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생애 및 배경
이 섹션에서는 타니가와 코지의 어린 시절과 교육 과정, 그리고 프로 기사로서의 초기 경력을 상세히 다룬다.
1.1. 어린 시절과 교육
타니가와 코지는 1962년 4월 6일 일본 효고현 고베시 스마구에서 태어났다. 다섯 살 때, 다섯 살 위인 형 타니가와 토시아키와의 잦은 형제 싸움을 말리기 위해 아버지가 쇼기판과 말을 사주면서 쇼기를 처음 접하게 되었다. 쇼기 규칙은 백과사전을 통해 배웠다고 한다. 처음에는 형제 싸움이 오히려 더 심해졌고, 지기 싫어하는 성격 탓에 말을 던지거나 물어뜯기도 했다는 일화가 있다. 하지만 효고현 대회에 출전하면서 쇼기의 재미를 느끼기 시작했다.
초등학생 시절, 고베 산노미야에서 열린 쇼기 행사에서 당시 8단이었던 나이토 쿠니오와 대국하기도 했다. 나이토는 당시 타니가와의 대국에 대해 "중반부터 종반으로 넘어가는 감각이 뛰어났다"고 평가했으며, 타니가와 본인도 이 대국이 큰 자신감으로 이어졌다고 회고했다.
프로 기사를 목표로 한 타니가와는 초등학교 5학년이던 1973년 4월, 5급으로 장려회에 입회하여 와카마츠 마사카즈 8단의 문하생이 되었다. 이후 순조롭게 승급과 승단을 거듭했으나, 한때 '타니가와를 무너뜨리는 모임'이 생기거나 8연패를 기록하는 등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특히 3급에서 2급으로 승급하는 데 11개월이 걸리기도 했다.
1.2. 프로 데뷔 및 초기 경력
타니가와 코지는 1975년 초단으로 승단했으며, 중학교 2학년이던 1976년 12월 20일 4단으로 승단하며 프로 기사로 정식 데뷔했다. 이로써 그는 카토 히후미에 이어 역사상 두 번째 '중학생 기사'가 되었다. 특히 중학교 2학년 이하의 나이로 프로에 입단한 기사는 타니가와가 최초이다. (카토는 나이는 타니가와보다 어렸지만 생일 관계로 중학교 3학년 때 프로에 입단했다.)
형인 타니가와 토시아키는 나다 중학교·고등학교와 도쿄 대학에서 쇼기부에 재적했으며, 아마추어 강호인 리코에서도 활동하며 여러 아마추어 타이틀을 획득했다. 2016년 기준으로 네슬레 일본 고베 본사에서 근무하고 있다. 4단 시절의 하부 요시하루를 평수(平手) 대국에서 이긴 적이 있으며, 주간 쇼기의 아마추어-프로 평수전에서는 사토 야스미츠에게도 승리한 바 있다.
프로 데뷔 후, 타니가와는 1979년 2월 '젊은 사자전'에서 우승하며 프로 기사로서 첫 우승을 기록했다.
2. 주요 업적 및 경력
타니가와 코지는 프로 데뷔 이후 수많은 타이틀을 획득하고 기록을 달성하며 쇼기 역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 이 섹션에서는 그의 타이틀 획득, 주요 수상 경력, 독창적인 쇼기 스타일, 그리고 주요 대국 및 라이벌 관계, 순위전 및 류오전(용왕전) 등급 기록을 상세히 다룬다.
2.1. 타이틀 획득 및 기록
타니가와는 통산 57번의 주요 타이틀전에 출전하여 27개의 타이틀을 획득했다. 이는 역대 5위에 해당하는 기록이다. 특히 명인 타이틀을 5회 획득하여 영세 명인 (17세 명인) 자격을 얻었다. 2022년 5월 23일, 그는 정식으로 17세 명인에 취임했다.
타이틀 | 획득 연도 | 획득 횟수 |
---|---|---|
용왕전 | 1990-91, 1996-97 | 4 |
명인 | 1983-84, 1988-89, 1997 | 5 |
왕위 | 1987, 1989-91, 2002-03 | 6 |
기왕 | 1985, 1987, 2003 | 3 |
왕장전 | 1991-94 | 4 |
왕좌 | 1990 | 1 |
기성 | 1991후-1992후, 1999 | 4 |
- 총 타이틀전 출전 57회, 총 획득 타이틀 27회 (역대 5위)
- 7대 타이틀(신설된 예왕전 제외) 모두 1회 이상 획득하는 생애 그랜드 슬램을 달성했다. (타니가와 외에는 나카하라 마코토, 하부 요시하루, 후지이 소타만이 달성)
타니가와는 1983년 21세 2개월의 나이로 명인 타이틀을 획득하며 역사상 최연소 명인 기록을 세웠다. 이 기록은 40년 후인 2023년 6월 1일 후지이 소타 7관왕에 의해 경신되었다. 또한 4단 승단(프로 입단)부터 명인 타이틀 획득까지 6년 177일이라는 최단 기간 기록도 보유하고 있다.
그는 2011년 3월 10일, 나카가와 다이스케를 꺾고 통산 1200승을 달성하며 역대 4번째 기록을 세웠다. 당시 48세 11개월로 최연소 1200승 기록이었다. 2018년 10월 1일에는 통산 1300승을 달성하며 역대 5번째 기록을 세웠고, 2025년 1월 15일에는 고다 마사타카를 꺾고 오야마 야스하루, 하부 요시하루에 이어 역대 3번째로 통산 1400승을 달성했다.
타니가와 코지의 승단 이력은 다음과 같다.
- 5급: 1973년 (장려회 입회)
- 초단: 1975년
- 4단: 1976년 12월 20일 (프로 데뷔)
- 5단: 1979년 4월 1일
- 6단: 1980년 4월 1일
- 7단: 1981년 4월 1일
- 8단: 1982년 4월 1일
- 9단: 1984년 4월 1일 (명인 타이틀 획득에 따른 승단, 당시 최연소 9단 기록)
- 17세 명인: 2022년 5월 23일 (명인 5기 획득에 따른 연맹 추천으로 취임)
2.2. 주요 수상 경력
타니가와 코지는 쇼기 실력뿐만 아니라 사회적 공헌을 인정받아 다양한 상을 수상했다.
2.2.1. 쇼기 대상
- 제6회 쇼기 대상 (1978년 4월 - 1979년 3월): 신인상
- 제7회 쇼기 대상 (1979년 4월 - 1980년 3월): 기법상
- 제9회 쇼기 대상 (1981년 4월 - 1982년 3월): 기법상
- 제10회 쇼기 대상 (1982년 4월 - 1983년 3월): 공로상
- 제11회 쇼기 대상 (1983년 4월 - 1984년 3월): 특별상
- 제13회 쇼기 대상 (1985년 4월 - 1986년 3월): 최우수 기사상, 최다승, 최다 대국상
- 제14회 쇼기 대상 (1986년 4월 - 1987년 3월): 최다승, 최다 대국상
- 제15회 쇼기 대상 (1987년 4월 - 1988년 3월): 최우수 기사상
- 제18회 쇼기 대상 (1990년 4월 - 1991년 3월): 최우수 기사상
- 제19회 쇼기 대상 (1991년 4월 - 1992년 3월): 최우수 기사상
- 제22회 쇼기 대상 (1994년 4월 - 1995년 3월): 특별상
- 제24회 쇼기 대상 (1996년 4월 - 1997년 3월): 최다 대국상
- 제25회 쇼기 대상 (1997년 4월 - 1998년 3월): 최우수 기사상
- 제26회 쇼기 대상 (1998년 4월 - 1999년 3월): 최다 대국상
- 제27회 쇼기 대상 (1999년 4월 - 2000년 3월): 최다 대국상
- 제30회 쇼기 대상 (2002년 4월 - 2003년 3월): 특별상
- 제31회 쇼기 대상 (2003년 4월 - 2004년 3월): 마스다 코조 상 (2003년 12월 19일 대 시마 아키라 전 54수 △7七은성)
- 제34회 쇼기 대상 (2006년 4월 - 2007년 3월): 명국상 (2006년 3월 16일 대 하부 요시하루 전)
2.2.2. 기타 표창
- 1983년 9월: 고베시 문화특별상
- 1988년: 고베시 특별표창
- 1989년: 고베시정 공로자 표창
- 1991년: 쇼기 영예감투상 (프로 공식전 600승 달성으로 일본 쇼기 연맹 수여, 역대 17번째, 20대 최초)
- 1992년: 고베시 특별표창
- 1997년 3월 3일: 공식전 통산 800승 달성 (쇼기 영예감투상, 역대 8번째)
- 1997년 6월: 효고현 '호마레'상, 고베시 문화영예상
- 1999년 12월 11일: 공식전 통산 900승 달성
- 2001년: 현역 근속 25년 표창 (일본 쇼기 연맹 수여)
- 2002년: 고베시 특별표창, 특별 쇼기 영예상 (프로 공식전 1000승 달성으로 일본 쇼기 연맹 수여, 역대 7번째)
- 2006년 2월 6일: 공식전 통산 1100승 달성 (역대 5번째)
- 2007년: 효고현 문화상
- 2011년 3월 10일: 공식전 통산 1200승 달성 (특별 쇼기 영예상, 역대 4번째, 당시 최연소 48세 11개월)
- 2014년 11월: 자수포장 (일본 정부 수여, 쇼기계에서 12번째 수상)
- 2016년 11월: 현역 근속 40년 표창 (일본 쇼기 연맹 수여)
- 2018년 10월 1일: 공식전 통산 1300승 달성 (역대 5번째)
- 2019년 9월 12일: 공식전 통산 1325승 달성 (역대 통산 승수 단독 3위)
- 2025년 1월 15일: 공식전 통산 1400승 달성 (역대 3번째)
2.3. 쇼기 스타일 및 철학
타니가와 코지는 다른 기사들이 쉽게 떠올리기 어려운 수순으로 순식간에 상대의 왕을 몰아붙이는 능력 때문에 '광속의 종반', '광속류'라는 별명을 얻었다. 모리우치 토시유키는 그를 "종반에 스피드 감각을 쇼기에 도입한 원조"라고 평가하며, 그의 기풍이 종반의 개념을 바꾸었다고 언급했다. 2009년에는 본인 스스로 "광속의 종반이 없어졌다"고 농담하기도 했지만, 이는 반드시 '광속'에만 얽매이지 않는 유연한 기풍으로 변화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또한, 유력한 수가 두 가지 이상 보일 경우 말이 앞으로 나아가는 수를 우선적으로 선택하는 경향 때문에 '타니가와 전진류'라고도 불린다. 타니가와가 휘호로 즐겨 쓰는 말로는 '광속', '전진', '비상', '위소유(危所遊, 마츠오 바쇼의 '명인은 위험한 곳에서 논다'에서 유래)' 등이 있으며, 이는 그의 쇼기관과 특징을 잘 나타낸다. 그의 필체는 독특하면서도 달필로 알려져 있다.
프로 데뷔 초 4단 시절에는 후리비샤를 주로 두었으나, 이후 이비샤로 전향했다. 쇼와와 헤이세이 시대 전후에는 선수번 카쿠가와리를 가장 잘 두어 다른 이비샤 기사들에게 두려움을 주었다. 후수번에서 아이 야구라가 불리하다는 정설이 생겨난 2000년경부터는 후수번 야구라를 두는 경우가 줄어들고 시켄비샤를 다용했으며, 이후 요코후도리 85히샤, 아이 후리비샤, 고키겐 나카비샤 등 유행하는 전법을 적극적으로 도입하여 다양한 기풍을 구사하게 되었다.
타니가와의 '광속의 종반'을 너무 신뢰한 나머지 상대방이 스스로 무너지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일례로 그가 영세 명인 자격을 획득한 제55기 명인전 제1국 종반에서, 하부 요시하루가 △6오비로 타니가와의 말과 금을 양걸이했다. 타니가와는 거의 시간을 들이지 않고 하부 왕 근처에 ▲4일은을 두었으나, 이 수는 외통수가 아니었다. 하지만 하부는 타니가와를 신뢰하여 그 수가 외통수라고 착각했고, 금을 잡고 필승의 수를 두면 이길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진영을 공격하던 말을 잡는 바람에 타니가와가 역전승을 거두었다.
데뷔 직후에는 하메테로 오래전부터 알려진 요코후도리 45카쿠 전법을 재발견하여 연이어 사용, 모리야스 히데미츠와 아즈마 카즈오를 36수 만에 쓰러뜨리며 붐을 일으키기도 했다.
2.4. 주요 대국 및 라이벌 관계
1983년 타니가와는 나카하라 마코토 16세 명인의 후계자로 주목받으며 최연소 명인에 등극했고, 1991년에는 4관왕에 올랐다. 그러나 그에게 이어진 것은 '타니가와 시대'가 아니라 하부 세대 기사들과의 치열한 대결 시대였다. 특히 하부 요시하루와의 150국이 넘는 대결은 '골든 카드'라고 불리며 쇼기 팬들의 큰 관심을 받았다.
프로 데뷔 후 타니가와는 순위전에서 2기 만인 1978년도부터 4기 연속 승급하여 단숨에 A급에 진입했다. 이 기간 동안 1978년도에는 젊은 기사들의 등용문인 젊은 사자전에서 첫 기전 우승을 차지했다.
1983년, 타니가와는 카토 히후미 명인에게 도전하여 제41기 명인전에서 4승 2패로 승리, 첫 타이틀이자 명인 타이틀을 획득하며 21세 2개월의 나이로 역사상 최연소 명인 기록을 세웠다. 타이틀 획득 기자회견에서 그는 "1년간 명인위를 맡겨주십시오"라고 겸손하게 말했다. 이듬해인 1984년, 제42기 명인전에서 모리야스 히데미츠를 4승 1패로 꺾고 첫 타이틀 방어에 성공했다. 이때 그는 "이제 약한 명인에서 평범한 명인이 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라고 소감을 밝혔다. 1985년에는 나카하라 마코토에게 2승 4패로 패해 명인 타이틀을 잃었다.
1983년 7월 19일, 왕위 리그 대 오야마 야스하루 전에서는 오야마의 왕을 외통수로 몰아가는 과정에서 우치후즈메 회피를 위한 카쿠후나리 (99수째 ▲4삼각불성)라는 마치 창작 츠메쇼기 같은 수를 두어 승리했다. 같은 해 제2회 전일본 프로 쇼기 토너먼트에서는 동기인 타나카 토라히코와 결승 3번 승부를 벌여 2승 1패로 우승, 전 기사 참가 토너먼트 기전에서 첫 우승을 차지했다. 이 기전과는 상성이 좋아 19회의 역사 동안 통산 7회 우승, 3회 준우승을 기록했다.
1985년도에는 제11기 기왕전에서 키리야마 키요스미로부터 기왕 타이틀을 빼앗았다. 또한 NHK배 TV 쇼기 토너먼트에서 우승하고, 처음으로 최다승(56승)을 기록하는 등 활약하여 쇼기 대상의 최우수 기사상을 처음 수상했다.
1986년에서 1987년도에는 타니가와보다 조금 늦게 두각을 나타낸 '55년조' 중 한 명인 타카하시 미치오와 3개의 타이틀전에서 연속으로 맞붙었다. 1987년도 제28기 왕위전에서 타카하시로부터 왕위 타이틀을 빼앗았고, 제13기 기왕전에서는 전년에 빼앗겼던 기왕 타이틀을 되찾았다. 이로써 그는 처음으로 2관왕(왕위, 기왕)이 되었고, 두 번째 최우수 기사상을 수상했다.
1988년도 제46기 명인전에서 나카하라 마코토를 4승 2패로 꺾고 명인 타이틀을 되찾아 처음으로 3관왕(명인, 왕위, 기왕)이 되었다. 그러나 같은 해 모리 케이지에게 왕위 타이틀을 잃고, 미나미 요시카즈에게 기왕 타이틀을 잃어 명인 1관왕으로 후퇴했다. 1989년도에는 제47기 명인전에서 요네나가 쿠니오를 4승 0패로 꺾고 명인 타이틀을 방어했으며, 제30기 왕위전에서 모리 케이지로부터 왕위를 되찾아 2관왕(명인, 왕위)으로 복귀했다.
1990년도 제48기 명인전에서 다시 나카하라 마코토에게 명인 타이틀을 빼앗겼으나, 제38기 왕좌전에서 나카하라로부터 왕좌 타이틀을 빼앗아 즉시 2관왕(왕위, 왕좌)으로 복귀했다. 이 기간 동안 제31기 왕위전에서는 타이틀전에 처음 등장한 5단 사토 야스미츠와 풀세트 접전 끝에 간신히 방어에 성공했다. 같은 해 제3기 용왕전에서 하부 요시하루와 처음으로 타이틀전 무대에서 맞붙어 하부로부터 용왕 타이틀을 빼앗았다. 이로써 그는 두 번째 3관왕(용왕, 왕위, 왕좌)이 되었고, 세 번째 최우수 기사상을 수상했다.
1991년도에는 제32기 왕위전에서 타이틀 방어에 성공했다. 그러나 제39기 왕좌전에서 후쿠자키 분고에게 패해 왕좌 타이틀을 잃고 2관왕으로 후퇴했다. 이 대국에서 타니가와는 목마름에 힘들어하는 후쿠자키에게 자신의 차를 건네주었고, 후쿠자키는 차를 마신 후 승리로 이끄는 묘수를 발견했다는 일화가 있다. 그러나 제4기 용왕전에서 모리시타 타쿠의 도전을 물리치고 방어에 성공했다. 이어서 제59기 기성전에서 미나미 요시카즈를 꺾고 처음으로 기성 타이틀을 획득했다. 나아가 제41기 왕장전에서도 미나미를 꺾고 첫 왕장 타이틀을 획득하며(1992년 2월 28일) 모든 7대 타이틀을 1회 이상 획득하는 생애 그랜드 슬램을 달성했다. 또한 오야마 야스하루, 나카하라 마코토, 요네나가 쿠니오에 이어 역사상 4번째 4관왕(용왕, 기성, 왕위, 왕장)이 되었고, 네 번째 최우수 기사상을 수상했다.
날짜 | 내용 |
---|---|
1991년 11월 22일 | 기성전 도전권 획득 (대 아베 타카시) |
1991년 11월 26일-27일 | 용왕전 제4국 (대 모리시타 타쿠, 패) |
1991년 11월 30일 | 천왕전 결승 (대 무라야마 사토시, 우승) |
1991년 12월 4일-5일 | 용왕전 제5국 (대 모리시타 타쿠, 승) |
1991년 12월 17일-18일 | 용왕전 제6국 (대 모리시타 타쿠, 승) |
1991년 12월 26일-27일 | 용왕전 제7국 (대 모리시타 타쿠, 승) = 용왕 방어 |
1991년 12월 31일 | 왕장 리그 플레이오프 2회전 (대 나카하라 마코토, 승) = 왕장 도전권 획득 |
1992년 1월 10일 | 기성전 제3국 (대 미나미 요시카즈, 승) = 기성 타이틀 획득 |
1992년 2월 27일-28일 | 왕장전 제5국 (대 미나미 요시카즈, 승) = 왕장 타이틀 획득, 4관왕 달성 |
1992년도에는 6번의 타이틀전에서 '하부 세대' 기사 3명과 대결했다. 제60기 기성전과 제61기 기성전에서 고다 마사타카를 상대로 2차례 방어에 성공했으나, 제33기 왕위전에서는 고다에게 패해 3관왕(용왕, 기성, 왕장)으로 후퇴했다. 제5기 용왕전에서는 하부에게 타이틀을 빼앗겨 2관왕(기성, 왕장)으로 후퇴했다. 제42기 왕장전에서는 방어에 성공했으나, 제18기 기왕전에서는 풀세트 접전 끝에 하부에게 패해 타이틀 획득에 실패했다.
1993년도부터는 타이틀전 대부분을 하부와 싸우게 된다. 1993년도 전기 제62기 기성전에서 타이틀을 잃고 왕장 1관왕이 되었다. 하부에게 타이틀전에서 3연패하며 이때부터 하부에 대한 부담감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1994년도에는 제64기 기성전과 제42기 왕좌전에서 하부에게 도전했으나 모두 패배했다. 한편 하부는 명인, 용왕 타이틀을 각각 요네나가 쿠니오, 사토 야스미츠로부터 빼앗아 역사상 최초의 6관왕이 되었고, 남은 타이틀은 타니가와가 보유한 왕장 타이틀뿐이었다. 하부는 제44기 왕장 리그에서 5승 1패를 기록하며 고다와의 플레이오프에서 승리, 전 7관왕을 걸고 타니가와 왕장에게 도전하게 되었다.
제44기 왕장전 (타니가와 4-3 하부)은 1995년 1월 12-13일 제1국에서 타니가와의 선승으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제2국을 앞둔 1월 17일, 타니가와는 한신·아와지 대지진으로 피해를 입었다. 1월 20일 요네나가 쿠니오와의 A급 순위전이 있었고, 19일 아내의 운전으로 고베에서 오사카로 탈출하는 데 13시간이 걸렸다고 한다. 그럼에도 타니가와는 대 요네나가 전에서 승리했고, 하부와의 왕장전 제2국에서도 승리했다. 그러나 하부도 끈질기게 3승 3패를 만들며 풀세트 접전으로 이어졌다.
아오모리현 오이라세에서 열린 최종 제7국 (1995년 3월 23-24일)은 아이 야구라의 쇼기가 되었는데, 2일째 76수에서 천일수가 성립되어 그날 바로 재대국이 진행되었다. 재대국은 선후가 바뀌었음에도 불구하고 40수까지 천일수 대국과 완전히 동일한 수순으로 진행되어 "서로의 의지가 완벽하게 일치했다"고 평가받았다. 41수에서 처음으로 선수인 타니가와가 수를 바꾸었다. 결과적으로 111수 만에 선수인 타니가와가 승리하며 4승 3패로 왕장 타이틀을 방어, 마지막 보루로서 하부의 7관 독점을 저지했다. 이 날은 쇼기계 취재로는 이례적으로 많은 보도진이 몰려들었다. 훗날 타니가와는 "지진이 없었다면 타이틀을 빼앗겼을지도 모른다"고 말했으며, 인터뷰에서 "한 번 7관왕의 기회를 만들 수는 있어도, 두 번은 무리라고 생각했다"고도 언급했다.
1995년도에는 하부가 개막부터 명인, 기성, 왕위, 왕좌, 용왕 타이틀을 모두 방어하는 데 성공했고, 왕장 리그도 다시 제패하여 2년 연속 타니가와 왕장에게 도전자가 되었다. 제45기 왕장전 (타니가와 0-4 하부)에서는 하부가 개막부터 3연승하며 순식간에 타니가와를 몰아붙였다. 야마구치현 마린피아 쿠로이에서 열린 제4국 (1996년 2월 13-14일)은 승패가 크게 갈리기 쉬운 '요코후도리' 전형으로 진행되었고, 타니가와는 선수번에서 나카하라 가코이를 짜는 새로운 구상을 선보였다. 2일째 대국은 NHK 위성 TV에서 오전 9시부터 종국까지(12:00-13:30 중단) 이례적으로 긴 시간 동안 방송되었다. 중계 장소(대반 해설)는 만원이었고, 해설을 맡은 모리시타 타쿠와 야마다 쿠미는 열기 때문에 땀을 흘렸다고 한다. 타니가와에게는 37수째가 아쉬운 한 수였다. 2일째 오후 3시 30분경에는 이미 하부가 우세해졌고, 자신의 왕에게 더 이상 방어가 불가능해진 타니가와는 77, 79수째의 형태 만들기로 항복을 암시했다. 이후는 쉬운 외통수가 되었고, 하부가 82수째 △7팔금으로 외통수를 걸자 오후 5시 6분, 타니가와는 투료했다. 타니가와에게는 굴욕적인, 7관왕의 탄생이었다. 종국 직후 인터뷰에서 그는 "모처럼 주목받았는데, 팬들에게도 하부 씨에게도 죄송하다"고 말했다.
하부에게 타이틀을 빼앗긴 후, 1996년 제9기 용왕전 도전권 결정 3번 승부에서 사토 야스미츠를 2승 0패로 꺾고 하부 용왕에게 설욕할 기회를 잡았다. 그리고 제9기 용왕전 7번 승부 (타니가와 4-1 하부)에서 하부로부터 용왕 타이틀을 빼앗았다. 이 7번 승부 제2국 종반 80수째에 타니가와가 언뜻 평범한 곳에 △7七계를 두었는데, 이는 '광속의 몰아붙임'이라고 불렸다. 이 수를 기점으로 하부의 왕은 순식간에 외통수 형태가 되었고, 타니가와가 승리했다. 당시 NHK 쇼기 강좌에서 강사를 맡았던 나카하라 마코토는 프로그램에서 "이번 용왕전은 재미있어졌네요. 7七계라는 수가 나왔습니다"라고 언급했다. 타니가와 본인은 당시를 회고하며 "이런 수가 떠오르는 것은 이치가 아니다. 7七 지점이 빛나 보였다고 써도 믿어줄까"라고 말했다.
직후 제46기 왕장전 (타니가와 0-4 하부)에서도 왕장 리그에서 무라야마 사토시와의 4승 2패 동률 플레이오프에서 승리하여 하부에게 도전했으나 패배했다. 그러나 제55기 A급 순위전에서는 1패 후 8연승으로 하부 명인에게 도전할 자격을 얻었다. 그리고 1997년 제55기 명인전 (타니가와 4-2 하부)에서 승리하여 2대 타이틀(용왕, 명인)을 독점했다. 또한 통산 5기 획득 규정에 따라 영세 명인 (17세 명인) 자격을 얻었다. 다음 날 NHK 종합 TV 뉴스에 출연한 타니가와는 "내용이 좋지 않았다", "아직 '타니가와 시대'를 만들지 못했다"고 말했다. 같은 해 1997년 4월-5월 (기전으로서의 연도는 1996년도) 제15회 전일본 프로 토너먼트 결승 5번 승부 (타니가와 3-2 모리시타)에서는 모리시타 타쿠를 꺾고 6번째 우승을 차지했다. 이 결승 5번 승부에서는 타니가와가 후수번인 2국에서 선수인 모리시타 타쿠의 아이 야구라 유도에 응하지 않고 후수 급전 보은 (원시 보은)을 보여 화제가 되었다. 같은 해 제10기 용왕전 (타니가와 4-0 사나다 케이이치)에서 용왕 방어에도 성공하여 2개의 빅 타이틀을 독점했다. 이러한 활약이 평가되어 타이틀 수는 하부의 4관왕보다 적었음에도 최우수 기사상(5번째)을 수상했다. 또한 1997년 (1-12월)의 획득 상금·대국료 랭킹에서 1위(총 1.18 억 JPY)를 차지했다. 1993년~2018년 사이에 하부 외의 기사가 1위를 차지한 것은 이 해와 2013년, 2017년뿐이다.
1998년도 이후의 타이틀전은 하부 요시하루, 사토 야스미츠, 후지이 타케시, 고다 마사타카, 마루야마 타다히사, 모리우치 토시유키 등 하부 세대 기사들만을 상대로 한 싸움이 되었다. 1998년도 제56기 명인전 7번 승부 (타니가와 3-4 사토 야스미츠)는 제6국까지 모두 선수가 승리하는 양상으로 풀세트 접전이 되었다. 타니가와가 선수로 승리한 3국은 모두 타니가와가 잘 두는 카쿠가와리를 사토가 받아들인 형태였다. 그러나 최종 제7국은 후리코마로 타니가와가 선수를 잡았음에도 야구라를 선택했다. 결과적으로 사토가 승리하며 '사토 신명인'이 탄생했다. 같은 해 제11기 용왕전 (타니가와 0-4 후지이)은 4조에서 도전자로 올라온 후지이 타케시와의 대결이 되었다. 타니가와는 4연패로 '후지이 신용왕'을 탄생시키며 무관이 되었다. 명인과 용왕 타이틀을 잃은 타니가와는 다음 기전까지 '전 용왕·전 명인'이라는 호칭을 사용할 권리가 있었으나, 본인의 의사에 따라 연맹에서 발표된 것은 일반적인 '9단' 호칭이었다.
1998년도 A급 순위전은 무라야마 사토시의 휴장(같은 해 사망)으로 9인 리그전이 되었다. 타니가와는 7전 전승으로 맞이한 최종 제8회전에서 시마 아키라에게 패배했다. 이로써 시마는 A급에 잔류하게 되었고, 대신 동생 제자이자 친한 이노우에 케이타가 A급에서 강등되었다. 7승 1패 동률인 모리우치 토시유키와의 플레이오프에서 승리하여 사토 야스미츠 명인에게 설욕할 권리를 얻었지만, "이노우에 군에게 미안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맞이한 1999년도 사토 야스미츠와의 제57기 명인전 (타니가와 3-4 사토)은 첫 2국에서 연패했다. 그러나 제3국과 제5국에서 전년과 마찬가지로 타니가와가 잘 두는 카쿠가와리를 사토가 받아들여 타니가와가 승리하는 등 3연승하며 탈환까지 1승만을 남겨두었다. 다음 제6국에서는 사토가 이비샤 아나가마를 사용하여 2일 밤늦게까지 이어지는 장기 대국을 제압했다. 최종국도 사토가 승리하며 타니가와는 명인 타이틀을 되찾지 못했다. 이 시리즈에서 타니가와는 후수번인 2국에서 당시 본격적으로 유행하기 시작한 전법인 '요코후도리 85히샤'를 채택했다.
이 명인전 직후, 제70기 기성전 (타니가와 3-0 고다 마사타카)에서 고다 마사타카로부터 기성 타이틀을 빼앗아 '무관'을 벗어났다. 이때 TV 인터뷰에서 "하나 정도는...(타이틀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이라며 쓴웃음을 지으며 여전히 최고수로서의 자각과 향상심을 드러냈다.
2000년도에는 왕위전에서 2년 연속 도전하는 등 제71기 기성전 (타니가와 2-3 하부), 제41기 왕위전 (타니가와 3-4 하부), 제50기 왕장전 (타니가와 1-4 하부)이라는 3개의 타이틀전에서 하부와 대결했다. 특히 기성전과 왕위전은 일정이 겹쳤고, 모두 최종국까지 이어져 '12번 승부'라고 불렸다. 결과는 3개 모두 패배하여 무관이 되었다. 그러나 이 해 제59기 A급 순위전에서는 최종 9회전에서 사토 야스미츠와의 동성 결전(6승 2패 동률)에서 승리하여 마루야마 타다히사 명인에게 도전할 권리를 얻었다.
그리고 2001년도 제59기 명인전 (타니가와 3-4 마루야마)은 3년 전 사토와의 명인전과 마찬가지로 제6국까지 모두 선수가 승리하고 최종국만 후수가 승리하는 양상(천일수 재대국이 있었던 점은 다름)으로, 마루야마의 방어로 끝났다. 이 명인전은 후수의 타니가와가 시켄비샤를 두자 마루야마가 '밀레니엄 가코이'를 2차례 사용하거나, 요코후도리 85히샤가 3차례 등장하는 등 당시 유행을 상징하는 대결이 되었다. 또한 이 해 왕장전(제51기)에서는 역사상 최초로 '2승 4패로 패했으나 잔류 결정전 없이 리그 잔류'라는 진기록을 세웠다.
2002년도 제43기 왕위전 7번 승부 (타니가와 4-1 하부)에서 하부 요시하루로부터 왕위 타이틀을 빼앗았다. 약 2년 만에 타이틀 보유자가 된 것이다. 이 시리즈의 모든 6국(제5국의 천일수 재대국 포함)은 모두 다른 전형이었다. 이 왕위전 제1국에서 공식전 통산 1000승(특별 쇼기 영예상, 역대 7번째)을 기록하여 당시 NHK에 해설자로 출연한 기사가 "1000승으로 선승"이라는 말장난을 하기도 했다. 이듬해 2003년도 제44기 왕위전 (타니가와 4-1 하부)에서는 하부에게 타이틀 탈환을 허용하지 않고 2연패에 성공했다. 하부를 상대로 동일 타이틀전에서 2년 연속 승리한 것은 타니가와가 최초이다. 또한 같은 해 제29기 기왕전 (타니가와 3-1 마루야마)에서는 마루야마 타다히사의 특기인 선수 카쿠가와리, 후수 요코후도리 85히샤를 격파하고 기왕 타이틀을 획득했다. 1998년 명인 타이틀 상실 이후 약 6년 만에 2관왕(왕위, 기왕)이 되었다. 그러나 이 두 타이틀은 다음 해(2004년도) 제45기 왕위전 (타니가와 1-4 하부)과 제30기 기왕전 (타니가와 0-3 하부)에서 모두 하부에게 빼앗겨 다시 무관이 되었다.
2003년 12월 19일, A급 순위전 대 시마 아키라 전에서 보은의 은을 그냥 버리는 묘수를 두었다. 이 대국은 시마가 스스로 각 교환을 하여 '선후 역전 카쿠가와리'가 되었고, 위 그림은 53수째 타니가와의 보은에 의한 은 교환을 선수의 시마가 거부하고 7七에 있던 은을 ▲8八은으로 뒤로 뺀 국면이다. 여기서 "△7七은성" (54수째)이 작렬했다. 이 54수째 △7七은성으로 쇼기 대상의 마스다 코조 상을 수상했다. 이 상은 전법이나 가코이가 아닌 특정 한 수에 대한 최초의 수여였다.
용왕전에서는 제1기(1988년도)부터 제18기(2005년도)까지 18기 연속으로 1조에 재적(용왕 재위 포함)했다. 제1기부터의 연속 기록으로는 최장이다.
2005년도 제64기 A급 순위전에서는 8승 1패로 하부와 동률을 이루었고, 두 기사의 플레이오프는 2006년 3월 16일에 진행되었다. 유행하는 후수번 한 수 손해 카쿠가와리 전형이 되었다. 종반에 하부는 127수째에 ▲3일각을 버리고 타니가와의 왕을 맹렬히 몰아붙였으나, 타니가와는 교묘하게 외통수를 피하며 156수 만에 승리했다. 이 한 수의 내용은 높이 평가되어 쇼기 대상에서 신설된 '명국상'을 수상했다.
그리고 11번째 명인전 출전인 제64기 명인전 (타니가와 2-4 모리우치)을 맞이했다. 제1국에서는 종반에 모리우치가 자신의 진영 7이와 8이에 은을 나란히 두는 진귀하고 강력한 방어를 보여 승리했고, 제2국에서는 고키겐 나카비샤 초급전으로 이비샤 측의 모리우치가 일방적인 내용으로 승리하며 시작되었다. 이후에는 선수번에서 자신감을 가진 모리우치에게 착실히 2승을 추가하며 패배했다. 9년 만의 명인 복귀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2.5. 순위전 및 류오전 등급 기록
타니가와 코지는 순위전 A급에서 32기 연속 재적하며 역대 2위 기록을 세웠다. 제67기 A급 순위전 (2008년도)에서는 최종국을 남겨두고 강등 가능성이 있는 처음 겪는 위기를 맞이했다. 최종국에서 스즈키 다이스케를 상대로 아이 후리비샤를 유도하여 승리, A급 잔류에 성공했다. 제69기 A급 순위전 (2010년도)에서 잔류하여 나카하라 마코토의 기록을 넘어 A급 연속 재적 기록을 30기(명인 재위 포함)로 늘려 역대 단독 3위가 되었다.
2012년도 제71기 A급 순위전에서는 2승 6패로 강등 가능성을 남긴 채 최종국에 임했으나, 다른 대국 결과에 따라 간신히 A급 잔류를 확정했다. 그러나 2013년도 제72기 A급 순위전에서 2014년 1월 7일 와타나베 아키라에게 패해 1승 6패가 된 후, 10일 다른 대국 결과로 B급 1조로 강등이 확정되었다. 이로써 그의 A급 연속 재적 기록은 32기에서 중단되었다. 영세 명인 자격 보유자가 B급 1조로 강등된 것은 나카하라 마코토 16세 명인 이후 두 번째였다.
2019년 9월 12일에는 제78기 순위전 B급 1조에서 마츠오 아유무에게 승리하며 카토 히후미를 넘어 역대 단독 3위인 통산 1325승을 달성했다. 그러나 마츠오 전 이후 순위전에서 연패하며 2020년 1월 23일 센다 쇼타 전에서 패배, 최종국을 기다리지 않고 B급 2조로 강등이 확정되었다(최종 성적 3승 9패 12위). 명인 경험자의 B급 2조 강등은 카토 히후미, 마루야마 타다히사에 이어 3번째이며, 영세 명인 자격자의 B급 2조 강등은 타니가와가 최초이다.
타니가와는 1993년부터 2007년까지, 그리고 2013년에 일본 쇼기 연맹의 연말 상금 및 대국료 랭킹 '톱 10'에 들었다. 8차례 '톱 3'에 들었으며, 1997년에는 상금 랭킹 1위를 차지했다.
연도 | 금액 | 순위 |
---|---|---|
1993 | 5650.00 만 JPY | 2위 |
1994 | 4359.00 만 JPY | 4위 |
1995 | 5402.00 만 JPY | 2위 |
1996 | 5069.00 만 JPY | 2위 |
1997 | 1.18 억 JPY | 1위 |
1998 | 9539.00 만 JPY | 2위 |
1999 | 6769.00 만 JPY | 2위 |
2000 | 6739.00 만 JPY | 2위 |
2001 | 4846.00 만 JPY | 4위 |
2002 | 4231.00 만 JPY | 5위 |
2003 | 4291.00 만 JPY | 4위 |
2004 | 4673.00 만 JPY | 3위 |
2005 | 2844.00 만 JPY | 5위 |
2006 | 3205.00 만 JPY | 5위 |
2007 | 2350.00 만 JPY | 9위 |
2013 | 1818.00 만 JPY | 8위 |
- 모든 금액은 일본 엔으로 표시되며, 1월 1일부터 12월 31일까지의 공식 토너먼트 및 대국에서 얻은 상금과 수수료를 포함한다.
3. 일본 쇼기 연맹 활동
타니가와 코지는 일본 쇼기 연맹의 주요 직책을 수행하며 연맹의 운영과 쇼기계 발전에 기여했다. 이 섹션에서는 그의 일본 쇼기 연맹 회장 재임 기간 동안의 활동을 다룬다.
3.1. 일본 쇼기 연맹 회장 재임
2011년 5월 26일, 일본 쇼기 연맹 제62회 정기 총회에서 2년 임기의 전무 이사로 선출되었다. 2012년 12월 18일 요네나가 쿠니오 연맹 회장이 사망하자, 2012년 12월 25일 열린 연맹 특별 회원 회의에서 그의 후임으로 선출되었다. 이로써 그는 간사이 지방 출신으로는 최초의 일본 쇼기 연맹 회장이 되었다.
타니가와는 제64회(2013년 6월 7일)와 제66회(2015년 6월 4일) 정기 총회에서 회장으로 재선되었다. 그러나 2017년 1월 18일, 그는 제29기 용왕전 도전권 논란 (쇼기 소프트웨어 부정 사용 의혹 사건)에 대한 연맹의 대처에 책임을 지고 사임하기로 결정했다고 발표했다. 그는 2017년 2월 6일 연맹 회원 특별 회의에서 후임자가 선출될 때까지 회장직을 계속 수행했다.
4. 개인 생활
타니가와 코지는 효고현 고베시 출신으로, 고베시와 깊은 인연을 맺고 있다. 그의 본가는 정토진종 혼간지파 타카마츠사(高松寺)로, 한신·아와지 대지진으로 피해를 입은 후 재건되었으며 현재는 친척이 계승하고 있다. 그는 고베시 문화특별상, 고베시 특별표창, 고베시정 공로자 표창, 효고현 '호마레'상, 고베시 문화영예상, 효고현 문화상 등을 수상했으며, 2005년 6월 18일에는 고베시의 고베 대사로 위촉되었다.
그는 사립 타키가와 중학교·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사카타 산키치의 증손 제자에 해당하며, 사카타의 제자인 후지우치 킨고 일문(門)의 흐름을 잇는 인물 중 한 명이다. 나이토 쿠니오, 모리야스 형제(마사유키, 히데미츠), 와카마츠 마사카즈(타니가와의 스승) 등 후지우치 일문은 '고베조'라고 불리며 쇼기계에 큰 세력을 구축했다.
열렬한 한신 타이거스 팬으로 알려져 있으며, 2008년 1월에는 타이거스 훈련장을 방문하여 쇼기판과 말을 선물하고, 당시 감독이었던 오카다 아키노부에게 아마추어 3단 면장을 수여하기도 했다. 또한 이마오카 마코토 (2004년 아마 2단)와도 교류가 있다. NHK BS2에서 2000년 1월에 방송된 '하부 요시하루의 신춘 대역전 5번 승부'에서는 야부 케이이치 (당시 한신 타이거스)를 응원하기 위해 하피 차림으로 영상 출연하기도 했다.
어린 시절부터 쇼기에 몰두했기 때문에 자전거를 타지 못한다. 음식 중에서는 게와 새우를 싫어한다고 한다. 본인에 따르면 어릴 적 초등학생 때 먹고 체한 경험이 원인이며, 현재는 먹어도 괜찮지만 대국 시에는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 피한다고 한다.
5. 쇼기 문화에 대한 기여
타니가와 코지는 쇼기 기사로서의 활약 외에도 저서 출판, 츠메쇼기 창작, 쇼기 보급 활동 등을 통해 쇼기 문화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그는 다수의 쇼기 관련 서적을 출판했다. 대표작으로는 '광속의 몰아붙임 전형별 종반의 기술', '타니가와 코지의 싸움의 절대 감각', '무위의 힘 마이너스가 플러스로 바뀌는 사고방식'(카와이 하야오와 공저), '부활', '구상력' 등이 있다. 또한 그의 연도별 모든 기보를 모은 '타니가와 코지 전집'이 순차적으로 간행되기도 했다.
츠메쇼기 작가로서의 면모도 가지고 있다. 츠메쇼기 전문 잡지 '츠메쇼기 파라다이스'가 주최하는 '칸쥬상'의 1997년도 특별상을 수상했다. 츠메쇼기 작가 와카시마 타다시가 주최하는 '츠메쇼기 해답 선수권'에 2007년부터 참가하여 40대임에도 불구하고 과감하게 도전하고 있다. 2008년에는 첫 츠메쇼기 작품집 '광속의 츠메쇼기'를 출간했다. 2011년에는 영세 명인으로서는 225년 만에 '월하수고(月下推敲)'라는 도식집 백번을 간행했다. 2012년 이 작품으로 제24회 쇼기 펜클럽 대상 특별상을 수상했다.
1980년대 후반 포니캐년은 타니가와를 모델로 한 쇼기 비디오 게임 시리즈인 '타니가와 코지의 쇼기 시난'(谷川浩司の将棋指南)을 MSX와 패미컴용으로 출시했다. 그는 또한 '쇼기 풍림화산'(슈퍼 패미컴, 1993년)과 PC용 소프트웨어 '게키사시 디럭스 명인전 도장'(2013년)의 감수에도 참여했다.
6. 제자
타니가와 코지는 프로 기사를 배출하기도 했다.
이름 | 4단 승단일 | 단위 및 주요 활약 |
---|---|---|
토나리 류마 | 2016년 4월 1일 | 7단, 일반 기전 우승 1회 |
7. 평가 및 영향
타니가와 코지는 쇼기계와 사회 전반에 걸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의 '광속의 종반'과 '전진류'는 쇼기의 종반 개념을 변화시켰다는 평가를 받는다. 와타나베 아키라는 프로가 된 후 타니가와의 쇼기를 연구했다고 밝히는 등, 많은 후배 기사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그는 하부 요시하루의 7관 독점을 저지한 '마지막 보루'로서 쇼기 역사에 큰 사건을 남겼으며, 40년간 최연소 명인 기록을 보유하며 쇼기계의 상징적인 존재로 군림했다. 2023년 6월 1일 후지이 소타가 자신의 최연소 명인 기록을 40년 만에 경신했을 때, 타니가와는 "40년 전의 말을 다시 사용하자면, 나카하라 마코토 16세 명인에게서 맡았던 최연소 명인 기록을 무사히 후지이 신명인에게 넘겨줄 수 있었다는 심정입니다"라고 소감을 밝혔다.
대국 중 그의 자세와 행동에 대해 하라다 야스오 9단은 "예의범절도 실력의 일부라고 하는데, 타니가와 군의 태도는 정말 단정하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구현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2024년 6월 13일 당시 현역 최고참 기사였던 아오노 테루이치가 은퇴하면서, 이 날 이후 타니가와가 현역 최고참 기사가 되었다. 2023년도 말(2024년 3월 31일) 기준으로 그는 현역 기사 중 최다 대국수(2324국)와 최다 패수(930패)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8. 연대표
날짜 | 주요 사건 및 기록 | 비고 |
---|---|---|
1962년 4월 6일 | 효고현 고베시 출생 | |
1973년 | 5급으로 장려회 입회 | 와카마츠 마사카즈 8단 문하생 |
1975년 | 초단 승단 | |
1976년 12월 20일 | 4단 승단 및 프로 데뷔 | 카토 히후미에 이은 2번째 중학생 기사 (중학교 2학년 최초) |
1978년 | 젊은 사자전 우승 | 프로 기사로서 첫 우승 |
1979년 4월 1일 | 5단 승단 | 순위전 C급1조 승급 |
1980년 4월 1일 | 6단 승단 | 순위전 B급2조 승급 |
1981년 4월 1일 | 7단 승단 | 순위전 B급1조 승급 |
1982년 4월 1일 | 8단 승단 | 순위전 A급 승급 |
1983년 6월 15일 | 명인 타이틀 획득 | 제41기 명인전에서 카토 히후미 명인 꺾고 승리. 21세 2개월 최연소 명인 기록 수립. |
1983년 9월 | 고베시 문화특별상 수상 | |
1983년도 | 전일본 프로 쇼기 토너먼트 우승 | |
1984년 4월 1일 | 9단 승단 | 명인 타이틀 획득에 따른 승단. 당시 최연소 9단 기록. |
1984년 | 명인 타이틀 방어 | 제42기 명인전에서 모리야스 히데미츠 꺾고 승리. |
1985년 | 기왕 타이틀 획득 | 제11기 기왕전에서 키리야마 키요스미 꺾고 승리. 첫 쇼기 대상 최우수 기사상 수상. |
1985년 | NHK배 TV 쇼기 토너먼트 우승 | |
1987년 | 왕위 타이틀 획득 | 제28기 왕위전에서 타카하시 미치오 꺾고 승리. |
1987년 | 기왕 타이틀 획득 | 제13기 기왕전에서 타카하시 미치오 꺾고 승리. |
1988년 | 고베시 특별표창 수상 | |
1988년 6월 14일 | 명인 타이틀 획득 | 제46기 명인전에서 나카하라 마코토 꺾고 승리. 3관왕 달성. |
1989년 | 고베시정 공로자 표창 수상 | |
1989년 | 왕위 타이틀 획득 | 제30기 왕위전에서 모리 케이지 꺾고 승리. |
1989년도 | JT 쇼기 일본 시리즈 우승 | |
1990년 | 왕좌 타이틀 획득 | 제38기 왕좌전에서 나카하라 마코토 꺾고 승리. |
1990년 | 용왕전 타이틀 획득 | 제3기 용왕전에서 하부 요시하루 꺾고 승리. |
1991년 | 쇼기 영예감투상 수상 | 공식전 통산 600승 달성 (역대 17번째, 20대 최초) |
1991년 | 기성 타이틀 획득 | 제59기 기성전에서 미나미 요시카즈 꺾고 승리. |
1991년 | 왕장전 타이틀 획득 | 제41기 왕장전에서 미나미 요시카즈 꺾고 승리. 4관왕 달성 및 7대 타이틀 생애 그랜드 슬램 달성. |
1992년 | 고베시 특별표창 수상 | |
1995년 3월 24일 | 왕장전 타이틀 방어 | 제44기 왕장전에서 하부 요시하루 꺾고 승리. 하부의 7관 독점 저지. |
1996년 2월 14일 | 왕장전 타이틀 상실 | 제45기 왕장전에서 하부 요시하루에게 패배. 하부가 7관왕 달성. |
1996년 11월 29일 | 용왕전 타이틀 획득 | 제9기 용왕전에서 하부 요시하루 꺾고 승리. '광속의 몰아붙임' △7七계 명수. |
1997년 6월 | 효고현 '호마레'상, 고베시 문화영예상 수상 | |
1997년 6월 11일 | 명인 타이틀 획득 | 제55기 명인전에서 하부 요시하루 꺾고 승리. 17세 명인 자격 획득. |
1997년 | 연말 상금 및 대국료 랭킹 1위 | 총 1.18 억 JPY |
1998년 11월 19일 | 용왕전 타이틀 상실 | 제11기 용왕전에서 후지이 타케시에게 패배. 무관. |
1999년 7월 7일 | 기성 타이틀 획득 | 제70기 기성전에서 고다 마사타카 꺾고 승리. 무관 탈출. |
2001년 | 현역 근속 25년 표창 | |
2002년 7월 13일 | 공식전 통산 1000승 달성 | 특별 쇼기 영예상 (역대 7번째). |
2002년 8월 29일 | 왕위 타이틀 획득 | 제43기 왕위전에서 하부 요시하루 꺾고 승리. |
2003년 3월 20일 | 기왕 타이틀 획득 | 제29기 기왕전에서 마루야마 타다히사 꺾고 승리. 2관왕 달성. |
2003년 12월 19일 | 마스다 코조 상 수상 | 대 시마 아키라 전 54수 △7七은성. |
2004년 9월 8일 | 왕위 타이틀 상실 | 제45기 왕위전에서 하부 요시하루에게 패배. |
2005년 2월 25일 | 기왕 타이틀 상실 | 제30기 기왕전에서 하부 요시하루에게 패배. 무관. |
2005년 6월 18일 | 고베시 고베 대사 위촉 | |
2006년 3월 16일 | 쇼기 대상 명국상 수상 | 제64기 A급 순위전 플레이오프 대 하부 요시하루 전. |
2007년 11월 7일 | 효고현 문화상 수상 | |
2009년도 | JT 쇼기 일본 시리즈 우승 | 우승 상금 초등학생 보급에 기부. |
2011년 3월 10일 | 공식전 통산 1200승 달성 | 특별 쇼기 영예상 (역대 4번째, 당시 최연소 48세 11개월). |
2011년 5월 26일 | 일본 쇼기 연맹 전무 이사 선출 | |
2012년 12월 25일 | 일본 쇼기 연맹 회장 취임 | 간사이 지방 출신 최초 회장. |
2014년 1월 10일 | 순위전 A급 강등 확정 | 32기 연속 A급 재적 기록 중단. |
2014년 11월 | 자수포장 수훈 | |
2016년 11월 | 현역 근속 40년 표창 | |
2017년 1월 18일 | 일본 쇼기 연맹 회장직 사임 발표 | 제29기 용왕전 도전권 논란 관련 책임. |
2018년 10월 1일 | 공식전 통산 1300승 달성 | 역대 5번째. |
2019년 9월 12일 | 공식전 통산 1325승 달성 | 역대 통산 승수 단독 3위. |
2020년 1월 23일 | 순위전 B급 2조 강등 확정 | 영세 명인 자격자 최초 B급 2조 강등. |
2022년 5월 23일 | 17세 명인 취임 | 명인 5기 획득에 따른 연맹 추천. |
2023년 6월 1일 | 후지이 소타가 최연소 명인 기록 경신 | 40년 만에 기록 경신. |
2024년 6월 14일 | 현역 기사 중 최장 활동 기사 등극 | 아오노 테루이치 은퇴 이후. |
2025년 1월 15일 | 공식전 통산 1400승 달성 | 역대 3번째. |
9. 기타
- 혈액형은 O형이다.
- 1971년 도큐 쇼기 축제에서 초등학생 고학년부에서 초등학교 3학년의 신분으로 우승했으며, 중학생 부문에서는 형 토시아키가 우승했다.
- 2000년 1월 NHK 교육 TV에서 방송된 'NHK 쇼기 강좌 - 타니가와 코지의 본질을 간파하다'의 '쇼기 원포인트 클리닉' 코너에서 타니가와가 의사 복장을, 어시스턴트인 시마이 사오리 여류 기사가 간호사 복장을 하고 등장한 적이 한 번 있다.
- 명인전에서 카토 히후미, 나카하라 마코토, 하부 요시하루, 사토 야스미츠, 마루야마 타다히사, 모리우치 토시유키 등 6명의 명인 재위 시에 도전자로 대국했다. 타니가와가 명인 재위 시에 도전자가 된 요네나가 쿠니오를 포함하면 총 7명의 명인 경험자와 명인전 무대에서 싸운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