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어린 시절 및 아마추어 경력
영스는 미국 텍사스주 샤이너에서 세 형제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철도원으로 일했으나, 장애를 겪은 후 가족과 함께 샌안토니오로 이주하여 목장 주인으로 생계를 이었다. 영스의 어머니는 샌안토니오에서 작은 호텔을 운영했으며, 영스 또한 신문 배달을 하며 가계에 보탬이 되었다.
영스는 웨스트 텍사스 밀리터리 인스티튜트에서 교육을 받았다. 그는 미식축구 장학금 제안을 받았으나, 야구에 대한 깊은 애정으로 이를 거절하고 야구 선수의 길을 택했다.
2. 마이너 리그 경력
영스는 1914년 클래스 B 텍사스 리그의 오스틴 세너터스에서 프로 야구 선수로 데뷔했으나, 17경기에서 타율 .145를 기록하며 부진했다. 이듬해인 1915년에는 전보다 수준이 낮은 클래스 D 리그에서 뛰었다. 먼저 미들 텍사스 리그의 브렌햄 소속으로, 이후 센트럴 텍사스 리그의 웍서해치 애슬레틱스 소속으로 활약했으나, 두 리그 모두 시즌 중에 중단되거나 해체되는 수순을 밟았다.
1916년, 영스는 클래스 D 팀인 웨스턴 어소시에이션의 셔먼 라이언스에서 내야수로 뛰면서 스위치히터로 타율 .362를 기록하며 두각을 나타냈다. 그의 이러한 활약은 뉴욕 자이언츠의 주목을 받았고, 그해 8월 영스는 뉴욕 자이언츠와 2000 USD에 계약을 맺고 프로 경력의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다.
3. 메이저 리그 경력: 뉴욕 자이언츠
로스 영스는 1917년부터 1926년까지 뉴욕 자이언츠 소속으로 메이저 리그에서 활약하며 팀의 황금기를 이끌었다. 그의 경력은 갑작스러운 질병으로 짧게 끝났지만, 팀의 4년 연속 내셔널 리그 페넌트 우승과 두 차례 월드 시리즈 우승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3.1. 초기 활동 및 데뷔
1917년, 영스는 텍사스주 말린에서 열린 뉴욕 자이언츠의 스프링 트레이닝에 합류했다. 구단은 초기에 영스를 인터내셔널 리그의 로체스터 허슬러스로 내려보냈다. 당시 존 맥그로 뉴욕 자이언츠 감독은 로체스터 감독에게 "내가 보았던 선수 중 가장 훌륭한 선수 중 한 명을 보내겠네. 그를 외야수로 기용하게. 만약 그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자네에게 책임을 물을 걸세."라고 언급하며 영스에 대한 높은 기대를 드러냈다. 로체스터에서 140경기에 출전하여 타율 .356을 기록한 영스는 시즌 후반 빅리그로 콜업되었다. 맥그로 감독은 영스의 넘치는 활력과 허슬 플레이를 보고 '펩'(Pep활력 또는 원기영어)이라는 별명을 붙여주었고, 심지어 그를 자신의 후임 감독으로 고려하며 가르치기 시작했다.
1917년 9월 25일, 영스는 메이저 리그 데뷔전을 치렀으며, 내셔널 리그 페넌트 우승을 차지한 뉴욕 자이언츠의 시즌 마지막 9경기 중 7경기에 출전했다. 이 중 6경기는 중견수로, 한 경기는 우익수로 나섰다. 이 7경기에서 2개의 2루타와 3개의 3루타를 포함하여 26타수 9안타, 타율 .346을 기록하며 인상적인 모습을 보였다.
1918년, 자이언츠의 주전 우익수였던 데이브 로버트슨이 지역 군인 야구단을 감독하기 위해 팀을 떠나자, 영스는 스프링 트레이닝부터 그의 빈자리를 메우며 주전으로 자리 잡았다. 그는 좌타석에만 들어섰음에도 불구하고 121경기에서 타율 .302를 기록하며 이 부문 리그 6위에 올랐다. 이 시즌은 영스가 주전 선수로서 7년 연속 3할 이상의 타율을 기록하는 첫 해였으며, 1917년의 짧은 빅리그 출장을 포함하면 통산 8번째 3할 타율 시즌 중 두 번째 해에 해당했다. 또한 출루율(OBP) .368로 내셔널 리그 6위에 이름을 올렸다. 이듬해 로버트슨이 투수 필 더글라스와의 맞트레이드로 시카고 컵스로 이적하면서, 영스는 뉴욕 자이언츠의 우익수 자리에 확고히 고정되었다. 1919년 시즌 영스는 .311의 타율로 이 부문 내셔널 리그 3위를 차지했다. 1920년에는 .351의 타율을 기록하며 로저스 혼즈비에 이어 타율 부문 내셔널 리그 2위에 올랐다.
3.2. 전성기 및 월드 시리즈 출전

영스는 1921년 시즌 타율 .327을 기록하며 내셔널 리그 9위에 올랐다. 1921년 월드 시리즈 3차전에서 영스는 월드 시리즈 경기에서 한 이닝에 2개의 안타를 기록한 최초의 선수가 되었다. 그는 시리즈 동안 타율 .280을 기록했고, 소속팀 뉴욕 자이언츠는 뉴욕 양키스를 꺾고 우승을 차지했다.
1922년 4월 29일, 영스는 사이클링 히트를 기록하는 기염을 토했다. 그해 정규 시즌 출루율(.398)과 도루(17개) 부문 내셔널 리그 공동 9위에 올랐으며, 1922년 월드 시리즈에서는 .375의 맹타를 휘두르며 뉴욕 자이언츠가 1년 만에 다시 만난 뉴욕 양키스를 또다시 꺾는 데 크게 기여했다.
1923년, 영스는 121득점으로 이 부문 내셔널 리그 1위를 차지했으며, .348의 타율로 리그 8위에 올랐다. 그러나 1923년 월드 시리즈에서는 .356의 타율로 분전했지만, 뉴욕 양키스의 우승을 저지하지 못했다.
영스는 1924년 시즌 타율 .356을 기록하며 내셔널 리그 3위에 올랐다.
3.3. 승부조작 의혹
1924년 시즌 마지막 시리즈에서 뉴욕 자이언츠는 브루클린 다저스와 리그 우승을 다투고 있었고, 폴로 그라운즈에서 필라델피아 필리스와 격돌했다. 당시 뉴욕 자이언츠의 외야수 지미 오코넬은 필리스의 유격수 하이니 샌드에게 500 USD를 주는 대가로 고의적인 패배를 제안했다. 하지만 샌드는 이 제안을 거절하고 아트 플레처 필리스 감독에게 사실을 보고했다. 이에 케네소 마운틴 랜디스 커미셔너는 오코넬과 자이언츠의 코지 돌란 코치에게 영구 제명 처분을 내렸다. 오코넬은 자신의 승부조작에 영스, 조지 켈리, 프랭키 프리시 또한 가담했음을 시사했으나, 랜디스 커미셔너는 그 세 선수에 대해서는 결백함을 확인하고 무혐의 처분을 내렸다.
3.4. 말년의 경력
영스는 1924년 월드 시리즈에서 타율 .185의 저조한 성적을 기록했으며, 뉴욕 자이언츠는 워싱턴 세너터스에게 패배했다. 1925년에는 타율 .264에 그치며 메이저 리그에서 처음으로 3할 미만의 타율을 기록했지만, 다음 해인 1926년에는 95경기에서 .306의 타율을 기록하며 어느 정도 부진을 씻어냈다.
경력 막바지에 이르러 영스는 그의 후계자가 되는 멜 오트에게 폴로 그라운즈에서 우익수 수비를 어떻게 하는지 가르쳐주며 멘토링 활동을 하기도 했다.
4. 투병 및 사망
영스의 선수 경력은 1926년 브라이트병이라고 불리던 콩팥 질환 진단을 받으면서 갑작스럽게 중단되었다. 그는 이미 몇 년 전인 1924년에 연쇄상구균 감염에 노출된 이력이 있었다. 1926년 8월 10일 경기를 마지막으로 너무 아파 더 이상 경기에 뛸 수 없었던 영스는 존 맥그로 감독의 강권에 따라 집으로 돌아갔다. 이듬해 1927년 3월에는 수혈을 받으며 병마와 싸웠다.
그러나 영스는 1927년 10월 22일, 브라이트병으로 인해 30세의 젊은 나이에 숨을 거두었다. 선수 시절 체중이 77 kg (170 lb)에 달했으나, 사망 당시에는 체중이 45 kg (100 lb)까지 줄어든 상태였다. 뉴욕 타임스에 실린 영스의 부고 기사에서 맥그로 자이언츠 감독은 그를 "내가 필드에서 본 최고의 외야수"였다고 극찬하며 애도를 표했다. 뉴욕 자이언츠 구단은 폴로 그라운즈의 우측 외야에 영스를 기리는 동판을 설치했다. 구단 측에서는 동판 제작 비용을 직접 지불하려 했으나, 팬들이 직접 비용을 모금하고 싶어 했고, 1인당 1 USD로 후원 금액에 제한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동판 제작 비용이 모두 모였다.
5. 유산 및 평가
로스 영스는 짧은 생애에도 불구하고 야구계에 깊은 인상을 남겼으며, 그의 선수 경력과 명예의 전당 헌액 과정은 여전히 논의의 대상이 되고 있다.
5.1. 선수 경력 평가 및 기록
영스는 통산 10시즌 동안 812득점, 42홈런, 592타점, 153도루, 타율 .322, 출루율 .399, 장타율 .441을 기록했다. 1925년 시즌 이전까지 매 시즌 3할 이상의 타율을 기록했으며, 3할 5푼 이상의 타율도 두 차례 기록했다. 그는 세 차례 시즌 100득점 이상을 기록했고, 타점 커리어 하이는 1921년의 102타점, 홈런 커리어 하이는 1924년의 10홈런이었다. 영스가 뉴욕 자이언츠에서 뛰었던 1921년부터 1924년까지, 팀은 4년 연속 월드 시리즈에 진출하여 이 중 1921년과 1922년 두 차례 우승을 차지하며 팀의 성공에 크게 기여했다.
존 맥그로 뉴욕 자이언츠 감독은 자신의 사무실에 크리스티 매슈슨과 영스의 사진 단 두 장만을 보관할 정도로 영스를 매우 아꼈다. 팀 동료였던 로시 라이언과 영스의 상대 팀 선수였던 브루클린 다저스의 벌리 그라임스는 영스를 두고 자신들이 보았던 선수 중 최고의 선수라고 극찬하기도 했다.
5.1.1. 통산 기록
연도 | 팀 | 경기 | 타석 | 타수 | 득점 | 안타 | 2루타 | 3루타 | 홈런 | 루타 | 타점 | 도루 | 도루실패 | 볼넷 | 삼진 | 병살타 | 타율 | 출루율 | 장타율 | OPS |
---|---|---|---|---|---|---|---|---|---|---|---|---|---|---|---|---|---|---|---|---|
1917 | NYG | 7 | 29 | 26 | 5 | 9 | 2 | 3 | 0 | 17 | 1 | 1 | - | 2 | 1 | - | .346 | .370 | .654 | 1.024 |
1918 | NYG | 121 | 532 | 474 | 70 | 143 | 16 | 8 | 1 | 178 | 25 | 10 | - | 8 | 44 | - | .302 | .368 | .376 | .744 |
1919 | NYG | 130 | 561 | 489 | 73 | 152 | 31 | 7 | 2 | 203 | 43 | 24 | - | 13 | 47 | - | .311 | .384 | .415 | .799 |
1920 | NYG | 153 | 671 | 581 | 92 | 204 | 27 | 14 | 6 | 277 | 78 | 18 | 18 | 13 | 55 | - | .351 | .427 | .477 | .904 |
1921 | NYG | 141 | 594 | 504 | 90 | 165 | 24 | 16 | 3 | 230 | 102 | 21 | 17 | 18 | 47 | - | .327 | .411 | .456 | .868 |
1922 | NYG | 149 | 643 | 559 | 105 | 185 | 34 | 10 | 7 | 260 | 86 | 17 | 9 | 21 | 50 | - | .331 | .398 | .465 | .863 |
1923 | NYG | 152 | 689 | 596 | 121 | 200 | 33 | 12 | 3 | 266 | 87 | 13 | 19 | 14 | 36 | - | .336 | .412 | .446 | .859 |
1924 | NYG | 133 | 612 | 526 | 112 | 187 | 33 | 12 | 10 | 274 | 74 | 11 | 9 | 6 | 31 | - | .356 | .441 | .521 | .962 |
1925 | NYG | 130 | 584 | 500 | 82 | 132 | 24 | 6 | 6 | 186 | 53 | 17 | 11 | 14 | 51 | - | .264 | .354 | .372 | .726 |
1926 | NYG | 95 | 421 | 372 | 62 | 114 | 12 | 5 | 4 | 148 | 43 | 21 | - | 10 | 19 | - | .306 | .372 | .398 | .770 |
통산: 10년 | 1211 | 5336 | 4627 | 812 | 1491 | 236 | 93 | 42 | 2039 | 592 | 153 | 83 | 119 | 390 | 37 | .322 | .399 | .441 | .839 |
5.2. 명예의 전당 헌액 논란
영스는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의 초대 헌액자를 뽑는 1936년 투표에 후보로 올랐으나, 미국야구기자협회(BBWAA)로부터 5% 미만의 지지를 받았다. 이후 1956년까지 매년 투표에 이름을 올렸지만, 가장 많은 득표는 1947년의 22%에 그쳤다. 포드 C. 프릭 커미셔너와 과거 팀 동료였던 빌 테리는 영스의 명예의 전당 입후보를 적극적으로 옹호했다.
과거 뉴욕 자이언츠에서 영스와 함께 뛰었던 테리와 프랭키 프리시는 1967년 베테랑 위원회에 합류하여, 1972년 영스를 포함한 여러 전 팀 동료들을 명예의 전당에 헌액시키는 데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영스 외에도 1970년의 제시 헤인스, 1971년의 데이브 밴크로프트와 칙 헤이피, 1973년의 조지 켈리, 1974년의 짐 보텀리, 1976년의 프레디 린드스트롬 등이 그들의 영향으로 헌액되었다.
영스의 헌액을 포함하여 테리와 프리시의 영향력 아래 선정된 일부 선수들의 헌액은 여러 측면에서 논란의 대상이 되어 왔다. 미국야구기자협회에 따르면 베테랑 위원회는 헌액자 선정에 있어 충분한 선별 과정을 거치지 않았으며, 위원회가 사적인 인연에 이끌려 선정을 결정했다는 의심, 즉 '사사로운 정'과 '인맥'에 의한 헌액이라는 비판도 제기되었다. 이러한 문제점들로 인해 이후 몇 년간 베테랑 위원회의 권한은 축소되었다. 야구 통계 전문가 빌 제임스는 이러한 상황을 인지하고 영스가 명예의 전당에 포함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반면 1981년, 《역대 최고의 야구 선수 100명》(The 100 Greatest Baseball Players of All Time)을 집필한 로런스 리터와 도널드 호니그는 자신들의 목록에 영스를 포함시켰다. 이에 대해 리터와 호니그는 '스모키 조 우드 신드롬'을 언급하며, 특별한 재능을 보였으나 부상이나 질병으로 인해 경력이 단축된 선수들이 비록 양적으로 뛰어난 통산 기록을 보유하지 못했더라도, 여전히 위대한 선수 목록에 포함될 가치가 있다고 역설했다. 이러한 상반된 견해는 영스의 명예의 전당 헌액에 대한 복합적인 평가를 보여준다.
5.3. 추모 및 영향
영스는 현재까지 명예의 전당 헌액자 중 가장 이른 나이에 사망한 선수이다. 또한 그는 샌안토니오 출신으로는 유일하게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인물이며, 1998년에는 샌안토니오 스포츠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영스의 고향인 샤이너에서는 2001년부터 2003년까지 클리퍼 필드에서 그를 기리는 야구 토너먼트 대회가 개최되기도 했다.
6. 사생활
영스는 1924년 10월, 버크셔스에서 휴가를 보내던 중 만난 브루클린 출신의 여성 도로시 피에네케와 결혼했다. 1925년 12월, 둘 사이에서 딸 캐롤린이 태어났으나, 아내 도로시는 시어머니와 갈등을 겪은 후 캐롤린이 태어나기 전에 영스와 헤어졌고, 영스는 결국 자신의 딸을 만나보지 못했다.
영스는 평소 상냥하고 관대한 성격의 소유자로 알려져 있었으며, 주위에 돈을 빌려주는 일이 잦아 사망 당시 1.60 만 USD의 빚을 진 상태였다고 한다. 그는 또한 골프를 즐겨 쳤는데, 메이저 리그 선수들 중 가장 골프를 잘 치는 선수로 유명했다.
7. 같이 보기
- 경력 중 사망한 야구 선수 목록
- 사이클링 히트
-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역대 도루 순위
-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역대 득점 순위
8. 외부 링크
- [https://baseballhall.org/hall-of-famers/youngs-ross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의 로스 영스]
- [https://www.baseball-reference.com/players/y/youngro01.shtml Baseball-Reference.com의 로스 영스 통계]
- [https://www.fangraphs.com/players/ross-youngs/1014390/stats Fangraphs.com의 로스 영스 통계]
- [https://www.baseball-reference.com/bullpen/Ross_Youngs Baseball-Reference Bullpen의 로스 영스]
- [https://www.retrosheet.org/boxesetc/Y/Pyounr101.htm Retrosheet의 로스 영스 통계]
- [http://thedeadballera.com/Obits/Obits_XYZ/Youngs.Ross.Obit.html 로스 영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