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생애 및 교육
올리버 웬들 홈스 시니어의 어린 시절, 가족 배경, 그리고 교육 과정을 연대순으로 설명한다.
1.1. 어린 시절과 가족

홈스 시니어는 1809년 8월 29일 매사추세츠주 케임브리지에서 태어났다. 그의 생가(하버드 야드 북쪽에 위치한 집)는 벙커힐 전투 계획이 세워진 곳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회중교회인 제일회중교회의 목사이자 열정적인 역사가였던 애비얼 홈스의 첫째 아들이자, 애비얼의 둘째 부인인 새라 웬델의 아들이었다. 새라 웬델은 부유한 집안의 딸이었으며, 홈스 시니어는 그의 외할아버지이자 판사였던 사람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 웬델 가문의 시조인 에베르트 얀센은 1640년 네덜란드를 떠나 뉴욕주 올버니에 정착했다. 또한 그의 어머니를 통해 매사추세츠 주지사 사이먼 브래드스트리트와 그의 아내이자 미국 최초의 출판 시인인 앤 브래드스트리트(토머스 더들리의 딸)의 후손이기도 하다.
어린 시절부터 홈스 시니어는 체구가 작고 천식을 앓았으나, 조숙한 것으로 유명했다. 8세 때 그는 다섯 살 동생 존을 데리고 케임브리지의 교수대에서 마지막 사형을 목격했으며, 이후 부모에게 꾸중을 들었다. 그는 또한 아버지의 서재를 탐험하는 것을 즐겼는데, 훗날 "그곳은 매우 신학적인 책들로 가득 차 있어서, 선반이 성스러운 학문의 무게로 휘어질 정도의 장엄한 폴리오에 둘러싸여 있었다"고 회고했다. 존 드라이든, 알렉산더 포프, 올리버 골드스미스와 같은 시인들의 작품을 접한 어린 홈스 시니어는 자신만의 시를 작곡하고 낭송하기 시작했다. 그가 13세 때 아버지가 기록한 그의 첫 시가 남아있다.
재능 있는 학생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린 홈스 시니어는 수다스러운 성격과 수업 시간에 이야기를 읽는 습관 때문에 종종 선생님들에게 꾸중을 들었다. 그는 데임 프렌티스와 윌리엄 빅로우 밑에서 공부한 후, '포트 스쿨'이라고 불리는 케임브리지포트 정착지의 사립 아카데미에 입학했다. 그의 학교 친구 중 한 명은 훗날 비평가이자 작가가 된 마거릿 풀러였는데, 홈스 시니어는 그녀의 지성을 존경했다.
1.2. 교육
홈스 시니어의 아버지는 그가 15세 때 매사추세츠주 앤도버에 있는 필립스 아카데미에 보냈다. 애비얼 홈스는 첫째 아들이 목사직을 잇기를 바라며 정통 칼뱅주의 교육으로 유명한 필립스를 선택했다. 그러나 홈스 시니어는 신학자가 되는 데 관심이 없었으며, 그 결과 앤도버에서의 1년을 즐기지 못했다. 그는 문학 클럽인 소셜 프래터니티의 선출 회원으로서 명성을 얻었지만, 학교 교사들의 "편협하고, 옹졸하며, 미개한" 태도를 싫어했다. 그러나 특히 한 선생님은 그의 어린 학생의 시적 재능을 알아보고 그것을 추구할 것을 제안했다. 16세 생일 직후, 홈스 시니어는 하버드 대학교에 입학 허가를 받았다.

하버드 대학교 1829년 졸업반의 일원으로서, 홈스 시니어는 대학 생활의 첫 몇 년 동안 기숙사 대신 집에서 통학했다. "단단한 부츠를 신고도 키가 160 cm 남짓"이었기 때문에, 그는 스포츠 팀이나 하버드 워싱턴 군단에 가입하는 데 관심이 없었다. 대신 그는 담배를 피우고 대화하기 위해 모이는 학생 그룹인 "귀족" 또는 "퍼프매니악"과 어울렸다. 그러나 지역 학생이자 목사의 아들로서, 그는 여러 사교 집단 사이를 자유롭게 넘나들 수 있었다. 그는 또한 1년 선배였던 찰스 천시 에머슨(랄프 왈도 에머슨의 형제)과 친구가 되었다. 2학년 때, 홈스 시니어는 학업 우수자에게 주어지는 학업 영예인 '데투어스'를 받은 20명의 학생 중 한 명이었는데, 이 상에는 『제임스 그레이엄, 존 로건, 윌리엄 팔코너의 시』가 함께 주어졌다. 학업 성과에도 불구하고, 그는 앤도버 출신 학우에게 "충분히 열심히 공부하지 않는다"고 인정했다. 그러나 그는 언어에 능숙했으며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스페인어 수업을 들었다.
홈스 시니어의 학문적 관심사와 취미는 법학, 의학, 그리고 글쓰기로 나뉘었다. 그는 헤이스티 푸딩에 선출되어 시인 및 서기직을 맡았고, 파이 베타 카파 명예 학회에도 가입했다. 두 친구와 함께 그는 보스턴의 새로운 미술관에 대한 풍자 시 모음집인 『아테나움 회화 갤러리의 시적 삽화』라는 작은 책을 공동 집필했다. 그는 졸업반 졸업식에 오리지널 작품을 제공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고, 큰 호평을 받은 "가볍고 비꼬는" 시를 썼다. 졸업 후 홈스 시니어는 법률계에 종사할 생각으로 집에서 지내며 하버드 로스쿨(당시에는 데인 스쿨로 불림)에서 공부했다. 그러나 1830년 1월까지 그는 법학 공부에 실망했다. 그는 "이곳과 관련된 거의 모든 것이 싫증 난다"고 썼다. "법의 전당이 그곳에 들어선 사람들에게는 어떤 곳일지 모르겠지만, 나에게는 문턱부터 매우 차갑고 음침하게 느껴진다."
1.3. 초기 문학 활동
1830년은 홈스 시니어에게 시인으로서 중요한 해였다. 법학 공부에 실망하면서도 그는 즐거움을 위해 시를 쓰기 시작했다. 그해 말까지 그는 50편이 넘는 시를 썼고, 그중 25편(모두 무명으로)을 하버드 친구들이 시작한 단명한 출판물 『콜레지언』에 기고했다. 이 시들 중 네 편은 결국 그의 가장 잘 알려진 작품이 될 것이었다: '도체스터 거인', '자존심 강한 보행자의 성찰', '저녁 / 재단사에 의하여', 그리고 '우스꽝스러움의 절정'. 그의 시 아홉 편이 1830년 팜플렛 『아테나움 회화 갤러리의 삽화』에 익명으로 출판되었다.

같은 해 9월, 홈스 시니어는 『보스턴 데일리 애드버타이저』에서 18세기 프리깃함 USS 컨스티튜션이 해군에 의해 해체될 예정이라는 짧은 기사를 읽었다. 홈스 시니어는 함선의 해체에 반대하여 '올드 아이언사이즈'를 썼다. 이 애국적인 시는 다음 날 『애드버타이저』에 실렸고, 곧 뉴욕, 필라델피아, 워싱턴의 신문에도 게재되었다. 이 시는 저자에게 즉각적인 전국적인 관심을 가져다주었을 뿐만 아니라, 세 연으로 된 이 시는 대중의 큰 공감을 불러일으켜 역사적인 함선이 보존될 수 있었다.
그해 나머지 기간 동안, 홈스 시니어는 단 다섯 편의 시만을 더 발표했다. 그해 그의 마지막 주요 시는 '마지막 잎새'였는데, 이 시는 부분적으로 1774년 보스턴 차 사건의 "인디언" 중 한 명이자 "마지막 중절모를 쓴 남자"였던 토머스 멜빌이라는 지역 남성에게서 영감을 받았다. 홈스 시니어는 훗날 멜빌이 "가을과 겨울의 폭풍을 견디고 줄기에 매달려 새로운 봄의 성장이 싹을 틔우고 잎을 펼치는 동안에도 여전히 가지에 매달려 있는 시든 잎사귀"를 떠올리게 했다고 썼다. 문학 비평가 에드거 앨런 포는 이 시를 영어로 된 가장 훌륭한 작품 중 하나라고 평했다. 몇 년 후, 에이브러햄 링컨 또한 이 시의 팬이 되었다. 링컨의 법률 파트너이자 전기 작가인 윌리엄 헌던은 1867년에 "나는 링컨이 이 시를 낭송하고, 칭찬하고, 찬양하고, 맹세하는 것을 들었다"고 썼다.
홈스 시니어는 1831년, 1833년, 1837년에 연간 선물 도서 『토큰』에 작품을 발표했다. 초기 문학적 성공에도 불구하고, 홈스 시니어는 문학 직업으로 전향하는 것을 고려하지 않았다. 훗날 그는 "작가 정신의 취하는 즐거움"을 맛보았지만, 그러한 만족감을 질병에 비유하며 "젊은 작가에게 활자 금속과의 정신적 접촉을 통해 침투하는 것만큼 빠르게, 그리고 철저하게 피, 뼈, 골수를 뒤덮는 납 중독의 형태는 없다"고 말했다.
2. 의학 경력
의사로서의 훈련 과정, 의료 개혁을 위한 노력, 산욕열 연구와 같은 주요 의학적 기여, 그리고 교육자로서의 활동을 심층적으로 다룬다.
2.1. 의학 훈련 및 개혁
법학 공부를 포기한 홈스 시니어는 의학으로 전향했다. 1830년 가을, 케임브리지의 어린 시절 집을 떠난 그는 보스턴의 의과대학에 다니기 위해 보스턴의 하숙집으로 이사했다. 당시 학생들은 의학, 해부학 및 외과, 산부인과, 화학, 그리고 약물학의 다섯 과목만을 공부했다. 홈스 시니어는 의사이자 친구의 아버지인 제임스 잭슨의 제자가 되었고, 병원 약제부에서 화학자로 파트타임으로 일했다. 사혈이나 물집 치료와 같은 당시 원시적인 의료 행위의 "고통스럽고 혐오스러운 측면"에 실망한 홈스 시니어는 환자에 대한 면밀한 관찰과 인간적인 접근 방식을 강조하는 스승의 가르침에 호의적으로 반응했다. 자유 시간이 부족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계속해서 글을 쓸 수 있었다. 그는 이 시기에 자신의 하숙집 아침 식탁에서 본 삶을 상세히 묘사한 두 편의 에세이를 썼다. 홈스 시니어의 가장 인기 있는 작품 중 하나로 발전할 이 에세이들은 1831년 11월과 1832년 2월에 『뉴잉글랜드 매거진』에 "아침 식탁의 독재자"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1833년, 홈스 시니어는 의학 공부를 더 하기 위해 파리로 여행했다. 도시의 병원 시스템이 최근 급진적으로 재편되면서 당시로서는 그곳의 의학 훈련은 매우 발전한 상태였다. 23세의 홈스 시니어는 유명한 파리 대학교 에콜 드 메데신에서 발전하고 있는 새로운 '임상' 방법으로 훈련받은 최초의 미국인 중 한 명이었다. 강의가 전적으로 프랑스어로 진행되었기 때문에 그는 개인 언어 강사를 고용했다. 고향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그는 편지와 방문객들(예: 랄프 왈도 에머슨)을 통해 가족 및 친구들과 계속 연락을 유지했다. 그는 새로운 환경에 빠르게 적응했다. 아버지에게 편지를 쓸 때, 그는 "나는 프랑스어를 말하고, 프랑스 음식을 먹고, 가끔 프랑스 술을 마시는 것을 좋아한다"고 적었다.
라 피티에 병원에서 그는 내과 병리학자 피에르 샤를 알렉상드르 루이 밑에서 공부했는데, 루이는 고대부터 의료 행위의 주축이었던 사혈 요법의 비효율성을 입증했다. 루이는 '기대 요법'의 아버지 중 한 명으로, 이는 질병 회복 과정에서 자연의 치유를 돕기 위해 의사가 가능한 모든 것을 해야 하며, 이 자연스러운 과정을 방해하는 어떤 것도 해서는 안 된다는 치료 원칙이다. 보스턴으로 돌아온 후, 홈스 시니어는 미국에서 기대 요법의 주요 지지자 중 한 명이 되었다. 홈스 시니어는 1836년 하버드 대학교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받았고, 급성 심낭염에 대한 논문을 썼다. 그의 첫 시집은 그해 말에 출판되었지만, 의료 경력을 시작할 준비가 되어 있던 홈스 시니어는 이를 일회성 이벤트로 치부했다. 책의 서문에서 그는 "이미 다른 업무에 종사하고 있으므로, 내 망토를 정리할 시간을 내는 데 약간의 노력이 필요했고, 이제는 기꺼이 더 조용한 작업으로 물러난다. 비록 덜 흥미로울지라도, 그것들은 유용하다고 인정받고 감사함으로 받아들여질 것이 더 확실하다"고 썼다.
졸업 후, 홈스 시니어는 매사추세츠 의학회, 보스턴 의학회, 그리고 파리에서 훈련받은 젊은 의사들로 구성된 보스턴 의학 개선 협회에 가입하며 빠르게 지역 의료계의 주역이 되었다. 그는 또한 많은 미국 의사들에게 생소했던 청진기 사용의 이점에 관한 논문을 제출하여 하버드 의학대학원의 권위 있는 보이던 상을 수상하면서 더 큰 명성을 얻었다.

1837년, 홈스 시니어는 보스턴 약국에 임명되었는데, 그곳의 열악한 위생 상태에 충격을 받았다. 그 해 그는 보이던 에세이 상 두 개를 모두 수상했다. 연구와 교육에 집중하기를 원했던 그는 동료 세 명과 함께 보스턴 트리몬트 로우 35번지 약국 위에 트레몬트 의과대학을 설립했는데, 이 학교는 훗날 하버드 의학대학원과 합병되었다. 그곳에서 그는 병리학을 강의하고, 현미경 사용법을 가르쳤으며, 시체 해부를 감독했다. 그는 종종 전통적인 의료 행위를 비판했으며, 한 번은 모든 현대 의학을 바다에 던져버린다면 "인류에게는 더 나을 것이고, 물고기에게는 더 나쁠 것"이라고 재치 있게 말했다. 다음 10년 동안 그는 작고 불규칙적인 개인 진료를 유지했지만, 대부분의 시간을 가르치는 데 보냈다. 그는 1838년부터 1840년까지 다트머스 의학대학원의 교수진으로 재직하며 해부학 및 생리학 교수로 임명되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매년 가을 14주 동안 뉴햄프셔주 하노버로 여행하여 강의했다. 그는 1838년 미국 예술 과학 아카데미의 펠로우로 선출되었다.
다트머스에서의 교수직을 사임한 후, 홈스 시니어는 의료적 오류, 즉 '돌팔이 의료'를 폭로하는 세 편의 강의 시리즈를 작성했다. 이전 강의보다 더 진지한 어조를 채택하여, 그는 첫 강의인 '점성술과 연금술', 두 번째 강의인 '과거의 의료 망상'과 같은 주제에서 드러난 잘못된 추론과 증거의 오용을 밝히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세 번째 강의의 주제인 동종요법을 "뒤틀린 독창성, 번지르르한 학식, 어리석은 신뢰, 그리고 실제로는 너무나 자주 섞이는 교묘한 오해의 혼합물"인 "가장된 과학"이라고 여겼다. 1842년, 그는 동종요법을 다시 비난하는 에세이 '동종요법과 그와 관련된 망상'을 출판했다.
1846년, 홈스 시니어는 '마취(anaesthesia)'라는 단어를 만들었다. 수술 중 디에틸 에테르 사용을 공개적으로 시연한 최초의 시술자인 치과의사 윌리엄 T. G. 모턴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썼다.
"모든 사람이 위대한 발견에 기여하고 싶어 합니다. 제가 할 일은 그 상태와 약제에 적용될 이름-또는 그 이름-에 대한 힌트를 한두 가지 주는 것입니다. 그 상태는 '마취(Anaesthesia)'라고 불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무감각, 특히 접촉 대상에 대한 무감각을 의미합니다."
홈스 시니어는 자신의 새로운 용어가 "모든 문명화된 인류의 혀로 반복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2.2. 산욕열 연구

1842년, 홈스 시니어는 월터 채닝이 보스턴 의학 개선 협회에서 산욕열에 대해 강의하는 것을 들었다. 산욕열은 당시 출산 후 여성 사망의 주요 원인이 되는 질병이었다. 이 주제에 관심을 갖게 된 홈스 시니어는 1년 동안 사례 보고서와 기타 의학 문헌을 검토하여 이 질병의 원인과 가능한 예방책을 파악했다. 1843년, 그는 자신의 연구 결과를 협회에 발표한 후, 단명한 출판물 『뉴잉글랜드 분기 의학 및 외과 저널』에 '산욕열의 전염성'이라는 논문으로 출판했다. 이 에세이는 당시의 일반적인 믿음(세균설이 확립되기 전)과는 달리, 출산 중 또는 직후 여성들이 감염되는 치명적인 질병인 산욕열의 원인이 의사를 통한 환자 간 접촉에서 비롯된다고 주장했다. 그는 침대 시트, 수건, 의류가 특히 이와 관련하여 문제가 된다고 믿었다. 홈스 시니어는 이 이론에 대한 방대한 증거를 수집했는데, 여기에는 감염된 환자들을 부검한 후 병에 걸려 사망한 의사들의 이야기도 포함되었다. 그는 자신의 주장을 마무리하며, 한 건이라도 산욕열이 발생한 의사는 자신의 도구를 정화하고, 치명적인 분만을 도울 때 입었던 옷을 태우며, 최소 6개월 동안 산부인과 진료를 중단해야 할 도덕적 의무가 있다고 주장했다.
처음 출판되었을 때는 크게 주목받지 못했지만, 홈스 시니어는 결국 두 명의 저명한 산부인과 교수-휴 L. 호지와 찰스 델루세나 마이그스-의 공격을 받았다. 이들은 그의 전염 이론을 완강히 부인했다. 1855년, 홈스 시니어는 개정된 버전의 에세이를 '사적인 전염병으로서의 산욕열'이라는 새로운 제목의 팜플렛 형태로 출판하며 추가 사례들을 논의했다. 새로운 서문에서 홈스 시니어는 자신의 반대자들에게 직접적으로 다음과 같이 썼다. "나는 내 조력자에 의해 독살당하는 한 명의 어머니를 구하는 것이, 내가 질병을 옮겨서 50명의 환자 중 40명을 살렸다고 주장하는 것보다 낫다." 그는 덧붙여 "나는 그들을 위해 더 강한 목소리가 변론할 때까지 생명이 위태로운 여성들을 대신하여 발언할 것을 간청한다"고 말했다.
몇 년 후, 이그나츠 제멜바이스는 오스트리아 빈에서 비슷한 결론에 도달했다. 그곳에서 그는 분만 시 시술 전에 염소 용액으로 손을 씻는 예방 조치를 도입하여 산욕 사망률을 상당히 낮추었으며, 당시에는 논란이 많았던 이 연구는 현재 세균설의 획기적인 업적으로 평가받는다.
2.3. 교육 및 강연 활동
1847년, 홈스 시니어는 하버드 의학대학원의 파크먼 해부학 및 생리학 교수로 채용되어 1853년까지 학장을 지냈고 1882년까지 강의했다. 임명 직후, 홈스 시니어는 해리엇 케지아 헌트라는 여성에게 입학 허가를 고려했다는 이유로 남학생들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학생들뿐만 아니라 대학 이사들과 다른 교수진의 반대에 부딪혀, 그녀는 입학 신청을 철회해야 했다. 하버드 의학대학원은 1945년이 되어서야 여성을 입학시켰다. 홈스 시니어의 파리 훈련 경험은 그가 학생들에게 질병의 해부 병리학적 기초의 중요성을 가르치게 했으며, "기도나 특별한 섭리 같은 교리가 그가 이차적인 원인을 직접적으로 보지 않는 변명이 될 수 없다"고 강조했다. 학생들은 홈스 시니어를 좋아했으며, 그를 "올리버 삼촌"이라고 불렀다. 한 조교는 이렇게 회고했다.
"그가 [강의실에] 들어서면 우레와 같은 함성과 박수갈채가 그를 맞이합니다. 그러고 나면 침묵이 흐르고, 건조한 뼈에 시적인 이미지를 입히고, 힘들고 피곤한 하루에 유머를 불어넣으며, 흥미롭지만 어려운 연구의 세부 사항들을 지친 청자에게 밝게 비추는 매력적인 묘사, 분석, 일화, 무해한 말장난의 시간이 시작됩니다."
홈스 시니어는 1851년부터 1856년까지 "현대 의학 과학", "강의와 강연", "19세기 영국 시인들"과 같은 주제로 광범위하게 강연했다. 뉴잉글랜드 전역을 여행하며 그는 강의당 40 USD에서 100 USD를 받았다. 그는 또한 이 시기에 많은 작품을 출판했으며, 그의 시집 영국판은 해외에서 잘 팔렸다. 그러나 사회적 태도가 변하기 시작하면서, 홈스 시니어는 자신이 "도덕적 폭군"이라고 부른 사람들과 공개적으로 갈등을 빚는 경우가 많았다. 언론으로부터 그의 노골적인 노예제 반대와 커져가는 금주 운동에 대한 그의 반감에 대한 비판이 커지자, 그는 강연을 중단하고 집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3. 문학 활동
시인과 산문 작가로서의 그의 작품 세계를 탐구하며, 주요 작품들의 내용, 문체, 주제 및 문학사적 의의를 분석한다.
3.1. 시
홈스 시니어는 윌리엄 컬런 브라이언트, 헨리 워즈워스 롱펠로, 제임스 러셀 로웰, 존 그린리프 휘티어와 함께 화롯가 시인 중 한 명이다. 가족 친화적이고 전통적인 글쓰기로 특징지어지는 이 시인들은 유럽에서 상당한 인기를 얻은 최초의 미국인 중 한 명이었다. 특히 홈스 시니어는 시가 "삶의 경험과 모습을 상상력에서 비롯되고 다른 사람들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모습으로 변모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다고 믿었다.

생전에 엄청난 인기로 인해 홈스 시니어는 추모식, 기념일, 생일 등 특정 행사를 위한 기념시를 써달라는 요청을 자주 받았다. 이러한 수요에 대해 그는 한때 자신을 "운문의 꽃집 주인이자, 사람들이 연회에 꽃다발 없이 간다면 무엇이라고 말할까?"라고 썼다. 그러나 비평가 하이엇 왜그너는 "그것을 만들어낸 행사를 살아남은 작품은 거의 없다"고 지적했다. 홈스 시니어는 진지한 모임에서는 충성심과 신뢰의 이점을 표현하고, 축제와 기념 행사에서는 재치를 보여주는 시인으로 알려졌다. 에드윈 퍼시 휘플은 홈스 시니어를 "감정과 열정의 시인"으로 여겼다. "그를 단지 코믹한 서정시인, 왁자지껄한 친구들과 주제넘은 자만심의 비방하는 시인으로만 아는 사람들은 그의 진지하고 감상적인 작품의 맑은 달콤함과 종달새 같은 전율에 놀랄 것이다."
홈스 시니어의 시 중 상당수가 기념적 성격을 띠고 있지만, 일부 작품은 주변 세계에 대한 그의 관찰을 바탕으로 쓰였다. 이것은 '올드 아이언사이즈'와 '마지막 잎새'라는 그의 가장 잘 알려지고 비평적으로 성공한 두 편의 시의 경우인데, 이들은 그가 젊은 성인이었을 때 발표되었다. '앵무조개'와 '집사님의 걸작, 또는 놀라운 외륜 마차'와 같은 시에서 볼 수 있듯이, 홈스 시니어는 외륜 마차나 앵무조개와 같이 오랫동안 친숙하거나 심도 있게 연구했던 구체적인 사물에 자신의 운문을 성공적으로 집중시켰다. 그의 작품 중 일부는 개인적인 또는 가족 역사도 다룬다. 예를 들어, 시 '도로시 큐'는 그의 외증조모를 그린 초상화이다. 이 시는 짧은 라임이 있는 이행시로 자부심, 유머, 부드러움을 결합하고 있다.
: 오 아가씨 도로시! 도로시 큐!
: 그대에게 빚진 선물은 기이하네;
: 왕도 딸이나 아들에게만 줄 수 있는 그런 선물,-
: 내 마음과 손의 모든 소유,
: 내 집과 땅에 대한 모든 권리;
: 어머니와 자매와 자식과 아내
: 그리고 기쁨과 슬픔과 죽음과 삶!
지나치게 감상적인 초월주의와 낭만주의 시의 노골적인 비평가였던 홈스 시니어는 때때로 기념시를 쓸 때 감상주의에 빠지기도 했지만, 종종 그러한 감정적 과잉을 유머로 균형을 맞췄다. 비평가 조지 워런 암스는 홈스 시니어의 시가 지역적 특성을 띤다고 보았고, 그의 "뉴잉글랜드적 소박함"과 "가정사에 대한 청교도적 친숙함"을 그 증거로 들었다. 그의 시에서 홈스 시니어는 종종 자연이라는 주제를 인간 관계와 사회적 가르침에 연결시켰다. 피츠필드의 경치 좋은 시골을 기념하여 발표된 '쟁기꾼'과 '새로운 에덴'과 같은 시는 1863년 『올드 파머스 알마낙』 판에도 인용되었다.
그는 '오, 자비 베푸시는 은총의 하나님이시여'와 '모든 존재의 주, 멀리서 보좌에 앉으신 이여'를 포함한 여러 찬송가 가사를 작곡했다。
3.2. 산문
주로 시인으로 알려져 있지만, 홈스 시니어는 수많은 의학 논문, 에세이, 소설, 회고록, 그리고 '아침 식탁' 시리즈와 같은 대화체 형식의 책들을 썼다. 그의 산문 작품들은 의학에서 신학, 심리학, 사회, 민주주의, 성과 젠더, 그리고 자연 세계에 이르는 다양한 주제를 다룬다. 작가이자 비평가인 윌리엄 딘 하웰스는 홈스 시니어가 극화된(또는 담론적인) 에세이라는 장르를 창조했다고 주장했는데, 이 장르에서는 주요 주제가 이야기의 줄거리에 의해 형성된다. 그러나 그의 작품은 종종 장르의 조합을 사용한다. 시, 에세이, 대화의 발췌문이 그의 산문 전반에 걸쳐 자주 포함된다. 비평가 윌리엄 로렌스 슈뢰더는 홈스 시니어의 산문 스타일이 "매력적"이라고 평가했는데, 이는 "독자의 주의를 크게 요구하지 않았다"는 점 때문이다. 그는 또한 저자의 초기 작품들(《독재자》와 《아침 식탁의 교수》)이 "정력적이고 매혹적"인 반면, 훗날의 작품들인 《유럽에서의 백일》과 《찻잔을 앞에 두고》는 "추천할 만한 스타일의 특징이 거의 없다"고 언급했다.

홈스 시니어는 '아침 식탁' 연작으로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 이 세 권의 대화체 형식의 책들은 독자들이 작가와 친밀한 유대감을 느끼게 하는 대화체 스타일 덕분에 다양한 독자층을 사로잡았고, 많은 팬들의 편지를 받았다. 이 연작의 대화체적인 어조는 단순히 아침 식탁 주변에서 벌어지는 철학적 논쟁과 즐거운 대화를 모방하는 것뿐만 아니라, 사고와 표현의 개방성을 촉진하기 위해서도 사용된다. 《독재자》의 첫 권에서 홈스 시니어는 독재자로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대화라는 사업은 매우 심각한 문제입니다. 한 시간만 이야기해도 하루 금식하는 것보다 더 기력을 약화시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제가 지금 할 말을 명심하십시오, 이는 일하는 전문직 남성의 조언만큼이나 좋으며, 비용이 들지 않습니다. 정맥에서 피 한 파인트를 잃는 것보다 신경을 건드리는 것이 낫습니다. 아무도 당신의 신경력이 빠져나가는 것을 측정하지 않고, 수술 후에 당신의 뇌와 골수에 붕대를 감지 않습니다."
다양한 화자들은 홈스 시니어의 삶과 경험의 여러 측면을 대변한다. 예를 들어, 첫 번째 작품의 화자는 파리에서 몇 년간 공부한 의사로 이해되며, 두 번째 권인 《아침 식탁의 교수》는 저명한 의과대학 교수의 시점에서 서술된다. 화자들이 수많은 주제를 논의하지만, 대화의 흐름은 항상 홈스 시니어가 파리에서 배운 과학과 의학의 개념, 그리고 그것들이 도덕 및 정신과 어떻게 관련되는지를 지지하는 방향으로 이어진다. 특히 《독재자》는 자아, 언어, 삶, 진실의 본질과 같은 철학적 문제들을 다룬다.
홈스 시니어는 자신의 첫 소설인 《엘시 베너》의 두 번째 서문에서, 이 작품을 쓴 목적이 "'원죄'와 그 기술적 명칭 하에 오는 왜곡된 위반에 대한 인간의 책임이라는 교리를 시험하기 위함"이라고 밝혔다。 그는 또한 "심각한 과학적 교리가 모든 소설 전반에 걸친 인물 묘사 밑에 깔려 있음을 감지할 수 있다"는 자신의 믿음을 언급했다. 그는 이 작품을 "심리적 로맨스"로 간주하며, 과학적 관점에서 도덕 신학을 묘사하기 위해 낭만적인 서사를 사용했다. 이러한 표현 방식은 그의 다른 두 소설에도 나타나는데, 이들 소설에서 홈스 시니어는 의료적 또는 심리적 딜레마를 사용하여 이야기의 극적인 줄거리를 심화시킨다.
홈스 시니어는 자신의 소설을 "약물 처리된 소설"이라고 불렀다. 일부 비평가들은 이 작품들이 지그문트 프로이트와 다른 신흥 정신과 의사 및 심리학자들의 이론을 탐구하는 데 혁신적이었다고 평가한다. 예를 들어, 《수호천사》는 정신 건강과 억압된 기억을 탐구하며, 홈스 시니어는 그의 작품 전반에 걸쳐 무의식의 개념을 사용한다. 《죽음의 반감》은 정신적 외상에 뿌리를 둔 공포증을 가진 인물을 묘사하며, 훗날 전기충격요법으로 치료된다. 홈스 시니어의 소설들은 그의 생전에는 비평적으로 성공하지 못했다. 《올리버 웬들 홈스의 정신과 소설》의 저자인 정신과 의사 클라렌스 P. 오버도르프는 이 세 작품을 "현대적 기준으로 판단할 때 형편없는 소설이다. ... 그들의 줄거리는 단순하고, 거의 유치하며, 그중 두 작품에서는 악당의 좌절과 진정한 사랑의 성취라는 일반적인 이야기에서 독자가 실망하지 않는다"고 평했다.
4. 개인적인 삶
결혼, 가족 관계, 보스턴에서의 생활, 피츠필드 여름 별장 생활 등 그의 개인적인 삶의 측면을 다룬다.
4.1. 결혼과 가족
1840년 6월 15일, 홈스 시니어는 보스턴의 킹스 채플에서 아멜리아 리 잭슨과 결혼했다. 그녀는 전 매사추세츠 대법원 부판사였던 찰스 잭슨의 딸이자, 홈스 시니어가 의학을 공부했던 의사 제임스 잭슨의 조카였다. 찰스 잭슨 판사는 부부에게 몽고메리 플레이스 8번지에 있는 집을 주었는데, 이곳은 18년 동안 그들의 보금자리가 되었다. 그들은 세 자녀를 두었다: 남북 전쟁 장교이자 미국 법학자인 올리버 웬들 홈스 주니어 (1841년 ~ 1935년), 아멜리아 잭슨 홈스 (1843년 ~ 1889년), 그리고 에드워드 잭슨 홈스 (1846년 ~ 1884년).
4.2. 보스턴과 피츠필드 생활
아멜리아 홈스는 1848년에 2000 USD를 상속받았고, 부부는 이 돈으로 매사추세츠주 피츠필드에 여름 별장을 지었다. 1849년 7월부터 가족은 그곳에서 "일곱 번의 축복받은 여름"을 보냈다. 최근 개인 진료를 중단했던 홈스 시니어는 버크셔에서 시간을 보내는 다른 문학계 인사들과 교류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1850년 8월, 홈스 시니어는 에버트 오거스터스 듀이킹크, 코넬리우스 매튜스, 허먼 멜빌, 제임스 T. 필즈, 그리고 너새니얼 호손과 시간을 보냈다. 그는 자신의 토지에 있는 나무들의 둘레를 측정하는 것을 즐겼고, "일반적으로 나무에 대한 강렬하고 열정적인 애정"이 있었고 "특히 특정 나무들에 대한 여러 낭만적인 애착"이 있었다고 기록했다. 피츠필드 집을 유지하는 높은 비용 때문에 홈스 가족은 1856년 5월에 집을 팔았다. 홈스 시니어는 1871년부터 1894년까지 보스턴의 비컨 스트리트 296번지에 거주했다.

1850년 학장으로 재직 중, 홈스 시니어는 악명 높은 파크먼-웹스터 살인 사건에서 변호인과 검찰 양측의 증인으로 나섰다. 피해자인 지역 의사이자 부유한 자선가인 조지 파크먼과 가해자인 존 웹스터는 모두 하버드 졸업생이었고, 웹스터는 세간의 이목을 끈 살인 사건 당시 의과대학 화학 교수였다. 웹스터는 유죄 판결을 받고 교수형에 처해졌다. 홈스 시니어는 1850년 11월 의과대학 입학 강의를 파크먼의 추모에 바쳤다.
4.3. 사회적 입장과 논란
같은 해, 홈스 시니어는 프레더릭 더글러스와 함께 일했던 마틴 델라니라는 아프리카계 미국인 남성으로부터 접촉을 받았다. 38세의 델라니는 인상적인 자격에도 불구하고 이전에 네 학교에서 거절당한 후 하버드 입학을 요청했다. 논란의 여지가 있는 움직임으로, 홈스 시니어는 델라니와 다른 두 명의 흑인 남성을 의과대학에 입학시켰다. 그들의 입학은 "우리는 흑인의 교육과 평가에 반대하지 않지만, 그들이 우리와 함께 대학에 있는 것에 대해 단호히 항의한다"는 학생 성명을 촉발시켰다. 60명의 학생이 이 결의안에 서명했지만, 48명의 학생은 "현재의 대중적 감정 상태에서 보스턴의 의과대학이 불행한 계층에게 전문직이 줄 수 있는 어떠한 교육 특권도 거부한다면 훨씬 더 큰 해악이 될 것"이라는 다른 결의안에 서명했다. 이에 대해 홈스 시니어는 흑인 학생들에게 그 학기 이후에는 계속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교수 회의는 홈스 시니어에게 "인종 혼합은 학급의 많은 부분에게 불쾌하며, 학교의 이익에 해롭다"고 쓰도록 지시했다. 흑인 교육을 지지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노예제 폐지론자는 아니었다. 그는 노예제 폐지론자들이 "염증을 유발할 계산된 모든 형태의 언어를 사용"하는 습관이 있다고 보았기 때문에, 그 운동이 너무 지나치다고 느꼈다. 이 지지 부족은 제임스 러셀 로웰과 같은 친구들을 실망시켰고, 로웰은 한때 홈스 시니어에게 노예제에 대해 더 솔직하게 말해야 한다고 말했다. 홈스 시니어는 침착하게 "지금은 내 방식대로 동료들을 개선하고 기쁘게 하려고 노력하게 해주세요"라고 답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홈스 시니어는 노예제가 평화롭고 합법적으로 끝날 수 있다고 믿었다.
홈스 시니어는 아메리카 원주민을 "미개한 남성성의 붉은 크레용 스케치"로 보았다. "백인과의 관계 문제"에 대해서는 "절멸"만이 유일한 해결책이라고 보았다.

1851년부터 1856년까지 홈스 시니어는 "현대 의학 과학", "강의와 강연", "19세기 영국 시인들"과 같은 주제로 광범위하게 강연했다. 뉴잉글랜드 전역을 여행하며 그는 강의당 40 USD에서 100 USD를 받았다. 그는 또한 이 시기에 많은 작품을 출판했으며, 그의 시집 영국판은 해외에서 잘 팔렸다. 그러나 사회적 태도가 변하기 시작하면서, 홈스 시니어는 자신이 "도덕적 폭군"이라고 부른 사람들과 공개적으로 갈등을 빚는 경우가 많았다. 언론으로부터 그의 노골적인 노예제 반대와 커져가는 금주 운동에 대한 그의 반감에 대한 비판이 커지자, 그는 강연을 중단하고 집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5. 말년과 죽음
하버드에서의 은퇴 후 활동, 유럽 여행, 친구들의 죽음으로 인한 상실감, 그리고 1894년의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설명한다.
1856년, 새터데이 클럽은 『애틀랜틱 먼슬리』를 창간하고 지원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이 새로운 잡지는 홈스 시니어의 친구 제임스 러셀 로웰이 편집했으며, 랄프 왈도 에머슨, 헨리 워즈워스 롱펠로, 존 로스롭 모틀리, J. 엘리엇 캐벗과 같은 뉴잉글랜드 문학 엘리트들이 기고했다. 홈스 시니어는 잡지의 이름을 제공했을 뿐만 아니라, 수년간 이 잡지에 다양한 글을 기고했다. 잡지의 첫 호를 위해 홈스 시니어는 그의 초기 에세이 두 편인 '아침 식탁의 독재자'의 새로운 버전을 발표했다. 허구적인 아침 식탁 대화를 기반으로 시, 이야기, 농담, 노래를 포함한 이 작품은 독자와 비평가 모두에게 호평을 받았으며 『애틀랜틱 먼슬리』의 초기 성공을 보장했다. 이 에세이들은 1858년에 동명의 책으로 출판되어 그의 가장 오래 지속되는 작품이 되었고, 사흘 만에 1만 부가 팔렸다. 그 속편인 《아침 식탁의 교수》는 1859년 1월부터 연재되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출간되었다.

홈스 시니어의 첫 소설 《엘시 베너》는 1859년 12월부터 『애틀랜틱』에 연재되기 시작했다. 원래 "교수의 이야기"라는 제목이었던 이 소설은 임신 중 방울뱀에게 물린 어머니 때문에 성격이 절반은 여자, 절반은 뱀인 신경증적인 젊은 여성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 소설은 존 그린리프 휘티어의 칭찬과 교회 신문들의 이단 작품이라는 비난을 포함하여 다양한 논평을 불러일으켰다.
또한 1859년 12월, 홈스 시니어는 뉴욕의 서니사이드 자택에서 병든 작가 워싱턴 어빙을 방문한 후 그에게 약을 보냈다. 어빙은 몇 달 후 사망했다. 매사추세츠 역사학회는 1859년 12월 15일에 열린 추모 행사에서 어빙에게 사후 명예 회원 자격을 수여했다. 이 행사에서 홈스 시니어는 어빙과의 만남에 대한 설명과 자신이 관찰한 의학적 증상 목록을 공개적으로 발표하는 것이 금기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제시했다.
1860년경, 홈스 시니어는 19세기 오락거리였던 3D 사진을 볼 수 있는 "미국식 입체경"을 발명했다. 그는 훗날 입체경의 인기에 대해 "그 제작에 완전히 새로운 원리가 포함된 것은 아니었지만, 당시 사용되던 어떤 휴대용 기구보다 훨씬 편리하여, 적어도 보스턴 시장에서는 점차 모든 기구들을 밀어냈다"고 설명했다. 홈스 시니어는 이 휴대용 입체경에 대해 특허를 내고 성공으로 이득을 취하는 대신, 그 아이디어를 무료로 제공했다.
1861년 사우스캐롤라이나주의 연방 탈퇴와 미국 남북 전쟁 발발 직후, 홈스 시니어는 연방을 지지하는 작품들을 발표하기 시작했는데, 그 첫 작품은 애국가 '충성스러운 북부의 목소리'였다. 그는 이전에 노예제 폐지론자들을 반역적이라고 비판했지만, 그의 주된 관심은 연방의 보존에 있었다. 같은 해 9월, 그는 『애틀랜틱』에 '빵과 신문'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발표했는데, 여기서 그는 자신을 열렬한 연방주의자로 자랑스럽게 밝혔다. 그는 "전쟁은 다른 어떤 것도 할 수 없었던 방식으로 우리가 무엇이 될 수 있고 무엇인지 가르쳐 주었다"고 썼고, 상류층까지도 "그들의 가느다란 몸매에 너무 헐렁하게 걸린 제복에 어울릴 만큼의 큰 용기"를 갖도록 영감을 주었다. 그러나 1863년 7월 4일, 홈스 시니어는 "노예제 외에 다른 어떤 원인도 나라를 분열시키는 데 물질적인 역할을 했다고 보는 것은 얼마나 부질없는 일인가"라고 썼고, 노예제를 "정의로운 하나님에 대한 죄악 중 하나"라고 선언했다. 홈스 시니어는 또한 전쟁에 개인적인 이해관계가 있었다. 그의 장남인 올리버 웬들 홈스 주니어는 1861년 4월 아버지의 바람과는 달리 육군에 입대했으며, 1861년 10월 볼스 블러프 전투에서 가슴에 총상을 입는 등 세 차례 부상을 입었다. 홈스 시니어는 안티텀 전투에서 아들의 부상 소식을 듣고 아들을 찾아 나선 이야기를 『애틀랜틱 먼슬리』에 발표했다.

남북 전쟁 와중에 홈스 시니어의 친구 헨리 워즈워스 롱펠로는 단테 알리기에리의 『신곡』을 번역하기 시작했다. 1864년부터 롱펠로는 몇몇 친구들을 매주 수요일 모임에 초대하여 도움을 요청했다. 홈스 시니어는 롱펠로, 로웰, 윌리엄 딘 하웰스, 찰스 엘리엇 노턴 등이 포함된 이 그룹의 일원이었는데, 이 그룹은 "단테 클럽"으로 알려졌다. 최종 번역본은 1867년 봄에 세 권으로 출판되었다. 미국 소설가 매튜 펄은 그들의 노력을 소설 『단테 클럽』(2003년)에서 소설화했다. 단테 번역본이 출판된 같은 해, 홈스 시니어의 두 번째 소설 《수호천사》가 『애틀랜틱』에 연재되기 시작했다. 이 소설은 11월에 책으로 출판되었는데, 판매량은 《엘시 베너》의 절반에 불과했다.
홈스 시니어의 명성은 그의 말년까지 이어졌다. 《아침 식탁의 시인》은 1872년에 출판되었다. 《독재자》가 출판된 지 15년 후에 쓰인 이 작품의 어조는 이전 작품보다 더 온화하고 향수를 불러일으켰다. 홈스 시니어는 "사람들이 나이가 들면, 결국 기억 속에 너무 많이 살아서 가장 소중한 소유물을 잃는 것을 일종의 즐거움으로 생각하게 된다. 우리가 그것을 소유하고 있을 때만큼 완벽한 것은 기억 속에 있을 때보다 더 완벽할 수 없다"고 썼다. 1876년, 70세의 나이로 홈스 시니어는 존 로스롭 모틀리의 전기를 출판했는데, 이는 그가 이전에 매사추세츠 역사학회 회보에 썼던 짧은 스케치글을 확장한 것이었다. 이듬해 그는 자신의 의학 에세이 모음집과 이전에 『애틀랜틱 먼슬리』에 썼던 다양한 에세이 모음집인 《오래된 삶의 한 권의 페이지》를 출판했다. 그는 1880년 미국 철학회 회원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35년간 교수로 재직한 후 1882년 하버드 의학대학원에서 은퇴했다. 그가 11월 28일 마지막 강의를 한 후, 대학은 그를 명예교수로 임명했다.

1884년, 홈스 시니어는 친구 랄프 왈도 에머슨의 삶과 작품에 헌정하는 책을 출판했다. 훗날의 전기 작가들은 홈스 시니어의 책을 자신의 연구 개요로 사용했는데, 특히 에머슨의 시에 헌정된 부분은 홈스 시니어가 특별한 통찰력을 가지고 있어 유용했다. 1885년 1월부터 홈스 시니어의 세 번째이자 마지막 소설인 《치명적인 반감》이 『애틀랜틱 먼슬리』에 연재되었다. 같은 해 말, 홈스 시니어는 자신의 시를 탐탁지 않게 여겼던 월트 휘트먼에게 10 USD를 기부했고, 친구 존 그린리프 휘티어도 그렇게 하도록 설득했다. 휘트먼의 친구이자 변호사인 토머스 도널드슨은 노년에 집에서만 지내게 된 휘트먼을 위해 말과 마차를 사주려고 여러 작가들에게 금전적 기부를 요청했었다.
지쳐서 어린 아들의 갑작스러운 죽음(에드워드 잭슨 홈스, 1884년 사망)에 애통해하던 홈스 시니어는 글쓰기와 사교 활동을 미루기 시작했다。 1884년 말, 그는 딸 아멜리아와 함께 유럽을 방문했다. 영국에서 그는 헨리 제임스, 조지 뒤 모리에, 알프레드 테니슨과 같은 작가들을 만났고,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문학박사 학위, 에든버러 대학교에서 법학박사 학위, 그리고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세 번째 명예 학위를 받았다. 홈스 시니어와 아멜리아는 이어서 파리를 방문했는데, 이곳은 그의 초기 시절에 큰 영향을 미쳤던 곳이다. 그는 화학자이자 미생물학자인 루이 파스퇴르를 만났는데, 파스퇴르의 이전 세균설 연구는 산욕열을 앓던 여성들의 사망률을 줄이는 데 도움이 되었다. 홈스 시니어는 파스퇴르를 "인류의 가장 진정한 은인 중 한 명"이라고 불렀다. 미국으로 돌아온 후, 홈스 시니어는 여행기 《유럽에서의 백일》을 출판했다.
1886년 6월, 홈스 시니어는 예일 대학교 로스쿨에서 명예 학위를 받았다. 수개월 동안 병으로 고생하며 병자 생활을 했던 그의 아내(결혼 40년 이상)는 1888년 2월 6일에 사망했다. 막내딸 아멜리아는 이듬해 짧은 병으로 사망했다. 시력이 약화되고 시대에 뒤떨어지고 있다는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홈스 시니어는 글쓰기에서 위안을 찾았다. 그는 1891년에 그의 마지막 대화체 책인 《찻잔을 앞에 두고》를 출판했다.

생애 말년, 홈스 시니어는 에머슨, 헨리 워즈워스 롱펠로, 제임스 러셀 로웰, 너새니얼 호손 등 대부분의 친구들보다 오래 살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가 말했듯이, "나는 내 자신의 생존자처럼 느껴진다. ... 우리는 삶의 항해를 시작할 때 함께 갑판에 있었다. ... 그러다 우리를 태웠던 배가 산산조각 나기 시작했다." 그의 마지막 공개석상 등장은 1893년 2월 23일 보스턴에서 열린 미국 교육 협회 리셉션이었다. 그곳에서 그는 '미국 교사들에게'라는 시를 발표했다. 한 달 후, 홈스 시니어는 하버드 총장 찰스 윌리엄 엘리엇에게 대학이 명예 문학박사 학위를 채택하고 새뮤얼 프랜시스 스미스에게 하나를 수여하는 것을 고려해야 한다고 썼지만, 학위는 수여되지 않았다.
홈스 시니어는 1894년 10월 7일 일요일 오후 잠들면서 조용히 사망했다. 그의 아들 올리버 웬들 홈스 주니어가 썼듯이, "그의 죽음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바랄 수 있는 만큼 평화로웠습니다. 그는 단순히 숨을 멈추었을 뿐입니다." 홈스 시니어의 추모 예배는 킹스 채플에서 열렸고 에드워드 에버렛 헤일이 집전했다. 홈스 시니어는 아내와 함께 매사추세츠주 케임브리지의 마운트 오번 묘지에 묻혔다.
6. 평가와 비판
동시대 문학계에서의 평가, 그의 작품과 사상이 후대에 미친 영향, 그리고 그의 사회적 견해에 대한 비판적 분석을 제공한다.
6.1. 문학 및 의학적 유산

홈스 시니어는 동료들로부터 큰 존경을 받았으며, 그의 긴 생애 동안 광범위한 국제적인 추종자들을 얻었다. 특히 그의 지성으로 주목받았으며, 미국 신학자 헨리 제임스 시니어는 그를 "내가 아는 한 지적으로 가장 활기찬 사람"이라고 불렀다. 비평가 존 G. 팔프리 또한 홈스 시니어를 칭찬하며 "천재적인 인물 ... 그의 방식은 전적으로 그 자신만의 것이며, 남자답고 꾸밈없으며, 일반적으로 편안하고 장난스러우며, 때로는 '가장 유머러스한 슬픔'으로 가라앉는다"고 언급했다.
18세기 영국에서 새뮤얼 존슨이 그랬던 것처럼, 홈스 시니어는 삶과 문학적 결과물 모두에서 그의 대화 능력으로 유명했다. 전국적인 인기를 누렸음에도 불구하고, 홈스 시니어는 보스턴 문화를 홍보했으며 종종 보스턴 중심적인 관점에서 글을 썼고, 보스턴을 "대륙의, 따라서 행성의 사고의 중심"이라고 믿었다. 그는 자신이 보스턴 지역의 가장 오래된 가문들을 언급하며 만든 용어인 보스턴 브라민으로 자주 불린다. 그가 사용한 이 용어는 좋은 가문의 구성원뿐만 아니라 지성주의도 암시했다. 그는 또한 에머슨의 『미국 학자』에 '미국 지성의 독립선언'이라는 별명을 붙였다.
그의 산욕열에 관한 에세이는 당시까지 "미국에서 의학 발전에 가장 중요한 기여"로 평가받았지만, 홈스 시니어는 주로 유머 작가이자 시인으로 가장 유명하다. 홈스 시니어의 숭배자였던 편집자이자 비평가 조지 리플리는 그를 "현대 시인 중 가장 재치 있고 독창적인 한 명"이라고 불렀다. 에머슨은 홈스 시니어가 말년에 이르러서야 시에 다시 집중하기 시작했지만, "10년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다가 마침내 위대하게 자라기 시작한 늙은 배나무처럼" 빠르게 자신의 역할을 완성했다고 언급했다.
홈스 시니어의 시는 다른 화롯가 시인들의 시와 함께 종종 학생들에게 암기하도록 요구되었다. 1890년대에 암기식 교육이 점차 사라지기 시작했지만, 이 시인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상적인 뉴잉글랜드 시인으로 굳건히 자리 잡았다. 문학 학자 로렌스 부엘은 이 시인들에 대해 "우리는 19세기만큼 그들을 높이 평가하지는 않지만, 여전히 19세기 뉴잉글랜드 운문의 주류로 간주한다"고 썼다. 또 다른 현대 학자는 "홈스 시니어는 문학 정전을 수정하려는 지속적인 움직임의 희생자"이며, "그의 작품은 화롯가 시인들 중 미국 문학 선집에 실릴 가능성이 가장 적다"고 지적한다.
홈스 시니어가 어린 시절 공부했던 매사추세츠주 앤도버의 필립스 아카데미 도서관은 그의 이름을 따서 올리버 웬들 홈스 도서관, 또는 OWHL로 명명되었다. 홈스 시니어의 개인 서재 자료-의학 논문, 에세이, 노래, 시 등을 포함-는 도서관의 특별 소장품 부서에 보관되어 있다. 1915년, 보스턴 시민들은 홈스 시니어가 자신의 서재에서 볼 수 있었을 법한 위치인 비컨 스트리트 296번지에 있는 그의 마지막 집 뒤에 추모 벤치와 해시계를 설치했다. 홈스 시니어가 예배를 드렸던 보스턴의 킹스 채플은 그를 기리는 명판을 세웠다. 명판에는 홈스 시니어가 인정한 순서대로 그의 업적이 새겨져 있다: "해부학 교수, 수필가, 그리고 시인". 그리고 호라티우스의 『시학』에서 인용한 "Miscuit Utile Dulci"("유용한 것과 즐거운 것을 섞었다")로 끝난다.
6.2. 비판과 논란
S. I. 하야카와와 하워드 맘포드 존스와 같은 비평가들은 홈스 시니어를 "문학 분야에서는 분명히 아마추어"라고 주장하며, 그의 문학 저술은 대체로 "의사의 여가에서 비롯된 성찰이자, 특정 전문적 선전을 퍼뜨리는 수단이며, 그의 사교 생활의 정수"라고 평가했다.
그는 노예제 폐지론자들을 극단적이라고 비판했음에도 불구하고, 노예제가 평화적이고 합법적으로 종식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그의 아메리카 원주민에 대한 견해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그는 원주민을 "미개한 남성성의 붉은 크레용 스케치"로 간주했으며, "백인 인종과의 관계 문제"에 대한 해결책으로 "절멸"만을 보았다. 1850년 하버드 의학대학원에서 학장으로 재직하면서 해리엇 케지아 헌트라는 여성의 입학을 고려했다는 이유로 남학생들의 비판을 받았고, 그녀는 결국 입학 신청을 철회해야 했다. 또한 1850년 마틴 델라니를 포함한 세 명의 흑인 남성 학생을 의과대학에 입학시켰을 때, 이 결정은 학생들과 교수진의 거센 반대에 부딪혔다. 60명의 학생들이 그들의 존재에 "단호히 항의한다"는 결의안에 서명했고, 이에 홈스 시니어는 흑인 학생들이 그 학기 이후에는 계속할 수 없을 것이라고 통보해야 했다. 교수 회의에서는 "인종 혼합은 학급의 많은 부분에게 불쾌하며, 학교의 이익에 해롭다"는 문구를 작성하도록 지시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은 그의 사회적 입장에 대한 비판적 시각과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7. 주요 저작 목록
- 시
- 《시》(1836년)
- 《여러 곡조의 노래》(1862년)
- 의학 및 심리학 연구
- 《사적인 전염병으로서의 산욕열》(1855년)
- 《사상과 도덕의 메커니즘》(1871년)
- 대화체 서적
- 《아침 식탁의 독재자》(1858년)
- 《아침 식탁의 교수》(1860년)
- 《아침 식탁의 시인》(1872년)
- 《찻잔을 앞에 두고》(1891년)
- 소설
- 《엘시 베너》(1861년)
- 《수호천사》(1867년)
- 《치명적인 반감》(1885년)
- 에세이
- "입체경과 스테레오그래프", 『애틀랜틱 먼슬리』, 6권 (1859년)
- "태양광선의 행동", 『애틀랜틱 먼슬리』, 8권 (1861년 7월)
- "햇빛의 활동", 『애틀랜틱 먼슬리』, 12권 (1863년 7월)
- 전기 및 여행기
- 《존 로스롭 모틀리, 회고록》(1876년)
- 《랄프 왈도 에머슨》(1884년)
- 《유럽에서의 백일》(1887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