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파울 헤르만 뮐러(Paul Hermann Müller, Paul Hermann Müller파울 헤르만 뮐러독일어, 1899년 1월 12일 ~ 1965년 10월 13일)는 스위스의 화학자로, 1939년 DDT의 살충 효과를 발견하여 인류의 질병 퇴치와 식량 생산 증대에 크게 기여했다. 그의 이 중대한 발견은 제2차 세계 대전 중 티푸스, 말라리아와 같은 전염병 확산을 억제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으며, 이 공로를 인정받아 1948년 노벨 생리학·의학상을 수상했다. 뮐러는 의학 연구자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의학 분야에서 노벨상을 수상한 첫 번째 인물 중 한 명으로 기록될 만큼 그의 업적은 당시 전 세계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하지만 DDT는 환경 잔류성과 생물 농축 문제 등으로 인해 훗날 많은 비판과 논란의 대상이 되었으며, 현재는 대부분의 국가에서 사용이 금지되어 있다. 본 문서는 뮐러의 생애와 업적, 그리고 DDT와 관련된 긍정적 기여와 비판적 평가를 종합적으로 다룬다.

2. 생애 초기 및 교육
뮐러의 개인적 배경, 출생, 성장 과정, 가족 관계와 학업 배경은 그가 훗날 과학자로서 성공하는 데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2.1. 어린 시절과 가정
파울 헤르만 뮐러는 1899년 1월 12일 스위스 졸로투른주 올텐에서 고틀리프 뮐러와 파니 뮐러(결혼 전 성은 라입폴트) 사이에서 네 자녀 중 첫째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스위스 연방 철도에서 근무했으며, 이로 인해 가족은 처음에는 아르가우주 렌츠버그로 이주했고, 이어서 바젤로 거처를 옮겼다. 어린 시절부터 뮐러는 호기심이 많아 집에 작은 실험실을 만들어 사진 현상판을 개발하거나 라디오 장비를 조립하는 등의 실험 활동에 몰두했다. 마르고 창백한 외모 때문에 학창 시절 친구들에게 '유령'(The Ghost)이라는 별명으로 놀림을 받기도 했다.
2.2. 학업 배경
뮐러는 지역 초등학교와 상하위 레알슐레에서 교육을 받았다. 1916년에는 성적 부진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드라이푸스사에서 실험실 조수로 일하기 시작했다. 이듬해인 1917년에는 론자 AG 전기 공장의 과학 산업 연구실에서 조수 화학자로 근무했다. 1918년에 학업을 재개하여 1919년 중등 교육 졸업장을 취득하고 같은 해 바젤 대학교에 입학했다.
바젤 대학교에서 뮐러는 식물학과 물리학을 부전공하며 화학을 전공했다. 처음에는 프리드리히 피히터 밑에서 무기화학을 공부했으며, 1922년부터는 한스 루페의 유기화학 실험실에서 연구를 이어갔다. 루페의 조교로 일하면서 1925년 '비대칭 메타-실리딘 및 그 모노 및 디-메틸 유도체의 화학적 및 전기화학적 산화'를 주제로 한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이는 최우수 성적(summa cum laude)으로 평가받았다.
3. 초기 경력 및 연구 활동
파울 헤르만 뮐러는 가이기사에서 다양한 연구 활동을 수행하며 그의 경력을 시작했으며, 특히 살충제 연구에 몰두하게 된 계기는 당시 사회적 문제와 깊이 연관되어 있었다.
3.1. 가이기(Geigy)사 초기 활동
1925년 5월 25일, 뮐러는 바젤에 위치한 가이기사(J. R. Geigy AG, 현 노바티스) 염료 부서의 연구 화학자로 입사했다. 그는 가이기사에서 합성 염료와 식물성 염료, 그리고 천연 무두질 물질에 대한 초기 연구를 수행했다. 이 연구는 합성 무두질제인 일르가탄 G, 일르가탄 FL, 일르가탄 FLT 등의 개발로 이어졌다. 특히 1930년대에는 가죽을 무르게 하는 합성제인 일르가탄을 발명하기도 했다.
1935년부터 가이기사는 나방과 식물 보호 물질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으며, 뮐러는 식물 보호에 특히 큰 관심을 보였다. 그는 대학에서 식물학을 부전공으로 선택할 만큼 식물과 자연에 대한 애정이 깊었으며, 이러한 관심이 화학적 식물 보호 물질을 직접 합성하려는 목표로 이어졌다고 언급했다. 1937년에는 살균 및 살충 활성을 가진 새로운 로단화물(rhodanide) 및 사이안화물(cyanate) 기반 화합물 합성 기술에 대한 특허를 취득했다. 이어서 그는 당시 사용되던 수은 기반 살균제보다 안전한 종자 소독제인 그라미논(Graminone)을 개발하기도 했다.
3.2. 살충제 연구의 시작
무두질제와 살균제 연구에서의 성공에 힘입어 뮐러는 살충제 개발 임무를 맡게 되었다. 당시 이용 가능한 살충제는 고가의 천연 제품이거나 곤충에게 효과적이지 않은 합성 물질이었으며, 효과적이면서도 저렴한 화합물은 인간과 다른 포유류에게도 독성이 강한 비소 화합물뿐이었다.
뮐러는 연구 과정에서 곤충이 화학 물질을 포유류와 다르게 흡수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러한 차이점에 주목하여 그는 곤충에게만 독성을 나타내는 화학 물질이 존재할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했다. 그는 "가장 많은 곤충 종에 대해 빠르고 강력한 독성 효과를 나타내면서도 식물과 온혈 동물에게는 거의 또는 전혀 해를 끼치지 않는 이상적인 접촉성 살충제"를 합성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또한 생산 비용이 저렴하고 화학적 안정성이 높은 장기 지속성 살충제를 개발하는 데에도 주력했다.
뮐러의 이러한 목표 설정에는 두 가지 주요 동기가 있었다. 첫째는 당시 스위스에 발생한 심각한 식량 부족 사태로, 이는 곤충의 농작물 침입을 더 효과적으로 통제할 필요성을 절감하게 했다. 둘째는 러시아에서 발생한 역사상 가장 광범위하고 치명적이었던 티푸스 전염병이었다. 그는 1935년부터 이상적인 살충제 탐색을 시작했다. 당시의 살충제는 나방의 먹이를 통한 경구 섭취에 의존하여 효율성이 낮았으므로, 뮐러는 곤충의 체표면을 덮는 키틴질은 수용성 물질이 침투하기 어렵다는 점에 착안하여, 소수성 물질을 이용한 접촉성 살충제의 가능성을 탐구했다.
4. DDT의 발견 및 응용
파울 헤르만 뮐러의 DDT 발견은 체계적인 연구 끝에 이루어졌으며, 그 이후 전 세계적으로 질병 통제와 농업 생산성 향상에 혁명적인 영향을 미쳤다.


4.1. DDT 합성 및 특성 발견
뮐러는 살충제에 관한 모든 데이터를 검토하고, 자신이 찾고 있는 이상적인 살충제가 어떤 화학적 특성을 가져야 할지 결정한 후, 그 목적에 맞는 화합물을 찾기 위한 연구에 착수했다. 그는 4년간의 탐색 기간 동안 349번의 실패를 겪었으며, 마침내 1939년 9월, 자신이 찾던 화합물을 발견했다. 그는 특정 화합물이 도포된 우리 안에 파리 한 마리를 넣었고, 잠시 후 파리는 죽었다.
뮐러가 우리에 넣은 이 화합물은 바로 다이클로로다이페닐트라이클로로에테인(dichlorodiphenyltrichloroethane, DDT), 더 정확히는 1,1,1-트라이클로로-2,2-비스(4-클로로페닐)에테인이었다. 이 물질은 오스트리아의 약리학자 오트마어 차이들러(Othmar Zeidler)가 1874년에 처음 합성한 것이었다. 차이들러는 자신의 합성 과정을 논문으로 발표했지만, 이 새로운 화합물의 특성을 심도 있게 연구하지 않아 살충제로서의 놀라운 가치를 인식하지 못했다. 뮐러는 DDT가 자신이 그토록 찾아왔던 물질임을 빠르게 깨달았다. 처음에는 합성 경로가 단순한 클로로벤젠 유도체에서 좋은 결과를 얻었으며, 이를 통해 유기 염소 화합물의 가능성을 탐구하던 중 DDT를 발견하게 되었다. DDT는 절지동물(곤충)에게만 독성을 발휘하며 인간, 가축, 농작물에는 무해하다는 점이 특히 매력적이었다. 또한 안정적이고 무취이며 살포에도 적합했다.
4.2. 효능 검증 및 특허 등록
스위스 정부와 미국 농무부는 DDT에 대한 시험을 통해 콜로라도 감자벌레에 대한 효능을 확인했다. 추가적인 시험에서는 모기, 이, 벼룩, 모래파리 등 광범위한 해충에 대한 놀라운 효과가 입증되었는데, 이들 해충은 각각 말라리아, 티푸스, 페스트, 다양한 열대병을 확산시키는 주요 매개체였다.
뮐러는 1940년 스위스에서 DDT에 대한 특허를 취득했으며, 이어서 1942년 영국, 1943년 미국과 오스트레일리아에서도 특허를 등록했다.
4.3. 전 세계적 적용 및 영향
특허 등록 후 가이기사는 DDT 기반 제품 두 가지를 시장에 출시했다. 하나는 5% 분말 형태의 살충제인 게사롤(Gesarol) 스프레이였고, 다른 하나는 3% 분말 형태의 살충제인 네오시드(Neocid) 더스트였다. 'DDT'라는 명칭은 1943년 영국 공급부에서 처음 사용되었으며, 같은 해 5월 미국 육군 보급 목록에 추가되었다. 또한 1943년에는 DDT가 성충 모기 매개체에 대한 잔류성 살충제로 처음으로 실용적인 시험에 사용되었다. 이듬해인 1944년 이탈리아에서는 말라리아모기 매개체와 말라리아 발병률에 미치는 영향을 시험하기 위해 공동체의 모든 거주지와 부속 건물 내부에 DDT 잔류량을 적용하는 시험이 수행되었다.
DDT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수백만 명의 생명을 구하는 데 기여했다. 특히 1943년 연합군이 이탈리아 남부 중심 도시 나폴리를 점령했을 때, 당시 이탈리아 전선에서 발진티푸스가 유행하고 있어 전선의 향방을 좌우할 수 있는 심각한 문제였다. 1944년 1월, 나폴리 시민 전원에게 DDT가 살포되었고, 이가 전멸하면서 발진티푸스 유행이 종식되었다. 약물로 전염병 유행을 통제한 것은 이것이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1950년대부터 1970년대 사이에는 DDT가 미국을 포함한 여러 국가에서 말라리아를 완전히 박멸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5. 후기 경력 및 인정
뮐러는 DDT 발견 이후 다양한 업적과 영예를 얻었으며, 이는 그의 과학적 기여가 얼마나 혁신적이었는지를 보여준다.
5.1. 노벨상 수상
파울 헤르만 뮐러는 1946년 가이기사의 식물 보호 물질 과학 연구 부국장으로 임명되었다. 1948년에는 "여러 절지동물에 대한 접촉독으로서의 DDT의 높은 효율성을 발견한 공로"로 노벨 생리학·의학상을 수상했다. 그가 의사나 의학 연구자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 영예를 얻었다는 사실은 DDT가 인간 질병 퇴치에 미친 지대한 영향을 반영한다. 노벨 위원회는 "DDT는 강제 수용소, 교도소 및 강제 이주자들의 철수 과정에서 대량으로 사용되었다. 의심할 여지 없이 이 물질은 이미 수십만 명의 생명과 건강을 보존했다"고 평가했다. 1951년 뮐러는 제1회 린다우 노벨상 수상자 회의(Lindau Nobel Laureate Meeting)에 참석한 7명의 노벨상 수상자 중 한 명이었다.
5.2. 기타 수상 및 직책
1948년 노벨 생리학·의학상 외에도 뮐러는 지중해 지역에 대한 DDT의 영향력을 인정받아 1962년 그리스의 테살로니키 대학교에서 명예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리스 정부는 국내 말라리아 박멸에 기여한 공로로 뮐러를 특별히 예우했으며, 1963년 그를 국가 영웅으로 환영했다. 또한 1963년에는 테살로니키 시로부터 금메달을 수여받았다.
그는 가이기사의 부사장직을 역임했으며, 그 외에도 다음과 같은 명예 직책과 상을 받았다.
- 1949년: 스위스 자연 연구 학회 명예 회원
- 1949년: 파리 산업 화학회 명예 회원
- 1951년: 레알레 파르나소스 국제 아카데미(나폴리) 명예 회원
- 1952년: 국제 식물약제 및 식물병리학회(파리) 명예 훈장
- 1954년: 브라질 군의학 아카데미(리우데자네이루) 명예 회원
- 라플라타 국립대학교 명예 박사 학위
- 에스쿠엘라 수페리오르 테크니카 에 인베스티가시온 시엔티피카(부에노스아이레스) 명예 교수직
5.3. 은퇴 후 활동
뮐러는 1961년 가이기사에서 은퇴했지만, 이후에도 자택 실험실에서 연구 활동을 계속했다.
6. 개인 생활
뮐러의 결혼, 가족, 취미 등 대중에게 알려진 개인적인 측면은 그의 과학적 업적만큼이나 그의 인간적인 면모를 보여준다.
6.1. 가족 및 성격
뮐러는 1927년 프리델 뤼에그세거와 결혼하여 두 아들인 하인리히(1929년생), 니콜라우스(1933년생)와 딸 마르가레타(1934년생)를 두었다. 그의 아내는 뮐러가 화학 연구에 전념할 수 있도록 가정을 돌보고 자녀들을 양육했다. 뮐러는 독립적이고 고독한 성향의 인물로 평가받았으며, 그의 딸 마르가레타는 그를 '자신의 빵을 만드는 사람'이라는 뜻의 Eigenbrötler아이겐브뢰틀러독일어라고 불렀다. 그는 대학 멘토였던 프리드리히 피히터에게 많은 것을 배우며 삶의 모든 측면에서 결단력과 끈기를 보여주었다.
6.2. 취미 및 관심사
자유 시간에 뮐러는 스위스 알프스와 스위스 쥐라산맥의 자연을 즐겼으며, 그곳에 작은 휴가용 주택을 소유하고 있어 오랜 관심사였던 식물학 연구를 다시 시작할 수 있었다. 또한 그는 정기적으로 가꾸는 작은 과수원을 소유하고 있었다. 뮐러는 정원 가꾸기, 산 야생화 사진 촬영, 이른 아침 자녀들과 함께하는 자연 산책을 통해 휴식을 취하곤 했다. 그는 아내와 함께 글루크의 오페라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케>의 플루트와 피아노 2중주를 자주 연주하며 음악을 즐기기도 했다. 주말에는 산에서 독서를 하며 식물 보호 및 해충 방제 과학에 몰두했는데, 이러한 깊은 관심이 가이기사에서의 살충제 연구와 궁극적으로 DDT의 살충 특성 발견으로 이어졌다.
7. 사망
파울 헤르만 뮐러는 짧은 투병 끝에 1965년 10월 13일 이른 아침 바젤에서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사망했다. 일부 자료에서는 10월 12일로 기록되어 있기도 하다.
8. 유산과 평가
파울 헤르만 뮐러의 DDT 발견은 인류에게 혁명적인 공헌을 했지만, 동시에 환경적 문제와 논란을 야기하며 복합적인 유산을 남겼다.
8.1. 긍정적 기여
DDT의 발견은 전 세계적인 보건 위생 개선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DDT는 발진티푸스, 말라리아, 황열과 같은 치명적인 질병의 매개체인 이, 모기, 벼룩 등을 효과적으로 통제하여 수백만 명의 생명을 구하고 전염병 확산을 방지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특히 1944년 이탈리아 나폴리에서 발생한 대규모 발진티푸스 유행을 DDT 살포로 성공적으로 종식시킨 사례는 그 효능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노벨 위원회는 뮐러의 업적에 대해 "DDT가 수용소, 교도소, 이재민 수용소 등에서 대량으로 사용되었으며, 수십만 명의 생명과 건강을 보호했다"고 강조했다. 1950년대에서 1970년대 사이에는 미국을 포함한 많은 국가에서 DDT 덕분에 말라리아가 거의 박멸되는 성과를 거두었다. 그의 연구는 또한 농업 분야에서 해충으로부터 농작물을 보호하고 식량 생산성을 크게 향상시켜 식량 부족 문제 해결에 기여했다. DDT는 살충제 연구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으며, 그의 혁신적인 접근 방식은 후속 살충제 개발에도 영향을 미쳤다.
8.2. DDT 관련 비판 및 논란
DDT는 뛰어난 살충 효과에도 불구하고 곧 여러 가지 심각한 비판과 논란에 직면했다. 가장 큰 문제는 DDT가 자연 환경에서 쉽게 분해되지 않고 오래 잔류하는 환경 잔류성이었다. 또한 지방에 잘 녹는 지용성 특성 때문에 생물의 체내에 축적되고, 먹이 사슬을 통해 상위 포식자로 갈수록 농도가 높아지는 생물 농축 현상을 야기했다. 이는 특히 조류의 알 껍질을 얇게 만들어 번식을 방해하거나, 특정 생물종에 직접적인 독성을 유발하는 등 생태계에 심각한 피해를 주었다.
이러한 문제들은 레이철 카슨의 저서 <침묵의 봄>(1962년)을 통해 대중에게 널리 알려지면서 DDT에 대한 광범위한 환경 운동과 비판이 촉발되었다. 또한 해충들이 DDT에 대한 저항성을 발달시키기 시작하면서 장기적인 효과가 감소하는 문제도 발생했다. 결국 DDT는 환경과 생태계에 미치는 부정적인 영향 때문에 전 세계적으로 제조 및 사용이 단계적으로 또는 전면적으로 금지되었다. 일본에서는 1970년에 사용이 금지되었고, 미국은 1972년에 농업용 사용을 금지했다. 이러한 규제는 말라리아를 매개하는 얼룩날개모기 등 일부 해충에 대한 강력한 통제 수단을 잃게 되어, 일부 지역에서는 말라리아가 다시 확산되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했다. 이러한 이유로, DDT는 과학 기술의 발전이 가져온 긍정적 효과와 예상치 못한 부작용 사이의 복잡한 관계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평가받는다.
9. 주요 저작물
파울 헤르만 뮐러가 발표한 주요 논문과 학술 저작물은 다음과 같다.
- Die chemische und elektrochemische Oxidation des as. m-Xylidins und seines Mono- und Di-Methylderivates, 바젤 대학교, 철학부. 취임 논문, 바젤 (1925)
- 프리드리히 피히터, 파울 헤르만 뮐러. Chemische und elektrochemische Oxydation des as. m-Xylidins und seines Mono- und Di-Methylderivats, Helvetica Chimica Acta, 8권 1호, 290-300쪽 (1925)
- P. 로이거, H. 마르틴, 파울 헤르만 뮐러. Über Konstitution und toxische Wirkung von natürlichen und neuen synthetischen insektentötenden Stoffen, Helv. Chim. Acta., 27권 1호, 892-928쪽, 제네바/바젤 (1944)
- 파울 헤르만 뮐러. Über Zusammenhänge zwischen Konstitution und insektizider Wirkung, Helv. Chim. Acta, 29권, 1560-1580쪽, 제네바/바젤 (1946)
- 파울 헤르만 뮐러. Relations entre la constitution chimique et l'action insecticide dans le groupe de Dichlorodiphényltrichloroéthane et Dérivés apparantes, Compte-Rendu du Premier Congrès International de Phytopharmacie. Hévérle, 97쪽 (1946)
- 파울 헤르만 뮐러. Dichlorodiphenyläthan und neuere Insektizide. Nobel lecture, delivered 11. December 1948. In "Les Prix Nobel en 1948", Kungl.Boktryckeriet P. A. Norstedt & Söner, 122-123쪽, 스톡홀름 (1949)
- 파울 헤르만 뮐러. Physik und Chemie des Dichlorodiphenyläthans, Ergebn. Hyg. Bakteriol. Immunitätsforsch. exp. Therap., 8-17쪽, 베를린/괴팅겐/하이델베르크 (1949)
- 파울 헤르만 뮐러. DDT and the newer insekticides, Proceedings of the 2nd International Congress on Crop Protection, 런던 (1949)
- 파울 헤르만 뮐러, M. 스핀들러. Die Chemie der Insektizide, ihre Entwicklung und ihr heutiger Stand, Experientia, 10권 3호, 91-131쪽, 바젤 (1954)
- 파울 헤르만 뮐러. Chlorierte Kohlenwasserstoffe in der Schädlingsbekämpfung. In: Ullmanns Encyklopädie der technischen Chemie. 5. Band, Urban & Schwarzenberg, 477-486쪽, 뮌헨/베를린 (1954)
- 파울 헤르만 뮐러. Physik und Chemie des DDT-Insektizides. In: DDT, das Insektizid Dichlorodiphenyläthan und seine Bedeutung Vol I, Birkhäuser, 29-89쪽, 바젤/슈투트가르트 (1955)
- 파울 헤르만 뮐러. Verwendung der Antibiotica im Pflanzenschutz und Vorratsschutz, Antibiotica et Chemotherapia, 6권, 1-40쪽, 바젤/뉴욕 (1959)
- 파울 헤르만 뮐러. Zwanzig Jahre wissenschaftliche - synthetische Bearbeitung des Gebietes der synthetischen Insektizide, Naturwiss. Rdsch., 14권, 209-219쪽, 슈투트가르트 (1961)
- 파울 헤르만 뮐러. Schädlingsbekämpfung; Insekticide und andere Insektenbekämpfungsmittel. In: Ullmanns Encyklopädie der technischen Chemie. 15. Band, Urban & Schwarzenberg, 103-131쪽, 뮌헨/베를린 (19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