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존 더튼 프로스트 소장(John Dutton Frost존 더튼 프로스트영어, 1912년 12월 31일 ~ 1993년 5월 21일)은 영국 육군의 공수부대 장교로, 제2차 세계 대전 중 마켓 가든 작전의 일환인 아른험 전투에서 아른험 다리에 도달하여 사흘간 격렬하게 방어한 소규모 영국 공수부대 병력을 지휘한 것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그는 새로 창설된 영국 공수연대에 초기부터 합류했으며, 북아프리카 전역, 시칠리아 침공, 이탈리아 침공 등 여러 전시 공수 작전에서 뛰어난 활약을 펼쳤다. 아른험 전투에서 부상을 입고 포로가 된 후에도 군에 남아 복무했으며, 1968년 육군에서 은퇴하여 웨스트서식스에서 육우 농부로 활동했다.
2. 초기 생애 및 배경
존 더튼 프로스트는 1912년 12월 31일 영국령 인도 제국의 푸네에서 영국 육군 장교인 프랭크 더튼 프로스트와 엘시 도라(결혼 전 성 브라이트)의 아들로 태어났다.
2.1. 어린 시절 및 교육
그는 처음에는 웰링턴 칼리지 (버크셔)에서 교육을 받았으나, 학업 부진으로 인해 1929년 서머싯주의 몽크턴 콤 스쿨로 전학했다. 흥미롭게도 그는 나중에 자신의 '후즈 후' 인물 정보에서 몽크턴 콤 스쿨에 대한 언급을 제외했다. 몽크턴 콤 스쿨을 떠난 후 그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영국 육군에 입대했다. 1932년 9월 1일 샌드허스트 왕립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캐머로니언스 (스코틀랜드 소총병)에 소위로 임관했다.
2.2. 초기 경력
1935년 9월 1일 중위 (영국 육군 및 해병대)로 진급한 프로스트는 토머스 리델-웹스터 중령이 지휘하는 연대 2대대에서 복무했으며, 이 대대는 나중에 더글러스 그레이엄 중령의 지휘 아래 1936년~1939년 아랍 반란 초기 단계에 영국 위임통치령 팔레스타인으로 파견되었다. 1938년부터 1941년까지 프로스트는 이라크 레비즈에서 근무했으며, 1940년 9월 1일 대위로 진급했다. 이라크 근무 당시 그는 아랍어에 능통하여 영국군에게 중요한 인력으로 평가받았다.
3. 제2차 세계 대전
제2차 세계 대전 중 프로스트는 새로 창설된 영국 공수연대에 자원하여 브루네발 작전, 북아프리카 전역, 시칠리아 및 이탈리아 전역, 그리고 아른험 전투 등 주요 공수 작전에 참전하며 뛰어난 활약을 펼쳤다.
3.1. 공수부대 지원
1941년 9월 영국으로 돌아온 프로스트는 처음에는 필립 크리스티슨 소장의 15 스코틀랜드 보병사단의 45 여단 (영국) 소속 영국 육군 예비군 부대인 캐머로니언스 10대대에서 복무했다. 같은 해 그는 새로 창설된 영국 공수연대에 자원했다. 그는 리처드 게일 준장의 1 공수여단 (영국) 소속 2 공수대대 (영국)에 배치되었고, 이 여단은 프레더릭 브라우닝 소장이 지휘하는 1 공수사단 (영국)의 일부였다. 당시 그는 아직 공수 훈련을 마치지 않은 상태였다.
3.2. 브루네발 작전 (Operation Biting)

프로스트는 브루네발에서 독일군의 뷔르츠부르크 레이더 시설을 해체하고 부품을 탈취하는 브루네발 작전에서 뛰어난 활약을 펼쳤다. 이 작전은 새로 창설된 영국 공수연대가 두 번째로 투입된 작전이었다. 당시 소령이었던 프로스트가 지휘하는 C중대가 이 임무를 맡았고, 1942년 2월 27일 120명의 병력이 상륙했다. 그들은 강력한 저항에 부딪혔지만, 부품을 훔치고 독일 레이더 기술자를 생포하는 데 성공했다. 이 작전으로 3명이 전사하고 6명이 부상했으며 6명이 포로가 되었다. 영국 총리 윈스턴 처칠은 이 작전을 높이 평가하며 공수부대의 추가적인 전시 작전을 보장했다. 이 공로로 프로스트는 무공 십자 훈장을 수여받았다.
3.3. 북아프리카 전역
횃불 작전 중 북아프리카에 연합군이 상륙했을 때, 1 공수여단은 사단의 나머지 부대와 분리되어 에드윈 플라벨 준장의 지휘를 받으며 튀니지에 상륙했다. 당시 대리 중령이자 대대장이었던 프로스트는 튀니스 남쪽 48280 m (30 mile) 지점의 데피엔 근처 적 비행장을 공격하는 임무를 맡았다. 비행장은 버려진 상태였고, 우드나에서 만나기로 했던 기갑 부대는 도착하지 않아 프로스트의 대대는 적진 후방 80467 m (50 mile) 지점에 고립되었다. 수적으로 열세였고 퇴각하는 동안 계속해서 공격을 받았지만, 그들은 전투를 통해 제1군 (영국)의 연합군 전선으로 돌아오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16명의 장교와 250명의 병력을 잃었다. 대대는 튀니스까지 영국 제1군과 함께 계속 싸웠다. 이 공로로 그는 1943년 2월 11일 첫 번째 특출근무훈장을 수여받았다.
3.4. 시칠리아 및 이탈리아 전역
1943년, 프로스트의 대대는 제럴드 래스버리 준장이 지휘하는 1 공수여단과 함께 허스키 작전 중 시칠리아에 상륙하여 프리모솔레 다리를 점령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여단은 심하게 흩어졌고, 다리에 도달한 295명의 장교와 병사들은 독일군 4 공수연대와 맞서게 되어 다리를 잃었으나, 다른 영국 제8군 부대가 도착하면서 다시 확보했다.
이 전역에서 프로스트의 마지막 작전은 이탈리아에서였다. 1 공수사단 전체는 1943년 9월 조지 F. 홉킨슨 소장이 전사한 후 어니스트 다운 소장이 지휘했으나 1944년 1월 로이 어크하트 소장으로 교체되었고, 해상으로 타란토에 상륙했다.
3.5. 마켓 가든 작전 및 아른험 전투

프로스트는 마켓 가든 작전 중 아른험 전투에 참여한 것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이 전투에서 프로스트는 1 공수사단의 아른험 다리 공격을 선봉에서 이끌고, 사단 나머지 부대가 도착할 때까지 다리를 사수해야 했다. 계획대로라면 브라이언 호록스 중장이 지휘하는 영국 제30군단이 도착하는 데 이틀이 걸릴 동안 약 9,000명의 병력이 아른험 다리를 방어할 예정이었다.
1944년 9월 17일, 2 공수대대장으로서 프로스트는 오스터르베이크 근처에 상륙하여 아른험으로 진격한 약 745명의 경무장 병력으로 구성된 혼성 부대를 이끌었다. 대대는 다리의 북쪽 끝을 점령했지만, 프로스트는 자신의 부대가 제2 SS 기갑군단에 포위되어 1 공수사단의 나머지 부대와 단절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프로스트는 이어진 4일간의 격렬한 전투를 지휘했다. 독일군은 공수부대 진지에 포격을 퍼붓고, 전차와 보병을 투입하여 양측 모두에게 가장 치열한 전투 중 하나를 벌였다. 독일군은 공수부대의 항복 거부와 계속되는 반격에 크게 놀랐다. 사흘째 되는 날 250명의 부상자를 후송하기 위한 짧은 휴전 이후, 남은 공수부대원들이 탄약을 모두 소진할 때까지 전투는 계속되었다. 당시 약 100명의 공수부대원만이 남아 있었다.
4. 포로 생활
아른험 전투 이후 포로가 된 프로스트는 슈팡겐베르크 성의 오플라크 IX-A/H에 수감되었다. 그는 나중에 오버마스펠트의 병원으로 옮겨졌다. 프로스트는 1945년 3월 미군이 해당 지역을 점령하면서 해방되었다. 1945년 9월 20일, 그는 아른험에서의 리더십을 인정받아 특출근무훈장 훈장 막대를 추가로 수여받았다.
5. 전후 경력
프로스트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도 군에 남아 다양한 직책을 수행했으며, 이후 은퇴하여 민간 생활을 보냈다.
5.1. 전후 군 복무
프로스트는 전쟁 후에도 군에 남아 복무했으며, 이 기간 동안 1 공수사단의 전투 학교를 지휘하고 노르웨이에서 로이 어크하트 소장 지휘하에 사단과 함께 영국으로 돌아왔고, 그곳에서 사단은 해체되었다. 그는 나중에 2 공수대대로 돌아왔고, 이 대대는 여전히 1 공수여단의 일부였지만 6 공수사단 (영국)으로 전속되었다. 프로스트는 영국 위임통치령 팔레스타인에서의 유대인 반란 (팔레스타인 주둔 6 공수사단 참조) 동안 자신의 옛 대대를 이끌었다. 팔레스타인에 있는 동안 그는 복지사로 일하던 미래의 아내 진 맥그리거 라일을 만났다. 그들은 1947년 12월 31일에 결혼하여 아들과 딸 두 자녀를 두었다. 1946년 말 영국으로 돌아온 그는 캠벌리 참모대학에 입학하여 졸업 후 52 로우랜드 보병사단의 참모 (군사) 2급 장교(GSO2)로 근무했으며, 이후 말라야 비상사태 동안 17 구르카 사단에서 GSO1로 복무했다. 영국으로 돌아온 그는 1955년부터 1957년까지 보병학교의 지원 무기 부문 지휘관을 역임했다. 그 후 그는 파트타임 군인들로 구성된 또 다른 예비군 부대인 44 공수여단을 지휘했으며, 1961년 10월 11일 임시 소장으로 진급하여 약 3년 동안 지휘관을 역임할 52사단의 지휘관으로 돌아왔다.
5.2. 은퇴
1968년 군에서 은퇴할 무렵, 프로스트는 영구 소장 계급에 도달했으며, 전시 훈장 외에도 1964년 신년 훈장 수여식에서 바스 훈장 동반자로 임명되었다. 1982년, 프로스트는 은퇴 후 육우 농업을 시작한 웨스트서식스주의 부군수로 임명되었다. 1977년 4월 6일, 그는 TV 프로그램 '이것이 당신의 인생이다 (영국 TV 시리즈)'의 에피소드 주인공이 되었다.
6. 개인 생활
프로스트는 1947년 12월 31일 진 맥그리거 라일과 결혼하여 아들과 딸 두 자녀를 두었다. 그는 군에서 은퇴한 후 웨스트서식스에서 육우 농업에 종사하며 민간 생활을 보냈다.
7. 훈장 및 표창
프로스트는 군 복무 및 공헌에 대해 다음과 같은 주요 훈장과 표창을 수여받았다.
- 바스 훈장 동반자 (CB)
- 특출근무훈장 (DSO) 및 훈장 막대 (Bar)
- 무공 십자 훈장 (MC)
- 몰타 주권 군사 훈장 대장 (Grand Officer of the Sovereign Military Order of Malta)
8. 저술 활동
프로스트는 자신의 군사 경험과 관련된 여러 저서를 집필했다.
- 1980년: A Drop Too Many - 자서전 (1부)
- 1983년: 2 PARA Falklands: The Battalion at War
- 1991년: Nearly There - 자서전 (2부)
9. 매체에서의 묘사 및 기념
프로스트의 삶과 업적은 여러 대중 매체에서 묘사되었으며, 그의 이름을 딴 기념물로 기려지고 있다.
9.1. 매체에서의 묘사
1945년, 영국 육군 영화 및 사진 부대(AFPU)와 J. 아서 랭크 조직은 브라이언 데스몬드 허스트 감독의 '그들의 영광'이라는 제목으로 브루네발 작전 및 아른험 전투에 대한 다큐멘터리 영화 제작을 시작했다. 이 영화에는 전투의 사건들을 다큐픽션 형식으로 재현한 장면들이 포함되었다. 존 프로스트는 많은 장면에서 자신을 연기한 120명의 아른험 참전 용사 중 한 명이었다.
1974년, 프로스트의 아른험에서의 역할은 코넬리우스 라이언의 베스트셀러 논픽션 서적인 '머나먼 다리'에서 비중 있게 다루어졌다. 1976년, 프로스트는 리처드 애튼버러 감독의 라이언의 책을 영화화한 '머나먼 다리'의 군사 고문으로 활동했다. 이 영화에서 프로스트는 앤서니 홉킨스가 연기했다.
9.2. 기념 및 헌사
1978년, 아른험의 라인강을 가로지르는 다리는 프로스트의 이름이 붙는 것을 본인이 꺼려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이름을 따서 '존 프로스트 다리'(John Frostbrug존 프로스트브뤼흐네덜란드어)로 개명되었다.
10. 사망
존 더튼 프로스트는 1993년 5월 21일 8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는 웨스트서식스주의 밀랜드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11. 평가 및 영향
존 프로스트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영국 공수부대의 핵심 인물 중 한 명으로 평가된다.
11.1. 역사적 평가
그는 특히 브루네발 작전과 아른험 전투에서 보여준 뛰어난 리더십과 용기로 높은 평가를 받는다. 아른험 전투에서 수적으로 열세인 상황에서도 4일간 다리를 사수하며 보여준 그의 끈질긴 저항은 연합군과 독일군 모두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의 군사적 성과는 공수 작전의 중요성과 위험성을 동시에 보여주는 사례로 남아 있다.
11.2. 영향
프로스트의 업적은 영국 공수연대의 초기 역사와 정체성 형성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그의 전투 경험은 여러 서적과 영화를 통해 대중에게 널리 알려졌으며, 특히 '머나먼 다리'를 통해 그의 용맹함과 지휘력이 강조되었다. 아른험 다리가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된 것은 그가 현대 군사 역사에 남긴 지대한 영향과 영웅적인 기여를 상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