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의양군 이재각(義陽君 李載覺, 1874년 ~ 1935년)은 전주 이씨 왕족이자 대한제국의 고위 관료이다. 그는 장조의 후손으로, 대한제국 시기 의양군에 봉해져 궁내부 특진관, 종정원경 등 여러 요직을 역임했다. 특히 1902년 영국의 에드워드 7세 즉위식에 특명부영대사로 파견되어 나이아가라 폭포를 방문한 한국인 최초의 인물로 기록된다. 또한 대한적십자사의 초대 및 제3대 총재를 지내며 근대화 과정에 참여했다.
그러나 한일 병합 조약 이후 일제강점기에 접어들면서 일본으로부터 후작 작위와 막대한 은사금을 수령하고, 일본군의 육군 소장 대우를 받는 등 친일 행적을 보였다. 이러한 이유로 해방 후 대한민국에서는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되어 친일인명사전 및 친일반민족행위 195인 명단 등에 등재되었다. 그의 생애는 대한제국 시기 왕족으로서의 활동과 일제강점기 친일 행위라는 상반된 평가를 동시에 받는다.
2. 초기 생애 및 배경
2.1. 가계 및 출생
이재각은 전주 이씨 왕족으로, 조선 후기 한성부에서 태어났다. 그의 본관은 전주, 휘는 재각(載覺), 자는 윤명(允明)이다. 그는 장조의 3남인 은전군의 증손이자, 선조의 아홉째 서자 경창군 이주(李珘)의 10세손에 해당한다. 아버지는 완평군 이승응(完平君 李昇應, 1836년 ~ 1909년)이며, 어머니는 알려져 있지 않다.
그의 할아버지 풍계군 이당(豊溪君 李瑭)은 은언군의 둘째 아들이자 전계대원군의 이복 형이었으나, 후사 없이 사망한 이복 작은아버지 은전군의 양자로 입양되었다. 이재각의 생부인 이승응은 선조의 서자 경창군의 8대손으로 원래 왕위 계승권에서 멀었으나, 풍계군의 양자로 들어가면서 고종의 4촌뻘이 되었다.
이재각은 1874년 4월 4일(고종 11년 음력 2월 18일)에 완평군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일각에서는 1873년생 설도 제기된다.
2.2. 교육 및 초기 경력
1891년(고종 28년) 증광시 진사에 급제하였고, 이듬해인 1892년(고종 29년) 문과 별시(文科別試)에 병과(丙科) 42위로 급제하여 관직에 나아갔다. 이후 비서원랑(祕書院郞)을 거쳐 1895년(고종 32년) 10월 15일 종척 집사(宗戚執事)로 임명되었다. 1897년 11월 16일에는 중추원 3등 의관에 임명되었다. 1898년(광무 2년) 4월 12일에는 경효전의 전작례(奠酌禮)와 작헌례(酌獻禮)에서 대축(大祝)으로 봉무하였다. 초기에는 비서감 좌서랑, 시강원 시독관 등의 직책을 수행하기도 했다.
3. 대한제국 시기 활동
이재각은 대한제국 시기에 다양한 고위 관직을 역임하며 외교 활동과 군사 부문에도 기여했다.
3.1. 관직 및 작위
1899년(광무 3년) 8월 4일, 일본의 친왕이 국경에 도착하자 동궁의 시강원 부첨사(侍講院副詹事)로서 노문(勞問)을 위해 파견되었다. 같은 해 9월 21일에는 의양도정(義陽都正)에 봉해졌고, 11월 17일에는 특별히 가자(加資)되어 의양군(義陽君)에 진봉(進封)되었다. 11월 28일에는 궁내부 특진관(宮内府特進官)에 제수되었다.
1901년(광무 5년) 3월 29일, 명헌태후궁 대부에 임용되어 칙임관 4등에 서임되었고, 6월 6일에도 궁내부 특진관에 임용되어 칙임관 4등에 서임되었다. 1905년(광무 9년) 2월 13일에는 종정원경(宗正院卿)에 임용되어 칙임관 3등에 서임되었다. 1907년(광무 11년) 1월 22일에는 궁내부 특진관에 임용되어 칙임관 1등에 서임되었다. 1910년(융희 4년) 8월 25일에는 종1품에 가자되었다.
3.2. 외교 활동 및 해외 방문
1902년(광무 6년) 1월 30일, 영국의 에드워드 7세 즉위를 축하하기 위한 특명부영대사(特命赴英大使)로 임명되어 영국 런던을 방문했다. 그는 수원 정3품 이종응, 예식원 번역과장 고희경, 참리관 김조현 등으로 구성된 사절단을 이끌었다.

사절단은 1902년 4월 17일 한양을 출발하여 5월 14일 캐나다 밴쿠버에 도착했다. 이재각은 특명영국대사로서 에드워드 7세의 즉위식 축하사절 겸 대관식에 참석하는 동안 영국 왕실의 배려로 나이아가라 폭포를 관광하게 되었다. 5월 14일 밴쿠버에서 열차에 탑승하여 5월 20일 토론토에 도착한 뒤 나이아가라 폭포를 관람했다. 나이아가라 폭포를 보고 놀란 일행 중 이종응은 기념 시를 남기기도 했다. 이 대관식 사절단 파견 사실은 1910년 이후 잊혀졌다가, 1994년 4월 11일 이종응의 증손녀 이해남과 남동생 이해석이 오랫동안 집에서 보관해오던 수행 기록을 언론에 공개하면서 비로소 알려졌다.
영국 체류는 1902년 6월 22일부터 7월 2일까지 이루어졌다. 귀국 후 그는 고종 황제를 알현하고 자신의 여정에 대해 보고했다. 이 보고에는 나이아가라 폭포뿐만 아니라 홍해, 스리랑카 등에 대한 내용도 포함되었다.
1905년(광무 9년) 3월 16일에는 러일 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자 이를 축하하기 위한 특파 대사(特派大使)로 임명되어 일본에 다녀왔으며, 약 한 달간 일본에 체류했다.
3.3. 대한적십자사 총재
1905년(광무 9년) 7월 24일, 이재각은 대한적십자사의 초대 총재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1906년(고종 43년) 7월 12일 총재직에서 해임되었고, 의친왕 이강이 그를 대신하여 총재직을 맡았다.
이후 1907년(광무 11년) 1월 18일에는 잠시 적십자사 총재의 사무를 임시로 서리(署理)하였고, 같은 해 4월 24일에는 다시 적십자사 총재로 재임명되었다. 그는 1910년(융희 4년) 10월 2일 대한적십자사가 해체됨에 따라 총재직에서 물러났다.
3.4. 기타 공직
1903년(광무 7년) 1월 30일, 전선사 제조(典膳司提調)를 겸임하였다. 1904년(광무 8년) 1월 2일에는 종척 집사에 임명되었다. 같은 해 9월 22일에는 군부 포공국장(軍部砲工局長)에 임용되어 주임관 1등에 서임되었으며, 이는 군대 현대화에 기여한 것으로 평가된다. 11월 5일에도 종척 집사에 임명되었다.
1905년(광무 9년) 5월 25일, 경부선 철도 개통식에 일본의 히즈야스왕〔博恭王〕이 참석하자 함께 참석하였다. 1907년(광무 11년) 4월 19일에는 육군 참장(陸軍參將)에 임용되었다. 1908년(융희 2년)에는 민간단체인 상공근무사의 회장으로 추대되었다. 같은 해 7월 23일에는 철종 장황제 제주 서사관(哲宗章皇帝題主書寫官)에 임명되었다.
1909년(융희 3년) 1월 5일부터 순종 황제가 남쪽 대구, 부산, 마산 등을 순행할 때 호종(扈從)하여 수행했다. 대구에서는 박중양 등 관찰사들의 접견 후 순종을 수행하여 대구, 부산, 마산 등을 순행하였다.

4. 일제강점기 활동
이재각은 한일 병합 조약 이후 일제강점기 동안 일본 제국으로부터 작위를 받고 경제적 특혜를 누리며 친일 행적을 이어갔다. 이러한 행적은 해방 후 대한민국에서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되는 주요 근거가 되었다.
4.1. 작위 수여 및 대우
1910년(융희 4년) 음력 9월 4일, 한일 병합 조약 체결 후 일본으로부터 조선귀족령에 의거하여 후작(侯爵) 작위를 수여받았다. 또한 일본 정부로부터 병합의 공로를 인정받아 은사공채 16.80 만 KRW을 받았다. 일본은 이재각에게 특별히 일본군 육군 소장 대우를 해주며 제복과 호위무관을 보내주기도 했다. 1912년 8월 1일에는 일본 정부로부터 조선 식민 통치에 대한 공로로 훈장을 받았다.
그는 일제강점기에도 조선 왕실과 관련된 여러 의례에 참여하며 일본의 식민 통치에 협력하는 모습을 보였다. 1911년 7월 20일에는 종척 집사에 임명되었고, 8월 10일에는 덕안궁(德安宮)의 향관(享官)에 임명되었다. 10월 22일에는 선원전(璿源殿)에 별도로 봉심(奉審)하였다.
이후에도 1914년 9월 7일 헌종의 탄신일, 11월 16일 영조의 탄신일, 1915년 10월 30일 정조의 탄신일, 1916년 9월 6일 문조의 탄신일에 선원전(璿源殿)에 봉심하였다. 1917년 9월 15일에는 고종 황제의 명으로 순조의 비 순원숙황후의 기신(忌辰) 구갑(舊甲)을 맞아 인릉(仁陵)에 가서 작헌례(酌獻禮)를 섭행(攝行)하였다. 1919년 1월 22일에는 수릉 향원(守陵享員)과 종척 집사에 임명되었다.
1924년에는 종3위에 서위되었고, 1926년 순종이 붕어하자 4월 26일 종척 집사에 임명되어 이재곤, 이달용 등과 함께 산릉도감과 빈전도감에 참여하였다. 같은 해 5월 10일에는 천릉시 종척 집사에 임명되었다. 그는 고종의 국장에도 참여했다.
5. 수훈 및 포상
이재각은 대한제국 시기와 일제강점기에 걸쳐 다양한 훈장과 포상을 받았다.
| 구분 | 훈장명 | 수여일 |
|---|---|---|
| 대한제국 | 태극장 (훈1등) | 1904년 4월 12일 |
| 이화대수장 (대훈) | 1905년 3월 19일 | |
| 서성대훈장 | 1907년 1월 21일 | |
| 금척대수장 (대훈) | 1910년 8월 27일 | |
| 일본 제국 | 욱일동화대수장 (훈1등) | 1905년 4월 1일 |
| 황태자 도한 기념장 | 1909년 4월 18일 | |
| 대례기념장 | 1915년 11월 10일 |
이 외에도 1909년 8월 27일에는 그의 부인 정부인 유씨가 훈2등 서봉장을 하사받았다. 1931년 1월 16일에는 일본으로부터 정3위(正三位)에 서위되었다.
6. 가족 관계
이재각의 가족 관계는 다음과 같다.
- 조부: 풍계군 이당(豊溪君 李瑭, 1783년 ~ 1826년) - 장조의 서장남 은언군의 차남.
- 생조부: 이도식(李道植) - 선조의 9남 경창군의 8대손.
- 아버지: 완평군 이승응(完平君 李昇應, 1836년 ~ 1909년) - 선조의 9남 경창군 8대손 이도식의 아들.
- 어머니: (이름 미상)
- 형제자매:
- 형: 인양군 이재근(仁陽君 李載覲, 1857년 ~ 1896년)
- 형: 이재현(李載現, 1870년 ~ ?) - 선조의 9남 경창군 생가의 숙부 이낙응(李洛應)에게 출계.
- 동생: 예양정 이재규(禮陽正 李載規, 1877년 ~ ?)
- 배우자:
- 정부인 유씨(貞夫人 柳氏, 1871년 9월 29일 ~ ?) - 도사 유덕수(柳德秀)의 딸.
- (이름 미상)
- 자녀:
- 아들: 이덕용(李徳鎔, 1923년 4월 4일 ~ 1952년 9월 16일)
7. 사망 및 평가
7.1. 사망
이재각은 1935년 5월 11일 경성부 운현궁에서 향년 62세로 사망하였다.
7.2. 친일 행적 및 역사적 평가
이재각은 대한제국의 고위 관료이자 왕족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한일 병합 조약 이후 일본으로부터 후작 작위를 받고 막대한 은사금을 수령하는 등 일제강점기 동안 친일 행적을 보였다. 특히 일본 정부로부터 육군 소장 대우를 받으며 제복과 호위무관까지 제공받은 사실은 그가 식민 통치에 적극적으로 협력했음을 보여준다.
1960년의 한 보도에 따르면, 일제강점기 동안 이재각 일가는 경성부에서 부유한 생활을 했으나 광복 후 손이 끊어졌다고 한다. 서울 삼청동 130번지에 있었던 이재각의 별장은 한국 전쟁 중에 파괴되었다.
그의 이러한 행적은 해방 후 대한민국에서 친일반민족행위자로 평가받는 주요 근거가 되었다. 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에 포함되었으며, 2005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도 선정되었다. 또한 2007년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195인 명단'에도 그 이름이 올라 있다. 민족문제연구소의 목록에는 그의 후작 작위를 습작(襲爵) 받은 아들 이덕용도 포함되어 있어, 그의 친일 행위가 후대까지 이어졌음을 보여준다.
8. 관련 항목
- 이승응
- 이덕용
- 이종응
- 대한적십자사
- 의친왕
- 이지용
- 이준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