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생애
팔켄베르크의 생애는 그의 도미니코회 입문, 교육 과정, 그리고 신학자로서의 학문적 활동을 통해 형성되었다.
1.1. 어린 시절과 교육
팔켄베르크의 어린 시절과 성장 배경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은 부족하다. 다만 그가 도미니코회에 입문하여 카민 수도원에서 수련기를 보냈다는 사실만이 전해진다. 그는 도미니코회에 입문하여 수도자로서의 교육을 받았다. 신성 신학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는 사실은 그가 수년간 수도회 내에서 철학과 신학을 가르쳤음을 시사한다.
1.2. 신학자로서의 활동
신학 석사 학위를 취득한 후, 요한 폰 팔켄베르크는 소속 수도원 및 대학에서 신학을 강의하며 학문적 활동을 이어갔다. 그의 학문적 배경은 주로 도미니코회의 신학적 전통에 기반을 두었으며, 이는 훗날 그의 저술과 사상에 큰 영향을 미쳤다.
2. 주요 활동 및 저술
팔켄베르크는 서방교회 대분열과 독일기사단 분쟁에 깊이 관여하며, 이를 통해 자신의 극단적인 신학적 및 정치적 사상을 저술로 남겼다.
2.1. 서방교회 대분열에서의 역할
서방교회 대분열 시기에 요한 폰 팔켄베르크는 그의 형제단과 총장인 베르나르 데 다티스(Bernard de Datis)가 알렉산데르 5세와 요한 23세의 확고한 지지자였음에도 불구하고, 교황 그레고리오 12세를 열렬히 지지했다. 그는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베르나르 데 다티스를 자신의 상급자로 인정하는 것을 공개적으로 거부할 정도로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다.
2.2. 독일기사단과 폴란드-리투아니아 간 분쟁
요한 폰 팔켄베르크는 독일기사단과 폴란드 왕국의 브와디스와프 2세 야기에우워 국왕 및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비타우타스 대공 간의 분쟁에서 독일기사단을 강력히 지지했다. 당시 독일기사단은 이교도였던 리투아니아 대공국에 대해 100년간의 십자군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이 분쟁은 양측의 요청에 따라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중재가 시도되었다.
2.3. 주요 저술과 사상
팔켄베르크는 《Liber de doctrina》와 《Satira》를 비롯한 여러 저술을 통해 자신의 논쟁적인 사상을 표명했으며, 이는 당대의 종교적, 정치적 갈등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다.
2.3.1. 《Liber de doctrina》
1416년에 출판된 《Liber de doctrina》는 폴란드의 학자 파울루스 블라디미리를 반박하기 위해 쓰였다. 이 저서에서 팔켄베르크는 폴란드 국왕과 그의 지지자들이 우상 숭배자이자 불신자라고 주장하며, 그들에 대한 반대는 고귀하고 칭찬할 만한 일이라고 역설했다. 그는 프란치스코회 신학자 장 프티가 옹호했던 참주 살해를 정당화하며, 폴란드 국왕과 그의 협력자들을 살해하는 것이 합법적이라고 결론지었다.
더 나아가 팔켄베르크는 《Liber de doctrina》에서 "황제는 평화로운 이교도라 할지라도 단지 그들이 이교도라는 이유만으로 살해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했다. 또한 "폴란드인들은 이교도를 옹호했으므로 죽음을 마땅히 받아야 하며, 이교도보다 더 철저히 말살되어야 한다. 그들은 주권을 박탈당하고 노예로 전락해야 한다"고 선언했다. 스태니슬라우스 F. 벨치(Stanislaus F. Belch)는 그의 저서 『파울루스 블라디미리와 그의 국제법 및 정치학 교리』에서 팔켄베르크가 집단살해를 정당화한 최초의 작가라고 평가했다.
2.3.2. 《Satira》 및 기타 저술
팔켄베르크는 1412년에 《Satira》를 발표하여 폴란드인들과 브와디스와프 2세 야기에우워 국왕을 다시 공격했다. 당시 야기에우워 국왕은 이미 기독교인이었으며 리투아니아 또한 기독교화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팔켄베르크는 야기에우워 국왕을 "미친 개"라고 부르며 왕이 될 자격이 없다고 맹비난했다.
1416년에 출판된 후기 저작인 《Tres tractatuli》에서는 장 제르송, 피에르 다일리, 그리고 파리 대학교의 다른 학자들이 장 프티의 저작들을 비난한 것에 대해 반박을 시도했다. 이 저서에서 그는 주교들이 자신의 책이나 그 일부를 이단으로 선언할 권리가 없다고 주장하며, 신앙 문제에 있어서는 교황과 공의회만이 오류가 없다고 역설했다.
3. 비판 및 논란
요한 폰 팔켄베르크의 사상과 저술은 당대에도 큰 비판과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그의 극단적인 주장은 종교적, 정치적 지도자들의 주목을 받았다.
3.1. 콘스탄츠 공의회와 도미니코회의 판결
그니에즈노 대주교 미코와이 트롬바의 명령으로 요한 폰 팔켄베르크는 투옥되었다. 폴란드인들은 팔켄베르크를 이단으로 단죄할 것을 요구했으나, 결국 콘스탄츠 공의회는 그의 저작들을 "스캔들적이고 비방적"이라고 비난하면서도 이단으로 규정하지는 않았다.
1417년 5월부터 6월까지 스트라스부르에서 열린 도미니코회 총회 또한 유사한 판결을 내렸는데, 그의 저술을 비난하는 동시에 팔켄베르크 본인에게는 종신형을 선고했다. 이후 팔켄베르크는 로마로 돌아와 교황 마르티노 5세와 동행했으며, 마르티노 5세에 의해 몇 년간 엄중히 감금되었다. 그가 결국 자유를 되찾았는지 아니면 그곳에서 사망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3.2. 민족 말살 옹호에 대한 평가
요한 폰 팔켄베르크가 주장한 민족 말살 옹호 사상은 당시에도 파격적이었으며, 현대적 관점에서 볼 때 심각한 논란의 여지가 있다. 그는 특정 민족 전체를 이교도라는 이유만으로 말살하고 노예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이는 인간 존엄성을 전면적으로 부정하고 국제법의 기초를 훼손하는 반인륜적 사상으로 평가된다. 비록 콘스탄츠 공의회가 그의 저술을 이단으로 단죄하지는 않았지만, "스캔들적이고 비방적"이라는 판결은 그의 사상이 당시 종교계에서도 용인될 수 없는 극단적인 것이었음을 보여준다. 역사가들은 그의 주장을 민족적 편견과 증오를 노골적으로 드러낸 사례이자, 집단살해 사상의 초기 형태로 지적하며 강력히 비판한다.
4. 사망
요한 폰 팔켄베르크는 1418년경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의 사망 장소는 이탈리아 또는 그의 고향인 팔켄베르크로 알려져 있으나, 정확한 장소와 사망 당시의 상황은 불확실하다. 그는 교황 마르티노 5세에 의해 감금된 상태로 생을 마감했을 가능성이 있다.
5. 영향 및 평가
요한 폰 팔켄베르크는 중세 후기 유럽의 격동기에 활동한 신학자로서, 그의 사상과 행동은 당시의 종교적, 정치적 갈등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통찰을 제공한다.
5.1. 역사적 평가
요한 폰 팔켄베르크의 역사적 평가는 매우 복합적이다. 그는 서방교회 대분열이라는 중대한 종교적 사건에 깊이 관여하며 특정 교황을 지지한 신학자였다. 동시에 독일기사단과 폴란드-리투아니아 간의 분쟁에 개입하여 독일기사단의 침략 행위를 정당화하는 논리를 제공했다. 특히 그의 저술인 《Liber de doctrina》에서 특정 민족의 절멸과 노예화를 주장하며 집단살해의 정당화를 시도한 점은 그의 사상이 가진 가장 논란이 많고 비판적인 측면이다.
비록 그의 저술이 이단으로 단죄되지는 않았지만, "스캔들적이고 비방적"이라는 공의회의 판결과 도미니코회의 종신형 선고는 그의 주장이 당시 기준에서도 극단적이고 위험한 것으로 여겨졌음을 보여준다. 팔켄베르크는 역사적으로 인류의 보편적 가치와 인권을 침해하는 극단적인 사상을 주창한 인물로 평가되며, 그의 주장은 후대에 발생한 수많은 민족 갈등과 잔혹 행위를 돌아보는 데 있어 경고의 메시지로 기능한다. 그는 중세 말기의 격동적인 사상적 흐름 속에서 나타난 극단적인 민족주의와 종교적 배타주의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중요한 인물로 기억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