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존 데이비스(John Davis존 데이비스영어, 1550년경 ~ 1605년 12월 29일)는 엘리자베스 1세 여왕 시대의 주요 항해사이자 탐험가로, 북서항로를 개척하려는 여러 차례의 항해를 이끌었다. 그는 네덜란드와 잉글랜드의 동인도 제도 항해에서 수석 항해사 또는 선장으로 활동하며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1592년 8월에는 포클랜드 제도를 발견하는 업적을 남겼다. 데이비스는 항해술 발전에 크게 기여하여 백스태프와 데이비스 사분위와 같은 항해 기구를 발명했으며, 실용 항해술에 관한 저서인 《선원의 비밀》(The Seaman's Secrets)과 《세계 수로학적 설명》(The World's Hydrographical Description)을 집필했다. 그의 탐험은 그린란드와 바핀섬 사이의 데이비스 해협을 비롯한 여러 지명에 그의 이름을 남겼다. 그러나 그의 생애는 이누이트족과의 갈등, 가정사 문제, 그리고 토머스 오필드 음모 연루와 같은 논란도 포함하고 있으며, 1605년 싱가포르 근해 빈탄섬에서 일본인 해적의 습격을 받아 사망했다.
2. 생애
존 데이비스는 1550년경 데번주 스토크 가브리엘 교구에서 태어났으며, 어린 시절을 인근의 샌드리지 바턴에서 보냈다. 그는 어린 시절 다트강에서 배를 가지고 놀며 많은 항해술을 익혔고, 일찍이 바다로 나갔던 것으로 추정된다.
2.1. 어린 시절과 교육
데이비스는 1550년 10월 데번주 스토크 가브리엘에서 세례를 받았다는 기록이 있다. 그의 어린 시절 이웃으로는 에이드리언 길버트, 험프리 길버트 및 그들의 이복형제인 월터 롤리가 있었으며, 이들과의 교류는 그의 생애에 걸쳐 여러 이점을 제공했다. 또한 그는 일찍부터 존 디와도 친구가 되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선원이 되었으며, 근처에 살던 에이드리아 길버트와 함께 항해에 나섰다. 데번주 출신의 길버트 가문과 롤리 가문(동시대 탐험가 월터 롤리를 배출)은 데이비스의 친한 이웃이었으며, 이들과의 교류를 통해 그는 평생에 걸쳐 다양한 이익을 얻었다.
2.2. 초기 활동
1583년 1월, 데이비스는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의 비서인 프랜시스 월싱엄과 존 디 등에게 북서항로 탐험 항해에 대한 자신의 구상을 제시했다. 2년 후인 1585년, 월싱엄은 그의 제안을 받아들여 탐험 자금을 지원했다.
3. 주요 활동 및 업적
존 데이비스는 북서항로 개척을 위한 주요 탐험 외에도 여러 중요한 항해에 참여하며 다양한 업적을 남겼다.
3.1. 북서항로 탐험
존 데이비스의 가장 중요한 목표 중 하나는 북아메리카 대륙 북부를 가로질러 아시아로 향하는 북서항로를 발견하는 것이었다. 그는 이 목표를 위해 세 차례의 주요 항해를 이끌었다.
3.1.1. 1585년 항해
1585년, 데이비스는 지원을 받아 첫 번째 북서항로 탐험에 나섰다. 그는 마틴 프로비셔의 항로를 따라 그린란드의 동해안으로 향했고, 케이프 페어웰을 돌아 서쪽으로 바핀섬을 향해 나아갔다. 이 항해에서 그는 마침내 얼음이 없는 바다를 발견하고 중국을 향해 북서쪽으로 항로를 잡았다. 이 해역은 오늘날 그의 이름을 따서 데이비스 해협이라 불리며, 그린란드와 바핀섬 사이에 위치한다. 그는 북위 66도에서 바핀섬에 부딪혔고, 섬 동부의 컴벌랜드만을 해협으로 믿고 진입했으나 8월 말에 되돌아와야 했다.
3.1.2. 1586년 및 1587년 항해
1586년, 데이비스는 네 척의 배를 이끌고 다시 북극 지역으로 향했다. 이 중 두 척은 빙산이 많은 그린란드의 동해안으로 보내졌고, 나머지 두 척은 그의 이름을 딴 해협(데이비스 해협)을 따라 북위 67도까지 진입했으나 북극 빙하에 막혀 더 이상 나아가지 못했다. 이 항해 중 '선샤인'(Sunshine)호는 그린란드 동쪽을 일주하려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1587년의 세 번째 탐험에서는 데이비스 해협을 통과하여 바핀만으로 진입했고, 그린란드 서해안을 따라 북위 72도 12분(현재 우페르나비크 남쪽)까지 도달했다. 그는 음악가들을 대동하여 이누이트족과의 첫 접촉 시 음악을 연주하고 선원들과 함께 춤을 추며 우호적인 관계를 형성하려 했다. 그러나 이누이트족이 그의 닻 중 하나를 훔쳐간 후 관계는 악화되었고, 이누이트족은 래브라도의 해밀턴만에서도 그의 배를 공격했다. 데이비스는 이곳에서 서쪽으로 나아가 북아메리카 대륙의 북단을 돌아 중국으로 가는 항로를 찾으려 했으나 실패했다. 그는 컴벌랜드만, 케이프 월싱엄, 엑서터만 등 북극권의 바핀섬 주변에 현재까지 남아있는 지명들을 명명했으며, 윌리엄 바핀이나 헨리 허드슨과 함께 초기 위대한 북극 탐험가로 평가받는 업적을 남겼다. 하지만 데이비스는 마틴 프로비셔와 마찬가지로 '분노하는 역류'(Furious Overfall)라고 불린 흐름이 거센 허드슨 해협을 통과하지 못해 그 너머의 허드슨만을 발견하지는 못했다. 이 항해의 항해 일지는 수세기 동안 후대 선장들의 교과서적인 모델로 남아 있었다.
3.2. 기타 탐험 및 항해
북서항로 탐험 외에도 존 데이비스는 중요한 해전과 다른 대륙으로의 항해에 참여하며 그의 항해 경력을 확장했다.
3.2.1. 스페인 무적함대와의 대립
1588년, 존 데이비스는 '블랙 독'(Black Dog)호의 선장으로 스페인 무적함대와의 칼레 해전에 참전한 것으로 보인다. 1589년에는 조지 클리퍼드, 제3대 컴벌랜드 백작과 함께 아조레스 제도 항해에 참여했다.
3.2.2. 포클랜드 제도 발견
1591년, 데이비스는 토머스 캐번디시의 두 번째 항해에 동행했다. 캐번디시는 사략선을 타고 스페인 선박을 습격하며 세계 일주 항해를 완수했던 인물로, 데이비스는 그와 함께 태평양으로 향하여 반대편(북아메리카 대륙 서해안)에서 북서항로를 탐험하려 했다. 캐번디시 원정대는 브라질에서 포르투갈인과의 교전으로 많은 부하를 잃고 남대서양에서 사망했지만, 데이비스는 남은 부하와 배를 인계받아 자신의 항해를 계속하려 했다. 그는 마젤란 해협으로 향했으나 악천후에 가로막혔고, 되돌아오는 길인 1592년 8월, '디자이어'(Desire)호에 승선한 채 포클랜드 제도를 발견했다. 그의 선원들은 섬에서 식량을 위해 수백 마리의 펭귄을 사냥했으나, 저장한 고기가 열대 기후에서 상해버려 76명의 선원 중 단 14명만이 살아서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3.2.3. 동인도 항해
1596년부터 1597년까지 데이비스는 월터 롤리 경과 함께 카디스와 아조레스 제도로 항해하며 롤리 경의 선박의 선장으로 활동했다. 1598년부터 1600년까지는 네덜란드의 동인도 제도 탐험에 수석 항해사로 참여하여, 플러싱에서 출항하여 미델뷔르흐로 돌아오는 동안 지리적 세부 사항들을 세심하게 해도에 기록했다. 그는 수마트라의 아체에서 일어난 배신 행위로부터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
1601년부터 1603년까지 그는 제임스 랭커스터 경과 함께 영국 동인도 회사의 첫 번째 항해에 수석 항해사로 동행했다. 이 항해에서 데이비스는 원래 투자액의 두 배를 벌면 500 GBP를, 세 배를 벌면 1000 GBP를, 네 배를 벌면 1500 GBP를, 다섯 배를 벌면 2000 GBP를 받기로 되어 있었다. (2015년 가치 기준 약 150.00 만 GBP에 해당).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동남아시아 항해에서 경험을 쌓은 그의 안내 덕분에 이 항해는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어 출자자들에게 큰 이익을 안겨주었다. 그러나 출항 전 데이비스는 런던 상인들에게 아체에서 후추를 100파운드당 4 레알 데 오초에 구할 수 있다고 말했지만, 실제로는 20 레알이 들었다. 항해가 끝난 후 랭커스터는 데이비스가 후추의 가격과 가용성 모두에 대해 잘못된 정보를 제공했다고 불평했다.
1604년 12월 5일, 데이비스는 이러한 상황에 대한 희생양이 된 것에 불만을 품고, 제임스 1세로부터 동인도 회사의 무역 독점권에도 불구하고 특허를 받은 '불법 무역상'(interloper) 에드워드 미셸본 경의 수석 항해사로 다시 동인도 제도로 항해를 떠났다.
4. 항해술 및 저술
존 데이비스는 단순한 탐험가를 넘어 항해 기술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으며, 자신의 경험과 지식을 바탕으로 중요한 저술 활동을 펼쳤다.
4.1. 항해술 기여
데이비스는 당시 항해 시 측량용 도구였던 크로스 스태프를 개량하여 백스태프와 데이비스 사분위를 발명했다. 특히 그의 이름을 딴 데이비스 사분위는 존 해들리가 팔분의를 발명한 1730년경까지 잉글랜드 선원들 사이에서 널리 사용되며 큰 인기를 누렸다.

4.2. 저술 활동
데이비스의 북극 탐험 기록은 리처드 해클루이트에 의해 출판되었고, 그의 세계 지도에도 반영되었다. 데이비스 자신은 1594년에 실용적인 항해술에 관한 귀중한 논문인 《선원의 비밀》(The Seaman's Secrets)을 출판했으며, 1595년에는 보다 이론적인 저서인 《세계 수로학적 설명》(The World's Hydrographical Description)을 저술했다. 그의 마지막 항해에 대한 기록은 1606년 에드워드 미셸본이 잉글랜드로 돌아온 후 작성되었다.
5. 개인사
존 데이비스의 개인적인 삶은 결혼, 가족 관계, 그리고 논란이 되는 사건들로 이루어져 있다.
1582년 9월 29일, 데이비스는 데번주의 고등 보안관이었던 존 풀퍼드 경과 배스 백작의 딸인 도로시 부르시에의 딸인 페이스 풀퍼드와 결혼했다. 그들은 네 명의 아들과 한 명의 딸을 두었다. 그러나 1592년 항해에서 돌아온 데이비스는 아내가 '세련된 정부'와 관계를 맺었음을 알게 되었다. 아내 페이스는 이 남자(위조범)와 공모하여 데이비스에게 '거짓되고 무의미한 혐의'를 씌웠다.

데이비스는 또한 가톨릭 사제 토머스 오필드를 함정에 빠뜨리려는 음모에도 연루되었다. 그는 후원자인 프랜시스 월싱엄의 지시를 받아 선동가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이며, 자신이 가톨릭으로 개종했다고 주장하며 가톨릭 대의를 돕기 위해 여러 잉글랜드 선박을 교황이나 스페인에 넘겨주겠다고 제안했다. 그는 이 제안을 논의하기 위해 루앙에서 오필드를 만났다. 협상은 결렬되었고 데이비스는 잉글랜드로 돌아왔으며, 오필드는 가톨릭 문헌을 유포한 혐의로 체포되었다. 오필드는 고문을 당했고 여왕의 종교에 흠을 잡는 책을 배포한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그는 1585년 7월 6일 타이번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6. 사망
존 데이비스는 1605년 12월 29일 싱가포르 근처의 빈탄섬 연안에서 사망했다. 그는 에드워드 미셸본 경의 항해에서 수석 항해사로 활동하던 중, 자신이 나포한 일본인 해적선에 있던 해적들에게 살해당했다. 해적들은 며칠 동안 우호적인 대화를 통해 잉글랜드인들을 안심시킨 후, 기습 공격을 감행했다. 데이비스는 "끌려가 난도질당하고 다시 내던져졌다"고 묘사되며, 공격 직후 거의 즉사했다.
7. 평가 및 영향
존 데이비스는 당대 최고의 항해사 중 한 명으로 평가받으며, 그의 업적은 후대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그의 생애에는 비판과 논란의 여지가 있는 측면도 존재한다.
7.1. 역사적 평가
데이비스는 엘리자베스 1세 시대의 주요 항해사이자 탐험가로서 높은 평가를 받는다. 그는 북서항로를 개척하려는 끊임없는 시도를 통해 북극 지역의 지리적 이해를 넓혔으며, 데이비스 해협과 같은 중요한 지형을 발견하고 명명했다. 또한 포클랜드 제도를 발견하여 대영 제국의 지리적 지평을 확장하는 데 기여했다. 그의 항해 일지는 후대 선장들에게 교과서적인 모델이 되었으며, 항해술 발전에 기여한 그의 발명품들은 오랫동안 사용되며 해상 탐험의 안전과 효율성을 높이는 데 일조했다.
7.2. 후대에 미친 영향
데이비스의 활동은 후대에 여러 구체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의 이름을 딴 데이비스 해협은 북극해 항해의 중요한 지점이 되었다. 그의 사망 후 수세기 동안, 네덜란드 고래잡이 선원들의 중요성으로 인해 그린란드 서해안의 정착지들은 해협의 이름을 따서 "스트라트 데이비스"(Straat Davis)라고 불렸고, 동해안은 노르웨이 정착지라고 잘못 추정되며 "그린란드"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그가 발명한 데이비스 사분위는 존 해들리의 팔분의가 도입되기 전까지 잉글랜드 선원들 사이에서 오랫동안 인기를 유지하며 항해의 정확도를 높이는 데 기여했다. 그의 저서인 《선원의 비밀》과 《세계 수로학적 설명》은 실용적 및 이론적 항해 지식을 후대에 전달하는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
7.3. 비판 및 논란
존 데이비스의 생애는 여러 비판과 논란을 포함한다. 1586년 이누이트족과의 상호작용에서 그는 처음에는 음악가들을 동반하여 우호적인 관계를 시도했으나, 이누이트족이 닻을 훔쳐간 후 관계가 악화되었고, 래브라도의 해밀턴만에서는 그의 배가 공격받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는 탐험가와 원주민 간의 복잡하고 때로는 폭력적인 관계를 보여준다.
개인사 측면에서는 1592년 항해에서 돌아온 후 아내 페이스 풀퍼드가 정부와 공모하여 그에게 '거짓되고 무의미한 혐의'를 씌운 사건이 있었다. 이로 인해 그의 가정 생활은 큰 어려움을 겪었다.
또한 데이비스는 가톨릭 사제 토머스 오필드를 함정에 빠뜨리려는 음모에 연루되었다. 그는 프랜시스 월싱엄의 지시를 받아 선동가로서 가톨릭으로 개종했다고 거짓 주장하며 잉글랜드 선박을 교황이나 스페인에 넘겨주겠다고 제안했다. 이 음모는 오필드의 체포, 고문, 그리고 1585년 타이번에서의 교수형으로 이어졌다. 이는 데이비스가 당대의 정치적, 종교적 갈등 속에서 윤리적으로 논란이 될 수 있는 행동에 가담했음을 보여준다.
영국 동인도 회사의 첫 항해에서는 아체의 후추 가격과 가용성에 대해 잘못된 정보를 제공하여 제임스 랭커스터로부터 비난을 받기도 했다. 이러한 사건들은 그의 판단력이나 정직성에 대한 의문을 제기할 수 있는 부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