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생애
천경자 화백의 삶은 예술가로서의 여정과 깊이 연결되어 있으며, 개인적인 경험들이 그녀의 작품 세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1.1. 출생 및 유년 시절
천경자는 1924년 11월 11일 전라남도 고흥군에서 군서기였던 아버지 천성욱과 외할아버지 슬하 무남독녀였던 어머니 박운아의 1남 2녀 중 장녀로 태어났다. 그녀의 외할아버지는 대한제국 초기 시절부터 깨어 있는 사상을 지닌 인물로, 딸인 박운아 여사에게 남장을 시켜 서당에 보낼 정도였다. 이러한 외할아버지는 큰 손녀인 천경자를 금지옥엽처럼 예뻐하며 '옥자(玉子한국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천경자는 밤마다 외할아버지의 무릎에 누워 '심청전', '흥부전', '춘향전', '삼국지', '수호전' 등을 들으며 잠이 들었고, 천자문과 창까지 배우며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보통학교 1학년 때 일본인 담임 선생님이 그녀의 그림 소질을 발견했으며, 대청마루 흰 횟가루 벽에 그린 여인상이 외할머니 눈에 띄어 매를 맞기도 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1.2. 교육
광주공립여자고등보통학교(현 전남여자고등학교) 재학 시절, 혼담이 오가자 시집가기 싫어 다듬잇돌 위에 앉아 미친 시늉을 했을 정도로 자유로운 영혼이었다. 1940년 17세 때 여수항을 출발해 일본 도쿄로 유학길에 올랐다. 도쿄여자미술전문학교(현 여자미술대학)에 입학할 무렵, 본명인 옥자(玉子한국어)를 버리고 '경자(鏡子한국어)'라는 이름을 스스로 지어 붙였다. 도쿄에서는 야수파나 입체파 등을 가르치던 서양화 고등과보다는 곱고 섬세한 일본화 풍에 매료되어 일본화 고등과에서 모델을 보고 관찰하여 섬세하게 사생하는 법을 집중적으로 교육받았다. 일본 유학 중이던 1942년 제22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외할아버지를 그린 '조부(祖父한국어)'가 입선했고, 1943년 제23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외할머니를 그린 수석 입상 작품 '노부(老婦한국어)'가 입선하면서 일찍이 재능을 인정받았다. '조부'는 고혈압으로 반신불수가 된 몸이지만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손녀의 모델이 되어준 외할아버지의 초상화였다. 고흥에서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내고 일본 유학까지 다녀오면서 하이힐에 양장을 차려입었던 천경자의 청년기는 그녀가 평생 간직했던 자부심의 바탕이 되었다. 또한, 그녀는 프랑스 파리 아카데미 고에쓰 최고위미술교육자연구수련과정을 수료하기도 했다.
1.3. 결혼과 가족
천경자의 결혼 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제2차 세계 대전의 여파로 도쿄여자미술전문학교를 중퇴하고 귀국하던 길에 도쿄역에서 우연히 만나 표를 건넨 명문대 중퇴생 출신의 이철식과 1944년 결혼하여, 1945년 첫째 딸 이혜선을, 1946년 아들 이남훈을 낳았다. 1946년 8월부터 전남여자고등학교에서 교사 생활을 했으나, 그해 10월 중순 이철식이 젊은 나이에 장결핵증으로 요절하면서 첫 남편과의 결혼 생활은 길지 못했다. 두 살배기 딸 이혜선과 첫돌도 안 된 아들 이남훈과 함께 광주를 등지고 잠시 목포에 머무르던 중, 1948년 전라남도 목포의 한 신문사 전직 사회부 기자 출신이었던 김남중을 만난다. 1950년 한국 전쟁 통에 여동생 천옥희마저 폐병으로 숨진 후 남편 없이 두 아이를 기르던 천경자 화백은 유머 넘치고 건장했던 그에게 깊이 빠져들었다. 그녀는 자서전 '내 슬픈 전설의 49페이지'에서 "청춘에 메말라 버린 나는 목 타는 사막에서 감로수를 마신 듯한 기분이었다"고 회고했다.
그러나 김남중은 이미 부인이 있는 사람이었고 주변에 항상 여성들을 거느리고 있었다. 떳떳하지 못한 관계에 대한 자괴감과 그의 변덕스러운 태도 때문에 천경자는 김남중이 전 부인과 이혼할 때까지 그를 기다리면서도 결별을 결심하는 고통의 나날을 보냈다. 그녀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언제나 기다리는 편이 된 나는 끝없이 두 갈래로 평행선을 이루는 철길을 아득히 바라보다가 그가 다가오는 소리에 가슴 설레고 형용할 수 없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고 기록했다.
천경자는 두 남편과의 사이에 2남 2녀를 두었다. 첫 남편 이철식과의 사이에 장녀 이혜선과 장남 이남훈을, 김남중과의 사이에 차녀 김정희와 차남 김종우를 두었다. 이 가운데 맏딸 이혜선은 뉴욕에서 어머니의 마지막을 지켰다. 2006년 갤러리현대 전시에서 처음 공개된 작품 '모기장 안의 쫑쫑이'에 등장하는 모 서점 대표 김종우는 천경자의 막내아들이다. 천경자는 아이들에게 남미짱(이혜선), 후닷닷(이남훈), 미도파(김정희), 쫑쫑이(김종우)라는 애칭을 붙여주고 아이들을 모델로, 때로는 사랑했던 남자를 모델로 그림을 그렸다. 물론 천경자 화백 그림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여인의 모델은 그 자신이다.
1.4. 사망
천경자 화백은 2003년 7월 2일 뇌졸중으로 쓰러진 후 미국 뉴욕에서 맏딸 이혜선과 함께 지내며 투병했다. 그녀의 사망 소식은 한동안 외부에 알려지지 않았다. 한국 표준시로 2015년 10월 22일, 천경자 화백의 가족 측은 그녀가 2015년 8월 6일 새벽 5시에 타계했다고 전했다. 이로 인해 그녀의 사망 시기와 행적을 둘러싼 논란이 불거지기도 했다.
2. 예술 활동
천경자 화백의 예술 활동은 그녀의 독자적인 화풍과 삶의 철학이 결합된 깊이 있는 세계를 보여준다.
2.1. 예술 사조 및 주제
천경자는 여성 인물, 꽃, 동물 등을 소재로 한 대담하고 화려한 색채의 독창적인 화풍을 구축했다. 그녀의 작품에는 강렬한 색채와 섬세한 묘사가 공존하며, 내면의 고독, 슬픔, 꿈, 사랑, 모성애 등 복합적인 정서가 담겨 있다. 특히 자전적인 요소가 강한 작품들은 그녀의 삶의 경험과 깊은 연관성을 보여준다. 여동생마저 한국 전쟁 직후 폐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아픔을 견디지 못한 천 화백은 자신의 고통을 마비시킬 만큼 무섭도록 끔찍한 자극을 줄 수 있는 소재를 택해 화폭을 35마리의 뱀으로 가득 채웠다. 1953년 피란지인 부산에서 연 개인전에 내놓은 그림 '생태(生態한국어)'는 천경자 화백의 작업을 화단이 주목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2.2. 주요 작품
천경자 화백의 대표작들은 그녀의 예술 세계를 명확히 보여준다.
- 생태 (1953): 35마리의 뱀을 그린 작품으로, 그녀의 고통과 내면의 아픔을 표현하며 화단에 큰 주목을 받았다.
- 길례언니 (1973): 노란 옷을 입고 꽃이 가득 달린 화려한 모자를 쓴 여인을 그린 작품으로, 이국적인 여인 그림의 시작을 알리는 대표작 중 하나이다.
- 내 슬픈 전설의 22페이지 (1977): 여인의 머리 위에 뱀이 있는 자화상으로, 그녀의 가장 유명한 작품 중 하나이며 내면의 슬픔과 자아를 상징적으로 표현했다.
- 황금의 비 (1982): 화려한 색채와 이국적인 분위기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 초원Ⅱ (1978): 2009년 경매에서 12.00 억 KRW에 낙찰되며 최고가를 기록한 작품이다.
- 원(園한국어) (1962): 2007년 11.50 억 KRW에 낙찰되었다.
- 막은 내리고 (1989): 2015년 7월 8.60 억 KRW에 거래된 여인 그림의 수작으로 평가받는다.
- 여인 (1989): 8.00 억 KRW에 거래되었다.
- 모자를 쓴 여인 (1982): 6.30 억 KRW에 거래되었다.
2.3. 해외 활동 및 여행
천경자는 당시로서는 드물게 해외 여행을 즐겼다. 40대 후반에서 70대 초반까지 타히티를 시작으로 유럽, 아프리카, 중남미 등 해외 스케치 기행을 12번이나 다니며 '천경자 풍물화'라는 개성적인 화풍을 개척했다. 우수에 젖은 이국적인 여인 그림은 타히티 여행 후부터 본격적으로 등장했다. 이러한 해외 경험은 그녀의 예술 세계를 확장하고 독특한 화풍을 구축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2.4. 교육 및 전문 활동
천경자는 1954년부터 1973년까지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교수로 재직했으며, 홍익대학교 동양화과 과장을 역임했다. 또한 1960년부터 1981년까지 국전 심사위원, 운영위원, 부위원장으로 활동하며 한국 미술계의 주요 인사로 자리매김했다. 1978년부터는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으로 활동했으며, 1981년에는 평화통일정책자문회의 자문위원을 지내기도 했다.
2.5. 베트남 전쟁 참전
1972년 베트남 전쟁 당시 문화공보부에서 베트남전 전쟁 기록화를 그리기 위해 화가 열 사람을 파견한다는 소식을 듣고, 김기창, 박영선, 김원, 임직순 등 남자 화가들 틈에서 홍일점 종군화가가 되었다. 그녀는 맹호부대에 종군해 1주일간 활동하며 M-16소총을 들고 꽃나무 그늘에 잠복하는 병사들, 연분홍 아오자이를 입고 자전거로 거리를 누비는 아가씨들을 많은 스케치와 담채 작품으로 남겼다.
2.6. 전시 및 수상 경력
천경자는 국내외에서 활발한 전시 활동을 펼쳤다. 1955년부터 1981년까지 국전 추천, 초대작가로 활동했으며, 현대화랑에서 4회에 걸쳐 초대전도 가졌다. 1963년 도쿄 서촌화랑에서 개인전을 열었고, 1965년에도 도쿄 이도 화랑에서 개인전을 개최했다. 1967년에는 말레이시아 정부 초청 초대전에 작품을 출품했으며, 1969년 제10회 상파울루 비엔날레에 참여했다. 1970년에는 남태평양 풍물 시리즈 스케치전을 신문회관화랑에서, 1974년에는 아프리카 풍물 시리즈 스케치전을 현대화랑에서 열었다. 1973년에는 '천경자 화랑(현대화랑)'을 열기도 했다. 1977년에는 한국현대동양화 유럽 순회전에 출전했으며, 1995년에는 호암갤러리에서 15년 만에 대규모 회고작품전을 가졌는데, 8만 명이 줄을 서서 볼 정도로 대성공을 거두었다.
그녀는 여러 차례 수상의 영광을 안았다. 1955년 대한미술협회전 대통령상, 1964년 문예상, 1971년 서울특별시문화상, 1975년 3·1문화상, 1979년 대한민국예술원상을 받았다. 1983년에는 은관문화훈장을 수훈했으며, 1999년에는 한국예술평론가협의회 선정 '20세기를 빛낸 한국의 예술인'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2.7. 미술 시장 가치
천경자 화백 작품의 미술 시장 가치는 매우 높게 평가된다. 2005년부터 10년간 경매시장 낙찰 총액 상위 화가 20명을 대상으로 분석한 결과, 천경자 화백의 작품 평균 호당 가격은 현존하는 작가 중 최고가 평가를 받았다. 서울옥션과 K옥션에 따르면, 천 화백 작품 중 최고가로 낙찰된 작품은 2009년 K옥션을 통해 거래된 '초원Ⅱ'(1978, 105.5×130cm)로 12.00 억 KRW에 팔려나갔다. 1962년작인 '원'은 2007년 11.50 억 KRW에 낙찰되었고, 2015년 7월에는 여인을 그린 천 화백의 다수 작품 중 수작으로 평가받는 '막은 내리고'(1989)가 8.60 억 KRW에 거래된 바 있다. 이밖에 1989년작인 '여인'이 8.00 억 KRW, 1982년작인 '모자를 쓴 여인'이 6.30 억 KRW 등을 기록했다.
3. 문학 활동
천경자는 그림 못지않게 문학적 재능도 뛰어났다. 그녀는 수필집 '탱고가 흐르는 황혼' 등 10권 이상의 저서를 남겼다. 타고난 글재주로 1955년의 '여인 소묘' 등 단행본 15건과 수필집 10권, 신문·잡지 연재 12건 등으로 대중과도 소통했다. 2006년에 새로 편집되어 나온 자서전 '내 슬픈 전설의 49페이지'는 쉰둘이던 1976년 잡지 '문학사상'에 연재하기 시작했던 글을 모아 1978년에 내놓았던 것이 절판된 후, 2006년 갤러리 현대 개인전과 때를 맞춰 새로 출간된 것이다.
그녀의 주요 저서 목록은 다음과 같다.
- <여인 소묘>
- <유성이 가는 곳>
- <언덕 위의 양옥>
- <천경자 남태평양에 가다>
- <아프리카 기행화문집>
- <한(恨한국어)>
- <자서전 내 슬픔 전설의 49페이지>
- <자유로운 여자>
- <쫑쫑>
- <꽃과 색채와 바람>
- <사랑이 깊으면 외로움도 깊어라>
- <탱고가 흐르는 황혼>
- <천경자 화집>
- <꽃과 영혼의 화가 천경자>
4. 철학 및 개인적 관점
천경자 화백은 자신의 삶과 예술 세계를 "내 과거를 열심히 살게 해 준 원동력은 '꿈'과 '사랑'과 '모정' 세 가지 요소였다고 생각한다. 꿈은 그림이라는 예술과 함께 호흡해왔고, 꿈이 아닌 현실로서도 늘 내 마음속에 살아 있었다. 그리고 이것을 뒷받침해 준 것이 사랑과 모정이었다"고 풀이했다. 그녀의 삶은 역경 속에서도 굴하지 않는 강인한 정신력을 보여주었으며, 사회적 기대와 개인적 도전을 극복한 선구적인 여성 예술가로서의 삶의 철학을 확립했다. 그녀의 작품에는 이러한 삶의 동력과 철학이 깊이 스며들어 있다.
5. 평가
천경자 화백의 삶과 예술은 한국 사회와 미술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다양한 시각으로 평가받았다.
5.1. 긍정적 평가 및 영향력
천경자는 동료 예술가와 대중으로부터 폭넓은 사랑과 존경을 받았다. 그녀는 큰 키에 파격적인 색깔과 무늬의 옷, 위태로울 정도로 뾰족했던 하이힐, 머리를 둘러싸는 커다란 화관이나 얼굴을 감싸는 커다란 선글라스, 가늘게 그린 눈썹과 붉게 칠한 입술, 담배를 문 모습으로 주변을 압도했던 스타였다. 반달형의 눈과 광대뼈가 인상적인 그녀는 당대의 패션 리더이기도 했다. 언론과의 인터뷰를 마다하지 않았고 구수한 전라도 사투리가 담긴 입담을 자랑한 그녀는 같은 시대를 살던 문인·화가들과도 진한 우정을 나눴다. 김환기, 박고석, 최순우, 김흥수, 박노수, 손응성, 유영국, 김현승, 고은, 김지하, 서정주 등의 남성 예술인과 박경리, 한무숙, 손소희, 조경희, 박완서, 한말숙, 전숙희 등 한 특정 시대를 풍미한 여성 문인들과도 단짝이었다.
배우 윤여정은 '가락 있는 멋쟁이 화가 천경자 선생님'이란 글에서 "1976년 뉴욕 맨해튼에서 전라도 사투리가 그렇게 어울리는 멋쟁이를 처음 봤고 그가 곧 대단한 이야기꾼이라는 것을 눈치 챌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방송인 황인용은 천경자 화백을 여러 번 인터뷰했으며, 남도 억양이 있는 민요 자락과도 같은 목소리, 이국적인 액세서리 등으로 그녀를 기억했다. 시인 고은은 "천경자는 누구인가. 그는 그것밖에 어떤 것도 될 수 없는 천형(天形한국어)의 예술가이다"라고 말했다. 시를 많이 쓰지는 않은 소설가 박경리는 오랜 지기인 천경자를 '고약한 예술가'로 부른 시 '천경자를 노래함'을 통해 천 화백의 성품과 기질을 소개했다.
화가 천경자는
가까이 갈 수도 없고
멀리 갈 수도 없고
매일 만나다시피했던 명동 시절이나
이십년 넘게
만나지 못하는 지금이나
거리는 멀어지지도
가까와지지도 않았다
대담한 의상걸친
그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허기도 탐욕도 아닌 원색을 느낀다.
어딘지 나른해 뵈지만
분명하지 않을 때는 없었고
그의 언어를 시적이라 한다면
속된 표현 아찔하게 감각적이다.
마음만큼 행동하는 그는
들쑥날쑥
매끄러운 사람들 속에서
세월의 찬 바람은 더욱 매웠을 것이다.
꿈은 화폭에 있고
시름은 담배에 있고
용기있는 자유주의자
정직한 생애
그러나
그는 좀 고약한 예술가다.
시사만화가 김성환은 자신의 회고에서 "(천 화백 작품은) 선 하나하나가 모두 다 살아있는 선"이라며 "그림을 보면 정신이 번쩍 난다"고 표현했다. 가수 조영남은 "천경자 화백은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았는데도 항상 소녀 같은 어른이었다"고 추억했다. 배우 김수미는 "한번 붓을 잡으면 '화장실 가는 시간도 아까워서 참는다'고 했다"며 천 화백의 그림에 대한 집념과 열정을 전했다. 세간에서는 천 화백의 삶을 프리다 칼로에 비유하기도 한다. 고통받은 내용은 달랐지만 한과 고독으로 점철된 그의 슬픈 전설의 페이지에도 사랑에 대한 아픔, 삶의 비애가 끊이지 않았다.
5.2. 비판 및 논란
천경자 화백의 경력에는 몇 가지 주요 논쟁점이 있었다.
5.2.1. '미인도' 위작 논란
천경자의 '미인도'는 국립현대미술관 소장품으로, 진위 시비는 1991년에 시작되었다. 국립현대미술관이 '움직이는 미술관'을 운영하면서 원작을 복제해 판매하던 중, 복제에 의구심을 가진 작가가 원작을 직접 보고 자신의 작품이 아니라고 주장하면서 논란이 불거졌다. 천경자의 위작 주장에 대해 국립현대미술관은 진위를 가리기 위해 X-선, 적외선, 자외선 촬영 등 과학적인 방법을 동원했고, 한국화랑협회 미술품감정위원회는 1991년 4월 11일 진품이라고 판정했다. 국립현대미술관은 "앞으로 위작임을 확증할 수 있는 증거가 밝혀지면 받아들이겠다"는 단서를 붙인 끝에 진품임을 주장했다.
이 과정에서 당시 67세였던 천경자 화백은 "자기 그림도 몰라보는 화가"라는 수군거림 속에 상당한 정신적 피해를 입었다. 그녀는 사건 직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직을 사퇴하고 전시회 출품 등 작품 공개 활동을 중지하겠다고 선언한 뒤 미국으로 떠났다. 이후 대규모 회고전을 가진 적은 있으나 신작은 보기가 어려워졌다.
'미인도'에 대한 논란은 1999년 고서화 위조범 권춘식이 자신이 '미인도'를 위조했다고 증언함으로써 다시 불거졌다. 그러나 국립현대미술관은 작품 입수 시점과 위조자가 진술한 시점이 불일치하고, 위조자가 수묵화 위조 전문이어서 천경자 화백의 채색화를 위조했다고 보기 어렵다는 이유를 들어 기존 입장을 고수했다. 검찰에서는 공소시효가 만료되어 더 이상 수사가 어렵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2016년 11월 프랑스의 과학 감정팀 Lumière Technology프랑스어는 위작 논란에 휩싸인 '미인도'에 대해 사실상 천 화백의 작품이 아니라는 내용의 보고서를 검찰 측에 제출했다. 그러자 11월 4일 국립현대미술관은 '프랑스 감정단의 미인도 감정 결과 보도에 대한 입장' 자료를 내고 프랑스 감정단이 천경자의 '미인도'에 대해 위작 의견을 낸 것과 관련해 "화면 표층 분석만으로 성급히 결론을 내렸다"고 강하게 반박했다. 국립현대미술관은 "프랑스 감정단이 감정 개시 전 브리핑에선 캔버스 화면의 층위 조사를 통해 보이지 않는 이미지와 붓질, 작업 방식 등의 패턴을 종합적으로 규명한다고 했으나 조사 결과를 보면 당초 공언한 바와는 반대로 극히 일부 자료에 대한 통계적, 인상적 분석 결과만 내놨다"고 주장하며 프랑스 감정단의 결론을 강하게 부정했다.
5.2.2. 사망 시기 관련 논란
1998년 미국으로 이주해 2002년부터 뉴욕에 거주하였으나, 2009년 1월 현재 천경자의 행적이 묘연하고 근황이 알려지지 않자 생존 여부에 관해 미스터리라고 표현하는 언론 보도가 있었다. 대한민국예술원은 천경자 화백의 근황이 확인되지 않는다며 2014년 2월을 기하여 수당 지급을 잠정 중단했다. 그러자 천경자 화백 가족은 "말도 안 되는 행태"라면서 이에 반발하여 예술원 탈퇴서를 제출했다.
사망 소식이 공식적으로 발표된 후에도 가족 간의 갈등이 불거졌다. 첫째 딸 이혜선은 나머지 가족이 천경자 화백 생전에 수년간 안부 전화도 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반면 천경자 화백의 둘째 딸과 둘째 사위는 첫째 딸이 어머니의 죽음을 숨겼다고 맞서며 사망 시기를 둘러싼 논란이 가중되었다.
6. 기념 및 추모
천경자 화백을 기리기 위해 그녀의 고향인 전라남도 고흥군에는 2007년부터 천경자전시관이 개관되었다. 이곳에는 천경자가 기증한 드로잉 55점, 판화 11점 등 총 66점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으며, 소장품과 아트상품 등이 갖추어져 있다.
7. 관련 항목
- 대한민국예술원
- 국립현대미술관
- 홍익대학교
- [https://chunkyungja.org/ 천경자 화백 공식 웹사이트]
- [https://www.daarts.or.kr/handle/11080/19630 한국예술디지털아카이브 천경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