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초기 생애와 배경
카지미에시 2세는 1138년 폴란드 공작 볼레스와프 3세와 그의 두 번째 아내 베르크의 잘로메아 사이에서 여섯 번째이자 살아남은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출생은 아버지 볼레스와프 3세의 사망일과 같은 날 이루어졌거나 직후에 이루어졌기 때문에 사실상 유복자로 태어난 것으로 여겨진다.
1.1. 출생과 유년기
카지미에시 2세는 1138년에 태어났으며, 그의 아버지 볼레스와프 3세가 작성한 유언장에 언급되지 않아 상속받을 영지를 전혀 가지지 못했다. 유년기에는 누나 폴란드의 아그네스와 함께 어머니 잘로메아가 과부로서 받은 영지인 웽치차에서 살았다. 이 시기 어린 카지미에시는 이복형 브와디스와프 2세가 자신의 아버지 유언을 거스르고 폴란드 전체를 재통합하려 시도하며 형제들인 볼레스와프 4세 및 미에슈코 3세와 벌였던 분쟁에서 벗어나 안전하게 지냈다. 브와디스와프 2세는 결국 1146년에 추방되었다.
1.2. 초기 고난과 정치적 경험
1144년에 어머니 잘로메아가 사망한 후, 카지미에시와 아그네스는 두 해 뒤 고공 작위를 계승한 형 볼레스와프 4세의 보살핌을 받았다. 어린 공작은 그의 후견 하에 안전하다고 느낄 수 있었지만, 미래에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을 유산의 일부를 받을 것이라는 보장은 없었다. 1151년 그가 가족 영지의 일부를 통제할 수 있는 적절한 나이(당시 13세)에 도달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아무것도 소유하지 못했다. 3년 후인 1157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바르바로사의 성공적인 폴란드 원정으로 그의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바르바로사는 브와디스와프 2세와 그의 아들들을 돕기 위해 왔고, 볼레스와프 4세는 바르바로사와 굴욕적인 조약을 맺어야 했다. 이 조약의 일환으로 카지미에시는 형의 황제에 대한 충성을 보장하기 위해 독일로 인질로 보내졌다. 제국 궁정에서의 카지미에시의 행방은 알려져 있지 않지만, 그는 1161년 5월 21일 이전에 폴란드로 돌아왔음이 분명하다. 이 날짜에 그는 형 볼레스와프 4세와 산도미에시의 헨리크와 함께 문서에 언급되어 있다.
2. 공작 권력으로의 부상
카지미에시 2세는 형 헨리크의 사망 후 산도미에시 공작령을 상속받는 과정에서 볼레스와프 4세에 의해 공작령이 분할되자 이에 반발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이 반란은 부분적인 성공을 거두어 그가 비실리차를 확보하게 했고, 이후 미에슈코 3세에 대항하는 귀족들의 지지를 받아 크라쿠프를 장악하고 고공 칭호를 획득하며 폴란드의 최고 권력자로 등극했다.
2.1. 비실리차 및 산도미에시 공작
1166년, 카지미에시의 형인 산도미에시의 헨리크는 프로이센 십자군 원정 중 전투에서 사망했다. 그는 자식 없이 사망하면서 자신의 유언에서 카지미에시를 소폴란드의 산도미에시 공국의 유일한 상속자로 지명했다. 그러나 당시 고공이던 볼레스와프 4세는 공작령을 세 부분으로 나누기로 결정했다. 가장 큰 부분(수도 산도미에시 포함)은 자신이 가지고, 두 번째 부분은 미에슈코 3세에게 주었으며, 카지미에시에게는 세 번째 부분인 작은 비실리차 지역만을 주었다.
고공의 결정에 분노하고 실망한 카지미에시는 형 미에슈코 3세, 거물급 귀족인 미에후프의 약사, 피오트르 브워스토비츠의 아들 스뱌토슬라프, 그니에즈노 대교구의 얀 대주교, 크라쿠프 대교구의 게드코 주교의 지지를 받아 볼레스와프 4세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카지미에시는 거의 모든 소폴란드의 지지도 받았다. 볼레스와프 4세의 신속한 조치로 반란은 진압되었고, 결국 카지미에시는 비실리차만을 유지할 수 있었다. 1172년, 미에슈코 3세는 다시 고공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키고, 어린 동생에게 자신과 합류하도록 설득하려 했다。 알 수 없는 이유로 카지미에시는 이번에는 참여를 거부했다.
볼레스와프 4세는 1173년에 사망했으며, 장자 상속 원칙에 따라 가장 나이 많은 생존 형제인 미에슈코 3세가 고공을 계승했다. 미에슈코는 산도미에시 공작령 전체를 카지미에시에게 주기로 결정했고, 그리하여 카지미에시는 마침내 그의 사망한 형이 불법적으로 빼앗았던 공작 작위를 되찾게 되었다.
2.2. 미에슈코 3세 전복 및 고공 등극
새로운 고공 미에슈코 3세의 강력하고 독재적인 통치는 소폴란드 귀족들 사이에 깊은 불만을 초래했다. 1177년에 발생한 새로운 반란은 이번에는 실질적인 승리 가능성을 가지고 있었다. 이 반란에는 거물급 귀족들 외에도 크라쿠프의 게드코 주교, 미에슈코의 장남 포즈난의 오돈, 전 고공 브와디스와프 2세의 아들인 실레시아 공국의 볼레스와프 1세 톨 공작, 그리고 카지미에시가 참여했다. 미에슈코와 화해한 후에도 카지미에시가 이 반란에 포함된 이유는 알려져 있지 않다.
새로운 지도력을 위한 싸움은 다소 특이한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자신의 대폴란드 공국에서 반란군에게 완전히 기습당한 미에슈코 3세는 포즈난으로 후퇴하여 거의 2년 동안 아들 오돈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마침내 그는 패배하여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볼레스와프 1세 톨 공작은 자신도 동생 미에슈코 1세 플로토노기와 자신의 아들 오폴레의 야로스와프와의 실레시아 내분으로 곤경에 처해 있었기 때문에, 크라쿠프와 고공령을 정복하는 데 실패했다. 곧 패배한 그는 카지미에시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실레시아에서의 성공적인 작전 후, 카지미에시는 크라쿠프로 진군하여 빠르게 점령했다。이제 크라쿠프 공작이 된 카지미에시는 볼레스와프 1세 톨이 브로츠와프의 하부 실레시아에 대한 완전한 권한을 얻는 대신, 카지미에시가 비톰, 오시비엥침, 프슈치나의 소폴란드 지역을 당시 퇴위된 미에슈코 1세 플로토노기의 유일한 아들이자 카지미에시의 대자인 오폴레의 카지미에시 1세에게 선물로 주는 조약을 체결하기로 결정했다.
3. 폴란드 고공 통치
고공으로서 카지미에시 2세의 통치 기간은 자신의 권력 공고화와 미에슈코 3세와의 지속적인 갈등으로 특징지어졌다. 그는 웽치차 의회를 통해 폴란드의 왕권 강화를 시도했지만, 영토 상실과 재탈환을 겪으며 내부적인 불안정에 직면하기도 했다. 동시에 그는 이웃 루스 공국들과 신성 로마 제국, 헝가리와의 외교 및 군사적 개입을 통해 외부 영향력을 확대하려 노력했다.
3.1. 권력 공고화와 웽치차 의회
1177년 고공 미에슈코 3세에 대한 반란은 카지미에시에게 완벽한 성공이었다. 그는 크라쿠프(시에라츠와 웽치차 지역 포함)를 정복하여 고공 작위를 얻었을 뿐만 아니라, 폴란드 군주로서 실레시아(당시 브와디스와프 2세의 세 아들인 볼레스와프 1세 톨, 미에슈코 1세 플로토노기, 콘라트 스핀들샹크와 볼레스와프의 아들 오폴레의 야로스와프 사이에 분할됨), 대폴란드(포즈난의 오돈이 통치), 그리고 마조프셰와 쿠야비(마조프셰의 레셰크 공작이 통치하며 당시 미성년자로서 어머니와 카지미에시의 추종자 중 한 명인 보이보드 지로나의 후견을 받음)에 대한 주권을 확장하는 데 성공했다. 발트해 연안의 포메렐리아(그단스크 포메른)는 삼보르 1세 공작이 폴란드 봉신으로서 통치했다.

그러나 미에슈코 3세는 자신의 복귀를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했으며, 처음에는 보헤미아, 나중에는 독일과 포메른 공국에서 활동했다. 카지미에시는 자신의 야망을 달성하고 크라쿠프 왕위(그리고 이와 함께 고공령)에 대한 세습권을 후손들에게 물려주기 위해 1180년 웽치차에서 폴란드 귀족 회의를 소집했다. 그는 귀족과 교회 양쪽에 특권을 부여하여, 성직자들의 소득에 대한 세금을 폐지하고 사망한 주교들의 토지에 대한 자신의 권리를 포기했다. 이러한 행동들을 통해 그는 크라쿠프에 대한 세습 계승 원칙의 승인을 얻어냈지만, 폴란드 왕권을 회복하기까지는 1세기 이상이 더 걸렸다.
3.2. 내부 갈등 및 영토 변화
1181년 상반기(웽치차 의회 개최 후 1년도 채 되지 않아), 미에슈코 3세는 포메렐리아의 메스트빈 1세 공작의 도움을 받아 대폴란드 동부 지역인 그니에즈노와 칼리시를 정복했으며, 아들 오돈을 설득하여 자신에게 복종하도록 만들었다. (일부 역사학자에 따르면, 오돈은 이후 아버지로부터 오브라강 남쪽의 대폴란드 영토를 받았다.) 같은 시기, 마조프셰의 레셰크 공작은 카지미에시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기로 결정했다. 그는 미에슈코 3세의 아들 미에슈코 영거를 마조프셰와 쿠야비의 통치자로 임명하여, 이 영토들의 계승에 대한 묵시적인 약속을 했다.
알려지지 않은 이유로 카지미에시는 이러한 사건들에 반응하지 않고, 오직 소폴란드에 대한 자신의 권한을 확보하는 데 집중하기로 결정했다. 1184년 프리드리히 바르바로사 황제의 궁정에서 외교 회담이 열렸는데, 카지미에시는 미에슈코 3세의 행동을 저지하고 폴란드 고공으로서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바르바로사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막대한 공물을 바쳤다.
1186년, 마조프셰의 레셰크 공작이 사망했다. 병약했던 레셰크 공작은 사망 전에 자신의 모든 영토를 고공 카지미에시에게 넘겨주기로 결정했다. 레셰크는 이전에 그의 나이 많은 삼촌 미에슈코 3세에게 상속을 약속했었으나, 미에슈코의 독재적인 처사로 인해 레셰크는 마음을 바꾸어 카지미에시에게 유리하게 결정했다. 그러나 레셰크의 사망 직후, 미에슈코 3세는 비스와강까지의 쿠야비 영토를 점령했고, 카지미에시는 마조프셰 본토만을 점유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조프셰 상속 덕분에 카지미에시는 폴란드 영토의 상당 부분을 직접 통치하게 되었다.
카지미에시가 루스 문제에 개입한 틈을 타, 1191년 미에슈코 3세는 크라쿠프의 바벨 성을 장악하고 고공 작위와 고공령에 대한 통제권을 탈취하는 데 성공했다. 그는 즉시 크라쿠프를 자신의 후손들을 위한 세습 봉토로 선언하고, 아들 미에슈코 영거를 통치자로 임명했다. 이 분쟁은 평화롭게 끝났는데, 카지미에시는 루스에서 돌아오자마자 싸움 없이 수도를 되찾았고, 미에슈코 영거는 아버지에게로 도망쳤다.
3.3. 외교 정책 및 개입
카지미에시의 통치 기간 동안 가장 중요한 사안은 형 미에슈코 3세와의 갈등 외에도 동쪽에 있는 이웃 키예프 루스 공국들에 대한 외교 정책이었다. 고공으로서 그에게 주어진 첫 번째 과제는 이전 고공들이 키예프 공주들과의 결혼(브와디스와프 4세는 노브고로드의 뱌체슬라바와, 미에슈코 3세는 키예프의 에우독시아와 결혼)을 통해 강하게 연관되어 있었던 키예프의 류리크 왕조 대공들과 유대를 형성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1178년 11월, 카지미에시는 자신의 딸 마리아(결혼 후 아나스타시아로 개명했을 가능성 있음)와 키예프의 프세볼로트 4세 공작의 결혼을 주선했다.
3.3.1. 키예프 루스와의 관계
그의 첫 주요 키예프 루스 문제 개입은 1180년에 일어났다. 이때 고공은 볼히니아의 볼로디미르 지역을 둘러싼 슘스크와 도로히친의 바실코 공작(고 볼레스와프 4세의 사위)과 조카 마조프셰의 레셰크가 민스크의 블라디미르와 벌인 분쟁에서 바실코를 지원했다. 이 전쟁은 블라디미르의 성공으로 끝났으며, 그는 볼로디미르와 브레스트를 정복했고, 바실코는 드로히친에서 자신의 영지를 유지했다.
그러나 이 전쟁으로 인해 브레스트의 통치 문제는 최종적으로 해결되지 않았다. 브레스트는 바실코의 사촌이자 카지미에시의 조카(누나 폴란드의 아그네스의 의붓아들)인 스뱌토슬라프 므스티슬라비치 공작에게 봉토로 주어졌다. 1182년에 스뱌토슬라프의 통치에 대한 반란이 발생했으나, 카지미에시의 개입 덕분에 그는 왕위에 복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지미에시는 상황이 불안정하다고 판단하여 결국 스뱌토슬라프의 이복동생인 로만에게 권력을 넘겨주기로 결정했다.
1187년, 할리치 공국의 야로슬라프 오스모미슬 공작이 사망하면서 그의 계승을 둘러싼 오랜 싸움이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그의 어린 사생아 올레그가 공국의 권한을 차지했지만, 그는 곧 보야르들에 의해 살해되었다. 그 후 할리치는 야로슬라프의 장남 블라디미르코에게 넘어갔다. 블라디미르코의 통치 역시 불안정했으며, 브레스트의 로만 공작은 이 상황을 이용하여 삼촌 카지미에시의 도움을 받아 그를 폐위시키고 할리치에 대한 완전한 통제권을 장악했다.
패배한 블라디미르코는 헝가리 왕국의 벨러 3세 국왕(그의 친척, 블라디미르코의 친할머니는 헝가리 공주였다)의 보호를 받기 위해 도피했고, 벨러 3세는 자신의 군대를 할리치로 보내기로 결정했다. 로만은 크라쿠프로 도망쳤고, 블라디미르코는 복수심에 소폴란드를 침공했다. 그러나 벨러 3세 국왕은 곧 할리치를 헝가리에 편입시키기로 결정하고 블라디미르코를 다시 폐위시킨 후 자신의 아들 언드라시 2세로 할리치 공작을 대체했다. 전쟁은 2년 더 계속되었는데, 프리드리히 바르바로사 황제의 지시에 따라 카지미에시가 블라디미르코의 할리치 통치권을 복구시켰다. 바르바로사 황제는 블라디미르코가 자신을 신하라고 선언하자 그를 돕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3.3.2. 신성 로마 제국 및 헝가리 왕국과의 외교 관계
카지미에시 2세는 1184년 프리드리히 바르바로사 황제의 궁정에서 열린 외교 회담에서 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막대한 공물을 바쳤다. 이는 미에슈코 3세의 복위 시도를 저지하고 폴란드 고공으로서의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려는 목적에서 이루어졌다.
또한 그는 할리치 공국의 계승 분쟁에서 헝가리 왕국과 얽히게 되었다. 야로슬라프 오스모미슬 공작 사망 후, 블라디미르코가 할리치를 차지했으나, 카지미에시의 조카 로만이 그를 폐위시켰다. 블라디미르코는 헝가리 왕 벨러 3세에게 피신했고, 벨러 3세는 할리치에 군대를 파견했다. 로만이 크라쿠프로 도망치자 블라디미르코는 소폴란드를 침공하며 보복했다. 이후 벨러 3세는 할리치를 헝가리에 편입시키고 자신의 아들 언드라시 2세를 할리치 공작으로 임명했다. 카지미에시는 프리드리히 바르바로사 황제의 지시를 받아 블라디미르코의 할리치 통치권을 회복시키며 이 분쟁에 개입했다.
3.4. 교회와의 관계
카지미에시의 통치 기간 동안 그는 교회에 매우 관대했으며, 특히 원추회의 수도원들인 봉호츠크, 옝제유프, 코프시프니차, 술레유프에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또한 미에후프의 예루살렘 성묘 기사단 수도회 소속 정규 참사회원, 체르빈스크 나트 비스와와 트셰메슈노의 정규 참사회원, 그리고 자고시치의 구호기사단에도 관대했다. 그는 또한 성 플로리안의 숭배를 확대하려고 노력했으며, 그의 유해는 게드코 주교에 의해 크라쿠프로 옮겨졌다.
3.5. 대학 설립 계획
카지미에시 2세는 크라쿠프에 대학을 설립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미 건물 건축을 시작했다. 그러나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인해 그의 계획은 좌절되었다. 현재의 야기에우워 대학교는 1364년에 카지미에시 3세 국왕에 의해 프라하 카렐 대학교에 이어 중앙 및 동유럽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대학으로 설립되었다.
4. 개인 생활과 가족
카지미에시 2세는 즈노이모의 헬레나와 결혼하여 여러 자녀를 두었다. 그의 가족 관계는 피아스트 왕조의 마조프셰 분파를 형성하는 중요한 기반이 되었으며, 그의 후손들은 훗날 폴란드 역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
4.1. 결혼과 자녀
카지미에시는 1160년과 1165년 사이(늦어도 1166년 이전)에 즈노이모의 헬레나 (1140년/1142년경 - 1202년/1206년경)와 결혼했다. 헬레나는 즈노이모의 공작 즈노이모의 콘라트 2세의 딸로, 프셰미슬 왕조의 모라비아 분파 출신이었다. 그들은 일곱 명의 자녀를 두었다:
- 마리아 (결혼 후 아나스타시아로 개명) (1167년 이전 출생) - 1178년 10월 11일에서 12월 24일 사이에 키예프의 프세볼로트 4세 공작과 결혼.
- 카지미에시 (1162년경 출생 - 1167년 2월 2일 또는 3월 1일 사망) -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명명됨.
- 볼레스와프 (1168년/1171년경 출생 - 1182년/1183년 4월 16일 사망) - 아마도 친할아버지인 볼레스와프 3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거나, 삼촌 볼레스와프 4세를 기리기 위함일 수 있다. 나무에서 떨어져 사고로 사망했다. 그는 아마 바벨 대성당에 묻혔을 것이다.
- 오돈 (1169년/1184년 출생 - 유아기 사망) - 아마도 포즈난의 오돈 또는 클뤼니의 오도 성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을 것이다.
- 폴란드의 아델라이드 (1177년/1184년경 출생 - 1211년 12월 8일 사망) - 산도미에시의 성 야고보 수녀원 설립자.
- 레셰크 1세 (1184년/1185년경 출생 - 1227년 11월 24일 사망).
- 마조프셰의 콘라트 1세 (1187년/1188년경 출생 - 1247년 8월 31일 사망).
4.2. 혈통
카지미에시 2세 정의공의 혈통은 다음과 같다:
번호 | 이름 | 관계 |
---|---|---|
1. | 카지미에시 2세 정의공 | |
2. | 볼레스와프 3세 | 아버지 |
3. | 잘로메아 | 어머니 |
4. | 브와디스와프 1세 헤르만 | 친할아버지 |
5. | 보헤미아의 유디트 | 친할머니 |
6. | 베르크의 헨리크 백작 | 외할아버지 |
7. | 모헨탈의 아델라이드 | 외할머니 |
8. | 카지미에시 1세 | 증조할아버지 |
9. | 키예프의 마리아 도로니예가 | 증조할머니 |
10. | 브라티슬라프 2세 | 증조할아버지 |
11. | 헝가리의 아델라이드 | 증조할머니 |
12. | 베르크의 포포 백작 | 외증조할아버지 |
13. | 소피아 | 외증조할머니 |
14. | 참의 디에폴트 2세 백작 | 외증조할아버지 |
15. | 재링엔의 리우트가르데 | 외증조할머니 |
16. | 미에슈코 2세 | 고조할아버지 |
17. | 로타링기아의 리헤자 | 고조할머니 |
18. | 블라디미르 1세 | 고조할아버지 |
20. | 보헤미아의 브르제티슬라프 1세 | 6대조 |
21. | 슈바인푸르트의 유디트 | 6대조 |
22. | 언드라시 1세 | 6대조 |
23. | 키예프의 아나스타시아 | 6대조 |
28. | 참-포흐부르크의 디에폴트 1세 변경백 | 6대조 |
30. | 케른텐의 베르톨트 1세 | 6대조 |
5. 사망
1194년 초, 카지미에시 2세는 발트해 연안의 요트빙인에 대한 원정을 조직했다. 이 원정은 완벽한 성공으로 끝났고, 카지미에시는 크라쿠프로 개선했다. 개선을 축하하는 연회 후, 카지미에시는 1194년 5월 5일에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일부 역사학자들은 그가 독살되었다고 믿었다. 그는 고공으로서 자신의 뒤를 이어 장남 레셰크 1세가 계승했는데, 레셰크 또한 아버지처럼 미에슈코 3세의 강력한 반대에 직면해야 했다. 카지미에시는 아마도 바벨 대성당에 묻혔을 것으로 추정된다.
6. 유산과 역사적 평가
카지미에시 2세 정의공은 폴란드의 분열기에 고공령의 안정화에 기여하고 마조프셰 피아스트 가문의 시조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의 통치는 내부 갈등과 외부 개입 속에서도 폴란드 국가의 연속성을 유지하려는 노력을 보여주었다.
6.1. "정의공" 칭호
카지미에시 2세에게 붙여진 존칭인 "정의공"(Sprawiedliwy폴란드어)은 동시대에 사용된 것이 아니며, 16세기에 처음으로 등장했다. 이 칭호는 그의 통치 기간 동안 보여준 공정성과 개혁적 노력에 대한 후대인들의 평가를 반영하는 것으로 보인다.
6.2. 공헌과 영향
카지미에시 2세는 피아스트 왕조의 마조프셰 분파의 시조로서 중요한 역사적 인물이 되었다. 그의 통치 기간 동안 그는 폴란드 고공국의 안정을 위해 노력했으며, 웽치차 의회를 통해 귀족과 교회에 특권을 부여하고 크라쿠프 왕위의 세습 원칙을 확립하려 시도하는 등 왕권 강화의 기반을 다졌다. 비록 그의 시대에 폴란드 왕권이 완전히 회복되지는 못했지만, 그의 노력은 훗날 폴란드 왕국의 재통합과 야기에우워 대학교 설립 계획과 같은 문화적 발전에 영향을 미쳤다. 그는 또한 주변 루스 공국들과의 외교 및 군사적 개입을 통해 폴란드의 국제적 위상을 높이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