고 선언했다. 호노리아는 서둘러 플라비우스 바수스 헤르쿨라누스와 결혼했지만, 이것이 아틸라가 자신의 주장을 계속하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 일본어 사료에 따르면 이 사건으로 아틸라가 호노리아의 편지를 "합법적인" 명분으로 삼아 콘스탄티노폴리스 대신 이탈리아를 침략하게 되었고, 이 약탈은 고트족에 의한 것보다 훨씬 잔혹한 것이었다.
5. 죽음
갈라 플라키디아는 이 사건 직후인 450년 11월 로마에서 사망했으며, 옛 산 피에트로 대성당 옆에 위치한 테오도시우스 가문의 영묘, 훗날 성 페트로닐라 예배당에 안장되었다. 그녀는 아틸라가 호노리아의 편지를 "합법적인" 명분으로 삼아 451년과 452년에 갈리아와 이탈리아를 황폐화시키는 것을 보지 못하고 사망했다. 그녀가 사망하자 서로마 제국 사람들의 증오는 발렌티니아누스 3세에게 집중되었다고 전해진다.
6. 공공 사업과 종교적 후원
갈라 플라키디아는 독실한 기독교인이었으며, 그녀가 영향력을 행사하던 시기 내내 다양한 교회의 건축 및 복원에 참여했다. 그녀는 로마의 성 밖의 성 바오로 대성전과 예루살렘의 성묘 교회를 복원하고 확장했다. 그녀는 아드리아해를 건너는 동안 폭풍우로부터 자신과 자녀들의 생명을 구원받은 것에 대한 감사로 라벤나에 산 조반니 에반젤리스타 성당을 지었다. 봉헌 비문에는 "갈라 플라키디아는 아들 플라키두스 발렌티니아누스 아우구스투스 및 딸 유스타 그라타 호노리아 아우구스타와 함께 바다의 위험에서 구원받은 것에 대한 서원을 갚았다"고 새겨져 있다.

라벤나에 있는 그녀의 갈라 플라키디아 영묘는 1996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건축물 중 하나이다. 그러나 이 건물은 실제로는 그녀의 무덤으로 사용된 적이 없으며, 초기에는 로마의 라우렌티우스를 기리는 예배당으로 세워졌다. 그 안에 있는 석관들이 테오도시우스 왕조의 다른 구성원들의 시신을 담고 있었는지, 또는 언제 그 건물에 안치되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7. 유산과 평가
갈라 플라키디아는 혼란스러웠던 서로마 제국 말기에 정치적, 종교적으로 중요한 영향을 미친 인물로 평가된다.
7.1. 긍정적 평가
그녀는 발렌티니아누스 3세의 섭정으로서 제국의 행정부를 관리하고, 서고트족과의 복잡한 관계를 조정하는 등 로마 정치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콘스탄티우스 3세와의 결혼을 통해 테오도시우스 왕조의 정통성을 강화하고 후계자를 안정적으로 확보하는 데 기여했다. 또한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서 로마와 예루살렘의 주요 교회를 복원하고 확장하는 등 공공 사업과 종교적 후원에 적극적이었다. 이는 당시 기독교가 로마 사회에 확고히 자리 잡는 데 기여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7.2. 비판과 논란
갈라 플라키디아에 대한 비판적 시각도 존재한다. 그녀는 스틸리코의 처형에 대해 동의했거나 최소한 반대하지 않았다는 주장이 있으며, 알라리크와 공모했다는 혐의를 받던 세레나에게 사형을 선고하는 데 가담하기도 했다. 남편 콘스탄티우스 3세의 사망 후 오빠 호노리우스와의 지나친 친밀함에 대한 스캔들성 소문과 이후 적대적인 관계 전환 등 그녀의 사생활에 대한 논란도 있었다. 특히 일본어 사료에서는 그녀와 발렌티니아누스 3세가 서로마 제국 사람들에게 증오의 대상이었다고 언급되어 대중적 인식이 부정적이었음을 시사한다. 또한 딸 호노리아가 원치 않는 결혼을 피하기 위해 아틸라에게 편지를 보내는 사건이 발생했는데, 이는 아틸라의 이탈리아 침략을 야기하는 빌미를 제공하여 제국에 심각한 피해를 입혔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8. 예술 및 대중문화에서의 묘사
갈라 플라키디아는 다양한 예술 및 대중문화 작품에서 묘사되었다.
- 알렉산드르 블로크의 시 "라벤나" (1909년 5월~6월)의 두 연(聯)은 그녀의 무덤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올가 마티치는 "블로크에게 갈라 플라키디아는 다른 문화사를 연결하는 종합적인 역사적 인물을 상징했다"고 언급했다.
- 에즈라 파운드는 그의 시 캔토스 (칸토스 21편)에서 그녀의 무덤을 과거에 남아있는 "금"의 예시로 사용한다.
- 루이스 주코프스키는 그의 시 "다른 4개국" ("A" 17편에 수록)에서 이를 언급한다.
- 카를 융은 그의 자서전 기억, 꿈, 반성 (9장 '라벤나와 로마' 절)에서 갈라 플라키디아를 언급한다. 그는 라벤나의 네오니아노 세례당에서 갈라의 무덤을 방문한 직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네 개의 거대한 모자이크 프레스코"를 경험한 환영에 대해 보고한다. 그는 "갈라 플라키디아의 인물에 개인적으로 영향을 받았다"고 말하며, "그녀의 무덤은 그녀의 인격에 도달할 수 있는 마지막 유산처럼 느껴졌다. 그녀의 운명과 존재 전체가 나에게 생생한 현존이었다"고 덧붙였다. 융은 나중에 자신과 지인이 기억하던 모자이크가 실제로는 존재한 적이 없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놀랐다고 한다.
- R. A. 래퍼티의 준역사 소설 로마의 몰락에서 갈라 플라키디아는 주요 조연으로 등장한다. 그녀는 "두 어린 황제의 도깨비 같은 여동생으로, 17세의 나이에 다른 모두가 겁에 질렸을 때 로마 원로원과 도시를 장악하고 세상의 마지막 100일 동안 저항을 대표했다"고 소개된다.
- BBC의 고대 로마: 제국의 흥망성쇠에서 나타샤 바레로가 갈라 플라키디아를 연기했다.
- 스페인 음악가 자우메 파이사는 1913년 오페라 갈라 플라키디아를 작곡했다.
- 1954년 영화 아틸라에서는 콜레트 레지스가 갈라 플라키디아를 연기했다.
- 2001년 미국 TV 미니시리즈 아틸라에서는 앨리스 크리게가 갈라 플라키디아를 연기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