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어린 시절과 배경
카를로스 4세는 카를로스 3세와 그의 아내 작센의 마리아 아말리아의 둘째 아들로 1748년 11월 11일 나폴리에서 태어났다. 당시 그의 아버지는 나폴리 왕국과 시칠리아 왕국의 국왕이었다. 그의 형 칼라브리아 공작 펠리페 왕자는 학습 장애와 간질로 인해 두 왕위에서 모두 제외되었다. 나폴리와 시칠리아에서 카를로스 4세는 '타란토 공작'으로 불렸다.
그는 폴란드 국왕이자 작센 선제후였던 아우구스트 3세의 딸인 어머니의 혈통을 통해 훌륭한 체격과 강인한 체력을 물려받았다. 젊은 시절 그는 시골에서 자신이 아는 가장 강한 남자들과 레슬링을 즐겼다. 반면 지적인 면에서는 뛰어난 군주였던 아버지와는 달리, 많은 사람들에게 둔하고 그저 정직할 뿐이라고 평가받았다. 그의 아버지조차 그와 대화할 때마다 "카를로스, 너는 바보구나"라고 말할 정도였다. 사촌인 파르마의 마리아 루이사 공녀와의 결혼이 결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여성과 교제한 경험이 없었던 그는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때도 그의 아버지는 "바보 같은 카를로스! 여자 따위는 모두 똑같다!"라고 일갈했다고 한다. 그는 사냥과 스포츠를 선호하여 국정 업무를 처리하기보다는 이쪽에 더 몰두했기 때문에 '엘 카사도르'(El Cazador스페인어, '사냥꾼'이라는 뜻)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역사가 스탠리 G. 페인은 카를로스 4세를 "마음씨는 착하지만 나약하고 단순한" 인물로 평가했다.
그는 아버지의 생전에도 국왕이 총애하던 대신을 몰아내고 아란다 백작 페드로 파블로 아바르카 데 볼레아로 교체하려 시도하다가, 아내의 손에 의해 심문을 받고 축출되기도 했다.
2. 통치

2.1. 즉위와 초기 통치
1788년 카를로스 3세가 사망하자 카를로스 4세가 왕위를 계승하여 다음 20년간 통치했다. 그는 왕권의 신성함에 대한 깊은 신념을 가지고 있었고, 절대적이고 강력한 국왕의 모습을 유지하려 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정부 운영에 수동적인 역할만을 수행했다. 국정 업무는 그의 아내 파르마의 마리아 루이사와 그가 총리로 임명한 마누엘 데 고도이에게 맡겨졌다.
즉위 초 카를로스 4세는 아버지의 정책을 유지할 의도였으며, 이에 따라 아버지의 총리였던 플로리다블랑카 백작 호세 모니뇨 이 레돈도를 유임시켰다. 플로리다블랑카는 1789년 밴쿠버섬 서해안에서 발생한 사소한 무역 및 항해 분쟁인 누트카 위기에서 영국과의 전쟁을 피했다. 스페인은 영국에 대항하여 프랑스 동맹의 지원을 받을 수도 있었으나, 프랑스 혁명 발발로 프랑스가 지원을 거부하자 플로리다블랑카는 굴욕적으로 영국의 요구에 굴복하고 협상을 진행할 수밖에 없었다.
1792년, 정치적, 개인적 적대자들의 압력으로 플로리다블랑카는 해임되었고, 아란다 백작 페드로 파블로 아바르카 데 볼레아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그러나 프랑스 혁명 공화국과의 전쟁이 발발하자, 자유주의적 성향의 아란다 백작은 곧 마누엘 데 고도이로 교체되었다. 고도이는 왕비의 총애를 받았으며 그녀의 연인으로 널리 알려져 있었고, 국왕의 지속적인 총애 또한 누렸다.
2.2. 정부 운영과 대신들의 영향력
카를로스 4세는 국정 운영에 대해 '아무것도 하지 않는 왕'으로 평가받았다. 그는 지배적인 왕비와 경험은 부족하지만 야심 찬 총리 고도이에게 국정을 맡겼다. 국왕의 통치 능력 부족, 왕비가 고도이를 포함한 여러 연인을 두었다는 소문, 그리고 고도이 자신의 사적인 의제가 결합되면서 왕실은 백성들로부터 점점 더 멀어졌다. 고도이는 사실상 왕비의 집무실을 장악했으며, 국왕은 자신의 삶 전체를 고도이에게 맡겼다.
2.3. 외교 정책 및 전쟁
프랑스 혁명 발발과 그의 부르봉 왕가 친척인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의 처형은 카를로스 4세에게 공포를 안겨주었다. 1793년 프랑스가 루이 16세 처형에 대한 스페인의 항의에 전쟁을 선포하자, 포르투갈과 스페인은 프랑스에 대항하는 상호 보호 조약을 체결했다. 그러나 1795년 프랑스는 고도이를 강제하여 제1차 산일데폰소 조약을 맺고 영국 왕국에 전쟁을 선포하게 했다. 이 조약 체결에 앞장선 고도이 총리에게 카를로스 4세는 '평화 대공'이라는 칭호를 내렸다.
그 결과 스페인은 프랑스 혁명 전쟁에서 공화정 프랑스와 동맹을 맺은 해양 제국 중 하나가 되었고, 상당 기간 동안 동맹 관계를 유지했다. 스페인은 트라팔가르 해전에서 영국에 패배하고 모든 함대를 잃었으며, 대륙봉쇄령을 지지했다. 1800년 10월, 스페인은 프랑스와 비밀리에 제3차 산일데폰소 조약을 맺고 북미 식민지 루이지애나를 이탈리아 반도의 토스카나 영토와 교환하는 조건으로 양도했다. 이는 나폴레옹이 북미에 식민지 제국 건설을 계획하고 영국을 견제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되었으며, 남미 스페인 식민지 보호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논리로 스페인과의 협상을 주도했다.
1807년 나폴레옹이 프로이센에 승리한 후, 고도이는 스페인을 다시 프랑스 편으로 유지했다. 그러나 이러한 동맹 전환은 신뢰할 수 있는 동맹국으로서 카를로스 4세의 입지를 약화시켰고, 고도이의 인기를 더욱 떨어뜨렸으며, 영국과의 동맹을 선호하던 '페르난디스타스'(페르난도 7세의 지지자들)의 세력을 강화시켰다.
2.4. 국내 정책 및 경제
스페인의 경제 문제는 오랫동안 지속되어 왔지만, 동맹국 프랑스가 추구하는 전쟁에 스페인이 얽히면서 더욱 악화되었다. 재정적 필요가 그의 국내외 정책을 좌우했다. 고도이의 경제 정책은 카를로스 4세 정권에 대한 불만을 증대시켰다.
주요 경제 개혁을 시도하기 위해, 개혁주의자이자 얀센주의 성향의 보수주의자였던 가스파르 멜초르 데 호베야노스는 농업 부흥을 촉진하기 위한 토지 소유권의 주요 구조 개혁을 제안했다. 그의 1795년 저서 『농업법안에 대한 보고서』(Informe en el expediente de ley agraria스페인어)는 스페인이 인구 증가와 번영을 위해 번성하는 농업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의 분석에 따르면, 토지 소유권의 집중과 전통 및 제도적 장벽이 농업 문제의 핵심이었다. 그는 마을이 소유한 공공 토지와 메스타(가축 소유주들의 조직으로, 목초지를 자신들의 자산으로 유지하던)가 통제하는 스페인 영토의 넓은 지역을 분할하여 매각할 것을 요구했다. 호베야노스는 또한 귀족 가문의 토지 재산이 분할되지 않고 세대를 통해 상속되는 마요라스고의 폐지와 가톨릭 교회가 소유한 토지의 매각을 주장했다. 이러한 정책의 목표는 스페인에 자영농을 육성하여 그들이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고 농업 생산성을 높이도록 하는 것이었으나, 그 대가는 교회와 귀족의 권력을 약화시키는 것이었다.
즉각적인 수입 문제가 더욱 심각해지자, 1804년 왕실은 해외 식민지에서 교회가 장기적으로 제공했던 담보 대출을 즉시 상환하도록 강제하는 조치를 부과했다. 이는 교회의 부와 권력을 약화시키려는 목적이었지만, 부유한 토지 소유 엘리트들은 담보 잡힌 재산에 대한 전액 지불 방법이 없어 재정적 파탄에 직면했다. 이 경솔한 왕실 칙령은 누에바 에스파냐(멕시코)의 독립 운동에 주요 요인으로 작용했다고 평가된다. 이 칙령은 카를로스 4세와 페르난도 7세가 퇴위하자마자 효력을 잃었지만, 시행 중에는 엘리트들의 지지를 약화시켰다.
2.5. 과학 탐험 및 발견
카를로스 4세의 통치 기간 동안 왕실 주도의 과학 탐험이 계속되었으며, 이 중 일부는 카를로스 3세에 의해 처음 승인된 것이었다. 누에바 그라나다 왕립 식물 탐험대(1783년~1816년)와 누에바 에스파냐 왕립 식물 탐험대(1787년~1803년)는 왕실의 자금 지원을 받았다. 말라스피나 탐험대(1789년~1794년)는 스페인 해군 사령관 알레한드로 말라스피나가 이끌었으며, 박물학자와 식물 세밀화가들이 스페인 왕실을 위한 정보를 수집하는 중요한 과학 탐험이었다.
1803년, 그는 스페인의 해외 영토에 천연두 백신을 보급하기 위한 발미스 탐험대를 승인했다. 1799년에는 프로이센 귀족이자 과학자인 알렉산더 폰 훔볼트가 스페인 아메리카를 자유롭게 여행하도록 허가했으며, 왕실 관리들에게 스페인 제국의 주요 지역 조사를 돕도록 장려했다. 훔볼트의 『누에바 에스파냐 왕국에 대한 정치적 에세이』는 그의 5년간의 여행에서 나온 중요한 출판물이었다.
2.6. 개인적 성격과 관심사
카를로스 4세는 선량하고 경건한 인물이었으나, 자신의 능력을 벗어나는 일련의 국제적 위기 속에서 허우적거렸다. 그는 '독재적이고 둔하며 어리석다'는 평을 들었다. 또한 전직 레슬링 선수였으며, 사냥에 많은 시간을 보냈다고 알려져 있다. 프란시스코 고야는 그를 여러 공식 궁정 초상화에 그렸는데, 많은 미술 평론가들은 이를 국왕의 굳건한 공허함을 풍자한 것으로 보았다.
3. 정치적 위기와 퇴위
3.1. 아랑후에스 민중 봉기와 퇴위
경제적 어려움, 왕비와 고도이 간의 성적 관계에 대한 소문, 그리고 국왕의 무능함은 국민들 사이에서 왕실의 위신을 떨어뜨렸다. 아버지로부터 왕위를 물려받기를 열망하고 총리에게 질투심을 느끼던 페르난도 왕세자는 1807년 쿠데타를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나폴레옹은 대륙봉쇄령을 위반한 포르투갈을 응징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 스페인의 고도이 내각과 1807년 퐁텐블로 조약을 맺었는데, 포르투갈 점령 후 분할 통치를 전제로 프랑스 군대가 제약 없이 스페인 영토를 통과하거나 진주할 수 있게 되었다. 1808년, 프랑스는 포르투갈을 공격한다는 명분으로 스페인 내 주요 전략적 요충지에 진지를 구축한 후 10만 명에 달하는 군대를 상주시켰다. 이를 통해 나폴레옹은 사실상 스페인을 지배할 수 있는 기회를 확보하였다.
스페인 왕실과 고도이 내각의 부패와 무능에 지쳐있던 스페인 국민들은 갑작스러운 외국 군대의 상주에 강하게 반발하였고 1808년 3월 18일, 왕세자 페르난도를 지지하는 개혁파가 아랑후에스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이 봉기는 1808년 3월 아랑후에스 민중 봉기로 이어져 고도이 내각을 붕괴시켰고, 카를로스 4세는 3월 19일 아들의 압력에 굴복하여 퇴위를 결정했다. 페르난도는 페르난도 7세로 즉위했으나, 며칠 후 카를로스 4세가 퇴위를 번복하며 나폴레옹에게 지지를 요청하면서 왕세자와의 권력 투쟁으로 번졌다.
3.2. 바욘 퇴위와 프랑스의 개입
나폴레옹은 사태 해결을 빌미로 카를로스 4세와 페르난도 7세를 모두 바욘으로 오도록 유도한 후 이들을 협박하여 강제로 폐위시켰다. 왕국에 대한 모든 권리를 박탈당한 카를로스 4세는 퐁텐블로에 감금되었고 왕세자 페르난도 7세는 발렌시아 성에 유폐되었다. 나폴레옹은 당시 스페인에 10만 명의 군대를 주둔시키고 있었고, 페르난도를 신뢰하지 않았다. 나폴레옹은 스페인이 영국과 양모 밀무역을 하며 대륙봉쇄령을 어겼다는 명분을 내세워 무력으로 스페인을 정복하였다. 이후 자신의 친형인 조제프 보나파르트를 스페인 국왕 호세 1세로 임명했으며, 이는 스페인 독립 전쟁의 시작으로 이어졌다.
4. 말년과 죽음

나폴레옹이 부르봉 왕가를 폐위시킨 후, 전 국왕 카를로스 4세와 그의 아내, 그리고 전 총리 고도이는 프랑스에서 처음에는 콩피에뉴 성에, 그리고 3년 동안 마르세유 (그의 이름을 딴 동네가 있었다)에 억류되었다. 나폴레옹이 세운 정권이 붕괴된 후, 페르난도 7세가 왕위에 복귀했다.
카를로스 4세는 1812년까지 유럽을 떠돌다가 마침내 로마의 바르베리니 궁전에 정착했다. 그의 아내는 1819년 1월 2일에 사망했으며, 그 뒤를 이어 카를로스 4세도 같은 해 1월 20일에 사망했다. 프랜시스 로널즈 경은 그의 여행 일지에 장례식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기록했다.
5. 가족
5.1. 결혼과 자녀
카를로스 4세는 1765년 그의 사촌인 파르마의 마리아 루이사와 결혼했다. 부부는 14명의 자녀를 두었으며, 이 중 7명이 성인이 될 때까지 생존했다.
Name | Portrait | Lifespan | Notes |
---|---|---|---|
카를로스 클레멘테 스페인 왕자 | ![]() | 1771년 9월 19일 - 1774년 3월 7일 | 엘 에스코리알에서 태어나 사망. 태어난 날 세례를 받았으며, 카를로스 3세가 "성부"를 대표하여 세례식에 참석했다. 교황 클레멘스 14세는 카를로스의 탄생을 축하하며 유아에게 봉헌된 강보를 보냈다. 어린 나이에 사망했다. |
카를로타 조아퀴나 포르투갈 및 알가르베의 왕비 | ![]() | 1775년 4월 25일 - 1830년 1월 7일 | 아랑후에스 왕궁에서 태어났으며, 1785년 사촌 주앙 6세와 결혼하여 1816년 포르투갈의 왕비가 되었다. 미래의 페드루 1세를 포함한 자녀를 두었다. 케루스 국립 궁전에서 사망했다. |
마리아 루이사 스페인 왕녀 | 1777년 9월 11일 - 1782년 7월 2일 | 라 그란하 데 산 일데폰소 왕궁에서 태어나 사망했다. 어린 나이에 사망했다. | |
마리아 아말리아 스페인 왕녀 | ![]() | 1779년 1월 9일 - 1798년 7월 22일 | 아랑후에스 왕궁에서 태어났으며, 1795년 삼촌 스페인의 안토니오 파스쿠알 왕자와 결혼했다. 1798년 사산아를 낳은 직후 사망했다. |
카를로스 도밍고 스페인 왕자 | ![]() | 1780년 3월 5일 - 1783년 6월 11일 | 엘 파르도 왕궁에서 태어나 아랑후에스 왕궁에서 사망했다. 그의 탄생 후, 아버지는 축하의 의미로 푸에르토 산 훌리안의 모든 죄수들을 사면했다. 어린 나이에 사망했다. |
마리아 루이사 에트루리아 왕비 루카 공작부인 | ![]() | 1782년 7월 6일 - 1824년 3월 13일 | 라 그란하 데 산 일데폰소 왕궁에서 태어났으며, 1795년 사촌 루도비코 1세와 결혼하여 카를로 2세를 포함한 자녀를 두었다. 1817년 루카 공작부인이 되었으며, 1824년 로마에서 암으로 사망했다. |
카를로스 프란시스코 데 파울라 스페인 왕자 | ![]() | 1783년 9월 5일 - 1784년 11월 11일 | 쌍둥이로, 라 그란하 데 산 일데폰소 왕궁에서 태어나 사망했다. 그들의 탄생은 스페인 국민에게 중요한 사건이었고, 계승의 안정성을 제공했으나, 카를로스와 펠리페의 이른 죽음으로 인해 이러한 안정성은 단절되었다. 둘 다 어린 나이에 사망했다. |
펠리페 프란시스코 데 파울라 스페인 왕자 | 1783년 9월 5일 - 1784년 10월 18일 | ||
페르난도 (7세) 스페인 국왕 | ![]() | 1784년 10월 14일 - 1833년 9월 29일 | 엘 에스코리알에서 태어나 사망했다. 1808년 아버지의 뒤를 이어 국왕이 되었으나, 한 달 후 조제프 보나파르트에 의해 폐위되었다. 1802년 사촌 나폴리와 시칠리아의 마리아 안토니아 공주와 결혼했으나 자녀는 없었다. 1813년 국왕으로 복위되었다. 1816년 조카 포르투갈의 마리아 이사벨과 결혼하여 자녀를 두었다. 1819년 작센의 마리아 조세파 아말리아와 결혼했으나 자녀는 없었다. 1829년 조카 양시칠리아의 마리아 크리스티나와 결혼하여 미래의 이사벨 2세를 포함한 자녀를 두었다. 1833년 사망했다. |
카를로스 마리아 이시드로 베니토 몰리나 백작 | 1788년 3월 29일 - 1855년 3월 10일 | 아랑후에스 왕궁에서 태어났다. 1816년 조카 포르투갈의 마리아 프란시스카 왕녀와 결혼하여 자녀를 두었다. 1838년 조카 베이라 공주 마리아 테레사와 결혼했으나 자녀는 없었다. 스페인 왕위의 첫 번째 카를로스파 왕위 요구자로 "카를로스 5세"로 불렸다. 1845년부터 1855년 사망 시까지 "몰리나 백작" 칭호를 사용했다. | |
마리아 이사벨 양시칠리아 왕비 | ![]() | 1789년 7월 6일 - 1848년 9월 13일 | 마드리드 왕궁에서 태어났으며, 1802년 사촌 프란체스코 1세와 결혼하여 미래의 페르디난도 2세를 포함한 자녀를 두었다. 1825년부터 1830년 남편 사망 시까지 왕비였다. 1848년 포르티치 궁전에서 사망했다. |
마리아 테레사 스페인 왕녀 | ![]() | 1791년 2월 16일 - 1794년 11월 2일 | 아랑후에스 왕궁에서 태어나 엘 에스코리알에서 사망했다. 어린 나이에 천연두로 사망했다. |
펠리페 마리아 스페인 왕자 | ![]() | 1792년 3월 28일 - 1794년 3월 1일 | 아랑후에스 왕궁에서 태어나 마드리드 왕궁에서 사망했다. 어린 나이에 사망했다. |
프란시스코 데 파울라 | ![]() | 1794년 3월 10일 - 1865년 8월 13일 | 아랑후에스 왕궁에서 태어났으며, 1819년 조카 나폴리와 시칠리아의 루이사 카를로타 공주와 결혼하여 자녀를 두었다. 1865년 마드리드에서 사망했다. |
6. 조상
카를로스 4세의 조상 가계도는 다음과 같다.
- 1. 카를로스 4세
- 2. 카를로스 3세
- 3. 작센의 마리아 아말리아
- 4. 펠리페 5세
- 5. 파르네세의 엘리사베타
- 6. 아우구스트 3세
- 7.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요제파
- 8. 루이 (그랑 도팽)
- 9. 바이에른의 마리아 안나 빅토리아
- 10. 오도아르도 파르네세
- 11. 노이부르크의 도로테아 소피
- 12. 아우구스트 2세
- 13. 브란덴부르크바이로이트의 크리스티아네 에버하르디네
- 14. 요제프 1세
- 15.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의 빌헬미네 아말리에
- 16. 루이 14세
- 17. 스페인의 마리아 테레사
- 18. 페르디난트 마리아
- 19. 사보이아의 헨리에타 아델라이데
- 20. 라누치오 2세 파르네세
- 21. 에스테의 이사벨라
- 22. 필리프 빌헬름
- 23. 헤센다름슈타트의 엘리사베트 아말리에
- 24. 요한 게오르크 3세
- 25. 덴마크의 안나 소피
- 26. 크리스티안 에른스트
- 27. 뷔르템베르크의 소피 루이제
- 28. 레오폴트 1세
- 29. 노이부르크의 엘레오노레 막달레네
- 30. 요한 프리드리히
- 31. 팔츠의 베네딕타 헨리에타
7. 역사적 평가 및 영향
카를로스 4세의 통치 기간은 스페인 역사에서 주요한 부정적 전환점으로 평가된다. 그는 국제적 위기를 처리할 능력이 부족했으며, 그의 무능함은 스페인의 정치적, 경제적 혼란을 심화시켰다. 그의 재위 기간 동안 스페인은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며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특히 트라팔가르 해전에서 스페인 함대가 전멸하면서 해양 제국으로서의 위상이 크게 실추되었다.
국내적으로는 왕비 마리아 루이사와 총신 마누엘 데 고도이의 국정 농단이 심화되어 왕실의 권위가 땅에 떨어졌고, 국민들의 불만이 고조되었다. 고도이의 경제 정책은 재정난을 심화시켰고, 특히 1804년 교회 재산 몰수령은 식민지 엘리트들에게 큰 타격을 주어 누에바 에스파냐(멕시코)의 독립 운동에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카를로스 4세의 리더십 부재와 통치에 대한 무관심은 스페인을 약화시키고 외부 세력의 개입을 용이하게 만들었다. 1808년 아랑후에스 민중 봉기와 이어지는 바욘 퇴위는 스페인 왕실의 무능을 극명하게 드러냈으며, 나폴레옹의 스페인 점령과 스페인 독립 전쟁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은 스페인 제국의 쇠퇴를 가속화하고 라틴 아메리카 식민지들의 독립을 촉진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그의 초상화를 그린 프란시스코 고야의 작품들은 종종 국왕의 '굳건한 공허함'을 풍자하는 것으로 해석되며, 이는 당대인들이 그를 평가했던 시각을 반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