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초기 생애 및 교육
콘스탄티노스 카라만리스는 1907년 3월 8일 오스만 제국의 일부였던 마케도니아 지방 세레스 근처의 프로티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게오르기오스 카라만리스는 1904년부터 1908년까지 그리스의 마케도니아 투쟁에 참여했던 교사였다.
그는 제1차 발칸 전쟁과 제2차 발칸 전쟁 이후 마케도니아 지역이 그리스에 합병된 1913년에 그리스 시민이 되었다. 마케도니아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후, 그는 아테네로 가서 법학 학위를 취득했다. 세레스에서 변호사로 활동을 시작했으며, 보수 정당인 인민당에 입당하여 28세의 나이로 1936년 총선에서 처음으로 국회의원으로 선출되었다. 건강 문제로 인해 그리스-이탈리아 전쟁에는 참전하지 않았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아테네와 세레스에서 시간을 보냈으며, 1944년 7월에는 그리스 망명 정부에 합류하기 위해 중동으로 떠났다.
2. 초기 정치 경력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카라만리스는 그리스 정치계에서 빠르게 두각을 나타냈다. 그의 부상은 동료 당원이자 절친한 친구인 람브로스 에프탁시아스(Lambros Eftaxias)의 강력한 지지를 받았다. 에프탁시아스는 콘스탄티노스 찰다리스(Konstantinos Tsaldaris) 총리 재임 시절 농업부 장관을 역임했다. 카라만리스의 첫 내각 직위는 1947년 같은 행정부에서 노동부 장관이었다.
1951년, 인민당의 저명한 인사들과 함께 카라만리스는 알렉산드로스 파파고스의 그리스 랠리에 합류했다. 1951년 9월 9일 총선에서 그리스 랠리가 승리하자, 카라만리스는 파파고스 행정부에서 공공사업부 장관이 되었다. 그는 도로 인프라 건설과 미국 원조 프로그램 관리의 효율성으로 주그리스 미국 대사관의 찬사를 받았다.
1955년 10월 파파고스가 짧은 병환 끝에 사망하자, 파블로스 국왕은 48세의 카라만리스를 총리로 임명했다. 국왕의 이러한 임명은 그리스 정치계를 놀라게 했는데, 이는 파파고스의 후임으로 유력하게 거론되던 그리스 랠리의 두 거물 정치인인 스테파노스 스테파노풀로스와 파나기오티스 카넬로풀로스를 제쳐두었기 때문이다. 총리가 된 후 카라만리스는 그리스 랠리를 국민급진연합으로 재편했다. 그가 총리로서 추진한 첫 법안 중 하나는 1952년에 명목상 승인되었으나 잠정적으로 중단되었던 여성 참정권의 전면적 확대였다. 카라만리스는 이후 세 번의 선거(1956년 2월, 1958년 5월, 1961년 10월)에서 연달아 승리했다.
3. 제1차 총리 재임 (1955년-1963년)
콘스탄티노스 카라만리스의 첫 번째 총리 재임 기간은 그리스의 경제 성장과 사회적 변화, 그리고 유럽 통합을 향한 중요한 발걸음이 이루어진 시기였다.
3.1. 경제 및 사회 정책
카라만리스는 1959년에 그리스 경제를 위한 5개년 계획(1959~1964)을 발표했다. 이 계획은 농업 및 산업 생산성 향상, 인프라에 대한 대규모 투자, 그리고 관광 산업 육성을 강조하여 전후 그리스 경제의 기적의 기반을 마련했다. 그러나 이 계획의 실행은 1967년 쿠데타와 이어진 7년간의 독재로 인해 중단되었다.
사회 정책 측면에서는 1952년에 명목상 승인되었으나 실제로는 시행되지 않고 있던 여성 참정권을 전면적으로 확대하는 법안을 추진하여 여성의 정치 참여를 실질적으로 보장했다.
3.2. 외교 정책 및 유럽 통합

국제 관계에서 카라만리스는 그리스와 키프로스의 통합(에노시스, Ένωσις에노시스현대 그리스어 (1453년 이후))이라는 기존 정부의 전략적 목표를 포기하고 키프로스의 독립을 지지하는 정책으로 전환했다. 1958년, 그의 정부는 영국 및 튀르키예와 협상에 참여했으며, 이는 키프로스 독립에 대한 합의의 기초가 된 취리히-런던 협정으로 이어졌다. 1959년 2월, 이 계획은 키프로스 지도자 마카리오스 3세에 의해 런던에서 비준되었다.
카라만리스는 일찍이 1958년부터 유럽 경제 공동체(EEC) 가입을 위한 적극적인 정책을 추진했다. 그는 그리스의 EEC 가입을 "그리스의 유럽적 운명"을 실현하는 개인적인 꿈으로 여겼다. 그는 콘라트 아데나워 독일 총리와 샤를 드 골 프랑스 대통령 등 유럽 지도자들을 직접 설득했으며, 이후 2년간 브뤼셀과의 집중적인 협상을 진행했다. 그의 적극적인 로비는 결실을 맺어, 1961년 7월 9일 그의 정부와 유럽 국가들은 그리스의 유럽 경제 공동체(EEC) 준회원 협정 의정서에 서명했다. 아테네에서 열린 서명식에는 유럽 연합의 전신인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벨기에, 룩셈부르크, 네덜란드 등 6개 회원국의 고위 정부 대표단이 참석했다. 경제부 장관 아리스티디스 프로토파파다키스와 외무부 장관 에방겔로스 아베로프도 자리에 함께했다. 루트비히 에르하르트 독일 부총리와 유럽 연합의 선구자이자 카라만리스처럼 카롤루스 대제상을 수상한 폴 앙리 스파크 벨기에 외무부 장관도 유럽 대표단에 포함되었다.
이러한 협정은 그리스의 경제적 고립을 종식시키고, 주로 NATO를 통한 미국의 경제 및 군사 원조에 대한 정치적, 경제적 의존도를 깨뜨리는 심오한 효과를 가져왔다. 그리스는 6개국 EEC 그룹 외에서 EEC 준회원국 지위를 획득한 최초의 유럽 국가가 되었다. 1962년 11월, 준회원 협정이 발효되었고, 이는 EEC 수입품에 대한 모든 그리스 관세를 점진적으로 철폐한 후 1984년까지 그리스의 EEC 정식 회원국 가입을 목표로 했다. 협정에 포함된 재정 의정서 조항은 그리스의 정식 회원국 가입에 대비하여 그리스 경제의 경쟁력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되도록 1962년에서 1972년 사이에 약 3.00 억 USD의 공동체 보조금을 지원하는 대출을 규정했다. 공동체의 재정 지원 패키지 및 가입 의정서는 1967년부터 1974년까지의 군사 정권 기간 동안 중단되었고, 그리스는 EEC에서 추방되었다. 또한 독재 기간 동안 그리스는 고문 혐의에 대한 유럽 평의회의 당혹스러운 조사를 우려하여 유럽 평의회 회원 자격을 사임했다.
3.3. 정치 위기와 메르텐 사건

1961년 총선에서 국민급진연합은 득표율 50.8%와 176석을 얻었다. 그러나 양대 야당인 EDA와 중앙연합은 유권자 협박 및 사망자 투표 등 수많은 부정 사례를 근거로 선거 결과를 인정하지 않았다. 중앙연합은 선거 결과가 군 지도부, 그리스 중앙 정보국, 악명 높은 우익 국가방위대 등 그림자 같은 '준국가(para-state)' 요원들에 의해 '페리클레스'라는 비상 계획에 따라 조작되었다고 주장했다. 비록 부정행위가 확실히 발생했지만, '페리클레스'의 존재는 결코 입증되지 않았으며, 선거 개입이 결과에 근본적인 영향을 미쳤는지도 불확실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앙연합의 지도자 요르요스 파판드레우는 새롭고 공정한 선거가 열릴 때까지 '무자비한 투쟁'(ανένδοτος αγών아넨도토스 아곤현대 그리스어 (1453년 이후))을 시작했다.
카라만리스의 입지는 1963년 5월 테살로니키에서 열린 평화 시위 중 좌파 국회의원 그리골리스 람브라키스가 우익 극단주의자들에게 암살당한 사건 이후 더욱 약화되었으며, 이는 파판드레우의 '준국가' 주장에 더 큰 신빙성을 부여했다. 암살범들은 나중에 지역 헌병대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카라만리스는 이 암살 사건에 충격을 받았고, 요르요스 파판드레우의 야당으로부터 심한 비판을 받았다. 그는 "이 나라를 누가 통치하는가?"라고 말했다.
카라만리스 정부의 마지막 결정타는 1963년 여름 왕실 부부의 영국 방문 계획을 둘러싼 왕궁과의 충돌이었다. 카라만리스는 그리스 내전 이후 여전히 그리스에 억류되어 있는 정치범들에 대한 시위의 빌미를 제공할 것을 우려하여 이 방문에 반대했다. 카라만리스와 왕궁, 특히 프레데리키 왕비 및 왕세자와의 관계는 한동안 악화되고 있었다. 총리는 또한 정부에 권한을 부여할 헌법 개정안에 대한 국왕의 반대, 왕실의 사치스러운 생활 방식, 그리고 국왕이 주장하는 군대에 대한 거의 독점적인 통제권에 대해서도 파블로스 국왕과 충돌했다. 국왕이 런던 방문을 연기하라는 그의 조언을 거부하자, 카라만리스는 사임하고 그리스를 떠났다. 그가 없는 동안 국민급진연합은 파나기오티스 카넬로풀로스, 콘스탄티노스 로도풀로스, 파나기스 파팔리구라스로 구성된 위원회에 의해 이끌어졌다.
메르텐 사건은 1959년 그리스에서 발생한 정치적 논란으로, 제2차 세계 대전 중 테살로니키의 나치 독일 점령군에서 '군사 행정 고문'을 지낸 막스 메르텐(Max Merten)과 관련된 사건이다. 메르텐은 1959년 그리스에서 전쟁 범죄로 유죄 판결을 받고 25년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그해 11월 3일, 메르텐은 서독의 정치적, 경제적 압력(당시 서독에는 수천 명의 그리스 가스타르바이터가 있었다)으로 인해 전쟁 범죄 사면을 받아 석방되어 서독으로 송환되었다. 메르텐의 체포는 독일과 연관이 있던 프레데리키 왕비를 격분시켰고, 그녀는 "이것이 검사 나리가 독일과 그리스 관계의 발전을 이해하는 방식인가"라고 의문을 표했다.
독일에서 메르텐은 결국 "증거 부족"으로 모든 혐의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1960년 9월 28일, 독일 신문 함부르거 에코(Hamburger Echo)와 슈피겔은 메르텐이 독일 당국에 진술한 내용의 일부를 공개했다. 메르텐은 이 진술에서 당시 내무부 장관이었던 카라만리스, 타코스 마크리스(Takos Makris)와 그의 아내 독술라(Doxoula, 메르텐은 그녀를 카라만리스의 조카라고 묘사했다), 그리고 당시 국방부 차관이었던 게오르기오스 테멜리스가 나치 그리스 점령 기간 동안 테살로니키에서 정보원 역할을 했다고 주장했다. 메르텐은 카라만리스와 마크리스가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로 보내진 그리스 유대인의 소유였던 테살로니키의 사업체를 보상으로 받았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한 자신이 카라만리스와 마크리스에게 자신을 사면하고 석방하도록 압력을 가했다고 주장했다.
카라만리스는 이러한 주장을 근거 없고 터무니없는 것이라고 일축하며, 메르텐이 진술하기 전에 자신에게 돈을 갈취하려 했다고 비난했다. 서독 정부(제3차 아데나워 내각) 또한 이러한 비난을 "명예 훼손적이고 중상모략적"이라고 규탄했다. 카라만리스는 야당이 자신에 대한 비방 캠페인을 조장했다고 비난했다. 카라만리스는 메르텐을 고소하지 않았지만, 그리스에서는 타코스와 독술라 마크리스, 테멜리스가 슈피겔을 고소했고, 이 잡지는 1963년 명예 훼손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메르텐은 그리스 법정 절차에 증인으로 출석하지 않았다. 메르텐 사건은 1961년 초까지 정치적 논의의 중심에 남아 있었다.
메르텐의 카라만리스에 대한 비난은 법정에서 결코 입증되지 않았다. 카라만리스의 열렬한 비판자였던 역사가 야니스 카트리스(Giannis Katris)는 1971년에 카라만리스가 총리직을 사임하고 독일 법원에서 개인 자격으로 메르텐을 고소하여 자신의 이름을 완전히 명예 회복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트리스는 이 비난을 "근거 없고" "명백히 허위"라고 일축했다.
4. 망명 및 정치 복귀
1963년 총선에서 그의 지도 아래 국민급진연합은 요르요스 파판드레우가 이끄는 중앙연합에 패배했다. 결과에 실망한 카라만리스는 '트리안타필리데스(Triantafyllides)'라는 이름으로 그리스를 떠났다. 그는 이후 11년간 프랑스 파리에서 자발적인 망명 생활을 보냈다. 카라만리스의 후임으로는 파나기오티스 카넬로풀로스가 국민급진연합의 지도자가 되었다.
1966년, 콘스탄티노스 2세 국왕은 그의 특사 데메트리오스 비치오스(Demetrios Bitsios)를 파리로 보내 카라만리스에게 그리스로 돌아와 정치에 복귀하도록 설득했다. 2006년, 두 사람 모두 사망한 후에야 전 국왕이 주장한 바에 따르면, 카라만리스는 비치오스에게 국왕이 헌법적 특권에 따라 계엄령을 선포한다면 돌아오겠다고 답했다고 한다. 미국 언론인 사이러스 L. 설즈버거는 별도로 카라만리스가 뉴욕으로 날아가 로리스 노스태드를 만나 자신을 중심으로 한 강력한 보수 정권을 수립하기 위한 그리스 내 쿠데타에 대한 미국의 지지를 로비했다고 주장했다. 설즈버거는 노스태드가 그러한 일에 관여하기를 거부했다고 주장했다. 전 국왕의 주장과 달리 설즈버거의 주장은 관련 인물들(카라만리스와 노스태드)이 살아있을 때 나왔으며, 오직 그와 노스태드의 말에만 의존했다. 1997년 전 국왕이 설즈버거의 주장을 되풀이했을 때, 카라만리스는 "전 국왕의 발언은 내용과 태도 모두 언급할 가치도 없으므로 다루지 않겠다"고 밝혔다. 전 국왕이 설즈버거의 주장을 채택하여 카라만리스의 쿠데타 계획설을 지지한 것은 일반적으로 카라만리스를 비판하던 좌파 성향 언론으로부터도 "뻔뻔하고", "무례하다"는 비난을 받았다. 당시 전 국왕은 카라만리스의 쿠데타 계획설을 뒷받침하기 위해 오직 설즈버거의 주장에만 언급했으며, 두 참가자가 모두 사망하여 반박할 수 없게 된 후에야 언급할 1966년 비치오스와의 만남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1967년 4월 21일, 게오르기오스 파파도풀로스 대령을 중심으로 한 장교들의 쿠데타로 헌정 질서가 전복되었다. 국왕은 군부가 임명한 정부를 그리스의 합법적인 정부로 인정하고 선서하게 했으나, 8개월 후 군사 정권을 전복시키기 위한 실패한 역쿠데타를 시도했다. 이후 콘스탄티노스 국왕과 그의 가족은 그리스를 떠났다.
2001년, 동독 비밀경찰 슈타지의 전 요원들은 그리스 조사 기자들에게 냉전 기간 동안 자신들이 카라만리스가 쿠데타를 계획했다고 조작하여 그의 명예를 훼손하려는 허위 정보 선전 캠페인을 조직했다고 주장했다. 이 작전은 카라만리스와 국왕의 바이에른 장교인 슈트라우스(Strauss) 사이의 조작된 대화에 초점을 맞춘 것으로 알려졌다. 그들은 또한 당시 PASOK 성향의 그리스 일간지 아브리아니(Avriani)에 반복적으로 게재되었던 전 신민주주의당 지도자 콘스탄티노스 미초타키스가 제복을 입은 나치 장교 옆에 서 있는 사진이 사실은 불가리아에서 조작된 포토몽타주였다고 주장했다. 그들의 폭로는 현재까지 이의가 제기되지 않고 있다.
5. 제2차 총리 재임 (1974년-1980년)

1974년, 튀르키예의 키프로스 침공은 군사 정권의 붕괴로 이어졌다. 1974년 7월 23일, 파이돈 기지키스(Phaedon Gizikis) 대통령은 파나기오티스 카넬로풀로스, 스피로스 마르케지니스(Spiros Markezinis), 스테파노스 스테파노풀로스(Stephanos Stephanopoulos), 에방겔로스 아베로프 등 구 정치인들과 군 수뇌부 회의를 소집했다. 회의의 목적은 국가 통합 정부를 구성하여 총선을 실시하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전 총리 파나기오티스 카넬로풀로스가 새 임시 정부의 수장으로 제안되었다. 그는 1967년 독재 정권에 의해 축출된 임시 총리이자 파파도풀로스와 그의 후임자를 반복적으로 비판했던 저명한 정치인이었다. 키프로스 북부에서는 여전히 격렬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지만, 그리스인들은 키프로스 전쟁이 에게해 전역으로 확산되기 전에 군사 정권이 권력을 포기하기로 한 결정에 환호하며 모든 주요 도시의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그러나 아테네의 협상은 파나기오티스 카넬로풀로스에게 정부 구성을 제안한 기지키스의 제안으로도 진전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모든 정치인들이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떠난 후, 에방겔로스 아베로프는 회의실에 남아 기지키스와 계속 논의했다. 그는 국내외의 새로운 상황과 위험을 고려할 때 카라만리스만이 성공적인 과도 정부를 이끌 수 있는 유일한 정치적 인물이라고 주장했다. 기지키스와 군 수뇌부는 처음에는 유보적인 태도를 보였지만, 결국 아베로프의 주장에 설득되었다. 참여한 군 지도자들 중 아라파키스(Arapakis) 제독이 카라만리스에 대한 지지를 가장 먼저 표명했다.
아베로프의 결정적인 개입 후, 기지키스는 카라만리스에게 총리직을 맡아달라고 요청했다. 프랑스에 머무는 동안 카라만리스는 1967년 4월 그리스에서 권력을 장악한 군사 독재 정권인 '대령들의 정권'에 대해 강력히 반대했다. 이제 그는 자발적인 망명을 끝내고 민주주의가 처음 발명된 곳인 그리스에 민주주의를 회복하기 위해 소환되었다. 그의 도착 소식에 환호하는 아테네 시민들은 "그가 온다! 그가 온다!"(Έρχεται! Έρχεται!에르헤테! 에르헤테!현대 그리스어 (1453년 이후))를 외치며 거리로 나섰다. 그리스 전역에서도 비슷한 축하 행사가 벌어졌다. 수천 명의 아테네 시민들도 그를 맞이하기 위해 공항으로 향했다. 카라만리스는 임시 대통령 파이돈 기지키스(Phaedon Gizikis) 아래에서 총리로 취임했다. 기지키스는 1974년 12월까지 법적 연속성을 위해 임시로 권력을 유지했으며, 이후 메타폴리티프시 기간 동안 새로운 헌법이 제정되면서 정식으로 선출된 미하일 스타시노풀로스 대통령으로 교체되었다.
5.1. 민주주의 회복 (메타폴리티프시)
메타폴리티프시의 본질적으로 불안정한 첫 몇 주 동안 카라만리스는 새로운 쿠데타의 두려움 때문에 구축함의 감시를 받으며 요트에서 잠을 자야 했다. 카라만리스는 키프로스 위기로 전쟁 직전까지 갔던 그리스와 튀르키예 간의 긴장을 외교적 경로를 통해 해소하려고 시도했다. 그리스 정부를 요르요스 마브로스가 대표했던 두 차례의 제네바 회담은 1974년 8월 14일 튀르키예의 전면적인 침공이나 이후 키프로스 37%의 튀르키예 점령을 막지 못했다. 이에 대한 항의로 카라만리스는 그리스를 NATO의 군사 부문에서 탈퇴시켰고, 1980년까지 복귀하지 않았다.
군사 통치에서 다원적 민주주의로의 확고한 전환 과정은 성공적이었다. 이 메타폴리티프시 전환 기간 동안 카라만리스는 그리스 내전 이후 금지되었던 그리스 공산당(KKE)을 합법화했다. 공산당의 합법화는 많은 이들에게 정치적 포용주의와 화해의 제스처로 여겨졌다. 동시에 그는 모든 정치범을 석방하고 군사 정권에 반대하는 모든 정치적 범죄를 사면했다. 그는 또한 화해라는 주제를 이어가면서, 독재 정권 협력자와 임명직 공무원들을 정부 관료제 내에서 제거하는 데 신중한 접근 방식을 채택했으며, 대령들의 정권 붕괴 4개월 후인 1974년 11월에 자유 선거를 실시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5.2. 신민주주의당 창당 및 선거 승리
골주의 원칙에 영향을 받아 카라만리스는 보수 정당인 신민주주의당을 창당했으며, 1974년 총선에서 기록적인 54.4%의 승리(현대 그리스 역사상 가장 큰 선거 승리)를 거두며 압도적인 의회 다수석을 확보하고 총리로 선출되었다.
5.3. 제3차 그리스 공화국 수립
총선 직후 1974년 국민투표를 통해 왕정을 폐지하고 그리스 공화국을 수립했다. 또한 1975년에는 전 독재자들에 대한 TV 중계 재판(그리스 군사 정권 재판)이 진행되었는데, 이들은 반역 및 반란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나중에 종신형으로 감형되었다. 그리고 새로운 헌법이 제정되었다. 군사 정권에 대한 성공적인 기소와 주범들에게 부과된 중형은 군대에 군사적 헌법 위반에 대한 면책 시대가 끝났다는 메시지를 전달했다.
1977년에는 신민주주의당이 다시 선거에서 승리했고, 카라만리스는 1980년까지 총리직을 계속 수행했다。 그의 정부의 대외 정책은 전후 처음으로 미국, 소련, 제3세계 간의 다극적 접근 방식을 선호했으며, 이는 그의 후임자인 안드레아스 파판드레우에 의해서도 계속되었다.
카라만리스 총리 재임 기간 동안 그의 정부는 은행 및 운송을 포함한 여러 부문에서 수많은 국유화를 단행했다. 대규모 국영 부문을 육성한 카라만리스의 경제 국가주의 정책은 많은 이들에게 '사회 광증(socialmania)'으로 묘사되기도 했다.
5.4. 유럽 경제 공동체(EEC) 가입

메타폴리티프시 기간 동안 그리스로 돌아온 직후 카라만리스는 1975년 정치적, 경제적 이유를 들어 그리스의 EEC 정식 회원국 가입을 위한 노력을 재개했다. 카라만리스는 그리스의 EEC 가입이 독재에서 민주주의로 막 전환된 국가의 정치적 안정성을 보장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1979년 5월, 그는 정식 가입 조약에 서명했다. 그리스는 1981년 1월 1일 EEC의 10번째 회원국이 되었는데, 이는 원래 의정서가 예상했던 것보다 3년 빠른 것이었으며, 군사 정권(1967~1974) 기간 동안 가입 조약이 동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루어진 성과였다.
6. 대통령 재임 (1980년-1985년, 1990년-1995년)
1979년 유럽 경제 공동체(현재의 유럽 연합)와의 가입 조약에 서명한 후, 카라만리스는 총리직을 사임하고 1980년 의회에 의해 공화국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1981년에는 그리스가 10번째 회원국으로 유럽 경제 공동체에 공식적으로 가입하는 과정을 감독했다. 그는 1985년까지 재임한 후 사임했으며, 안드레아스 파판드레우의 논란이 많은 절차로 인해 흐리스토스 사르체타키스가 그의 뒤를 이었고, 이는 1985년 그리스 헌법 위기를 야기했다. 1989년 정치 위기 당시 파판드레우의 두 번째 임기 말 상황을 묘사하며 "그리스는 끝없는 혼란에 빠졌다"는 그의 발언은 유명해졌다.
1990년에는 보수 의회 다수당(당시 총리 콘스탄티노스 미초타키스의 보수 정부 하)에 의해 다시 대통령으로 재선되었으며, 1995년 코스티스 스테파노풀로스가 그의 뒤를 이을 때까지 재임했다.
7. 말년 및 사망
카라만리스는 1995년 88세의 나이로 정계에서 은퇴했다. 그는 5번의 총선에서 승리했으며, 총리로서 14년, 공화국 대통령으로서 10년을 포함하여 총 60년 이상을 현역 정치에 몸담았다. 민주주의에 대한 오랜 봉사와 유럽 연합 초기 단계부터 유럽 통합의 선구자로서의 공로를 인정받아, 카라만리스는 1978년 유럽에서 가장 권위 있는 상 중 하나인 카롤루스 대제상을 수상했다. 그는 자신이 설립하고 기부한 보수 성향의 싱크탱크인 콘스탄티노스 카라만리스 재단에 자신의 기록물을 기증했다.
카라만리스는 1998년 91세의 나이로 짧은 투병 끝에 사망했다.
8. 평가 및 영향
8.1. 긍정적 평가
카라만리스는 1955년부터 1963년까지 그리스의 빠른 경제 성장을 주도했으며, 유럽 연합 가입을 성공적으로 이끈 주요 설계자로 칭송받고 있다. 그의 지지자들은 그를 카리스마 넘치는 '민족 지도자'(Ethnarches에트나르헤스현대 그리스어 (1453년 이후))로 추앙했다.
그는 메타폴리티프시 기간 동안 민주주의를 성공적으로 회복하고, 공산당을 합법화하며 그리스에 의원내각제 민주주의 시스템을 확립함으로써 두 가지 큰 국가적 분열을 치유한 공로를 인정받고 있다. 군사 정권 재판에서 군사 정권 주범들을 성공적으로 기소하고 중형을 부과함으로써, 군대의 헌법 위반에 대한 면책 시대가 끝났다는 메시지를 군대에 전달했다. 카라만리스의 유럽 통합 정책은 그리스와 미국 간의 가부장적 관계를 종식시킨 것으로도 평가받고 있다.
8.2. 비판 및 논란
카라만리스는 1950년대 후반부터 키프로스 문제에 대한 그의 입장에 대해 심한 비판을 받아왔다. 그는 마카리오스 3세가 취리히-런던 협정에 서명하도록 강요했는데, 만약 서명하지 않으면 그리스계 키프로스인에 대한 그리스의 정치적 지원을 철회하겠다고 위협했다. 1974년 여름 튀르키예의 키프로스 침공과 메타폴리티프시 기간 동안, 그는 당시 키프로스 대통령 대행이었던 글라프코스 클레리데스의 군사 지원 요청을 단호히 거부하며 "키프로스는 멀리 떨어져 있다"(Η Κύπρος κείται μακράν이 키프로스 키테 마크란현대 그리스어 (1453년 이후))는 유명한 발언을 남겼다. 키프로스가 그리스로부터 받은 유일한 군사 지원은 군사 정권 말기에 그리스 특공대가 '니키 작전'(Operation Niki오퍼레이션 니키영어)이라는 암호명으로 수행한 것이었으며, 이는 키프로스가 너무 멀다는 주장을 반박하는 근거가 되기도 했다. 카라만리스는 디미트리오스 이오아니디스가 명령했을 때 키프로스를 돕기를 거부했던 군 수뇌부(보나노스, 기지키스, 아라파키스 등)를 기소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마카리오스에 대한 키프로스 쿠데타에서의 그들의 역할을 묵살하고 군대 내 요직에 그대로 유지시켰다.
일부 좌파 반대자들은 그가 우익 '준국가(para-statal)' 단체들을 묵인했다고 비난했다. 이 단체들은 국민급진연합과 파판드레우의 중앙연합 간의 선거 경쟁에서 '폭력과 부패'(Via kai Notheia비아 카이 노티아현대 그리스어 (1453년 이후), 즉 부정행위)를 저질렀고, 그리골리스 람브라키스 암살의 책임이 있었다. 카라만리스의 일부 보수 반대자들은 1970년대 그의 사회주의적 경제 정책을 비판했는데, 여기에는 올림픽 항공과 엠포리키 은행의 국유화, 그리고 대규모 공공 부문 창설이 포함되었다. 카라만리스는 또한 1974년 키프로스 문제 관리에서 우유부단했다는 비판을 앙게 S. 블라호스(Ange S. Vlachos)로부터 받았지만, 그가 당시 튀르키예와의 전면전을 능숙하게 피했다는 점은 널리 인정되고 있다.
9. 사생활
카라만리스는 1951년 저명한 정치인 파나기오티스 카넬로풀로스의 조카인 아마리아 메가파누 카넬로풀루(Amalia Megapanou Kanellopoulou, 1929년 ~ 2020년)와 결혼했다. 그들은 1972년 파리에서 이혼했으며, 자녀는 없었다. 카라만리스는 평생 자녀가 없었다.
10. 기념 및 추모
2005년 6월 29일, 헤로데스 아티쿠스 음악당에서 콘스탄티노스 카라만리스의 그리스 문화에 대한 공헌을 기리는 시청각 추모 행사가 열렸다. 요르요스 레몬도스(George Remoundos)가 무대 감독을 맡았고, 스타브로스 사르하코스(Stavros Xarhakos)가 음악을 지휘하고 선정했다. '문화적 기억'이라는 제목의 이 행사는 콘스탄티노스 G. 카라만리스 재단이 주최했다. 2007년에는 그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여러 행사가 개최되었다.
11. 관련 항목
- 현대 그리스의 역사
- 그리스의 대통령 목록
- 그리스의 정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