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사이먼 브래드스트리트(세례일 Simon Bradstreet영어, 1603/4년 3월 18일 - 1697년 3월 27일)는 뉴잉글랜드의 상인, 정치인, 식민지 행정가로, 매사추세츠만 식민지의 마지막 총독을 역임했다. 1630년 윈스롭 함대를 타고 매사추세츠에 도착한 그는 식민지 정치에 거의 끊임없이 관여했지만, 1679년에야 총독이 되었다. 그는 외교 사절로 활동하고 런던의 왕실 대리인으로도 일했으며, 뉴잉글랜드 연합의 위원으로도 봉사했다. 정치적으로 온건한 입장을 취하며, 언론의 자유를 옹호하고 영국 국왕 찰스 2세가 왕좌에 복귀한 후 그의 요구를 수용해야 한다는 소수 의견을 주장하기도 했다. 브래드스트리트는 매사추세츠 공동 설립자 토머스 더들리의 딸이자 뉴잉글랜드 최초의 출판 시인인 앤 브래드스트리트와 결혼했다. 그는 토지와 해운업에 투자하는 사업가로서 활동했으며, 93세의 고령으로 사망하여 코튼 매더에 의해 "뉴잉글랜드의 네스토르"라고 불렸다. 그의 후손 중에는 저명한 법학자 올리버 웬델 홈즈 주니어, 데이비드 수터, 그리고 미국 대통령 허버트 후버, 배우 험프리 보가트와 같은 인물들이 있다.
2. 초기 생애와 배경
사이먼 브래드스트리트는 1603년/04년 3월 18일 잉글랜드 링컨셔주 호블링에서 사이먼과 마가렛 브래드스트리트 부부의 셋째 아들 중 둘째로 세례를 받았다. 그의 아버지 사이먼은 교구 교회의 목사였으며, 아일랜드의 소수 귀족 가문의 후손이었다. 그의 형 존 브래드스트리트를 통해서 조카는 초대 남작 사이먼 브래드스트리트 경이 되었다. 아버지가 목소리 큰 비국교도였기에, 어린 사이먼은 일찍이 청교도적 종교관을 습득했다.
브래드스트리트는 16세에 케임브리지 대학교 임마누엘 칼리지에 입학하여 2년간 공부했다. 그 후 1622년부터 링컨 백작인 시어도어 클린턴을 섬기며 토머스 더들리의 조수로 일했다. 브래드스트리트가 1623년부터 1624년까지 임마누엘 칼리지에 다시 다녔는지에 대해서는 다소 불확실한 점이 있다. 역사학자 벤(Venn)에 따르면, 이 시기에 사이먼 브래드스트리트라는 인물이 임마누엘에 다니며 석사 학위를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계보학자 로버트 앤더슨(Robert Anderson)은 이것이 동일 인물이 아닐 것이라고 추정한다. 브래드스트리트가 임마누엘에 재학하던 중, 존 프레스턴에 의해 워릭 백작의 아들 로버트 리치 경의 가정교사 또는 지도자로 추천받았다. 로버트 리치는 1623년 당시 12세였고, 존 프레스턴은 1622년에 임마누엘 칼리지의 학장으로 임명되었다.
더들리가 1624년 링컨셔의 보스턴으로 잠시 이사했을 때 브래드스트리트가 그의 자리를 이어받았다. 몇 년 후 더들리가 돌아오자, 브래드스트리트는 잠시 워릭 백작부인의 집사로 일했다. 1628년 브래드스트리트는 16세의 더들리 딸 앤 더들리와 결혼했다.
1628년 더들리와 링컨 백작 주변 인물들은 북아메리카에 청교도 식민지를 세우려는 목적으로 매사추세츠만 회사를 설립했다. 브래드스트리트는 1629년에 이 회사에 참여했으며, 1630년 4월 브래드스트리트 부부는 더들리 가족과 식민지 총독 존 윈스럽과 함께 매사추세츠만으로 향하는 함대에 합류했다. 그들은 그곳에서 매사추세츠만 식민지의 수도인 보스턴을 건설했다.
3. 매사추세츠만 식민지에서의 활동
보스턴에 잠시 머문 후, 브래드스트리트는 더들리 가족 근처의 뉴타운(훗날 케임브리지로 개명된 현재의 하버드 스퀘어 지역)에 첫 거주지를 마련했다. 1637년 무율법주의 논쟁 당시, 그는 앤 허친슨 재판에 참여한 치안판사 중 한 명이었고, 그녀의 식민지 추방에 찬성표를 던졌다. 1639년에는 세일럼 시내에 존 엔디컷의 토지 근처에 땅을 하사받았다. 그는 한동안 그곳에 살다가 1634년 입스위치로 이주했으며, 1648년에는 앤도버의 개척자 중 한 명이 되었다.
1666년 그의 앤도버 집은 화재로 전소되었는데, 이는 "하녀의 부주의" 때문이라고 여겨졌다. 그는 다양한 사업 이권을 가지고 있었으며, 토지 투기에 참여하고 다른 식민지 주민들과 함께 해안 무역선에 투자하기도 했다. 1660년 그는 "나라간세트 컨트리"(현재의 로드아일랜드주 남부)에 이해관계를 가진 토지 개발 회사인 애서튼 무역 회사의 주식을 매입했다. 그는 이 회사의 주요 인물 중 한 명이 되어 운영 위원회에서 활동했으며, 회사의 토지를 광고하는 전단지를 발행하기도 했다. 사망 당시 그는 식민지 전역 5개 공동체에 걸쳐 6.1 km2가 넘는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다. 또한 그는 한나(Hannah)라는 여성과 그녀의 딸 빌라(Billah)라는 두 명의 노예를 소유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알려져 있다.

브래드스트리트는 식민지 정치에 깊이 관여했다. 보스턴에서 의회가 처음 개최되었을 때, 그는 식민지 서기로 선출되었고 1644년까지 이 직책을 유지했다. 그는 정치적으로 온건한 입장을 취하여, 통치하는 행정관을 비판하는 사람들을 처벌하는 법률과 사법적 결정에 반대했다. 또한 그는 1692년 세일럼 마녀 재판으로 절정에 달했던 고향 세일럼을 휩쓴 마녀 히스테리에 대해서도 공개적으로 반대 의사를 표명했다.
그는 뉴잉글랜드 연합에서 매사추세츠를 대표하는 위원으로 수년간 봉사했다. 이 조직은 뉴잉글랜드 식민지들 간의 공동 관심사(주로 방어)를 조율하는 역할을 했다. 그는 식민지의 공공 업무를 좌우하는 평의회에서 보좌관으로 정기적으로 선출되었지만, 1678년 존 레버렛 총독 휘하에서 부총독으로 처음 선출될 때까지는 더 높은 직책에 오르지 못했다. 그는 식민지의 일부 외국 이웃에 대한 군사 행동에 반대했으며, 1640년대 아카디아 내전에 대한 공식 개입에 반대했고, 제1차 영국-네덜란드 전쟁(1652~1654) 중에는 뉴네덜란드 공격에도 반대했다.
브래드스트리트는 정착민, 다른 영국 식민지, 그리고 뉴암스테르담의 네덜란드인들과 교섭하는 등 여러 외교 임무에 파견되었다. 1650년에는 하트퍼드로 파견되어 하트퍼드 조약을 협상하여 영국 식민지와 뉴암스테르담 간의 경계를 확정했다. 이후 몇 년 동안 그는 요크와 키터리의 정착민들과 합의를 통해 이들을 매사추세츠의 사법권 아래 두었다.
1660년 찰스 2세가 잉글랜드 왕좌에 복귀한 후, 식민지 당국은 그들의 헌장 권리를 보존하는 것에 대해 다시 우려하기 시작했다. 브래드스트리트는 1661년 "그들의 특허권, 특권, 그리고 국왕에 대한 의무와 관련하여 적절하다고 여겨지는 사항들을 검토하고 논의하기 위한" 입법 위원회를 이끌었다. 이 위원회가 작성한 서한은 식민지의 헌장 권리를 재확인하고, 왕실에 대한 충성 선언도 포함했다. 브래드스트리트와 존 노턴은 이 서한을 런던에 전달할 대리인으로 선정되었다. 찰스 2세는 헌장을 갱신했지만, 자신의 동의에 조건을 붙인 서한을 대리인들에게 전달하여 매사추세츠로 돌려보냈다. 식민지는 무엇보다도 잉글랜드 성공회와 퀘이커 같은 종교적 소수자에게 종교적 관용을 확대할 것으로 기대되었다. 대리인들은 의회의 강경파로부터 혹독한 비판을 받았지만, 브래드스트리트는 국왕의 요구에 순응하는 것이 가장 안전한 길이라고 옹호했다.
국왕의 요구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는 식민지를 분열시켰다. 브래드스트리트는 식민지가 국왕의 뜻에 따라야 한다고 주장하는 온건한 "수용론자" 파벌의 일원이었다. 이 파벌은 식민지의 헌장 권리를 적극적으로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강경한 "공화주의" 파벌과의 논쟁에서 패배했으며, 공화주의 파벌은 1660년대 내내 존 엔디컷과 리처드 벨링햄 총독에 의해 주도되었다. 1660년대 후반 찰스 2세가 제2차 영국-네덜란드 전쟁과 국내 정치 문제로 분주하면서 이 문제는 1670년대 중반까지 잠잠했다. 그러나 국왕이 의회 및 종교 개혁에 대한 요구를 재개하고 강경파 치안판사들이 다시 저항하면서 식민지와 왕실 간의 관계는 악화되었다.
4. 총독 재임 및 식민지 통치

1679년 초 존 레버렛 총독이 사망하자, 부총독이었던 브래드스트리트가 그의 뒤를 이어 총독이 되었다. 레버렛은 국왕의 요구에 대한 수용에 반대했었으며, 브래드스트리트와 같은 수용론자 지도부로의 변화는 너무 늦었다. 브래드스트리트는 매사추세츠만 식민지의 원본 헌장 하의 마지막 총독이 되었다. 그의 부총독인 토머스 댄포스는 공화주의 파벌 출신이었다. 브래드스트리트의 재임 기간 동안, 국왕의 대리인 에드워드 랜돌프는 식민지에 머물며 특정 유형의 무역을 불법으로 규정한 항해법을 시행하려 했다.
랜돌프의 법 집행 시도는 브래드스트리트가 랜돌프의 요구를 수용하려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상인 계층과 이에 동조하는 치안판사들 모두로부터 강력한 저항을 받았다. 배심원들은 항해법 위반 혐의를 받은 선박에 대해 유죄를 선고하는 것을 자주 거부했으며, 한 번은 브래드스트리트가 배심원들의 판결을 바꾸기 위해 세 번이나 시도하기도 했다. 랜돌프가 항해법을 강제하려던 시도는 결국 식민지 의회로 하여금 자체적인 법 집행 기구를 마련해야 한다고 확신시켰다. 1681년 해군 사무소 설립 법안이 활발히 논의되었는데, 공화주의 당이 다수였던 대의원회는 이 아이디어에 반대했고, 온건한 치안판사들은 이를 지지했다. 최종적으로 통과된 법안은 공화주의 당의 승리였으며, 법 집행을 어렵게 만들고 보복 소송의 여지를 남겼다. 브래드스트리트는 실제로 이 법을 시행하기를 거부했고, 랜돌프는 이에 대한 공개적인 이의 제기를 발표했다. 브래드스트리트는 1682년 재선에서 승리하면서 어느 정도 자신의 입장을 옹호할 수 있었고, 이후 자신의 사법 권한을 이용하여 이 법의 효력을 더욱 약화시켰다.
랜돌프가 식민지 의회의 비협조적인 태도를 본국에 보고하겠다고 위협하자, 의회는 식민지의 주장을 펼칠 대리인들을 잉글랜드로 파견했다. 그러나 이들의 권한은 제한적이었다. 1682년 말 런던에 도착한 직후, 무역위원회는 식민지에 최후 통첩을 보냈다. 즉, 대리인들에게 헌장 수정을 협상할 수 있는 권한을 포함하여 더 넓은 권한을 부여하거나, 헌장이 무효화될 위험을 감수하라는 것이었다. 의회는 대리인들에게 강경한 입장을 취하라는 지시를 내림으로써 이에 대응했다. 1683년 시작된 법적 절차에 따라, 헌장은 1684년 10월 23일 공식적으로 무효화되었다.
4.1. 뉴잉글랜드 왕령 시기 및 총독 임시 복귀

1684년 찰스 2세 국왕은 뉴잉글랜드 왕령을 설립했다. 식민지 대리인 중 한 명이었던 브래드스트리트의 처남 조셉 더들리는 1685년 제임스 2세 국왕에 의해 뉴잉글랜드 의회 의장으로 임명되었고, 1686년 5월 식민지를 장악했다. 브래드스트리트는 더들리의 의회에 참여할 것을 제안받았으나 거절했다. 더들리는 1686년 12월 에드먼드 안드로스 경으로 교체되었다. 안드로스는 기존 토지 소유권을 무효화하고 회중교회의 재산을 잉글랜드 성공회 예배를 위해 몰수하는 등 매사추세츠에서 크게 미움받았다. 안드로스의 독단적인 통치는 왕령에 속한 다른 식민지에서도 인기가 없었다.
안드로스에 대한 반란 움직임은 1688년 12월 명예혁명 소식이 보스턴에 전해지기 전인 1689년 1월부터 이미 나타났다. 윌리엄 3세와 메리 2세가 왕좌에 오르자, 런던에 있던 매사추세츠의 대리인 인크리스 매더와 윌리엄 핍스 경은 그들에게 매사추세츠 헌장 복원을 청원했고, 무역위원회에도 청원했다. 매더는 또한 무역위원회를 설득하여 안드로스에게 혁명 소식을 알리는 것을 지연시켰다. 그는 이미 브래드스트리트에게 (혁명 이전에 준비된) 헌장이 불법적으로 무효화되었으며, 행정관들이 "사람들의 마음에 변화를 준비시켜야 한다"는 보고를 담은 서한을 보냈다. 혁명 소식은 3월 말에 일부 개인들에게 전해졌으며, 브래드스트리트는 1689년 4월 18일 보스턴에서 형성된 폭도들을 조직한 몇몇 가능한 인물 중 한 명이다. 그는 안드로스 이전의 다른 행정관들과 안드로스 의회 구성원 일부와 함께 그날 안드로스에게 공개 서한을 보내 폭동을 진압하기 위해 항복할 것을 요구했다. 캐슬 아일랜드의 안전한 곳으로 도피했던 안드로스는 항복했고, 몇 달간 감금된 후 결국 잉글랜드로 송환되었다.
안드로스 체포 후, 브래드스트리트가 의장이 된 안전위원회가 결성되었다. 이 위원회는 윌리엄과 메리에게 보스턴 식민지의 행동을 정당화하는 서한을 작성했는데, 그 내용은 윌리엄이 잉글랜드를 침공할 때 사용했던 선언문과 유사한 언어를 사용했다. 위원회는 상당히 빠르게 식민지 정부를 옛 헌장 하의 형태로 되돌리기로 결정했다. 이러한 형태로 브래드스트리트는 총독직을 다시 맡았고, 1692년까지 매년 총독으로 재선되었다. 그는 옛 통치 방식의 재도입에 반대하는 사람들에게서 식민지를 방어해야 했으며, 런던에 보낸 보고서에서 이들을 문제를 일으키는 불만 세력과 이방인으로 묘사했다. 식민지의 북부 국경은 윌리엄 왕 전쟁에 휘말려 있었고, 인디언들의 잦은 습격이 있었다. 브래드스트리트는 1690년 윌리엄 핍스 경의 아카디아와 퀘벡 원정을 승인했다.
1691년 윌리엄과 메리는 매사추세츠만 식민지를 설립하는 헌장을 발표하고, 핍스를 그 초대 총독으로 임명했다. 1692년 새로운 총독이 도착했을 때, 브래드스트리트는 핍스의 의회에 참여할 것을 제안받았으나 거절했다.
5. 개인 생활
브래드스트리트의 첫 번째 아내 앤은 앤 브래드스트리트라는 이름으로 유명한 시인이었으며, 1650년 잉글랜드에서 그녀의 시집이 출판되었다. 이 시집에는 남편에 대한 변함없는 사랑을 표현하는 시 구절들이 포함되어 있다.
제목 | 내용 (발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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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사랑하는 남편에게 (To my Dear and Loving Husband) | 둘이 하나 된 적 있다면, 분명 우리일 것입니다; 남자가 아내에게 사랑받은 적 있다면, 바로 당신일 것입니다; 아내가 남자에게 행복한 적 있다면, 여성들이여, 당신이 할 수 있다면 저와 비교해보세요. 나는 온 금광보다, 또는 동양이 가진 모든 부보다 당신의 사랑을 귀하게 여깁니다. |
앤 브래드스트리트는 1672년에 사망했다。 부부 사이에는 8명의 자녀가 있었으며, 그 중 7명이 유년기를 넘겨 생존했다. 그들의 자녀 중에는 더들리 브래드스트리트와 존 브래드스트리트가 포함된다. 1676년 브래드스트리트는 세일럼의 토머스 가드너의 아들인 조셉 가드너 대위의 미망인 앤 가드너와 재혼했다.
6. 사망

사이먼 브래드스트리트는 1697년 3월 27일, 매사추세츠주 세일럼에 있는 자택에서 9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는 세일럼의 차터 스트리트 역사 지구에 위치한 묘지에 안장되었다. 그의 사망 당시 93세는 당대 기준으로도 매우 장수한 나이였다. 이러한 이유로 코튼 매더는 그를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장수한 현자이자 지혜로운 조언자로 유명한 네스토르에 비유하여 "뉴잉글랜드의 네스토르"라고 칭했다.
7. 평가와 유산
7.1. 정치적 온건주의와 기여
사이먼 브래드스트리트는 식민지 정치에서 온건하고 합리적인 인물로 평가받는다. 그는 언론의 자유를 옹호하며, 통치자들에 대한 비판적 의견을 표명한 사람들을 처벌하는 법과 사법적 결정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했다. 특히 1692년 세일럼 마녀 재판으로 절정에 달했던 마녀 히스테리에 대해서도 공개적으로 반대 목소리를 내며, 광기에 휩싸인 사회 분위기 속에서 이성적인 시각을 유지하려 노력했다.
외교적으로는 식민지의 이익을 대변하면서도 왕실의 요구에 대한 유연한 태도를 보였다. 찰스 2세의 왕정 복고 후, 그는 식민지가 국왕의 요구를 수용해야 한다는 '수용론자' 파벌에 속하여, 강경한 '공화주의' 파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왕실과의 관계를 조화롭게 유지하려 했다. 이는 식민지의 자치권을 지키면서도 본국과의 불필요한 충돌을 피하려는 그의 외교적 노력의 일환으로 해석된다. 그의 이러한 온건한 입장은 급변하는 식민지 정치 상황에서 안정과 균형을 추구하는 데 기여했다.
7.2. 비판과 논란
사이먼 브래드스트리트는 그의 정치적 온건주의와 현명한 외교적 능력에도 불구하고, 일부 비판과 논란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특히 1637년 무율법주의 논쟁 당시, 그는 앤 허친슨의 재판에서 그녀의 식민지 추방에 찬성표를 던졌다. 이는 당시 사회의 종교적 정통주의와 자유로운 신앙 사이의 갈등을 반영하는 사건이었으나, 현대적 관점에서는 사상적 다양성에 대한 억압으로 비판될 수 있는 부분이다.
또한, 그가 한나(Hannah)라는 여성과 그녀의 딸 빌라(Billah)라는 두 명의 노예를 소유하고 있었다는 기록은 그의 유산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형성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식민지 시대의 일반적인 관행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더라도, 노예 소유는 현대 사회의 인권과 정의의 관점에서 그의 역사적 평가에 부정적인 그림자를 드리운다. 이러한 논란들은 브래드스트리트의 공과를 균형 있게 평가하는 데 있어 중요한 고려 사항이다.
7.3. 후대와 영향
사이먼 브래드스트리트는 뉴잉글랜드 역사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의 정치적 경력은 매사추세츠만 식민지의 자치와 영국 왕실 요구 사이의 복잡한 관계를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이며, 마지막 총독으로서 식민지의 전환기적 시대를 이끌었다.
그의 유산은 또한 방대한 가족 구성원을 통해 이어졌다. 특히, 그의 첫 아내 앤 브래드스트리트는 미국 식민지 시대의 저명한 시인으로, 그녀의 작품을 통해 브래드스트리트 가문은 문학사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사이먼 브래드스트리트의 후손 중에는 미국 역사에 큰 족적을 남긴 수많은 유명 인물들이 있다. 여기에는 미국 연방 대법원 대법관을 지낸 법학자 올리버 웬델 홈즈 주니어와 데이비드 수터, 제31대 미국 대통령을 역임한 허버트 후버, 그리고 할리우드의 전설적인 배우 험프리 보가트 등이 포함된다. 이처럼 그의 후손들은 다양한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사이먼 브래드스트리트의 유산을 현재까지도 이어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