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역사적 파우스트

파우스트는 사망 직후부터 전설과 문학적 인물로 다루어졌기 때문에, 그의 삶에 대한 역사적 사실을 확실하게 확립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17세기에는 심지어 역사적 파우스트의 존재 자체가 의심받았고, 전설적인 인물은 마인츠의 인쇄업자 요한 푸스트와 동일시되기도 했다. 그러나 요한 게오르크 노이만은 1683년 저서 《마술사 파우스트에 대한 역사적 탐구》에서 동시대의 기록들을 바탕으로 파우스트의 역사적 존재를 확립했다.
30년 이상에 걸친 활동 기록, 1466년과 1480/1년으로 기록된 두 가지 출생 연도, 게오르크와 요한으로 기록된 두 가지 이름, 그리고 크니틀링겐과 하이델베르크/헬름슈테트(Helmstedt)로 기록된 두 가지 출신지 때문에, 스스로를 '파우스트'라고 칭한 두 명의 방랑 마술사가 있었을 가능성이 제기되기도 한다. 한 명은 게오르크로 약 1505년부터 1515년까지 활동했으며, 다른 한 명은 요한으로 1530년대에 활동했다는 설이다.
1.1. 출생 및 배경
역사적 요한 파우스트의 가능한 출신지로는 크니틀링겐, 하이델베르크 근처의 헬름슈타트, 또는 슈타트로다가 있다. 오늘날 크니틀링겐에는 파우스트를 기념하는 기록 보관소와 박물관이 있다. 헬름슈타트를 그의 출생지로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파우스트의 출생 연도는 1480/1년 또는 1466년으로 제시되는데, 후자를 선호하는 학자들도 있다. 잉골슈타트 시청에는 1528년 6월 27일자 편지에 '하이델베르크 출신 요르크 파우스트 박사'가 언급되어 있다. 다른 자료에는 '게오르기우스 파우스트스 헬름슈테텐시스'로 기록되어 있다. 하이델베르크 대학교 기록 보관소에서 헬름슈테트 출신 학생들을 조사한 결과, 1483년부터 1487년까지 등록된 '게오르기우스 헬름슈테터'의 기록이 발견되었는데, 그는 1484년 7월 12일에 학사 학위를, 1487년 3월 1일에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1.2. 활동 및 직업
1506년, 파우스트는 겔른하우젠에서 마술 묘기와 점성술적 예언을 선보인 기록이 있다. 이후 30년 동안 남부 독일에 걸쳐 비슷한 기록들이 다수 남아 있다. 파우스트는 의사, 철학 박사, 연금술사, 마술사, 점성술사로 활동했으며, 종종 사기꾼으로 고발당하기도 했다. 교회는 그를 악마와 결탁한 신성모독자로 비난했다. 파우스트는 또한 개신교로 전향했다고 알려지기도 했다.
파우스트는 전국을 떠돌며 활동했다. 1520년 2월 23일, 그는 밤베르크에서 주교와 마을을 위한 점성술적 예언을 해주었고, 그 대가로 10 굴덴을 받았다. 1528년에는 잉골슈타트를 방문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추방당했다. 1532년에는 뉘른베르크에 입성하려 했던 것으로 보이며, 당시 시장의 기록에는 "위대한 흑마술사이자 남색가 파우스트 박사의 자유로운 통행을 거부한다"는 부정적인 내용이 남아 있다.
1.3. 동시대 기록 및 평가
동시대 인물들의 기록은 파우스트에 대한 다양한 평가를 보여준다. 1507년 8월 20일자 편지에서 요하네스 트리테미우스는 요하네스 비르둥에게 '게오르기우스 자벨리쿠스'라는 특정 인물에 대해 경고하며, 그를 '게오르기우스 자벨리쿠스, 파우스트 유니오르, 강령술의 원천, 점성술사, 제2의 마술사 등'이라고 칭하는 사기꾼이자 협잡꾼이라고 불렀다. 트리테미우스에 따르면, 자벨리쿠스는 겔른하우젠과 뷔르츠부르크에서 자신의 힘을 신성모독적으로 자랑하며, 심지어 그리스도의 모든 기적을 쉽게 재현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트리테미우스는 자벨리쿠스가 1507년 지킹겐에서 교사직을 얻었으나, 이를 악용하여 남학생들과 동성애를 저질렀고, 처벌을 피하기 위해 적시에 도주했다고 주장했다.
콘라트 무티아누스 루푸스는 1513년에 에르푸르트의 한 여관에서 '게오르기우스 파우스트스, 헬미테우스 하이델베르겐시스'(아마도 '하이델베르크의 반신'을 의미하는 '헤미테우스'의 오기일 것)라는 손금술사와의 만남을 회상하며, 그의 허영심 많고 어리석은 자랑을 엿들었다고 기록했다.
이후의 기록들은 좀 더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기도 한다. 튀빙겐의 교수 요아힘 카메러리우스는 1536년에 파우스트를 존경할 만한 점성술사로 인정했으며, 보름스의 의사 필리프 베가르디는 1539년에 그의 의학 지식을 칭찬했다. 파우스트에 대한 마지막 직접적인 기록은 1535년 6월 25일로, 뮌스터 반란 당시 뮌스터에서 그의 존재가 기록되었다.
1.4. 사망
파우스트의 사망 시점은 1540년 또는 1541년으로 추정된다. 그는 슈타우펜임브라이스가우의 "호텔 춤 뢰벤(Hotel zum Löwen)"에서 연금술 실험 중 폭발로 사망했다고 전해진다. 그의 시신은 "심하게 훼손된" 상태로 발견되었다고 보고되었는데, 이는 그의 성직자 및 학자 적대자들에 의해 악마가 직접 그를 데려갔다는 식으로 해석되었다.
1548년, 신학자 요한 가스트는 그의 저서에서 파우스트가 끔찍한 죽음을 맞았으며, 시신을 여러 번 뒤집어도 얼굴이 계속 땅을 향했다고 기록했다. 가스트는 1548년 자신의 기록에서 바젤에서 파우스트와 개인적으로 만났던 일화를 언급하는데, 당시 파우스트는 요리사에게 특이한 종류의 가금류를 제공했다고 한다. 가스트에 따르면 파우스트는 개와 말을 데리고 다녔으며, 그 개가 때때로 하인으로 변신한다는 소문이 있었다.
또 다른 사후 기록은 1562년 요하네스 만리우스가 멜란히톤의 기록을 바탕으로 작성한 《공통 주제집》에 담겨 있다. 만리우스에 따르면, '요하네스 파우스트스'는 멜란히톤의 개인적인 지인이었으며 크라쿠프에서 공부했다고 한다. 만리우스의 기록은 이미 전설적인 요소가 스며들어 있어 역사적 자료로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만리우스는 파우스트가 독일 황제의 이탈리아 승리가 자신의 마법적 개입 덕분이라고 자랑했다고 전한다. 베네치아에서는 날아오르려 했으나 악마에 의해 땅에 내던져졌다고 한다. 요하네스 비어는 《악마의 속임수》(1568년)에서 파우스트가 바텐부르크에서 체포된 일화를 전하는데, 그가 지역 성직자 도로스테니우스에게 수염을 없애기 위해 비소를 사용하라고 권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도로스테니우스는 독을 얼굴에 발랐고, 그 결과 수염뿐만 아니라 피부의 많은 부분을 잃었다는 일화로, 비어는 이 이야기를 피해자 본인에게서 들었다고 한다. 1602년에도 필리프 카메러리우스는 파우스트를 직접 만난 사람들에게서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고 주장했지만, 1587년 《파우스트북》이 출판된 이후로는 역사적 일화와 소문, 전설을 구분하기가 불가능해졌다.
바트크로이츠나흐 시에는 1492년에 지어진 것으로 알려진 "마이스터 요한 게오르크 자벨리쿠스 파우스트의 집" 부지에 "파우스트 하우스"라는 레스토랑이 있다.
2. 파우스트에게 귀속된 저작물

파우스트에게 귀속된 여러 인쇄본 그리무아르 또는 마법 서적들이 존재한다. 이 중 일부는 그의 생전인 "1540년", 또는 "1501년", "1510년" 등으로 인위적으로 날짜가 기재되어 있으며, 심지어 "1405년", "1469년"과 같이 비합리적으로 이른 날짜가 기재된 경우도 있다. 그러나 이 인쇄본들은 실제로는 16세기 후반, 즉 약 1580년경부터 시작된 민중본 전통의 발전 시기와 동일한 시기에 제작되었다. 《헬렌츠방》 텍스트는 16세기 후반의 필사본으로도 현존한다. 약 1700년경의 필사본 중에는 '요한 파우스트 박사의 검은 무어인이라 불리는 실천적 헬렌츠방. 1407년'이라는 제목의 텍스트가 포함되어 있는데, 이는 인쇄본으로 '파우스트 박사의 소위 검은 무어인 별, 런던 1510년 인쇄'로 알려진 텍스트이다. 파우스트에게 귀속된 《헬렌츠방》의 변형본은 이후 200년 동안, 18세기까지 계속 출판되었다.
파우스트에게 귀속된 주요 저작물 목록은 다음과 같다.
- 1501년: 《파우스트 박사의 삼중 헬렌츠방》(로마, 1501년)
- 1501년: 《영혼 지휘》(로마, 1501년)
- 1501년: 《파우스트 박사의 사중 헬렌츠방》(로마, 1501년)
- 1505년: 《요한 파우스트 박사의 검은 카발라》(파사우, 1505년)
- 1510년: 《요한 파우스트 박사의 검은 계단》(런던, 1510년)
- 1520년: 《파우스트의 삼중 헬렌츠방》(쿤들링겐의 위대한 마술사 D. 파우스트, 즉 이집트 흑마술)
- 1524년: 《요한 파우스트의 수동 헬렌츠방》(비텐베르크, 1524년)
- 1527년: 《프락시스 마기아 파우스티아나》(파사우, 1527년)
- 1540년: 《파우스트의 헬렌츠방 또는 기적 예술 및 경이의 책》(비텐베르크, 1540년)
- 《파우스트 박사의 위대하고 강력한 헬렌츠방》(프라하)
- 1669년?: 《요한 파우스트 박사의 기적 예술 및 경이의 책 또는 검은 까마귀라고도 불리는 삼중 헬렌츠방》(리옹, 1469년)
- 《D. I. 파우스트의 검은 까마귀》(날짜 미상, 16세기)
- 1692년: 《파우스트 박사의 위대하고 강력한 바다의 영혼, 루시퍼와 세 바다의 영혼을 소환하여 물속에서 보물을 얻는 법》(암스테르담, 1692년)
이러한 작품들은 J. 샤이블레가 1849년에 《수도원》에서 수집 및 편집했으며, 1976년과 1977년에는 '종교 및 세계관 연구회'에서 "문차일드 에디션"으로, 그리고 다시 포세이돈 프레스와 푸리에 출판사에서 영인본으로 출판되었다.
3. 전설과 문학 속의 파우스트
파우스트는 그의 죽음 직후부터 마술에 능통했다는 전설이 생겨났으며, 특히 악마와 계약을 맺은 인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3.1. 민중본과 전설의 형성

1587년 요한 슈피스가 인쇄한 《요한 파우스트 박사의 이야기》는 파우스트의 죄에 대한 독일 민중본으로, 파우스트 캐릭터의 문학적 전통의 시작을 알렸다. 이 책은 1587년에 영어로 번역되어 크리스토퍼 마르로의 주목을 받았다. 마르로의 《파우스트 박사의 비극적인 생애와 죽음의 역사》(1589년)는 파우스트를 르네상스 마법의 전형적인 숙련자로 묘사한다. 17세기에는 마르로의 작품이 인기 있는 연극 형태로 독일에 재도입되었고, 시간이 지나면서 파우스트는 대중의 오락을 위한 단순히 코믹한 인물로 전락했다.
한편, 슈피스의 민중본은 G. R. 비트만과 니콜라우스 피처에 의해 편집되고 발췌되었으며, 18세기 초에 익명으로 현대화된 형태로 《기독교적 사고를 가진 자의 파우스트북》으로 재출판되었다. 이 판은 널리 알려졌고 괴테도 젊은 시절에 읽었다. 리하르트 슈테허가 요약한 바에 따르면, 이 버전은 농부의 아들 '요한 파우스트'라는 젊은이가 비텐베르크에서 신학 외에 의학, 점성술, "다른 마법 예술"을 공부하는 이야기이다. 그의 끝없는 지식 욕구는 그를 비텐베르크 근처 숲에서 악마를 소환하게 만들었고, 악마는 스스로를 메피스토펠레스라고 부르는 회색 수도사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파우스트는 24년간의 봉사를 대가로 자신의 영혼을 바치는 악마와의 계약을 맺는다. 악마는 파우스트의 모험에 동행할 famulus '크리스토프 바그너'와 푸들 '프레스티기아르'를 만들어낸다. 파우스트는 쾌락적인 삶을 살아간다. 라이프치히의 아우어바흐스 켈러에서는 술통을 타고 나오고, 에르푸르트에서는 테이블에서 와인을 뽑아낸다. 그는 로마의 교황, 이스탄불의 오스만 술탄, 인스브루크의 카이저를 방문한다. 16년 후, 그는 계약을 후회하고 철회하고 싶어 하지만, 악마는 그를 설득하여 계약을 갱신하게 하고, 트로이의 헬레네를 소환한다. 파우스트는 헬레네와 함께 유스투스라는 아들을 낳는다. 24년이 끝나갈 무렵, "악마의 우두머리인 사탄"이 나타나 다음 날 밤 파우스트의 죽음을 알린다. 파우스트는 림리히에서 열린 "최후의 만찬" 장면에서 친구들과 작별하고 그들에게 회개와 경건함을 당부한다. 자정 무렵 파우스트의 방에서 큰 소음이 나고, 아침에는 방 벽과 바닥에 피와 뇌가 튀어 있었으며, 파우스트의 눈은 바닥에, 시신은 안뜰에 버려져 있었다. 베트남어 자료에서는 파우스트가 지식을 위해 영혼을 팔았고, 결국 메피스토에게 몸이 찢겨 피와 뇌가 흩뿌려졌다고 묘사한다.
3.2. 주요 문학 및 예술 작품
파우스트 전설은 16세기부터 18세기에 걸쳐 다양한 문학 및 예술 작품으로 재탄생했다.
- 크리스토퍼 마르로: 《파우스트 박사의 비극적인 생애와 죽음의 역사》(1588년~1592년, 희곡)는 파우스트를 르네상스 마법의 전형적인 숙련자로 묘사한다.
- 요한 볼프강 폰 괴테: 《파우스트》(1808년 제1부, 1833년 제2부)는 파우스트 전설을 가장 유명하게 재해석한 작품이다. 괴테는 젊은 시절인 1808년에 제1부를 완성했는데, 이는 당시 독일의 "궁핍함"에 대한 반항적인 정서를 담고 있었다. 82세의 나이로 사망하기 1년 전인 1831년에 완성된 제2부는 파우스트가 더 이상 세속적인 쾌락을 추구하지 않고, 삶에 유익한 행동을 통해 인류의 창조적 힘과 정복의 무한한 열망을 상징하는 인물로 변화한다. 파우스트는 메피스토에게 영혼을 팔아 천국과 지옥을 오가고, 회춘하며, 간척 사업을 벌이는 등 다양한 시련과 유혹을 겪지만, 결국 "시작은 행동이다"라는 진리를 깨닫고 "매일 정복하는 자만이 자유와 삶을 누릴 자격이 있다"고 선언한다. 괴테는 파우스트를 통해 인간의 선과 악, 유혹과 의지 사이의 투쟁을 보여주며, 인간 내면의 천사와 악마의 공존을 형상화했다.
이 외에도 파우스트 전설을 바탕으로 한 수많은 작품들이 있다.
- 희곡: 《바그너북》(1593년), 《비트만의 파우스트북》(1599년), 《파우스트 박사의 위대하고 강력한 헬렌츠방》(1609년), 《요한 파우스트 박사, 자연 마법 및 비자연 마법》(1612년), 《피처의 파우스트북》(1674년), 《파우스트 박사의 위대하고 강력한 바다의 영혼》(1692년), 《바그너북》(1714년), 《기독교적 사고를 가진 자의 파우스트북》(1725년), 《체노독수스》(1602년), 《그레트헨》(1879년), 《댐 양키스》(1955년), 《록 헌터를 망칠 성공이 있을까?》(1955년), 《윌리 맥크리먼의 검은 본스필》(1965년), 《유혹》(1986년).
- 오페라: 루이 슈포어의 《파우스트》(1816년), 엑토르 베를리오즈의 《파우스트의 파멸》(1846년), 샤를 구노의 《파우스트》(1859년), 아리고 보이토의 《메피스토펠레》(1868년), 에르베의 《작은 파우스트》(1869년), 프레데릭 루츠의 《파우스트와 마르그리트》(1855년) 및 《최신 파우스트》(1888년), 페루초 부소니의 《파우스트 박사》(1916년~1925년), 《파우스트 박사가 불을 밝히다》(1938년), 이고르 스트라빈스키의 《난봉꾼의 행각》(1951년), 《루벤, 루벤》(1955년), 《요한 파우스트 박사의 이야기》(1994년), 《파우스트, 마지막 밤》(2006년).
- 발레: 《파우스트》(1848년)를 비롯한 여러 파우스트 발레 작품들.
- 클래식 음악: 프란츠 슈베르트의 《물레잣는 그레트헨》(1814년), 리하르트 바그너의 《파우스트 서곡》(1840년), 샤를 발렌틴 알캉의 《네 시대의 대 소나타》 중 2악장 "준 파우스트"(1847년), 로베르트 슈만의 《괴테의 파우스트 장면들》(1853년), 구스타프 말러의 《교향곡 8번》 2부(1906년~1907년), 프란츠 리스트의 《파우스트 교향곡》(1854년~1857년) 및 《메피스토 왈츠》, 하버갈 브라이언의 《고딕 교향곡》, 리스트의 《무조 바가텔》.
- 소설 및 산문: 《곰 가죽》, 《다니엘과 악마》, 《방랑자 멜모스》(1820년), 《악마와 톰 워커》(1824년), 《성 요한의 전야》(1830년), 《오리올》(1844년), 《샤스-갈레리》(1892년), 《사탄의 슬픔》(1896년), 《파타피지션 파우스트롤 박사의 위업과 의견》(1898년), 《거장과 마르가리타》(1929년~1940년), 《메피스토》(1936년), 《악마와 다니엘 웹스터》(1937년), 《루시퍼 외에는 아무도 없다》(1939년), 토마스 만의 《파우스트 박사》(1947년), 《벨벳 속의 악마》(1951년), 《양키스가 페넌트를 잃은 해》(1954년), 《세 가지 속임수》(1956년), 《뒷골목의 악마》(1956년), 《지옥행 열차》(1958년), 《숨쉬기 위해 머무르다》(1966년), 《저주 게임》(1986년), 《에릭》(1990년), 《악마의 작품》(1991년), 《잭 파우스트》(1997년), 《강령술사 요하네스 카발》(2009년), 《마지막 파우스트》(2019년).
- 영화: 《메피스토펠레스의 실험실》(1897년), 《파우스트와 마르그리트》(1900년), 《파우스트의 파멸》(1903년), 《파우스트와 마르그리트》(1904년), 《프라하의 학생》(1913년), 《사타니카 랩소디》(1915년), 《프라하의 학생》(1926년), 《파우스트》(1926년), 《악마와 다니엘 웹스터》(1941년), 《별명 닉 빌》(1949년), 《파우스트의 전설》(1949년), 《미녀와 악마》(1950년), 《밤의 마르그리트》(1955년), 《댐 양키스》(1958년), 《파우스트》(1960년), 《눈부신》(1967년), 《파우스트 박사》(1967년), 《파우스트 박사의 이상한 사건》(1969년), 《메피스토》(1981년), 《파우스트 박사》(1982년), 《오, 하나님! 당신은 악마》(1984년), 《크로스로드》(1986년), 《파우스트》(1994년), 《눈부신》(2000년), 《파우스트: 저주받은 자들의 사랑》(2000년), 《파우스트 5.0》(2001년), 《나는 십대 파우스트였다》(2002년), 《행복으로 가는 지름길》(2007년), 《염소 이야기》(2008년), 《파우스트》(2011년), 《마지막 파우스트》(2019년).
- 만화: 《신의 인간》(1929년), 《파우스트》(1950년), 파우스트 박사(1968년), 《파우스트》(1987년), 《프라우 파우스트》(2014년).
- 미술: 《메피스토펠레스와 마르가레타》를 비롯한 여러 파우스트 관련 회화 작품들.
3.3. 파우스트 신화와 상징성
파우스트는 인간의 욕망, 지식 추구, 선악의 이중성 등 신화적 의미를 담고 있으며 현대 문화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베트남어 자료에 따르면, "아아, 내 안에는 두 영혼이 함께 있다. 한쪽은 맹렬한 열정으로 모든 감각을 통해 세상을 떠나려 하고, 다른 한쪽은 순수하고 조상들의 영역으로 날아오르기 위해 이 세상에 굳건히 머물려 한다."는 구절처럼, 파우스트는 인간 내면의 복잡한 갈등을 상징한다.
파우스트는 세계 문학사에서 창조적 힘과 탐구를 위해 자신의 영혼을 바치는 유일무이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그는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 프란츠 카프카의 그레고르 잠자처럼 인간의 인식을 넘어선 세계로 상상력과 창조력을 통해 발을 들여놓는다. 파우스트의 영혼은 선과 악, 삶과 죽음, 유혹과 의지 사이의 투쟁으로서 가치를 지닌다. 또한 파우스트는 문학에서 화신 모티프를 열어주었다.
민중본에서 파우스트는 비극적으로 죽음을 맞이하지만, 괴테는 파우스트의 마지막 말인 "시간이여 멈춰라!" 이후 천사들이 그의 영혼을 천국으로 데려가게 함으로써, 파우스트가 인간 내면의 천사와 악마 모두를 포괄하는 존재임을 강조한다. 파우스트는 단순한 역사적 인물을 넘어, 인간의 무한한 가능성과 끊임없는 노력을 상징하는 신화적 형상으로 자리매김했다.
4. 평가 및 영향
파우스트는 역사적 인물로서의 논란과 전설적 인물로서의 상징성을 동시에 지니며 후대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4.1. 긍정적 평가
파우스트는 지식 추구와 인간의 무한한 야망을 상징하는 인물로 평가받는다. 비록 그가 연금술사나 마술사로서 활동하며 주술적 행위에 연루되었지만, 그의 지식에 대한 갈망과 미지의 영역을 탐구하려는 의지는 르네상스 시대의 과학적 탐구 정신과도 연결될 수 있다. 특히 괴테의 《파우스트》는 이러한 인간의 긍정적인 측면, 즉 끊임없이 노력하고 성장하려는 의지를 부각시키며, 파우스트를 단순한 마법사가 아닌 인류의 진보를 상징하는 문화적 아이콘으로 승화시켰다. 그의 이야기는 수많은 문학, 음악, 미술 작품에 영감을 주어 예술적 가치를 창출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4.2. 비판 및 논란
역사적 파우스트는 동시대 기록에서 사기, 마법, 신성모독, 심지어 동성애 혐의로 비판받았다. 특히 마르틴 루터는 그를 악마의 힘을 빌린 자로 비난하기도 했다. 악마와의 계약이라는 전설은 그의 삶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을 강화했으며, 초기 민중본에서는 파우스트가 비참한 최후를 맞는 것으로 묘사되어 그의 행동이 가져올 파멸을 경고하는 역할을 했다. 이러한 비판적 시각은 파우스트의 삶과 관련된 역사적 논쟁의 핵심을 이루며, 그가 단순한 지식 추구자가 아닌, 당시 사회의 도덕적, 종교적 규범을 위반한 논란의 인물이었음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