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제이미 프랭크 레드냅(Jamie Frank Redknapp제이미 프랭크 레드냅영어, 1973년 6월 25일 출생)은 1989년부터 2005년까지 활동했던 잉글랜드의 전 축구 선수이다. 그는 현재 스카이 스포츠의 축구 해설가이자 데일리 메일의 스포츠 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레드냅은 기술적으로 뛰어난 미드필더이자 창의적인 플레이메이커였으며, 정확하고 강력한 프리킥 능력도 갖추고 있었다. 그는 AFC 본머스, 사우샘프턴, 리버풀, 토트넘 홋스퍼에서 선수 생활을 했으며, 리버풀과 토트넘 홋스퍼에서는 주장을 맡기도 했다. 또한 1995년부터 1999년까지 잉글랜드 국가대표팀에서 17경기에 출전했으며, UEFA 유로 1996에서 4강에 진출한 잉글랜드 대표팀의 일원이었다. 리버풀에서의 11년은 그의 선수 경력 중 가장 성공적인 시기였으며, 클럽에서 237경기 이상을 뛰었고 풋볼 리그 컵 1995년 우승에 기여했다.
잦은 부상으로 얼룩진 선수 생활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레드냅은 경기장 안팎에서의 미디어 활동으로도 유명했다. 그는 1998년 팝 가수 루이스 레드냅과 결혼했으나 2017년 이혼했으며, 2021년에는 모델 프리다 안데르손과 재혼했다. 그는 축구계에서 잘 알려진 가문 출신으로, 그의 아버지는 축구 감독 해리 레드냅이며, 프랭크 램파드의 사촌이자 프랭크 램파드 시니어의 조카이다.
2. 초기 생애 및 배경
제이미 레드냅은 축구 명문가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축구와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성장했다.
2.1. 출생 및 가족
제이미 레드냅은 1973년 6월 25일 잉글랜드 햄프셔주 바턴온시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유명한 축구 감독 해리 레드냅이며, 어머니는 산드라 해리스이다. 그에게는 모델로 활동하는 형 마크가 있다. 또한 그는 프랭크 램파드의 외사촌이며, 웨스트햄 유나이티드의 전 선수이자 그의 아버지 해리의 전 감독 보좌관이었던 프랭크 램파드 시니어의 조카이기도 하다. 그의 아버지가 당시 AFC 본머스를 지도하고 있었기 때문에, 레드냅은 잉글랜드 남부 해안에서 성장했다.
2.2. 학력
레드냅은 도싯주 크라이스트처치에 위치한 트윈햄 스쿨에 다녔다. 어린 시절 그는 형과 함께 선데이 리그 유소년 팀에서 축구를 시작하며 선수로서의 꿈을 키웠다.
3. 선수 경력
제이미 레드냅은 1989년부터 2005년까지 프로 축구 선수로 활약하며 여러 클럽을 거쳤다. 그의 경력은 뛰어난 기술과 리더십으로 빛났지만, 잦은 부상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3.1. AFC 본머스
레드냅은 토트넘 홋스퍼의 유소년 선수로 축구 경력을 시작했으나, 프로 계약 제안을 거절하고 1989년 16세의 나이로 그의 아버지 해리 레드냅이 감독을 맡고 있던 AFC 본머스에서 프로 데뷔를 했다. 그는 본머스에서 13경기에 출전하며 잠재력을 보여주었고, 1991년 1월 15일 리버풀의 관심을 받아 이적하게 되었다. 당시 리버풀의 감독이었던 케니 달글리시는 17세에 불과했던 레드냅을 영입하기 위해 35.00 만 GBP를 지불했는데, 이는 당시 잉글랜드 축구 역사상 10대 선수에게 지불된 이적료 중 가장 높은 금액 중 하나였다. 그는 또한 어소시에이트 멤버스 컵에서 2경기에 출전했다.
3.2. 리버풀 FC

레드냅은 케니 달글리시 감독이 1991년 2월 22일 갑작스럽게 사임하기 전 마지막으로 영입한 선수 중 한 명이었다. 그는 1991년 10월 23일 UEFA컵 오세르와의 경기에서 리버풀 데뷔전을 치렀는데, 당시 18세 120일의 나이로 유럽 대항전에 출전한 리버풀 역사상 최연소 선수가 되었다. 이 기록은 13개월 후 필 차녹에 의해 깨졌다.
레드냅의 리버풀 첫 골은 1991년 12월 7일 사우샘프턴과의 리그 경기에서 터졌는데, 그는 얀 묄뷔와 교체되어 63분에 투입된 후 1대1 무승부 상황에서 득점했다. 달글리시 감독의 사임 후, 레드냅은 그레이엄 수네스 감독 체제에서 리버풀의 과도기 팀의 일원이 되었다. 그는 처음 2년 반 동안 대부분 교체 선수나 리저브 팀에서 뛰었으며, 1992 FA컵 결승전 우승에도 참여하지 못했다. 1993-94 시즌부터 마크 월터스를 대신하여 주전 선수로 자리매김했다. 이 시기에 레드냅은 새롭게 발전하는 프리미어리그의 대중적인 포스터 보이 아이콘 중 한 명이 되었다. 그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라이언 긱스, 리 샤프와 같은 다른 사진발 잘 받는 젊은 선수들과 함께 광고, 홍보 활동에 활용되었고, 그 결과 축구 스타들은 1990년대 중반부터 후반에 걸쳐 록 스타나 팝 스타에 버금가는 연예인이 되었다.
로이 에반스 감독 체제에서는 팀의 핵심 선수로 활약했지만, 스티브 맥매너먼, 로비 파울러, 스탠 콜리모어, 제이슨 매카티어 등 다른 젊은 선수들과 함께 '스파이스 보이즈'라는 비판적인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다. 특히 레드냅은 데이비드 제임스와 함께 탑맨과 아르마니의 모델로 런웨이에 서는 등 경기장 밖에서의 생활이 문제가 되기도 했다.
레드냅의 기여는 제라르 울리에 신임 감독 체제였던 1998-99 시즌에 절정에 달했으며, 그는 수많은 득점 기회를 만들고 10골을 기록했다. 존 반스, 스티브 맥매너먼, 폴 인스의 이적 후 1999-2000 시즌에는 부주장을 거쳐 정식 주장이 되었다. 그의 활약은 클럽이 프리미어리그 상위 3위권으로 복귀하는 데 기여했지만, 2000-01 프리미어리그 시즌에는 무릎 부상으로 인해 출전이 제한되었다. 오랜 부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는 미국에서 저명한 무릎 전문의 리처드 스테드먼 박사에게 무릎 수술을 받았다. 이로 인해 레드냅은 FA컵, 리그컵, UEFA컵을 모두 우승한 클럽의 트레블 캠페인에 참여할 수 없었다. 부상 중이었지만, 클럽 주장으로서 그는 카디프의 밀레니엄 스타디움에서 부주장 로비 파울러와 함께 FA컵 트로피를 들어 올리기 위해 팀 동료들의 부름을 받았다. 그는 2001-02 프리미어리그 시즌 전 프리시즌 투어에서 부상에서 복귀했다.
레드냅의 복귀는 오래가지 못했고, 그는 다시 부상에 시달렸다. 2001년 10월 27일 찰턴 애슬레틱과의 경기에서 2대0 승리에 기여하며 득점했지만, 3일 후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와의 UEFA 챔피언스리그 경기가 그의 리버풀 마지막 경기가 되었다. 그는 리버풀 소속으로 총 308경기에 출전하여 41골을 기록했으며, 리버풀 팬들 사이에서 가장 좋아하는 선수 중 한 명으로 자리매김하여 2006년 '콥을 뒤흔든 100명의 선수' 설문조사에서 40위에 선정되었다.
3.3. 토트넘 홋스퍼 FC
레드냅은 글렌 호들 감독이 이끄는 토트넘 홋스퍼로 2002년 4월 18일 2001-02 프리미어리그 시즌의 남은 몇 경기를 앞두고 자유 이적으로 합류할 수 있었다. 그는 다음 시즌 시작인 2002년 8월 17일, 전 소속팀 리버풀의 라이벌인 에버턴과의 리그 경기에서 데뷔전을 치렀고, 이 경기에서 그의 패스는 매슈 에더링턴의 프리미어리그 첫 골로 이어졌다.
레드냅은 일주일 뒤인 2002년 8월 26일 화이트 하트 레인에서 열린 아스톤 빌라와의 리그 경기에서 토트넘 소속으로 첫 골을 기록하며 1대0 승리를 이끌었다. 그는 토트넘에서 2년 반 동안 49경기에 출전하여 4골을 기록한 후, 2005년 1월 4일 그의 아버지 해리 레드냅이 감독으로 있는 사우샘프턴으로 이적했다.
3.4. 사우샘프턴 FC
31세의 레드냅은 2005년 1월 4일 자유 이적으로 사우샘프턴에 합류하여 강등권 싸움에 동참했다. 그는 2005년 1월 5일 세인트 메리즈 스타디움에서 풀럼과의 리그 경기에서 데뷔전을 치렀고, 경기는 3대3 무승부로 끝났다. 레드냅의 사우샘프턴 소속 유일한 골은 3일 뒤 식스필드 스타디움에서 열린 FA컵 3라운드 노샘프턴 타운과의 경기에서 터졌으며, 팀은 3대1로 승리했다.
레드냅은 사우샘프턴에서의 짧은 기간 동안 거의 완전한 몸 상태를 유지하지 못했고, 팀이 27시즌 연속 최상위 리그에 머물다가 챔피언십으로 강등되는 것을 막지 못했다. 시즌이 끝난 2005년 6월 19일, 31세의 레드냅은 계속되는 부상 문제와 의료 전문가의 조언에 따라 축구 선수로서의 은퇴를 결정했다.
4. 국가대표 경력
레드냅은 잉글랜드 국가대표팀에서도 활약하며 중요한 경기에 출전했다.
잉글랜드 감독 테리 베너블스는 1995년 9월 6일 웸블리 스타디움에서 열린 콜롬비아와의 친선 경기에서 레드냅에게 국제 경기 데뷔 기회를 주었다. 이 경기는 레네 이기타의 유명한 '전갈 킥'이 레드냅의 빗맞은 크로스에서 비롯된 것으로 가장 잘 기억되고 있다. 이 장면은 2002년 채널 4의 '가장 위대한 스포츠 순간 100선'에서 94위에 올랐다.
레드냅은 잉글랜드 대표팀에서 총 17경기에 출전했지만, 주요 토너먼트에서는 단 39분만 뛰었다. 이는 UEFA 유로 1996 대회에서 스코틀랜드와의 조별 리그 경기에서 교체 선수로 출전했을 때였다. 더 가디언의 롭 스미스는 이후 레드냅의 "매끄러운 패스가 느리게 움직이는 바퀴에 기름칠을 했다"고 평가했다. 그는 1998 FIFA 월드컵과 UEFA 유로 2000 모두 부상으로 인해 출전하지 못했다.
그의 유일한 국제 경기 골은 1999년 10월 10일 선덜랜드의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에서 열린 벨기에와의 친선 경기에서 2대1 승리 중 한 골을 기록한 것이었다.
5. 지도자 경력
선수 생활 은퇴 후, 제이미 레드냅은 잠시 지도자 경력에도 발을 들였다.
2007년 9월 21일, 첼시는 로만 아브라모비치 구단주가 스탬퍼드 브리지의 코칭 스태프 개편을 모색하면서 레드냅에게 아브람 그랜트의 보조 코치직을 제안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실제 임명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2008년 12월 11일, 제이미 레드냅이 UEFA 코칭 자격증을 공부하면서 주 2회 첼시 리저브 팀 코치를 맡게 될 것이라고 발표되었다. 이 공석은 전 첼시 리저브 팀 코치였던 브렌던 로저스가 왓포드로 이적하면서 발생했다.
6. 미디어 경력
레드냅은 2004년 UEFA 유로 2004 기간 동안 BBC의 스튜디오 해설가로 미디어 경력을 시작했다. 은퇴 후 그는 전업 해설가로 활동하며 전 잉글랜드 팀 동료 게리 네빌과 함께 스카이 스포츠의 정규 스튜디오 해설가로 출연하고 있다. 또한 스카이 스포츠 웹사이트의 정규 칼럼니스트이기도 하다.
2005년, 레드냅은 아내 루이스와 전 팀 동료 팀 셔우드와 함께 프로 축구 선수와 그 가족을 대상으로 하는 격월간 잡지 '아이콘 매거진'을 창간했다.
2010년에는 스카이 1의 프로그램 '풋볼스 넥스트 스타'의 진행자 겸 멘토로, 그리고 스카이 1 스포츠 게임 쇼 '어 리그 오브 데어 온'의 팀 주장으로 활동했다.
레드냅은 '그가 말 그대로 그를 반으로 잘랐다', '알론소와 시소코는 말 그대로 수비수 네 명 앞에 앉도록 뽑혔다', '드록바는 오늘 센데로스를 말 그대로 파괴했다', '젊은 시절 마이클 오언은 말 그대로 그레이하운드였다', '그는 왼발로 안쪽으로 파고들어야 했다, 왜냐하면 그는 말 그대로 오른발이 없기 때문이다', '마르틴 욜의 목은 말 그대로 도마 위에 올랐다', '이 공들은 이제 발에서 말 그대로 폭발한다'와 같은 표현에서 'literally'라는 단어를 반복적으로 과도하게 사용하고 오용한 것으로 상당한 주목을 받았다. 2010년, 그는 이러한 영어 사용의 미숙함으로 인해 플레인 잉글리시 캠페인으로부터 '풋 인 마우스 어워드'를 수상했다.
2021년 4월 22일, 제이미 레드냅과 해리 레드냅, 코미디언 톰 데이비스가 진행하는 토크쇼 '레드냅스 빅 나이트 아웃'이 스카이 원에서 첫 방송되었다.
7. 개인사
제이미 레드냅은 대중의 주목을 받는 개인 생활을 영위해왔다.
레드냅은 1998년 6월 29일 팝 가수 루이스 너딩과 결혼했다. 그들은 두 아들을 두었다. 첫째 아들 찰스 윌리엄 "찰리" 레드냅은 2004년 7월 27일 런던의 포틀랜드 병원에서 태어났다. 찰스라는 이름은 루이스가 임신 사실을 알게 된 날 돌아가신 그녀의 할아버지의 이름을 딴 것이다. 둘째 아들 보 헨리 레드냅은 2008년 11월 10일에 태어났다. 보라는 이름은 그의 할아버지 해리 레드냅이 태어난 런던의 보(Bow) 지역에 경의를 표하기 위해 지어졌다. 19년간의 결혼 생활 끝에, 제이미와 루이스 레드냅은 2017년 12월 29일 이혼했다.
2021년 10월 18일, 레드냅은 런던 첼시 등기소에서 모델 프리다 안데르손과 결혼했다. 이 부부는 아들 한 명을 두었다.
8. 선수 경력 통계
8.1. 클럽
클럽 | 시즌 | 리그 | FA컵 | 리그컵 | 유럽 | 기타 | 총계 | |||||||
---|---|---|---|---|---|---|---|---|---|---|---|---|---|---|
디비전 | 출전 | 득점 | 출전 | 득점 | 출전 | 득점 | 출전 | 득점 | 출전 | 득점 | 출전 | 득점 | ||
AFC 본머스 | 1989-90 | 2부 디비전 | 4 | 0 | 0 | 0 | 0 | 0 | - | 0 | 0 | 4 | 0 | |
1990-91 | 3부 디비전 | 9 | 0 | 3 | 0 | 3 | 0 | - | 2 | 0 | 17 | 0 | ||
총계 | 13 | 0 | 3 | 0 | 3 | 0 | - | 2 | 0 | 21 | 0 | |||
리버풀 | 1991-92 | 1부 디비전 | 6 | 1 | 2 | 0 | 0 | 0 | 2 | 0 | - | 10 | 1 | |
1992-93 | 프리미어리그 | 29 | 2 | 1 | 0 | 6 | 1 | 4 | 0 | - | 40 | 3 | ||
1993-94 | 프리미어리그 | 35 | 4 | 2 | 0 | 4 | 0 | - | - | 41 | 4 | |||
1994-95 | 프리미어리그 | 41 | 3 | 6 | 1 | 8 | 2 | - | - | 55 | 6 | |||
1995-96 | 프리미어리그 | 23 | 3 | 3 | 0 | 3 | 0 | 4 | 1 | - | 33 | 4 | ||
1996-97 | 프리미어리그 | 23 | 2 | 1 | 0 | 1 | 1 | 7 | 0 | - | 32 | 3 | ||
1997-98 | 프리미어리그 | 20 | 3 | 1 | 1 | 3 | 1 | 2 | 0 | - | 26 | 5 | ||
1998-99 | 프리미어리그 | 34 | 8 | 2 | 0 | 0 | 0 | 4 | 2 | - | 40 | 10 | ||
1999-2000 | 프리미어리그 | 22 | 3 | 0 | 0 | 1 | 0 | - | - | 23 | 3 | |||
2000-01 | 프리미어리그 | 0 | 0 | 0 | 0 | 0 | 0 | 0 | 0 | - | 0 | 0 | ||
2001-02 | 프리미어리그 | 4 | 1 | 0 | 0 | 1 | 0 | 3 | 1 | 0 | 0 | 8 | 2 | |
총계 | 237 | 30 | 18 | 2 | 27 | 5 | 26 | 4 | 0 | 0 | 308 | 41 | ||
토트넘 홋스퍼 | 2002-03 | 프리미어리그 | 17 | 3 | 0 | 0 | 0 | 0 | - | - | 17 | 3 | ||
2003-04 | 프리미어리그 | 17 | 1 | 0 | 0 | 0 | 0 | - | - | 17 | 1 | |||
2004-05 | 프리미어리그 | 14 | 0 | - | 1 | 0 | - | - | 15 | 0 | ||||
총계 | 48 | 4 | 0 | 0 | 1 | 0 | - | - | 49 | 4 | ||||
사우샘프턴 | 2004-05 | 프리미어리그 | 16 | 0 | 1 | 1 | - | - | - | 17 | 1 | |||
커리어 총계 | 314 | 34 | 22 | 3 | 31 | 5 | 26 | 4 | 2 | 0 | 395 | 46 |
8.2. 국가대표
국가대표팀 | 연도 | 출전 | 득점 |
---|---|---|---|
잉글랜드 | 1995 | 3 | 0 |
1996 | 2 | 0 | |
1997 | 3 | 0 | |
1998 | 2 | 0 | |
1999 | 7 | 1 | |
총계 | 17 | 1 |
:득점 및 결과는 잉글랜드의 득점을 먼저 표기하며, 득점 열은 레드냅의 각 골 이후의 점수를 나타낸다.
번호 | 날짜 | 경기장 | 출전 | 상대팀 | 득점 | 결과 | 대회 |
---|---|---|---|---|---|---|---|
1 | 1999년 10월 10일 |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 선덜랜드, 잉글랜드 | 15 | 벨기에 | 2-1 | 2-1 | 친선 경기 |
9. 수상 경력
제이미 레드냅은 선수 경력 동안 다음과 같은 팀 및 개인 트로피를 획득했다.
리버풀
- 풋볼 리그 컵: 1994-95
- FA 채리티 실드: 2001
- UEFA컵: 2001
잉글랜드 U21
- 툴롱 토너먼트: 1993, 1994
10. 평가 및 유산
제이미 레드냅의 선수 경력은 뛰어난 재능에도 불구하고 잦은 부상으로 인해 상당한 영향을 받았다. 그는 리버풀과 토트넘 홋스퍼의 주장을 역임하며 팀에 기여했지만, 지속적인 부상은 그의 잠재력을 완전히 발휘하는 데 방해가 되었다.
그는 경기장 안팎에서 미디어 활동으로도 유명했다. 리버풀 시절에는 스티브 맥매너먼, 로비 파울러 등과 함께 '스파이스 보이즈'라는 별명으로 불리며 모델 활동 등 사생활이 도마 위에 오르기도 했다. 은퇴 후에는 스카이 스포츠의 해설가이자 칼럼니스트로 활발하게 활동하며 대중적인 인지도를 유지했다. 그러나 그의 해설 중 'literally'와 같은 특정 단어의 과도한 사용은 대중의 주목을 받았고, 이는 2010년 '플레인 잉글리시 캠페인'으로부터 '풋 인 마우스 어워드'를 수상하는 결과로 이어지기도 했다. 이러한 미디어에서의 활발한 활동과 논란은 그의 명성에 양면적인 영향을 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