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제임스 르로이 보텀리 (James Leroy Bottomley영어) (1900년 4월 23일 ~ 1959년 12월 11일)는 미국의 프로 야구 1루수, 스카우트, 감독이었다. 그는 1922년부터 1937년까지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MLB)에서 1루수로 활약했으며, 특히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소속으로 4번의 내셔널 리그 페넌트와 2번의 월드 시리즈 우승을 이끌었다.
보텀리는 1924년 9월 16일 브루클린 다저스와의 경기에서 9이닝 경기 타점 신기록인 12타점을 기록했으며, 이는 1993년 마크 휘튼에 의해 타이 기록이 되었다. 1926년에는 내셔널 리그 타점왕을 차지하며 카디널스의 첫 월드 시리즈 우승에 기여했다. 1928년에는 내셔널 리그 최우수 선수(MVP)로 선정되었고, 홈런과 타점 부문에서 리그 선두를 기록했다. 또한 메이저 리그 역사상 두 번째로 20-20-20 클럽에 가입했으며, 30 2루타, 20 3루타, 30 홈런 시즌을 기록한 최초의 선수가 되었다. 그는 9시즌 동안 3할 이상의 타율을 기록했으며, 16년간의 메이저 리그 경력 동안 통산 타율 0.310을 기록했다. 카디널스 외에도 신시내티 레즈와 세인트루이스 브라운스에서 뛰었으며, 1937년에는 브라운스의 선수 겸 감독으로도 활동했다.
선수 경력을 마친 후, 보텀리는 시카고 컵스 구단의 스카우트이자 마이너 리그 베이스볼 감독으로 일했다. 심근 경색을 겪은 후 은퇴하여 미주리주에서 아내와 함께 소를 키웠다. 그는 쾌활한 성격 덕분에 '써니 짐' (Sunny Jim영어)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1974년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으며, 2014년에는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렸다.
2. 어린 시절 및 배경
제임스 보텀리는 어린 시절부터 생계를 위해 다양한 직업을 경험하며 야구에 대한 열정을 키웠다.
2.1. 어린 시절과 학업
보텀리는 1900년 4월 23일 일리노이주 오글스비에서 존 보텀리와 엘리자베스 보텀리née Carter니 카터영어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족은 후에 일리노이주 노코미스로 이주했으며, 보텀리는 그곳에서 초등학교와 노코미스 고등학교에 다녔다. 그는 가족의 재정적 지원을 돕기 위해 16세에 고등학교를 중퇴했다. 학업을 중단한 후, 보텀리는 탄광 노동자, 트럭 운전사, 식료품점 점원, 철도 사무원 등 다양한 직업을 전전했다. 1920년에는 그의 남동생 랄프가 탄광 사고로 사망하는 비극을 겪기도 했다.
2.2. 초기 활동 및 야구 입문
보텀리는 생계를 보태기 위해 여러 지역 세미프로 야구팀에서 뛰며 경기당 5 USD를 벌었다. 그의 경기력을 눈여겨본 한 경찰관이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의 단장인 브랜치 리키에게 보텀리를 추천했다. 리키는 스카우트 찰리 배럿을 보내 보텀리의 기량을 확인하게 했고, 카디널스는 1919년 말 보텀리를 입단 테스트에 초청했다. 테스트에 합격한 보텀리는 월 150 USD의 계약을 맺으며 프로 야구 경력을 시작했다.
1920년, 보텀리는 마이너 리그 베이스볼에서 프로 데뷔를 했다. 그는 클래스 D 사우스 다코타 리그의 미첼 커널스에서 97경기 동안 0.312의 타율을 기록했으며, 웨스턴 리그 클래스 A의 수 시티 패커스에서도 6경기를 뛰었다. 마이너 리그 시절, 언론은 그의 쾌활한 성격 때문에 그를 '써니 짐'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다음 시즌에는 클래스 A 텍사스 리그의 휴스턴 버펄로스에서 뛰었지만, 시즌 초 다리 부상과 감염으로 인해 130경기에서 0.227의 타율과 부진한 수비력을 보였다. 리키는 그를 휴스턴에 1200 USD에 팔 수 없게 되자, 클래스 AA 인터내셔널 리그의 시러큐스 치프스에 1000 USD에 팔았다. 1922년, 다리 부상에서 완전히 회복된 보텀리는 치프스에서 타율 0.348, 14 홈런, 15 3루타, 0.567의 장타율을 기록했다. 시즌 후 카디널스는 치프스로부터 보텀리를 1.50 만 USD에 영입했다.
3. 프로 야구 경력
제임스 보텀리는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에서 전성기를 보내며 팀의 핵심 선수로 활약했고, 이후 다른 팀에서도 선수 겸 감독으로 활동하며 다채로운 경력을 쌓았다.
3.1.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시절
1922년 8월 18일, 보텀리는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소속으로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에 데뷔했다. 그는 잭 푸르니에를 대신하여 37경기에서 타율 0.325를 기록했다. 1923년, 카디널스는 보텀리를 주전 1루수로 기용했고, 그는 신인임에도 불구하고 타율 0.371을 기록하며 팀 동료인 로저스 혼즈비(0.384)에 이어 내셔널 리그 2위를 차지했다. 그의 출루율 0.425도 혼즈비에 이어 리그 2위였으며, 장타율 0.535로 6위, 94 타점으로 리그 10위에 올랐다.
1924년, 보텀리는 타율 0.316을 기록했다. 특히 9월 16일 브루클린 다저스와의 경기에서 그는 12타점을 기록하며 윌버트 로빈슨이 1892년에 세운 11타점 기록을 깨고 메이저 리그 단일 경기 최다 타점 신기록을 세웠다. 이 경기에서 보텀리는 6타수 6안타(2홈런, 1더블, 3싱글)를 기록했다. 이 기록은 1993년 마크 휘튼에 의해 타이 기록이 되었다. 그는 시즌을 111타점(리그 3위), 14홈런(리그 7위), 0.500의 장타율(리그 10위)로 마쳤다. 8월 29일, 보텀리는 2루수 포지션에서 좌투수로서 어시스트를 기록한 마지막 선수가 되었다.
1925년, 보텀리는 타율 0.367을 기록하며 혼즈비에 이어 다시 리그 2위를 차지했다. 그는 227 안타로 내셔널 리그 1위에 올랐으며, 128타점(리그 3위), 0.413의 출루율(리그 7위)을 기록했다. 1926년 시즌에는 타율 0.298을 기록했지만, 내셔널 리그 최다인 120타점을 기록했다. 그의 19홈런은 핵 윌슨의 21홈런에 이어 리그 2위였으며, 장타율 0.506으로 6위에 올랐다. 그는 1926년 월드 시리즈에서 타율 0.345를 기록하며 카디널스가 뉴욕 양키스를 꺾고 우승하는 데 기여했다.

1927년, 보텀리는 124타점(리그 4위)과 0.509의 장타율(리그 6위)로 시즌을 마쳤다. 1928년에는 타율 0.325, 31홈런, 136타점을 기록하며 홈런과 타점 부문에서 리그 1위에 올랐다. 또한 그는 메이저 리그 역사상 두 번째로 20-20-20 클럽에 가입했으며, 30 2루타, 20 3루타, 30 홈런 시즌을 기록한 최초의 선수가 되었다. 그 해 그는 내셔널 리그 MVP를 수상했다. 카디널스는 1928년 월드 시리즈에 진출했지만, 보텀리는 타율 0.214에 그치며 뉴욕 양키스에게 패배했다.
1929년, 보텀리는 29홈런(리그 7위), 137타점(리그 5위), 0.568의 장타율(리그 8위)을 기록했다. 1930년에는 감독 개비 스트리트가 "부진한 해"라고 평가할 만큼 어려움을 겪었고, 1930년 월드 시리즈에서는 22타수 0.045의 타율로 부진하며 카디널스가 필라델피아 애슬레틱스에게 패배했다. 시리즈 후 보텀리는 자신의 월드 시리즈 활약을 "타격 면에서는 실패작"이라고 자평했다.
1931년 시즌을 앞두고 보텀리의 카디널스 내 입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었지만, 그는 스프링 트레이닝에서 다시 타격 능력을 과시했다. 인터내셔널 리그 로체스터 레드 윙스에서 카디널스로 이적한 뛰어난 수비수 리퍼 콜린스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스트리트 감독은 보텀리가 주전 1루수로 남을 것이라고 발표했다. 그러나 보텀리는 1931년 시즌 초 부상을 입고 복귀 후에도 고전하며 콜린스에게 자리를 잃을 위기에 처했다. 하지만 그는 부상 복귀 후 다시 컨디션을 회복했고, 시즌을 타율 0.3482로 마쳤다. 이는 팀 동료 칙 해피(0.3489)와 빌 테리(0.3486)에 이어 3위를 기록한 것으로, MLB 역사상 가장 근접한 타율 경쟁이었다. 그의 장타율 0.534는 리그 6위였다. 카디널스는 1931년 월드 시리즈에 진출했고, 보텀리는 타율 0.160에 그쳤지만 카디널스는 애슬레틱스를 꺾고 우승했다. 그 오프시즌에 다른 팀들은 보텀리나 콜린스를 영입하기 위한 트레이드를 시도했다. 1932년, 보텀리는 91경기만 뛰었음에도 타율 0.296을 기록했다.
3.2. 주요 기록 및 수상
제임스 보텀리는 선수 경력 동안 여러 인상적인 기록과 개인적인 영예를 달성했다.
- 1경기 12타점 신기록: 1924년 9월 16일 브루클린 다저스와의 경기에서 메이저 리그 단일 경기 최다 타점 신기록인 12타점을 기록했다. 이 기록은 1993년 마크 휘튼에 의해 타이 기록이 되었다.
- 내셔널 리그 타점왕: 1926년과 1928년에 내셔널 리그 타점 부문 1위를 차지했다.
- 내셔널 리그 홈런왕: 1928년에 내셔널 리그 홈런 부문 1위를 기록했다.
- 내셔널 리그 MVP: 1928년 내셔널 리그 최우수 선수(MVP)로 선정되었다.
- 20-20-20 클럽 가입: 1928년 시즌에 30 2루타, 20 3루타, 30 홈런을 기록하며 메이저 리그 역사상 두 번째로 20-20-20 클럽(시즌 20 2루타, 20 3루타, 20 홈런)에 가입한 선수가 되었다. 그는 30-20-30 시즌을 기록한 최초의 선수였다.
- 6년 연속 100타점 이상: 1924년부터 1929년까지 6년 연속으로 100타점 이상을 기록했다.
- 단일 시즌 1루수 비보조 더블 플레이 최다 기록: 1루수로서 단일 시즌 최다 비보조 더블 플레이(8개)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 커리어 150 2루타, 150 3루타, 150 홈런 기록: 메이저 리그 역사상 150개 이상의 2루타, 3루타, 홈런을 기록한 두 명의 선수 중 한 명이다(다른 한 명은 루 게릭).
3.3. 월드 시리즈 참가 및 우승
보텀리는 카디널스 소속으로 총 4번의 월드 시리즈에 참가하여 2번의 우승을 경험했다.
- 1926년 월드 시리즈: 보텀리는 이 시리즈에서 타율 0.345를 기록하며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가 뉴욕 양키스를 4승 3패로 꺾고 구단 역사상 첫 월드 시리즈 우승을 차지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 1928년 월드 시리즈: 카디널스는 다시 월드 시리즈에 진출했지만, 보텀리는 이 시리즈에서 타율 0.214에 그치며 뉴욕 양키스에게 4전 전패로 패배했다.
- 1930년 월드 시리즈: 보텀리는 이 시리즈에서 22타수 0.045의 저조한 타율을 기록했으며, 카디널스는 필라델피아 애슬레틱스에게 2승 4패로 패배했다.
- 1931년 월드 시리즈: 보텀리는 이 시리즈에서 타율 0.160에 그쳤지만, 카디널스는 필라델피아 애슬레틱스를 4승 3패로 꺾고 다시 한번 월드 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
총 24번의 월드 시리즈 경기에서 그는 타율 0.200(90타수 18안타), 1홈런, 10타점을 기록했다.
3.4. 신시내티 레즈 및 세인트루이스 브라운스 시절
카디널스에서의 성공적인 시기 이후, 보텀리는 신시내티 레즈와 세인트루이스 브라운스로 이적하며 선수 경력을 이어갔다. 이 시기에는 연봉 분쟁과 선수 겸 감독으로서의 역할 변화를 겪었다.

1932년 시즌 후, 카디널스는 보텀리를 오니 캐롤과 에스텔 크랩트리를 상대로 신시내티 레즈에 트레이드했다. 레즈는 보텀리를 칙 해피와 함께 더욱 강력한 공격력을 구축하려 했다. 보텀리는 그 오프시즌에 신시내티의 감독직을 노렸지만, 도니 부시에게 돌아갔다.
보텀리는 레즈와의 연봉 분쟁으로 야구를 그만두겠다고 위협했다. 그는 전년도 카디널스에서 받았던 1.30 만 USD에서 삭감된 8000 USD의 연봉에서 인상을 요구했다. 결국 그와 레즈는 1.00 만 USD에서 1.30 만 USD 사이로 추정되는 1년 계약에 합의했다. 1933년, 보텀리는 83타점(내셔널 리그 8위)과 13홈런(리그 9위)을 기록했다. 레즈에서 3시즌 동안 보텀리는 타율 0.283 이상을 기록하거나 83타점 이상을 기록하지 못했다. 1935년 스프링 트레이닝 중 연봉 분쟁으로 레즈를 떠났지만, 4월에 팀으로 복귀하기로 결정했다.
1936년 시즌을 앞두고 레즈는 보텀리를 아메리칸 리그의 세인트루이스 브라운스로 트레이드했으며, 브라운스는 당시 혼즈비가 감독을 맡고 있었다. 이 트레이드에서 브라운스는 조니 버넷을 내주었다. 7월 원정 경기 도중 보텀리는 허리 부상으로 은퇴를 선언했지만, 마음을 바꿔 팀에 남기로 했다. 보텀리는 1936년 시즌 타율 0.298을 기록했다.
1937년, 보텀리는 다시 야구계로 돌아오기로 결정했다. 1937년 시즌 동안 브라운스가 25승 52패의 저조한 성적을 기록하자, 브라운스는 혼즈비를 해고하고 보텀리를 선수 겸 감독으로 임명했다. 보텀리는 브라운스를 이끌고 21승을 추가했지만, 팀은 46승 108패의 기록으로 시즌을 8위로 마쳤다. 브라운스는 7위인 애슬레틱스에 9.5 게임 뒤졌고, 1위와는 56게임 차이였다. 선수로서 보텀리는 1937년 시즌 65경기에서 타율 0.239를 기록했다. 그는 그 해 아메리칸 리그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10명의 선수 중 한 명이었다.
브라운스는 1937년 시즌 후 보텀리를 재계약하지 않았고, 그를 1937년 시즌 동안 그의 수석 코치였던 개비 스트리트로 교체했다. 1938년, 보텀리는 시러큐스 치프스의 선수 겸 감독으로 활동했다. 시즌 초 부진한 성적과 팀 사장 잭 코벳이 유능한 선수를 추가하지 않자, 보텀리는 사임하고 딕 포터로 교체되었다. 보텀리는 또한 더 이상 선수로 뛰고 싶지 않다고 밝혔다.
3.5. 선수 경력 통계
제임스 보텀리는 16시즌 동안 총 1,991경기에 출전했으며, 그의 주요 통산 기록은 다음과 같다.
항목 | 기록 |
---|---|
경기 수 | 1,991 |
시즌 수 | 16 |
타율 | 0.310 |
안타 | 2,313 |
타수 | 7,471 |
득점 | 1,177 |
2루타 | 465 |
3루타 | 151 |
홈런 | 219 |
타점 | 1,422 |
도루 | 58 |
볼넷 | 664 |
출루율 | 0.369 |
장타율 | 0.500 |
수비율 (1루수) | 0.988 |
월드 시리즈에서는 4번의 시리즈에서 총 24경기에 출전하여 타율 0.200(90타수 18안타), 1홈런, 10타점을 기록했다.
3.6. 감독 경력
제임스 보텀리는 선수 경력 말기에 세인트루이스 브라운스와 시러큐스 치프스에서 선수 겸 감독으로 활동했다.
팀 | 연도 | 정규 시즌 | 포스트시즌 | |||||||
---|---|---|---|---|---|---|---|---|---|---|
경기 수 | 승 | 패 | 승률 | 최종 순위 | 승 | 패 | 승률 | 결과 | ||
세인트루이스 브라운스 | 1937 | 77 | 21 | 56 | 0.273 | 아메리칸 리그 8위 | - | - | - | - |
총계 | 77 | 21 | 56 | 0.273 | 0 | 0 | - |
1937년 브라운스에서 선수 겸 감독을 맡았을 때, 팀은 25승 52패의 성적으로 혼즈비 감독을 해고한 후 보텀리를 임명했다. 보텀리는 남은 시즌 동안 팀을 이끌고 21승을 추가했지만, 최종적으로 46승 108패의 기록으로 시즌을 마쳤다. 브라운스는 7위 팀에 9.5 게임 뒤졌고, 1위 팀과는 56게임 차이였다.
1938년에는 시러큐스 치프스의 선수 겸 감독으로 활동했지만, 시즌 초 부진한 성적과 팀 운영의 어려움으로 인해 사임했다.
4. 개인 생활
제임스 보텀리는 야구 경력 외에도 목장 운영과 라디오 방송 해설 등 다양한 활동을 하며 은퇴 후의 삶을 보냈다.
4.1. 가족 및 결혼
보텀리는 1933년 2월 4일 세인트루이스에서 미용실을 운영하던 엘리자베스 "베티" 브라우너 (Elizabeth "Betty" Browner영어)와 결혼했다. 두 사람 사이에는 자녀가 없었다.
4.2. 은퇴 후 활동
1938년 야구에서 은퇴한 후, 보텀리와 그의 아내는 미주리주 버번 지역으로 이주하여 헤리퍼드 소를 키웠다. 1939년, 보텀리는 라디오 방송인으로 변신하여 KWK 라디오 방송국과 계약을 맺고 카디널스와 브라운스 경기를 해설했다.
1955년, 보텀리는 카디널스의 스카우트로 야구계에 복귀했다. 1957년에는 시카고 컵스의 스카우트로 합류했으며, 클래스 D 애팔래치아 리그의 펄라스키 컵스 감독을 맡았다. 펄라스키에서 감독으로 일하던 중 심근 경색을 겪었다. 이후 보텀리 부부는 인근의 설리번으로 이사했다.
보텀리는 1959년 12월 심장 질환으로 사망했다. 그와 그의 아내 베티는 미주리주 설리번에 있는 국제 오드 펠로우즈 기사단 묘지에 안장되었다.
5. 명예 및 평가
제임스 보텀리는 그의 뛰어난 야구 실력과 업적으로 인해 다양한 명예를 얻었지만,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 헌액 과정에서는 논란이 일기도 했다.
5.1. 명예의 전당 헌액
보텀리는 1974년 베테랑 위원회에 의해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에 사후 헌액되었다. 그러나 그의 헌액은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미국 야구 기자협회는 베테랑 위원회가 회원 선정에 있어 충분히 엄격하지 않다고 비판했다. 베테랑 위원회에 프랭키 프리시와 빌 테리 등 보텀리의 카디널스 시절 팀 동료들이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에, 정실주의에 대한 비난이 제기되었다. 프리시와 테리는 1970년 제시 헤인즈, 1971년 데이브 밴크로프트와 칙 해피, 1972년 로스 영스, 1973년 조지 켈리, 1976년 프레디 린드스트롬 등 팀 동료들의 선정을 주도했다. 이러한 논란으로 인해 이후 베테랑 위원회의 권한이 축소되었다.
5.2. 기타 명예 및 기념
2014년, 카디널스는 보텀리를 2014년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명예의 전당의 첫 헌액자 22명 중 한 명으로 발표했다. 그의 고향인 일리노이주 오글스비와 그가 살았던 미주리주 설리번의 시립 공원도 보텀리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또한 노코미스에는 보텀리 외에 같은 노코미스 출신인 레이 샬크와 레드 러핑 등 명예의 전당 헌액자들을 기리는 보텀리-러핑-샬크 야구 박물관이 있다.
5.3. 영향 및 평가
보텀리는 쾌활한 성격 덕분에 '써니 짐'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그는 1루수로서 단일 시즌 최다 비보조 더블 플레이(8개)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또한 홈런 볼이 관중을 맞춰 소송을 당한 유일한 선수로도 알려져 있다(소송을 제기한 원고는 당시 공을 보고 있지 않았다). 그는 1924년부터 1929년까지 6년 연속으로 100타점 이상을 기록했다. 보텀리는 프랭크 슐트에 이어 야구 역사상 두 번째로 한 시즌에 20개 이상의 2루타, 3루타, 홈런을 기록한 선수이며, 루 게릭과 함께 커리어 동안 150개 이상의 2루타, 3루타, 홈런을 기록한 두 명의 선수 중 한 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