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Overview
쥐스탱 아호마데그베토메탱은 1917년 1월 16일 출생하여 2002년 3월 8일에 사망한 베냉의 정치인으로, 한때 다호메이라 불렸던 이 나라의 독립 전후 혼란기에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며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그는 지역 기반의 권력이 중시되던 정치 환경 속에서 성장했으며, 다호메이 국회 의장과 총리 겸 부통령을 역임했습니다. 1970년부터 1972년까지 위베르 마가, 수루 미강 아피티와 함께 베냉 정치의 주요 세 축을 이루는 '대통령 평의회'의 일원으로서 국가를 이끌었으며, 특히 1972년 5월 7일에는 평화적인 정권 이양을 통해 대통령 평의회 의장직에 올랐습니다. 그러나 그의 집권은 1972년 10월 26일 마티외 케레쿠 소령이 주도한 군사 쿠데타로 인해 짧게 막을 내렸고, 아호마데그베토메탱은 다른 두 정치인과 함께 1981년까지 투옥되었습니다. 석방 후 1991년부터 1995년까지 국회의원으로 재직하며 베냉의 민주화 과정에 다시 기여하는 등 말년까지 정치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그의 삶은 베냉의 민주주의 정착을 향한 오랜 투쟁과 정치적 불안정의 시대를 상징하며, 복합적인 역사적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2. Early life and political beginnings
쥐스탱 아호마데그베토메탱은 프랑스 식민지 시대 다호메이의 격동기에서 태어나 정치적으로 중요한 인물로 성장했습니다. 그의 출생 배경, 교육, 초기 직업 경험은 훗날 그의 정치 경력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2.1. Birth, childhood, and education
아호마데그베토메탱은 1917년 1월 16일, 그의 출생지이자 역사적인 도시인 아보메이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아보메이 왕족의 직계 후손으로, 이러한 배경은 남부 지역, 특히 퐁족 사이에서 그의 정치적 기반을 다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그는 윌리엄 퐁티 학교와 다카르에 있는 프랑스 서아프리카 의과대학에서 교육을 받았습니다. 잠시 프랑스 육군에서 복무하며 하사관 계급에 이르렀고, 짧은 군 경력 후 치의학을 전공하여 수도인 포르토노보에 자신의 치과 병원을 개업했습니다.

2.2. Early career and political entry
치의사로서의 활동과 함께 아호마데그베토메탱은 정치에 입문했습니다. 그는 1946년 다호메이 진보 연합 (UPD)의 초기 구성원이었으나, 이후 아프리카 인민 블록 (BPA)을 설립했습니다. 그는 1947년 총선거에서 당선되었고 1952년에도 재선되었습니다. 1955년 BPA는 UPD와 합병하여 다호메이 민주 연합 (UDD)을 창설했습니다. 그는 프랑스 식민 통치에 대한 비판적인 목소리를 내며 노동조합과 연대하여 영향력을 확대했습니다. 이러한 기반을 바탕으로, 아호마데그베토메탱은 1956년 11월 선거에서 자신의 고향이자 구 다호메이 왕국의 수도였던 아보메이 시장에 당선되었습니다.
1959년 지역 선거에서는 수루 미강 아피티가 이끄는 다호메이 공화당 (PRD)이 144,038표로 37석을 얻었고, 위베르 마가가 이끄는 다호메이 민주 집회 (RDD)가 62,132표로 22석을 얻었습니다. 반면 아호마데그베토메탱의 UDD는 162,179표를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11석밖에 얻지 못했습니다. 이 결과는 즉각적인 폭동으로 이어졌으며, 아호마데그베토메탱 지지자들의 폭동은 프랑스 군대가 진압에 나설 정도로 심각했습니다. 펠릭스 우푸에부아니의 중재로 아피티와 아호마데그베토메탱은 논란이 된 18석을 나누는 데 합의했습니다. 그러나 아호마데그베토메탱은 아피티가 다호메이의 총리직을 유지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겠다고 분명히 밝혔고, 이에 대한 요구를 아피티는 무시했습니다. 결국 마가가 총리직의 타협안으로 선택되었고, 1959년 5월 22일 이 직위에 투표로 선출되었습니다.
3. Political career
쥐스탱 아호마데그베토메탱의 정치 경력은 베냉 독립 전후의 격렬한 당파 대립과 불안정한 정권 교체 속에서 전개되었습니다. 그는 야당 지도자로서 정부에 저항하고, 쿠데타로 실각했으며, 다시 권력의 중심에 복귀하는 등 베냉 현대사의 주요 흐름을 관통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3.1. Early political activities and opposition (1959-1963)
1960년 8월 1일 다호메이가 독립하자 마가가 초대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독립 직후, 세 주요 정당은 '애국 행동 전선'으로 통합되어 다호메이를 하나의 선거구로 재조정했습니다. 이 시스템 하에서는 다수표를 얻은 후보 명단이 모든 입법 의석을 차지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통합은 오래가지 못했고, 곧 아호마데그베토메탱은 이 연합에서 탈퇴했습니다. 그는 국내 일자리 부족으로 인한 대중의 불만을 이용하여 시위를 선동했습니다. 1960년 9월, 그는 경제 침체의 유일한 해결책이 자신을 수장으로 하는 단일 정당 국가라고 주장하며 새로운 정치적 입지를 모색했습니다.
한편 마가는 펠릭스 우푸에부아니를 통해 RDD를 그의 아프리카 민주 연합의 다호메이 지부로 인정받으려 했으나, 아호마데그베토메탱은 UDD만이 해당 연합의 유일한 대표라고 계속 주장했습니다. 9월 말, 아호마데그베토메탱은 마가가 국가 발전을 촉진하고 노동 계층의 복지를 보장할 능력이 없다는 이유로 노동조합들에게 또 다른 파업을 시작하도록 설득했습니다. 다호메이의 수도인 포르토노보와 최대 도시인 코토누에서 발생한 이 파업은 매우 심각하여 경찰이 최루탄을 사용했습니다. 마가가 활과 화살을 든 북부 지지자들을 밤거리 순찰에 투입하면서 파업은 진정되었습니다. 동시에 UDD 의원들은 국회에서 불신임 결의안을 제출했습니다. 마가는 그 제안에 반대하는 데 도움을 받기 위해 아피티에게 의지했지만 결국 결의안은 부결되었습니다.

불신임 결의안이 거부된 직후, UDD 의원들은 의원직을 사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곧 PRD 의원들로 대체되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PRD와 RDD는 합병하여 다호메이 통합당 (PDU)을 결성했고, 마가는 당연히 그 당의 지도자로 선출되었습니다. 12월 11일, 마가는 공식적으로 대통령으로, 아피티는 부통령으로 선출되었습니다. 1960년 국회의원 선거에서 PDU는 69%의 득표율을 얻었지만, UDD는 31%를 득표했음에도 불구하고 국회에 대표를 두지 못했습니다.
1961년 5월 26일, 정보부 장관 알베르 테보에제르는 아호마데그베토메탱이 대통령 암살을 모의했다는 사실을 마가에게 보고했으며, 아호마데그베토메탱과 11명의 다른 반대파 인물들이 체포되었습니다. 재판은 12월에 열렸는데, 이는 아프리카의 많은 정치 재판과는 달리 공개적으로 진행되었고 변호인 측은 파리에서 변호사를 선임할 수 있었습니다. 결국 아호마데그베토메탱은 음모에 가담한 역할로 5년 형을 선고받았고, 다른 사람들은 1년에서 10년 형을 선고받았습니다. UDD 또한 불법화되었습니다. 마가는 결국 1962년 11월 그들을 석방했는데, 이는 감옥에서의 모범적인 행동뿐만 아니라 전 적들과 화해하기 위함이라고 밝혔습니다.
3.2. Period of instability and return to power (1963-1970)
1963년 10월 27일, 크리스토프 소글로 장군이 주도한 쿠데타로 마가 정권이 전복되었습니다. 소글로는 빠르게 민정 이양 절차를 진행했고, 마가를 대신하여 아피티가 대통령으로, 아호마데그베토메탱이 부통령으로 취임했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 간의 대립이 곧 불거져 정치가 정체되었고, 결국 1965년 11월 29일 소글로가 두 번째 쿠데타를 일으켜 아호마데그베토메탱은 실각했습니다. 이후 단명하는 정권들이 연이어 들어섰으나 정치는 안정되지 못했습니다.
이러한 불안정한 상황 속에서 1970년에는 다시 마가, 아피티, 아호마데그베토메탱이 정계로 복귀하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대통령 평의회'를 구성하여 2년마다 대통령직을 순환하는 데 합의했고, 마가가 먼저 권력을 잡게 되었습니다. 이 합의는 내전을 막기 위한 시급한 타협으로 이루어졌습니다.
3.3. Presidential Council era (1970-1972)
1970년 5월 7일 구성된 대통령 평의회는 다호메이의 세 주요 정치 세력이 정권을 순환하며 국가를 통치하는 독특한 체제였습니다. 이 평의회는 당시 다호메이의 고질적인 지역주의와 정치적 분열을 해결하기 위한 고육지책으로 탄생했습니다.
3.3.1. Formation and initial period (under Maga)
1969년 12월 10일, 모리스 쿠앙데테가 에밀 데를린 진수를 전복시켰으나 군부는 쿠앙데테를 인정하지 않았고, 결국 두 인물 간의 합의가 이루어지지 못하자 폴 에밀 드 수자가 의장을 맡은 군사 이사회가 설립되었습니다. 1970년 3월 28일, 진정한 대통령을 결정하기 위한 선거가 실시되었고, 대통령 평의회의 세 주요 인물인 마가, 아호마데그베토메탱, 아피티는 선거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습니다. 이 선거는 협박과 뇌물이 난무했고, 지역별 충성도가 다시금 부각되었습니다. 또한, 여러 폭력 사태가 발생하여 선거 전날 파라쿠에서만 6명이 사망하거나 부상당했다는 보고도 있었습니다. 후보 진수는 마가 지지자들이 자신의 지지자 한 명을 살해했다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논란에도 불구하고 마가는 북부 지역에서, 아호마데그베토메탱은 남서부/중앙 지역에서, 아피티는 남동부 지역에서 각각 과반수의 표를 얻었습니다. 선거 결과는 마가가 252,551표, 아호마데그베토메탱이 200,091표, 아피티가 186,332표를 얻었습니다. 마가는 남부 전체에서 24,000표를 얻은 반면, 보르구 주에서는 그에게 180,000표가 투표되어 투표율 78% 중 97.3%를 차지했습니다. 진수는 17,551표로 3%를 얻는 데 그쳤습니다.
그러나 드 수자는 4월 3일 마가가 가장 많은 표를 얻은 아타코라 주의 선거 결과를 무효화했습니다. 격분한 마가는 자신이 대통령으로 선포되지 않으면 분리 독립하겠다고 위협하는 북부 인민 회의를 결성했습니다. 그는 정치 회의 참석을 위해 파라쿠의 선거 캠프를 떠나는 것조차 거부했습니다. 마가의 이러한 반응으로 인해 많은 남부 노동자들이 북부에서 도피하는 사태가 발생했습니다. 아피티는 만약 마가가 대통령직을 차지한다면 자신의 지역이 나이지리아에 합류하도록 설득하겠다고 주장했으며, 뇌물로 대통령직을 얻으려 했습니다. 아호마데그베토메탱은 마가가 선거 제도를 부정하게 이용했다고 주장했습니다. 반면 다른 세 전직 대통령과 달리 진수는 자신이 패배했음을 인정하고 협상에 참여하기로 결정했으며, "개인적인 이유"로 연립 정부 구성을 거부했습니다. 다른 전직 대통령들은 4월 13일 내전을 막기 위해 급하게 타협에 합의했습니다.
대통령 평의회는 5월 7일 설립되었으며, 마가, 아호마데그베토메탱, 아피티로 구성되었고, 2년마다 대통령직이 교체되었습니다. 마가는 이 시스템을 첫 2년간 이끌었습니다. 각 구성원은 자신의 임기를 연장하기 위해 군대를 사용하거나 다른 수단을 동원하지 않겠다고 동의했습니다. 첫 투표에서 만장일치가 되지 않으면 두 번째 투표에서는 두 평의회 구성원의 다수결로 결정되었습니다. 이 평의회는 다호메이의 행정부와 입법부 역할을 겸했습니다.
내각은 아호마데그베토메탱의 동맹 4명, 마가의 동맹 3명, 아피티의 동맹 3명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재무장관 가브리엘 로제, 정보관광부 장관 테오필 파올레티, 교육부 장관 에드몽 두수-요보, 통신부 장관 카를 아우앙수는 모두 아호마데그베토메탱의 측근이었습니다. 마가의 내각 동료는 재무장관 파스칼 차비 카오, 보건부 장관 알베르 우아사, 농촌 개발부 장관 차비 마마였으며, 아피티의 측근은 노동부 장관 암브루아즈 아그보통, 경제기획부 장관 조제프 케케, 법무부 장관이자 인장 관리인 미셸 토코였습니다. 진수 정권에서 외무장관을 역임했던 다우다 바다루는 계속 직책을 유지했습니다.
마가가 의장으로 재임하는 동안 그의 경제 정책은 그의 대통령 재임 기간 동안 격렬했던 노동조합 지도자들의 시위를 잠재우는 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는 지출을 줄이고 탈세를 단속함으로써 공무원들의 급여를 재정적으로 지원할 세금 계획을 세우는 데 기여했습니다는 점에서 호평을 받았습니다. 1970년 다호메이는 4.29 억 XOF의 흑자를 기록했고, 이듬해에는 5.70 억 XOF의 흑자로 증가했습니다. 국가 경제가 호조를 보이자, 아호마데그베토메탱과 평의회 구성원들은 세 채의 집과 세 대의 메르세데스-벤츠 300 자동차를 공유하고, 삼두정치 창립 기념일을 위한 축제를 개최하는 등 여러 호화로운 생활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평의회는 쿠투클루이 사건으로 인기를 잃었습니다. 아호마데그베토메탱과 평의회 구성원들의 법령에 따라 1960년대 후반부터 다호메이에서 법률 활동을 해왔던 토고의 야당 지도자 노에 쿠투클루이는 1971년 10월 27일 공식적으로 다호메이에서 추방되었습니다. 이는 토고 대통령 에티엔 에야데마 장군의 요청에 따른 것으로, 쿠투클루이는 에야데마의 군사 정부에 대한 여러 음모에 연루되어 있었습니다. 평의회의 송환 결정은 코토누에서 시위를 촉발했습니다. 그러나 마가는 자신의 결정을 이행할 수 없었는데, 알퐁스 알레이가 쿠투클루리를 보호하고 다호메이 외부의 알려지지 않은 장소로 데려갔기 때문입니다. 알레이 대령은 이 사건에서 어떤 처벌도 받지 않았습니다.
학생들도 이 시위에 참여했으며, 그들은 곧 정부와 충돌할 또 다른 이유를 찾았습니다. 1971년 11월 5일, 아호마데그베토메탱과 그의 행정부는 '노동자, 군인, 경찰을 이용하여 다호메이를 전쟁터로 만들려' 했던 급진적인 청년 단체인 다호메이 학생청년연합 (UGEED)을 폐쇄했습니다. 이는 교육부 장관이 교육 회의에 불참한 것에 대한 UGEED 주도의 시위에서 비롯되었습니다. 파업에 참여했던 학생들은 11월 19일에 학교로 복귀가 허용되었는데, 이는 부모가 더 이상 시위에 참여하지 않겠다는 문서에 서명하는 경우에만 해당되었습니다. 만약 이를 준수하지 않으면 다호메이 교육 시스템에서 퇴출될 것이었습니다. 정부 주도의 집회들이 이 금지를 지지하기 위해 조직되었습니다.
군부 또한 동요했습니다. 대통령 평의회의 구성은 군대를 더욱 격분시켰습니다. 1971년 5월 7일 아보메이에서 집회로 이동 중이던 아호마데그베토메탱이 매복 공격을 받았습니다. 마가는 처음에는 그 존재를 부인했고, 오늘날까지도 세부 사항은 불분명합니다. 1972년 1월 28일에는 위다의 한 포병 캠프에서 또 다른 군사 봉기가 발생했습니다. 대통령은 두 장교를 보내 반란군을 제압했지만, 어떤 처벌도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아호마데그베토메탱과 마가 모두 후자의 사건이 쿠데타 시도였다고 믿었습니다.
쿠앙데테는 2월 23일 새벽 다시 권력을 장악하려 했습니다. 아호마데그베토메탱은 처음 반란 소식을 들었을 때, 이를 마가가 권력을 유지하려는 시도라고 생각했습니다. 쿠앙데테는 위다 주둔군을 이끌고 정부 건물을 장악하고 드 수자를 살해하려 했습니다. 작전 중, 공격자 무무니 소령은 드 수자의 총에 치명상을 입었습니다. 이 음모는 좌절되었으나, 마가는 이 문제를 처리하기 위해 프랑스 방문을 취소했습니다. 12인 군사 위원회는 곧 쿠앙데테의 시도와 동시에 진행될 또 다른 음모를 밝혀냈습니다. 조사 결과에 따르면, 글렐레와 피에르 보니 대위는 드 수자가 암살될 때까지 쿠앙데테를 따르다가, 이후 자신들의 지도자를 제거하고 진수를 다시 권력에 앉히려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최근의 사건들은 평의회가 군대에 대해 가지고 있던 "두려움과 경멸"을 여실히 보여주었습니다.
3.3.2. Leadership and final coup (under Ahomadégbé-Tomêtin)
마가는 1972년 5월 7일 아호마데그베토메탱에게 권력을 이양했습니다. 이는 12년 만에 다호메이의 국가 원수직이 군사적 개입 없이 비군사적인 방식으로 승계된 첫 사례였습니다. 새로운 의장은 마가를 축하하며 이 삼두정치 체제가 "다호메이의 가장 유익한 제도 중 하나"였다고 칭송했습니다. 당시에는 이 삼두정치 체제가 서로를 끊임없이 약화시킬 것이라고 여겨졌기에, 이러한 순조로운 권력 이양은 다호메이 통합을 향한 긍정적인 단계로 평가되었습니다.
대통령 평의회는 1972년 쿠데타 모의자들에 대한 군사 재판 조직에 지연을 보였고, 재판은 5월 12일이 되어서야 시작되었습니다. 법정은 쿠앙데테 외 21명을 심리했는데, 대부분 군 장교였지만 일반 시민과 마가의 경호원도 포함되었습니다. 5월 16일 형량이 발표되었습니다. 쿠앙데테는 사형을 선고받았고, 조수에 대위와 글렐레 대위, 아그보통 병참상사, 한 하사관과 한 병장도 궐석재판으로 사형을 선고받았습니다. 5명에게는 종신형이, 2명에게는 20년 징역형, 1명에게는 15년, 2명에게는 10년, 그리고 2명에게는 5년 징역형이 선고되었습니다. 추가로 4명은 무죄로 풀려났습니다. 그러나 이 형벌들은 결코 집행되지 않았는데, 배심원들은 쿠앙데테가 또 다른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장악할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평의회의 또 다른 지연된 기능은 1970년 헌법이 요구했던 자문 국회인 국민 자문 의회(Assemblée Consultative Nationale)의 구성이었습니다. 헌법에 따르면 이러한 의회는 30명의 의원으로 구성되어 평의회 구성원들에게 경제, 사회 및 기타 문제에 대해 자문하며, 폴 다르부가 의장을 맡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의회는 "대통령 평의회 구성원들 간의 집중적인 흥정 ... 그리고 그들의 정치적 부하들이 의회 내 자리를 차지하려는 압력" 때문에 1972년 7월까지 설립되지 못했습니다.
아호마데그베토메탱 집권기의 가장 주목할 만한 사건 중 하나는 코바치 사건이었습니다. 이는 파스칼 차비 카오가 대통령 평의회에 공식 문구류를 독점적으로 판매하는 권한을 부여받으면서 시작되었고, 뇌물 수수와 횡령 의혹으로 확산되었습니다. 아호마데그베토메탱은 차비 카오를 해고하려 했으나, 차비 카오의 멘토였던 마가가 이를 거부했습니다. 마가는 아피티를 설득하여 이 법안에 거부권을 행사하도록 했습니다.
10월 26일, 위다 주둔군 병사들에 의해 또 다른 쿠데타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번 쿠데타는 성공적이었고, 마티외 케레쿠 소령이 대통령으로 취임했습니다. 쿠데타는 마가와 아호마데그베토메탱이 내각 회의를 진행하는 도중에 발생했습니다. 현장 보고에 따르면, 병사들이 갑자기 대통령궁 내각 회의실로 들이닥쳐 총기를 난사했으나, 아무도 다치지 않았습니다. 케레쿠는 이 삼두정치 체제를 "진정 괴물"이라고 칭하며, "용서할 수 없는 무능함" 등을 쿠데타의 정당화 사유로 내세웠습니다. 쿠앙데테는 사면되었으나, 이전 평의회 구성원들은 사면되지 않았습니다. 마가, 아호마데그베토메탱, 그리고 아피티는 1981년 케레쿠에 의해 풀려나기 전까지 9년 이상을 감옥에서 보냈습니다.
4. Later life and death
투옥에서 풀려난 후, 쥐스탱 아호마데그베토메탱은 다시금 베냉의 정치 무대에 복귀하여 국가 발전에 기여하고자 했습니다. 그의 말년 활동과 죽음은 그의 복잡한 삶의 마지막 장을 장식했습니다.
4.1. Post-imprisonment activities
1981년 투옥에서 풀려난 후, 아호마데그베토메탱은 1991년 민주주의를 위한 국민 집회 소속으로 국회의원에 당선되어 1995년까지 재직했습니다. 그는 사망할 때까지 자신이 설립한 다호메이 민주 연합(UDD)을 계속 이끌었습니다. 그의 말년 정치 활동은 베냉의 민주화 과정에 대한 그의 지속적인 헌신을 보여주었습니다.
4.2. Death and funeral
아호마데그베토메탱은 2002년 3월 8일 코토누에 있는 위베르 마가 국립 대학 병원에서 사망했습니다. 정확한 사인은 공개되지 않았지만, 그가 오랫동안 질병으로 고통받았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삼두정치 체제를 함께 이끌었던 세 명의 주요 정치인 중 마지막으로 사망한 인물이었습니다. 그의 사망에 따라 3월 11일부터 7일간의 국가 애도 기간이 선포되었고, 전국에 걸쳐 조기가 게양되었습니다. 케레쿠 대통령은 그의 사망 직후 아호마데그베토메탱의 자택을 방문하여 그를 "성격과 신념을 가진 투사이며 현명한 사람"이라고 칭찬했습니다.
5. Legacy and reception
쥐스탱 아호마데그베토메탱은 베냉의 복잡한 현대 정치사에서 논쟁적인 인물이었습니다. 그의 삶과 정치적 유산은 대중과 언론, 그리고 역사학자들 사이에서 다양한 평가를 받았습니다.
5.1. Public and media reception
아호마데그베토메탱의 사망 소식은 다호메이의 신문들을 지배했으며, 케레쿠 대통령의 긍정적인 평가와는 달리 더 복합적인 반응을 얻었습니다. 한편으로 케레쿠 대통령은 그를 "성격과 신념을 가진 투사이며 현명한 사람"으로 칭찬했습니다. 그러나 일부 언론은 보다 비판적인 시각을 드러냈습니다. 르 프로그레스(Le Progres르 프로그레스프랑스어)지는 아호마데그베토메탱을 "아보메이의 괴물"이라고까지 표현하면서도, 그가 "솔직함과 진실성 때문에 형제들에게 시기받았다"고 언급했습니다. 또한 "지금 그의 애국심, 높은 도덕성, 정치적 업적을 칭송하는 많은 이들이 한때 그를 죽였다"고 비판적으로 지적했습니다. 르 마티날(Le Matinal르 마티날프랑스어)은 "저 너머의 메시지: 아호마데그베가 케레쿠에게 도전하다"라는 제목의 기사를 통해 "범죄의 가해자들이 악어의 눈물을 흘리는 것이 어찌 그렇게 부적절할 수 있는가"라고 의문을 제기했습니다.
보다 중립적인 평가는 프라테르니테(Fraternite프라테르니테프랑스어)지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 신문은 "정치적 힘이 비범했던 아호마데그베는 베냉 현대사에서 가장 두려운 정치인 중 한 명이었다. 그를 친구로 두든 적으로 두든 위험했다. 그에게 정치는 여러 쉼표는 있지만 마침표는 없는 굽이진 문장이었다"라고 평했습니다.

르 레푸블리캥(Le Republicain르 레푸블리캥프랑스어)지는 그의 몰락을 바오밥나무에 비유하며, 그의 죽음 이후 대체로 슬픈 감정을 반영했습니다. 이 신문에 따르면, 아호마데그베토메탱은 "1970년 5월부터 1972년 10월까지 다호메이(현 베냉)를 번갈아 이끈 세 명의 위대한 사상가 중 한 명이었다"고 평가했습니다. 또한 오랜 투옥 생활이 그의 고무적인 자질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고 보았습니다. 레 에코 뒤 주르(Les Echos du Jour레 에코 뒤 주르프랑스어)는 "대통령이 된 치과의사는 삶과 그 불행에 맞서, 그리고 죽음에 맞서 끝까지 싸웠다... 그는 죽음을 피하기 위함이 아니라, 끝날 때까지는 아무것도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온 힘을 다해 저항했다"고 서술했습니다. 준 아프리크지는 그의 부고 기사에서 그를 "유머러스하고, 즐거운 분위기를 좋아했으며, 삶의 좋은 면을 즐길 줄 알았으나, 그의 분노는 호메로스적이었다"고 묘사했습니다.
5.2. Historical evaluation
쥐스탱 아호마데그베토메탱의 역사적 평가는 베냉의 독립과 민주화 과정에서 그의 복합적인 역할에 초점을 맞춥니다. 그는 지역주의적 정치 환경 속에서 아보메이 왕족의 후손이자 퐁족의 지도자로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이는 때로는 정치적 분열의 원인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프랑스 식민 통치에 대한 강력한 비판자였으며, 노동조합과 연대하여 대중적 기반을 확보하는 등 독립 운동에 기여한 측면도 있습니다.
그의 정치 경력은 위베르 마가, 수루 미강 아피티와의 격렬한 대립과 연합을 반복하며 베냉 정치의 불안정성을 상징합니다. 1970년 대통령 평의회의 형성은 이러한 지역 기반 정치 세력 간의 타협을 통해 내전을 막고 평화적인 권력 이양을 시도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진전으로 평가될 수 있습니다. 특히 1972년 마가로부터의 순조로운 정권 이양은 다호메이 정치사에서 드물었던 긍정적인 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짧은 집권기는 마티외 케레쿠의 쿠데타로 막을 내렸고, 이는 베냉 민주주의 발전에 큰 타격을 주었습니다.
9년 간의 투옥 생활 이후, 그가 다시 국회의원으로 복귀하여 활동한 것은 베냉의 민주화 노력에 대한 그의 지속적인 의지를 보여주는 긍정적인 평가 요소입니다. 그는 단순한 권력자가 아니라, 자신의 정치적 신념을 위해 투쟁하고 고난을 감수했으며, 말년에 다시 민주적 절차에 참여함으로써 베냉의 다당제 민주주의 정착에 일조하려 했던 인물로 기억됩니다. 그의 유산은 베냉이 겪었던 정치적 격변과 민주주의를 향한 길고 험난한 여정을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부분입니다.
6. Election results
쥐스탱 아호마데그베토메탱이 참여했던 주요 선거 결과는 다음과 같습니다.
선거명 | 직책명 | 대수 | 정당 | 득표율 | 득표수 | 결과 |
---|---|---|---|---|---|---|
1964년 베냉 대통령 선거 | 다호메이의 부통령 | 2대 | 무소속 | 단독후보 | 42표 | 당선 |
1970년 베냉 대통령 선거 | 다호메이의 대통령 | - | 무소속 | 36.57% | 200,092표 | 낙선 |
7. See also
- 위베르 마가
- 수루 미강 아피티
- 마티외 케레쿠
- 베냉의 역사
- 다호메이 공화국
- 베냉의 대통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