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초기 생애와 왕위 계승
요한 3세의 초기 생애와 왕위 계승 과정은 바사 가의 복잡한 가족 관계와 스웨덴의 불안정한 정치 상황 속에서 형성되었다. 그는 핀란드 공작으로서의 활동을 통해 독립적인 세력을 구축하려 했으며, 이는 이복형 에리크 14세와의 심각한 갈등과 투옥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에리크 14세의 정신 이상은 요한 3세의 석방과 그를 왕위에 올리는 계기가 되었다.
1.1. 탄생과 초기 생애
요한 3세는 1537년 12월 20일 스테게보리 성에서 스웨덴 국왕 구스타브 1세 바사와 그의 두 번째 왕비 마르가레타 레이온후부드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칼 9세와 마그누스 바사의 형이자 에리크 14세의 이복동생이다.
1556년 6월 27일, 요한은 세습 핀란드 공작으로 임명되었으며, 이후 1581년에는 핀란드 대공 칭호를 취득했다. 그는 핀란드 공작으로서 리보니아 문제에 관여하여 구스타브 1세의 불쾌감을 사기도 했다. 구스타브 1세는 러시아의 위협으로부터 발트해 동부의 스웨덴 영토를 확보하기 위해 요한을 핀란드에 배치했다. 요한은 한때 에리크와 협력하여 그의 대리인으로 런던을 방문하기도 했다. 이 임무는 실패했지만, 그는 영국에서 프로테스탄트의 재도입과 1559년에 출판된 공동 기도서를 목격하며 전례와 신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 시기 그는 시녀 카린 한스도테르와 관계를 시작했으며, 1556년부터 1561년까지 동거하며 네 명의 사생아를 두었다.
1.2. 에리크 14세와의 갈등 및 투옥
요한의 이복형 에리크 14세가 국왕이 되자마자, 형제들은 왕권에 대한 권한 문제로 갈등을 겪기 시작했다. 핀란드 공작으로서 요한은 에리크의 탈린과 다른 동발트해 항구 확보 노력에 반대했다. 그는 자신의 권한을 제한하는 1561년의 아르보가 조약에 마지못해 서명했다.
갈등은 요한이 에리크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562년 10월 4일 빌뉴스에서 폴란드 국왕 지그문트 2세 아우구스투스의 여동생인 카타리나 야기에우옹카와 결혼하면서 노골적으로 드러났다. 에리크는 당시 폴란드와 전쟁 중이었는데, 결혼 직후 요한과 처남인 폴란드 국왕은 요한이 폴란드 국왕으로부터 12.00 만 USD를 선지급하는 대가로 리보니아에 있는 7개 영구 성을 담보로 받는다는 내용의 협정을 체결했다. 에리크는 이 협정이 아르보가 조약에 직접적으로 위배된다고 보았고, 이 사실을 알게 되자마자 요한에게 리보니아 성들을 포기할 것을 요구했다. 요한이 이를 거부하고 스웨덴에 충성할지 폴란드에 충성할지에 대한 국왕의 질문에도 회피적인 답변을 하자, 1563년 4월 그는 반역죄로 스웨덴에 소환되었다.
요한이 소환에 불응하자, 1563년 6월 스톡홀름에 소집된 의회는 그를 반역죄로 유죄를 선고하고 생명, 재산, 왕위 계승권을 박탈했다. 판결을 집행하기 위해 상당한 규모의 군대가 파견되었다. 요한은 전투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고, 투르쿠 성에서 1,200명의 병력으로 몇 주간 방어한 후 1563년 8월 12일 공작의 감옥에 수감되는 조건으로 항복했다. 그는 아내와 함께 스웨덴으로 이송되어 그립스홀름 성에 수감되었다. 요한과 그의 아내가 배를 타고 그립스홀름으로 향할 때, 그들은 요한의 지지자 30명이 처형된 쇠데르포르트를 통과했다. 요한은 4년 이상 포로로 지냈다. 그러나 그의 투옥 생활은 에리크가 나중에 겪을 것에 비하면 비교적 가벼웠다. 부부는 많은 책을 받을 수 있었고, 독서에 열중했던 요한은 대부분의 시간을 아내와 함께 공부하고 대화하는 데 보냈다. 그들의 세 자녀는 감금 중에 태어났는데, 1564년에는 두 살에 사망한 엘리사베트(이사벨라), 1566년에는 지기스문트, 1568년 5월에는 안나가 태어났다.
1.3. 석방과 반란
에리크 14세의 정신 이상이 심화되던 1567년 가을, 요한은 1567년 10월 석방이 확정되었고, 이후 공작으로서의 권리 회복을 위한 협상이 시작되었다. 1568년 상반기 에리크의 행동은 요한에게 다시 자유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불러일으켰다. 이에 요한은 동생 칼과 일부 귀족들과 함께 에리크의 통치에 반대하는 공동 봉기를 모의했다. 1568년 7월 봉기가 시작되어 빠르게 확산되었고, 9월 중순에는 공작들의 군대가 이미 스톡홀름 외곽에 이르렀다. 9월 29일 스톡홀름 성문이 열리면서 군대가 입성했다. 요한의 외삼촌인 스텐 레이온후부드는 이 봉기의 중요한 동맹이었으나 치명상을 입고 사망 직전 라세보리 백작 작위를 받았다. 에리크 14세는 포로로 잡혔고, 직후 요한은 시 당국과 그곳에 모인 귀족, 전사들에 의해 국왕으로 추대되었다. 요한은 곧바로 자신의 투옥 생활에 대한 가혹한 처우의 주범이라고 여겼던 에리크의 가장 신뢰하던 조언자 요란 페르손을 처형했다.
요한은 또한 덴마크-노르웨이 및 뤼베크와의 평화 회담을 시작하여 북방 7년 전쟁을 종결시키려 했으나, 자신의 사절단이 과도한 덴마크 요구를 수락한 로스킬레 조약을 거부했다. 2년간의 추가 전투 끝에 1570년 슈테틴 조약으로 전쟁이 종결되었고, 스웨덴은 큰 양보를 하지 않았다. 이후 몇 년간 그는 리보니아 전쟁에서 러시아를 성공적으로 격파했고, 1583년 플루사 조약으로 전쟁이 종결되면서 스웨덴은 나르바를 재탈환했다. 그의 외교 정책 전반은 폴란드와의 연관성에 영향을 받았는데, 1587년 그의 아들 지기스문트 3세 바사가 폴란드 국왕이 되었다.
2. 통치
요한 3세의 통치 기간은 왕권의 공고화, 대외 정책의 변화, 그리고 종교적 갈등으로 점철된 시기였다. 그는 스웨덴을 발트해 강국으로 만들려는 야망을 품고 내외적으로 다양한 정책을 추진했다.
2.1. 왕권 공고화와 국내 정책
1569년 1월, 요한 3세는 에리크 14세를 퇴위시킨 같은 의회에 의해 국왕으로 인정받았다. 그러나 이러한 인정은 요한 3세의 양보 없이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의 동생 칼 공작은 아르보가 조약으로 부과된 권한 제한 없이 공작으로서의 지위를 인정받았다. 귀족들에게는 그들의 권리를 확대하고 의무를 제한하는 특권이 부여되었는데, 이는 스웨덴 귀족사에서 중요한 순간을 의미한다. 특히 고위 귀족들에게는 스웨덴 귀족 계급의 깊은 중요성을 지닌 다양한 계층 간의 구분을 공고히 하고 발전시키는 특별한 특권이 주어졌다.
요한 3세는 에리크 14세가 생존하는 한 자신의 왕위가 안전하지 않다고 느꼈다. 그의 재위 기간 동안 1569년 음모, 모르나이 음모, 1576년 음모 등 세 차례의 폐위 음모가 적발되었다. 포로로 잡힌 이복형의 석방 가능성에 대한 두려움은 끊임없이 요한 3세를 불안하게 만들었고, 1571년에는 경비병들에게 최소한의 구출 시도 위험이 있더라도 포로로 잡힌 국왕을 암살하라고 명령하기에 이르렀다. 에리크 14세의 생명은 아마도 그러한 명령의 결과로 1577년에 끝났을 것이다. 비록 그렇지 않더라도, 요한이 이복형의 가능한 살인을 주저하지 않았으며 그것이 그의 의지에 반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요한 3세는 선전 목적으로 자신을 아버지와 자주 비유하며, 특히 아버지가 "피에 굶주린 개" 크리스티안 2세로부터 스웨덴을 "해방시켰듯이", 자신은 "폭군" 에리크 14세로부터 백성을 구했다고 강조했다. 그는 아버지와 형제들과 유사한 특성을 가지고 있었는데, 폭력적이고 사나운 기질을 지녔으며 의심이 많았다. 그러나 그는 날카로움, 단호함, 신중함, 그리고 실용적인 시각이 부족했다.
요한 3세와 그의 왕비 카타리나 야기에우옹카는 아들 지기스문트가 가톨릭 교육을 받도록 했다. 이는 아마도 그가 폴란드 왕위를 획득하는 데 도움이 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이 목표는 1587년에 달성되었지만, 요한 3세는 스웨덴에 새로운 동군연합을 부여한 셈이었는데, 이는 그의 아버지가 해체했던 칼마르 동맹보다 더 부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스웨덴과 폴란드는 발트해에서 종종 직접적으로 상충되는 이해관계를 가졌기 때문이다. 그는 또한 곧 자신의 결정을 후회하고 지기스문트를 스웨덴으로 돌려보낼 것을 헛되이 요구했지만, 고위 귀족들은 이를 반대했다. 그들은 이것이 폴란드와의 전쟁으로 이어질 것이며, 스웨덴이 28년간의 전쟁 후에 감당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예상했기 때문이다.
요한은 정치적 재편으로 대응했다. 이전처럼 추밀원 귀족에 의존하는 대신, 이제는 이전 통치 기간 대부분 동안 격렬하게 대립했던 동생 칼 공작의 도움을 구했다. 그동안 많은 이유로 대립했지만, 가장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요한 3세가 국왕으로서 칼 공작의 공작령 내에서 왕권에 대해 자신이 공작 시절 강력히 반대했던 것과 동일한 원칙을 적용하려 했기 때문이다. 1587년, 그는 마침내 동생에게 자신이 1569년에 폐지했던 아르보가 조약과 매우 유사한 법령을 승인하도록 설득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1590년에 제안된 새로운 공작 권한 배치 계획을 보면, 그는 고위 귀족들과의 결렬 이후 이전에 완고하게 주장했던 주장을 포기했다.
그러나 요한의 동생 칼과의 새로운 우정조차도 곧 식었고, 요한은 생애 마지막 몇 달 동안 완전히 외로웠다. 1592년 봄, 그는 열병에 걸려 매우 불안해했다. 그는 도시보다 공기가 더 건강하다고 생각했던 스켑스홀멘에 지은 별궁으로 이사하면 나아질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상태는 나아지지 않았고, 한여름에는 더욱 악화되었다.
2.2. 대외 정책과 전쟁
요한 3세는 1570년 북방 7년 전쟁을 종결시키고 덴마크와 뤼베크와 평화 조약을 맺으면서 발트해 지역에 중점을 둔 외교 정책을 펼쳤다. 그는 러시아의 풍부한 무역을 통제하는 것을 목표로 1570년 러시아와 전쟁을 시작했다. 이 전쟁은 1595년까지 다양한 강도로 계속되었다. 1581년 나르바 함락은 그의 가장 큰 군사적 성공이었다. 그는 또한 폴란드와의 관계 강화를 위해 노력했으며, 이는 1587년 그의 아들 지기스문트가 폴란드 국왕으로 선출되는 것으로 이어졌다.
2.3. 교회 정책과 전례 논쟁
요한 3세와 교회 간의 관계는 초기에는 좋았지만, 라우렌티우스 페트리 대주교가 반란을 승인하기까지 오랜 시간을 주저했다. 국내 정치에서 요한 3세는 그의 폴란드 왕비의 영향으로 명확한 가톨릭적 성향을 보였는데, 이는 스웨덴 성직자와 귀족들에게 마찰을 일으켰다. 그러나 대주교는 곧 자신의 새로운 교회법을 비준받았는데, 이는 이미 구스타브 국왕 통치 시절에 초안을 작성했지만 그의 승인을 받지 못했던 것이다. 이 교회법은 옛 전통과의 연속성을 강조했다. 또한 중세 시대의 교회 조직을 본질적으로 동일한 교구들과 함께 복원했다. 1575년, 그는 스웨덴에 남아있던 가톨릭 수도회들이 다시 수련 수사를 받을 수 있도록 허락했다.
이 모든 것은 요한이 강하게 영향을 받은 중재 신학의 표현으로 볼 수 있는데, 이는 당시 유럽을 분열시키던 다양한 경쟁 신앙 간의 모순을 줄이는 것을 목표로 했다. 요한 자신은 중재 신학자 게오르크 카산더의 학식 있는 추종자였다. 그는 교부 시대 기독교의 첫 5세기 합의(consensus quinquesaecularis)를 바탕으로 로마와 비텐베르크 간의 화해를 모색했다.
요한이 이 메시지에 귀를 기울인 것은 결코 혼자가 아니었다. 폴란드 국왕 지그문트 2세 아우구스투스와 제국 내에 여러 신앙을 가진 페르디난트 1세 (신성 로마 황제)와 막시밀리안 2세 (신성 로마 황제) 황제들 또한 이에 민감했다. 요한은 1571년 라우렌티우스 페트리 대주교의 루터교 스웨덴 교회법 출판을 승인했지만, 1575년에는 교회가 교부학으로의 회귀를 보여주는 Nova ordinantia ecclesiastica라는 교회법 부록을 승인하도록 했다.
2.3.1. 붉은 책

이는 요한이 스웨덴-라틴어 붉은 책을 공포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책은 Liturgia suecanae ecclesiae catholicae & orthodoxae conformis라는 제목으로 여러 가톨릭 관습을 재도입했으며, 20년간 지속된 전례 논쟁과 교황과의 협상 시도를 야기했으나 완전히 실패했다. 부분적으로는 이 문제에서 요한의 측근이었던 페트루스 미카엘리스 페히트가 로마의 성좌로 가는 도중 익사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또한 나폴리에 동결된 아내 가족의 자산을 회수하기 위해 교황청의 도움을 구했다. 더 나아가 그는 예수회가 스톡홀름의 왕립 신학 대학에 비밀리에 인력을 배치하는 것을 허용했다.
때때로 요한은 칼뱅주의 성향을 가졌고 자신의 공작령에서 국왕 요한의 전례를 추진하지 않은 동생 쇠데르만란드 공작 칼(훗날 칼 9세)과 신학적으로 대립하기도 했다. 이는 예를 들어 외레브로 조항에서 칼 공작령의 사제들이 새로운 예배 방식에서 거리를 두는 것으로 표현되었다. 그러나 요한은 또한 잉겔베르투스 올라이 헬신구스와 에라스무스 니콜라이 아르보겐시스를 비롯한 자신의 교회 정책 지지자들도 있었다.
2.4. 예술 및 건축 후원
요한 3세는 예술, 특히 건축에 매우 깊은 관심을 가졌다. 그는 의심할 여지 없이 스웨덴 역사상 가장 건축에 열정적인 군주였다. 그는 형 에리크와 마찬가지로 매우 예술적이고 미학적인 재능이 뛰어났다. 그러나 그의 아름다움에 대한 감각은 건축 분야에서 가장 명확하게 표현되었다. 그는 건물에 대한 정교한 계획을 세우는 데 많은 시간을 보냈지만, 그의 생애 동안 실현된 것은 그 중 일부에 불과했다.
"건축은 우리의 가장 큰 열망이다"라고 요한 자신이 건축가와 건축업자에게 명령하는 수많은 편지 중 하나에 썼다.
2.4.1. 해외 전문가 초빙
요한은 독일과 네덜란드에서 숙련된 건축가, 조각가, 화가들을 불러들였으며, 직접 자신의 도면을 통해 여러 곳에서 유발한 활발한 건축 활동에 개입했다. 남아있는 그의 건축 관련 편지들은 그가 건축을 이해하고 이탈리아 르네상스, 특히 전성기 르네상스와 매너리즘의 원리를 잘 알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의 편지에서 그는 건축가와 건축업자에게 조언하고 훈계하며, 그들의 도면을 수정하고 건축과 장식의 세부 사항에 몰두했다. 특히 그의 관심은 장식 자체에 집중되었다. 외부에서는 웅장한 포털과 창문, 화려한 박공, 풍부하게 장식된 첨탑에, 내부에서는 특히 풍부한 벽널과 문틀에 집중했다.

특히 세바스티아노 세를리오의 건축 예술에 관한 책들이 영감의 원천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요한 자신의 취향이 여러 면에서 나타났고, 그는 재위 기간 동안 발생한 흥미로운 예술 운동의 중심 인물로 정당하게 평가될 수 있다.
요한 3세 주변의 많은 예술가와 장인들 중에는 스웨덴인 안데르스 말라레 (주로 건축가로 활동), 조각가이자 건축가로 중요한 역할을 한 빌럼 보이 (웁살라에 있는 요한의 묘비 제작), 바스테나의 건축가 아렌트 드 로이와 한스 플레밍과 같은 몇몇 저명한 인물들이 있었다.
그러나 요한에게는 더 숙련된 사람들이 필요했다. 그가 고용한 외국 장인들 중에는 원래 롬바르디아 출신인 파르 가문의 세 건축가, 즉 프란치스쿠스 파르, 요한 밥티스타 파르, 도미니쿠스 파르가 있었는데, 프란치스쿠스 파르는 웁살라와, 나머지 두 사람은 보리홀름 성과 칼마르 성에 그들의 이름이 붙어 있다. 그 외에 스투코 예술가이자 건축가인 안토니우스 바츠, 핀란드와 리보니아의 수석 건축가인 피터 헤르티그, 조각가인 마르쿠스 울프룸과 우르반 슐츠, 화가인 요한 밥티스타 반 우더와 아렌트 람브레흐츠, 석공과 조각가인 롤란드 마클, 피터 드 라 코헤, 루카스 반 더 베르트 등이 있었다. 독일 공국과 덴마크에서 온 산림 관리인을 포함하여 농업 문제에 도움을 주기 위해 해외 전문가들도 초빙되었다.
2.4.2. 교회와 수도원
요한 3세가 건축에 관심을 가진 특별한 측면은 오래된 기념비적인 건물들을 보존하려는 그의 노력이다. 그의 열정은 도시의 외관을 돌보는 데까지 확장되었다. 웁살라 대성당, 베스테로스 대성당, 린셰핑 대성당, 스카라 대성당은 옛 영광을 되찾았고, 핀란드에서는 투르쿠 대성당이 복원되어 새로운 성가대석을 얻었으며, 에스토니아의 탈린 성모 마리아 대성당도 복원되었다. 더 이상 사용되지 않거나 파괴된 수도원 교회 중 개조된 곳으로는 바른헴 수도원, 브레타 수도원, 알바스트라 수도원, 아스케뷔 수도원과 구드헴 수도원, 그리고 핀란드의 나안탈리 수도원이 있다. 스톡홀름에서는 스토르키르칸, 리다르홀멘 교회 및 독일 교회 (원래 중세 길드홀이었으며, 핀란드 교단에도 주어져 오랫동안 성 헨리 교회라고 불렸다)가 복원되었고, 구스타브 1세에 의해 철거된 성 클라라 수녀원 터에 클라라 교회가 건설되었다. 또 다른 새로운 건물은 성 야고보 교회였다. 그가 계획했던 다른 교회들, 예를 들어 삼위일체 교회는 결코 지어지지 않았다.
2.4.3. 성과 요새
요한 3세는 자신의 모든 주요 성에 예배당을 지었으며, 바스테나 성은 부분적으로 보존되어 있고 칼마르 성은 여전히 잘 보존되어 있다. 이러한 교회 건축 활동에서 고딕 건축 전통은 세부 사항까지도 살아남았다. 수많은 성곽 및 요새 프로젝트는 구스타브 1세와 에리크 14세 시대부터 이어받은 것도 있고, 요한 3세가 새로 시작한 것도 있다. 스톡홀름의 트레 크로노르 궁전은 크게 확장되고 재단장되었다. 성 교회 부분을 포함한 북쪽 안뜰은 1697년 성 화재 전까지 유지되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웁살라 성 (현재의 남쪽 부분과 서쪽 확장 부분)은 1572년 화재 이후 러스티카 처리된 회벽과 두 개의 둥근 탑을 갖춘 벽돌 건물로 재건축되었다. 구스타브 1세에 의해 시작된 바스테나 성은 오늘날과 같은 르네상스 궁전으로 확장되었으나, 원래 계획대로 완공된 것은 17세기 초에 이르러서였다. 스바르트셰 궁전은 특이한 건물로, 둥근 아케이드가 있는 안뜰과 오래된 석조 건물의 양쪽에 돔형 교회가 있었다.
폴란드와 더 가까웠기 때문에 요한이 자주 거주했던 칼마르 성에서는 안뜰의 둘레가 완성되었고, 바닥은 같은 높이로 깔렸으며, 내부에는 에리크 14세 치하에서 시작된 값비싼 장식이 계속되었다. 반면 보리홀름 성은 요한 3세의 가장 큰 신축 건물로, 완전히 규칙적인 평면과 뛰어난 공간감, 웅장함, 강력한 요새를 자랑했지만, 요한 3세의 통치 기간 동안에는 완공되지 못했다. 또 다른 신축 건물은 군닐라 비엘케 왕비의 미망인 거처로 계획된 브라보리 성이었고, 드로트닝홀름 궁전 (구 드로트닝홀름 궁전은 1661년에 소실)은 카타리나 야기에우옹카의 요청으로 멜라렌호의 한 섬에 건설되었다.
이 외에도 투르쿠 성, 베스테로스 성, 예블레 성, 스테게보리 성, 린셰핑 성의 재건축도 언급할 수 있다. 거의 모든 성에는 요새가 있었다. 순수한 요새로서의 엘브스보리, 굴베리, 크로노베리 성, 켁스홀름, 비보리 등에서도 중요한 요새화 작업이 자주 이루어졌고, 국왕은 이를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았다. 요새 건축 기술에서 스웨덴은 이 시기 북유럽 국가 중 선두에 있었는데, 새로운 이탈리아 시스템이 파르 형제에 의해 도입되었기 때문이었다.
2.4.4. 기념물
기념비적인 조각 작품 중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아버지 구스타브 1세와 그의 첫 두 왕비의 묘비이며, 아름다운 카타리나 야기에우옹카의 묘비도 웁살라 대성당에 있다. 해당 장소에 있는 요한 3세의 기념물은 그의 아들 지기스문트가 그단스크에서 조각가 빌럼 반 덴 블로케에게 의뢰했지만, 1782년에야 구스타브 3세의 보살핌으로 스웨덴에 도착하여 1818년에 현재 위치에 세워졌다. 비록 배열이 잘못되어 있었지만, 1890년대 초 교회 복원 중에 아기 린데그렌에 의해 재설계되었다.
3. 사생활
요한 3세의 사생활은 두 번의 결혼과 혼외 관계로 이루어졌다.
1562년 10월 4일, 요한은 빌뉴스에서 야기에우옹 가 출신의 폴란드 카타리나 야기에우옹카 (1526년~1583년)와 첫 번째 결혼을 했다. 스웨덴에서는 그녀를 카타리나 야게우옹카라고 부른다. 그녀는 폴란드 국왕 지그문트 2세 아우구스투스의 여동생이었다. 그들은 세 명의 자녀를 두었다.
- 엘리사베트 (이사벨라) (1564년~1566년)
- 지기스문트 (1566년~1632년), 폴란드 (1587년~1632년), 스웨덴 (1592년~1599년) 국왕, 핀란드와 리투아니아의 대공
- 안나 (1568년~1625년)

그는 1585년 2월 21일 군닐라 비엘케 (1568년~1597년)와 두 번째 결혼을 했으며, 그들은 한 명의 아들을 두었다.
- 요한 (1589년~1618년), 처음에는 핀란드 공작, 1608년부터는 외스테르예틀란드 공작. 어린 공작은 칼 9세의 딸인 사촌 마리아 엘리사베트 (1596년~1618년)와 결혼했다.
그는 애인 카린 한스도테르 (1532년~1596년)와의 사이에서 최소 네 명의 사생아를 두었다.
- 소피아 길렌히엘름 (1556년~1583년), 폰투스 드 라 가르디와 결혼
- 아우구스투스 길렌히엘름 (1557년~1560년)
- 율리우스 길렌히엘름 (1559년~1581년)
- 루크레티아 길렌히엘름 (1560년~1585년)
요한은 1562년 카타리나 야기에우옹카와 결혼한 후에도 카린과 그들의 자녀들을 계속 돌봤다. 그는 카린과 자녀들을 돌봐줄 남편을 찾아주었다. 1561년에 카린은 요한의 친구이자 하인이었던 귀족 클라스 안데르손(웨스트괴테)과 결혼했다. 그들은 브리타라는 딸을 낳았다.
요한은 1568년에 왕이 된 후에도 카린과 그의 사생아들을 계속 지원했다. 1572년에 카린은 다시 결혼했는데, 그녀의 첫 남편은 1563년에 에리크 14세에 의해 반역죄로 처형되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라르스 헨릭손과 재혼했으며, 요한은 1576년에 라르스를 귀족으로 봉하여 카린과의 자녀들을 돌보게 했다. 같은 해, 그는 자신의 딸 소피아를 엘리자베트 공주의 시녀로 궁궐에 배치했다. 1580년에 요한은 그녀를 폰투스 드 라 가르디와 결혼시켰다. 소피아는 나중에 야코브 드 라 가르디를 낳다가 사망했다.

4. 사망
요한 3세와 동생 칼의 우정은 곧 식었고, 생애 마지막 몇 달 동안 요한은 완전히 외로웠다. 1592년 봄, 그는 열병에 걸려 매우 불안해했다. 그는 도시보다 공기가 더 건강하다고 생각했던 스켑스홀멘에 지은 별궁으로 이사하면 나아질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상태는 나아지지 않았고, 한여름에는 더욱 악화되었다.
요한 3세는 1592년 11월 17일 스톡홀름에서 사망했으며, 그의 왕국은 외부 및 내부 갈등으로 약화되고 무질서와 방치 상태에 놓여 있었고, 가까운 미래에 큰 위험에 처해 있었다. 요한 3세는 웁살라 대성당에 안장되었다.
5. 유산과 역사적 평가
요한 3세의 통치는 스웨덴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으로 평가된다. 그는 왕권을 공고히 하고 국가적 정체성을 확립하려 노력했지만, 동시에 종교적 혼란과 정치적 불안정을 야기한 복합적인 인물이었다.
5.1. 긍정적인 측면과 기여
요한 3세는 리보니아 전쟁에서 러시아를 상대로 나르바를 재탈환하는 등 군사적 성공을 거두며 스웨덴의 발트해 지배권을 강화했다. 그는 특히 예술과 건축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이는 스웨덴 전역의 많은 건축물 복원 및 신축으로 이어졌다. 그의 후원 아래 이탈리아 르네상스 양식이 스웨덴에 도입되었으며, 이는 스웨덴 예술사의 중요한 시발점이 되었다. 그는 많은 숙련된 외국 장인들을 초빙하여 건축 프로젝트에 참여시켰고, 이는 스웨덴의 건축 기술 발전에 기여했다.
5.2. 비판과 논란
요한 3세의 통치에 대한 비판은 주로 그의 권력 장악 과정과 종교 정책에서 비롯된다. 그는 이복형 에리크 14세를 축출하고 왕위에 올랐으며, 에리크의 사망에도 연루되었다는 의혹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이는 그의 통치에 대한 도덕적 논란을 야기했다. 또한, 그는 미흡한 행정관이자 최악의 재정관으로 알려져 왕국을 무질서와 방치 상태에 놓았다는 비판을 받는다. 그의 가톨릭에 대한 호의와 '붉은 책' 출판을 통한 전례 개혁 시도는 스웨덴의 주류 루터교도들과의 심각한 종교적 갈등인 '전례 논쟁'을 야기했으며, 이는 내부 분열을 심화시켰다. 그의 성품 또한 폭력적이고 의심이 많았으며, 날카로움, 단호함, 신중함, 실용적인 시각이 부족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5.3. 영향과 기념물
요한 3세의 영향은 특히 건축과 문화 분야에서 두드러진다. 그가 건설하고 복원한 수많은 성곽, 교회, 수도원은 오늘날 스웨덴의 중요한 역사적 유산으로 남아있다. 그의 고향인 핀란드의 포리 시는 그의 모토였던 Deus Protector Noster(우리 하느님은 우리의 수호자)를 도시의 모토로 사용하고 있으며, 2008년 시 창립 450주년을 기념하여 포리 시청 앞에 공작 요한의 동상이 세워졌다. 웁살라 대성당에 있는 그의 묘비는 그의 예술 후원자로서의 면모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기념물이다.
6. 조상
16대조 | 8대조 | 4대조 | 2대조 | 본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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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요한 3세 | ||||
요한 크리스티에른손 바사 | 에리크 요한손 바사 | 구스타브 1세 | ||
비르기타 구스타브스도테르 스투레 | 세실리아 몬스도테르 에카 | |||
에리크 아브라함손 레이온후부드 | 에리크 아브라함손 레이온후부드 | 마르가레타 레이온후부드 | ||
비르기타 몬스도테르 나트 오크 다그 | 에바 에릭스도테르 바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