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생애 초기 및 선수 경력 시작
파브리초 폴레티는 이탈리아 에밀리아로마냐주 페라라 도의 본데노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다.
1.1. 출생 및 유년 시절
폴레티는 1943년 7월 13일 이탈리아 에밀리아-로마냐 주 본데노에서 태어났다. 1957년부터 1961년까지 지역 유소년 클럽인 본데네세에서 뛰었다.
1.2. 초기 프로 데뷔
1960-61 시즌에 토리노 FC 성인팀에 합류했지만 출전 기회를 얻지 못했던 폴레티는, 1961-62 시즌 세리에 D의 아스티로 임대되어 프로 경력을 시작했다. 아스티에서 그는 24경기에 출전하여 2골을 기록하며 프로 데뷔 시즌을 성공적으로 마쳤다. 이후 1962-63 시즌을 앞두고 원소속팀인 토리노로 복귀했다.
2. 클럽 경력
폴레티는 토리노 FC에서 가장 빛나는 시기를 보냈으며, 이후 칼리아리와 삼프도리아에서도 활약하며 프로 경력을 이어갔다.
2.1. 토리노 FC
1962년에 18세의 나이로 토리노에 입단한 파브리초 폴레티는 1971년까지 9시즌 동안 팀의 핵심 수비수로 활약했다. 그는 1962년 10월 21일 제노아와의 세리에 A 원정 경기에서 0-1로 패했지만 토리노 데뷔전을 치렀다. 토리노 소속으로 그는 모든 대회를 통틀어 275번의 공식 경기에 출전했으며, 이는 세리에 A 224경기 (18골), 코파 이탈리아 37경기 (4골), 유럽대항전 14경기 (1골)를 포함한다. 친선 경기 10경기를 포함하면 총 285경기에 출전하여 23골을 기록했다. 이러한 기록으로 그는 구단 역대 최다 출장자 순위에서 14위에 이름을 올렸다.
폴레티는 동료 나탈리노 포사티와 함께 당시 세리에 A에서 가장 강력한 측면 수비 라인을 구축했다. 네레오 로코 감독의 지휘 아래 그는 공격과 수비 양면에 효율적으로 기여하는 '양방향 수비수'로 성장했다. 또한 수비수임에도 불구하고 팀의 주요 페널티 킥 전담 키커를 맡아 그의 경력 전반에 걸쳐 여러 중요한 골을 기록했다. 토리노에서 폴레티는 코파 이탈리아에서 두 차례 우승컵을 들어 올렸다. 이는 1967-68 시즌과 1970-71 시즌에 달성한 업적이다.

2.2. 이후 클럽 경력
토리노를 떠난 후, 폴레티는 1971년부터 1974년까지 칼리아리에서 활약하며 64경기에 출전해 1골을 기록했다. 이어서 1974-75 시즌에는 삼프도리아로 이적하여 5경기에 출전했으며, 친선 경기 1경기를 더 치른 후 해당 시즌을 끝으로 현역에서 은퇴했다. 그는 총 13시즌 동안 세리에 A에서 294경기에 출전하여 20골을 넣었으며, 모든 대회를 통틀어 프로 경력 동안 344경기에 출전하여 24골을 기록했다.
3. 국가대표팀 경력
파브리초 폴레티는 이탈리아 국가대표팀에서도 활약했으며, 특히 1963년 지중해 게임에서 금메달을 획득하고 1970년 FIFA 월드컵에 참가하여 팀의 준우승에 기여했다.
3.1. 1963년 지중해 게임
폴레티는 이탈리아 B 대표팀 소속으로 6경기에 출전했다. 1963년 나폴리에서 개최된 1963년 지중해 게임에 참가하여 이탈리아 팀이 축구 종목에서 금메달을 획득하는 데 기여했다.
3.2. 1970년 FIFA 월드컵
1965년부터 1970년까지 이탈리아 국가대표팀에서 6경기에 출전한 폴레티의 첫 국가대표팀 경기는 1965년 6월 16일 스웨덴과의 경기였다. 그는 1970년 FIFA 월드컵 이탈리아 대표팀의 일원으로 대회에 참가했으며, 이탈리아는 이 대회에서 준우승을 차지했다.
특히 논란의 여지가 있었던 경기는 "세기의 경기"로 불리는 서독과의 준결승전이었다. 폴레티는 연장전에서 부상당한 로베르토 로사토를 대신하여 교체 출전했다. 이 경기에서 게르트 뮐러의 골이 터졌을 때, 폴레티와 이탈리아의 골키퍼 엔리코 알베르토시는 두 선수 간의 수비적인 오해로 인해 실점의 책임이 있다는 비판을 받았다. 이탈리아는 준결승에서 승리했지만, 결승전에서 브라질에 1-4로 대패하며 준우승에 머물렀다.
4. 감독 경력
선수 은퇴 후 파브리초 폴레티는 감독으로서 새로운 경력을 시작했다. 1978년 1월, 그는 세리에 D 소속의 수차라의 감독으로 부임하여 잔프랑코 보차노의 뒤를 이었다. 그러나 팀의 프로모치오네 리그 강등을 막지는 못했다. 이후 1987년부터 1988년까지 파엔차의 감독을 맡기도 했다. 1980년대에 파트너인 마리차와 함께 코스타리카로 이주하여 정착한 폴레티는 현재 그곳에서 축구 지도자로 활동하고 있다.
5. 사생활
파브리초 폴레티는 슬하에 마르코와 에리카 두 자녀를 두었으며, 밀레나, 파비올라, 마르티나 세 손주와 사무엘레, 초에 두 증손주가 있다. 그의 개인적인 삶에서 가장 비극적인 사건은 1967년 10월 15일 토리노에서 발생했다. 코르소 레 움베르토 길을 건너던 중 자동차에 치인 사고로, 폴레티는 다리에 경미한 부상을 입었으나, 당시 그와 함께 있었던 절친한 친구이자 토리노 팀 동료인 지지 메로니가 이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이 사고는 삼프도리아와의 경기 직후에 일어난 비극이었다.
6. 수상
파브리초 폴레티는 선수 경력 동안 클럽과 국가대표팀에서 여러 중요한 우승을 달성했다.
6.1. 클럽 수상
- 토리노
- 코파 이탈리아: 1967-68, 1970-71
6.2. 국가대표팀 수상
- 이탈리아
- 지중해 게임: 1963 (금메달)
- 월드컵 준우승: 1970
6.3. 개인 수상
- 용기의 선수 금메달상 (Medaglia d'oro al valore atletico)
7. 평가 및 논란
파브리초 폴레티는 수비수로서의 효율성과 다재다능함으로 평가받았지만, 특정 국제 경기에서의 실책으로 인해 논란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7.1. 기여와 업적
폴레티는 수비수로서 공수 양면에 걸쳐 효율적인 기여를 하는 선수로 평가받았다. 특히 그는 팀의 주된 페널티 킥 전담 키커를 맡아 수비수임에도 불구하고 여러 중요한 득점을 기록하며 팀의 공격에 크게 기여했다. 이는 그의 다재다능함과 경기 기여도를 보여주는 부분이다. 토리노에서 두 차례의 코파 이탈리아 우승을 이끌었으며, 이탈리아 국가대표팀의 1970년 FIFA 월드컵 준우승 멤버로 활약한 것은 그의 주요 업적으로 꼽힌다.
7.2. 특정 논란
파브리초 폴레티와 관련된 가장 큰 논란은 1970년 FIFA 월드컵 준결승전에서 발생했다. 이 경기에서 게르트 뮐러가 득점한 실점 상황에서, 폴레티와 당시 이탈리아 골키퍼 엔리코 알베르토시 사이에 수비적인 오해가 있었다는 지적을 받았다. 이 실점은 "세기의 경기"로 불리는 이 역사적인 준결승전의 중요한 순간이었으며, 폴레티와 알베르토시는 이로 인해 비판적인 시각에 직면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