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어린 시절과 배경
1.1. 출생과 가족
카림 압둘자바는 1947년 4월 16일 뉴욕시 할렘에서 페르디난드 루이스 앨신더 주니어(Ferdinand Lewis Alcindor Jr.)라는 이름으로 태어났다. 그는 백화점 가격 확인원인 코라 릴리언과 대중교통 경찰관이자 재즈 음악가인 페르디난드 루이스 앨신더 시니어의 외동아들이었다. 그의 어머니 코라는 노스캐롤라이나주에서 태어나 대이동의 일환으로 할렘에 왔다. 그의 아버지 페르디난드 시니어는 트리니다드 이민자의 아들이었으며, 그의 삼촌은 흑인 활동가이자 의학 개척자인 존 앨신더 박사였다.
1.2. 어린 시절의 환경과 영향
앨신더는 1950년 3세 때 이사한 어퍼 맨해튼의 인우드 지역에 있는 딕맨 스트리트 프로젝트에서 성장했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남들보다 훨씬 컸는데, 출생 시 체중은 0.3 kg (12 oz)였고 키는 0.6 m (22.5 in)였다. 9세에는 이미 0.1 m (5 in)에 달했고, 8학년(13~14세)에는 0.2 m (6 in)까지 자라 이미 슬램덩크를 할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의 큰 키 때문에 또래들의 시선과 언급으로 인해 십대 시절 종종 우울함을 느꼈다.
그는 사립 남학교인 가톨릭 고등학교인 파워 메모리얼 아카데미에 다녔는데, 그곳에서는 몇 안 되는 흑인 학생 중 한 명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그에게 어린 시절부터 책을 사랑하는 마음을 심어주었다. 1964년 15세 흑인 소년 제임스 파월이 뉴욕 경찰관의 총에 맞아 사망한 사건으로 촉발된 1964년 할렘 폭동은 앨신더의 인종 정치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그때부터 나는 내가 누구인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 알았다. 나는 흑인의 분노를 의인화한 존재, 육화된 흑인 권력이 될 것이었다"고 말했다.
2. 고등학교 경력
앨신더는 파워 메모리얼 아카데미에서 잭 도노휴 감독의 팀을 3년 연속 뉴욕시 가톨릭 챔피언십으로 이끌었으며, 71연승과 79승 2패의 전체 기록을 달성했다. 이로 인해 그는 "파워의 탑(The Tower from Power)"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의 총 2,067점은 뉴욕시 고등학교 기록이었다. 팀은 앨신더가 10학년과 11학년일 때 전국 고등학교 남자 농구 챔피언십에서 우승했고, 3학년 때는 준우승을 차지했다. 그는 마지막 학년에 도노휴 감독이 자신을 '니거'라고 부른 후 감독과 불편한 관계를 겪었다.
앨신더와 파워 메모리얼 아카데미가 겪은 유일한 패배는 메릴랜드에서 모건 우튼(농구 명예의 전당 헌액자)이 코치하는 드마타 가톨릭 고등학교와의 72경기 중 46-43으로 패한 경기였다. 이 패배는 3년 만의 첫 패배였다. 앨신더는 1965년 파워 메모리얼 아카데미에서 3년 연속 우승과 72승 1패의 기록, 2,067점과 2,002리바운드(모두 뉴욕 기록)를 남기고 경력을 마쳤다. 17세에 앨신더는 키가 2.1 m (7 ft)에 달했고, "고등학교 센세이션"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는 올아메리카 고등학교 팀에 선정되었고, 그의 모습은 전국 잡지에 실렸다.
3. 대학 경력

앨신더는 고등학교 졸업 후 바로 NBA에서 프로로 뛸 수 없었다. 당시 리그는 대학을 졸업했을 것으로 가정되는 해부터 선수들을 받아들였다. 그가 프로 농구를 할 수 있는 다른 선택지는 할렘 글로브트로터스에 합류하거나 해외에서 뛰는 것이었지만, 앨신더의 목표는 대학에 진학하는 것이었다. 윌트 체임벌린 이후 가장 인기 있는 유망주였던 그는 수백 개의 학교로부터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다. 미국 남부의 인종차별이 심했던 팀들도 앨신더를 영입하기 위해 인종의 벽을 허물 의향이 있었다. 그는 브루인스의 제리 노먼 보조 코치의 스카우트를 받은 후 캘리포니아 대학교 로스앤젤레스에 진학하기로 결정했다.
3.1. UCLA에서의 활약
키가 0.2 m (7 in)에 달했던 앨신더는 1972년까지 신입생이 정식 팀에서 뛸 수 없었기 때문에 브루인스에서의 첫 해에는 신입생 팀에 배정되었다. 신입생 팀에는 동료 고등학교 올아메리칸 선수인 루시우스 앨런, 케니 헤이츠, 린 셰켈포드 등이 있었다. 1965년 11월 27일, 앨신더는 브루인스의 새로운 폴리 파빌리온에서 열린 연례 정식 팀 대 신입생 팀 시범 경기에서 첫 공개 경기를 가졌는데, 12,051명의 팬이 참석했다. 1965-66년도 정식 팀은 2년 연속 전국 챔피언이었고 프리시즌 여론 조사에서 1위를 차지한 팀이었다. 신입생 팀은 앨신더의 31점과 21리바운드에 힘입어 75-60으로 승리했다. 신입생 팀이 UCLA 정식 팀을 이긴 것은 처음이었다. 정식 팀은 챔피언십 팀에서 게일 구드리치와 키스 에릭슨이 졸업했고, 주전 가드 프레디 고스는 병으로 결장했다. 경기 후 UPI는 "UCLA 브루인스가 이번 주 전국 농구 타이틀 방어전을 시작하지만, 지금은 캠퍼스에서 두 번째로 좋은 팀일 뿐이다"라고 보도했다. 신입생 팀은 그해 21승 0패를 기록하며 주니어 칼리지와 다른 신입생 팀들을 압도했고, 앨신더는 경기당 33점과 21리바운드를 기록했다.
앨신더는 1966년 2학년으로 정식 팀에 데뷔했으며 전국적인 주목을 받았다.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는 그가 첫 경기에서 56점을 기록하여 게일 구드리치가 보유하고 있던 UCLA 단일 경기 기록을 깬 후 그를 "새로운 슈퍼스타"라고 묘사했다. 그는 시즌 후반에 61점을 기록하기도 했다. 경기당 29점과 15.5리바운드를 기록하며 UCLA를 30승 0패의 무패 기록과 전국 챔피언십으로 이끌었다. 이는 4년 만에 세 번째 우승이자 7년 연속 우승의 첫 시작이었다.
3.2. NCAA에서의 지배력과 수상
시즌 후, 덩크 슛은 그의 지배력을 억제하려는 시도로 대학 농구에서 금지되었고, 비평가들은 이를 "앨신더 룰"이라고 불렀다. 이 규칙은 1976-77 시즌까지 해제되지 않았다. 앨신더는 팀의 88승 2패 기록에 주요 기여를 했다. 두 번의 패배 중 하나는 휴스턴 대학교와의 경기였는데, 앨신더가 눈 부상을 입었고, 다른 하나는 지역 라이벌 USC와의 경기였다. USC는 "지연 경기"를 펼쳤는데, 당시에는 샷 클락이 없어 트로잔스 선수들이 득점을 시도하기 전에 원하는 만큼 공을 오래 소유할 수 있었다. 그들은 앨신더를 단 4개의 슛과 10점으로 제한했다.
대학 경력 동안 앨신더는 3회 전국 올해의 선수 (1967-1969), 3회 만장일치 퍼스트 팀 올아메리칸 (1967-1969), 3회 NCAA 농구 챔피언 팀 (1967, 1968, 1969)에서 뛰었으며, 3회 NCAA 토너먼트에서 최우수 선수로 선정되었고, 1969년에는 최초의 네이스미스 대학 올해의 선수가 되었다. 그는 헬름스 재단 올해의 선수상을 3회 수상한 유일한 선수였다. 그는 충족되지 않은 스카우트 약속 때문에 미시간으로 전학을 고려했으나, UCLA 선수 윌리 놀스가 앨신더와 팀 동료 루시우스 앨런을 운동 후원자 샘 길버트에게 소개했고, 길버트는 두 선수가 UCLA에 남도록 설득했다.
3학년 때인 1968년 1월 12일, 앨신더는 캘리포니아와의 경기에서 톰 헨더슨과의 리바운드 싸움 중 왼쪽 각막에 상처를 입었다. 그는 스탠포드와 포틀랜드와의 다음 두 경기에 결장했다. 그의 각막은 프로 경력 중에도 다시 상처를 입어 나중에 눈 보호를 위해 고글을 착용하게 되었다. 1월 20일, 브루인스는 가이 루이스 감독의 휴스턴 쿠거스와 최초로 전국적으로 중계된 정규 시즌 대학 농구 경기에서 아스트로돔에 52,693명의 관중이 모인 가운데 맞붙었다. "세기의 경기"로 불린 이 경기에서 쿠거스의 포워드 엘빈 헤이즈는 39점 15리바운드를 기록했고, 눈 부상에 시달리던 앨신더는 15점에 그쳐 휴스턴이 71-69로 승리하며 UCLA의 47연승을 마감했다. 헤이즈와 앨신더는 NCAA 토너먼트 준결승에서 재대결을 펼쳤는데, 건강한 앨신더를 앞세운 UCLA가 휴스턴을 101-69로 꺾고 전국 챔피언십으로 향했다. UCLA는 경기당 37.7점을 기록하던 헤이즈를 단 10점으로 묶었다. 우든은 헤이즈를 막아낸 다이아몬드-앤-원 수비 전술을 고안한 보조 코치 노먼의 공로를 인정했다.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는 이 경기에 대한 표지 기사를 실으며 "루의 복수: 휴스턴 대파"라는 헤드라인을 사용했다. 1968-69년도 4학년으로서 앨신더는 브루인스를 3년 연속 전국 타이틀로 이끌었다.
3.3. 1968년 올림픽 보이콧
1968년 여름, 앨신더는 두 차례의 샤하다를 통해 가톨릭에서 수니 이슬람으로 개종했다. 그는 아랍어 이름 카림 압둘자바를 채택했지만, 1971년까지 대중적으로 사용하지 않았다. 그는 1968년 하계 올림픽을 보이콧하고 미국 올림픽 농구팀 선발에 참여하지 않기로 결정했는데, 이 팀은 결국 금메달을 획득했다. 앨신더는 미국 내 아프리카계 미국인에 대한 불평등한 대우에 항의하며 "이 나라를 위해 금메달을 따고 돌아와 억압 속에서 사는 것의 무의미함을 세상에 알리려 노력했다"고 밝혔다.
NBA는 대학 저학년 선수들의 조기 NBA 드래프트 선언을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앨신더는 학업을 마치고 1969년 역사학 학사 학위를 취득했다. 여가 시간에는 무술을 수련했다. 2학년과 3학년 사이에 뉴욕에서 아이키도를 공부했고, 이후 로스앤젤레스에서 이소룡 밑에서 절권도를 배웠다.
4. 프로 경력
4.1. 밀워키 벅스 (1969-1975)

글로브트로터스는 앨신더에게 100.00 만 USD를 제안했지만 그는 거절했고, 창단 2년차에 불과했던 밀워키 벅스에 1969년 NBA 드래프트에서 전체 1순위로 지명되었다. 벅스는 피닉스 선스와의 동전 던지기에서 1순위 지명권을 얻었다. 그는 또한 뉴욕 네츠에 의해 1969년 ABA 드래프트에서도 전체 1순위로 지명되었다. 네츠는 앨신더가 뉴욕 출신이기 때문에 그를 영입하는 데 유리하다고 믿었지만, 앨신더가 벅스와 네츠 모두에게 각 팀에서 단 하나의 제안만 수락하겠다고 말했을 때, 그는 네츠의 제안이 너무 낮다고 거절했다. 샘 길버트가 로스앤젤레스 사업가 랄프 샤피로와 함께 무료로 계약을 협상했다. 앨신더가 밀워키 벅스의 140.00 만 USD 제안을 선택한 후, 네츠는 보장된 325.00 만 USD를 제안했다. 앨신더는 이 제안을 거절하며 "입찰 전쟁은 관련된 사람들을 타락시킨다. 그것은 나를 인신매매범처럼 느끼게 할 것이고,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4.1.1. 드래프트와 신인 시즌
앨신더의 존재는 벅스가 56승 26패의 기록(전년도 27승 55패에서 향상됨)으로 NBA 동부 디비전 2위를 차지할 수 있게 했다. 1970년 2월 21일, 그는 소닉스를 140-127로 이긴 경기에서 51점을 기록했다. 앨신더는 즉시 스타가 되었고, 득점에서 리그 2위(28.8점)와 리바운드에서 3위(14.5리바운드)를 기록하여 NBA 올해의 신인상을 수상했다. 필라델피아 76ers와의 시리즈 결정전에서 그는 46점 25리바운드를 기록했다. 그는 윌트 체임벌린에 이어 플레이오프 경기에서 최소 40점 25리바운드를 기록한 두 번째 신인이었다. 그는 또한 플레이오프에서 20점 이상을 기록한 10경기 이상으로 NBA 신인 기록을 세웠는데, 이는 2018년 제이슨 테이텀이 동률을 이루었다.
4.1.2. 첫 우승과 MVP
다음 시즌, 벅스는 올스타 가드 오스카 로버트슨을 영입했다. 밀워키는 1970-71 시즌에 66승으로 리그 최고 기록을 세웠고, 당시 기록인 20연승을 포함했다. 앨신더는 6번의 NBA 최우수 선수상 중 첫 번째 상과 첫 득점왕(31.7점)을 수상했다. 그는 또한 총 득점에서도 2,596점으로 리그 선두를 차지했다. 벅스는 1971년 NBA 파이널에서 볼티모어 불리츠를 4-0으로 스윕하며 NBA 타이틀을 획득했다. 앨신더는 4차전에서 27점 12리바운드 7어시스트를 기록했으며, 시리즈에서 경기당 27점, 60.5%의 야투 성공률을 기록하여 파이널 MVP로 선정되었다.
4.1.3. 이슬람 개종과 이름 변경
오프시즌 동안 앨신더와 로버트슨은 벅스 감독 래리 코스텔로와 함께 미국 국무부를 대표하여 3주간의 아프리카 농구 투어에 참여했다. 1971년 6월 3일 국무부 기자회견에서 그는 앞으로 자신을 무슬림 이름인 카림 압둘자바로 불러달라고 밝혔는데, 그 이름은 대략 "고귀한 자, 전능하신 분의 종(즉, 신의 종)"을 의미한다.
4.1.4. 지속적인 성공과 트레이드 요청

압둘자바는 벅스에서 계속해서 지배적인 선수였다. 다음 해, 그는 득점왕(34.8점과 총 2,822점)을 다시 차지했고, NBA 역사상 처음으로 데뷔 3년 만에 두 번이나 NBA 최우수 선수로 선정되었다. 1974년, 압둘자바는 벅스를 4년 연속 미드웨스트 디비전 타이틀로 이끌었고, 4년 만에 세 번째 MVP 상을 수상했다. 그는 득점(27.0점, 3위), 리바운드(14.5리바운드, 4위), 블록슛 (283개, 2위), 필드골 성공률 (.539, 2위)에서 NBA 상위 5위 안에 들었다. 밀워키는 1974년 파이널에 진출했지만, 보스턴 셀틱스에게 7차전에서 패했다.
오프시즌에 자유 계약 선수가 된 로버트슨은 벅스와 계약에 합의하지 못해 1974년 9월 은퇴했다. 10월 3일, 압둘자바는 뉴욕 닉스로의 트레이드를 비공개적으로 요청했으며, 두 번째 선택은 워싱턴 불리츠 (현 위저즈), 세 번째는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였다. 그는 밀워키시나 팬들에 대해 부정적으로 말한 적은 없었지만, 중서부에 있는 것이 자신의 문화적 요구에 맞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틀 후 1974-75 시즌 프리시즌 경기에서 버팔로에서 셀틱스를 상대로 경기 중, 압둘자바는 돈 넬슨의 손톱에 왼쪽 눈을 찔려 각막 찰과상을 입었다. 이에 화가 나 백보드 지지대를 주먹으로 쳐서 오른손 뼈 두 개를 부러뜨렸다. 그는 시즌 첫 16경기를 결장했고, 이 기간 동안 벅스는 3승 13패를 기록했다. 11월 말 보호용 고글을 착용하고 복귀했다. 1975년 3월 13일, 스포츠 캐스터 마브 앨버트는 압둘자바가 뉴욕이나 로스앤젤레스로, 가급적이면 닉스로의 트레이드를 요청했다고 보도했다. 다음 날 밀워키에서 레이커스에게 패한 후, 압둘자바는 기자들에게 다른 도시에서 뛰고 싶다는 자신의 의사를 확인해주었다. 그는 시즌 동안 평균 30.0점을 기록했지만, 밀워키는 38승 44패로 디비전 최하위를 기록했다.
4.2.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 (1975-1989)

1975년, 레이커스는 벅스로부터 압둘자바와 리저브 센터 월트 웨슬리를 영입하고, 그 대가로 센터 엘모어 스미스, 가드 브라이언 윈터스, 유망주 신인 데이브 마이어스와 주니어 브리지먼, 그리고 현금을 내주었다. 1975-76 시즌, 레이커스에서의 첫 시즌에 그는 압도적인 활약을 펼쳤는데, 경기당 27.7점을 기록하며 리바운드(16.9 rpg), 블록슛(4.12 bpg), 총 출전 시간(3,379분)에서 리그 선두를 차지했다. 그의 1,111개의 수비 리바운드는 여전히 NBA 단일 시즌 기록이다(수비 리바운드는 1973-74 시즌 이전에는 기록되지 않았다). 그는 네 번째 MVP 상을 수상하며 레이커스 프랜차이즈 역사상 첫 수상자가 되었지만, 레이커스가 40승 42패로 시즌을 마쳐 2년 연속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했다.
4.2.1. 레이커스로의 이적과 초기 활약
무명 선수들을 영입한 후, 레이커스는 1976-77 시즌 퍼시픽 디비전 최하위권에 머물 것으로 예상되었다. 압둘자바는 팀을 NBA 최고 기록인 53승 29패로 이끄는 데 기여했고, 빌 러셀의 기록과 동률을 이루는 다섯 번째 MVP 상을 수상했다. 압둘자바는 야투 성공률(.579)에서 리그 선두를 차지했으며, 득점(26.2점)에서 3위, 리바운드(13.3개)와 블록슛(3.18개)에서 2위를 기록했다. 플레이오프에서 레이커스는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를 서부 컨퍼런스 준결승에서 꺾고 포틀랜드 트레일블레이저스와 맞붙게 되었다. 이 대결은 압둘자바와 젊고 부상 없는 빌 월튼의 기억에 남을 만한 대결이었다. 압둘자바가 통계적으로 시리즈를 지배했음에도 불구하고, 월튼과 트레일블레이저스(플레이오프에 처음 진출한 팀)는 월튼의 능숙한 패스와 적절한 플레이에 힘입어 레이커스를 스윕했다.
4.2.2. "쇼타임" 시대와 우승
1977-78 시즌 개막전 시작 2분 만에, 압둘자바는 밀워키의 켄트 벤슨이 자신의 복부를 팔꿈치로 가격한 것에 대한 보복으로 벤슨의 얼굴을 주먹으로 때려 오른손이 부러졌다. 벤슨은 오른쪽 눈에 멍이 들고 두 바늘을 꿰매야 했다. 벤슨에 따르면 압둘자바가 먼저 팔꿈치로 가격했지만, 목격자가 없었고 리플레이에도 잡히지 않았다. 1975년에 백보드 지지대를 주먹으로 쳐서 같은 뼈를 부러뜨렸던 압둘자바는 거의 두 달 동안 경기에 나서지 못했고 20경기를 결장했다. 그는 당시 리그 최고 기록인 5000 USD의 벌금을 부과받았지만 출장 정지 처분은 받지 않았다. 벤슨은 한 경기를 결장했지만 리그로부터 처벌을 받지 않았다. 압둘자바가 복귀했을 때 레이커스는 8승 13패를 기록 중이었다. 그는 1978년 NBA 올스타전에 선정되지 않았는데, 이는 그의 20년 경력 중 올스타전에 선정되지 않은 유일한 경우였다. 시카고의 아티스 길모어와 디트로이트의 밥 래니어가 서부 컨퍼런스 리저브로 선정되었고, 월튼이 센터로 선발 출전했다. 언론의 비판 속에서 압둘자바는 올스타 명단이 발표된 날 필라델피아 76ers와의 경기에서 39점 20리바운드 6어시스트 4블록을 기록하며 승리했다. 그는 올스타 브레이크 전 마지막 경기인 뉴저지 네츠 (현 브루클린)와의 경기에서 37점 30리바운드를 추가하며 승리했다.
압둘자바의 플레이는 다음 두 시즌 동안에도 강세를 유지하여 두 번의 올NBA 세컨드 팀과 한 번의 올디펜스 퍼스트 팀, 한 번의 올디펜스 세컨드 팀에 선정되었다. 그러나 레이커스는 플레이오프에서 계속해서 좌절을 겪었고, 시애틀 슈퍼소닉스에게 1978년 (1라운드)과 1979년 (준결승)에 탈락했다.

레이커스는 1979년 NBA 드래프트에서 매직 존슨을 전체 1순위로 지명했다. 그들은 1976년 리그 규정에 따라 자유 계약 선수 게일 구드리치의 영입에 대한 보상으로 뉴올리언스 재즈 (이후 유타)로부터 이 지명권을 얻었다. 존슨의 합류는 1980년대 레이커스의 "쇼타임" 왕조의 길을 열었고, 8번의 파이널 진출과 5번의 NBA 챔피언십 우승을 이끌었다. 젊은 시절만큼 지배적이지는 않았지만, 압둘자바는 역대 최고의 농구 선수 중 한 명으로서의 지위를 굳혔고, 추가로 4번의 올NBA 퍼스트 팀 선정과 2번의 올디펜스 퍼스트 팀 영예를 얻었다. 그는 존슨과 함께한 첫 시즌인 1979-80 시즌에 기록적인 여섯 번째 MVP 상을 수상했다. 1980년 NBA 파이널에서 압둘자바는 5경기에서 평균 33.4점을 기록했고, 5차전에서 발목을 삐었지만 40점을 기록하며 경기를 마쳤고 팀을 승리로 이끌었다. 그는 6차전에 결장했고, 레이커스가 우승을 확정하자 존슨은 결승전에서 42점 15리바운드 7어시스트를 기록하며 파이널 MVP로 선정되었다.
압둘자바는 다음 여섯 시즌 동안 계속해서 경기당 20점 이상을 기록했다. 레이커스는 1981-82 시즌에 또 다른 챔피언십에서 우승했지만, 그는 파이널에서 편두통에 시달려 필라델피아를 상대로 경기당 18점에 그쳤다. 14번의 플레이오프 경기에서 그는 당시 경력 최저인 20.4점 평균을 기록했다. 레이커스는 1983년 NBA 파이널에서 76ers와 재대결을 펼쳤는데, 76ers는 지난 파이널에서 압둘자바가 대릴 도킨스와 칼드웰 존스의 빅맨 듀오를 압도한 후 센터 포지션을 강화하기 위해 모제스 말론을 영입했다. 76ers는 레이커스를 4-0으로 스윕했고, 말론은 시리즈에서 압둘자바를 72-30으로 리바운드에서 압도하며 파이널 MVP로 선정되었다。 말론은 27개의 공격 리바운드를 기록했는데, 이는 압둘자바의 총 리바운드(30개)와 거의 같았다.
4.2.3. 통산 최다 득점 기록 경신
1983-84 시즌 전에 압둘자바는 레이커스와 2년 300.00 만 USD 계약을 체결했는데, 금액은 연기되지 않았다. 그는 트레이닝 캠프에서 바이러스성 간염에 걸려 복귀 후 한 달 동안 약해졌다. 1983년 12월 22일 골든스테이트와의 경기에서 10점을 기록하며 시즌 평균이 17.7점으로 떨어졌는데, 이는 그의 경력 평균보다 거의 10점 낮은 수치였다. 그의 득점은 크리스마스 이후 회복되었다. 1984년 4월 5일, 유타 재즈와의 원정 경기에서 압둘자바는 윌트 체임벌린의 NBA 통산 최다 득점 기록을 경신했다. 그는 존슨으로부터 패스를 받아 4.6 m (15 ft) 거리에서 자신의 특허 스카이훅 슛을 0.2 m (7 in)의 슛 블록 전문가 마크 이튼 위로 성공시켰다. 이 경기는 재즈가 라스베이거스 밸리에서 치른 11번의 홈 경기 중 하나인 토마스 & 맥 센터에서 열렸다. 이 경기는 18,389명의 팬을 끌어모았는데, 이는 재즈가 1979-80 시즌 전에 뉴올리언스에서 이사온 이후 가장 많은 홈 관중이었다. 1980-81 시즌 이후 처음으로 압둘자바는 시즌 동안 레이커스에서 득점(21.5점)과 리바운드(7.3개) 모두에서 선두를 차지했다. 그는 지난 몇 년보다 꾸준히 더 좋은 활약을 펼쳤고, 경력에서 아홉 번째로 올NBA 퍼스트 팀에 선정되었으며, 그의 마지막 올디펜시브 선정인 올NBA 디펜시브 세컨드 팀에 투표되었다. 팀은 1984년 NBA 파이널에 진출했지만 보스턴에게 패했다.
4.2.4. 마지막 시즌과 은퇴

1984-85 시즌은 압둘자바의 마지막 시즌이 될 것으로 예상되었는데, 그는 체임벌린의 기록을 깬 이후 은퇴할 것이라고 주장해왔다. 각 팀들은 그가 홈 경기장에 마지막으로 나타날 때 그를 기리기 시작했지만, 레이커스는 그들에게 행사에서 '은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말라고 지시했다. 그는 마음을 바꿀 가능성을 열어두었지만, 데이브 카웬스처럼 은퇴 선물을 받고 다시 뛰고 싶지 않았다. 1984년 12월 5일, 압둘자바는 레이커스와 1년 200.00 만 USD 계약 연장에 합의했는데, 금액은 연기되지 않았다。 그는 1985년에 두 번째 파이널 MVP를 수상했는데, 38세 54일의 나이로 이 상을 수상한 최고령 선수가 되었다. 그는 셀틱스를 상대로 한 시리즈에서 평균 25.7점, 9리바운드, 5.2어시스트, 1.5블록을 기록했다. 그는 1차전에서 초반에 부진하여 30세의 보스턴 센터 로버트 패리시에게 12점 3리바운드로 막혔고, 레이커스는 148-114로 대패하며 "메모리얼 데이 학살"이라는 오명을 얻었다. 다음 날 팀의 비디오 분석 세션에서 압둘자바는 평소에는 뒤쪽에 앉았지만 앞줄에 앉아 팻 라일리 감독의 모든 비판을 받아들였다. 2차전 전에 압둘자바는 아버지와 함께 팀 버스를 타고 경기에 갈 수 있는지 물었다. 평소 규칙에 엄격했던 라일리는 예외를 두기로 동의했다. 압둘자바는 30점 17리바운드 8어시스트 3블록을 기록하며 109-102 승리를 이끌었다. 레이커스의 4승 경기에서 그는 평균 30.2점, 11.3리바운드, 6.5어시스트, 2.0블록을 기록했다. 이 우승으로 셀틱스의 레이커스를 상대로 한 8연속 챔피언십 우승 기록이 깨졌다.
압둘자바는 1985-86 시즌에 17번째 시즌을 뛰며 돌프 셰이즈, 존 해블리첵, 폴 사일러스, 엘빈 헤이즈가 보유했던 16시즌의 NBA 최다 시즌 출전 기록을 경신했다. 1985년 11월 12일, 그는 레이커스와 같은 200.00 만 USD 연봉으로 1년 계약 연장에 서명하면서 1985-86 시즌 이후 은퇴할 수 있는 옵션을 유지했다. 1986-87 시즌 전에 그는 리그에 늘어나는 2.1 m (7 ft) 선수들과 경쟁하기 위해 5.9 kg (13 lb)를 늘려 약 122 kg (270 lb)에 도달했다. 레이커스는 1987년 보스턴과의 챔피언십을 시작으로 그의 마지막 세 시즌 동안 매년 NBA 파이널에 진출했다. 이후 그는 레이커스와 2년 계약을 체결했다.
라일리는 레이커스가 1968-69년 셀틱스 이후 처음으로 연속 우승을 차지하는 NBA 팀이 될 것이라고 장담했고, 그들은 1988년 디트로이트 피스턴스를 꺾고 챔피언십을 차지했다. 압둘자바는 파이널 6차전에서 14개의 슛 중 3개만 성공했지만, 경기 종료 14초를 남기고 자유투 2개를 성공시켜 시리즈를 7차전으로 연장시켰다. 최종전을 승리한 후, 41세의 센터는 4점 3리바운드에 그쳤음에도 불구하고 라커룸에서 한 시즌 더 뛰고 은퇴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그의 득점, 리바운드, 출전 시간은 19번째 시즌에 감소했고, 경기 전에 그가 은퇴할 것이라는 보도가 있었다. 그의 "은퇴 투어"에서 그는 홈과 원정 경기 모두에서 기립 박수를 받았고, "캡틴 스카이훅"이라고 쓰인 요트부터 그의 경력에서 입었던 유니폼 액자, 페르시아 양탄자 등 다양한 선물을 받았다. 포럼에서 시애틀과의 마지막 정규 시즌 경기에서 모든 레이커스 선수들은 압둘자바의 상징적인 고글을 착용하고 코트에 나왔다. 레이커스는 1989년 파이널에서 피스턴스에게 4경기 스윕을 당하며 패했다.
은퇴 당시 압둘자바는 NBA 통산 최다 출전 경기 기록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는 또한 통산 최다 출전 시간(57,446분), 최다 필드골 성공(15,837개), 최다 득점(38,387점), 1,000점 이상 시즌 최다(19회) 기록을 보유하고 있었다.
5. 선수로서의 프로필 및 기술
코트 위에서 압둘자바는 뛰어난 능력, 독보적인 기술, 그리고 리더십을 보여주었다.
5.1. 공격 기술
공격에서 압둘자바는 지배적인 로우-포스트 공격수였다. 윌트 체임벌린이나 샤킬 오닐과 같은 다른 로우-포스트 전문가들과는 달리, 그는 키가 0.2 m (7 in)에 몸무게는 약 109 kg (240 lb)인 날씬한 거인이었지만, 1986년에는 122 kg (270 lb)까지 몸을 불렸다. 초기에는 민첩성과 속도를 활용했고, 후기에는 더 큰 체구를 활용하여 골대 아래를 수비했다. 압둘자바는 양손으로 구사하는 그의 상징적인 "스카이훅" 슛으로 유명했다. 이 슛은 그의 경력 야투 성공률 .559에 기여했는데, 이는 은퇴 당시 NBA 역사상 8위였고, 두려운 클러치 슈터로서의 명성을 얻었다. 그는 마지막 시즌을 제외하고 모든 시즌에서 50% 이상의 야투 성공률을 기록했다.
압둘자바에 따르면, 그는 5학년 때 양손을 사용하는 미칸 드릴을 연습한 후 이 기술을 배웠고, 곧 그 가치를 깨달았는데, "내 얼굴에 다시 박히지 않는 유일한 슛"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또한 세인트루이스 호크스의 클리프 헤이건이 훅 슛을 쏘는 것을 보기도 했다. 존 우든은 그의 훅 슛이 뒤에서 블록당하는 것을 막기 위해 일반적인 훅 슛의 sweeping motion을 없애고, 공을 몸에 가깝게 유지하고 더 직선적인 움직임으로 슛을 쏘라고 조언했다. 압둘자바의 훅 슛은 덩크가 금지된 UCLA 3학년 때 향상되었다. 대학 마지막 해에는 종종 림 위 몇 피트에서 공을 놓았다.
5.2. 수비 기술
압둘자바는 수비에서도 지배적인 존재감을 유지했다. 그는 NBA 올디펜시브 팀에 11번 선정되었다. 그는 뛰어난 블록슛 능력으로 상대방을 좌절시켰고, 경기당 평균 2.6개의 슛을 막아냈다. 그는 공격적인 리바운더는 아니었고, 포지셔닝보다는 2.1 m (7 ft)의 키에 더 의존했다. 경력 초기에 겪었던 혹독한 몸싸움 때문에 그의 리바운드 평균은 후반기에 경기당 6~8개로 떨어졌다.
5.3. 신체 단련 및 내구성
엄격한 체력 단련 프로그램 덕분에 압둘자바는 역대 가장 내구성이 뛰어난 선수 중 한 명이었다. 그는 26세에 연중 컨디셔닝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동안 압둘자바는 1976년에 유연성 향상을 위해 요가를 시작했으며, 그의 신체 단련 요법으로 유명했다. 그는 "요가 없이는 내가 그렇게 오래 뛸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신진대사 때문에 체중을 늘리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1979-80 시즌 전에 그는 프리 웨이트에서 노틸러스 장비로 바꾸고 태극권에서 요가로 바꾸면서 4.5 kg (10 lb)를 늘려 113 kg (250 lb)가 되었다. 후기에는 마모를 줄이기 위해 라일리는 그에게 득점 후 공을 인바운드하지 않게 했고, 자유투 시에는 코트 반대편 끝에서 기다리게 했다. 에너지를 절약하기 위해 "더 영리한 경기"를 펼쳤다고 묘사한 압둘자바는 때때로 레이커스가 속공으로 득점하는지 확인하기 위해 수비에 머물다가 몇 초 후에야 공격 진영으로 넘어가는 마지막 선수가 되기도 했다. 1981년, 그는 서두르지 않는다는 비판에 대해 "나는 밤에 42분에서 45분 동안 뛰어야 한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그것은 거대한 잔디밭을 깎는 것과 같다. 만약 당신이 서둘러서 격렬하게 뛰어다니면, 그것은 자멸적이다. 가장 필요한 시점에 지쳐버릴 것이다"라고 답했다. 압둘자바는 당시 NBA 기록인 20시즌과 1,560경기를 뛰며 경력을 마쳤는데, 이 기록은 나중에 전 셀틱스 센터 로버트 패리시에 의해 깨졌다.
압둘자바는 1974년 프리시즌에 눈을 찔린 후 그의 상징적인 고글을 착용하기 시작했다. 그는 1979년 플레이오프에서 벗어날 때까지 몇 년 동안 계속 착용했다. 그는 1980년 10월 휴스턴의 루디 톰자노비치에게 오른쪽 눈을 우연히 찔린 후 다시 고글을 착용하기 시작했다. 수년간 눈을 찔린 후, 압둘자바는 각막 침식 증후군을 앓게 되었고, 눈이 건조해지면 가끔 통증을 겪었다. 그는 1986년 12월 이 질환으로 인해 세 경기를 결장했다.
5.4. 리더십과 팀워크
팀원으로서 압둘자바는 타고난 리더십을 발휘했으며, 동료들로부터 "캡" 또는 "캡틴"이라는 애칭으로 불렸다. 그는 침착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는데, 라일리는 그가 코칭하기 좋은 선수였다고 말했다.
6. 지도자 경력
1995년, 압둘자바는 코칭에 대한 관심을 표명하며 선수 시절의 지식을 전수하고 싶다고 밝혔다. 선수 시절 성공에도 불구하고 그의 기회는 제한적이었다. 선수 시절 압둘자바는 내성적이고 침울한 것으로 평판이 좋았다. 그는 종종 언론에 불친절했다. 그의 예민함과 수줍음은 그가 냉담하고 무뚝뚝하다는 인식을 만들었다. 당시 그의 사고방식은 시간이 없거나 누구에게도 빚진 것이 없다는 것이었다. 매직 존슨은 어렸을 때 그에게 사인을 요청했다가 무시당했던 것을 회상했다. 압둘자바는 기자가 자신을 만지면 기자를 외면할 수 있었고, 한 번은 인터뷰 중에도 신문 읽기를 거부하기도 했다.
압둘자바는 경력 대부분을 미디어의 관심에 대해 조심스러운 태도로 보냈다(UCLA에서 스타였을 때는 미디어에 대처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 그는 경력 말년에 가서야 부드러워졌다. 압둘자바는 "나는 내가 사람들에게 그런 식으로 영향을 미쳤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고, 그것이 전부였다. 나는 항상 그들이 캐내려 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너무 의심이 많았고 그 대가를 치렀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까다로운 사람"이라는 평판과 50세 가까운 나이에 코칭에 뛰어들려는 시도가 NBA나 NCAA에서 감독이 될 기회에 영향을 미쳤다고 믿는다.
6.1. 코치 보조 역할
압둘자바는 로스앤젤레스 클리퍼스와 시애틀 슈퍼소닉스의 보조 코치로 일하며 젊은 센터인 마이클 올로워칸디와 제롬 제임스 등을 지도했다.
6.2. 헤드 코치 역할
압둘자바는 2002년 USBL의 오클라호마 스톰의 감독을 맡아 그 시즌에 팀을 리그 챔피언십으로 이끌었지만, 1년 후 컬럼비아 대학교의 감독직을 맡는 데 실패했다. 그는 이후 뉴욕 닉스의 스카우트로 일했다. 그는 2005년부터 2011년까지 6시즌 동안 필 잭슨 감독 밑에서 레이커스의 특별 보조 코치로 돌아왔다. 초기에 그는 젊은 센터인 앤드류 바이넘을 지도했다. 압둘자바는 또한 1998년 애리조나주 화이트리버의 포트 아파치 인디언 보호구역에 있는 알체세이 고등학교에서 자원봉사 코치로 활동했다. 그는 UCLA와 밀워키 벅스의 감독직을 얻기 위해 로비를 벌였으나 실패한 후 2013년에 코칭에서 물러났다.
7. 영화, 방송, 저술 활동
농구 선수로서의 경력 외에도 압둘자바는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7.1. 연기 경력

로스앤젤레스에서 뛰면서 압둘자바는 연기에 도전할 수 있었다. 그는 1972년 이소룡의 영화 사망유희에서 영화 데뷔를 했다.
1980년, 압둘자바는 에어플레인에서 부조종사 로저 머독 역을 맡았다. 그가 어린 소년에게 자신은 단지 항공사 부조종사 로저 머독일 뿐이라고 주장하지만, 소년은 계속해서 압둘자바가 "최고"이지만 아버지에 따르면 그는 "수비에서 열심히 하지 않고" "플레이오프를 제외하고는 정말 노력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장면이 있다. 이로 인해 압둘자바의 캐릭터는 "젠장, 안 그래!"라고 소리치며 캐릭터를 벗어나 "UCLA 때부터 그딴 소리만 들었다"며 "매일 밤 죽어라 노력했다!"고 소리친다. 그는 소년에게 "네 아빠한테 빌 월튼과 밥 래니어를 48분 동안 코트 위아래로 끌고 다니라고 전해라"라고 말한다. 영화 후반부에 머독이 의식을 잃고 쓰러질 때, 그는 압둘자바의 고글과 노란 레이커스 반바지를 입은 채 조종석에 쓰러진다. 2014년, 압둘자바와 에어플레인 공동 출연자 로버트 헤이즈 (테드 스트라이커 역)는 위스콘신 관광을 홍보하는 패러디 광고에서 에어플레인 역할을 재현했다.

압둘자바는 자신을 연기하는 등 수많은 다른 TV 및 영화 출연을 했다. 그는 플레치, 트로프 비벌리 힐스, 포겟 파리스와 같은 영화와 풀 하우스, 리빙 싱글, 아멘, 내 사랑 레이몬드, 마틴, 디프런트 스트로크스 (그의 키가 작은 아역 스타 게리 콜먼과 유머러스하게 대비됨), 더 프레시 프린스 오브 벨 에어, 스크럽스, 21 점프 스트리트, 이머전시!, 맨 프롬 아틀란티스, 뉴 걸과 같은 텔레비전 시리즈에 출연했다. 압둘자바는 1984년 어둠의 이야기 에피소드에서 램프의 지니를 연기했다. 그는 또한 1994년 2월 10일 스케치 코미디 텔레비전 시리즈 인 리빙 컬러 에피소드에서 자신을 연기했다.
압둘자바는 스티븐 킹의 더 스탠드의 텔레비전 버전에도 출연했고, 슬램 덩크 어니스트에서 농구의 대천사를 연기했으며, 베이스켓볼에서 짧은 대사 없는 카메오 출연을 했다. 압둘자바는 또한 1994년 TV 영화 더 버논 존스 스토리의 공동 총괄 프로듀서였다. 그는 또한 2006년 "힙합켓볼 II: 더 리재즈브레이션 리믹스 '06"이라는 스킷으로 콜베어 리포트에 출연했고, 2008년에는 나치 금을 찾기 위한 임무를 맡은 무대 감독으로 출연했다. 압둘자바는 또한 2011년 심슨 가족의 "사랑은 많은 목을 조르는 것"이라는 에피소드에서 자신을 연기했다. 그는 2012년부터 2013년까지 방영된 NBC 시리즈 가이즈 위드 키즈에서 자신을 연기하는 반복적인 역할을 맡았다. 알자지라 잉글리시에서 그는 단지 선수로서가 아니라, 자신의 지성을 활용하고 다른 기여를 한 사람으로 기억되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2017년, 압둘자바는 래퍼 푸샤 T와 스톰지가 피처링한 록 밴드 린킨 파크의 2017년 곡 "굿 굿바이"의 뮤직 비디오에 출연했다. 비디오에서 압둘자바는 린킨 파크의 리드 싱어 체스터 베닝턴이 자신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여러 사람에게 덩크를 해야 하는 덩크 콘테스트의 군주 또는 황제 역할을 맡았다. 비디오에 대한 인터뷰에서 베닝턴은 압둘자바가 "역대 최고의 [농구] 선수"라고 믿는다고 말했다.
2019년 2월, 그는 빅뱅 이론 시즌 12 에피소드 16 "더 D&D 볼텍스"에 출연했다. 2021년, 압둘자바는 데이브 시즌 2 에피소드에 자신으로 특별 출연했다. 그가 출연한 에피소드도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압둘자바는 2022년 넷플릭스 영화 나이브스 아웃: 글래스 어니언에 자신으로 카메오 출연한다. 2023년, 압둘자바는 쇼타임 시리즈 빌리언스 시즌 7 에피소드 3에 자신으로 출연했다.
7.2. 저술 및 문학 활동
2018년 9월, 압둘자바는 2019년 7월에 부활하는 베로니카 마스의 작가 중 한 명으로 발표되었다.
그는 베스트셀러 작가이자 문화 평론가가 되었다. 그는 주로 아프리카계 미국인 역사에 관한 여러 책을 출판했다. 그의 첫 책인 자서전 자이언트 스텝스는 1983년 공동 저자 피터 노블러와 함께 집필되었다. 이 책의 제목은 재즈 거장 존 콜트레인의 앨범 자이언트 스텝스에 대한 오마주이다. 다른 책으로는 레이몬드 옵스트펠드와 공동 집필한 거인들의 어깨 위에서: 할렘 르네상스를 통한 나의 여정과 앤서니 월튼과 공동 집필한 형제들의 무기: 제2차 세계 대전의 잊혀진 영웅들, 761전차대대의 장대한 이야기가 있는데, 이는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싸운 최초의 흑인 기갑 부대의 역사이다.
2015년, 압둘자바는 셜록 홈즈 이야기의 표제 인물을 기반으로 한 빅토리아 시대 미스터리 소설 마이크로프트 홈즈로 성인 소설 작가로 데뷔했다. 두 편의 속편이 이어졌다: 마이크로프트와 셜록 (2018)과 마이크로프트와 셜록: 텅 빈 새장 (2019). 세 편 모두 안나 워터하우스와 공동 집필했다.
타임지에 인종과 종교 문제 등을 다루는 정기 칼럼을 기고했다. 그는 2015년 1월 25일 미트 더 프레스에 출연하여 기독교를 표방하는 폭력적인 극단주의자들의 행동에 대해 기독교가 비난받지 않는 것처럼, 이슬람도 폭력적인 극단주의자들의 행동에 대해 비난받아서는 안 된다는 칼럼에 대해 이야기했다. 무슬림으로서의 삶에 대해 질문받았을 때, 그는 "나는 내 신앙에 대해 어떤 오해도 없다. 나는 사람들을 살해하고 세상에 이 모든 혼란을 야기하는 무슬림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에 대해 매우 우려한다. 그것은 이슬람이 아니다. 사람들이 무슬림에 대해 생각할 때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이 모든 것에 대해 우리가 모두 나서서 무언가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2014년 11월, 압둘자바는 자코뱅지에 대학 운동선수에 대한 정당한 보상을 요구하는 에세이를 발표하며 "공정성이라는 이름으로 우리는 대학 운동선수들의 노예 생활을 끝내고 그들이 마땅히 받아야 할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고 썼다. 2017년, 압둘자바는 로스앤젤레스 이스라엘 영사 샘 그룬드베르그가 주최한 라마단 기념 행사에서 연설하며 무슬림-유대 관계와 문화 교류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2021년 6월, 그는 자코뱅지에 코로나19 백신 접종을 거부하는 사람들의 공중 보건에 미치는 부정적인 영향에 대한 에세이를 발표하며 카이리 어빙 등을 비판했다. 압둘자바는 2021년에 온라인 뉴스레터를 발행하기 시작했다.
7.3. 다큐멘터리 및 기타 미디어
2011년 2월 10일, 압둘자바는 뉴어크의 사이언스 파크 고등학교에서 유명하지만 종종 간과되는 뉴욕 르네상스 프로 농구팀의 격동적인 여정을 다룬 자신의 영화 거인들의 어깨 위에서를 공개했다. 이 행사는 학교, 도시, 주 전역에 생중계되었다. 2015년, 그는 자신의 삶을 다룬 HBO 다큐멘터리 카림: 한 명의 소수자에 출연했다. 2020년, 압둘자바는 히스토리 채널 특별 프로그램 블랙 패트리어츠: 혁명의 영웅들의 총괄 프로듀서이자 내레이터였다. 그는 내레이션으로 에미상 후보에 올랐다.
압둘자바는 2013년 ABC 리얼리티 시리즈 스플래시, 유명인 다이빙 대회에 참가했다. 2018년 4월, 압둘자바는 댄싱 위드 더 스타즈 시즌 26의 모든 운동선수 시즌에 참가하여 프로 댄서 린지 아놀드와 파트너를 맺었다.
8. 사회 운동 및 공직 활동
8.1. 사회 및 정치 운동
1967년, 압둘자바는 무하마드 알리의 베트남 전쟁 참전 거부를 지지하기 위해 모인 저명한 흑인 운동선수들의 회의인 클리블랜드 서밋에 참석한 유일한 대학 운동선수였다.
그는 인종과 종교 문제 등 다양한 주제에 대한 토론에 정기적으로 기고하고 텔레비전에 출연했다. 그는 2017년 도널드 트럼프의 여행 금지 조치를 비난하며 "이성과 연민의 부재는 순수한 악의 정의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수천 년의 투쟁에서 정제된 우리의 신성한 가치에 대한 거부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8.2. 문화 대사 및 정부 임명
2012년 1월, 힐러리 클린턴 미국 국무장관은 압둘자바가 미국 문화 대사직을 수락했다고 발표했다. 발표 기자회견에서 압둘자바는 미국 문화 대표로서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역사적 유산에 대해 언급하며 "루이 암스트롱이 케네디 대통령을 위해 처음으로 이 역할을 했을 때를 기억한다. 그는 나의 영웅 중 한 명이었다. 그래서 그의 발자취를 따르는 것이 좋다"고 말했다. 이 역할의 일환으로 압둘자바는 브라질을 방문하여 지역 청소년 교육을 홍보했다.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은 퇴임 전 마지막 날, 압둘자바를 가브리엘 더글러스 및 칼리 로이드와 함께 대통령 피트니스, 스포츠 및 영양 위원회에 임명했다고 발표했다.
2017년 1월, 압둘자바는 스티븐 므누신 미국 재무장관에 의해 시민 주화 자문 위원회에 임명되었다. 미국 조폐국에 따르면 압둘자바는 알렉산더 해밀턴의 삶에 대한 관심으로 이 취미를 시작한 열렬한 동전 수집가이다. 그는 2018년에 조폐국이 "개인적인 의무 증가"라고 설명한 이유로 사임했다.
9. 개인적인 삶
9.1. 가족과 관계
압둘자바는 UCLA 4학년 때 레이커스 경기에서 하비바 압둘자바 (본명 재니스 브라운)를 만났다. 그들은 1971년에 결혼했고, 세 자녀를 두었다: 딸 하비바와 술타나, 그리고 아들 카림 주니어는 발파라이소를 거쳐 웨스턴 켄터키에서 농구를 했다. 압둘자바와 재니스는 1978년에 이혼했다. 그는 셰릴 피스토노와의 사이에 또 다른 아들 아미르를 두었다. 또 다른 아들 아담은 TV 시트콤 풀 하우스에 그와 함께 출연했다.
1983년, 압둘자바의 집이 불에 탔다. 약 3,000장에 달하는 그의 소중한 재즈 LP 컬렉션을 포함한 많은 소지품이 파괴되었다. 많은 레이커스 팬들이 그에게 앨범을 보내주었고, 그는 그것이 힘이 되었다고 느꼈다. 2016년, 압둘자바는 챈스 더 래퍼와 함께 친구 무하마드 알리를 추모하는 공연을 펼쳤다.
9.2. 종교적 개종과 정체성
앨신더는 가톨릭에서 성장했지만, 뉴욕을 떠나 UCLA로 가면서 신앙을 버렸다. 1971년 24세에 그는 이슬람으로 개종하고 법적으로 카림 압둘자바가 되었는데, 이는 "고귀한 자, 전능하신 분의 종"을 의미한다. 그는 하마스 압둘 칼리스에 의해 이름이 지어졌다. 압둘자바는 워싱턴 D.C.에 있는 7700 16번가 NW 주택을 구입하여 칼리스가 하나피 마드합 센터로 사용하도록 기증했는데, 몇 년 후 이 장소는 1973년 하나피 무슬림 학살이 일어난 곳이 되었다. 결국 카림은 "칼리스의 꾸란에 대한 가르침 중 일부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들은 헤어졌다." 1973년, 압둘자바는 꾸란을 스스로 공부할 수 있을 만큼 아랍어를 배우기 위해 리비아와 사우디아라비아로 순례를 떠났고, 그는 "이 순례를 통해 자신의 신념을 명확히 하고 신앙을 새롭게 했다"고 말했다. 압둘자바는 또한 네이션 오브 이슬람의 지도자 맬컴 엑스에게 큰 영향을 받았다. 압둘자바는 이 단체에 가입하라는 초대를 받았지만 거절했다.
압둘자바는 이슬람으로 개종하면서 이름을 바꾼 배경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는 "우리 유산의 일부였던 것에 매달린 것"이라고 말했는데, "많은 노예들이 이곳으로 끌려왔을 때 무슬림이었다. 우리 가족은 18세기에 트리니다드에서 온 알신더라는 프랑스 농장주에 의해 미국으로 끌려왔다. 우리 민족은 요루바족이었고, 그들의 문화는 노예 제도에서 살아남았다... 아버지는 내가 어렸을 때 그것을 알게 되었고, 그것은 나에게 '야, 나는 누군가다, 다른 아무도 몰라도'라는 것을 아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주었다. 내가 어렸을 때는 아무도 흑인에 대해 긍정적인 것을 믿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은 흑인들에게 끔찍한 부담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억압되거나 왜곡된 자신들의 역사에 대한 정확한 생각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의 개명은 미국, 특히 백인 지역에서 그의 대중적 이미지를 더욱 훼손시켰다.
1998년, 압둘자바는 마이애미 돌핀스의 러닝백 카림 압둘자바 (현 압둘-카림 알-자바르, 본명 샤몬 샤)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한 후 합의에 도달했다. 그는 카림이 압둘자바라는 명칭과 돌핀스 유니폼의 등번호 33번을 사용하여 자신이 유명하게 만든 이름으로 이득을 취하고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젊은 압둘자바는 돌핀스에서 뛰는 동안 유니폼 이름표를 "압둘"로 변경해야 했다. 이 미식축구 선수 또한 UCLA의 운동선수였다.
9.3. 건강 문제
압둘자바는 편두통에 시달렸고, 증상을 줄이기 위해 대마초를 사용한 것이 법적 문제로 이어지기도 했다. 2009년 11월, 압둘자바는 필라델피아 염색체 양성 만성 골수성 백혈병이라는 백혈병의 일종인 혈액 및 골수암을 앓고 있다고 발표했다. 이 질병은 2008년 12월에 진단되었지만, 압둘자바는 매일 경구 약물을 복용하고, 두 달에 한 번 전문가를 만나고, 정기적으로 혈액 검사를 받음으로써 자신의 상태를 관리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2009년 기자회견에서 이 질병이 자신이 정상적인 삶을 사는 것을 막지 못할 것이라고 믿는다고 밝혔다. 압둘자바는 자신의 암 치료제인 글리벡을 생산하는 노바티스의 대변인이기도 하다.
2011년 2월, 압둘자바는 트위터를 통해 자신의 백혈병이 사라졌고 "100% 암이 없다"고 발표했다. 며칠 후, 그는 자신의 잘못된 진술을 명확히 했다: "암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결코 아니며, 나는 그것을 알았어야 했다. 내 암은 지금 절대적인 최소치에 있다." 2015년 4월, 압둘자바는 심혈관 질환 진단을 받고 병원에 입원했다. 그 주 후반, 그의 68번째 생일에 그는 UCLA 메디컬 센터에서 4중 관상동맥 우회 수술을 받았다.
2020년, 압둘자바는 11년 전에 전립선암 진단을 받았다고 밝혔다.
2023년 2월, 그는 자신의 심방세동 진단에 대해 공개적으로 이야기했다. 그는 브리스톨 마이어스 스큅과 화이자의 "기다릴 시간 없어(No Time to Wait)" 캠페인과 협력하여 뇌졸중 위험을 높이는 불규칙하고 빠른 심장 박동 상태의 증상에 대한 인식을 높였다. 2023년 12월, 그는 콘서트에 참석하던 중 넘어져 엉덩이뼈가 부러져 병원에 입원했다.
10. 유산 및 영예
카림 압둘자바는 농구계 및 사회 전반에 걸쳐 지대한 영향력을 남겼으며 수많은 영예를 받았다.
10.1. 운동 관련 영예 및 수상
압둘자바는 1995년 네이스미스 농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그는 1990년 뉴욕시 농구 명예의 전당의 첫 헌액자였다.
대학 경력 동안 그는 2회 AP 올해의 대학 농구 선수 (1967, 1969), 2회 오스카 로버트슨 트로피 수상자 (1967, 1968), 2회 UPI 올해의 대학 농구 선수 (1967, 1969)에 선정되었다. 그는 3회 만장일치 퍼스트 팀 올아메리칸 (1967-1969)이었고, 3회 NCAA 농구 챔피언 팀 (1967-1969)에서 뛰었으며, 3회 NCAA 토너먼트 최우수 선수 (1967-1969)로 영예를 안았고, 1969년에는 최초의 네이스미스 대학 올해의 선수가 되었다. 그는 3회 퍼스트 팀 올-팩-8 (1967-1969)에 선정되었다. 2007년에는 전미 대학 농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NBA 경력에서는 올해의 신인상 (1970), 6회 NBA 챔피언 (1971, 1980, 1982, 1985, 1987, 1988), 2회 NBA 파이널 MVP (1971, 1985), 6회 NBA MVP (1971, 1972, 1974, 1976, 1977, 1980), 6회 스포팅 뉴스 NBA MVP (동일 연도)를 수상했다. 그는 19회 NBA 올스타 (1970-1977, 1979-1989)에 선정되었고, 15회 올NBA 팀 (10회 퍼스트 팀, 5회 세컨드 팀), 11회 NBA 올디펜시브 팀 (5회 퍼스트 팀, 6회 세컨드 팀)에 이름을 올렸다. 그는 2회 NBA 득점왕 (1971, 1972), 1회 NBA 리바운드왕 (1976), 4회 NBA 블록왕 (1975, 1976, 1979, 1980)을 차지했다. 그는 NBA 35주년 기념팀, NBA 50주년 기념팀, NBA 75주년 기념팀에 선정되었다. 그의 등번호 33번은 밀워키 벅스와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에서 영구 결번되었다. 그는 2회 미스터 농구 USA (1964, 1965), 3회 퍼레이드 매거진 올아메리칸 퍼스트 팀 (1963-1965)에 선정되었다. 2012년 11월 16일, 로스앤젤레스 스테이플스 센터 앞에 압둘자바의 동상이 공개되었다.
10.2. 농구에 미친 영향
압둘자바는 기록적인 6번의 MVP 상을 수상했다. 그의 통산 38,387점은 2023년 2월 7일 르브론 제임스가 그를 넘어설 때까지 NBA 통산 득점 기록이었다. 압둘자바는 약 39년 동안 득점 기록을 보유했는데, 이는 리그 역사상 가장 긴 기간이다. 그의 스카이훅 슛은 역대 가장 막을 수 없는 슛 중 하나로 여겨진다. 그는 6번의 NBA 챔피언십 우승과 2번의 파이널 MVP를 차지했으며, 15번의 올NBA 팀과 11번의 올디펜시브 팀에 선정되었고, 19번의 올스타 팀에 선정되었다. 이는 2024년 제임스가 경신할 때까지 기록이었다. 압둘자바는 NBA 35주년, 50주년, 75주년 기념팀에 선정되었다. 그는 경력 동안 평균 24.6점, 11.2리바운드, 3.6어시스트, 2.6블록을 기록했으며, 30점 이상 16리바운드 이상을 기록한 시즌이 3번 연속이었고, 27점 이상 14.5리바운드 이상을 기록한 시즌이 6번이었다. 그는 NBA 통산 리바운드(17,440개)에서 3위이다. 그는 통산 블록(3,189개)에서 3위인데, 이는 이 농구 통계가 그의 경력 4년차(1974년)까지 기록되지 않았다는 점을 고려하면 인상적인 기록이다. 그는 한 시즌에 리바운드와 블록 모두에서 NBA 선두를 차지한 5명의 선수 중 한 명이다.
압둘자바는 경력 정점의 지배력과 후기 경력의 장수 및 꾸준한 탁월함을 결합했다. NBA에서 요가를 사용한 선구자였던 그는 이소룡에게 "무술의 훈련과 영성"을 가르쳐준 공로를 인정했는데, 이는 그가 "20년 동안 부상 없이 NBA에서 경쟁력 있게 뛸 수 있었던" 주요 요인이었다. 압둘자바는 경력 동안 팀의 정규 시즌 경기 중 95%에 출전했으며, 20시즌 중 11시즌에서 80경기 이상을 뛰었고, 5번은 82경기 전부에 출전했다. 1980년 여섯 번째이자 마지막 MVP를 차지한 후에도 그는 다음 6시즌 동안 20점 이상을 기록했으며, 38세의 17번째 시즌에는 경기당 23점을 기록했다. 그는 15년 간격으로 퍼스트 팀 올NBA에 선정되었고, 파이널 MVP는 14시즌 간격으로 수상했다.
역대 가장 우아한 농구 선수 중 한 명인 압둘자바는 역대 최고의 센터이자 NBA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 중 한 명으로 여겨진다. 그는 2007년 ESPN에 의해 윌트 체임벌린을 제치고 역대 최고의 센터로 선정되었고, 2018년 슬램지의 "역대 100대 선수" 목록에서 4위에 올랐으며, 2020년 ESPN의 역대 NBA 선수 74인 목록에서 3위에 올랐는데, 이는 빌 러셀과 체임벌린을 제치고 역대 최고의 센터였다. 리그 전문가들과 농구 전설들은 그를 역대 최고의 선수를 논할 때 자주 언급했다. 라일리는 1985년에 "더 이상 판단할 필요가 있는가? 한 사람이 기록을 깨고, 챔피언십에서 우승하고, 엄청난 비판과 책임을 견뎌냈는데, 왜 판단하는가? 그를 역대 최고의 선수로 축배를 들자"고 말했다. 2023년, 제임스가 NBA 통산 득점 기록을 경신하려 할 때, 압둘자바는 여전히 라일리의 최고의 선수 선택이었다: "우리는 역대 최고의 선수 없이는 챔피언십에서 우승하지 못한다. 그는 역대 최고의 무기를 가지고 있었다. 스카이훅은 막을 수 없었다. 경기 마지막 순간에는 한 사람에게 갈 것이다." 마이애미 히트의 사장으로서 라일리는 제임스가 로스터에 있을 때 두 번의 NBA 타이틀을 획득했다. 아이재아 토마스는 "숫자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면, 카림이 역대 최고의 선수이다"라고 말했다. 2013년, 줄리어스 어빙은 "역대 선수들 중 카림은 여전히 1위이다. 그는 당신이 프랜차이즈를 시작해야 할 선수이다"라고 말했다. 2015년, ESPN은 압둘자바를 NBA 역사상 최고의 센터로 선정했고, 마이클 조던에 이어 역대 NBA 선수 중 2위로 평가했다. 조던의 슛은 황홀하고 상상할 수 없는 것으로 여겨졌지만, 압둘자바의 스카이훅은 자동적이었고, 그 자신은 이 슛을 "매력적이지 않다"고 불렀다. 2016년, 압둘자바의 유일하게 인정된 루키 카드는 경매에서 50.19 만 USD에 팔리며 역대 가장 비싼 농구 카드가 되었다(이 기록은 이후 경신되었다). 2022년, 그는 ESPN의 NBA 75주년 기념팀 목록에서 3위(포지션 1위)에 올랐고, 디 애슬레틱의 유사한 목록에서도 3위(조던과 제임스 다음)에 올랐다.
압둘자바는 또한 1978년 아디다스와 스니커즈 후원 계약을 체결한 최초의 NBA 선수였다. 그는 곧 최초의 시그니처 슈즈를 가진 선수가 되었다. 2014년, UCLA 브루인스는 2월 13일 콜로라도를 상대로 "더 블루프린트" 크레이지 8을 착용했고, 이 신발은 2월 14일부터 온라인과 뉴올리언스의 아디다스 매장에서 NBA 올스타 주말 동안 판매되었다.
10.3. 비운동 관련 영예 및 인정
2011년, 압둘자바는 암 연구 인식을 높이는 데 기여한 공로로 더블 헬릭스 메달을 수상했다. 또한 2011년, 압둘자바는 뉴욕 공과대학교에서 명예 학위를 받았다. 2016년, 압둘자바는 퇴임하는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으로부터 대통령 자유 훈장을 수여받았다. 2020년, 압둘자바는 다큐멘터리 특별 프로그램 블랙 패트리어츠: 혁명의 영웅들의 내레이션으로 프라임타임 에미상 최우수 내레이터 후보에 올랐다.
11. 통계 자료
11.1. 정규 시즌 통계
연도 | 팀 | 경기 출전 | 선발 출전 | 경기당 출전 시간 | 필드골 성공률 | 3점슛 성공률 | 자유투 성공률 | 경기당 리바운드 | 경기당 어시스트 | 경기당 스틸 | 경기당 블록 | 경기당 득점 |
---|---|---|---|---|---|---|---|---|---|---|---|---|
1969 | 밀워키 | 82 | - | 43.1 | .518 | - | .653 | 14.5 | 4.1 | - | - | 28.8 |
1970 | 밀워키 | 82 | - | 40.1 | .577 | - | .690 | 16.0 | 3.3 | - | - | 31.7 |
1971 | 밀워키 | 81 | - | 44.2 | .574 | - | .689 | 16.6 | 4.6 | - | - | 34.8 |
1972 | 밀워키 | 76 | - | 42.8 | .554 | - | .713 | 16.1 | 5.0 | - | - | 30.2 |
1973 | 밀워키 | 81 | - | 43.8 | .539 | - | .702 | 14.5 | 4.8 | 1.4 | 3.5 | 27.0 |
1974 | 밀워키 | 65 | - | 42.3 | .513 | - | .763 | 14.0 | 4.1 | 1.0 | 3.3 | 30.0 |
1975 | L.A. 레이커스 | 82 | 82 | 41.2 | .529 | - | .703 | 16.9 | 5.0 | 1.5 | 4.1 | 27.7 |
1976 | L.A. 레이커스 | 82 | 82 | 36.8 | .579 | - | .701 | 13.3 | 3.9 | 1.2 | 3.2 | 26.2 |
1977 | L.A. 레이커스 | 62 | - | 36.5 | .550 | - | .783 | 12.9 | 4.3 | 1.7 | 3.0 | 25.8 |
1978 | L.A. 레이커스 | 80 | - | 39.5 | .577 | - | .736 | 12.8 | 5.4 | 1.0 | 4.0 | 23.8 |
1979 | L.A. 레이커스 | 82 | - | 38.3 | .604 | .000 | .765 | 10.8 | 4.5 | 1.0 | 3.4 | 24.8 |
1980 | L.A. 레이커스 | 80 | - | 37.2 | .574 | .000 | .766 | 10.3 | 3.4 | .7 | 2.9 | 26.2 |
1981 | L.A. 레이커스 | 76 | 76 | 35.2 | .579 | .000 | .706 | 8.7 | 3.0 | .8 | 2.7 | 23.9 |
1982 | L.A. 레이커스 | 79 | 79 | 32.3 | .588 | .000 | .749 | 7.5 | 2.5 | .8 | 2.2 | 21.8 |
1983 | L.A. 레이커스 | 80 | 80 | 32.8 | .578 | .000 | .723 | 7.3 | 2.6 | .7 | 1.8 | 21.5 |
1984 | L.A. 레이커스 | 79 | 79 | 33.3 | .599 | .000 | .732 | 7.9 | 3.2 | .8 | 2.1 | 22.0 |
1985 | L.A. 레이커스 | 79 | 79 | 33.3 | .564 | .000 | .765 | 6.1 | 3.5 | .8 | 1.6 | 23.4 |
1986 | L.A. 레이커스 | 78 | 78 | 31.3 | .564 | .333 | .714 | 6.7 | 2.6 | .6 | 1.2 | 17.5 |
1987 | L.A. 레이커스 | 80 | 80 | 28.9 | .532 | .000 | .762 | 6.0 | 1.7 | .6 | 1.2 | 14.6 |
1988 | L.A. 레이커스 | 74 | 74 | 22.9 | .475 | .000 | .739 | 4.5 | 1.0 | .5 | 1.1 | 10.1 |
경력 | 1,560 | 789 | 36.8 | .559 | .056 | .721 | 11.2 | 3.6 | .9 | 2.6 | 24.6 | |
올스타 | 18 | 13 | 24.9 | .493 | .000 | .820 | 8.3 | 2.8 | .4 | 2.1 | 13.9 |
11.2. 플레이오프 통계
연도 | 팀 | 경기 출전 | 선발 출전 | 경기당 출전 시간 | 필드골 성공률 | 3점슛 성공률 | 자유투 성공률 | 경기당 리바운드 | 경기당 어시스트 | 경기당 스틸 | 경기당 블록 | 경기당 득점 |
---|---|---|---|---|---|---|---|---|---|---|---|---|
1970 | 밀워키 | 10 | - | 43.5 | .567 | - | .733 | 16.8 | 4.1 | - | - | 35.2 |
1971 | 밀워키 | 14 | - | 41.2 | .515 | - | .673 | 17.0 | 2.5 | - | - | 26.6 |
1972 | 밀워키 | 11 | - | 46.4 | .437 | - | .704 | 18.2 | 5.1 | - | - | 28.7 |
1973 | 밀워키 | 6 | - | 46.0 | .428 | - | .543 | 16.2 | 2.8 | - | - | 22.8 |
1974 | 밀워키 | 16 | - | 47.4 | .557 | - | .736 | 15.8 | 4.9 | 1.3 | 2.4 | 32.2 |
1977 | L.A. 레이커스 | 11 | - | 42.5 | .607 | - | .725 | 17.7 | 4.1 | 1.7 | 3.5 | 34.6 |
1978 | L.A. 레이커스 | 3 | - | 44.7 | .521 | - | .556 | 13.7 | 3.7 | .7 | 4.0 | 27.0 |
1979 | L.A. 레이커스 | 8 | - | 45.9 | .579 | - | .839 | 12.6 | 4.8 | 1.0 | 4.1 | 28.5 |
1980 | L.A. 레이커스 | 15 | - | 41.2 | .572 | .000 | .790 | 12.1 | 3.1 | 1.1 | 3.9 | 31.9 |
1981 | L.A. 레이커스 | 3 | - | 44.7 | .462 | .000 | .714 | 16.7 | 4.0 | 1.0 | 2.7 | 26.7 |
1982 | L.A. 레이커스 | 14 | - | 35.2 | .520 | .000 | .632 | 8.5 | 3.6 | 1.0 | 3.2 | 20.4 |
1983 | L.A. 레이커스 | 15 | - | 39.2 | .568 | .000 | .755 | 7.7 | 2.8 | 1.1 | 3.7 | 27.1 |
1984 | L.A. 레이커스 | 21 | - | 36.5 | .555 | - | .750 | 8.2 | 3.8 | 1.1 | 2.1 | 23.9 |
1985 | L.A. 레이커스 | 19 | 19 | 32.1 | .560 | - | .777 | 8.1 | 4.0 | 1.2 | 1.9 | 21.9 |
1986 | L.A. 레이커스 | 14 | 14 | 34.9 | .557 | - | .787 | 5.9 | 3.5 | 1.1 | 1.7 | 25.9 |
1987 | L.A. 레이커스 | 18 | 18 | 31.1 | .530 | .000 | .795 | 6.8 | 2.0 | .4 | 1.9 | 19.2 |
1988 | L.A. 레이커스 | 24 | 24 | 29.9 | .464 | .000 | .789 | 5.5 | 1.5 | .6 | 1.5 | 14.1 |
1989 | L.A. 레이커스 | 15 | 15 | 23.4 | .463 | - | .721 | 3.9 | 1.3 | .3 | .7 | 11.1 |
경력 | 237 | 90 | 37.3 | .533 | .000 | .740 | 10.5 | 3.2 | 1.0 | 2.4 | 24.3 |
12. 저술
그가 집필한 주요 서적 목록은 다음과 같다.
- 자이언트 스텝스 (Giant Steps, 1983)
- 카림 (Kareem, 1990)
- 선택된 자이언트 스텝스 (작가들의 목소리) (Selected from Giant Steps (Writers' Voices), 1999)
- 용기의 흑인 프로필: 아프리카계 미국인 성취의 유산 (Black Profiles in Courage: A Legacy of African-American Achievement, 1996)
- 보호구역에서의 한 시즌: 화이트 마운틴 아파치족과의 나의 체류 (A Season on the Reservation: My Sojourn with the White Mountain Apaches, 2000)
- 형제들의 무기: 제2차 세계 대전의 잊혀진 영웅들, 761전차대대의 장대한 이야기 (Brothers in Arms: The Epic Story of the 761st Tank Battalion, World War II's Forgotten Heroes, 2004)
- 거인들의 어깨 위에서: 할렘 르네상스를 통한 나의 여정 (On the Shoulders of Giants: My Journey Through the Harlem Renaissance, 2007)
- 내 세상은 무슨 색깔인가? 아프리카계 미국인 발명가들의 잃어버린 역사 (What Color Is My World? The Lost History of African American Inventors, 2012)
- 스트리트볼 크루 북 1권 페인트 속의 사스콰치 (Streetball Crew Book One Sasquatch in the Paint, 2013)
- 스트리트볼 크루 북 2권 게임 훔치기 (Streetball Crew Book Two Stealing the Game, 2015)
- 마이크로프트 홈즈 (Mycroft Holmes, 2015)
- 벽에 쓰인 글: 흑백을 넘어 새로운 평등을 찾아서 (Writings on the Wall: Searching for a New Equality Beyond Black and White, 2016)
- 코치 우든과 나: 코트 안팎에서의 50년 우정 (Coach Wooden and Me: Our 50-Year Friendship On and Off the Court, 2017)
- 카림이 되다: 코트 안팎에서 성장하기 (Becoming Kareem: Growing Up On and Off the Court, 2017)
- 마이크로프트 홈즈와 아포칼립스 핸드북 (Mycroft Holmes and The Apocalypse Handbook, 2017)
- 마이크로프트와 셜록 (Mycroft and Sherlock, 2018)
- 마이크로프트와 셜록: 텅 빈 새장 (Mycroft and Sherlock: The Empty Birdcage, 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