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ทักษิณ ชินวัตร탁신 친나왓태국어은 1949년 7월 26일 태국 치앙마이에서 태어난 사업가이자 정치인으로, 2001년부터 2006년까지 제23대 태국 총리를 지냈다. 그는 이동통신사 어드밴스드 인포 서비스(AIS)와 정보통신 대기업 신 코퍼레이션을 설립하여 태국에서 손꼽히는 부호가 되었다. 탁신은 1998년 타이락타이당을 창당하여 2001년 총선에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며 총리에 취임했다. 그는 태국 역사상 처음으로 민주적으로 선출되어 임기를 채운 총리였으며, 2005년 총선에서도 재선에 성공하며 대중적 지지를 확고히 했다.
총리 재임 기간 동안 탁신 정부는 '탁시노믹스'로 불리는 경제 정책을 통해 농촌 빈곤을 크게 줄이고, 보편적 의료보험 제도인 '30밧 의료보험'을 도입하여 서민층의 의료 접근성을 향상시켰다. 또한 IMF 차관을 조기 상환하고 대규모 인프라 투자를 추진하며 경제 성장을 이끌었다. 그러나 2003년 '마약과의 전쟁' 캠페인 과정에서 2,500명 이상의 비정상적인 사망자가 발생하고 초법적 처형 논란이 불거지는 등 심각한 인권 침해 비판에 직면했다. 또한 남부 태국 반란에 대한 강경 대응은 크루 세 모스크 사건과 딱 바이 사건 같은 비극을 초래하며 국내외 비판을 받았다.
2006년, 탁신은 가족 소유의 신 코퍼레이션 주식을 싱가포르 테마섹 홀딩스에 10억 달러 이상에 비과세로 매각하면서 대규모 시위에 직면했다. 반정부 시위대는 그를 부패, 권력 남용, 권위주의적 성향으로 비난했다. 2006년 4월 조기 총선을 실시했으나 야당이 불참하고 태국 헌법재판소가 선거 무효를 선언하면서 정치적 위기가 심화되었다. 결국 2006년 9월 19일, 탁신이 해외에 머무는 동안 군부 쿠데타로 총리직에서 축출되었고, 그의 정당은 해산되었으며 정치 활동이 금지되었다.
탁신은 2008년 태국을 잠시 방문한 것을 제외하고 15년 동안 자발적 망명 생활을 이어갔다. 이 기간 동안 그는 권력 남용 혐의로 궐석재판에서 유죄 판결을 받고 경찰 계급을 박탈당했으며, 2010년에는 460억 밧 규모의 자산이 동결 및 몰수되었다. 망명 중에도 그는 프아타이당과 반독재 민주 통일 전선 (레드셔츠) 운동을 통해 태국 정치에 지속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 2011년부터 2014년까지 그의 여동생 잉락 친나왓이 총리를 역임했으며, 2024년에는 막내딸 패통탄 친나왓이 총리로 취임하면서 탁신 가문의 정치적 영향력이 이어지고 있다.
2023년 8월, 탁신은 15년간의 망명 생활을 마치고 태국으로 귀국하여 즉시 수감되었다. 그러나 국왕의 사면으로 징역 8년이 1년으로 감형되었고, 2024년 2월 건강상의 이유로 가석방되었다. 가석방 후에도 그는 왕실 모독죄 혐의로 기소되는 등 법적 문제에 직면했으나, 2024년 8월 다시 국왕의 사면으로 불경죄 혐의에서 벗어났다. 그는 태국 정치에 대한 깊은 영향력을 유지하며, 민주주의와 사회 발전에 기여한 긍정적인 평가와 함께 권위주의적 통치, 부패, 인권 침해 등으로 인한 비판을 동시에 받고 있다.
2. 유년기 및 배경
탁신 친나왓은 1949년 7월 26일 태국 치앙마이주 산캄팽군에서 러트 친나왓(Loet Shinawatra)과 인디 라밍웡(Yindi Ramingwong) 사이의 10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다. 그의 별명은 '노이'였으나, 태국 육군 사관학교 10기 동기생들이 붙여준 '매우'라는 별명도 있었다. 탁신은 15세까지 산캄팽군의 마을에서 성장했으며, 이 기간 동안 가족의 커피숍과 오렌지 농장 사업을 도왔고, 16세부터는 아버지의 영화관 운영을 지원하며 사업적 감각을 키웠다.
탁신의 증조부인 셍 사엑후 (丘春盛치우 춘성중국어)는 1860년대에 태국에 이주한 중국 객가인으로, 1908년 치앙마이에 정착했다. 그의 장남인 치앙 사엑후는 1890년 찬타부리주에서 태어나 현지 여성인 사엥 사마나와 결혼했다. 치앙의 장남인 삭은 1938년 태국화 정책에 따라 태국 성씨인 '신나왓'을 사용하기 시작했으며, 나머지 가족들도 이를 따랐다. 셍 사엑후는 세금 징수 사업으로 부를 축적했다. 치앙 사엑후/신나왓은 이후 신나왓 실크를 설립하고 금융, 건설, 부동산 개발 사업으로 확장했다. 탁신의 아버지 러트 친나왓은 1919년 치앙마이에서 태어나 인디 라밍웡과 결혼했다. 인디의 아버지 차로엔 라밍웡(왕촨청)은 중국계 객가 이민자였으며, 란나 왕국 (치앙마이) 왕족의 일원인 짠팁 나 치앙마이 공주와 결혼했다.
1968년, 러트 친나왓은 정치에 입문하여 치앙마이 지역의 국회의원이 되었다. 그는 1976년 정치에서 은퇴한 후 커피숍을 운영하고 오렌지와 꽃을 재배했으며, 영화관 두 곳, 주유소, 자동차 및 오토바이 대리점을 열었다. 탁신이 태어날 무렵, 신나왓 가문은 이미 치앙마이에서 가장 부유하고 영향력 있는 가문 중 하나였다. 탁신은 테라와다 불교도이다.
2.1. 교육
탁신 친나왓은 1965년 몬포트 칼리지에서 중등 교육을 마쳤다. 이후 1969년 태국 육군 사관학교 10기, 1973년 태국 경찰 사관학교 26기를 수석으로 졸업했다.
졸업 후, 탁신은 1975년 미국 동켄터키 대학교에서 형사 사법 분야 석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3년 후인 1978년 샘휴스턴 주립 대학교에서 동 분야 박사 학위를 받았다. 또한 1979년 마히돌 대학교 사회과학부에서 강사로 재직하기도 했다. 1994년에는 탐마삿 대학교에서 언론학 명예 박사 학위를 수여받았다.
2.2. 초기 경력
탁신 친나왓은 경찰관으로서의 경력을 시작했으며, 이후 사업가로 변신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다.
2.2.1. 경찰관 생활
1973년 태국 경찰 사관학교를 졸업한 탁신 친나왓은 왕립 태국 경찰에 입대하여 경찰관 생활을 시작했다. 1975년에는 미국 동켄터키 대학교에서 형사 사법 석사 학위를, 1978년에는 샘휴스턴 주립 대학교에서 동 분야 박사 학위를 취득하며 학문적 배경을 쌓았다.
태국으로 돌아온 그는 방콕 경찰청 본부 기획 정책과 부과장 직위까지 올랐으며, 1987년 경찰 중령 계급으로 경찰직에서 사임했다. 탁신은 1975년부터 1976년까지 왕립 경찰 사관학교에서 강사로도 활동했다. 그의 전처인 폿자만 다마퐁은 경찰청장 프루판 다마퐁의 누나이며, 현재는 모계 성씨를 사용하고 있다.
2015년 9월, 탁신 친나왓의 경찰 중령 계급은 박탈되었다.
2.2.2. 사업가 생활
탁신 친나왓과 그의 아내는 탁신이 아직 경찰로 재직 중이던 시기부터 비단 상점, 영화관, 아파트 건물 등 여러 사업을 시작했다. 그러나 이들 사업은 모두 실패로 돌아가 5000.00 만 THB가 넘는 부채(약 100.00 만 GBP)를 안게 되었다. 1982년, 그는 ICSI를 설립하고 경찰 인맥을 활용하여 정부 기관에 컴퓨터를 임대하는 사업을 시작하여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다. 하지만 이후 보안 시스템(SOS)과 시내버스 무선 서비스(Bus Sound) 사업은 모두 실패했다.
1986년 4월, 그는 어드밴스드 인포 서비스(AIS)를 설립했는데, 이 회사는 컴퓨터 임대 사업으로 시작했다. 1987년 탁신은 경찰직을 사임하고 본격적으로 사업에 뛰어들었다. 그는 낭만 드라마 '반 사이 통'을 제작하여 극장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 1988년에는 퍼시픽 텔레시스와 제휴하여 '팩링크' 무선 호출기 서비스를 운영, 마케팅하며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지만, 이후 탁신은 자신의 호출기 회사를 설립하기 위해 지분을 매각했다.
1989년에는 케이블 TV 회사인 IBC를 설립했다. 당시 탁신은 태국 언론 및 미디어를 담당하던 총리실 장관 찰럼 유밤룽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 프로젝트는 이전 정부에서 거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찰럼이 탁신에게 IBC 설립 권한을 부여한 것이 친분을 이용한 특혜가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IBC는 결국 수익을 내지 못하고 CP 그룹의 UTV와 합병되었다.
1989년, 탁신은 데이터 네트워킹 서비스인 신나왓 데이터콤을 설립했는데, 이는 현재 AIS와 TOT가 소유한 '어드밴스드 데이터 네트워크'로 알려져 있다. 탁신의 많은 사업체들은 이후 신 코퍼레이션으로 통합되었다. 1986년 AIS는 탁신의 군 인맥을 통해 독점 계약을 얻었으며, GSM-900 주파수 대역을 사용하여 급성장하여 태국 최대의 이동통신 사업자가 되었다.
1987년 신나왓 컴퓨터 및 커뮤니케이션 그룹이 설립되어 1990년 태국 증권거래소에 상장되었다. 1990년 탁신은 신나왓 새틀라이트를 설립하여 4개의 타이콤 통신 위성을 개발하고 운영했다. 1999년 신나왓 가족은 10.00 억 THB를 투자하여 신나왓 대학교를 설립했으며, 이 대학은 공학, 건축, 경영 관리 분야에서 국제 프로그램을 제공한다. 2000년, 탁신은 왕실 자산국과 네이션 미디어 그룹, 시암 상업은행으로부터 재정난에 시달리던 iTV 방송국을 인수했다.
3. 정치 활동
탁신 친나왓은 1994년 팔랑 탐 당을 통해 정계에 입문한 뒤, 1998년 타이락타이당을 창당하고 2001년 총선에서 승리하며 제23대 총리직에 올랐다.
3.1. 정계 입문
탁신 친나왓은 1994년 말 참롱 스리무앙의 추천으로 팔랑 탐 당을 통해 정계에 입문했다. 1994년 12월, 그는 프라송 순시리의 후임으로 외무부 장관에 임명되었다. 그는 이후 반한 실파아차 정부에서 부총리직을 맡았으며, 1996년 5월에는 참롱 스리무앙의 방콕 주지사 선거 출마를 돕기 위해 다른 네 명의 팔랑 탐 당 소속 장관들과 함께 반한 내각에서 사임했다.
1996년 8월, 탁신과 팔랑 탐 당은 반한 정부에서 탈퇴했다. 1996년 9월, 반한은 의회를 해산했다. 탁신은 1996년 11월 총선에 출마하지 않겠다고 발표했지만, 팔랑 탐 당의 대표직은 유지했다. 이 선거에서 팔랑 탐 당은 단 한 석만 얻는 치명적인 패배를 당했고, 곧 대부분의 당원들이 사임하며 사실상 붕괴되었다.
1997년 8월 15일, 탁신은 태국 바트화의 평가 절하와 1997년 아시아 금융 위기가 발생한 후 차왈릿 용차이윳 정부에서 부총리가 되었다. 그는 불과 3개월 뒤인 11월 14일 차왈릿이 사임하면서 이 직책을 떠났다. 1997년 9월 27일의 불신임 토론 중, 민주당의 수텝 타우수반은 탁신이 바트화 평가 절하 결정에 대한 내부 정보를 이용하여 이득을 취했다고 비난했으나, 후속 민주당 정부는 이러한 비난을 조사하지 않았다. 이 기간 동안 탁신은 칼라일 그룹의 아시아 자문위원회에서 활동하다가 2001년 총리가 되면서 사임했다.
3.2. 타이락타이당 창당과 첫 총리 재임
탁신은 1998년 쏨킷 짜뚜시피딱, 팔랑 탐 당의 동지인 쑤다랏 케유라판, 푸라차이 피움쏨분 등 19명과 함께 '태국인들이 태국인들을 사랑한다'는 의미의 타이락타이당을 창당했다. 쏨킷에게서 영감을 받은 것으로 알려진 대중주의적 강령을 내세운 타이락타이당은 보편적 의료 접근성, 농민을 위한 3년 채무 유예, 그리고 모든 태국 마을에 1백만 밧의 지역 관리 개발 기금 등을 약속했다.
추안 릭파이 총리가 2000년 11월 의회를 해산한 후, 타이락타이당은 1997년 헌법 하에서 치러진 첫 선거인 2001년 태국 총선거에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당시 일부 학자들은 이를 태국 역사상 가장 개방적이고 부패 없는 선거로 평가했다. 타이락타이당은 248석을 얻어(이전 어떤 정당보다 많은 의석) 정부를 구성하는 데 단 3석만 더 필요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탁신은 총체적인 통제권을 확보하고 불신임 투표를 피하기 위해 차트 타이 당(41석)과 신 희망당(36석)과 광범위한 연합을 형성했으며, 소규모 정당인 세리탐 당(14석)을 흡수했다. 탁신은 2001년 2월 9일 태국 총리에 취임했다.
3.2.1. 자산 은닉 혐의
총리 취임 직전, 태국 국가 부패 방지 위원회(NCCC)는 탁신 친나왓이 1997년 부총리 재직 시절과 그 이듬해에 약 23.70 억 THB (약 5600.00 만 USD) 상당의 자산을 신고하지 않았다는 혐의로 헌법재판소에 기소했다. 유죄 판결 시, 탁신은 5년간 정치 활동이 금지될 수 있었다. 이 사건은 헌법이 정치인과 그 배우자가 민간 기업의 주식을 소유하는 것을 금지함에 따라 '주식 은닉 사건'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탁신은 자신의 소유 주식을 가정부와 다른 차명인들에게 이전하여 소유권을 은폐했다.
헌법재판소에서의 탁신의 증언에 따르면, 그가 모든 자산을 공개하지 않은 이유는 다음과 같다:
- 헌법이 '개인 자산'이라는 용어를 정의하지 않는다.
- 회계 설명이 명확하지 않다.
- 타인의 명의를 사용하여 대체된 자산을 공개하지 않은 것은 이전에 요구되지 않았으므로 위반으로 간주되지 않는다.
- 고의로 타인 명의의 자산 목록을 공개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 1999년 11월 18일에 발표된 1999년 부패 방지 및 진압법 유기법률 사용 발표 이전에 회계 자료를 제출할 책임이 없다.
- 2000년 11월 14일, 24일, 30일 감사위원회 위원장에게 보낸 기밀 서신에서 피고(탁신 친나왓)는 이미 자산 및 부채 목록과 회계에 표시되지 않은 이유를 설명했으며, 추가 자산 목록 통지는 세 차례 제출된 회계의 일부로 간주되었다.
반면, 국가 부패 방지 위원회 사무총장 클라나롱 잔틱은 법정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 헌법이 '개인 자산'이라는 용어를 정의하지 않더라도, 이는 상식적인 이해의 범주에 속한다.
- 회계 설명은 사소한 변경이 있을 수 있지만, 중요한 정보는 변함이 없으며 더 명확하게 수정되었다.
- 장관이나 회계 제출자가 회계 설명을 이해하지 못해 다른 사람의 명의를 사용한 자산 목록을 공개하지 않았다고 진술한 사례는 없다.
- 1999년 부패 방지 및 진압법 유기법률이 1999년 11월 18일에 발표되었지만, 피고는 헌법이 의무화된 1997년 10월 11일부터 현행 헌법에 따라 회계 자료를 제출할 책임이 있다.
이후 헌법재판소는 8대 7로 탁신 친나왓에게 고의성이 없다고 판결했다. 이 판결은 당시 탁신의 높은 인기로 인해 헌법재판소를 향한 대중의 압력에 영향을 받았을 수 있으며, 일부에서는 그가 국가를 통치할 기회를 얻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러나 여전히 사회의 일부에서는 법원의 결정에 회의적이며 탁신이 사법 절차를 방해했다고 보아, 이후 헌법재판관 4명에 대한 고발 및 해임이 이루어졌다.
2011년 태국 진실화해위원회는 2년간의 작업 끝에 최종 보고서를 발표하며, 모든 정치 위기는 헌법재판소가 위법하게 행동한 '탁신 주식 은닉 사건'에서 비롯되었다고 밝혔다. 헌법재판관 7명은 탁신 친나왓이 유죄라고 판결했으나, 다른 6명의 판사는 무죄라고 판결했다. 그러나 헌법재판소는 이 사건이 자신들의 관할이 아니라고 판결했으나 본안에 대해 판결하지 않은 두 명의 재판관의 표를 탁신이 무죄라고 판결한 6명의 판사의 표에 합산했다. 이로 인해 탁신에게 유리한 8대 7 판결이 나왔고, 이는 법률 위반으로 인식되어 태국 사법 절차에 대한 대중의 불신을 초래했다.
4. 총리 재임기 (2001년 ~ 2006년)
총리 탁신 친나왓의 재임기(2001년~2006년)는 태국 현대사에서 가장 독특한 시기 중 하나로 평가된다. 그는 전임자들과 차별화되는 과감한 정책들을 도입하며 경제, 공중 보건, 교육, 에너지, 사회 질서, 마약 단속, 국제 관계 등 광범위한 분야에 영향을 미쳤다.




탁신 정부의 가장 효과적인 정책은 농촌 빈곤 감소와 보편적 의료보험 도입이었다. 이는 특히 인구 밀도가 높은 북동부 지역의 농촌 빈곤층으로부터 큰 지지를 얻는 데 기여했다. 그의 내각은 학자, 전 학생 운동가, 팔랑 탐 당의 전 지도자들로 구성되었으며, 프롬민 레르트수리뎃, 짜투론 차이상, 프라팟 판야차트락사, 수라퐁 쑤엡웡리, 쏨킷 짜뚜시피딱, 쑤라끼앗 싸티라타이, 쑤다랏 케유라판 등이 포함되었다. 전통적인 지역 권력자들도 그의 정부에 합류했다.
그러나 그의 정부는 점차 독재주의, 선동 정치, 부패, 이해충돌, 인권 침해, 외교적 비숙련, 법적 허점 이용, 언론 자유에 대한 적대감 등으로 비난받았다. 그는 또한 왕실 모독, 반역, 종교 및 왕실 권위 찬탈, 국제 투자자에 대한 자산 매각, 종교적 모독 등 수많은 논란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4.1. 주요 정책
탁신 총리 재임기에는 '탁시노믹스'를 중심으로 한 경제 정책과 더불어 교육, 보건, 마약 퇴치, 에너지 등 다양한 분야에서 혁신적인 정책들이 추진되었다.
4.1.1. 경제 정책
탁신 정부는 농촌 지역의 대다수 유권자들에게 어필하기 위한 경제 정책들을 고안했다. 여기에는 마을 단위 소액 대출 개발 기금, 저금리 농업 대출, 마을 개발 기금에 대한 직접 현금 지원(SML 제도), 인프라 개발, 그리고 '하나의 땀본 하나의 제품'(OTOP)과 같은 농촌 중소기업 개발 프로그램 등이 포함되었다.
탁신의 경제 정책은 1997년 아시아 금융 위기로부터 태국 경제를 회복시키고 빈곤을 상당히 감소시키는 데 기여했다. GDP는 2001년 4.90 조 THB에서 2006년 7.10 조 THB로 증가했다. 태국은 IMF에 대한 채무를 예정보다 2년 빨리 상환했다.
태국에서 가장 빈곤한 지역인 북동부의 소득은 2001년부터 2006년까지 46% 증가했다. 전국 빈곤율은 21.3%에서 11.3%로 감소했다. 소득 불균형을 나타내는 지니 계수는 2000년 0.525에서 2004년 0.499로 떨어졌다(1996년부터 2000년까지는 상승했다). 태국 증권거래소는 다른 지역 시장보다 높은 성과를 보였다. 2001년과 2002년에 재정 적자를 겪은 후, 탁신은 균형 재정을 달성하여 2003년부터 2005년까지 상당한 재정 흑자를 기록했다. 대규모 인프라 투자 프로그램에도 불구하고 2007년에도 균형 재정이 예상되었다. 외환 보유고는 2001년 300.00 억 USD에서 2006년 640.00 억 USD로 두 배 증가했다.
비평가들은 '탁시노믹스'가 단순한 케인스 경제학 방식의 경기 부양책을 재포장한 것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다른 이들은 이 정책들이 농촌 빈곤층을 "탁신의 현금 지원에 중독"시켰다고 비난했다.
탁신은 태국의 대규모 지하 복권 시스템을 합법화하여 정부 복권 사무소에서 운영하도록 도왔다. 약 700.00 억 THB (20.00 억 USD)에 달하는 복권 판매 수익은 "한 지역 한 장학금" 프로그램 등 사회 프로젝트에 사용되었다。 탁신 정부는 또한 대규모 방송사 MCOT를 민영화했다. 2006년 쿠데타 이후, 탁신의 많은 경제 정책은 중단되었고, OTOP 프로그램은 재정비되었으며, 정부 복권 사무소의 프로그램은 불법으로 간주되었고, 정부는 여러 언론 매체와 에너지 회사를 국유화했다. 그러나 태국 개발 연구소(TDRI)의 경제학자들은 많은 대중주의 정책이 경제를 부양하지 못했으며 일부는 우연의 일치였다는 보고서를 발표했다.
4.1.2. 교육 정책
탁신의 교육 개혁 중 하나는 1997년 헌법에 따라 의무화된 학교 분권화였다. 이는 지나치게 중앙집권화되고 관료화된 교육부에서 땀본 행정 조직(TAO)으로 학교 관리를 위임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는 공무원으로서의 지위를 박탈당할 것을 우려한 태국 교사 70만 명의 거대한 반대에 부딪혔다. 교사들은 또한 TAO가 학교를 관리할 능력이 부족하다고 우려했다. 대규모 교사 시위와 여러 학교 폐쇄 위협에 직면하자 탁신은 타협하여 TAO로 이전되는 학교 교사들에게 다른 학교로 전근할 2년의 시간을 주었다.
기타 의도된 정책 변경에는 학습 개혁 및 관련 교과과정 분권화가 포함되었는데, 주로 총체적 교육의 활용을 늘리고 암기 학습의 사용을 줄이는 방식이었다.
저소득층의 대학 접근성을 높이기 위해 탁신은 학생 대출 기금(SLF)과 소득 조건부 대출(ICL)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ICL 프로그램은 어려운 학생들이 직업 교육에서 대학 수준까지 학업을 지원받을 수 있도록 대출을 확보할 수 있게 하는 것이었다. 태국 은행들은 전통적으로 교육 대출을 제공하지 않았다. 그러나 ICL은 대출금 회수를 졸업 1년 후부터 시작하며, 월급이 1.60 만 THB에 도달하면 이자율이 대출 승인일로부터 인플레이션에 상응하는 수준으로 적용되었다. SLF는 가족 소득 제한이 있었지만, 이자율은 졸업 1년 후부터 1%였다. 탁신 정부가 전복된 후 이 프로그램들은 통합되었고 소득 제한이 수정되었다.
탁신은 니콜라스 네그로폰테의 '모든 어린이에게 노트북을'(OLPC) 프로젝트의 초기 지지자 중 한 명으로, 태국 교육부는 60만 대를 구매하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군사 정부는 이 프로젝트를 취소했다.
탁신은 또한 논란의 여지가 있는 '한 구역 한 꿈 학교' 프로젝트를 시작했는데, 이는 모든 구역에 최소한 하나의 고품질 학교를 보장하기 위해 학교의 질을 향상시키는 것을 목표로 했다. 이 프로젝트는 탁신과 컴퓨터 및 교육 장비 판매 회사만이 수혜자라는 비판을 받았다. 많은 학교가 이 프로젝트를 시행하면서 중앙 정부로부터 불충분한 재정 지원을 받아 심각한 부채를 지게 되었다.
이 외에도 그는 국가 표준화 시험에만 의존하던 국립 대학 입학 제도를 변경했다. 탁신은 학생들이 사설 입학 시험 과외보다는 교실 학습에 집중하도록 고등학교 성적의 가중치를 높이는 것을 추진했다.
4.1.3. 보건 정책
탁신은 재임 기간 동안 두 가지 핵심 보건 정책을 추진했다. 2002년 시작된 보조금 지원 보편적 의료보험(UHC)과 저비용 항레트로바이러스제 (ARVs)의 보급이 그것이다. 특히 '30밧 의료보험'으로 불리는 UHC 프로그램은 일반 대중의 찬사를 받았으나, 많은 의사와 공무원들로부터 비판을 받았다.
이 프로그램이 도입되기 전에는 인구의 상당 부분이 의료보험 혜택을 받지 못했고 의료 서비스 접근성도 제한적이었다. UHC는 인구의 의료 접근성을 76%에서 96%로 증가시키는 데 기여했다. 초기에 UHC는 '포퓰리즘' 정책으로 비난받았으며, 2006년 쿠데타 이후 보건부 장관인 몽콜 나 송클라는 30밧 프로그램을 '마케팅 술책'이라고 비난했다. UHC 환자의 거의 절반이 받은 치료에 불만족했으며, 의료 서비스 제공자의 과도한 업무량, 혼잡한 대기실, 환자 진단 시간 부족 등의 단점이 있었다. 또한, 이 프로그램의 비용은 2006년 5600.00 만 THB에서 2019년 1.66 억 THB로 세 배 증가했지만, 여전히 GDP의 1% 미만을 유지하고 있다.
4.1.4. 마약과의 전쟁
2003년 1월 14일, 탁신은 '마약과의 전쟁' 캠페인을 시작하며 3개월 내에 "나라의 모든 구석"에서 마약을 없애겠다고 선언했다. 이 캠페인은 마약 중독자에 대한 처벌 정책 변경, 주별 체포 및 압수 목표 설정(블랙리스트 포함), 목표 달성 공무원에 대한 포상, 할당량 미달성자에 대한 처벌 위협, 마약상 표적화, 그리고 '무자비한' 집행으로 구성되었다. 휴먼 라이츠 워치에 따르면, 캠페인 초기 3개월 동안 2,275명이 초법적 처형되었다.
정부는 사망자 중 약 50명만이 경찰의 소행이며, 나머지는 마약상들이 자신의 동료들에 의해 제거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인권 비평가들은 상당수가 초법적으로 처형되었다고 주장했다. 이들 대부분은 정부 블랙리스트에 올라 있었으나, 마약 거래에 연루되었다는 증거는 없었다. 블랙리스트는 신뢰할 수 없었으며, 일부 마약상은 등재되지 않았고, 많은 무고한 사람들도 포함되었다. 정부는 지역 사회 구성원들에게 마약 사용자 및 거래자를 당국에 신고하도록 장려했고, 신고된 이름은 정부 검토를 위해 상자에 담겼다. 이로 인해 혼란과 실수가 발생했으며, 무고한 사람들이 블랙리스트에 포함되기도 했다. 또한, 블랙리스트를 경쟁자들에 대한 보복에 이용한 사례도 있었다.
2003년 생일 축사에서 푸미폰 아둔야뎃 국왕은 정부의 마약 전쟁 처리에 대해 미묘하게 비판하며, 헌법 조항이 군주에게 정부 책임 면제를 명시함에도 불구하고 사망자들에 대한 책임이 자신에게 전가되는 것에 대한 우려를 표했다. 국왕은 국가 내의 광범위한 책임 문제에 대해 우려를 표하며, 국가의 조치와 다른 요인으로 인한 사상자들을 구별하고 식별하는 것의 어려움을 강조했다. 이 연설은 국가 위기 관리에 있어 정부 관리들의 법적, 도덕적 책임을 섬세하게 지적했다. 국왕은 또한 경찰 총수에게 살인 사건을 조사할 것을 요청했다. 경찰청장 산트 사루타논드는 사망 사건에 대한 재조사를 시작했으며, 다시 한번 사망자 중 경찰의 소행은 소수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마약 전쟁은 국제 사회로부터 광범위한 비판을 받았다. 탁신은 유엔 인권 위원회에 특사를 파견하여 상황을 평가해 줄 것을 요청했으나, 인터뷰에서 "유엔은 내 아버지가 아니다. 나는 유엔의 태국 방문에 대해 걱정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2006년 쿠데타 이후, 군사 정권은 마약 퇴치 캠페인을 조사하기 위한 위원회를 임명했다. 전 법무장관 카닛 나 나콘이 위원회를 이끌었다. 2008년 1월 이코노미스트지는 이 위원회의 조사 결과에 대해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2003년에 살해된 사람들의 절반 이상이 마약 거래와 관련이 없었다. 위원회는 이 폭력이 결함 있는 블랙리스트에 기반한 정부의 '사살 명령' 정책 때문이라고 비난했다. 그러나 이러한 조사 결과는 관련된 자들을 기소로 이끌기는커녕 묻혀버렸다. 물러나는 임시 총리 쑤라윳 출라논은 탁신의 잘못을 바로잡겠다고 다짐하며 취임했다. 그러나 이번 주 그는 살인 사건에 대해 법적 조치를 취할 증거가 불충분하다고 말했다. 분위기가 바뀐 이유를 쉽게 알 수 있다. 인권 단체인 휴먼 라이츠 워치의 연구원 수나이 파숙은 위원회의 원본 보고서에 총격범들을 부추긴 정치인들의 이름이 명시되어 있었지만, 지난달 PPP가 선거에서 승리한 후 그 이름들이 삭제되었다고 말한다."
야당 지도자였던 아피싯 웨차치와는 탁신이 캠페인에서 저지른 역할 때문에 인도에 반한 죄를 저질렀다고 비난했다. 총리로 임명된 후, 아피싯은 살인 사건에 대한 조사를 시작하며, 성공적인 조사가 국제형사재판소에 의한 기소로 이어질 수 있다고 주장했다. 전 법무장관 캄피 깨우차로엔이 조사를 이끌었고, 아피싯 내각은 조사 위원회를 승인했다. 아피싯은 조사가 정치적 동기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고 부인했다. 목격자와 피해자들은 아피싯의 직접적인 통제 하에 운영되는 특수 조사국에 신고하도록 촉구되었다.
4.1.5. 에너지 정책
에너지 정책에서 탁신 정부는 추안 릭파이 정부의 민영화 정책을 계속 추진했지만, 중요한 변화가 있었다. 추안 정부의 아시아 금융 위기 이후 정책이 산업 파편화와 도매 전력 시장 경쟁을 통해 경제적 효율성을 추구했던 반면, 탁신 정책은 더 강력한 경제 성장을 안정적으로 지원하고 지역 에너지 시장에서 중요한 주체가 될 수 있는 '국가 챔피언'을 육성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탁신은 또한 신재생에너지 장려 및 에너지 절약 정책을 시작했다. 2006년 쿠데타 이후 탁신 시대의 많은 에너지 정책은 뒤집혔다.
4.2. 행정 개혁
탁신 행정 개혁 중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은 정부 부처 개편으로, 이를 '빅뱅'이라고 불렀다. 이는 "역사적인 돌파구"이자 "쭐랄롱꼰 국왕이 태국의 현대적인 부처 시스템을 구축한 1897년 이래 첫 주요 부처 개편"으로 칭송받았다. 기존 시스템의 경직성과 비효율성을 해소하기 위한 계획은 수년간 연구되었으나, 탁신 정부가 들어서기 전까지는 실행되지 않았다.
이 개편은 관료주의를 간소화하고 성과와 결과에 중점을 두기 위해 고안되었다. 사회 및 인적 안보 개발부, 관광 및 스포츠부, 자연 자원 및 환경부, 정보 통신 기술부, 문화부 등 새로운 부처들이 신설되었다.
탁신은 지방 주지사의 역할을 적극적인 정책 관리자로 변화시켰다. 역사적으로 중앙 정부 부처는 방콕에 보고하는 고위 관리들이 이끄는 현지 사무소를 통해 지방에서 운영되었으며, 내무부가 임명한 지방 주지사의 역할은 주로 의례적이었다.
탁신의 행정 개혁 정책의 핵심 요소인 'CEO 주지사'는 전통적인 관료주의의 운영 방식을 "더욱 결과 지향적이고 반응적인 도구"로 전환하려는 그의 노력을 상징했다. 2001년에 시범 운영되어 2003년 10월 모든 주에 도입된 CEO 주지사는 지방 개발을 계획하고 조정하는 책임을 맡았으며, 전반적인 지방 업무에 대한 책임이 부여되었다. 'CEO 주지사'는 각 주지사에게 직접 보고하는 재무부의 '지방 CFO'의 도움을 받았다. 주지사들은 채권을 발행하여 자금을 조달할 권한을 부여받았고, 집중적인 교육 과정을 이수했다.
당시 75개 주의 CEO 주지사는 내무부 장관의 임명으로 이루어졌으며, 인력과 재정 관리에 더 큰 권한을 가졌다. 'CEO 주지사 예산'이라는 특별 예산도 배정되었는데, 이는 수천만 밧에 달했다. 실제로는 이 예산이 지역 국회의원들 사이에서 관리되고 공유되었으며 정치적 목표 달성을 위한 것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심지어 학자들로부터는 탁신 정부의 '고용된 비전 작성자'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쿠데타 이후, 쑤라윳 출라논 총리는 2008년부터 시작될 주 및 지역 그룹 개발을 위한 예산 계획 관리 및 준비에 관한 왕실 법령을 초안했다. 'CEO 주지사 예산'은 폐지되었고, 이로써 지역 국회의원들이 표를 얻기 위해 예산을 사용하는 것이 방지되었다.
탁신 시대에는 투자부터 공과금, 신분증 처리까지 관료적 절차를 줄이기 위한 여러 정부 원스톱 서비스 센터도 개설되었다.
4.3. 외교 정책

탁신은 중국, 호주, 바레인, 인도, 미국과 여러 FTA 협상을 시작했다. 특히 미국과의 FTA는 높은 비용의 태국 산업이 사라질 수 있다는 비판을 받았다.
태국은 미국 주도의 이라크 전쟁 침공에 참여하여 423명의 인도주의 지원군을 파견했다. 2004년 9월 10일 병력을 철수했으며, 이라크에서 두 명의 태국 군인이 반군의 공격으로 사망했다.
탁신은 태국이 외국의 원조를 거부하고, 기부국들과 협력하여 메콩 강 하류 지역의 이웃 국가들 개발을 지원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탁신은 외국 지도자들과 국제 사회에 대해 외교적이지 못한 행동을 했다는 비난을 여러 차례 받았다. 유엔에 대한 그의 유명한 발언 외에도(위 '마약과의 전쟁' 참조), 국제 회의에서 실수를 저질렀다는 의혹도 있었다.
탁신은 태국을 지역 선도 국가로 자리매김하는 데 열정적이었으며, 라오스와 같은 빈곤한 인접 국가들에서 다양한 개발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더욱 논란이 된 것은, 그가 미얀마 독재 정권과 긴밀하고 우호적인 관계를 맺었으며, 여기에는 그의 가족 사업과 위성 통신 거래를 체결할 수 있도록 빈곤한 국가에 40.00 억 THB 규모의 신용 한도를 제공한 것도 포함된다.
탁신은 그의 전 외무부 장관 쑤라끼앗 싸티라타이의 유엔 사무총장이 되기 위한 다소 가능성 없는 캠페인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4.4. 남부 태국 반란 대응
태국 남부 3개 주에서 2001년부터 폭력 사태가 재개되었으며, 이 지역은 무슬림이자 말레이인이 다수를 차지한다. 이러한 폭력 사태의 원인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이 있다. 2001년 이후의 공격은 경찰, 군대, 학교에 집중되었으나, 민간인(불교 승려 포함)도 정기적인 표적이 되었다. 탁신은 이러한 상황 관리 방식에 대해 광범위한 비판을 받았다.
세 가지 주요 논란이 되는 사건 중 첫 번째는 시위대가 은신해 있던 크루 세 모스크를 군대가 급습하여 시위대를 살해한 사건이었다. 두 번째는 2004년 10월 딱 바이 사건으로, 군대가 평화로운 시위를 해산하는 과정에서 84명의 무슬림 시위자가 사망했다. 수백 명의 구금자들은 총칼의 위협 속에서 군용 트럭에 땔감처럼 겹겹이 쌓여 수갑이 채워진 채 엎드려 있어야 했다. 트럭은 구금 장소로 이동하기까지 몇 시간 동안 지체되었다. 84명의 희생자들은 질식, 압사 또는 과열로 사망한 것으로 보고되었다. 투명성 부족과 부실한 조사로 인해 사망의 정확한 성격과 원인은 논란과 의심의 대상이 되었다. 이 외에도 더 많은 사망자가 발생했다는 보고가 있었으나, 이는 확인되지 않았다.
세 번째 사건으로, 무슬림 변호사 쏨차이 닐라파이짓은 고문당했다고 주장하는 반군 혐의자들을 변호하다가 경찰에 의해 납치되어 살해된 것으로 추정되며 실종되었다. 경찰 수사 및 재판 과정에서 증언과 법의학적 증거에도 불구하고, 연루된 것으로 알려진 경찰에 대한 모든 혐의는 기각되었고 강제 실종 사건은 종결되었다.
탁신은 이 지역에서 군사 및 경찰 활동을 확대하겠다고 발표했다. 2005년 7월, 탁신은 남부 3개 주의 불안정한 상황을 관리하기 위해 긴급 법령을 발효했다. 여러 인권 단체들은 이 법령이 시민의 자유를 침해하는 데 사용될 수 있다고 우려를 표명했다.
2005년 3월, 탁신은 전 총리 아난 판야라춘이 의장을 맡는 국가 화해 위원회를 설립하여 남부 지역의 평화 정착 노력을 감독하도록 했다. 2006년 6월 최종 보고서에서 위원회는 이슬람 율법의 도입과 파타니 말레이어 (야위)를 태국어와 함께 이 지역의 공식 언어로 지정할 것을 제안했다. 탁신 행정부는 이 보고서를 검토하기 위한 정부 위원회를 배정했으나, 아무런 조치도 취해지지 않았다.
탁신은 남부 지역의 폭력 사태를 일으키는 이슬람 무장 단체를 훈련시키는 데 사용된 말레이시아의 정글과 무장 단체에게 영감을 준 인도네시아를 비난했다。
4.5. 수완나품 공항 건설
오랜 논의와 공항 부지 안정성에 대한 우려로 인해 계획이 장기간 방치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탁신 정부는 새로운 수완나품 국제공항 건설을 추진했다. 공항은 탁신 정부가 전복된 지 일주일 만에 개장했다.
탁신 정부 구성원들은 수완나품 공항 건설 프로젝트에서의 부패 혐의로 기소되었다. 이러한 혐의는 군사 정권이 2006년 쿠데타를 정당화하는 데 사용되었다. 군부는 공항에 대한 여러 조사를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사단은 공항 손상이 "미미하고" "흔한" 수준이라고 밝혔다. 손상 복구 비용은 총 공항 건설 비용의 1% 미만으로 추정되었다. 군부는 공항 수리를 지연시키고 공항 문제를 심화시켜 탁신 정부에 추가적인 책임을 전가하려 한다는 비판을 받았다.
4.6. 비판과 논란 (총리 재임기)
총리 재임 기간 동안 탁신 친나왓에게는 여러 가지 비판과 논란이 제기되었다.
4.6.1. 정책 부패
탁신은 "정책 부패"로 비난받았다. 이는 인프라 및 자유화 정책과 같이 합법적이면서도 "국민의 이익을 침해하는" 행위로 정의되었다. 국가 개발 행정 연구원(NIDA)의 수판니 차이암폰과 시린팁 아룬루에는 정책 부패로 인해 국가가 원래 지출해야 할 금액보다 5~30% 더 많은 비용을 지출하게 되어 총 4000.00 억 THB의 추가 비용이 발생했다고 주장했다. 탁신 비판자들은 추가적인 부패 사례를 지적한다. 2003년 태국 투자 위원회(BOI)가 신 새틀라이트의 iPSTAR 프로젝트에 총 164.00 억 THB 상당의 세금 감면 혜택을 부여한 것과, 같은 해 태국 교통부가 신 코퍼레이션이 저가 항공사 에어아시아와 합작 투자를 마무리하려던 시점에 킬로미터당 3.8 THB의 최소 항공료를 폐지한 결정 등이 그것이다.
2006년 쿠데타 이후, 군사 정권이 임명한 자산 조사 위원회는 정책 부패 혐의를 근거로 탁신의 자산을 동결했다. 탁신은 이러한 혐의를 부인했다. 그는 "그들은 나를 비난하기 위해 아름다운 용어를 만들어냈을 뿐이다. 이 정부에는 그런 것이 없다. 우리의 정책은 오직 대다수 국민의 이익을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2002년부터 2006년까지 신 코퍼레이션의 주가는 38 THB에서 104 THB로 173% 상승했지만, 신 새틀라이트의 주가는 하락했다. 같은 기간 태국 증권거래소(SET) 지수는 161% 상승했으며, 다른 주요 SET 블루칩 기업들의 주가는 훨씬 더 많이 상승했다. 산업 규제 완화로 인해 AIS의 시장 점유율은 68%에서 53%로 하락했다.
국제투명성기구는 탁신 정부 재임 기간 동안 태국의 기업인들 사이에서 투명성에 대한 평판이 다소 개선되었다고 보고했다. 2001년 태국의 CPI 점수는 3.2점(61위)이었으나, 2005년에는 3.8점(59위)으로 상승했다.
세계은행의 세계 거버넌스 지표 연구에 따르면, 탁신 재임 기간인 2002년부터 2005년까지 태국의 '부패 통제' 점수는 1998년부터 2000년까지의 민주당 정부 기간에 비해 낮게 나타났다.
2008년 탁신은 부패한 토지 거래와 관련하여 궐석 재판에서 2년형을 선고받았다. 총리 재임 중 저지른 부패 행위로 유죄 판결을 받은 최초의 태국 정치인으로서, 탁신은 아내가 국영 기관으로부터 토지를 헐값에 매입하는 것을 도운 과정에서 이해충돌 규정을 위반한 것으로 밝혀졌다.
4.6.2. 언론 통제 및 기타 비판
탁신 정부는 미인가 커뮤니티 라디오 방송국 단속에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비난을 받았으며, 탁신은 비판적인 언론인들을 상대로 명예훼손 소송을 제기하기도 했다. 2010년 3월 사건 직후, 아피싯 웨차치와는 레드셔츠 지도부와 대화하겠다고 밝혔으나 탁신과는 대화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그는 탁신의 부와 사치를 비판하며, 총리의 호화로운 생활과 많은 지지층의 소박한 농업 기반을 대조시켰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상대방이 자칭하는 '프라이'(ไพร่태국어, 서민)와의 친밀성을 비난하며, 탁신이 태국 군대, 관료, 정당의 전통적인 엘리트층인 '암마트'에 훨씬 더 가깝다고 주장했다.
5. 2005년~2006년 정치 위기 및 실각
총리 탁신 친나왓은 2005년 압도적인 지지로 재선에 성공했으나, 이후 신 코퍼레이션 매각 논란과 대규모 반정부 시위에 직면하며 정치 위기를 겪었다. 이는 결국 의회 해산, 조기 총선 무효화, 그리고 2006년 군사 쿠데타로 이어져 그의 실각을 초래했다.
5.1. 2005년 재선과 초기 시위
"재건의 4년, 기회 창출의 4년"이라는 슬로건 아래, 탁신과 타이락타이당은 2005년 태국 총선거에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어 의회 500석 중 374석을 차지했다. 이 선거는 태국 역사상 가장 높은 투표율을 기록했다. 그러나 그의 두 번째 임기는 곧 "의회 독재"라는 비판과 함께 시위에 직면했다.
정치 위기는 미디어 거물이자 인기 토크쇼 진행자였던 송티 림통꾼이 탁신에 대한 비판을 시작하면서 촉발되었다. 한때 탁신 지지자였던 송티는 탁신이:
- 논란이 많은 승려 루앙 타 마하 부아의 설교를 인쇄한 송티를 고소하여 언론 자유를 제한했다.
- 유명한 에라완 사당 훼손 사건을 주도했다.
는 등의 비난을 제기했다.
5.2. 신 코퍼레이션 매각 논란
2006년 1월 23일, 탁신 일가는 신 코퍼레이션의 모든 지분을 테마섹 홀딩스에 매각했다. 신나왓 가문과 다마퐁 가문은 이 매각으로 약 730.00 억 THB (약 18.80 억 USD)를 세금 없이 벌어들였다. 이는 태국 증권거래소에서 주식을 매각하는 개인에게 양도소득세를 면제하는 규정을 활용한 것이었다. 탁신은 국가 자산으로 여겨지는 공기업을 외국 기업에 매각하여 개인적인 이득과 뇌물을 취했다는 부패 혐의로 비난받았다. 당시 태국 법은 국가 중요 자산의 공공 또는 외국 기업 매각을 금지했지만, 탁신은 이러한 매각을 허용하도록 법을 개정했다.
신 코퍼레이션 매각 이후, 민주주의를 위한 인민 동맹(PAD)이 주도하는 시위가 뒤따랐으며, 이 시위의 지도자에는 참롱과 송티가 포함되었다. 시위 참가자 수는 곧 수만 명으로 불어나 방콕 정부청사 주변을 점거했다.
5.3. 의회 해산 및 조기 총선
2006년 2월 24일, 탁신은 의회 해산을 발표했으며, 4월 2일로 조기 총선 일정을 잡았다.
탁신은 조기 총선을 실시한 것에 대해 비판을 받았다. 이는 사실상 어떤 국회의원도 당적을 변경하는 것을 막는 결과를 낳았다. 더 네이션 사설은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이는 민주주의의 개념, 특히 우리와 같은 덜 발달된 민주주의에서 중대한 오류를 간과하고 있다. 빈곤하고 정보가 부족한 대중은 탁신과 같은 인물에게 쉽게 조종당할 수 있으며, 탁신의 조작은 이미 잘 기록되어 있다."
탁신의 타이락타이당은 야당의 광범위한 보이콧에도 불구하고 선거에서 승리하여 의회 462석을 얻었다. 득표율은 찬성표 대 반대표가 16대 10이었다(불참자 제외). 그러나 40명의 타이락타이당 후보들은 무경쟁 선거에서 1997년 헌법이 요구하는 최소 20% 득표율을 얻지 못해 재선거가 필요했다. 민주당은 재선거에 참여하기를 거부했고, PAD와 함께 중앙 행정 법원에 재선거 취소를 청원했다. 참롱 스리무앙은 PAD가 선거를 무시하고 "탁신이 사임하고 태국에 왕실이 임명한 총리가 나올 때까지 계속 집회를 가질 것"이라고 선언했다.
탁신은 2006년 4월 4일 의회가 재개되면 총리직을 수락하지 않을 것이지만, 그때까지는 과도기 총리직을 유지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는 이후 과도기 부총리 칫차이 완나사티트에게 직무를 위임하고, 정부청사를 떠나 휴가를 떠났다.
4월 25일 재선거에서는 타이락타이당이 25개 선거구에서 승리하고 2개 선거구에서 패배했다. 4월 29일에는 13개 선거구에서 또 다른 재선거가 예정되었다. 타이락타이당은 이후 20% 규칙을 충족시키기 위해 소규모 정당들에게 선거 출마를 돈으로 회유했다는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으며, 민주당은 소규모 정당들에게 출마하지 않도록 돈을 주었다는 혐의를 받았다. 헌법재판소가 주요 선거 무효 여부를 심의하는 동안 재선거는 중단되었다. 망명 중 언론 인터뷰에서 탁신은 자신의 기술적 과반수를 주장했다.
5.4. 2006년 군사 쿠데타
2006년 5월 8일, 태국 헌법재판소는 투표소의 부적절한 위치를 이유로 4월 총선을 8대 6으로 무효화 판결을 내렸다. 이 판결은 "사법적 행동주의"의 획기적인 사례로 불렸다. 4월 총선을 보이콧했던 민주당은 10월 선거에 출마할 준비가 되었다고 밝혔다.
새로운 선거가 명령되었고, 이후 2006년 태국 총선거가 10월 15일로 정해졌다. 법원은 선거관리위원회 위원들에게 직무유기 혐의로 유죄를 선고하고 구금했다. 그러나 9월 19일 군부가 정권을 장악하면서 선거는 취소되었다.
탁신 정부는 부패, 권위주의, 핀란드 플롯 음모, 이해충돌, 외교적 비숙련, 언론 통제 등의 혐의를 받았다. 탁신은 조세 회피, 왕실 모독 (푸미폰 아둔야뎃 국왕 모독), 태국 기업 자산의 국제 투자자 매각 등의 혐의로 기소되었다. 국제앰네스티를 포함한 독립 기관들은 탁신의 인권 기록을 비판했다. 탁신은 또한 총리 재임 중 자산 은닉 혐의로 기소되었다.
2006년 민주주의를 위한 인민 동맹의 대규모 시위가 이어졌고, 2006년 9월 19일 탁신이 해외에 있는 동안 국가 안보 이사회(CNS)로 불린 군사 정권이 2006년 태국 쿠데타를 통해 탁신의 과도기 정부를 교체했다. 태국 헌법재판소는 타이락타이당이 선거 부정을 저질렀다는 이유로 소급 적용하여 당을 해산하고, 탁신과 타이락타이당 고위 간부들의 정치 활동을 5년간 금지했다. CNS가 임명한 자산 조사 위원회는 탁신과 그의 가족의 태국 내 자산 총 760.00 억 THB (22.00 억 USD)를 동결했는데, 이는 탁신이 재임 중 비정상적으로 부유해졌다는 주장에 근거한 것이었다. 탁신과 그의 아내는 2001년 취임 당시 총 151.00 억 THB의 자산을 신고했으나, 취임 전에 많은 자산을 자녀들과 측근들에게 이전한 상태였다.
탁신은 2008년 2월 28일, 그가 지지했던 인민의 힘 당이 쿠데타 이후 선거에서 승리한 후 태국으로 귀국했다。 그러나 2008년 베이징 올림픽을 위해 베이징을 방문한 후, 그는 최종 대법원 판결을 듣기 위해 귀국하지 않고 영국에 망명을 신청했다. 이는 거부되었고, 이후 그는 여러 나라를 떠돌아야 했다. 2008년 10월, 태국 대법원은 탁신에게 궐석 재판으로 이해충돌 혐의를 인정하여 2년형을 선고했다.
인민의 힘 당은 이후 대법원에 의해 해산되었지만, 당원들은 재결집하여 탁신이 또한 지지하는 프아타이당을 결성했다. 탁신은 반독재 민주 통일 전선 (레드셔츠)의 지지자이자 자금 지원자로 알려져 있다. 정부는 2009년 쏭끄란 축제 기간 동안 UDD 시위에서의 역할 때문에 탁신의 여권을 취소했다. 2010년 2월 26일, 대법원은 탁신이 비정상적으로 부를 축적했다는 혐의로 유죄 판결을 내린 후, 그의 동결된 자산 중 460.00 억 THB를 압류했다. 2009년에는 탁신이 몬테네그로의 경제 시민권 프로그램을 통해 몬테네그로 시민권을 취득했다는 사실이 발표되었다.
6. 망명 및 법적 문제 (2006년 ~ 2023년)
탁신 친나왓은 2006년 총리직에서 축출된 이후 2023년 태국 귀국까지 17년간의 망명 생활을 보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다양한 법적 문제에 직면했으며, 해외에서도 태국 정치에 지속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
6.1. 망명 생활
총리직에서 물러난 탁신은 2006년 9월 20일 뉴욕에서 영국 런던으로 이동하며 사실상 망명 생활을 시작했다. 2008년 2월 28일 태국으로 잠시 귀국했으나, 같은 해 8월 베이징 올림픽에 참석하기 위해 출국한 뒤 다시 태국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2008년 11월 8일 영국 정부가 그의 비자를 취소한 후, 그는 '소재를 전전하고 있다'고 밝히며 사실상 떠돌이 생활을 했다.
2009년에는 몬테네그로 시민권을 획득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이후 니카라과, 우간다 등 여러 국가의 시민권을 추가로 취득했다는 보도도 나왔다. 2009년 11월 인터뷰에서 그는 두바이에 거주하며 태국 외 지역에 약 1.00 억 USD의 자산을 보유하고 있다고 밝혔으며, 금광, 다이아몬드 연마, 복권 사업 등에 투자하고 있다고 말했다. 2011년 7월, 그의 여동생 잉락 친나왓이 이끄는 프아타이당이 총선에서 승리한 후, 2011년 8월 15일 일본 정부는 탁신에게 입국 비자를 발급했다. 그는 8월 22일 일본에 입국하여 기자회견에서 잉락 정부의 운영에 개입하지 않을 것이며, 자신의 귀국 문제가 태국 국민의 갈등을 심화시킬 것을 우려해 귀국할 생각이 없다고 밝혔다.
2008년 11월 영국 정부는 탁신과 폿자만의 비자를 취소했으며, 방콕 영국 대사관은 항공사들에게 그들이 영국행 항공편에 탑승하지 못하도록 요청했다. 2008년 말, 아라비안 비즈니스는 영국이 탁신의 영국 내 자산 42.00 억 USD를 동결했다고 보도했으나, 영국 정부는 이 주장을 확인하거나 부인하지 않았다.
탁신은 중국, 바하마, 니카라과, 그리고 남미와 아프리카의 여러 나라를 망명지로 고려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보도에 따르면 신나왓 가문은 바하마와 니카라과에서 명예 시민권을 부여받았으며, 중국에 550.00 만 GBP 상당의 집을 짓고 있었다. 2009년 5월 말 기준으로 그는 두바이에 머물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 대변인은 탁신이 태국 여권이 아닌 6개의 여권을 사용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2008년 12월, 탁신은 독일 거주 허가를 얻었으나, 2009년 5월 28일 독일 정부가 이 사실을 인지하자마자 취소되었다. 이후 탁신은 니카라과 외교관 자격을 취득했다. 2011년 7월 15일, 독일 외무부 장관 귀도 베스터벨레는 탁신의 대리 정당이 선거에서 승리한 후, 탁신의 독일 입국 금지 조치를 해제했다.
2008년, 그는 아내와 이혼했다. 2020년 10월, 그와 그의 측근들이 아랍에미리트 두바이에서 코로나19에 감염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2022년 7월, 탁신은 당시 NHK당 참의원이던 히가시타니 요시카즈와 회담하여 아베 신조 전 총리 피살 사건에 대해 애도를 표했다.
6.2. 맨체스터 시티 FC 구단주
총리 시절, 탁신은 풀럼 FC와 리버풀 FC를 인수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비평가들은 이를 그의 정치적 문제를 모면하기 위한 홍보성 행위라고 주장했다.
2007년 6월 21일, 총리직에서 물러난 탁신은 프리미어리그 클럽 맨체스터 시티 FC를 8160.00 만 GBP에 인수했다. 그는 스벤예란 에릭손을 감독으로 임명하고 유명 선수들을 영입한 후, 팬들로부터 "프랭크"라는 별명으로 불리며 잠시 인기를 얻었다. 그러나 에릭손은 나중에 탁신의 구단 운영에 대해 비판하며 "그는 축구를 이해하지 못했고,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고 말했다. 그는 2008년 9월 아부다비 유나이티드 그룹의 투자자들에게 클럽을 약 2.00 억 GBP에 매각했다.
맨체스터 시티 매각 후, 탁신은 '명예 회장'으로 지명되었으나 어떠한 행정적 책임도 없었다. 그러나 그는 구단이 자신의 유죄 판결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고 태국 당국으로부터 '도피 중'이라는 이유로 나중에 명예 회장직에서 해임되었다.
6.3. 주요 법적 문제
탁신 친나왓은 망명 기간 동안 태국에서 여러 법적 혐의와 판결에 직면했다.
6.3.1. 라차다피섹 토지 매입 사건
2008년 5월, 쑤라윳 출라논 총리는 탁신이 태국으로 돌아와도 좋다고 말했으며, 개인적으로 그의 안전을 보장하겠다고 밝혔다. 2008년 1월 탁신의 부인 폿자만은 방콕 도착 즉시 체포되었으나, 대법원 출두 후 보석으로 풀려났고 출국 금지 명령을 받았다. 그녀는 주식 거래 및 토지 매각 법규 위반 혐의로 재판을 받게 되었다.
2008년 2월 28일, 탁신은 17개월의 망명 생활 끝에 방콕에 도착했다. 탁신은 정치에 다시 뛰어들지 않고 축구 관련 활동에 집중하고 싶다고 밝혔다. 3월, 탁신은 두 건의 형사 부패 사건 중 하나에서 대법원에 무죄를 주장했다. 그는 한 달간의 영국 여행을 허가받은 후 4월 11일 다시 출두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6월, 대법원은 탁신이 중국과 영국으로 여행하려는 요청을 기각했는데, 그의 부패 사건이 재판을 앞두고 있었기 때문이었고, 기소 후 여권을 압수당했다. 7월, 법원은 미얀마에 대한 저리 대출과 관련된 탁신의 네 번째 부패 혐의에 대해 관할권을 인정했다. 법원은 또한 탁신, 그의 전 내각, 그리고 현 정부 구성원 3명이 2003년 새로운 국영 복권 설립을 통해 도박 방지법을 위반했다는 주장을 심리하기로 합의했다.
2008년 7월 31일, 폿자만은 유죄 판결을 받고 3년형을 선고받았으나, 보석으로 풀려났다. 방콕 형사 법원은 또한 폿자만의 양자이자 탁신의 차명으로 자산을 소유한 혐의를 받던 반포트 다마퐁과 그의 비서에게도 탈세 혐의로 유죄를 선고했다.
2008년 8월 10일, 탁신과 폿자만은 베이징에서 열린 2008 베이징 올림픽 개회식에 참석하여 보석 조건을 위반했다. 그는 태국으로 돌아오고 싶지만 현재 자신과 가족에게 안전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탁신은 정치적 적들이 사법부를 방해하고 있다고 주장하며 영국에 정치 망명을 신청했다. 그가 실제로 망명 신청을 진행했는지에 대한 증거는 없으며, 그의 망명 신청은 승인되거나 거부되지 않았다.
2008년 9월 16일, 태국 대법원 정치인 형사부는 탁신에게 다른 4건의 계류 중인 부패 사건 중 하나와 관련하여 두 번째 체포 영장을 발부하고 재판을 중단하라고 명령했다. 그의 이후 여러 부패 재판 불출석으로 인해 추가 체포 영장이 발부되었다.
2008년 10월 21일, 대법원 정치인 형사부는 탁신이 총리 재임 중 공매에서 자신의 아내가 공공 토지를 매입하는 것을 도왔고, 이 과정에서 권력을 남용했다고 판결하며 2년형을 선고했다. 이 판결은 그가 총리 재임 중 저지른 부패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은 최초의 태국 정치인이 되었다.
곧이어 탁신은 로이터 통신에 "결과를 통보받았다. 이렇게 될 줄은 오래전부터 예상했다"고 말하며, 이 사건이 정치적 동기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덧붙였다. 수석 검사 섹산 방솜분은 영국에 그의 범죄인 인도를 요청했다. 탁신은 이제 영국에 정치 망명을 신청하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했다.
2008년 11월 10일, 필리핀 대변인은 태국과의 '우호적인' 관계를 이유로 탁신의 정치 망명 요청을 '정중하게' 거절할 것이라고 밝혔다.
6.3.2. 자산 동결 및 몰수 판결
2010년 2월 26일, 태국 대법원은 탁신의 태국 내 자산을 압류할지 여부에 대한 판결을 선고할 예정이었다. 이 자산은 쿠데타 이후 AEC에 의해 동결된 760.00 억 THB 상당의 가치였다. AEC는 군사 정권의 훈령 30호에 따라 자산을 동결했다. 태국 전역에 긴장감이 고조되었고, 특히 방콕으로 향하는 도로에는 수만 명의 정부 보안군이 배치되었다. 그러나 UDD는 판결 당일에 집회를 열지 않겠다고 부인했다. 9명의 대법원 판사는 정책 부패를 통한 비정상적인 부의 축적 혐의에 대해 판결을 내려야 했다. 정책 부패는 법원에서 합법적이고 사회 및 경제에 잠재적으로 이익이 될 수 있는 경제 정책을 시행하면서도, 정책 결정자가 부분적으로 소유한 회사들을 지원함으로써 권력을 남용한 것으로 정의되었다. 검찰은 탁신이 총리 재임 중 5번의 권력 남용을 저질렀다고 주장했다.

법원은 먼저 탁신과 폿자만이 자산의 실제 소유주이며, 그의 자녀와 친척이 아님을 판결했다. 또한 법원은 군사 정권의 발표에 근거하여 자산을 압류할 권한이 있다고 판결했다. 법원은 탁신이 5건의 정책 부패 중 4건에서 유죄라고 판단하고, 460.00 억 THB의 압류를 명령했다. 나머지 300.00 억 THB는 동결 상태로 유지되었다.
- 첫 번째 혐의: 통신 사업자 양허 수수료를 소비세로 전환.** 이전에는 통신 사업자들이 TOT/CAT(국영 기업)에 매출의 일정 비율을 양허 수수료로 지불해야 했다. 탁신 정부는 이를 모든 사업자가 직접 정부에 동등한 소비세를 지불하는 시스템으로 변경했다. 이러한 소비세 부과는 결국 소비자에게 전가될 것이었다. 탁신은 모든 사업자들이 동일한 총 비용을 계속 지불했다고 주장했다. 재판관들은 이것이 AIS에 이득을 주면서 TOT에 해를 끼쳤으며, 따라서 권력 남용이라고 판결했다.
- 두 번째 혐의: 선불 이동통신 서비스에 대한 수익 분배 계약 수정.** 이전에는 통신 사업자들이 후불 이동통신 서비스에 대해 TOT에 매출의 일정 비율을 지불해야 했다. 일반적으로 소비자에게 더 저렴한 선불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AIS는 TOT와 선불 서비스에 대한 수익 분배 계약을 협상하여 TOT에 더 적은 수익을 제공했다. 이는 2001년부터 2006년까지 약 142.00 억 THB의 손실(수익 25%에서 20%로 감소)과 2006년부터 2015년까지 추가로 약 560.00 억 THB의 손실(수익 30%에서 20%로 감소)을 초래한 것으로 추정된다. 재판관들은 선불 계약 조건이 AIS에 이득을 주면서 TOT에 해를 끼쳤다고 판결했다. 재판관들은 이 계약으로 인해 TOT의 총 수익이 실제로 상당히 증가했다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았지만, 선불 수익 증가가 TOT의 후불 수익에 해를 끼치면서 발생했다고 지적했다. 2001년 13%에서 2007년 80%로 폭발적인 태국 이동통신 보급률 증가(거의 전적으로 선불 서비스 덕분)와 같은 기간 AIS 시장 점유율이 68%에서 53%로 감소한 사실은 법원에서 고려되지 않았다.
- 세 번째 혐의: 모바일 로밍 계약 수정.** 이전에는 이동통신 사업자 간 로밍 계약이 없었으며, 한 사업자의 가입자는 다른 사업자의 네트워크에서 서비스를 사용할 수 없어 이동통신 산업의 성장을 제한했다. 탁신 정부 하에서는 로밍이 허용되었으며, 로밍 요금은 AIS와 다른 사업자들이 TOT 및 기타 국영 기업과 공유해야 하는 수익에서 차감되었다. 본질적으로 TOT는 AIS가 다른 사업자 네트워크에서 로밍하는 가입자의 비용을 분담하도록 도왔다. 이는 TOT와 CAT의 수입을 감소시키면서 사업자들에게 이득을 주었다. 그러나 재판관들은 이것이 AIS에 이득을 주었지만, 이는 탁신이 아닌 AIS의 새 소유주(테마섹 홀딩스)에게 이득을 주었으므로 권력 남용이 아니라고 판결했다.
- 네 번째 혐의: 타이콤 4호를 iPSTAR로 교체.** 이전 정부는 원래 타이콤 3호의 백업 위성으로 타이콤 4호를 발사 및 운영하기 위해 신샛과 계약했었다. 대신 신샛은 탁신 정부와 협상하여 당시 역사상 가장 큰 상업 위성인 iPSTAR를 발사하기로 했으며, 이는 상업 인터넷 서비스를 제공하면서 타이콤 3호의 백업 역할도 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iPSTAR는 타이콤 3호와 같은 C-밴드 트랜스폰더를 가지고 있지 않아 기술적으로는 불가능한 주장이다. 신 코퍼레이션의 신샛 소유권은 이후 51%에서 40%로 감소했다. 재판관들은 소유권 변경과 위성 사양 변경이 타이콤 3호의 백업 위성 역할을 일대일로 수행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태국의 통신 보안을 약화시켰다고 판단했다. 또한 협상이 신샛이 별도의 양허 계약 없이도 타이콤 4호보다 훨씬 큰 상업적 잠재력을 가진 위성을 발사할 수 있게 했다고 지적했다.
- 다섯 번째 혐의: EXIM 은행의 미얀마 대출을 타이콤 서비스 대금으로 지불.** 탁신은 미얀마 지도자들과 만나 양국 간 무역 협정을 협상할 예정이었다. 협상된 거래 중 하나는 미얀마가 신샛으로부터 3.76 억 THB 상당의 위성 서비스를 구매할 수 있도록 태국 EXIM 은행 대출을 받는 것이었다. 탁신은 협상에서 많은 거래가 성사되었으며, 16개 다른 회사들도 EXIM 은행의 대출 혜택을 받았다고 언급했다. 재판관들은 대출이 탁신에게 특혜를 주었으므로 권력 남용이라고 판결했다.
재판관들은 탁신이 취임한 날부터 싱가포르 테마섹 홀딩스에 주식을 매각한 날까지의 신 코퍼레이션 주식 가치 상승분인 460.00 억 THB를 압류하기로 결정했다. 참고로 탁신이 총리로 재직하던 당시, 그는 약 5.00 억 THB의 자산을 신고했으며, 폿자만은 80.00 억 THB에서 90.00 억 THB의 자산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기간 동안 신 주식은 121% 상승했으며, 이는 기준 SET 지수의 128% 상승과 비슷했고, 태국 최고의 블루칩 기업 중 하나인 시암 시멘트는 717% 상승했다. 재판관들은 탁신이 직무유기 혐의로 유죄라고 판단하지 않았다. 또한, 탁신의 정책으로 인한 정부의 이득은 판결과 무관하다고 언급했다. 정부는 양허 계약 변경만으로 약 1000.00 억 THB의 증가된 수입을 얻었다.
6.3.3. 기타 의혹과 혐의
2009년 4월, 추밀원 장군 피치트 꿀라와닛차야는 전 미국 태국 대사 랠프 L. 보이스로부터 탁신이 반정부 시위를 조직하기 위해 케이맨 제도 은행 계좌를 통해 1000.00 억 THB (28.00 억 USD)를 자금 세탁했다는 정보를 들었다고 보고했다. 보이스 본인은 "왜 자신이 탁신이 예금을 했을 수도 있는 곳에 대한 정보원이라고 언급되었는지 전혀 모르겠으며, 그러한 정보도 가지고 있지 않다"고 말했다.
탁신은 2009년 11월 4일 캄보디아 정부와 훈센의 특별 경제 고문으로 임명되었다고 발표되었다. 캄보디아는 그를 정치적 박해의 희생자로 간주하여 탁신을 태국으로 인도하기를 거부할 것이라고 밝혔다. 2009년 11월 5일, 양국은 서로의 대사를 소환했다. 태국 총리 아피싯 웨차치와는 이를 "첫 번째 외교적 보복 조치"라고 밝혔다. 캄보디아가 태국의 내정에 간섭하고 있으므로 모든 양자 협정을 재검토할 것이라고 말했다. 캄보디아 장관회의 구성원이자 부총리인 쏙 안은 탁신의 임명은 캄보디아 내부의 결정이며 "국제 관행에 부합한다"고 말했다. 대사들의 상호 철수는 양국 간에 발생한 가장 심각한 외교 조치였다.
2009년 11월 11일, 시와락 추띠퐁은 탁신과 캄보디아 총리 훈센의 기밀 비행 계획을 캄보디아 주재 태국 대사관 1등 서기관인 캄롭 팔라왓위차이에게 전달한 혐의로 캄보디아 경찰에 체포되었다. 시와락은 캄보디아의 항공 교통 관제를 관리하는 민간 기업인 캄보디아 항공 교통 서비스에서 일하는 태국인 엔지니어였다. 시와락은 자신이 스파이가 아니라고 부인했고, 태국 정부는 그가 무고하며 이 사건이 탁신/캄보디아의 태국-캄보디아 관계 추가 손상 음모라고 주장했다. 태국 1등 서기관은 캄보디아에서 추방되었다. 시와락은 전 1등 서기관 캄롭이 스파이 활동에 연루되지 않았음을 확인하여 자신의 손상된 명예를 회복시켜 달라고 요청했다. 캄롭은 논란 내내 언론에 언급을 거부했으며, 카싯의 비서인 차와논 인타라코말야쑷은 1등 서기관이나 시와락에게 잘못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캄롭으로부터 어떠한 진술도 없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시와락은 이후 7년형을 선고받았다. 탁신은 캄보디아 정부에 시와락의 사면을 요청했고, 그는 곧 노로돔 시하모니 국왕에 의해 사면되어 추방되었다. 부총리 수텝 타우수반은 나중에 시와락이 아피싯 정부의 신뢰를 떨어뜨리기 위해 자신의 체포를 연출했다고 비난했다. 전 태국 스파이 책임자이자 외무부 장관 프라송 순시리도 이에 동의하며 "처음부터 짜고 친 것이었다"고 주장했다.
2010년 2월 26일, 태국 대법원은 쿠데타 이후 AEC에 의해 동결된 탁신의 태국 자산 760.00 억 THB에 대한 판결을 선고할 예정이었다. 법원은 탁신이 5건의 정책 부패 중 4건에서 유죄라고 판단하고, 460.00 억 THB의 압류를 명령했다. 나머지 300.00 억 THB는 동결 상태로 유지되었다. 이 판결은 그의 자녀와 친척에게 이전된 신 코퍼레이션 주식과 관련된 논란을 포함했다. 탁신은 메신저 역할을 하는 운전사나 가정부에게 주식을 명의 신탁 방식으로 이전하여 수십억 바트의 자산을 불법적으로 은닉한 혐의도 받았다. 탁신은 눈물을 흘리며 헌법재판소에 정직한 실수였다고 말했지만, 법원은 그를 무죄로 선고했다.
또한 탁신과 폿자만이 자녀들에게 신 코퍼레이션 주식을 양도할 때 탈세가 있었는지 여부도 논란이 되었다. 탁신은 2001년 취임 당시 폿자만의 자산이 수십억 바트라고 신고했지만, 그 이전에 이미 많은 자산을 자녀와 친척들에게 이전한 것으로 드러났다. 자산 조사 위원회는 판통태의 계좌에 신 코퍼레이션의 배당금이 입금되었고, 이 계좌가 폿자만의 계좌로 11.00 억 THB를 이체하는 데 사용되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핀통타 또한 부모의 차명인으로 지목되었지만, 그녀는 어머니로부터 받은 돈이 "생일 선물"이었다고 주장했다. 이 생일 선물은 신 코퍼레이션 주식 3.67 억 THB를 매입하는 데 사용되었다. DSI, AEC, 증권거래위원회는 윈마크와 두 펀드가 모두 탁신과 그의 전처 소유임을 발견했다.
2010년 2월 27일 저녁, 방콕은행 세 지점 밖에서 오토바이에서 수류탄이 투척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인명 피해는 없었다. 범인은 잡히지 않았고, 어떤 조직도 공격의 책임을 주장하지 않았다. 탁신과 UDD는 즉시 어떠한 관련도 부인했다. 오토바이 운전사의 몽타주를 기반으로 체포 영장이 발부되었다.
2019년 8월 30일, 태국 대법원은 2003년 끄룽타이 은행의 부패 스캔들에 연루되어 탁신이 돈세탁을 했다는 혐의를 무죄로 판결했다. 법원은 끄룽타이 은행 이사 차이차이 인드라미삽의 증언이 모순된다고 판시하며 탁신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6.4. 해외에서의 정치적 영향력
탁신은 망명 중에도 태국 정치에 깊은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는 인민의 힘 당(2008년 통치)과 그 후신인 프아타이당, 그리고 반독재 민주 통일 전선(레드셔츠) 운동을 통해 지속적으로 태국 정치에 개입했다. 그의 여동생 잉락 친나왓은 2011년부터 2014년까지 총리를 역임했으며, 막내딸 패통탄 친나왓은 2024년부터 총리로 재직하고 있다.
2009년 중순, 탁신 지지자들이 주도하는 대규모 폭력 시위로 인해 파타야에서 열릴 예정이던 ASEAN 정상회담이 취소되고 방콕에 비상사태가 선포되었다. 탁신은 위성 전화와 화상 통화를 통해 UDD 집회를 격려하며 한때 "인민 혁명"을 촉구하기도 했다. 시위 진압 이후 그는 단지 "도덕적 지지"를 제공했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2021년, 코로나19 범유행이 한창이던 시기에 그는 '토니 우드섬'이라는 가명으로 클럽하우스 계정을 사용하여 태국 정치와 코로나19 대응에 대해 태국 청중과 소통했다. 그는 태국에 있는 동안에도 정치 활동에 관여하는 것으로 보였으며, 2020년에도 프아타이당 후보들을 지원하기 위해 활동했다는 보도가 있었다. 그러나 그해 지방 선거에서 프아타이당 후보들이 예상보다 저조한 성과를 보이면서 탁신의 인기가 예전 같지 않다는 평가도 나왔다. 2022년에는 프아타이당과 팔랑 프라차랏 당이 국회 회의에 불참하여 '100명으로 나누는 비례대표 의원 배분 방식'이 통과되면서 프아타이당이 유리해지자, 탁신이 쁘라윗 웡수완 팔랑 프라차랏 당 대표와 은밀히 거래했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6.5. 캄보디아 경제 고문
2009년 11월 4일, 탁신이 캄보디아 정부와 훈센 총리의 특별 경제 고문으로 임명되었다고 발표되었다. 캄보디아는 그를 정치적 박해의 희생자로 간주하여 탁신을 태국으로 인도하기를 거부할 것이라고 밝혔다. 2009년 11월 5일, 양국은 서로의 대사를 소환하며 외교적 긴장이 고조되었다. 태국 총리 아피싯 웨차치와는 이를 "첫 번째 외교적 보복 조치"라고 밝혔으며, 캄보디아가 태국의 내정에 간섭하고 있으므로 모든 양자 협정을 재검토할 것이라고 말했다. 캄보디아 부총리 쏙 안은 탁신의 임명이 캄보디아 내부의 결정이며 "국제 관행에 부합한다"고 주장했다. 대사들의 상호 철수는 양국 간에 발생한 가장 심각한 외교 조치였다.
- 스파이 논란**
2009년 11월 11일, 태국인 엔지니어 시와락 추띠퐁이 탁신과 캄보디아 총리 훈센의 기밀 비행 계획을 캄보디아 주재 태국 대사관 1등 서기관에게 전달한 혐의로 캄보디아 경찰에 체포되었다. 태국 정부는 시와락이 무고하며, 이 사건이 탁신과 캄보디아의 태국 관계 손상을 위한 음모라고 주장했다. 시와락은 이후 7년형을 선고받았으나, 탁신의 요청으로 노로돔 시하모니 국왕에 의해 사면되어 추방되었다.
7. 태국 귀국 및 이후 전개 (2023년 ~ 현재)
탁신 친나왓은 수년간의 망명 생활 끝에 2023년 8월 태국으로 귀국했으나 즉시 구금되었다. 이후 왕실의 사면과 가석방을 통해 자유의 몸이 되었으며, 그의 정치적 영향력은 가족을 통해 이어지고 있다.
7.1. 귀국 발표와 초기 구금
2023년 총선거를 앞두고 탁신은 15년간의 자발적 망명 생활을 끝내고 태국으로 돌아오겠다고 발표했다. 그는 고향으로 돌아와 가족과 함께하기 위해 기꺼이 징역형을 살겠다고 밝혔다. 정부 구성 과정이 지연되면서 여러 차례 연기된 끝에, 탁신은 2023년 8월 22일, 프아타이당 후보인 세타 타위신이 총리로 선출될 예정이던 바로 그날 태국에 도착했으며, 즉시 대법원으로 이송된 후 방콕 교도소에 수감되어 8년 형을 살게 되었다. 정치 평론가들은 그가 전체 형기를 채우지 않을 것이며, 그의 귀국이 군부 성향 정당들을 연립 정부에 참여시키는 정치적 거래의 일부로 협상된 것이라고 보았다.

2023년 8월 22일 오전 9시경, 탁신은 싱가포르 셀레타르 공항에서 걸프스트림 G650 항공편(GLF6)으로 돈므앙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개인 여객 터미널에 도착한 그는 라마 10세 국왕과 수티다 왕비의 초상화에 경의를 표하고 가족, 프아타이당 의원, 지지자들을 만난 후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탁신이 태국으로 돌아오는 동안, 약 1만 4천 명의 사람들이 비행기 추적 앱인 Flightradar24를 통해 그의 비행을 실시간으로 추적했으며, 이는 당시 가장 높은 실시간 추적 기록이었다. 또한, #탁신귀국 해시태그는 당일 태국 트위터에서 실시간 트렌드 1위를 차지했다.
탁신이 태국에 도착한 후, 경찰은 그를 대법원으로 이송한 다음 방콕 교도소로 보냈다. 그러나 같은 날 밤 수감 중이던 탁신은 불면증, 가슴 통증, 고혈압 증세를 보였고, 교도소 병원 의료진의 진단에 따라 더 나은 의료 장비를 갖춘 경찰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탁신은 경찰 병원 마하 푸미폰 라차누손 88세 건물 14층에 위치한 로열 스위트룸에서 치료를 받았다. 이후 패통탄은 탁신이 피로와 스트레스 증세를 보이며, 코로나19 후유증도 있다고 밝혔다. 그녀는 또한 부친의 사면 신청은 본인의 재량이며, 사립 병원 이송을 요청한 적이 없다고 덧붙였다.
7.2. 왕실 사면 및 가석방
2023년 9월 1일, 비사누 크르응암 부총리 겸 법무부 장관 대행은 법무부가 탁신에 대한 사면 신청서를 가족으로부터 접수했다고 밝혔다. 그는 다음 단계로 관련 기관에 문서를 보낼 것이라고 말했다. 같은 날, 라마 10세 국왕은 탁신에게 8년형을 1년으로 감면하는 왕실 서한을 발표했다. 이 사면 신청 절차와 왕실 명령을 받은 총리는 당시 프라윳 찬오차였다.
이후 2024년 2월 18일, 탁신은 경찰 병원에서 6개월간의 수감 생활을 마치고 나이와 건강상의 이유로 930명의 수감자 중 한 명으로 가석방되었다. 그는 오전 6시 6분경 두 딸과 함께 경찰 병원을 떠나 30분 만에 찬송라 저택에 도착했다. 탁신 지지자들은 그의 집 앞에서 응원하며 기다렸다. 피차이 라따나딜록 나 푸껫은 이 가석방으로 탁신이 정치적 지시를 더 쉽게 내릴 수 있게 되었다고 분석했다. 며칠 후, 당시 총리 겸 재무부 장관인 세타 타위신은 찬송라 저택에서 탁신을 만났다.
탁신은 당초 2024년 8월 22일에 형기가 만료될 예정이었으나, 이후 법무부 차관 퐁스와트 닐라요틴은 형기 만료일이 8월 31일로 수정되었다고 밝혔다. 그러나 2024년 8월 16일, 라마 10세 국왕은 2024년 7월 28일 6주년 생일 기념으로 2024년 왕실 사면 법령을 공포했으며, 이는 8월 17일 왕실 관보에 게재되어 8월 18일부터 발효되었다. 이 법령 제6조 3항에 따라 가석방 중이던 탁신은 즉시 완전한 사면을 받아 형기 만료일에 앞서 석방되었다. 같은 날, 탁신은 패통탄이 총리로 임명되는 왕실 명령 수락식에 참석했다. 그는 앞으로 정치적 직책을 맡지 않을 것이며, 패통탄의 정치 경로는 자신과는 다를 것이라고 확신했다.
7.3. 출소 후 활동 및 새로운 혐의
가석방 후 탁신은 전국 각지를 방문하고 외교 활동에도 관여하기 시작했다. 탁신계인 세타 총리는 국방장관을 비군인으로 임명하고 빈곤층을 위한 퍼주기 정책을 추진하는 등 탁신계 정책을 펼쳐 친군부 보수 세력의 불만을 키웠다.
2024년 5월, 태국 검찰은 탁신이 2015년 망명 중 한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한 발언에 대해 왕실 모독죄 혐의로 기소하겠다고 발표했다. 6월 14일, 탁신은 왕실 모독 혐의로 기소되었다. 탁신은 혐의를 부인했으나, 코로나19를 이유로 출두하지 않아 기소 절차가 6월 18일로 연기되었다. 6월 18일, 태국 검찰은 예상대로 탁신을 왕실 모독 혐의로 기소했다. 형사 법원은 같은 날 보석을 허가하여 그는 구금되지 않았다. 같은 해 8월 17일에는 국왕의 생일을 맞아 추가적인 왕실 사면을 받아 공식적으로 석방되었다.
2024년 8월, 헌법재판소의 결정에 따라 세타가 총리직에서 사임하자, 프아타이당과 친군부 보수 정당들은 기존의 연정을 유지하고, 탁신의 막내딸인 패통탄 친나왓이 태국의 새로운 총리가 되었다.
2024년 8월 22일, 탁신은 태국 귀국 1주년을 기념하여 네이션 그룹이 주최한 "디너 토크: 비전 포 태국 2024" 행사에서 비전을 발표했다. 이 행사에는 많은 유명 기업인과 정치인들이 참석했으며, 탁신은 경제, 마약 단속, 소프트 파워 정책 등 다양한 분야의 비전을 제시했다. 그는 또한 2017년 태국 헌법 개정, 정부 구성, 형법 제112조 관련 사건, 태국 쿠데타에 대한 견해, 그리고 자신과 쁘라윳, 쁘라윗과의 관계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탁신은 2017년 정당법 및 프아타이당 당규에 따라 당원 자격이 없으므로 정당에 가입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2024년 11월 13일 우돈타니주 꿈파와피군 왓 시나카람 다목적 광장에서 사라웃 페차파놈폰을 위한 유세에 참석하여 태국 귀국 후 첫 연설을 했다. 사라웃은 이 선거에서 승리했으며, 푸미탐 웨차야차이는 당 정책 외에 탁신이 사라웃의 승리에 기여했다고 언급했다.
이후 탁신은 지속적으로 사업 활동에 참여하고 있다. 예를 들어, 원 방콕의 리츠칼튼 방콕 호텔에서 열린 2024 포브스 글로벌 CEO 콘퍼런스에 참석했으며, 라따나폰 웡나파찬이 설립한 시암 AI 코퍼레이션과 엔비디아 CEO 젠슨 황이 주최한 "AI 비전 포 태국" 행사에도 참여했다.
8. 평가와 유산
탁신 친나왓은 태국 정치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그에 대한 평가는 극명하게 엇갈린다.
8.1. 긍정적 평가
탁신 정부의 경제 정책은 1997년 아시아 금융 위기 이후 태국 경제를 회복시키고 빈곤을 크게 감소시키는 데 기여했다. 특히 '탁시노믹스'는 농촌 지역을 중심으로 한 광범위한 지지를 얻었으며, 마을 단위 소액 대출, 저금리 농업 대출, 마을 개발 기금 현금 지원, 인프라 개발, '하나의 땀본 하나의 제품'(OTOP) 등의 프로그램은 농촌 지역의 삶의 질을 향상시켰다. 2001년에서 2006년 사이에 북동부 지역의 소득은 46% 증가했고, 전국 빈곤율은 21.3%에서 11.3%로 감소했다. 태국은 예정보다 2년 빨리 IMF 채무를 상환했으며, 외환 보유고도 두 배로 증가했다.
가장 혁신적인 정책 중 하나는 '30밧 의료보험'으로 불리는 보편적 의료보험 제도였다. 이 제도는 의료 서비스 접근성을 76%에서 96%로 끌어올리며 저소득층의 의료 혜택을 크게 확대했다. 이 외에도 교육 분권화, 학생 대출 기금, '한 구역 한 꿈 학교' 프로젝트 등 교육 개혁을 추진하여 교육 접근성을 높이고 학습 방식을 개선하려 노력했다. 탁신은 또한 태국 왕립 경찰의 데이터베이스를 현대화하고 컴퓨터 활용을 확대하는 데 기여하며, 초기 사업가로서 어드밴스드 인포 서비스(AIS)와 타이콤 위성을 설립하여 태국 통신 산업 발전에 선구적인 역할을 했다.
8.2. 비판과 논란
탁신 친나왓은 재임 기간 동안 권위주의적 성향과 인권 침해, 그리고 부패 혐의로 심각한 비판을 받았다. 2003년 '마약과의 전쟁' 캠페인에서는 초법적 처형으로 2,500명 이상의 비정상적 사망자가 발생했으며, 이는 휴먼 라이츠 워치 등 국제 인권 단체로부터 맹렬한 비난을 받았다. 딱 바이 사건과 크루 세 모스크 사건 등 남부 태국 반란에 대한 강경 대응은 무슬림 주민들에 대한 폭력과 인권 침해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정책 부패"로 비난받았는데, 이는 법적으로는 문제가 없지만 자신의 사업적 이익과 관련된 정책 결정을 통해 공공의 이익을 침해했다는 주장이다. 신 코퍼레이션 주식 매각 과정에서의 탈세 의혹과 자산 은닉 혐의, 라차다피섹 토지 매입 사건에서의 권력 남용 유죄 판결 등은 그의 재정적 비리 의혹을 증폭시켰다. 태국 헌법재판소가 그의 자산 은닉 혐의에 대해 고의성이 없다고 판결했으나, 이는 법원의 공정성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또한 그는 언론 자유를 침해하고 비판적인 언론인들을 상대로 명예훼손 소송을 제기했으며, 정부에 비판적인 공동체 라디오 방송국을 탄압했다는 비난을 받았다.
탁신의 통치는 태국 민주주의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비판도 있다. 그는 "의회 독재"라는 비난을 받았으며, 자신의 지지를 위해 대중주의적 정책을 남용했다는 지적이 제기되었다. 이러한 문제들은 결국 2006년과 2014년 두 차례의 태국 쿠데타로 이어져 태국의 정치적 불안정을 심화시키는 원인이 되었다.
8.3. 태국 정치에 대한 영향
탁신 친나왓은 21세기 태국 정치의 양극화를 심화시킨 핵심 인물로 평가된다. 친탁신 진영(주로 프아타이당과 레드셔츠)과 반탁신 진영(군부, 군부계 정당, 민주당, 옐로셔츠) 간의 갈등은 태국 정치의 주요한 특징이 되었다. 2006년과 2014년의 군부 쿠데타 역시 반탁신 진영이 탁신에 반대하여 일으킨 것이었다. 방콕과 남부 지역에서는 탁신에 대한 반감이 강하지만, 북동부 지역에서는 그가 총리 재임 기간 동안 농민과 빈민층을 위한 지원 정책을 많이 펼쳤기 때문에 압도적인 지지를 받고 있다.
탁신은 본래 왕실의 간섭을 줄이고 입헌군주제를 추진하려 했기에 푸미폰 아둔야뎃 국왕과 불편한 관계였으며, 실제로 2006년과 2014년 쿠데타도 국왕의 승인하에 이루어졌다. 그러나 마하 와찌랄롱꼰 국왕과는 왕세자 시절부터 친분이 있었으며, 탁신 또한 왕위 계승 문제에서 마하 와찌랄롱꼰을 지지하는 등 둘의 관계는 깊다. 망명 중에도 그의 정치적 영향력은 지속되었으며, 그의 여동생 잉락 친나왓과 막내딸 패통탄 친나왓이 총리에 오르면서 '탁신 가문의 정치'라는 비판과 함께 그의 영향력이 태국 정치에 계속 투영되고 있다.
9. 개인 생활
탁신 친나왓은 1976년 7월 폿자만 다마퐁과 결혼했다. 둘 사이에는 아들 판통태 친나왓과 두 딸 핀통타 친나왓, 패통탄 친나왓이 있다. 2008년에 이혼했다. 탁신의 막내 여동생인 잉락 친나왓은 오빠의 요청으로 2011년 정치에 입문했으며, 2011년 7월 3일 총리로 선출되었다。 2022년 7월 기준으로 탁신은 약 20.00 억 USD의 순자산을 보유하고 있다.
10. 수상 및 명예
탁신 친나왓은 태국 국내외에서 다양한 훈장, 명예 학위, 상 등을 받았다.
10.1. 국내 훈장
태국 국내에서 탁신 친나왓이 받은 주요 훈장들은 다음과 같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가장 큰 훈장, 태국 국기, 태국 왕실, 그리고 2005년의 탁신 - 1996년 - 태국 대백상훈장 특등 기사대십자장
- 1995년 - 태국 왕관훈장 특등 기사대십자장
- 2001년 - 태국 디렉구나폰훈장 1등 기사대십자장
- 2002년 - 태국 쭐라촘끌라오훈장 2등 대지휘관
- 2003년 - 보이 스카우트 바지라 포상 메달 1급
모든 왕실 훈장은 2019년 3월 29일 왕실 관보에 따라 라마 10세 국왕에 의해 회수되었다.
10.2. 해외 훈장
탁신 친나왓이 해외 국가로부터 받은 훈장들은 다음과 같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캄보디아 국기, 태국 국기, 그리고 2005년의 탁신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바레인 국기, 태국 국기, 그리고 2005년의 탁신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브루나이 국기, 태국 국기, 그리고 2005년의 탁신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스웨덴 국기, 태국 국기, 그리고 2005년의 탁신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네덜란드 국기, 태국 국기, 그리고 2005년의 탁신 - 2001년 - 캄보디아 사하메트리 왕실 훈장 대십자장
- 2002년 - 바레인 르네상스 국왕 하마드 훈장 1등급
- 2002년 - 브루나이 국가에 대한 충성 훈장 1등급
- 2003년 - 스웨덴 북극성 왕실 훈장 대지휘관
- 2004년 - 네덜란드 오라녜-나사우 훈장 대십자장
- 2004년 - 페루 태양 훈장 대십자장
10.3. 명예 학위 및 수상
탁신 친나왓은 다음과 같은 명예 학위와 다양한 기관 및 단체로부터 상을 받았다.
- 1992년 아세안 평화 및 화해 연구소(AIPR) 선정 '올해의 아세안 사업가'
- 1993년 태국 통신학회 선정 '사회 복지를 위한 통신 개발상'
- 1993년 싱가포르 비즈니스 타임스 선정 '올해의 탁월한 통신인 상' (아시아 선도 사업가 12인 중 1인)
- 파이낸셜 월드 선정 '올해의 아시아 CEO'
- 탐마삿 대학교 언론학 명예 박사
- 싱가포르 '이광요 교환 펠로우십' 최초의 태국인 수혜자
- 타임지 선정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50인' 중 1인
- 주태국 필리핀 대사관 선정 '태국-필리핀 관계 선의 증진자' 3인 중 1인
- 샘휴스턴 주립 대학교 '탁월한 형사 사법 졸업생 상'
- 샘휴스턴 주립 대학교 '자랑스러운 졸업생 상'
- 태국 언론인 사진 작가 협회 명예상 (2001년 정치인 부문)
- 2004년 국제 용서상
- 플레하노프 러시아 경제 아카데미 명예 박사 학위
- 2012년 ABLF (아시아 비즈니스 리더십 포럼) '정치가 상'
- 2018년 영국 여론조사기관 유고브(YouGov) 선정 '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인물' 1위
2007년에는 일본 다쿠쇼쿠 대학교의 초빙 교수가 되기도 했다.
11. 계보
- 1. 탁신 친나왓
- 2. 러트 친나왓
- 4. 치앙 사엑후 (丘阿昌치우 아창중국어)
- 8. 셍 사엑후 (丘春盛치우 춘성중국어)
- 16. 지쿵 사엑후 (丘志勤치우 즈친중국어)
- 17. 씨 사엘라우 (刘氏류씨중국어)
- 9. 통디
- 8. 셍 사엑후 (丘春盛치우 춘성중국어)
- 5. 사엥 사마나
- 10. 문 사마나
- 11. 라 사마나
- 4. 치앙 사엑후 (丘阿昌치우 아창중국어)
- 3. 인디 라밍웡
- 6. 차로엔 퉁시우
- 12. 프롬
- 13. 수
- 7. 짠팁 나 치앙마이 공주
- 14. 차이쏭크람 왕자 (쏨파밋 나 치앙마이)
- 15. 우사 나 치앙마이
- 28. 노이롯 나 치앙마이
- 29. 으앙프엉 나 치앙마이
- 6. 차로엔 퉁시우
- 2. 러트 친나왓