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Overview
울리히 폰 융깅겐(Ulrich von Jungingen울리히 폰 융깅겐독일어, 1360년경 ~ 1410년 7월 15일)은 중세 말기의 슈바벤인 귀족으로, 1407년부터 1410년까지 제26대 독일 기사단 총장을 역임했습니다. 그는 총장 재임 기간 동안 리투아니아 대공국과 폴란드 왕국에 대한 강경한 대결 정책을 추진했으며, 이는 결국 폴란드-리투아니아-독일 기사단 전쟁으로 이어져 그룬발트 전투에서 기사단에게 재앙적인 패배를 안겨주었고 그 자신도 전사하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융깅겐의 사망과 그룬발트 전투의 대패, 그리고 뒤이은 평화 조약에서 부과된 막대한 금전적 부담은 독일 기사단국의 국운이 기울게 되는 결정적인 변곡점이 되었습니다. 오늘날까지도 울리히 폰 융깅겐은 그룬발트에서의 전술적 실책과 오만함으로 주로 기억되며, 그의 공격적인 정책이 가져온 비극적인 결말은 역사적으로 중요한 교훈으로 평가됩니다.
2. 생애와 경력
울리히 폰 융깅겐은 슈바벤의 귀족 가문인 융깅겐 가문의 후예로, 아마도 1311년에 조상 대대로 살던 융깅겐의 본거지가 황폐화된 후 슈토카흐 근처 호엔펠스 성에서 태어난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는 형인 콘라트 폰 융깅겐과 함께 가문의 상속에서 제외된 어린 아들이었기 때문에 독일 기사단에 서원하고 프로이센에 위치한 기사단국으로 이주했습니다. 울리히는 슐로하우(츠우후프)에 거주했으며 1396년부터 1404년까지 발가의 콤투르(지휘관)를 지냈습니다. 그의 형 콘라트가 1393년 총장으로 선출되면서 울리히의 경력은 형의 후원으로 더욱 발전했습니다.
2.1. 초기 생애 및 기사단 입단
울리히 폰 융깅겐은 1360년경 슈바벤 지역의 명문 귀족 가문인 융깅겐 가문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가문의 본거지였던 융깅겐은 1311년에 황폐해진 바 있어, 그는 아마도 슈토카흐 근처에 위치한 호엔펠스 성에서 유년기를 보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당시 귀족 가문의 상속 관습에 따라 장남이 아닌 둘째 아들이었던 울리히는 형 콘라트 폰 융깅겐과 함께 가문의 주요 재산을 상속받을 수 없었으며, 이에 따라 종교적인 길을 택해 독일 기사단에 입단하게 됩니다. 그는 기사단의 본거지가 있는 프로이센으로 이주하며 기사로서의 삶을 시작했습니다. 초기에는 슐로하우(츠우후프)에서 거주했으며, 1396년부터 1404년까지 발가 지역의 콤투르(지휘관)로 복무하면서 기사단 내에서의 입지를 다져나갔습니다.
2.2. 기사단 내에서의 성장
울리히 폰 융깅겐의 경력은 형 콘라트 폰 융깅겐이 1393년 독일 기사단 총장으로 선출되면서 큰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는 형의 후원을 받으며 기사단 내에서 빠르게 승진했습니다. 1398년, 독일 기사단이 고틀란드에서 식료품 형제단을 축출한 후, 울리히는 덴마크의 마르그레테 1세 여왕과의 고틀란드 소유권에 대한 협상에서 두각을 나타냈습니다. 또한 그는 사모기티아 공국과 관련된 1398년 살리나스 조약 체결과 관련하여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에 파견된 외교 사절단으로 활동하며 자신의 외교적 역량을 입증했습니다.
1404년에는 기사단의 군사 총책임자인 마르샬(Grand Marshal)이자 쾨니히스베르크의 콤투르로 임명되었습니다. 이 시기에 그는 몇 차례의 사모기티아 봉기에 대처해야 했는데, 엄격한 진압과 함께 지역 귀족들에게 뇌물을 주는 등 다양한 방법으로 봉기를 진압했습니다. 이처럼 군사적, 외교적 능력을 인정받으며 기사단 내에서 중요한 인물로 성장했습니다.
2.3. 독일 기사단 총장 재임과 정책
1407년, 형인 콘라트 폰 융깅겐 총장이 갑작스럽게 사망하자, 울리히는 6월 26일 그의 후임으로 독일 기사단 총장에 선출되었습니다. 그는 형과는 달리 외교적 역량이 제한적이라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당시 사모기티아의 상황은 비타우타스 대공의 선동으로 여전히 긴장 상태였으며, 비타우타스는 양도된 영토를 되찾기 위해 혼란을 이용하려 했습니다. 또한 신임 총장은 비타우타스의 사촌인 폴란드 국왕 야기에우워와 도브진 땅 및 저당 잡힌 노이마르크 지역을 둘러싼 갈등을 물려받았습니다. 폴란드 대사 미코와이 쿠로프스키 대주교는 리투아니아에 대한 어떤 공격도 필연적으로 폴란드와의 무력 충돌을 야기할 것이라고 선언했습니다.
그러나 울리히는 양면 전쟁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선제공격을 준비했습니다. 그는 헝가리의 지기스문트 왕과 동맹을 맺고, 신성 로마 제국 내에서 용병을 모집했으며, 1409년 8월 6일 폴란드에 전쟁을 선포했습니다. 동맹국인 지기스문트 왕은 모라비아의 요프스트와의 로마인의 왕 선출 분쟁에 묶여 울리히에게 도움을 주지 못했지만, 기사단군은 처음에는 도브진과 쿠야비에서 성공적인 작전을 펼쳤고 비드고슈치를 포위했습니다. 지기스문트의 형인 보헤미아의 바츨라프 4세는 일시적인 휴전을 주선하고 교전 당사자들 사이에서 중재를 시도했으나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했습니다. 울리히의 대결 정책은 기사단국을 파멸로 이끄는 첫걸음이 되었습니다.
2.4. 그룬발트 전투와 최후
1410년 7월 2일, 울리히 폰 융깅겐 총장은 말보르크성을 떠나 연합된 폴란드-리투아니아 군대와의 최종 결전을 위해 진군했습니다. 양측 군대는 7월 15일 그룬발트 (그륀펠데)와 스테음바르크 (탄넨베르크) 마을 사이에서 맞붙었습니다. 정오가 가까워질 때까지 양측 군대 중 어느 쪽도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얀 드우고시의 연대기에 따르면, 이때 울리히는 두 자루의 검을 야기에우워 왕에게 보내면서 야기에우워와 비타우타스가 이 검으로 살거나 죽을 수 있다고 언급했습니다.

이 행위는 대담한 도발로 여겨졌고, 이로 인해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군의 공격이 시작되었습니다. 기사단은 처음에는 이 공격을 격퇴했으나, 야기에우워 군대의 두 번째 공격이 곧이어졌습니다. 승리를 확신했던 울리히는 직접 남아있는 연대를 이끌고 폴란드 군대에 맞서 싸우기로 결정하면서 전세는 역전되었습니다. 그는 거의 야기에우워 왕을 붙잡을 뻔했지만, 동시에 기사단의 군사 작전에 대한 전체적인 지휘권을 잃었습니다. 도마뱀 동맹의 니콜라우스 폰 레니스 휘하 프로이센 연합군이 이탈하자, 총장은 수적으로 우세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군에 맞서야 했습니다. 리투아니아군이 후방에서 공격해오자 울리히의 병력은 궤멸되었고, 그 자신도 전사했습니다. 폴란드 연대기 작가 얀 드우고시에 따르면 그는 폴란드 기사 스크신노의 므슈치유와 조우하여 패배했다고 합니다. 야기에우워 왕은 울리히의 시신을 말보르크성으로 이송하도록 주선한 후 말보르크성 공성전을 시작했습니다. 이 전투는 기사단의 몰락을 알리는 결정적인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3. 역사적 평가 및 유산
울리히 폰 융깅겐의 삶과 죽음, 특히 그룬발트 전투에서의 최후는 역사적으로 다양한 방식으로 기억되고 평가되어 왔습니다. 그의 공격적인 정책과 오만함이 초래한 결과는 후대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3.1. 다양한 시각에서의 평가와 해석
얀 드우고시의 묘사를 바탕으로, 후대의 사람들은 울리히 폰 융깅겐을 성급하고 오만한 인물로 평가했습니다. 특히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의 관점에서는 그가 무모한 전쟁을 일으켜 파멸을 자초한 인물로 그려집니다. 얀 마테이코가 1878년에 그린 명화 '그룬발트 전투'는 흰색 복장에 검은 십자가를 두른 울리히가 비타우타스 대공을 공격하려다, 사형 집행인의 도끼와 그니에즈노 회의를 연상시키는 성창 복제품을 든 두 명의 폴란드 보병에게 살해당하는 순간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 전통은 헨리크 시엔키에비치가 1900년에 쓴 소설 '독일 기사단'에서 이어지는데, 이 소설은 울리히를 충동적이고 공격적인 지휘관으로 묘사하며, 이는 당시 러시아 제국 점령하의 비스와 강 지역의 상황을 모델로 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소설은 1960년 알렉산데르 포드 감독에 의해 영화 '독일 기사단의 기사들'로 제작되기도 했습니다.
반면, 19세기 독일 역사학에서는 울리히를 적들의 교활함에 희생된 기사도적 덕목을 지닌 인물로 묘사하려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작가 에른스트 비허트는 그의 소설 '하인리히 폰 플라우엔'에서 이러한 시각을 반영했습니다. 현대에 이르러서는 그의 전술적 실책과 리더십 부족이 패배의 주요 원인으로 지적되며, 특히 그가 지나치게 공격적인 정책을 추진함으로써 기사단국 전체의 운명을 위태롭게 했다는 평가가 지배적입니다.
3.2. 기념물 및 추모
울리히 폰 융깅겐의 죽음과 관련된 추모 노력은 다양하게 이루어져 왔습니다. 그의 후임자였던 하인리히 폰 플라우엔은 1413년 옛 전장터에 성모 마리아 경당을 세웠으나, 이 경당은 1656년 이 지역에서 활동하던 리프카 타타르인 또는 크림 타타르인 부대에 의해 파괴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1901년, 동프로이센 주의 독일 당국은 "독일 정신과 독일 법을 위한 투쟁에서 영웅적인 죽음"을 기념하는 빙하 표석 (융깅겐슈타인)을 세웠습니다. 이 돌은 현재도 그 자리에 있지만 넘어져 비문이 더 이상 읽히지 않습니다. 최근에는 근처에 울리히 폰 융깅겐의 죽음을 기념하는 두 번째 기념석 ("대총장 울리히 폰 융깅겐의 사망 장소")이 세워졌습니다. 오늘날 이 지역에서는 매년 그룬발트 전투를 재현하는 역사 재현 행사가 열리며, 이를 통해 울리히 폰 융깅겐과 그룬발트 전투의 역사적 의미가 되새겨지고 있습니다.
4. 함께 보기
- 독일 기사단
- 그룬발트 전투
-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
- 콘라트 폰 융깅겐
- 하인리히 폰 플라우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