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어린 시절과 배경
1.1. 출생 및 성장
나카하라 마코토는 1947년 9월 2일 돗토리현 게타카군 가노정 (현 돗토리시 가노정 미야가타)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생후 1개월 만에 미야기현 시오가마시로 이사하여, 시오가마시를 그의 고향으로 여긴다.
1.2. 교육과 쇼기 입문
나카하라 마코토는 어린 시절 시오가마의 사가이 마사지로에게 6점 접쇼기로 쇼기를 배웠고, 이후 센다이의 이시카와 타케시의 지도를 받았다. 1956년에는 이가라시 토이치, 하라다 야스오 등 여러 실력파들과 대국하며 실력을 길렀다. 1957년 9월 말, 10세의 나이로 상경하여 타카야나기 토시오 문하에 입문했으며, 세리자와 히로후미가 그의 사형이었다. 이듬해 1958년 4월 장려회에 6급으로 입회했고, 13세 중학교 2학년 때 초단으로 승단했다. 그는 타니가와 코지, 하부 요시하루와 함께 13세에 초단이 된 기록을 가지고 있다.
삼단 시절에는 야마다 미치요시가 주최하는 야마다 연구회와 세리자와의 세리자와 연구회에 참여하여 수련했다. 프로 입단 직전의 관문인 '삼단에서 사단으로의 벽' (현 삼단 리그)을 넘는 데 3년간 6기 동안 어려움을 겪었으며, 이 과정에서 인간적인 고뇌를 겪었다고 회고한다. 이는 일본대학 사쿠라가오카 고등학교 재학 중 쇼기 수련과 학업을 병행하는 어려움 때문이기도 했다.
2. 프로 쇼기 경력
나카하라 마코토는 쇼기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 중 한 명으로 평가되며, 그의 프로 경력은 탁월한 업적과 수많은 명승부로 점철되어 있다.
2.1. 데뷔 및 초기 활약
1965년 가을, 18세의 나이로 키리야마 키요스미를 동서 결정전에서 꺾고 사단으로 승단하여 프로 기사로 데뷔했다. 프로 입단 후 왕좌전에서 세 번째 대국부터 11연승을 기록했으며, 이후 순위전에서 4년 연속 승급하며 최단 기간에 A급 팔단으로 승단했다.
1967년 후기, 제11기 기성전에서 야마다 미치요시 팔단에게 처음으로 타이틀에 도전했으나 풀세트 접전 끝에 패했다. 당시 가토 히후미와 함께 최연소 타이틀 도전 기록으로 언급되었다. 그러나 반년 후, 1968년 전기의 제12기 기성전에서는 마스다 코조 구단, 후타카미 타츠야 팔단, 오야마 야스하루 명인 (당시 왕장, 십단, 왕위를 포함한 사관왕) 등 강호들을 연파하고 다시 야마다에게 도전하여 3승 1패로 승리, 생애 첫 타이틀인 기성위를 획득했다. 20세의 나이로 타이틀을 획득한 것은 당시 오야마 야스하루가 보유하고 있던 27세 최연소 타이틀 획득 기록을 경신하는 쾌거였다. 이후 오야마와 야마다를 상대로 기성위를 2회 방어하여 3연패를 달성했으나, 세 번째 방어전에서 나이토 쿠니오에게 패해 무관이 되었다.
2.2. 전성기 (1970년대-1980년대)
1970년도 십단전에서 오야마를 4승 2패로 꺾고 오야마의 5관 독점 체제를 무너뜨렸다. 이어진 후기 제17기 기성전에서도 오야마를 3승 무패로 완파하며 생애 첫 이관왕이 되었다. 다음 해 1971년 전기 제18기 기성전에서도 오야마를 상대로 3승 1패로 방어에 성공하며 통산 5번째 기성위를 획득, 영세 기성 자격을 얻었다. 당시 23세 10개월의 나이로, 이는 최연소 영세 칭호 획득 기록이었다 (2024년 현재 역대 3위). 이 두 해는 오야마와 나카하라 두 기사만이 타이틀을 보유한 '양강 시대'였다.
1971년도 A급 순위전 2년차에 제26기 순위전에서 A급 순위전 사상 최초로 전승 (8승 0패)을 기록하며 명인전 도전권을 획득했다. 그리고 1972년 제31기 명인전 칠번 승부에서 오야마와 풀세트 접전 끝에 4승 3패로 승리하며, 쇼기계의 정점인 명인위에 처음으로 올랐다. 이 해에 그는 생애 첫 삼관왕이 되었고, 오야마를 무관으로 만들었다. 이후 오야마는 명인위에 복귀하지 못했다 (1974년도 제33기 명인전과 1986년도 제44기 명인전에서 나카하라에게 도전했으나 모두 패했다). 나카하라는 하라다 야스오에게서 '쇼기계의 젊은 태양'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2.3. 라이벌전과 과도기
1973년도부터는 요네나가 쿠니오, 가토 히후미, 나이토 쿠니오 등 오야마 야스하루보다 젊은 동세대 기사들과의 대결이 주를 이뤘다. 특히 요네나가와는 타이틀전에서 수많은 사투를 벌였다.
1973년 제14기 왕위전에서 나이토 쿠니오에게 4승 무패로 승리하며 왕위 타이틀을 획득, 생애 첫 사관왕이 되었다. 그러나 직후의 십단전에서 오야마에게 타이틀을 내주었다. 1년간 삼관을 방어한 나카하라는 이듬해 (1974년도) 십단위를 탈환하며 다시 사관왕에 복귀했다. 이후 나카하라와 오야마는 각각의 타이틀을 계속 방어하며 1974년도부터 1977년도 중반까지 나카하라가 명인, 십단, 왕위, 왕장의 사관왕, 오야마가 기성, 그리고 기왕은 다른 기사가 차지하는 구도가 이어졌다. 이 시기 나카하라는 방어전에서 동세대 라이벌들과 자주 맞붙었다.
오우치 노부유키와 대결한 1975년 명인전 (4승 3패 1 지쇼기)에서는 한때 2승 3패로 코너에 몰렸으나, 7국에서 오우치가 필승 국면에서 둔 악수 (107수 ▲7一각) 덕분에 지쇼기로 만들고 역전 방어에 성공했다. 이듬해 1976년 제35기 명인전에서 요네나가 쿠니오를 4승 3패로 꺾고 방어에 성공하며 명인 5연패를 달성, 영세 명인 (제16세 명인) 자격을 얻었다.
1977년도 후기 제31기 기성전에서 오야마에게 풀세트 접전 끝에 기성위를 탈환하며 오야마에 이어 쇼기 사상 두 번째로 오관왕이 되었다. 남은 타이틀은 기왕뿐이었고, 이 해 제3기 기왕전에서 가토 히후미에게 도전했으나 3승 무패로 완패하며 전 6관왕 달성에는 실패했다.
이후 나카하라의 상대적인 부진과 요네나가 및 가토의 상승세로 인해 그들과의 타이틀전 전적은 50대 50에 가까워졌고, 보유 타이틀 수는 점차 감소했다. 가토 히후미와 대결한 1982년도 (제40기 명인전) 명인전은 지쇼기와 천일수를 포함해 흔히 '십번 승부'라 불리는 명승부가 되었으나, 3승 4패로 명인위를 내주었다. 이로써 그의 명인 9연패는 막을 내렸다.
2.4. 말년 경력 및 은퇴
1980년대 중반부터는 타니가와 코지와 55년조 (1980년 프로 입단 동기)인 타카하시 미치오, 나카무라 오사무, 미나미 요시카즈, 츠카다 야스아키 등 다음 세대 기사들과의 타이틀전 대결이 주를 이뤘고, 그가 보유한 타이틀 수는 삼관왕 또는 무관으로 변해갔다.
1985년도 제43기 명인전에서 전전기에 사상 최연소 명인이었던 타니가와로부터 명인위를 탈환하며 복귀했다. 이듬해 1986년 제44기 명인전에서는 오야마가 도전자로 나섰으나, 나카하라가 방어에 성공했다 (나카하라 4승 1패). 이 대국이 두 사람이 타이틀전 무대에서 마지막으로 맞붙은 순간이었다.
1987년도 제35기 왕좌전에서 츠카다 야스아키에게 왕좌위를 내주며 명인 단일관왕이 되었다. 이듬해 (1988년도) 제46기 명인전에서 타니가와에게 명인위를 빼앗겨 무관의 '전 명인'이 되었다. 그러나 같은 해 제36기 왕좌전에서 츠카다에게 왕좌위를 탈환했고, 후기 제53기 기성전에서는 그의 사제인 타나카 토라히코로부터 기성위를 빼앗아 이관왕으로 복귀했다.
1990년도 제48기 명인전에서 타니가와로부터 명인위를 탈환하며 두 번째 복귀를 달성했고, 삼관왕이 되었다. 그러나 전기 제56기 기성전에서 야시키 노부유키에게 기성위를 내주며 야시키가 사상 최연소 타이틀 획득 기록을 세우는 것을 허용했다. 또한 제38기 왕좌전에서는 타니가와에게 패하며 명인위만 남은 단일관왕이 되었다.
1992년도 제50기 명인전에서는 타카하시 미치오의 도전을 받았는데, 초반에 1승 3패로 몰렸다. 당시까지 명인전에서 3연패 후 역전한 사례는 없었으나, 나카하라는 그 징크스를 깨고 방어에 성공했다. 그러나 특기라고 할 수 있는 야구라전으로 진행된 1, 2, 4국에서 모두 패했다는 점은 화제가 되었다.
1993년 제51기 명인전은 요네나가 쿠니오와 6번째 명인전 맞대결이었으나, 4승 무패로 완패하며 처음으로 요네나가에게 명인위를 내주었고, 요네나가가 사상 최연장 명인 기록을 달성하는 것을 허용함과 동시에, 그의 유일한 타이틀이었던 명인위를 잃었다. 같은 해 왕장전에서는 도전자가 되었으나 타니가와에게 패했다 (나카하라 2승 4패). 이 대국이 나카하라의 마지막 타이틀전 등장이었다.
1994년 NHK배에서 요네나가와의 결승전에서 승리하며 우승했다. 이는 그의 마지막 공식 기전 우승이었다 (비공식 기전인 달인전에서는 2001년-2002년 연속 우승을 포함해 4번 우승했다).
2000년도 제58기 순위전에서 2승 7패의 성적으로 A급에서 강등되었다. 이는 영세 명인 자격 보유자가 A급에서 강등되는 사상 최초의 사건이었다 (이후 타니가와 코지, 모리우치 토시유키, 하부 요시하루도 이 기록을 세웠다). A급 강등 후 B급 1조에서 2기 동안 활동한 뒤, 프리 클래스 선언을 하고 프리 클래스로 전출했다. 영세 명인 자격자가 B급 1조나 프리 클래스에서 활동하는 것은 전례 없는 일이었으나, 이후로도 2000년도 류오전 1조 우승, 2003년도 류오전 도전수 결정 삼번 승부 진출, 2004년 왕위 리그 진입, 2007년 기성전 도전수 결정 토너먼트 진출 등 여러 기전에서 상위권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나카하라와 하부 요시하루의 타이틀전 번승부는 끝내 성사되지 못했다. 무관이 된 후인 1994년 전기 제64기 기성전에서는 타니가와 코지와의 도전수 결정전에서 패하여 하부 기성에게 도전할 기회를 놓쳤다. 같은 해 제53기 순위전에서는 7승 2패로 1위 타이였으나 모리시타 타쿠와의 플레이오프에서 패하여 하부 명인에게 도전할 기회를 놓쳤다. 1996년도 제22기 기왕전에서는 도전수 결정 이번 승부에서 모리시타 타쿠에게 패하여 하부 기왕에게 도전할 기회를 놓쳤다. 또한 모리우치 토시유키와 대결한 2003년도 류오전 도전수 결정 삼번 승부에서도 1승 2패로 패배했는데, 이것이 하부와의 타이틀전을 실현할 마지막 기회였다. 참고로, 일반 기전의 결승에서 하부와 맞붙은 것은 1988년도 NHK배 단 한 번뿐이다 (하부가 명인 경험자 4명 전원을 꺾고 우승하여 화제가 되었다).
2008년 8월 12일, 왕장전 2차 예선 준결승에서 A급 팔단인 키무라 카즈키에게 승리한 후 감상전 도중 몸에 이상을 느껴 병원에 긴급 이송되었다. 뇌출혈 진단을 받고 즉시 입원했으며, 이후 2009년 3월 31일까지 휴장하는 것이 발표되었다. 이 휴장으로 인한 첫 번째 부전패 상대도 키무라 카즈키였다.
이후 기전 복귀를 위해 재활 치료를 계속했으나 회복이 여의치 않아 쇼기 관련 활동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같은 날짜로 일본 쇼기 연맹에 은퇴계를 제출했다. 연맹 이사회는 이를 수리했음을 3월 11일에 발표했다. 2016년 5월 30일자 『니혼게이자이 신문』의 「나의 이력서」에 따르면, 입원 중에 대장암이 발견되었고, 치료에 전념하기 위해 은퇴를 결단했다고 한다.
발표 당일 나카하라 본인의 기자회견이 열렸다. 왼쪽 손발에 불편함을 안고 오른손에 지팡이를 짚고 기자회견장에 나타났으나, 건강하고 담담한 어조로 "43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타이틀전 등 많은 승부의 무대를 밟으며 승부를 충분히 만끽했다. 그 점에서는 후회가 없다"고 말했다. 다만, "후회가 있다면 (도전을 놓친 2003년의) 류오전 도전수 결정전이다. 하부 씨와 한 번 타이틀전을 싸워보고 싶었다"고 덧붙였다. 휴장 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류오전 1조에 재적한 상태로 은퇴한 것이다.
은퇴 후 활동에 대해 "기전 해설, 평론 활동을 하고 싶다"고 밝혔다. 일본 쇼기 연맹은 나카하라 마코토의 쇼기에 대한 다년간의 공적을 평가하여, 2009년 4월 1일부터 70세 생일을 맞이하는 2017년까지 '명예 기사회장'으로 위촉했다. 이후 2011년 4월 11일에 사임할 때까지 역임했다. 또한 2009년부터 JR 무사시신조역 근처의 "신조 어린이 쇼기 교실"에서 제자인 사토 슈지와 함께 비정기적으로 타이틀전 대국 해설회를 열고 있다.
3. 기풍과 이론적 기여
나카하라 마코토는 독창적인 기풍과 전술 이론으로 쇼기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이는 그에게 마스다 코조상을 안겨주었다.
3.1. 기풍 개요
전성기 시절 나카하라 마코토는 본격파 이비샤 (앉은 비차) 선수였으며, 그의 기풍은 '시젠류' (自然流자연류일본어)라고 불렸다. 하라다 야스오는 그의 기풍을 "공격해야 할 때 공격하고, 방어해야 할 때 방어하는, 마치 큰 강이 흐르는 듯 자연스러운 운수"라고 묘사했다. 옥 (왕)의 견고함보다 판 전체의 지배를 중시하는 독특한 대국관이 특징이었으며, 입옥 (상대 진영에 왕이 들어가는 것)에도 능했다. 또한 '계마 사용의 명수'라고 불릴 정도로 계마를 능숙하게 사용하여, 그의 승리 대국에서는 계마의 묘수가 자주 나타난다.
대 후리비샤 (뜬 비차)전에서의 옥두위취 (왕 머리 위치 잡기)와 같이 이상적인 형태를 추구하고 이를 저지하려는 상대를 꼬집어 이기는 교과서적인 승리가 많았다. 그는 오야마전에서의 '후리비샤 깨기', 오우치전에서의 '아나가쿠마 깨기', 나이토전에서의 '대 공중전법' 등 상대의 특기 전법을 차례로 격파했다.
1982년도 제40기 명인전에서 타이틀을 잃은 후 그의 기풍에 변화가 생겼다.
3.2. 독창적 전술 개발
기풍 변화와 함께 나카하라 마코토는 '나카하라류 아이가카리' (中原流相掛かり나카하라류 아이가카리일본어), '요코후도리 나카하라 가코이' (横歩取り中原囲い요코후도리 나카하라 가코이일본어), '나카하라류 급전 야구라' (中原流急戦矢倉나카하라류 급전 야구라일본어)와 같은 독창적인 전술을 개발했다. 특히 1992년 타카하시 미치오와의 제50기 명인전에서 야구라전에서 단 한 판도 승리하지 못하고 실관 위기에 처한 후, 그는 아이가카리, 요코후도리 나카하라 가코이, 단기간 동안 명인전에 채택했던 나카하라 비차, 후수 야구라에서의 나카하라류 급전 야구라, 대 후리비샤에서의 6오 보 전법 등을 사용하여 승률을 유지했다.
1996년에는 '나카하라류 아이가카리', '나카하라류 요코후도리', '나카하라 가코이' 등의 전법을 개발한 공로로 마스다 코조상을 수상했다. 특히 '나카하라 가코이'는 요코후도리 (옆걸음 보차 취하기) 오프닝에 대한 방어 전략으로 개발된 진형의 일종이며, 상대의 비차(飛車) 낙하를 방어하는 데 사용된다.
나카하라는 명인전에서 두 번의 큰 악수를 두었다 (제31기 명인전 3국 대 오야마전에서의 ▲8오금 미스, 제48기 명인전 2국 대 타니가와전에서의 △2오계 타는 공짜로 잡히는 것을 착각). 또한 제37기 명인전 4국에서는 요네나가 상대로 ▲5칠은이라는 역사적인 묘수를 두어 승리했다.
은퇴 전 몇 년간은 '형세 낙관파'의 대표적인 기사로 알려져 있었으며, 상대나 대기실의 기사들이 대부분 '호각 또는 나카하라 불리'라고 생각하는 국면에서도 대국 후 감상에서는 "그 국면에서는 내가 좋았다고 생각한다"고 말하는 경우가 많았다.
4. 주요 타이틀 및 기록
나카하라 마코토는 쇼기 역사상 가장 많은 타이틀을 획득한 기사 중 한 명으로, 수많은 기록과 이정표를 세웠다.
4.1. 영세 칭호 및 주요 타이틀
나카하라 마코토는 총 91회의 주요 타이틀전에 등장하여 64회의 타이틀을 획득했다. 이는 하부 요시하루와 오야마 야스하루에 이어 역대 3위의 기록이다. 그는 구(舊) 십단전을 포함하여 7개 타이틀 모두를 한 번 이상 획득한 생애 그랜드 슬램을 달성했다.
그는 5개의 영세 칭호를 보유하고 있다.
- 제16세 명인: 1976년 제35기 명인전에서 명인 5연패를 달성하며 영세 명인 자격을 획득했다. 자격 획득 후 30년이 지난 2007년 11월 17일 (쇼기 데이)에 일본 쇼기 연맹 이사회의 제안과 본인의 승낙으로 현역 신분으로 '제16세 명인' 칭호를 습위했다. 이는 모리우치 토시유키가 제18세 명인 자격을 획득한 것과 나카하라의 은퇴 시기가 가까워진 것을 고려한 결정이었다.
- 영세 십단: 1994년 4월 1일에 습위했다. 당시 '전 명인'의 직함을 잃을 때, 그의 공적을 기려 '십단'이라고 부를 수 없다는 특별한 논의를 통해 영세 십단 칭호를 현역으로 습위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 명예 왕좌: 2007년 9월 2일에 환갑을 맞아 규정에 따라 습위했다.
- 영세 기성: 1971년 제18기 기성전에서 통산 5번째 기성위를 획득하며 영세 기성 자격을 획득했다. 당시 23세 10개월로, 최연소 영세 칭호 획득 기록이었다. 2008년 4월 1일에 습위했다.
- 영세 왕위: 2008년 4월 1일에 습위했다. 나카하라 마코토가 영세 왕위 칭호를 습위한 최초의 기사이다.
주요 타이틀 획득 기록은 다음과 같다.
타이틀 | 획득 연도 | 등장 횟수 | 획득 기수 | 연패 | 영세 칭호 (비고) |
---|---|---|---|---|---|
류오 | - | 0 | - | - | |
명인 | 1972-1981, 1985-1987, 1990-1992 | 18회 | 15기 | 9연패 | 제16세 명인 |
왕위 | 1973-1978, 1980-1981 | 11회 | 8기 | 6연패 | 영세 왕위 |
왕좌 | 1983-1986, 1988-1989 | 8회 | 6기 | 4연패 | 명예 왕좌 |
기왕 | 1979 | 3회 | 1기 | - | |
왕장 | 1972-1977, 1984 | 13회 | 7기 | 6연패 | |
기성 | 1968전후-1969전, | 23회 | 16기 | 5연패 | 영세 기성 |
구(舊) 타이틀 | 획득 연도 | 등장 횟수 | 획득 기수 | 연패 | 영세 칭호 (비고) |
십단 | 1970-1972, 1974-1979, | 15회 | 11기 | 6연패 | 영세 십단 |
등장 횟수 총 91회, 획득 총 64기 (역대 3위), 7타이틀 생애 그랜드 슬램 달성 (구 십단전 포함) |
쇼기 타이틀 획득 기록 역대 순위 (2024년도 제37기 류오전 종료까지):
- 1위: 하부 요시하루 (99기, 138회 등장)
- 2위: 오야마 야스하루 (80기, 112회 등장)
- 3위: 나카하라 마코토 (64기, 91회 등장)
- 4위: 와타나베 아키라 (31기, 45회 등장)
- 5위: 타니가와 코지 (27기, 57회 등장)
- 6위: 후지이 소타 (26기, 27회 등장)
- 7위: 요네나가 쿠니오 (19기, 48회 등장)
- 8위: 사토 야스미츠 (13기, 37회 등장)
- 9위: 모리우치 토시유키 (12기, 25회 등장)
- 10위: 가토 히후미 (8기, 24회 등장)
4.2. 기타 기전 우승 및 쇼기 대상
나카하라 마코토는 주요 타이틀 외에 28회의 일반 기전에서 우승하여 역대 3위를 기록하고 있다.
- 왕좌전 (일반 기전 시대) - 10회 (1969년-1974년, 1976년-1979년)
- NHK배 - 6회 (1974년, 1977년, 1982년, 1987년, 1992년, 1994년)
- 하야자시 쇼기 선수권 - 3회 (1972년 후기, 1973년 후기, 1985년)
- 일본 시리즈 - 1회 (1981년)
- 올스타 승자 잔류전 (5승 이상) - 3회 (1984년, 1987년-1988년)
- 쇼기 연맹배 쟁탈전 - 1회 (제3회)
- 코고 신에이전 - 1회 (제11회)
- 최강자 결정전 - 1회 (제11회)
- 명장전 - 2회 (제1기, 제2기)
그는 쇼기 대상을 수상했는데, 최우수 기사상 5회, 마스다 코조상 1회 (나카하라류 요코후도리, 나카하라 가코이 전법 개발 공로) 등이 있다.
4.3. 전체 경력 통계
나카하라 마코토의 통산 성적은 대국 수 2093국 (타이틀전 지쇼기 3국 포함), 1308승 782패, 승률 0.6258이다. 은퇴 시점 기준 1308승은 역대 2위의 성적이었다.
그는 류오전 1조에 통산 18기 동안 재적했다 (제1기-9기, 13기-15기, 17기-22기). 또한 순위전 A급 이상에 29기 연속 재적하여, 총 29기를 A급에서 보냈다 (제25기-30기, 36기-58기). 이는 30년 연속 A급 이상 재적한 기록이다.
4.4. 주요 기록 및 이정표
- 기성위 재위 - 16기 (오야마 야스하루, 하부 요시하루와 함께 역대 1위 타이)
- 기성전 본선 (16강 이상) 진출 - 71기 (제8기, 제9기, 제11기부터 제79기까지의 69기 연속). 기성전이 연 2회 개최되던 시기부터 은퇴 직전까지 40여 년간 이어진 기록이다.
- 연도 최고 승률 - 0.855 (47승 8패) (1967년도)
- 사단 승단부터 영세 칭호 자격 획득까지 최단 기록 - 5년 10개월
- 최연소 실력제 영세 명인 자격 획득 - 28세 9개월
- 순위전 A급 전승 - 1971년 (휴장자가 있어 8국 진행. 이후 모리우치 토시유키, 하부 요시하루, 와타나베 아키라가 9전 전승을 달성)
- 연도 승률 7할 초과 - 10년 연속
- 2007년 9월 27일, 오야마 야스하루에 이어 쇼기 사상 두 번째로 통산 1300승을 달성했다.
주요 승수 표창 및 기록은 다음과 같다.
- 1979년 12월 12일 - 통산 500승 달성
- 1981년 10월 9일 - 통산 600승 달성 (쇼기 영예상)
- 1986년 9월 2일 - 통산 800승 달성 (쇼기 영예 감투상)
- 1992년 1월 10일 - 통산 1000승 달성 (특별 쇼기 영예상, 사상 3번째)
- 1995년 6월 29일 - 통산 1100승 달성 (사상 3번째)
- 1999년 6월 29일 - 통산 1200승 달성 (특별 쇼기 영예상, 사상 2번째)
- 2007년 9월 27일 - 통산 1300승 달성 (사상 2번째)
- 2004년 2월 16일 - 통산 2000대국 달성 (사상 3번째, 통산 1269승 728패, 승률 0.635, 지쇼기 3)
- 1990년 11월 17일 - 현역 근속 25년 표창
- 2005년 11월 - 현역 근속 40년 표창
주요 대전 상대와의 승패 기록은 다음과 같다.
대전 상대 | 대국 수 | 승 | 패 | 타이틀전 (획득/패퇴) |
---|---|---|---|---|
츠카다 마사오 | 4 | 4 | 0 | - |
마스다 코조 | 12 | 9 | 3 | - |
오야마 야스하루 | 162 | 107 | 55 | 획득 16, 패퇴 4 |
후타카미 타츠야 | 42 | 29 | 13 | 획득 2, 패퇴 1 |
야마다 미치요시 | 22 | 15 | 7 | 획득 2, 패퇴 1 |
가토 히후미 | 109 | 67 | 41 | 획득 5, 패퇴 4 |
아리요시 미치오 | 58 | 41 | 17 | 획득 3, 패퇴 1 |
나이토 쿠니오 | 71 | 47 | 24 | 획득 4, 패퇴 2 |
요네나가 쿠니오 | 187 | 106 | 80 | 획득 14, 패퇴 6 |
오우치 노부유키 | 43 | 28 | 14 | 획득 1, 패퇴 0 |
키리야마 키요스미 | 51 | 34 | 17 | 획득 3, 패퇴 0 |
카츠우라 오사무 | 35 | 26 | 9 | 획득 1, 패퇴 0 |
모리야스 히데미츠 | 38 | 22 | 16 | 획득 1, 패퇴 1 |
모리 케이지 | 42 | 30 | 12 | 획득 2, 패퇴 0 |
아와지 히토시게 | 13 | 11 | 2 | 획득 1, 패퇴 0 |
아오노 테루이치 | 36 | 27 | 9 | 획득 1, 패퇴 0 |
타나카 토라히코 | 23 | 12 | 11 | 획득 1, 패퇴 0 |
타니가와 코지 | 98 | 42 | 56 | 획득 3, 패퇴 3 |
타카하시 미치오 | 45 | 30 | 15 | 획득 1, 패퇴 0 |
나카무라 오사무 | 30 | 15 | 15 | 획득 0, 패퇴 2 |
시마 아키라 | 32 | 16 | 16 | - |
미나미 요시카즈 | 26 | 12 | 14 | 획득 1, 패퇴 0 |
츠카다 야스아키 | 32 | 21 | 11 | 획득 1, 패퇴 1 |
모리시타 타쿠 | 30 | 13 | 17 | - |
하부 요시하루 | 29 | 10 | 19 | - |
사토 야스미츠 | 29 | 12 | 17 | - |
모리우치 토시유키 | 35 | 17 | 18 | - |
야시키 노부유키 | 21 | 11 | 10 | 획득 1, 패퇴 1 |
마루야마 타다히사 | 22 | 7 | 15 | - |
고다 마사타카 | 31 | 6 | 25 | - |
와타나베 아키라 | 4 | 1 | 3 | - |
요네나가 쿠니오와의 187국은 단일 상대와의 대국 수 역대 1위 기록이다.
5. 쇼기계 리더십 및 기여
나카하라 마코토는 일본 쇼기 연맹의 회장직을 역임하며 쇼기계 발전에 기여했다.
5.1. 일본 쇼기 연맹 회장직
나카하라 마코토는 후타카미 타츠야의 뒤를 이어 2003년 5월부터 2005년 5월까지 일본 쇼기 연맹 회장으로 재임했다. 그는 한 임기만 수행한 후 회장직을 요네나가 쿠니오에게 넘기고 부회장으로 취임했다. 2007년 5월 기사회 총회에서 이사 선거에 출마하지 않고 이사 겸 부회장직에서 물러났다.
5.2. 명예 기사 회장직
일본 쇼기 연맹은 나카하라 마코토의 쇼기에 대한 다년간의 공로를 높이 평가하여, 은퇴 후인 2009년 4월 1일부터 그의 70세 생일인 2017년까지 '명예 기사회장'으로 위촉했다. 그는 2011년 4월 11일에 사임할 때까지 이 직책을 수행하며 쇼기계에 대한 지속적인 기여를 이어갔다.
6. 개인 생활 및 대외적 이미지
나카하라 마코토는 대국 외적으로도 여러 일화와 취미를 가지고 있으며, 그의 인간적인 면모는 팬들에게도 잘 알려져 있다.
6.1. 성격 및 취미
사단에서 육단에 이르는 시절, 그의 압도적인 강함 때문에 '아톰'이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다. 그는 지기 싫어하는 성격으로, 아마추어 상대로도 결코 봐주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다나카 가쿠에이가 자유민주당 총재로 출마했을 때, 부채에 '오오카쿠' (五五角고고카쿠일본어)라고 휘호하여 선물한 일화도 있다.
친한 기사였던 이케다 슈이치가 삼단 시절에 폐결핵으로 고향에서 장기 요양을 할 때, 당시 사단에서 오단으로 먼저 프로 기사가 되었던 나카하라가 입원 중이던 이케다의 생활비를 매달 지원해주었다.
그의 취미는 바둑과 음악 감상 (클래식 음악), 그리고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경기 시청이다. 바둑에 대해서는 2016년 현재도 쇼기 연맹 바둑부에 소속되어 있으며, 2019년 1월에는 아마추어 육단 면장을 수여받기도 했다. 클래식 음악은 프로 입단 초기부터 명곡 다방에 자주 드나들며 취미를 붙였고, 쇼기 팬이었던 야마모토 나오즈미와도 교류하며 '코마온 콘서트'에서 지휘봉을 잡은 적도 있다.
그는 츠메쇼기 (말림 쇼기) 창작에도 능하여, 명인 재위 중에도 직접 만든 츠메쇼기를 잡지에 기고하기도 했다. 중학교 때 출제한 9수 츠메쇼기는 츠카다 마사오마저 풀지 못했다고 한다. 소년 시절 별명은 '마코롱'이었는데, 당시 쓰던 안경이 센다이의 과자 '마코롱'처럼 둥글게 생겼기 때문이라고 한다. 대국 해설 시 그의 말버릇인 "놀랍네요" (驚いたね오도로이타네일본어)는 예상 밖의 수를 둘 때 내뱉는 말인데, 이는 좋은 수보다는 악수일 때가 많았다고 알려져 있다.
6.2. 공개된 논란
1994년부터 1998년 사이에 하야시바 나오코 (전 여류 기사)의 집에 걸려온 자동 응답 전화에 "지금부터 돌격합니다", "너 같은 건 빨리 죽어버려! 에이즈라도 걸려버리면 돼!" 등 나카하라 본인의 육성이 녹음된 테이프가 1998년 TV 와이드쇼 등을 통해 공개되었다. 나카하라는 자택 정원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사실 관계를 인정했다.
6.3. 제자
나카하라 마코토의 문하에서 프로 기사 및 여류 기사가 된 제자들은 다음과 같다.
- 남성 프로 기사
이름 | 사단 승단일 | 단위, 주요 활동 |
---|---|---|
오구라 히사시 | 1988년 10월 1일 | 팔단 |
사토 슈지 | 1990년 10월 1일 | 팔단, 일반 기전 우승 1회 |
타카노 히데유키 | 1998년 4월 1일 | 육단 |
쿠마사카 마나부 | 2002년 4월 1일 | 육단 |
- 여류 프로 기사
이름 | 여류 프로 입단일 | 단위, 주요 활동 |
---|---|---|
카이 토모미 | 1997년 4월 1일 | 여류 오단, 여왕 1회, 여류 왕위 4회, 쿠라시키 후지바나 2회, 일반 기전 우승 2회, A급 재적 2회 |
7. 저서
나카하라 마코토는 제16세 명인이자 일본 쇼기 연맹 회장을 역임한 만큼 수많은 저서를 남겼다. 특히 입문서도 많이 저술했다. 다음은 대표적인 저서 목록이다.
- 『결단의 한 수!』 (일본쇼기연맹, 2008년 7월)
- 『쇼기 뇌-이것으로 당신의 뇌는 되살아난다』 (선마크 출판, 2006년 10월)
- 『실전형 말림 쇼기 삼수・오수・칠수 말림』 (닛토쇼인, 2006년 8월)
- 『나카하라 마코토의 풀어봐요 말림 쇼기』 (플로럴 출판, 2001년 12월)
- 『자연류 나카하라 마코토의 실전 명승부』 (도쿄서점, 1999년 10월)
- 『자연류 나카하라 마코토의 후리비샤 깨기』 (도쿄서점, 1999년 5월)
- 『요코후도리 나카하라류-필살진 제2탄!』 (일본쇼기연맹, 1995년 4월)
- 『나카하라류 후리비샤 깨기』 (이케다 서점, 1994년 11월)
- 『나카하라류 급전 쇼기』 (이케다 서점, 1994년 7월)
- 『나카하라류 아이가카리-필살의 5구 금형』 (일본쇼기연맹, 1994년 3월)
- 『이비샤 아나가쿠마 3번 쇼기가 강해진다』 (오이즈미 서점, 1987년 10월)
- 『급전 코시카케긴 3번 쇼기가 강해진다』 (오이즈미 서점, 1987년 8월)
- 『나카하라 마코토 자연류 명인전 격투보』 (이케다 서점, 1987년 4월)
- 『급전 야구라 3번 쇼기가 강해진다』 (오이즈미 서점, 1987년 2월)
- 『필살 미노 깨기 3번 쇼기가 강해진다』 (오이즈미 서점, 1986년 8월)
- 『필살 아나가쿠마 깨기 3번 쇼기가 강해진다』 (오이즈미 서점, 1986년 2월)
- 『나카하라의 필승 야구라 나카비샤』 (이케다 서점, 1985년 8월)
- 『야구라전 3번 쇼기가 강해진다』 (오이즈미 서점, 1985년 4월)
- 『봉은전 3번 쇼기가 강해진다』 (오이즈미 서점, 1985년 2월)
- 『히네리비샤 3번 쇼기가 강해진다』 (오이즈미 서점, 1984년 12월)
- 『나카하라의 필승 히다리 미노-대 시켄비샤』 (이케다 서점, 1984년 11월)
- 『나카비샤 3번 쇼기가 강해진다』 (오이즈미 서점, 1984년 8월)
- 『나카하라 공격의 실전집-오야마 제15세 명인과의 대 후리비샤전 15국』 (나가오카 서점, 1984년 5월)
- 『시켄비샤 3번 쇼기가 강해진다』 (오이즈미 서점, 1984년 1월)
- 『나카하라의 야구라 교실』 (이케다 서점, 1983년 11월)
- 『야구라 전법 II』 (치쿠마 쇼보, 1983년 6월)
- 『야구라 전법 I』 (치쿠마 쇼보, 1983년 3월)
- 『나카하라의 시켄비샤로 이기다』 (이케다 서점, 1982년 2월)
- 『나카하라의 나카비샤 교실』 (이케다 서점, 1980년 10월)
- 『나카하라의 말별 다음 한 수《보・향・계》』 (이케다 서점, 1978년 4월)
- 『나카하라의 요세와 츠메』 (이케다 서점, 1977년 3월)
8. 기타 표창 및 영예
나카하라 마코토는 쇼기 관련 분야 외적으로도 여러 국가 및 지방자치단체로부터 표창과 영예를 받았다.
- 1972년 제1회 가와사키시 문화상
- 1985년 시오가마시 시민 영예상
- 2004년 돗토리현 가노정 명예 주민
- 2008년 자수포장 수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