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프랜시스 조지프 스펠먼 (Francis Joseph Spellman프랜시스 조지프 스펠먼영어) 추기경은 1889년 5월 4일 매사추세츠주 휘트먼에서 태어나 1967년 12월 2일 뉴욕시에서 사망한 미국의 저명한 가톨릭 성직자이다. 그는 1932년부터 1939년까지 보스턴 대교구의 보좌주교를 지냈고, 1939년부터 사망할 때까지 뉴욕 대교구의 제6대 대교구장으로 봉사했다. 1946년 교황 비오 12세에 의해 추기경으로 서임되었다.
스펠먼 추기경은 미국 가톨릭교회 내에서 광범위한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그의 거주지는 '파워하우스' (Powerhouse파워하우스영어)라는 별명으로 불릴 정도였다. 그는 종교적, 사회적, 정치적 문제에 깊이 관여하며 냉전 시대 미국의 반공주의를 강력히 지지했고, 매카시즘을 옹호했으며 베트남 전쟁에 대한 적극적인 지지 입장을 표명했다. 이러한 보수적 신념은 그의 신학적, 세속적 정치관에 깊이 뿌리박혀 있었다.
또한 그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라틴어 미사를 지지하는 등 보수적인 입장을 취했으나, 존 코트니 머리 (John Courtney Murray존 코트니 머리영어) 신부의 종교 자유 선언 작성을 옹호하며 실용적인 관점에서 에큐메니즘을 지지하기도 했다. 그의 임기 동안 뉴욕 대교구의 광범위한 교회 인프라 확장을 주도하여 15개의 교회, 94개의 학교, 22개의 사제관, 60개의 수녀원, 34개의 기타 기관을 건설하는 등 뛰어난 재정 관리 능력을 보여 '머니백 추기경'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성적 지향에 대한 의혹, 퓰턴 셰언 (Fulton Sheen퓰턴 셰언영어) 주교와의 갈등, 베트남 전쟁 지지 등 여러 논란과 비판에 직면하기도 했다.
2. 초기 생애 및 교육
프랜시스 조지프 스펠먼은 1889년 5월 4일 매사추세츠주 휘트먼에서 윌리엄 스펠먼과 엘렌 스펠먼(결혼 전 성은 콘웨이)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윌리엄 스펠먼은 식료품 상인이었으며, 그의 부모는 아일랜드 클론멜과 레인브리지에서 미국으로 이민 온 사람들이었다. 프랜시스는 다섯 자녀 중 장남으로, 마틴과 존 두 명의 남동생과 매리언, 헬렌 두 명의 여동생이 있었다. 어린 시절 그는 성령 교회(Church of Holy Souls)에서 복사로 봉사했다.

2.1. 어린 시절과 교육
스펠먼은 휘트먼에 가톨릭 학교가 없었기 때문에 공립학교인 휘트먼-핸슨 지역 고등학교에 다녔다. 그는 사진과 야구를 좋아했으며, 고등학교 1학년 때는 야구팀에서 1루수로 뛰었으나 손 부상을 입은 후에는 팀 감독을 맡았다. 고등학교 졸업 후 1907년 뉴욕시의 포덤 대학교에 입학하여 1911년에 졸업하고 사제가 되기로 결심했다.
윌리엄 오코넬 대주교는 스펠먼을 로마에 있는 교황청 북아메리카 대학으로 유학 보냈다. 그는 폐렴으로 심하게 고통받아 학교 측에서 그를 집으로 돌려보내려 했으나, 그는 떠나기를 거부하고 결국 신학 공부를 마쳤다. 로마 유학 시절 동안 스펠먼은 미래의 추기경이 될 가에타노 비슬레티, 프란체스코 보르곤기니 두카, 도메니코 타르디니와 친분을 쌓았다.
3. 사제 서품 및 초기 경력
3.1. 사제 서품
스펠먼은 1916년 5월 14일 로마의 산타폴리나레 대성당에서 총대주교 주세페 체페텔리에 의해 사제로 서품되었다. 미국으로 돌아온 후 그는 보스턴 대교구의 여러 본당에서 사목직을 맡았다. 그러나 그를 로마로 보냈던 오코넬 대주교는 스펠먼을 "작은 멋쟁이"라고 묘사하며 "프랜시스는 장부 담당자를 읽는 법을 가르쳤을 때 일어나는 일을 전형적으로 보여준다"고 말하는 등 그를 낮게 평가했다. 이로 인해 스펠먼은 상대적으로 중요하지 않은 직책들을 맡았다.
1917년 미국이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자 스펠먼은 미 육군 군종 신부로 입대하려 했으나 키 제한에 미달하여 실패했다. 그는 또한 미 해군 군종 신부로도 지원했으나, 당시 해군 차관보였던 프랭클린 D. 루스벨트가 그의 지원을 두 번이나 개인적으로 거부했다.
오코넬 대주교는 결국 스펠먼에게 대교구 신문인 더 파일럿의 구독을 홍보하는 일을 맡겼다. 이후 1918년에는 대교구의 보조 교회법원장으로, 1924년에는 대교구 기록 보관인으로 임명되었다.
3.2. 바티칸 근무 및 외교 활동
스펠먼은 친구 보르곤기니 두카의 책 두 권을 영어로 번역한 후, 1925년 바티칸 국무원의 초대 미국인 무임소 서기관으로 로마에 파견되었다. 국무원에서 근무하는 동안 그는 콜럼버스 기사단과 협력하여 로마에서 어린이 놀이터를 운영하기도 했다. 1926년 10월 4일, 교황 비오 11세는 스펠먼을 교황 시종으로 승격시켰다.
1927년 독일을 방문하는 동안 스펠먼은 당시 교황 사절로 봉사하던 에우제니오 파첼리 대주교(훗날 교황 비오 12세)와 평생의 우정을 쌓았다. 1931년에는 비오 11세의 첫 바티칸 라디오 방송을 영어로 번역했다. 같은 해 베니토 무솔리니의 파시스트 정부가 이탈리아를 장악했을 때, 스펠먼은 파시즘을 비난하는 교황의 회칙 Non abbiamo bisogno논 아비아모 비소뇨이탈리아어를 로마에서 파리로 비밀리에 운반하여 출판하는 데 기여했다. 그는 또한 1932년 더블린에서 열린 국제 성체 대회에서 로렌초 라우리 추기경의 비서로 봉사했으며, 성좌의 언론 사무소를 개혁하여 등사기를 도입하고 보도 자료를 발행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4. 주교 경력
4.1. 보스턴 보좌주교
1932년 7월 30일, 스펠먼은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보스턴 대교구의 보좌주교이자 실라의 명의주교로 임명되었다. 교황은 원래 스펠먼을 메인주 포틀랜드와 뉴햄프셔주 맨체스터의 주교로 임명하는 것을 고려했었다. 스펠먼은 1932년 9월 8일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파첼리 대주교로부터 주교 서품을 받았다. 주세페 피차르도 대주교와 프란체스코 보르곤기니 두카 대주교가 공동 서품자로 참여했다. 스펠먼은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주교로 서품된 최초의 미국인이었다. 보르곤기니 두카는 그를 위해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배 산타 마리아 (Santa Maria산타 마리아스페인어)를 포함하는 문장을 디자인했으며, 비오 11세는 그에게 Sequere Deum세퀘레 데움라틴어("하느님을 따르라")이라는 좌우명을 주었다.
미국으로 돌아온 후 스펠먼은 보스턴의 성 요한 신학대학에 거주했다. 대교구는 나중에 그를 뉴턴 센터의 성심 본당 주임 신부로 임명했으며, 그곳에서 그는 모금 활동을 통해 교회의 4.30 만 USD에 달하는 부채를 탕감했다. 1935년 스펠먼의 어머니가 사망했을 때, 제임스 마이클 컬리 매사추세츠 주지사, 조지프 L. 헐리 부지사, 그리고 오코넬 대주교를 제외한 많은 성직자들이 장례식에 참석했다.
1936년 가을, 파첼리 대주교는 표면적으로는 여러 도시를 방문하고 자선가 제네비브 가반 브래디의 손님이 되기 위해 미국을 방문했다. 그러나 실제 방문 목적은 바티칸 시국에 대한 미국의 외교적 승인을 논의하기 위해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을 만나는 것이었다. 스펠먼은 하이드 파크에 있는 루스벨트 사유지에서 이 만남을 주선하고 참석했다.
스펠먼은 조지프 P. 케네디 시니어와도 초기에 친분을 맺었다. 조지프 케네디 시니어는 당시 주영 미국 대사이자 부유한 가톨릭 가문의 수장이었다. 수년 동안 스펠먼은 훗날 상원의원이 되는 로버트 F. 케네디, 진 케네디, 유니스 케네디, 그리고 훗날 상원의원이 되는 에드워드 케네디를 포함한 여러 케네디 자녀들의 결혼을 주례했다.
파첼리의 미국 방문 중, 그와 케네디, 스펠먼은 찰스 코플린 신부의 격렬한 라디오 방송을 중단시키려 시도했다. 바티칸과 워싱턴의 교황 사절단은 그의 방송이 중단되기를 원했지만, 코플린의 상급자인 디트로이트의 마이클 갤러거 주교는 그를 제지하기를 거부했다. 1939년, 코플린은 전미 방송인 협회의 압력으로 방송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4.2. 뉴욕 대교구장

비오 11세의 사망 후, 파첼리 추기경은 1939년 교황 비오 12세로 선출되었다. 비오 12세의 첫 행동 중 하나는 1939년 4월 15일 스펠먼을 뉴욕 대교구의 제6대 대교구장으로 임명하는 것이었다. 그는 1939년 5월 23일에 대교구장으로 착좌했다. 1940년과 1941년에는 화가 아돌포 뮐러-우리 (Adolfo Müller-Ury아돌포 뮐러-우리영어)에 의해 두 차례 초상화가 그려졌다. 스펠먼은 이스트 할렘의 성 세실리아 본당에서 대교구 최초의 정기 스페인어 미사를 시작했다.
교구장으로서의 의무 외에도, 비오 12세는 1939년 12월 11일 스펠먼을 미군 군종교구장으로 임명했다. 수년 동안 스펠먼은 일본, 대한민국, 유럽에 주둔한 미군 병사들과 함께 많은 성탄절을 보냈다.
뉴욕 재임 기간 동안 스펠먼은 종교적, 정치적 문제에서 상당한 전국적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그의 거주지는 '파워하우스' (Powerhouse파워하우스영어)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는 정치가 버나드 바루크, 미 상원의원 데이비드 I. 월시, 미 하원 원내대표 존 윌리엄 매코맥 등 많은 저명한 성직자, 연예인, 정치인들을 초청했다. 1945년, 스펠먼은 맨해튼에서 앨 스미스 기념 재단 만찬을 시작했는데, 이는 저명한 국가 인사들이 참석하는 가톨릭 자선단체를 위한 연례 화이트 타이 모금 행사이다.
대교구장으로 임명된 후, 스펠먼은 루스벨트 대통령의 가까운 측근이 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루스벨트는 1943년 스펠먼에게 유럽, 아프리카, 중동 등 16개국을 4개월 동안 방문해 달라고 요청했다. 이는 그가 "공식 외교관보다 더 큰 자유"를 가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탈리아 전역 동안 스펠먼은 교황 비오 12세와 루스벨트 사이의 연락관 역할을 하며 로마를 폭격과 시가전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오픈 시티로 선포하려는 노력을 지원했다.
4.3. 미군 군종교구장
스펠먼은 1939년 12월 11일 교황 비오 12세에 의해 미군 군종교구장으로 임명된 이후, 제2차 세계 대전과 한국 전쟁을 비롯한 여러 분쟁 지역에서 미군 복무자들을 위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그는 전 세계에 주둔한 미군을 방문하여 사목 활동을 펼쳤으며, 특히 일본, 대한민국, 유럽 등지에 주둔한 병사들과 함께 많은 성탄절을 보내며 그들의 사기를 진작시켰다. 그의 광범위한 해외 방문은 그가 군종교구장으로서 군인들의 영적 필요를 충족시키고 교황청과 미국 정부 사이의 비공식적인 외교 채널 역할을 하는 데 기여했다.
5. 추기경 서임 및 영향력
교황 비오 12세는 1946년 2월 18일 추기경 회의에서 스펠먼을 산티 조반니 에 파올로의 추기경 사제로 서임했다. 역사가 윌리엄 V. 섀넌 (William V. Shannon윌리엄 V. 섀넌영어)에 따르면, 스펠먼은 "그의 신학과 세속 정치에 있어 깊이 반동적이었다."
1949년 퀸스의 칼바리 공동묘지에서 묘지기들이 임금 인상을 요구하며 파업에 돌입했을 때, 스펠먼은 그들을 공산주의자로 비난하고 성 요셉 신학대학의 신학생들을 파업 파괴자로 동원했다. 그는 미국 식량, 담배, 농업 및 연합 노동자 조합 소속 묘지기들의 행동을 "무고한 망자와 그 유족들, 그들의 종교와 인간적 품위에 대한 부당하고 부도덕한 파업"이라고 비난했다. 이 파업은 활동가 도로시 데이와 작가 어니스트 헤밍웨이 (Ernest Hemingway어니스트 헤밍웨이영어)의 지지를 받았는데, 헤밍웨이는 스펠먼에게 신랄한 비판 서한을 보냈다.
스펠먼은 1956년 윌리엄 J. 브레넌 주니어가 미국 대법원 대법관으로 임명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으나, 나중에 이를 후회했다. 윌리엄 O. 더글러스 대법관은 한때 "나는 우리의 미국적 이상을 크게 더럽혔다고 생각하는 몇몇 미국인들을 알게 되었다. 그 중 한 명이 스펠먼 추기경이었다"고 말했다.
스펠먼은 1958년 교황 선거에 참여하여 교황 요한 23세를 선출했다. 그는 요한 23세에 대해 경멸적인 태도를 보이며 "그는 교황이 아니다. 그는 바나나나 팔아야 할 사람이다"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1959년, 스펠먼은 과테말라에서 열린 성체 대회의 교황 특사로 봉사했으며, 여행 중 니카라과에 들러 교황의 명령에 반하여 미래의 독재자 아나스타시오 소모사 데바일레와 공개적으로 만났다.
가톨릭 언론인 레이먼드 애로요 (Raymond Arroyo레이먼드 애로요영어)가 2008년 퓰턴 셰언 (Fulton Sheen퓰턴 셰언영어)의 자서전 흙 속의 보물: 퓰턴 J. 셰언의 자서전 (Treasure in Clay: The Autobiography of Fulton J. Sheen흙 속의 보물: 퓰턴 J. 셰언의 자서전영어) 서문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스펠먼 추기경이 셰언을 방송에서 몰아냈다고 널리 알려져 있다." 셰언은 텔레비전에서 물러나라는 압력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뉴욕시의 교회에서 환영받지 못했다. 스펠먼은 성 패트릭 대성당에서 셰언의 연례 성 금요일 강론을 취소하고 성직자들이 주교와 친분을 맺는 것을 막았다."

역사가 팻 맥나마라 (Pat McNamara팻 맥나마라영어)는 스펠먼이 도시의 늘어나는 푸에르토리코인 공동체에 대한 봉사를 수년 앞선 것으로 평가했다. 그는 스페인어를 배우기 위해 사제들을 해외로 보냈으며, 1960년에는 대교구 본당의 4분의 1이 스페인어권 가톨릭 신자들을 위한 봉사를 제공했다. 추기경 재임 기간 동안 스펠먼은 15개의 교회, 94개의 학교, 22개의 사제관, 60개의 수녀원, 34개의 기타 기관을 건설했다. 그는 또한 에콰도르를 방문하여 세 개의 학교를 설립했는데, 키토에 있는 카디널 스펠먼 고등학교와 카디널 스펠먼 여학교, 그리고 과야킬에 있는 카디널 스펠먼 고등학교가 그것이다.
스펠먼은 모든 본당 건축 프로그램을 자신의 손에 집중시켜 은행가들로부터 더 좋은 이자율을 얻었으며, 비오 12세에게 제2차 세계 대전 후 바티칸의 이탈리아 중심 투자를 국제화할 필요성을 설득했다. 그의 재정적 수완 때문에 그는 때때로 "머니백 추기경"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6. 주요 활동 및 관점
6.1. 공산주의에 대한 입장
스펠먼은 한때 "진정한 미국인은 공산주의자도, 공산주의를 용인하는 사람도 될 수 없다"고 말했으며, "모든 미국인의 첫 번째 충성은 공산주의를 경계하며 제거하고 공산주의자들을 미국주의로 개종시키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조지프 매카시 상원의원이 1953년 연방 정부 내 공산주의 전복 세력을 조사한 것을 옹호하며, 1954년에는 매카시가 "우리에게 공산주의자와 공산주의 방식에 대해 알려주었다"며 "공산주의에 반대할 뿐만 아니라... 공산주의자들의 방식에도 반대한다"고 말했다.
1954년 일찍이 스펠먼은 아이젠하워 행정부에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서의 공산주의 진격에 대해 경고했다. 그는 1950년에 미래의 남베트남 대통령인 응오딘지엠을 만났고, 그의 강력한 가톨릭 및 반공산주의적 견해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베트민에게 프랑스가 패배한 후, 스펠먼은 아이젠하워 행정부에 분쟁 개입을 촉구하기 시작했다.
1965년 미국이 베트남 전쟁에 참전하자, 그는 개입의 강력한 지지자가 되었다. 1965년 12월, 일단의 대학생들이 반전 성직자들을 탄압하는 것에 항의하여 스펠먼의 거주지 밖에서 시위를 벌였다. 스펠먼은 1965년 성탄절을 남베트남에 주둔한 미군과 함께 보냈다. 그곳에서 그는 스티븐 디케이터 제독의 말을 인용하며 "내 조국, 항상 옳기를 바라지만, 옳든 그르든 내 조국"이라고 선언했다. 스펠먼은 또한 베트남 전쟁을 "문명을 위한 전쟁"이자 "베트콩과 북베트남 인민에 대한 그리스도의 전쟁"이라고 불렀다.
일부 비평가들은 베트남 전쟁을 "스펠리" (Spelly스펠리영어)의 전쟁이라고 불렀고, 스펠먼을 "성직자들의 밥 호프"라고 불렀다. 한 사제는 그가 "교황이 우리에게 내려놓으라고 간청하는 총에 축복을 내리고 있다"고 비난했다. 1967년 1월, 반전 시위대가 성 패트릭 대성당에서 미사를 방해했다. 스펠먼의 전쟁 지지와 교회 개혁 반대는 교회와 국가 내에서 그의 영향력을 크게 약화시켰다. 삽화가 에드워드 소렐 (Edward Sorel에드워드 소렐영어)은 1967년 스펠먼이 총검이 달린 소총을 들고 있는 모습을 그린 풍자 포스터 주님을 통과하고 탄약을 찬양하라 (Pass the Lord and Praise the Ammunition주님을 통과하고 탄약을 찬양하라영어)를 디자인했으나, 스펠먼이 인쇄 직후 사망하여 배포되지 않았다.
6.2. 사회 및 인권 문제
스펠먼은 미국 민권 운동 중 시위에 대해 개인적으로 반대 입장을 표명한 적이 있지만, J. 에드거 후버가 마틴 루터 킹 주니어를 비난해 달라는 요청은 거절했다. 그는 1965년 셀마 몽고메리 행진에 참여한 뉴욕 사제 및 수녀 그룹의 여행 비용을 지원했다. 스펠먼은 공공 주택에서의 인종 차별에 반대했지만, 대니얼 베리건과 그의 형제 필립 베리건을 비롯한 사제들과 젊은 멜키트 사제 데이비드 커크 (David Kirk데이비드 커크영어)와 같은 이들의 사회 활동에는 반대했다.
6.3. 문화 및 예술에 대한 관점
스펠먼은 대중문화에 대해 보수적이고 비판적인 태도를 보였다.
- 그는 1941년 그레타 가르보 주연의 영화 두 얼굴의 여인 (Two-Faced Woman두 얼굴의 여인영어)을 "죄악의 기회... 공공 도덕에 위험하다"고 비난했다. 그는 가르보의 레즈비언 및 양성애적 도덕성 의혹을 비난했다.
- 1947년 영화 포에버 앰버 (Forever Amber포에버 앰버영어)에 대한 스펠먼의 비난은 제작자 윌리엄 펄버그 (William Perlberg윌리엄 펄버그영어)로 하여금 "로마 가톨릭교회를 달래기 위해 영화를 검열하지 않겠다"고 공개적으로 선언하게 만들었다.
- 스펠먼은 1948년 이탈리아 영화 기적 (L'Amore사랑이탈리아어)을 "사악하고 해로운 영화... 모든 기독교인에 대한 비열한 모욕"이라고 불렀다.
- 그는 1956년 캐럴 베이커 주연의 영화 베이비 돌 (Baby Doll베이비 돌영어)을 "역겹고" "도덕적으로 혐오스럽다"고 비난했다.
- 1964년 홀로코스트 기간 동안 비오 12세의 행동에 대한 연극 대리인 (The Deputy대리인영어)이 브로드웨이에서 개막했을 때, 스펠먼은 이를 "위대하고 선량한 사람의 명예를 터무니없이 더럽히는 행위"라고 비난했다. 연극 제작자 허먼 슘린 (Herman Shumlin허먼 슘린영어)은 스펠먼의 발언을 "기독교인과 유대인 사이에 쐐기를 박으려는 계산된 위협"이라고 불렀다.
7. 정치 및 사회 참여
스펠먼은 그레이엄 바든 미 하원의원이 공립학교에만 연방 자금을 지원하려는 노력을 "가톨릭 어린이들에 대한 종교적 편견의 비겁한 십자군"이라고 비난했으며, 바든 자신을 "편협의 사도"라고 불렀다.
그는 1949년 엘리너 루스벨트 전 영부인이 자신의 칼럼 나의 하루에서 교구 학교에 대한 연방 자금 지원에 반대하는 입장을 표명하자 그녀와 격렬한 공개 논쟁을 벌였다. 이에 스펠먼은 그녀를 반가톨릭주의라고 비난하며 그녀의 칼럼을 "미국인 어머니에게 걸맞지 않은 차별 문서"라고 불렀다. 스펠먼은 결국 하이드 파크에서 루스벨트를 만나 논쟁을 해결했다.
존 F. 케네디 민주당 상원의원이 1960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을 때, 스펠먼은 그의 공화당 상대 후보인 비가톨릭 신자 리처드 닉슨 부통령을 지지했다. 이는 케네디가 교구 학교에 대한 연방 지원과 교황청 미국 대사 임명에 반대했기 때문이었다. 케네디 보좌관 데이비드 파워스 (David Powers데이비드 파워스영어)는 1960년에 케네디가 자신에게 "왜 스펠먼은 나에게 반대하는가?"라고 물었고, 파워스는 "스펠먼은 미국에서 가장 강력한 가톨릭 신자입니다. 당신이 대통령이 되면 당신이 그럴 것입니다"라고 답했다고 회상했다. 스펠먼의 닉슨 지지는 케네디 가문과의 오랜 관계를 끝냈다.
1964년 대통령 선거에서는 린든 B. 존슨 대통령을 지지했는데, 이는 존슨의 1965년 고등교육시설법과 1964년 경제 기회법이 가톨릭교회에 큰 혜택을 주었기 때문이었다.
8.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스펠먼은 1962년부터 1965년까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참석하여 의장단에 앉았다. 그는 바티칸이 공의회 위원회에 주로 자유주의적 성직자들을 임명하고 있다고 믿었다. 그는 미사에 자국어 사용을 도입하는 공의회 개혁에 반대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진정으로 가톨릭 언어인 라틴어는 불변하며, 저속하지 않고, 여러 세기 동안 서방 교회의 일치를 지켜왔습니다." 신학적으로 보수적이었지만, 스펠먼은 실용적인 이유로 에큐메니즘을 지지했다.
1963년 4월, 스펠먼은 알프레도 오타비아니 추기경(당시 신앙교리성 장관)이 존 코트니 머리 (John Courtney Murray존 코트니 머리영어) 신부에 대해 잘 알려진 적대감에도 불구하고 머리 신부를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페리투스 (peritus페리투스라틴어)로 데려왔다. 주미 교황 사절 에지디오 바뇨치 대주교는 머리 신부를 침묵시키려 했으나, 스펠먼과 머리 신부의 예수회 상급자들은 그를 대부분의 교황청 간섭 시도에서 보호했다. 머리 신부의 작업은 공의회의 종교 자유 선언을 형성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맥나마라 (Pat McNamara팻 맥나마라영어)에 따르면, 스펠먼의 머리 신부 지지는 공의회의 종교 자유 선언인 인간 존엄성 선언 (Dignitatis humanae인간 존엄성 선언라틴어) 초안 작성에 그의 상당한 영향력에 기여했다.
요한 23세의 사망 후, 스펠먼은 1963년 교황 선거에 참여하여 교황 바오로 6세의 선출에 기여했다. 스펠먼은 나중에 린든 존슨 대통령의 요청에 따라 1965년 미국의 도미니카 공화국 개입 이후 반미주의 정서를 완화하기 위해 사제들을 도미니카 공화국으로 파견하는 데 동의했다.
스펠먼은 교회, 학교, 병원 등 가톨릭 인프라를 광범위하게 건설하는 시기를 뉴욕 대교구에서 이끌었다. 그는 모든 본당 건축 프로그램을 자신의 손에 통합하여 은행가들로부터 더 좋은 이자율을 얻었으며, 비오 12세에게 제2차 세계 대전 후 바티칸의 이탈리아 중심 투자를 국제화할 필요성을 설득했다. 그의 재정적 수완 때문에 그는 때때로 "머니백 추기경"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9. 논란 및 비판
9.1. 성적 지향 및 동성애 관련 의혹
J. 에드거 후버 FBI 국장의 1991년 전기 작가인 커트 젠트리 (Curt Gentry커트 젠트리영어)는 후버의 파일에 "스펠먼이 매우 활동적인 동성애자였다는 수많은 주장"이 포함되어 있었다고 밝혔다.
2002년 언론인 미켈란젤로 시뇨릴레 (Michelangelo Signorile미켈란젤로 시뇨릴레영어)는 스펠먼을 "미국 가톨릭교회 역사상 가장 악명 높고 강력하며 성적으로 탐욕스러운 동성애자 중 한 명"이라고 불렀다. 존 쿠니 (John Cooney존 쿠니영어)는 스펠먼의 전기 미국의 교황 (The American Pope미국의 교황영어) (1984)을 출판했다. 시뇨릴레에 따르면, 쿠니의 원고에는 처음에는 연구원 C. A. 트립 (C. A. TrippC. A. 트립영어)을 포함하여 스펠먼의 동성애에 대한 개인적인 지식을 가진 여러 사람들과의 인터뷰가 포함되어 있었다. 시뇨릴레에 따르면, 가톨릭교회는 쿠니의 출판사인 타임스 북스에 스펠먼의 성적 지향을 다룬 네 페이지 분량을 한 단락으로 줄이도록 압력을 가했다. 출판된 책에는 다음과 같은 두 문장이 포함되어 있다. "수년 동안 스펠먼 추기경이 동성애자라는 소문이 무성했다. 그 결과, 많은 사람들은 대중적 도덕주의자 스펠먼이 육체의 사람과는 모순될 수 있다고 느꼈고, 지금도 그렇게 느낀다."
시뇨릴레와 존 러게리 (John Loughery존 러게리영어)는 스펠먼이 성적으로 활동적이었음을 시사하는 이야기를 인용한다. 그들은 또한 스펠먼이 1943년 브로드웨이 리뷰 원 터치 오브 비너스의 남성 합창단원과 개인적인 관계를 맺었다는 이야기를 전한다.
9.2. 베트남 전쟁 지지
스펠먼의 베트남 전쟁에 대한 강력한 지지는 그를 둘러싼 가장 큰 논란 중 하나였다. 그는 베트남 전쟁을 "문명을 위한 전쟁"이자 "베트콩과 북베트남 인민에 대한 그리스도의 전쟁"이라고 묘사하며 적극적인 개입을 촉구했다. 이러한 그의 입장은 "스펠리" (Spelly스펠리영어)의 전쟁이라는 비판적인 별명을 낳았고, 일부 비평가들은 그를 "성직자들의 밥 호프"라고 부르기도 했다. 한 사제는 그가 "교황이 우리에게 내려놓으라고 간청하는 총에 축복을 내리고 있다"고 비난하며 그의 전쟁 지지를 강력히 비판했다.
1967년 1월, 반전 시위대가 성 패트릭 대성당에서 미사를 방해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스펠먼의 전쟁 지지와 교회 개혁에 대한 반대는 교회와 국가 내에서 그의 영향력을 크게 약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삽화가 에드워드 소렐 (Edward Sorel에드워드 소렐영어)이 1967년 스펠먼이 총검이 달린 소총을 들고 있는 모습을 풍자한 포스터를 디자인했으나, 스펠먼이 인쇄 직후 사망하여 배포되지 못했다.
10. 수상 경력
- 뉴욕 백년 협회 골드 메달 상 (1946년) - "뉴욕시에 대한 뛰어난 공헌을 인정하여"
- 미국 재향군인회 공로 훈장 (1963년)
- 루벤 다리오 훈장 (니카라과 정부 최고 훈장, 1958년 중앙아메리카 방문 시 수여) - 1959년 니카라과 우표 발행으로 기념
- 미국 육군사관학교 실바누스 세이어 상 (1967년)
11. 유산 및 평가
11.1. 긍정적 평가
작가 러셀 쇼 (Russell Shaw러셀 쇼영어)는 스펠먼이 "20세기 중반 미국주의와 가톨릭주의의 융합을 구현했다"고 평가했다. 그의 "지속적인 업적은 개인에 대한 친절한 행동과 그가 설립하거나 강화한 종교 및 자선 기관들이었다"고 덧붙였다. 그는 뉴욕 대교구장으로서 15개의 교회, 94개의 학교, 22개의 사제관, 60개의 수녀원, 34개의 기타 기관을 건설하며 교구의 인프라를 크게 확장했다. 또한, 그는 푸에르토리코인 공동체에 대한 봉사를 시작하여 스페인어를 배우기 위해 사제들을 해외로 보내는 등 당시로서는 앞선 시도를 했다. 에콰도르에 세 개의 학교를 설립한 것도 그의 교육에 대한 헌신을 보여준다.
11.2. 비판 및 논쟁
스펠먼은 "그의 신학과 세속 정치에 있어 깊이 반동적이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윌리엄 O. 더글러스 대법관은 그를 "우리의 미국적 이상을 크게 더럽혔다고 생각하는 몇몇 미국인들 중 한 명"으로 꼽았다. 그는 교황 요한 23세에 대해 "그는 교황이 아니다. 그는 바나나나 팔아야 할 사람이다"라고 말하는 등 경멸적인 태도를 보였으며, 교황의 명령에 반하여 미래의 니카라과 독재자 아나스타시오 소모사 데바일레와 공개적으로 만나는 등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특히 베트남 전쟁에 대한 그의 강력한 지지는 "스펠리" (Spelly스펠리영어)의 전쟁이라는 비판을 받았으며, 반전 시위대의 표적이 되기도 했다. 그의 보수적인 문화관은 여러 영화와 연극에 대한 검열 및 비난으로 이어져 예술계와 갈등을 빚었다.
11.3. 문학적 유산
헨리 모턴 로빈슨의 1950년 소설 추기경 (The Cardinal추기경영어)은 부분적으로 스펠먼을 모델로 삼아 쓰여졌다. 이 소설은 1963년 영화 추기경으로 각색되었으며, 톰 트라이온이 추기경 역을 맡았다.
11.4. 기념물
1947년 7월, 포덤 대학교 캠퍼스에 그의 이름을 딴 예수회 기숙사 건물인 스펠먼 홀이 개관했다.
12. 사망
스펠먼은 1967년 12월 2일 78세의 나이로 뉴욕시에서 사망했다. 그는 성 패트릭 대성당의 주 제단 아래 지하 묘지에 안장되었다. 그의 장례 미사에는 린든 B. 존슨 대통령, 휴버트 험프리 부통령, 로버트 F. 케네디, 뉴욕 상원의원 제이컵 재비츠, 뉴욕 주지사 넬슨 록펠러, 뉴욕 시장 존 린지, 주유엔 미국 대사 아서 골드버그, 그리스 정교회 대주교 이아코보스 등 저명한 인사들이 참석했다.
13. 관련 항목
- 카디널 스펠먼 고등학교 (브록턴, 매사추세츠)
- 카디널 스펠먼 고등학교 (뉴욕시)
- 미국의 로마 가톨릭교회
- 로마 가톨릭교회의 교계제도
- 미국 가톨릭 주교 목록
- 미국 가톨릭 주교 목록: 군종 서비스
- 교황, 총대주교, 수석주교, 대주교, 주교 목록
- 스펠먼 우표 및 우편 역사 박물관
- 폴 마르친쿠스
14. 외부 링크
- [http://www.milarch.org/ Archdiocese for the Military Services, USA], 공식 웹사이트
- [http://www.gcatholic.org/dioceses/diocese/unit0.htm Archdiocese for the Military Services of the United States]
- [http://vault.fbi.gov/Cardinal%20Francis%20Spellman FBI file on Cardinal Spellman]
- [https://www.archny.org/ Roman Catholic Archdiocese of New York], 공식 웹사이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