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초기 생애 및 교육
페트로샨의 어린 시절은 제2차 세계 대전의 어려움과 함께 시작되었으며, 체스에 대한 그의 초기 관심은 저명한 체스 이론가들의 영향을 받았다.
1.1. 출생 및 어린 시절
페트로샨은 1929년 6월 17일 조지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트빌리시에서 아르메니아인 부모에게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그는 형 흐마야크와 누나 바르투쉬처럼 학업에 뛰어났고 공부를 즐겼다. 그는 8세에 체스를 배우기 시작했지만, 문맹이었던 그의 아버지 바르탄은 체스가 아들에게 직업으로서 성공을 가져다줄 것 같지 않다고 생각하여 학업을 계속하도록 격려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페트로샨은 고아가 되었고 생계를 위해 거리를 청소해야 했다. 이 무렵 그의 청력이 나빠지기 시작했으며, 이 문제는 평생 그를 괴롭혔다. 1969년 타임지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당시를 회상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한겨울에 거리를 청소하기 시작했는데 정말 끔찍했어요. 물론 그때는 기계가 없었으니 모든 것을 손으로 해야 했죠. 몇몇 나이 든 남자들이 저를 도와줬어요. 저는 약한 소년이었으니까요. 그리고 거리 청소부라는 것이 부끄러웠어요. 그건 당연한 일이겠죠. 이른 아침 거리가 텅 비어 있을 때는 괜찮았지만, 날이 밝아지고 사람들이 나오기 시작하면 정말 싫었어요. 병에 걸려 학교를 1년 쉬었죠. 아버지의 여동생인 바부슈카가 있었는데, 그분이 저를 정말 살려주셨어요. 제가 아프고 배고플 때 먹을 빵을 주셨죠. 그때부터 청력 문제가 시작되었어요. 어떻게 된 일인지는 기억나지 않아요. 그 시절은 그다지 명확하지 않네요."
1.2. 교육 및 초기 영향
페트로샨은 자신의 배급량을 사용하여 덴마크의 그랜드마스터 아론 니밈조비치의 체스 프락시스(Chess Praxis)를 구입했는데, 이 책은 훗날 그가 체스 선수로서 가장 큰 영향을 받았다고 언급한 책이다. 그는 또한 루돌프 슈필만의 체스에서의 희생의 기술(The Art of Sacrifice in Chess)도 구입했다. 페트로샨의 체스에 초기 영향을 미친 또 다른 선수는 호세 라울 카파블랑카였다. 12세에 그는 티플리스 개척자 궁전에서 아르칠 에브랄리제의 지도를 받으며 훈련을 시작했다. 에브랄리제는 니밈조비치와 카파블랑카의 지지자였으며, 체스에 대한 그의 과학적인 접근 방식은 무모한 전술과 불확실한 조합을 권장하지 않았다. 그 결과, 페트로샨은 카로칸 디펜스와 같은 견고한 포지션 오프닝 레퍼토리를 개발했다. 개척자 궁전에서 단 1년 훈련한 후, 그는 방문 중이던 소련 그랜드마스터 살로 플로르를 동시 전시회에서 이겼다.
1946년까지 페트로샨은 캔디데이트 마스터 칭호를 얻었다. 그 해에만 그는 조지아 체스 선수권 대회에서 그랜드마스터 폴 케레스와 무승부를 기록했고, 이후 예레반으로 이주하여 아르메니아 체스 선수권 대회와 소련 주니어 체스 선수권 대회에서 우승했다. 페트로샨은 1947년 소련 체스 선수권 대회에서 마스터 칭호를 얻었지만, 결승에는 진출하지 못했다. 그는 니밈조비치의 나의 시스템을 연구하고 더 큰 경쟁을 찾아 모스크바로 이주하며 자신의 경기를 향상시키기 시작했다.
2. 체스 경력 발전
모스크바로 이주한 후, 페트로샨은 체스 실력을 급격히 향상시키며 국제 대회에서 뛰어난 성과를 거두고 세계적인 선수로 발돋움했다.
2.1. 모스크바로 이주와 경력의 시작
1949년 모스크바로 이주한 후, 페트로샨의 체스 선수 경력은 빠르게 발전했으며 소련 대회에서의 그의 성적은 꾸준히 향상되었다. 그는 1951년 소련 선수권 대회에서 2위를 차지하여 국제 마스터 칭호를 얻었다. 이 대회에서 페트로샨은 세계 챔피언 미하일 보트비니크와 처음으로 맞붙었다. 백으로 플레이하며 오프닝에서 약간 불리한 포지션을 얻은 후, 그는 두 번의 경기 중단과 총 11시간의 플레이를 통해 무승부를 기록했다. 페트로샨의 이 대회 결과는 다음 해 스톡홀름에서 열린 인터조널 토너먼트에 그를 진출시켰다. 그는 스톡홀름 대회에서 2위를 차지하며 그랜드마스터 칭호를 얻었고, 1953년 후보자 토너먼트에 진출했다.
2.2. 그랜드마스터 획득 및 초기 대회
페트로샨은 1953년 취리히 후보자 토너먼트에서 5위를 차지했는데, 이 결과는 그의 경력에서 정체기의 시작을 알렸다. 그는 약한 선수들과 무승부를 기록하고 그랜드마스터 칭호를 유지하는 것에 만족하는 듯 보였으며, 자신의 체스 실력을 향상시키거나 세계 챔피언이 되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다. 이러한 태도는 1955년 소련 선수권 대회에서의 그의 결과로 잘 드러난다. 19경기 중 페트로샨은 무패였지만, 단 4경기만 이기고 나머지는 모두 무승부였으며, 각 무승부는 20수 이내로 끝났다. 그의 일관된 플레이는 괜찮은 토너먼트 결과를 보장했지만, 대중과 소련 체스 언론 및 당국으로부터는 좋지 않은 시선을 받았다. 대회 막바지에 언론인 바실리 파노프는 대회 참가자들에 대해 다음과 같은 평론을 썼다. "보트비니크와 스미슬로프 외에 15라운드까지 실제 승리 기회는 겔러, 스파스키, 타이마노프에게 있다. 나는 페트로샨을 이 그룹에서 의도적으로 제외한다. 왜냐하면 그는 첫 라운드부터 더 쉽지만 명예로운 목표, 즉 인터조널 4인조에 드는 것을 위해 플레이하고 있음을 분명히 했기 때문이다."
2.3. 소련 선수권 대회 및 챔피언십 도전
이 정체기는 1957년 소련 선수권 대회로 끝이 났다. 21경기 중 페트로샨은 7승 4패 10무를 기록했다. 이 결과는 22명의 경쟁자 중 7위에 불과했지만, 토너먼트 플레이에 대한 그의 더 야심찬 접근 방식은 소련 체스 커뮤니티로부터 큰 찬사를 받았다. 그는 1959년에 첫 소련 선수권 대회에서 우승했고, 그 해 후반에 열린 후보자 토너먼트에서 종종 간과되었던 그의 전술적 능력을 발휘하여 폴 케레스를 이겼다. 페트로샨은 1960년에 소련 스포츠 마스터 칭호를 받았고, 1961년에 두 번째 소련 타이틀을 획득했다. 그의 뛰어난 플레이는 1962년까지 이어졌고, 그는 자신의 첫 세계 챔피언십 매치가 될 후보자 토너먼트에 진출했다.
3. 세계 체스 챔피언십
페트로샨은 세계 챔피언 타이틀을 획득하고 방어하며 잃기까지의 과정을 상세히 겪었다.
3.1. 1963년 세계 체스 챔피언십

1962년 스톡홀름에서 열린 인터조널 토너먼트에 참가한 후, 페트로샨은 큐라소에서 열린 후보자 토너먼트에 팔 벤코, 미로슬라프 필립, 바비 피셔, 예핌 겔러, 폴 케레스, 빅토르 코르치노이, 미하일 탈과 함께 진출했다. 소련을 대표한 페트로샨은 최종 점수 17½점으로 토너먼트에서 우승했으며, 그 뒤를 이어 동료 소련 선수인 겔러와 케레스가 각각 17점, 미국 선수 피셔가 14점을 기록했다. 피셔는 나중에 소련 선수들이 담합하여 자신을 우승하지 못하게 "집단 괴롭힘"을 했다고 비난했다. 이 주장의 증거로 그는 페트로샨, 겔러, 케레스 간에 치러진 12경기 모두 무승부였다는 점을 지적했다. 통계학자들은 이 소련 경쟁자들이 서로 경기할 때 평균 19수를 두는 반면, 다른 경쟁자들과 경기할 때는 평균 39.5수를 두었다고 지적했다. 피셔의 주장에 대한 반응은 엇갈렸지만, FIDE는 나중에 후보자 대회에서의 미래 담합을 방지하기 위해 규칙과 형식을 조정했다.
후보자 토너먼트에서 우승한 페트로샨은 24경기 매치에서 미하일 보트비니크에게 세계 체스 챔피언 타이틀을 도전할 권리를 얻었다. 체스 연습 외에도 페트로샨은 매일 몇 시간씩 스키를 타며 매치를 준비했다. 그는 그렇게 긴 매치에서는 체력과 지구력이 후반 경기에서 중요한 요소가 될 수 있다고 믿었다. 이 이점은 보트비니크가 페트로샨보다 훨씬 나이가 많다는 점에서 더욱 커졌다. 토너먼트 경기에서 많은 무승부가 선수가 1위를 차지하는 것을 막을 수 있었지만, 무승부는 1대1 매치의 결과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이런 점에서 페트로샨의 신중한 플레이 스타일은 매치 플레이에 잘 맞았는데, 그는 단순히 상대방이 실수를 저지르기를 기다렸다가 이를 활용할 수 있었다. 페트로샨은 보트비니크와의 매치에서 15무승부와 함께 5승 2패로 승리하며 세계 챔피언 타이틀을 획득했다.
3.2. 1966년 세계 체스 챔피언십

세계 챔피언이 된 후, 페트로샨은 모스크바뿐만 아니라 소련 전역을 위한 체스 신문 발행을 추진했다. 이 신문은 64로 알려지게 되었다. 페트로샨은 예레반 주립 대학교에서 철학 석사 학위를 위해 공부했으며, 그의 1968년 논문은 "체스 논리, 체스 사고의 논리에 대한 몇 가지 문제"라는 제목이었다.
1966년, 페트로샨이 세계 체스 챔피언 타이틀을 획득한 지 3년 후, 그는 보리스 스파스키의 도전을 받았다. 페트로샨은 매치에서 무승부가 아닌 승리를 통해 타이틀을 방어했으며, 이는 알렉산더 알레힌이 1934년 세계 챔피언십에서 예핌 보골류보프를 물리친 이후 처음으로 달성된 위업이었다. 그러나 스파스키는 다음 후보자 주기에서 예핌 겔러, 벤트 라르센, 빅토르 코르치노이를 물리치고 1969년 페트로샨과의 재대결 자격을 얻었다. 스파스키는 12½-10½로 매치에서 승리했다.
3.3. 1969년 세계 체스 챔피언십
1969년 보리스 스파스키와의 재대결에서 페트로샨은 12½-10½로 패배하며 세계 챔피언 타이틀을 스파스키에게 넘겨주었다. 이로써 6년간의 그의 챔피언 시대는 막을 내렸다.
4. 후기 경력 및 대회 참가
세계 챔피언 타이틀 상실 이후 페트로샨은 주요 대회에 꾸준히 참가하며 올림피아드 및 팀 대회에서 뛰어난 활약을 펼쳤다.
4.1. 주요 토너먼트 성적

1976년, 그는 다른 여러 소련 체스 챔피언들과 함께 망명자 빅토르 코르치노이의 행동을 비난하는 청원서에 서명했다. 이는 1974년 후보자 준결승전에서 페트로샨이 1½-3½ (+1-3=1)로 뒤진 채 5경기 후 기권한 이후 두 사람 사이의 쓰라린 불화가 계속된 것이었다. 1977년 코르치노이와의 매치에서는 두 전 동료가 악수하거나 서로 대화하기를 거부했다. 그들은 심지어 별도의 식사 및 화장실 시설을 요구하기도 했다. 페트로샨은 이 매치에서 패배했고, 러시아 최대 체스 잡지인 64의 편집장 자리에서 해고되었다. 그의 비평가들은 그의 공격을 꺼리는 태도를 비난했으며, 일부는 이를 용기 부족 탓으로 돌렸다. 이때 미하일 보트비니크는 그를 변호하며, 페트로샨은 자신이 안전하다고 느낄 때만 공격했으며 그의 가장 큰 강점은 방어에 있다고 말했다.
그의 후기 성공 중 일부는 1976년 론 파인 인터내셔널과 1979년 탈린의 폴 케레스 기념 토너먼트에서의 우승(16경기 중 12승 무패, 미하일 탈, 다비드 브론슈테인 등을 제치고 우승)을 포함한다. 같은 해 리우데자네이루 인터조널에서 라이오시 포르티시와 로베르트 휘브너와 공동 1위를 차지했으며, 1981년 틸버그 대회에서는 우승자 알렉산더 벨리아프스키에 반점 뒤진 2위를 기록했다. 이곳에서 그는 젊은 가리 카스파로프를 상대로 기적적인 탈출을 통해 마지막으로 유명한 승리를 거두었다.
4.2. 올림피아드 및 팀 대회
페트로샨은 1958년까지 소련 올림피아드 팀에 선발되지 못했다. 하지만 그 이후 그는 1958년부터 1978년까지 10회 연속 소련 올림피아드 팀에 참여하여 9개의 팀 금메달, 1개의 팀 은메달, 그리고 6개의 개인 금메달을 획득했다. 올림피아드 경기에서의 그의 전체적인 성적은 인상적이다. 129경기 중 단 1패(로베르트 휘브너에게)만을 기록하며 +78-1=50, 즉 79.8%의 승률을 기록했는데, 이는 아나톨리 카르포프(+43-2=23, 80.1%)와 미하일 탈 (+65-2=34, 81.2%)에 이어 역대 세 번째로 좋은 성적이다.
페트로샨의 올림피아드 결과는 다음과 같다.
대회 | 보드 | 점수 | 결과 (승-패-무) | 메달 |
---|---|---|---|---|
뮌헨 1958 | 예비 2 | 10½/13 | +8-0=5 | 보드 금메달, 팀 금메달 |
라이프치히 1960 | 예비 2 | 12/13 | +11-0=2 | 보드 금메달, 팀 금메달 |
바르나 1962 | 2 | 10/12 | +8-0=4 | 보드 금메달, 팀 금메달 |
텔아비브 1964 | 1 | 9½/13 | +6-0=7 | 팀 금메달 |
하바나 1966 | 1 | 11½/13 | +10-0=3 | 보드 금메달, 팀 금메달 |
루가노 1968 | 1 | 10½/12 | +9-0=3 | 보드 금메달, 팀 금메달 |
지겐 1970 | 2 | 10/14 | +6-0=8 | 팀 금메달 |
스코페 1972 | 1 | 10½/16 | +6-1=9 | 팀 금메달 |
니스 1974 | 4 | 12½/14 | +11-0=3 | 보드 금메달, 팀 금메달 |
부에노스아이레스 1978 | 2 | 6/9 | +3-0=6 | 팀 은메달 |
페트로샨은 또한 처음 8번의 유럽 팀 챔피언십 (1957년부터 1983년까지) 소련 팀에 참여했다. 그는 8개의 팀 금메달과 4개의 보드 금메달을 획득했다. 유럽 팀 경기에서의 그의 총 성적은 (+15-0=37)으로, 64.4%의 승률을 기록했다. 그의 유럽 팀 경기 결과는 다음과 같다.
대회 | 보드 | 점수 | 결과 (승-패-무) | 메달 |
---|---|---|---|---|
빈 1957 | 6 | 4/5 | +3-0=2 | 보드 금메달, 팀 금메달 |
오버하우젠 1961 | 4 | 6/8 | +4-0=4 | 보드 금메달, 팀 금메달 |
함부르크 1965 | 1 | 6/10 | +2-0=8 | 보드 금메달, 팀 금메달 |
카펜베르크 1970 | 1 | 3½/6 | +1-0=5 | 팀 금메달 |
바스 1973 | 2 | 4½/7 | +2-0=5 | 보드 금메달, 팀 금메달 |
모스크바 1977 | 2 | 3½/6 | +1-0=5 | 팀 금메달 |
스카라 1980 | 3 | 2½/5 | +0-0=5 | 팀 금메달 |
플로브디프 1983 | 3 | 3½/5 | +2-0=3 | 팀 금메달 |
5. 플레이 스타일 및 체스 철학
페트로샨의 체스 플레이 방식은 독특하고 강력했으며, 그로 인해 "철의 티그란"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의 체스에 대한 접근 방식과 철학은 안전과 예방을 최우선으로 했다.
5.1. 방어적 스타일과 "철의 티그란"
페트로샨은 아론 니밈조비치의 예방 개념에 강하게 영향을 받은 보수적이고 신중하며 매우 방어적인 체스 선수였다. 그는 자신의 공격 능력을 활용하는 것보다 상대방의 공격 능력을 막는 데 더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며, 자신의 포지션이 완전히 안전하다고 느끼지 않는 한 거의 공격에 나서지 않았다. 그는 보통 지나치게 공격적인 상대가 실수를 저지를 때까지 꾸준히 플레이하여 승리했으며, 자신의 약점을 드러내지 않고 이 실수를 활용하여 승리를 확보했다. 이러한 플레이 스타일은 특히 역습을 선호하는 다른 선수들과의 경기에서 무승부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인내심과 방어 숙련도는 그를 패배시키기 매우 어렵게 만들었다. 그는 1952년과 1955년 인터조널 토너먼트에서 무패였으며, 1962년에는 단 한 경기도 패배하지 않았다. 패배를 피하는 페트로샨의 꾸준한 능력은 그에게 "철의 티그란"이라는 별명을 안겨주었다. 2004년 한 책의 저자들은 그를 체스 역사상 가장 이기기 어려운 선수로 평가했으며, 미래의 세계 챔피언 블라디미르 크람니크는 그를 "대문자 D의 첫 번째 수비수"라고 불렀다. 레프 폴루가예프스키는 "그 시절에는 소련 선수권 대회에서 우승하는 것이 '철의 티그란'과의 경기에서 이기는 것보다 쉬웠다"고 말했다. 레본 아로니안은 페트로샨을 "겉으로는 너무나 침착하고 지루해 보였지만, 실제로는 깊고 교활한 독특한 플레이 스타일"을 가진 워른 마시에 비유했다. 바비 피셔는 "그는 믿을 수 없는 전술적 통찰력과 위험을 예측하는 뛰어난 능력을 가졌다... 당신이 아무리 잘 생각하고 계산해도 소용없다... 그는 20수 전부터 어떤 위험이든 '냄새 맡을' 것이다!"라고 평가했다.
페트로샨은 자신의 기물들을 특정 계획에 묶어두지 않는 폐쇄형 오프닝을 선호했다. 흑으로는 시실리안 디펜스 나이도르프 바리에이션과 프렌치 디펜스를 즐겨 플레이했다. 백으로는 종종 잉글리시 오프닝을 두었다. 페트로샨은 오프닝에서 상대방을 혼란스럽게 하고 엔드게임에서 삼회 반복으로 무승부를 위협하기 위해 몇 수 안에 같은 기물을 여러 번 움직이는 경우가 많았다. 1955년 소련 체스 선수권 대회에서 마르크 타이마노프와의 경기에서 페트로샨은 24수 경기에서 같은 룩을 6번 움직였으며, 이 중 4번은 연속된 수에서 발생했다. 그는 아론 니밈조비치의 영향으로 자주 기인하는 특징인 비숍보다 나이트에 대한 강한 애착을 가지고 있었다.
페트로샨의 플레이 스타일을 묘사하기 위해 여러 비유적인 표현이 사용되었다. 해럴드 C. 숀버그는 "그와 경기하는 것은 장어에게 수갑을 채우려는 것과 같았다. 잡을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고 말했다. 그는 어둠 속에 숨어 있는 지네, 뛰어오를 기회를 엿보는 호랑이, 희생자를 천천히 질식시키는 비단뱀, 결정적인 일격을 가하기 위해 몇 시간 동안 기다리는 악어로 묘사되었다. 페트로샨의 뒤를 이어 세계 체스 챔피언이 된 보리스 스파스키는 그의 플레이 스타일을 이렇게 묘사했다. "페트로샨은 나에게 고슴도치를 떠올리게 한다. 그를 잡았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는 가시를 내민다."
페트로샨의 플레이 스타일은 패배를 피하는 데 매우 성공적이었지만, 지루하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체스 애호가들은 그의 "초보수적인" 스타일을 "대담하고" "불굴의" 소련 체스의 인기 있는 이미지와는 상반되는 것으로 보았다. 1971년 후보자 토너먼트에서 빅토르 코르치노이와의 매치에서는 너무 많은 단조로운 무승부가 나와 러시아 언론이 불평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스베토자르 글리고리치는 페트로샨을 "보드 위의 위험을 예측하고 패배의 위험을 피하는 데 있어 비할 데 없는 능력으로 매우 인상적"이라고 묘사했다. 페트로샨은 비판에 대해 "내 경기가 더 '재미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나는 더 '재미있게' 할 수도 있지만, 그러면 질 수도 있다"고 답했다. 페트로샨 스타일의 또 다른 결과는 그가 많은 승리를 거두지 못했기 때문에 종종 2위나 3위를 차지했음에도 불구하고 토너먼트에서 우승하는 경우가 드물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그의 스타일은 매치에서는 매우 효과적이었다.
페트로샨은 때때로 공격적이고 희생적인 스타일로 플레이하기도 했다. 1966년 스파스키와의 매치에서 그는 게임 7과 게임 10을 이런 방식으로 승리했다. 보리스 스파스키는 나중에 "페트로샨의 장점은 상대방이 그가 언제 갑자기 미하일 탈처럼 플레이할지 전혀 모른다는 점이다"라고 말했다. (탈은 당대 가장 공격적인 선수로 알려져 있었다.)
5.2. 주요 체스 기여
페트로샨은 상대방의 비숍이나 나이트를 위해 룩을 희생하는 "포지션 교환 희생"으로 유명했다. 카스파로프는 페트로샨이 이 모티프를 사용한 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논했다.
"페트로샨은 '포지션의 질'을 위해 교환 희생을 도입했는데, 여기서 시간 요소는 알레힌과 탈의 플레이에서 매우 중요하지만, 거의 역할을 하지 않는다. 오늘날에도 이러한 추상적인 개념으로 보드에서 자신감 있게 플레이할 수 있는 선수는 거의 없다. 페트로샨 이전에는 아무도 이것을 연구하지 않았다. '그냥 그렇게' 교환을 희생함으로써, 물질적 균형이 깨진 포지션에서 특정 장기적인 이점을 위해, 그는 거의 아무도 볼 수 없고 제대로 평가할 수 없는 잠재된 자원을 발견했다."
포지션 교환 희생의 가장 유명한 예 중 하나는 1953년 취리히에서 새뮤얼 레셰프스키와의 경기에서 나왔다. 백을 잡은 레셰프스키는 강력한 폰 센터 때문에 유리해 보였으며, 이는 Bf3와 d4-d5 이후 기동할 수 있었다. 페트로샨은 자신의 기물들이 수비적인 역할에 국한되어 수동적으로 배치되어 있어 어려운 포지션에 있음을 깨달았다. 그는 또한 백이 h2-h4-h5로 킹사이드를 공격하여 나중에 방어하기 더 어렵게 만들 약점을 유발할 수도 있음을 이해했다. 이러한 위협에 직면하여 페트로샨은 나이트를 d5 칸으로 이동시켜 중앙에 두드러지게 배치하고 백의 폰 전진을 막는 계획을 고안했다.
:25... Re6!
룩이 e7에서 비워지면서, 흑의 나이트는 d5로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게 되었고, 그곳에서 c3의 폰을 공격하고 궁극적으로 ...b5-b4와 함께 흑의 퀸사이드 폰 다수의 전진을 지원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26. a4 Ne7 27. Bxe6 fxe6 28. Qf1 Nd5 29. Rf3 Bd3 30. Rxd3 cxd3
경기는 결국 41수에서 무승부로 끝났다.
페트로샨은 킹스 인디언 디펜스 전문가였으며, 종종 현재 페트로샨 시스템으로 알려진 1.d4 Nf6 2.c4 g6 3.Nc3 Bg7 4.e4 d6 5.Nf3 0-0 6.Be2 e5 7.d5를 플레이했다. 이 변형은 경기 초반에 중앙을 닫는다. 백의 전술적 아이디어 중 하나는 Bg5를 두어 흑의 나이트를 퀸에 묶는 것이다. 흑은 퀸을 움직이거나 (...Qe8) ...h6를 두어 응수할 수 있지만, 후자의 수는 흑의 킹사이드 폰 구조를 약화시킨다. 페트로샨 변형에 대한 흑의 두 가지 응수는 그랜드마스터 폴 케레스와 레오니드 슈타인에 의해 개발되었다. 케레스 변형은 7...Nbd7 8.Bg5 h6 9.Bh4 g5 10.Bg3 Nh5 11.h4 이후에 발생하며, 슈타인 변형은 7...a5로 즉각적인 퀸사이드 공격을 시작한다.
퀸스 인디언 디펜스에도 페트로샨이 개발한 변형이 있다: 1.d4 Nf6 2.c4 e6 3.Nf3 b6 4.a3는 ...Bb4+를 방지하려는 아이디어다. 이 시스템은 1980년 젊은 가리 카스파로프가 여러 그랜드마스터를 물리치는 데 사용하면서 많은 주목을 받았다. 오늘날 페트로샨 변형은 여전히 가장 강력한 변형으로 간주되며, 마스터 경기에서 가장 높은 점수를 기록하고 있다.
다른 페트로샨 변형은 그륀펠드 디펜스의 1.d4 Nf6 2.c4 g6 3.Nc3 d5 4.Nf3 Bg7 5.Bg5 이후와 프렌치 디펜스의 1.e4 e6 2.d4 d5 3.Nc3 Bb4 4.e5 Qd7 이후에서 찾을 수 있다. 일부 권위자들은 전 세계 챔피언 바실리 스미슬로프와 함께 그의 이름을 딴 카로칸 디펜스 변형인 페트로샨-스미슬로프 변형, 1.e4 c6 2.d4 d5 3.Nc3 dxe4 4.Nxe4 Nd7를 언급한다.
5.3. 체스 철학
페트로샨은 체스에 대한 깊은 철학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체스는 그 형식 때문에 게임이지만, 본질적으로는 예술이며, 숙달하기 어려운 점 때문에 과학이다. 체스는 좋은 책이나 음악 작품처럼 많은 즐거움을 줄 수 있다. 하지만 잘 플레이하려면 배워야 하고, 그래야만 진정한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고 말했다. 또한 그는 "나는 체스에서-비록 그것이 게임으로 남아 있지만-우연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절대적으로 확신한다. 이것이 나의 신조이다. 나는 포지션 요구 사항에 따라 플레이한 체스 게임만을 좋아한다... 나는 논리적이고 올바른 게임만을 믿는다"고 강조했다.
6. 개인적인 삶과 건강
페트로샨의 개인적인 삶은 그의 가족 관계와 취미를 포함하며, 그의 생애에 영향을 미친 청각 장애는 그의 체스 경력과도 연결된다.
6.1. 결혼과 가족
페트로샨은 1949년부터 모스크바에 거주했다. 1960년대와 1970년대에는 퍄트니츠카야 거리 59번지에 살았다. 앤서니 사이디가 그에게 러시아인이냐고 묻자 페트로샨은 "해외에서는 우리 모두를 러시아인이라고 부른다. 나는 소련 아르메니아인이다"라고 답했다.
1952년, 페트로샨은 키이우에서 태어난 러시아 유대인인 로나 야코블레브나(본명 아비네제르, 1923~2005)와 결혼했다. 모스크바 국립 언어 대학교를 졸업한 그녀는 영어 교사이자 통역사였다. 그녀는 모스크바 보스트랴코프스키 묘지의 유대인 구역에 묻혔다. 그들에게는 바르탄과 미하일이라는 두 아들이 있었다. 미하일은 로나의 첫 결혼에서 얻은 아들이었다.
6.2. 청각 장애와 체스
페트로샨은 부분적으로 귀가 들리지 않았고 경기 중에 보청기를 착용했는데, 이는 때때로 이상한 상황으로 이어졌다. 한 번은 그가 스베토자르 글리고리치에게 무승부를 제안했는데, 글리고리치는 처음에는 놀라서 거절했지만 몇 초 후에 마음을 바꿔 다시 무승부를 제안했다. 페트로샨은 그 제안에 반응조차 하지 않고 나중에 경기를 이겼다. 나중에 밝혀진 바에 따르면 그는 보청기를 껐기 때문에 글리고리치가 다시 무승부를 제안했을 때 듣지 못했다. 1971년 그는 세비야의 시끄러운 지역에서 로베르트 휘브너와 후보자 매치를 치렀는데, 이는 그에게는 방해가 되지 않았지만 휘브너를 너무 화나게 하여 그가 매치에서 기권하게 만들었다. 청력이 좋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고전 음악을 매우 사랑했고 콘서트에 가는 것을 즐겼다. 야세르 세이러완은 "토너먼트 분석 세션에서 선수들은 모두 동시에 말했지만, 페트로샨이 무언가를 말할 때마다 모두가 입을 다물고 경청했다"고 회상했다.
6.3. 취미 및 관심사
그의 취미로는 축구, 백개먼, 크로스컨트리 스키, 탁구, 정원 가꾸기 등이 있었다.
7. 사망 및 유산
페트로샨은 위암으로 사망했으며, 그의 사후에는 다양한 기념 사업이 이루어지며 아르메니아 체스계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7.1. 사망
페트로샨은 1984년 8월 13일 모스크바에서 위암으로 사망했으며, 모스크바 아르메니아 묘지에 안장되었다.
7.2. 기념 및 영향력
사망 당시 페트로샨은 체스 관련 강의와 기사를 책으로 엮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이 책은 그의 아내 로나에 의해 편집되어 1989년 러시아어로 샤흐마트니예 렉치 페트로샤나 (Шахматные лекции Петросяна)라는 제목으로, 1990년 영어로 페트로샨의 유산(Petrosian's Legacy)이라는 제목으로 사후 출판되었다.

1987년, 세계 체스 챔피언 가리 카스파로프는 페트로샨의 묘비에 기념비를 공개했다. 이 기념비는 체스 세계 챔피언에게 수여되는 월계관과 페트로샨의 고향 아르메니아의 국가 상징인 아라라트산의 쌍봉 위로 태양이 빛나는 왕관 이미지를 담고 있다. 2006년 7월 7일, 페트로샨을 기리는 기념물이 예레반의 다브타셴 지구에 페트로샨의 이름을 딴 거리에 세워졌다.

페트로샨은 또한 아르메니아 드람의 세 번째 지폐 시리즈에 그의 이미지가 2000 AMD 지폐에 새겨져 영예를 얻었다.

8. 비판 및 논란
페트로샨은 그의 플레이 스타일과 관련하여 일부 비판과 논란에 직면했다. 1963년 세계 체스 챔피언십의 후보자 토너먼트에서 바비 피셔는 소련 선수들이 자신을 우승하지 못하게 "집단 괴롭힘"을 했다고 비난하며 담합 의혹을 제기했다. 이 논란은 FIDE가 후보자 대회의 규칙과 형식을 조정하게 만들었다.
그의 플레이 스타일에 대한 비판도 있었다. 체스 애호가들은 그의 "초보수적인" 스타일을 "대담하고" "불굴의" 소련 체스의 인기 있는 이미지와는 상반되는 것으로 보았다. 1971년 빅토르 코르치노이와의 후보자 토너먼트 매치에서는 너무 많은 단조로운 무승부가 나와 러시아 언론이 불평하기도 했다.
또한, 1976년 빅토르 코르치노이가 망명한 후, 페트로샨은 다른 여러 소련 체스 챔피언들과 함께 코르치노이의 행동을 비난하는 청원서에 서명했다. 이는 1974년 후보자 준결승전에서 시작된 두 사람 사이의 쓰라린 불화의 연장선이었다. 1977년 코르치노이와의 매치에서는 두 전 동료가 악수하거나 서로 대화하기를 거부했으며, 심지어 별도의 식사 및 화장실 시설을 요구하기도 했다. 이 매치에서 패배한 후 페트로샨은 러시아 최대 체스 잡지인 64의 편집장 자리에서 해고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