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생애
김기창 화백은 어린 시절 청각을 상실하는 어려움을 겪었으나 어머니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미술 교육을 시작하며 예술적 재능을 꽃피웠다. 이후 동료 화가 박래현과 결혼하여 예술적 동반자로서 활발한 협업을 이어갔으며, 광복 이후에는 자신만의 독창적인 화풍을 정립하며 한국 미술계에 큰 족적을 남겼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동안 일제에 협력한 친일 행적이 드러나면서 그의 삶과 예술에 대한 평가에 있어 논란의 여지를 남겼다.
1.1. 유년기 및 교육
김기창은 1913년 2월 18일 경성부 운니동에서 아버지 김승환과 어머니 한윤명 사이 8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김승환은 당시 조선총독부 토지관리국 직원이었다. 어린 시절 잠시 충청남도 공주에서 유년기를 보내기도 했다. 여덟 살(승동보통학교 2학년) 때 장티푸스로 인한 고열로 청각을 완전히 상실했으며, 이로 인해 언어 장애 증세도 겪게 되었다.
아들의 재능을 알아본 어머니 한윤명은 김기창의 미술 교육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어머니의 소개로 김기창은 당시 고종과 순종의 어진을 그렸던 명망 높은 화가 이당(以堂한국어) 김은호의 문하생으로 들어가 동양화를 사사받았다. 김은호의 가르침 아래 김기창은 전통 수묵채색화를 배웠으며, 스승과 마찬가지로 당시 일본 수묵채색화의 영향을 받아 부드러운 색조로 여성과 아이들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인물화(인물화人物畵한국어)에 집중했다.
1.2. 미술 교육 및 식민지 시기 활동
김기창은 1931년 조선총독부가 주최하는 권위 있는 연례 미술전인 조선미술전람회(줄여서 '선전')에 처음 출품하여 동양화 부문에서 입선했다. 그는 1940년까지 총 6회 입선했으며, 특히 1937년에는 '고담(古談한국어)'으로 첫 특선(특선特選한국어)을 수상했다. 그의 초기작 중 하나인 '판상도무(판상도무板上跳舞한국어)'(1931)도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수상하며 주목받았다. 4회 연속 특선 경력을 쌓은 후, 27세에 선전 추천작가(추천작가推薦作家한국어)로 선정되어 당시 미술계에서 영향력 있는 작가로 인정받았다.
1930년대의 많은 화가들처럼 김기창 역시 식민 당국의 취향에 맞춰 향토색(향토색鄕土色한국어)이 담긴 목가적인 풍경을 작품에 담았다. 추천작가가 된 후 1942년 첫 개인전을 개최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초기 작품 중 상당수는 한국 전쟁 중에 소실되거나 현재까지 소재가 파악되지 않고 있다.
1.3. 일제 강점기 친일 행적 논란
김기창은 일제강점기 동안 그의 뛰어난 필력으로 일본 제국주의와 일본 군국주의를 찬양하고, 한국인의 태평양 전쟁 동원을 지지하는 작품들을 다수 제작하여 친일 행적 논란의 중심에 섰다. 그는 식민지 조국의 현실을 외면하고 그림을 통해 일제의 전쟁 동원에 적극적으로 협력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그는 친일 미술인 단체인 조선미술가협회 일본화부 평의원으로 활동했으며, 1942년부터 1944년까지 일제 말 친일 미술전의 핵심인 반도총후미술전(半島銃後美術展한국어)에 동문 장우성과 함께 일본화부 추천작가로 발탁되었다. 김기창은 일제 군국주의를 찬양하고 고취하기 위한 선전 작업에도 앞장섰는데, 이는 당시 신문과 잡지에 실린 삽화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주요 친일 작품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지적된다.
- 〈님의 부르심을 받고서〉: 1943년 8월 6일자 《매일신보》에 게재되었다.
- 〈총후병사〉: 조선식산은행의 사보 《회심(會心한국어)》지에 실린 훈련병을 그린 펜화에 담채를 가한 삽화로, "완전군장으로 간이 의자에 앉아 휴식을 취하는 병사의 옆모습을 포착한 것으로 얼굴과 주먹 쥔 손에는 성전에 참여한 멸사봉공의 굳은 의지가 생생하게 담겨있다"는 평가를 받았다. 김기창은 이 작품에 대해 "정식으로 그린 그림이 아니라 삽화에 불과해 친일한 작품으로 볼 수 없다"고 부정했으나, 이후 공개된 다른 작품으로 인해 그의 주장은 거짓으로 드러났다.
- 〈적진육박〉: 1944년 조선총독부의 후원을 받아 경성일보사가 개최한 '결전' 미술전람회에 출품된 작품이다. 이 작품은 당시 남양군도에서 대검을 소총에 끼운 채 적진을 향하고 있는 일본군의 육박전을 묘사하고 있어, 일제 군국주의를 찬양하고 소위 '황국신민'의 영광을 고취하기 위한 목적임이 명확하다는 비판을 받았다.
또한 김기창은 1940년 10월 조선남화연맹전과 1943년 1월 애국백인일수전람회를 통해 일제의 기금 모집에 적극적으로 협력했다. 이러한 친일 행적들로 인해 그는 사후인 2008년 민간단체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중 미술 분야에 선정되었으며, 2009년 대통령 직속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1.4. 결혼과 예술적 협업
김기창은 1943년 동료 화가 박래현을 처음 만나 3년간의 필담 연애 끝에 1946년 결혼했다. 박래현과의 결혼은 김기창의 예술 경력에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결혼 후 그는 박래현과 함께 잦은 공동 전시회를 개최했으며, 이전의 사실적인 채색 인물화 스타일에서 벗어나 더욱 가볍고 투명한 수묵채색화(수묵담채화水墨淡彩畫한국어)를 제작하기 시작했다. 그의 붓놀림은 더욱 빨라졌고, 그림 속 형태는 반추상(semi-abstract영어)에 가까울 정도로 단순화되었다.
부부는 총 17회의 공동 전시회를 열며 긴밀하게 협력했으나, 1970년 박래현이 판화(printmaking영어)를 공부하기 위해 미국으로 떠나면서 예술적 협업은 잠시 중단되었다. 1976년 박래현이 한국으로 돌아온 직후 사망하자, 김기창은 잠시 작품 활동을 중단하는 시간을 가졌다.
1.5. 광복 이후의 예술 활동
광복 이후 김기창은 논란에도 불구하고 2001년 사망할 때까지 한국 미술계에서 활발히 활동하며 독자적인 예술 세계를 구축했다. 그는 수묵담채화 등 새로운 화풍을 시도하며 전통 미술의 현대화를 모색했다.
1970년대부터 1990년대에 걸쳐 제작된 '바보산수(바보산수한국어)'와 '청록산수(청록산수한국어)' 연작은 김기창의 가장 독특하고 대중적인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바보'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바보산수'는 전통적인 민화(민화民畵한국어)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려는 시도였다. 마치 바보나 어린아이가 그린 듯 직관적이고 해학적인 이 화풍은 단순하고 만화적인 형태를 통해 순수하고 진솔한 미학적 표현과 감정을 강조했다. 이 시기 그의 작품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고도로 추상적인 형태를 통합했다. 이러한 풍경화에서 나타나는 역동적인 움직임은 그의 청각 장애로 인한 '침묵의 세계'에서 붓놀림을 통해 소리를 표현하려는 김기창의 방식이라는 해석이 일반적이다.
말년에는 '청록산수' 연작과 문자도(문자도文字圖한국어)를 제작했으며, 십장생十長生한국어과 장승한국어과 같은 전통 민화 요소를 계속해서 작품에 활용했다.
1.6. 주요 작품 및 주제
김기창 화백은 다양한 주제와 독창적인 화풍으로 많은 대표작을 남겼다. 그의 작품 세계는 전통적인 소재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하거나, 개인적인 경험을 예술적으로 승화시키는 특징을 보인다.
그의 대표작 중 하나는 세종대왕의 초상화이다. 이 초상화는 현재 대한민국의 1만원권 지폐에 사용되고 있다. 또한 그는 김정호, 을지문덕 등 여러 역사적 인물의 표준 영정(표준영정標準影幀한국어)을 제작하기도 했다.
특히 김기창은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 그리스도의 전승을 한국적으로 해석하여, 예수를 한복을 입은 한국인으로 묘사한 동양화 연작을 그렸다. 이는 기독교를 한국 사회에 토착화하려는 신학적인 시도로 평가되기도 한다. 그러나 역사적 예수는 로마 제국과 헤롯 왕실, 예루살렘 성전의 착취를 받던 가난한 농촌 공동체이자 '신통한 것이 나올 수 없는 곳', '이방인의 갈릴리'라고 불릴 만큼 무시와 소외를 받던 지역인 갈릴리 출신의 민중이었던 반면, 김기창 화백의 그림에서는 예수가 양반의 옷을 입고 있는 모순이 지적되기도 한다.
그 외 주요 작품으로는 군마도한국어, 청산도한국어, 소와 여인한국어, 가을한국어, 보리타작한국어 등이 있다.
2. 경력 및 사회 활동
김기창 화백은 화가로서의 활동 외에도 교육자로서 후학 양성에 힘썼으며, 자신의 청각 장애 경험을 바탕으로 사회적 약자인 청각 장애인들의 복지를 위한 사회 공헌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2.1. 교육 활동
김기창은 1955년부터 홍익대학교에서 강의를 시작했으며, 1962년에는 세종대학교의 전신인 수도여자사범대학으로 자리를 옮겨 교수로 재직했다. 그는 미술 교육에 대한 깊은 기여를 했다.
그는 국제적인 미술 교류에도 활발히 참여했다. 1957년에는 미국 뉴욕 월드하우스 화랑 주최 한국 현대작가전에 초대 출품했으며, 1960년에는 국전 초대작가가 되어 국전 심사위원을 역임했다. 또한 타이베이, 홍콩, 도쿄, 마닐라 등지에서 열린 한국미술전에 작품을 출품하며 한국 미술을 해외에 알렸다. 1963년에는 5월문예상 미술본상을 수상했으며, 제7회 상파울루 비엔날레에 한국 대표로 참가했다. 1964년에는 미국무성의 초청으로 도미했고, 1969년에는 다시 미국을 방문하여 뉴욕에서 개인전을 개최했다. 세종대학교에서 명예 교육학 박사 학위를 받기도 했다.
2.2. 사회 공헌 활동
김기창은 자신의 청각 장애를 통해 얻은 경험을 바탕으로 청각 장애인들의 삶의 질 향상에 깊은 관심을 가 가졌다. 1979년에는 한국농아복지회를 창설하고 초대회장에 취임하여 청각 장애인 복지 증진을 위한 기반을 마련했다. 나아가 1984년에는 서울특별시 강남구 역삼동에 청각 장애인을 위한 복지센터인 청음회관을 설립하여 사회적 약자를 위한 그의 헌신적인 노력을 구체화했다. 그는 한국의 청각 장애인 공동체를 위한 인식 개선과 복지 향상을 위한 열정적인 옹호자로 평가받는다.
3. 평가 및 영향
김기창 화백은 한국 현대 미술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며, 전통 미술의 현대화와 독창적인 화풍 개발에 기여했다는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동시에 그의 친일 행적은 예술적 성과와 별개로 지속적인 비판과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다.
3.1. 예술적 평가
김기창은 전통적인 한국 수묵채색화의 현대화를 개척한 선구자로 평가받는다. 그의 폭넓은 예술 활동은 한국의 근대 미술과 현대 미술의 역사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통찰을 제공한다. 그는 전통적인 민화와 풍경화를 대담하게 재해석했으며, 광복 이후 한국 미술의 정체성을 재발견하는 데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김기창 작품의 양식적 변화는 자율적인 한국적 정체성을 탐구하는 과정을 반영한다.
3.2. 비판 및 논쟁
김기창 화백의 삶과 예술에 대한 비판적 논의와 논쟁의 핵심은 그의 뛰어난 예술적 성과와 일제강점기 친일 행적 사이의 관계에 있다. 그의 작품이 한국 미술사에 미친 긍정적인 영향에도 불구하고, 군국주의를 찬양하고 전쟁 동원에 협력했던 친일 행위는 지울 수 없는 오점으로 남아 있다. 특히 민족문제연구소와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에 의해 친일 인사로 등재된 사실은 그의 예술적 위상과 별개로 역사적 책임 문제를 제기하며 지속적인 비판의 근거가 되고 있다. 그의 작품 해석에 있어서도 이러한 친일 행적을 어떻게 이해하고 평가할 것인지에 대한 다양한 시각이 존재한다.
4. 수상 및 서훈
김기창 화백은 생전 및 사후에 다음과 같은 주요 훈장과 상들을 받았다.
- 1963년: 5월문예상 미술본상
- 1977년: 은관문화훈장 (2등급)
- 1991년: 인촌상
- 2001년: 금관문화훈장 (1등급, 추서)
5. 개인사
김기창 화백의 개인사는 그의 예술 세계와 사회 활동에 큰 영향을 미친 가족 관계와 깊이 연결되어 있다.
5.1. 가족 관계
김기창은 아버지 김승환과 어머니 한윤명 사이에서 8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외할아버지는 청주 한씨였으며, 외할머니는 이정진(李貞鎭, 1873년 ~ 1950년)이었다. 어머니 한윤명(韓潤明, 1895년 ~ 1932년)은 김기창의 예술적 재능을 일찍이 알아보고 적극적으로 지원하여 그가 화가의 길을 걷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는 1946년 동료 화가 박래현 (1920년 4월 13일 ~ 1976년 1월 2일)과 결혼하여 예술적 동반자이자 삶의 반려자로서 관계를 이어갔다. 두 사람 사이에는 4명의 자녀가 있다.
- 장녀: 김현 (1947년생)
- 장남: 김완 (1949년생)
- 차녀: 김선 (1952년생)
- 삼녀: 김영 (1956년생)
김기창에게는 남동생 김기학 (1915년생), 여동생 김기옥 (1926년생 ~ 1994년 3월 2일), 그리고 화가인 남동생 김기만 (金基萬, 1929년 5월 9일 ~ 2004년 12월 26일)이 있었다. 또한 그의 사돈으로는 손명원 (1941년 5월 5일생, 전 현대미포조선 및 쌍용자동차 사장)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