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초기 생애 및 교육
페데리코 프랑코는 1962년 7월 24일 아순시온에서 태어났다. 1982년 2월 20일 에밀리아 알파로와 결혼하여 슬하에 루이스 페데리코 프랑코, 클라우디아 바네사, 이반 알렉산더, 엔조 세바스티안 등 네 자녀를 두었다. 에밀리아 알파로는 2008년부터 2013년까지 파라과이 국회의원으로 선출되기도 했다.
그는 초등 교육을 도미니카 공화국에서 받았으며, 기초 과정은 국립 수도대학(National College of the Capital)에서 이수했다. 중등 교육은 아순시온에 위치한 사도 성 요셉 대학(Apostolic College San Jose)에서 마쳤다. 의사가 되기를 희망했던 그는 아순시온 국립대학교 의과대학에 입학하여 1986년 5.00점 만점에 4.56점의 평균 학점으로 외과 의사 학위를 취득했다. 이후 내과 분야에서 대학원 학위를 받았다.
2. 의료 경력
프랑코 가족은 페르난도 데 라 모라 시에 '사나토리오 프랑코'(Sanatorio Franco)라는 병원을 소유하고 있으며, 페데리코 프랑코와 그의 형제들은 병원 설립 초기부터 운영에 참여했다.
그는 1990년부터 1991년까지 클리닉 병원(Hospital de Clinicas, HC) 1CCM에서 인턴 및 레지던트 책임자를 역임했으며, 응급 호출 책임자로도 활동했다. 또한 1991년부터 1992년까지 의료 기호학 강사로, 1994년부터 1996년까지 국립 병원 책임자로, 같은 병원의 내과 레지던트 책임자로 근무했다. 이 외에도 국립 병원 의료 클리닉의 병실 책임자와 심장과 병동 책임자를 지냈다.
1991년 6월 24일에는 파라과이 내과 학회 회원으로 가입했으며, 파라과이 내과 학회 집행위원회 위원으로도 활동했다.
3. 정치 경력
페데리코 프랑코는 진정급진자유당(PLRA) 소속으로 정치 경력을 시작했다. 그는 2003년부터 2008년까지 센트랄 주의 주지사를 역임하며 주요 정치적 발판을 마련했다.
3.1. 센트랄 주지사
2003년부터 2008년까지 센트랄 주의 주지사로 재임하면서, 프랑코는 주의 행정을 총괄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진정급진자유당 내에서 지도적 역할을 공고히 했으며, 그의 행정 경험은 이후 부통령 및 대통령직으로 나아가는 기반이 되었다.
3.2. 파라과이의 부통령
2008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진정급진자유당은 페르난도 루고 후보를 지지할지, 아니면 루고와 함께 공동 후보로 나설지를 논의했다. 결국 후자의 선택이 우세하여 프랑코는 루고의 러닝메이트로 부통령 후보에 출마했다. 그는 2008년 8월 루고와 함께 부통령으로 당선되어 취임했다.
부통령 재임 기간 동안 프랑코는 루고 행정부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기도 했다. 특히 토지 관리 문제와 2009년 루고의 아들 관련 논란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를 냈다. 이러한 비판은 루고 행정부와의 긴장 관계를 드러내는 요소였다.
3.3. 파라과이 대통령 재임
2012년 6월 21일, 페르난도 루고 대통령은 탄핵 절차에 직면했으며, 다음 날인 6월 22일 상원에 의해 직위에서 해임되었다. 루고가 단 두 시간 만에 변론을 준비해야 했던 점 때문에 남미국가연합(UNASUR)은 루고의 해임이 사실상의 쿠데타에 해당한다고 우려를 표명했다. 루고의 탄핵 직후, 페데리코 프랑코는 한 시간 뒤 취임 선서를 하고 대통령직을 승계했다. 그는 루고의 남은 임기인 2013년 8월까지 대통령직을 수행했다. 파라과이 헌법은 대통령이 부분적인 임기를 수행했더라도 재선에 출마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으므로, 프랑코는 2013년 대선에 출마할 수 없었다.

3.3.1. 내각
페데리코 프랑코 대통령 재임 기간 동안 임명된 주요 장관들은 다음과 같다.
- 외교부 장관: 호세 펠릭스 페르난데스 에스티가리비아
- 재무부 장관: 마누엘 페레이라 브루스케티
- 내무부 장관: 카르멜로 카바예로
- 국방부 장관: 마리아 리스 가르시아 데 아르놀드
- 공공사업통신부 장관: 엔리케 살린 부사르키스
- 공중보건사회복지부 장관: 안토니오 아르보
- 농축산부 장관: 엔조 카르도소
- 교육문화부 장관: 오라시오 갈레아노 페로네
- 법무노동부 장관: 마리아 로레나 세고비아 아수카스
3.3.2. 정책 및 조치
프랑코 대통령은 취임 후 첫 조치 중 하나로 루벤 칸디아 아마리야를 내무부 장관에서 해임하고 카르멜로 카바예로를 임명했다. 칸디아 아마리야는 루고 대통령의 내무부 장관이었던 카를로스 필리솔라가 6월 15일 사임한 후 잠시 그 자리를 이어받았었다.
프랑코는 또한 리오 틴토 알칸과의 40.00 억 USD 규모의 알루미늄 공장 건설 협상을 즉시 재개했으며, 몬산토의 유전자 변형 대두 판매를 승인했다. 그는 또한 여러 농업기업 대표들을 자신의 정부에 임명했다. 이와 함께 사회 프로그램 예산 삭감과 공공 부문 해고도 발표되었다.
3.3.3. 부패 의혹
페데리코 프랑코의 대통령 재임 기간은 짧았고 초기 파라과이의 경제 상황이 양호했음에도 불구하고, 국가의 재정 적자가 크게 증가했다는 특징을 보였다. 그가 퇴임한 후, 후임 정부는 그가 진정급진자유당을 중심으로 조직된 광범위한 부패 및 엽관주의 시스템을 통해 국가 자원을 약탈했다고 비난했다.
전 대통령은 이후 여러 정치 협력자들로부터 공금 횡령 혐의로 고발당했으며, 이들 중 한 명은 부패 혐의로 6년 형을 선고받기도 했다. 2008년 정부에 취임한 시점부터 2012년 퇴임 시점까지 그의 재산은 거의 750% 증가한 것으로 보고되었다. 이러한 의혹들은 그의 재임 기간에 대한 주요 비판점으로 작용했다.
4. 개인적인 삶
페데리코 프랑코는 1982년 2월 20일 에밀리아 알파로와 결혼했다. 슬하에 루이스 페데리코 프랑코, 클라우디아 바네사, 이반 알렉산더, 엔조 세바스티안 등 네 명의 자녀를 두었다. 그의 아내 에밀리아 알파로는 2008년부터 2013년까지 파라과이 국회의원으로 활동하며 가족의 정치 참여를 이어갔다. 프랑코 가족은 페르난도 데 라 모라 시에 '사나토리오 프랑코'라는 병원을 소유하고 있으며, 이는 그의 의료 경력과 함께 가족 사업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그의 형제인 훌리오 세사르 프랑코 또한 상원의원이자 진정급진자유당의 전 의장, 그리고 전 부통령을 역임하는 등 가족 전체가 파라과이의 정치 및 사회에 깊이 관여하고 있다.
5. 선거 결과
페데리코 프랑코는 2008년 파라과이 대통령 선거에서 페르난도 루고의 러닝메이트로 부통령 후보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선거명 | 직책명 | 대수 | 정당 | 득표율 | 득표수 | 결과 | 당락 |
---|---|---|---|---|---|---|---|
2008년 선거 | 파라과이의 부통령 | 27대 | 진정급진자유당 | 42.40% | 766,502표 | 1위 | 당선 |
6. 평가 및 비판
페데리코 프랑코의 대통령 재임은 파라과이 정치사에서 논란의 여지가 많은 시기로 평가된다. 그는 페르난도 루고 대통령의 탄핵이라는 비정상적인 과정을 통해 대통령직을 승계했으며, 이 탄핵 절차 자체는 남미국가연합(UNASUR)을 비롯한 국제 사회로부터 '쿠데타'에 가깝다는 비판을 받았다. 루고에게 단 두 시간의 변론 시간만이 주어졌다는 점은 절차적 정당성에 대한 심각한 의문을 제기했다.
그의 짧은 재임 기간 동안 파라과이의 재정 적자가 크게 증가했으며, 후임 정부는 그가 진정급진자유당을 중심으로 한 광범위한 부패와 엽관주의 시스템을 통해 국가 자원을 약탈했다고 비난했다. 특히 2008년 정부 취임부터 2012년 퇴임까지 그의 개인 재산이 약 750% 증가했다는 보고는 부패 의혹을 더욱 증폭시켰다. 여러 정치 협력자들이 그의 지시로 공금을 횡령했다고 고발당하는 등, 그의 통치 기간은 재정 관리 부실과 부패 스캔들로 얼룩졌다. 이러한 비판은 그의 정치적 유산에 부정적인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7. 유산
페데리코 프랑코의 대통령 재임은 짧았지만, 페르난도 루고의 탄핵이라는 논란의 중심에 서 있었던 만큼 파라과이 정치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그의 집권은 파라과이 민주주의의 안정성과 제도적 취약성을 드러내는 사건으로 기록되며, 이후 파라과이 정치 지형에 지속적인 논쟁과 불신을 남겼다. 특히 그의 재임 중 불거진 재정 적자 증가와 부패 의혹은 그의 유산을 평가하는 데 있어 중요한 비판점으로 작용하며, 파라과이 정치의 투명성과 책임성에 대한 논의를 촉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