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페터 슈라이어(독일어: Peter Schreier독일어, 1935년 7월 29일 - 2019년 12월 25일)는 20세기를 대표하는 리릭 테너 중 한 명이자 저명한 지휘자로, 오페라, 콘서트, 리트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며 국제적인 명성을 쌓았다. 그는 1963년부터 베를린 국립 오페라의 단원으로 활동하며 모차르트 작품의 주요 배역들을 소화했고, 특히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의 《크리스마스 오라토리오》와 수난곡에서 복음사가 역을 맡아 상징적인 해석으로 극찬받았다.
슈라이어는 동독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빈 국립 오페라,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등 세계 주요 무대에서 활발하게 공연했던 드문 예술가 중 한 명이었다. 그는 1970년대 초부터 지휘자로서도 활약하며 바흐, 모차르트, 하이든 등의 작품을 선호했으며, 때로는 성악가와 지휘자를 겸하기도 했다. 그는 텍스트에 대한 깊은 이해와 음악적 표현의 강렬함으로 평가받았으며, 에른스트 폰 지멘스 음악상, 레오니 소닝 음악상 등 다수의 권위 있는 상을 수상하며 음악계에 큰 유산을 남겼다.
2. 초기 생애 및 교육
페터 슈라이어는 유년 시절부터 체계적인 음악 교육을 받으며 음악적 재능을 키웠다.
2.1. 유년 시절과 교육
슈라이어는 1935년 7월 29일 독일 작센 자유주의 마이센에서 태어나 마이센 근교의 가우에르니츠라는 작은 마을에서 성장했다. 그의 아버지는 그 마을의 교사이자 교회의 성가대 지휘자, 그리고 오르간 연주자였다.
1945년 6월, 거의 10살이 되던 해, 드레스덴 폭격으로 도시가 파괴된 지 불과 몇 달 만에 슈라이어는 유명한 드레스덴 십자가 합창단의 기숙 학교에 입학했다. 당시 합창단은 재편되고 있었으며, 슈라이어는 다른 몇몇 소년 합창단원들과 함께 드레스덴 외곽의 지하에서 생활했다. 합창단 지휘자 루돌프 마우어스베르거는 그의 재능을 일찍이 알아보았고, 그에게 많은 알토 솔로 파트를 맡겼으며 그의 목소리를 염두에 둔 작곡을 하기도 했다. 이 시기(1948~1951년)의 솔로 녹음은 이후 음반으로 재발매되기도 했다.
슈라이어의 목소리가 변성된 것은 16세 때였다. 그는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의 수난곡과 《크리스마스 오라토리오》에 나오는 여러 복음사가 역이 모두 테너라는 점 때문에 열렬히 바라던 대로 테너가 되었다. 전문 성악가가 되기로 결심한 후, 그는 1954년부터 1956년까지 개인적으로 성악 레슨을 받았고, 이후 드레스덴 음악 대학에서 성악과 더불어 지휘를 공부했다.
3. 음악 활동
페터 슈라이어는 오페라, 콘서트, 리트 등 광범위한 분야에서 뛰어난 음악적 재능을 발휘하며 명성을 쌓았다.
3.1. 오페라 경력
페터 슈라이어는 1957년 드레스덴 국립 오페라에서 베토벤의 오페라 《피델리오》에서 첫 번째 죄수 역으로 전문적인 데뷔 무대를 가졌다. 그의 결정적인 성공은 1962년 모차르트의 오페라 《후궁으로부터의 유괴》에서 벨몬테 역을 맡으면서 이루어졌으며, 이후 《마술피리》에서는 타미노 역으로도 출연했다. 1963년에는 베를린 국립 오페라의 단원이 되었다.
1966년부터 그는 빈 국립 오페라의 연례 초청 가수로 오랜 기간 활동했다. 같은 해, 그는 바이로이트 축제에 카를 뵘의 지휘 아래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에서 젊은 뱃사람 역으로 데뷔했다. 이는 그의 유일한 바이로이트 출연이기도 했다. 1967년부터 25년간 그는 매년 열리는 잘츠부르크 축제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1969년에는 슈타츠카펠레 드레스덴이 참여한 CD 녹음에서 엥겔베르트 훔퍼딩크의 오페라 《헨젤과 그레텔》에서 마녀 역을 맡아 열연했다. 그는 경력 전반에 걸쳐 60개 이상의 오페라 배역을 소화했다.
특히 주목할 만한 점은 그가 한스 피츠너의 오페라 《팔레스트리나》의 주역을 세계 초연지이자 이 작품이 자주 공연되던 서독 뮌헨의 바이에른 국립 오페라뿐만 아니라, 반나치가 국시였던 동독의 동베를린에서도 노래했다는 것이다. 당시 독일 내에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는 문제였기에 이는 그의 경력에 있어 중요한 지점으로 여겨진다.
그는 바그너의 오페라에서 《라인의 황금》의 로게, 《지크프리트》의 미메 역을 맡아 뛰어난 연주를 선보였다. 또한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에서는 멜로트 역을 맡기도 했다.
3.2. 콘서트 및 리트 가창
슈라이어는 콘서트 무대에서도 뛰어난 역량을 보여주었으며, 특히 리트 레퍼토리에 대한 깊이 있는 해석으로 명성을 얻었다. 그는 활동 초기부터 독일 리트 가창으로 잘 알려져 있었고, 특히 프란츠 슈베르트와 로베르트 슈만의 걸출한 해석가로 평가받았다.
J.S. 바흐의 음악은 그의 젊은 시절부터 중요한 레퍼토리의 중심이었다. 그는 토마스 교회 합창단과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와 함께 에르하르트 마우어스베르거 지휘 아래 정기적으로 바흐 칸타타를 녹음했으며, 여기에는 1970년에 녹음된 오순절 칸타타 《Erschallet, ihr Lieder, erklinget, ihr Saiten!독일어 BWV 172》도 포함된다. 그는 바흐의 《마태 수난곡》에서 루돌프 마우어스베르거와 에르하르트 마우어스베르거, 카를 리히터, 클라우디오 아바도,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헬무트 릴링 등 여러 지휘자와 함께 복음사가 역으로 녹음했다. 또한 바흐의 《요한 수난곡》과 《크리스마스 오라토리오》도 헬무트 릴링과 함께 녹음했다.
슈라이어의 슈베르트 가곡집 《백조의 노래》와 《겨울 나그네》 녹음에 대해 비평가들은 그의 목소리가 더 이상 아름답지 않을 수도 있지만, 텍스트의 의미에 따른 음색의 범위와 억양의 강렬함이 가장 매혹적인 녹음 중 하나이며, 시에 대한 깊은 이해와 정확한 표현을 통해 격렬한 몰입감을 선사한다고 평가했다.
3.3. 국제적 활동
슈라이어는 동독 출신 예술가로는 드물게 국제 무대에서 활발하게 활동한 인물이었다. 그는 메트로폴리탄 오페라를 비롯한 세계 여러 곳에서 공연을 펼쳤다.
특히 그는 빈 국립 오페라에서 정기적으로 출연했는데, 1967년 타미노 역으로 데뷔한 이래 벨몬테, 모차르트의 《돈 조반니》의 돈 오타비오, 《이도메네오》의 타이틀 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카프리치오》의 플라망, 차이콥스키의 《예브게니 오네긴》의 렌스키, 로시니의 《세비야의 이발사》의 알마비바 백작, 바그너의 《라인의 황금》의 로게 역 등으로 총 200회 이상의 공연을 가졌다. 그의 이러한 국제적 활동은 냉전 시대 동독 예술가의 제약에도 불구하고 그의 뛰어난 음악적 역량과 세계적인 인정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4. 지휘 경력
1970년대 초부터 페터 슈라이어는 지휘자로서도 활동을 시작했으며, 특히 모차르트, 바흐, 하이든의 작품에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지휘했다. 그는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포함한 세계적인 오케스트라들을 지휘했다.
슈라이어의 지휘 활동에서 특히 흥미로운 점은 바흐의 오라토리오나 수난곡 연주 시 복음사가의 노래와 지휘를 동시에 겸하는 경우가 많았다는 것이다. 일례로 2005년 2월 4일 일본 이시카와현립 음악당에서 열린 오케스트라 앙상블 가나자와의 정기 공연에서는 바흐의 《마태 수난곡》 전곡을 암보로 지휘하면서 직접 복음사가를 노래하여 일본에서 마지막 복음사가 가창 무대를 선보였다. 이처럼 그는 자신이 깊이 이해하고 사랑하는 바흐 음악을 성악가이자 지휘자로서 입체적으로 표현해냈다.
5. 은퇴 및 말년 활동
페터 슈라이어는 2000년 6월 오페라 무대에서 은퇴했다. 베를린 국립 오페라에서의 마지막 역할은 모차르트의 《마술피리》의 타미노 역이었는데, 그는 더 이상 젊은 왕자 역을 연기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은퇴를 결심했다고 밝혔다.
그는 2005년 12월 22일 체코 프라하의 루돌피눔 드보르자크 홀에서 열린 체코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정기 연주회에서 바흐의 《크리스마스 오라토리오》 1부에서 3부를 지휘하고 동시에 복음사가를 노래하며 가수로서의 활동을 완전히 마무리했다. 전날 공연과 마찬가지로 약 1,100석 규모의 공연장은 만원이었다. 그는 이후에도 평생 꾸준히 불러왔던 프란츠 슈베르트와 로베르트 슈만의 가곡집은 계속 불렀다.
가수로서의 활동을 마무리한 후, 슈라이어는 지휘 활동과 후학 양성에 집중했다. 자신의 모교인 드레스덴 십자가 합창단의 지휘도 맡았으며, 젊은 음악가들을 육성하는 데 힘썼다.
그는 2005년 말 가수 생활에서 완전히 은퇴하고 이후 모든 공식 연주 활동에서 지휘에만 전념하겠다고 발표하며 세계 각지에서 고별 공연을 가졌다. 일본에서는 같은 해 11월 10일 오사카의 더 심포니 홀, 11월 12일과 14일 도쿄의 도쿄 오페라 시티 콘서트홀, 11월 16일 오카야의 오카야시 문화회관 카노라 홀에서 총 4차례 공연을 통해 팬들에게 작별 인사를 전했다. 오카야에서 열린 슈베르트의 가곡집 《겨울 나그네》 연주회는 일본에서 가수로서의 슈라이어를 만날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되었다.
6. 개인사
페터 슈라이어는 결혼하여 드레스덴의 로슈비츠 지역에 1945년부터 거주했다. 그는 오랜 투병 끝에 2019년 12월 25일 크리스마스에 드레스덴에서 84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는 아내 레나테와 두 아들 토르스텐, 랄프를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그의 장례식은 2020년 1월 8일 드레스덴 크로이츠교회에서 치러졌다.
7. 평가 및 유산
페터 슈라이어는 텍스트에 대한 깊은 공감 능력을 지닌 매우 지적인 성악가로 평가받았다. 비평가들은 그의 노래에 대해 "목소리는 더 이상 아름답지 않을지 몰라도, 음색의 폭과 단어의 의미에 따른 억양의 강렬함은 가장 설득력 있는 녹음 중 하나"라고 평했으며, "분위기 변화가 생생하게 전달되는 강렬하고 몰입감 있는 해석"이라고 극찬했다. 그는 특히 바흐 음악의 해석에 있어 가수이자 지휘자로서 최고 수준의 기량을 선보였으며, 당대 최고의 바흐 연주자 중 한 명으로 손꼽혔다.
모니카 그륀터스 독일 문화미디어 담당 연방 정부 위원은 슈라이어의 사망 후 그를 "우리나라에서 가장 인상적인 목소리 중 한 명"으로 추모하며, 그가 "세계 오페라 극장에서 문화 국가 독일을 대표했다"고 언급했다. 또한 그는 바흐의 수난곡에 나오는 복음사가 역으로 기억될 것이며, 40년에 걸친 경력 동안 음악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고 강조했다. 슈라이어는 지적인 가수이자 표현력이 풍부한 연주자로서 클래식 음악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그의 수많은 음반과 공연은 후대 음악가들에게 영감의 원천이 되고 있다.
8. 수상 및 영예
페터 슈라이어는 경력 전반에 걸쳐 수많은 상과 명예로운 칭호를 받았다.
- 캄머징어 (뛰어난 공로를 세운 성악가에게 부여되는 칭호) - 1963년 동독, 1980년 오스트리아, 1982년 바이에른 주에서 수여.
- 국가급 최우수상 (National First Class Prize of the GDR), 1967년
- 로베르트 슈만 상, 1969년
- 헨델 상, 1972년
- 독일민주공화국 국가상, 1972년
- 조국공로훈장 금장, 1984년
- 에른스트 폰 지멘스 음악상, 1988년
- 레오니 소닝 음악상, 1988년 (덴마크)
- 빈 음악협회 명예 회원, 1986년
- 인민우정의 별, 1989년
- 스웨덴 왕립 음악원 회원, 1989년
- 독일연방공화국 공로장 1급, 1993년
- 베를린 예술 아카데미 회원, 1993년
- 빈 플루트 시계상, 1994년
- 게오르크 필리프 텔레만 상, 1994년
- 독일 성경상 (바흐의 위대한 수난곡과 작품 해석에 대한 공로로), 1998년
- 유럽 교회 음악상, 2000년
- 마이센 시 명예 시민 (도시 복원을 위한 기금 모금 노력에 대한 공로로)
- 왕립 음악원/콘 재단 바흐 상, 2009년
- 후고 볼프 아카데미 후고 볼프 메달, 2011년 (슈투트가르트)
- 펠릭스 멘델스존 바르톨디 재단 국제 멘델스존 상, 2011년 (라이프치히)
- 라이프치히 바흐 축제 바흐 메달 (바흐 해석에 대한 공로로), 2013년
- 작센 공로훈장, 2016년
- 드레스덴 주도 예술상, 2016년
9. 음반 목록
페터 슈라이어는 성악가로서, 그리고 지휘자로서 수많은 중요한 음반을 녹음했다.
분류 | 작곡가 | 작품명 | 기타 정보 |
---|---|---|---|
가수 | 바흐 | 《마태 수난곡》 (복음사가 및 아리아) | 카를 리히터 지휘 |
가수 | 바흐 | 《요한 수난곡》 | 한스-요아힘 로츠쉬 지휘 |
가수 | 바흐 | 《크리스마스 오라토리오》 | 마르틴 플레미히 지휘, 드레스덴 필하모니, 드레스덴 십자가 합창단 |
가수 | 베토벤 | 《멀리 있는 연인에게》 Op. 98 | 안드라스 시프 (피아노) |
가수 | 베를리오즈 | 《레퀴엠》 | 샤를 뮌슈 지휘 |
가수 | 브람스 | 《아름다운 마겔로네》 | 안드라스 시프 (피아노) |
가수 | 모차르트 | 오페라 아리아 모음집 | |
가수 | 모차르트 | 《마술피리》 (타미노) | 볼프강 사발리슈 지휘 |
가수 | 모차르트 | 《사랑의 숨결. 모차르트 테너 페터 슈라이어》 | 오트마르 주이트너 지휘 |
가수 | 프로코피예프 - 힌데미트 | 가곡집 | |
가수 | 슈베르트 | 《아름다운 물방앗간 아가씨》 | 콘라트 라고스니히 (기타) |
가수 | 슈베르트 | 《겨울 나그네》 (성악 및 현악 사중주 편곡) | |
가수 | 슈베르트 | 슈베르트 가곡 모음집 | 안드라스 시프 (피아노) |
가수 | 쉬츠 | 《요한 수난곡》 SWV 481 / 《다비드 시편》 | 마르틴 플레미히 지휘 |
가수 | 슈만 | 《시인의 사랑》 | 크리스토프 에셴바흐 (피아노) |
가수 | 슈만 | 《시인의 사랑》 / 《리더크라이스》 Op. 39 | 노먼 셰틀러 (피아노) |
가수 | 컴필레이션 | 《소년 알토에서 서정적 테너로》 | |
가수 | 바그너 | 《트리스탄과 이졸데》 (멜로트) |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지휘 |
가수 | 볼프 | 괴테 가곡집 | 볼프강 사발리슈 (피아노) |
가수 | 볼프 | 뫼리케 가곡집 | 카를 엥엘 (피아노) |
지휘자 | 바흐 | 《크리스마스 오라토리오》 (발췌) | 슈타츠카펠레 드레스덴 |
지휘자 | 바흐 | 《요한 수난곡》 | 슈타츠카펠레 드레스덴 |
지휘자 | 바흐 | 《두 결혼 칸타타》 (Weichet nur, betrübte Schatten독일어, BWV 202 / O holder Tag, erwünschte Zeit독일어, BWV 210) | 베를린 실내 관현악단 |
지휘자 | 바흐 | 《세속 칸타타》 (Was mir behagt, ist nur die muntre Jagd독일어, BWV 208 / Ich bin in mir vergnügt독일어, BWV 204) | |
지휘자 | 바흐 | 《마태 수난곡》 | 라이프치히 방송 합창단, 슈타츠카펠레 드레스덴 |
지휘자 | 바흐 | 《나단조 미사》 | 라이프치히 방송 합창단, 슈타츠카펠레 드레스덴 |
지휘자 | 모차르트 | 《레퀴엠》 | 마거릿 프라이스, 트루델리제 슈미트, 프란시스코 아라이사, 테오 아담; 라이프치히 방송 합창단 & 슈타츠카펠레 드레스덴 |
10. 관련 서적 및 영상
페터 슈라이어에 관한 여러 서적과 다큐멘터리 영화가 제작되어 그의 삶과 예술을 조명하고 있다.
- 다큐멘터리 영화
- 《페터 슈라이어 - 모든 것에는 때가 있다》(독일어: Peter Schreier - Alles hat seine Zeit독일어). 83분 분량의 영화로, 하이데 블룸이 감독하고 제작했다. 2006년 작품이다.
- 관련 서적
- 고트프리트 슈미델: 《당신을 위한 페터 슈라이어 초상》(독일어: Peter Schreier für Sie porträtiert독일어). 라이프치히 VEB 도이처 페를라크 퓌어 무직, 1976년.
- 페터 슈라이어: 《내 시선으로 본 것들. 생각과 기억》(독일어: Aus meiner Sicht. Gedanken und Erinnerungen독일어). 동베를린, 1983년.
- 볼프-에버하르트 폰 레빈스키: 《페터 슈라이어: 인터뷰, 사실, 의견》(독일어: Peter Schreier: Interviews, Tatsachen, Meinungen독일어). 뮌헨, 마인츠: 피퍼, 쇼트, 1992년.
- 위르겐 헬프리히트: 《페터 슈라이어 - 한 삶의 멜로디》(독일어: Peter Schreier - Melodien eines Lebens독일어). 드레스덴 쿤스트 페를라크, 후숨, 2008년.
- 레나테 래츠: 《슈라이어, 페터》(독일어: Schreier, Peter독일어). 《동독 인물 사전》 5판, 2권, 베를린 Ch. 링크스, 2010년.
- 만프레트 마이어, 페터 슈라이어: 《백미러에서: 회상과 견해》(독일어: Im Rückspiegel : Erinnerungen und Ansichten독일어). 만프레트 마이어 기록. 빈: 슈타인바우어, 2005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