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주세페 피아치(Giuseppe Piazzi주세페 피아치이탈리아어, 1746년 7월 16일 ~ 1826년 7월 22일)는 이탈리아의 저명한 천문학자이자 수학자, 그리고 테아티노회 소속의 가톨릭 사제였다. 그는 시칠리아의 팔레르모에 팔레르모 천문대를 설립하고 초대 대장을 역임했으며, 이는 현재 '주세페 S. 바이아나 팔레르모 천문대'로 알려져 있다. 피아치는 1801년 1월 1일, 최초의 소행성이자 가장 큰 왜행성인 세레스를 발견한 것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이 발견은 당시 태양계의 행성 구성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그는 또한 7,646개의 별을 정밀하게 수록한 '팔레르모 별 목록'을 편찬하여 천문학 연구의 정밀도를 한 단계 끌어올리는 데 기여했다. 그의 업적은 사후에도 기려져 소행성 1000 피아치아, 달의 피아치 분화구, 그리고 세레스 표면의 지형 등에 그의 이름이 붙여졌다.
2. 생애 및 교육
주세페 피아치는 1746년 7월 16일 이탈리아 롬바르디아주의 폰테 인 발텔리나에서 태어났다. 그의 과학 교육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초기 전기를 포함하여 거의 남아있지 않지만, 그는 토리노에서 공부하며 지오반 바티스타 베카리아의 강의를 들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2.1. 학문적 배경
1768년부터 1770년까지 피아치는 로마의 산 안드레아 델라 발레에 있는 테아티노회 수도원에서 거주하며 프랑수아 자크리에 밑에서 수학을 공부했다. 이후 1773년 12월에는 라벤나로 옮겨 콜레지오 데이 노빌리에서 "학생 감찰관(prefetto degli studenti이탈리아어)"을 맡았으며, 철학과 수학 강사로 1779년 초까지 재직했다.
2.2. 교수 및 천문학자 경력
1770년 7월, 피아치는 몰타 대학교 수학과 교수로 임용되었다. 크레모나와 로마에서 잠시 머문 후, 1781년 3월 팔레르모로 이주하여 당시 "아카데미아 데 레지 스투디"로 알려진 팔레르모 대학교의 수학 강사로 부임했다. 그는 1787년 1월 19일까지 이 직책을 유지하다가 천문학 교수로 임명되었다.
2.3. 해외 활동 및 팔레르모 천문대
천문학 교수 임명과 거의 동시에, 피아치는 2년간 파리와 런던에서 천문학 실습 훈련을 받고 팔레르모 천문대 설립을 위한 특수 제작 기기를 확보할 권한을 부여받았다. 1787년 3월 13일부터 1789년 말까지의 해외 체류 기간 동안, 피아치는 당시 프랑스와 영국의 주요 천문학자들과 교류했다. 이 시기에 그는 18세기 가장 숙련된 기기 제작자 중 한 명인 제시 램스덴이 제작한 유명한 고도-방위각 측정 원형 기구를 확보할 수 있었다. 이 원형 기구는 1790년 7월 1일 공식적으로 설립된 팔레르모 천문대의 가장 중요한 장비가 되었다.
2.4. 나폴리 천문대 감독
1817년, 페르디난도 1세 국왕은 피아치에게 카포디몬테 천문대의 완공을 맡겼고, 그를 나폴리와 시칠리아 천문대의 총감독으로 임명했다.
3. 천문학적 업적

피아치는 천문학자로서 여러 중요한 발견과 연구 성과를 남겼으며, 특히 소행성 세레스의 발견은 그의 가장 큰 업적으로 평가받는다.
3.1. 별 목록 작성
피아치는 팔레르모 별 목록(Palermo Catalogue영어)의 편찬을 감독했다. 이 목록에는 7,646개의 별이 전례 없는 정밀도로 수록되어 있다. 이 목록에는 윌리엄 허셜이 명명한 "가넷 스타"(Garnet Star영어)인 뮤 케페이와 함께, 로타네브와 수알로신과 같은 별명들이 포함되어 있다. 이 작업은 체계적인 하늘 관측을 통해 이루어졌으며, 1803년에 초판이 출판되었고 1814년에 개정판이 나왔다.
3.2. 세레스 발견
1801년 1월 1일, 피아치는 별들을 배경으로 움직이는 "별과 같은 물체"를 발견했다. 처음에는 고정된 별이라고 생각했지만, 움직임을 확인한 후에는 그것이 행성, 혹은 그가 "새로운 별"이라고 부른 천체임을 확신하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일지에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빛은 다소 희미했고 목성과 같은 색깔이었지만, 일반적으로 8등급으로 간주되는 다른 많은 별들과 비슷했다. 따라서 나는 그것이 고정된 별이 아니라는 점에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둘째 날 저녁, 나는 관측을 반복했고, 이전 관측과 시간이나 천정으로부터의 거리가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하고 그 정확성에 대해 의심을 품기 시작했다. 이후 나는 그것이 새로운 별일 수도 있다는 강한 의심을 품게 되었다. 셋째 날 저녁, 나의 의심은 확신으로 바뀌었고, 그것이 고정된 별이 아님을 확신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것을 알리기 전에 넷째 날 저녁까지 기다렸고, 만족스럽게도 그것이 이전 날들과 같은 속도로 움직이는 것을 보았다."
그는 그것이 행성이라고 가정했음에도 불구하고, 보수적인 입장을 취하여 혜성으로 발표했다. 밀라노의 천문학자 바르나바 오리아니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자신의 의심을 다음과 같이 서면으로 밝혔다:
"저는 이 별을 혜성으로 발표했습니다만, 그 주변에 어떤 성운도 동반하지 않고, 게다가 그 움직임이 너무 느리고 상당히 균일하기 때문에, 여러 번 이것이 혜성보다 더 나은 무엇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대중에게 이러한 추측을 내놓지 않도록 조심했습니다."
그는 이 천체가 곧 태양의 빛에 가려져 사라졌기 때문에 오랫동안 관측할 수 없었다. 기존 방법으로는 궤도를 계산할 수 없었기에, 수학자 카를 프리드리히 가우스는 새로운 궤도 계산 방법을 개발하여 천문학자들이 이 천체를 다시 찾아낼 수 있도록 했다. 가우스의 계산을 통해 1801년 12월 프란츠 크사버 폰 차흐와 하인리히 빌헬름 올베르스에 의해 세레스가 재발견되었다. 궤도가 더 잘 결정된 후, 피아치의 가정이 옳았음이 분명해졌고, 이 물체는 혜성이 아니라 작은 행성에 더 가까웠다. 우연히도, 이는 티티우스-보데의 법칙이 행성이 존재할 것이라고 예측한 위치와 거의 정확히 일치했다.
피아치는 이 천체에 로마 신화와 시칠리아의 곡물 여신인 케레스와 나폴리와 시칠리아의 페르디난도 4세 국왕의 이름을 따서 "케레스 페르디난데아(Ceres Ferdinandea라틴어)"라고 명명했다. 그러나 "페르디난데아" 부분은 나중에 정치적인 이유로 삭제되었다. 세레스는 소행성대 내에서 발견된 최초이자 가장 큰 소행성으로 밝혀졌다. 2006년 국제천문연맹의 정의에 따라 세레스는 현재 왜행성으로 분류된다.
3.3. 기타 천문학 연구
세레스 발견 외에도 피아치는 별의 고유 운동 연구에도 기여했다. 그는 61 시그니를 시차 측정에 좋은 후보로 특별히 지목했으며, 이는 훗날 프리드리히 빌헬름 베셀에 의해 실제로 시차 측정이 이루어졌다. 61 시그니 성계는 때때로 '피아치의 나는 별'(Piazzi's Flying Star영어) 또는 '베셀의 별'(Bessel's Star영어)로 불리기도 한다.
4. 사후 평가 및 기념
주세페 피아치의 업적은 현대 천문학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사후에도 그의 공헌을 기리기 위한 다양한 기념 사업이 이루어졌다.
4.1. 명명된 것들
- 천문학자:** 영국의 천문학자 윌리엄 헨리 스미스의 아들이자 이탈리아에서 태어난 천문학자 찰스 피아치 스미스는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 기념상:** 1871년, 코스탄티노 코르티가 조각한 피아치 기념상이 그의 고향인 폰테의 주요 광장에 세워졌다.
- 소행성:** 1923년, 카를 라인무트가 하이델베르크에서 발견한 1000번째 소행성은 그의 이름을 따서 1000 피아치아로 명명되었다.
- 달의 크레이터:** 1935년, 달의 피아치 분화구는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 세레스 표면 지형:** 최근에는 허블 우주 망원경이 촬영한 세레스의 큰 반사율 지형(아마도 충돌구)이 비공식적으로 '피아치'라고 불리게 되었다.
5. 저작
피아치는 여러 중요한 저술을 남겼다. 그중 가장 잘 알려진 것은 1790년에 팔레르모 왕립 학회에서 천문학 강좌 개설을 기념하여 발표한 연설문인 『팔레르모 왕립 학회 천문학 강좌 개설 연설문』(Discorso recitato nell'aprirsi la prima volta la Cattedra di astronomia nell'Accademia de' r. Studj di Palermo이탈리아어)이다.
6. 관련 인물
피아치의 경력과 밀접하게 관련된 인물 중 한 명은 그의 조수이자 팔레르모 천문대장직을 승계한 니콜로 카치아토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