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초기 생애 및 배경
에후드 바라크는 1942년 2월 12일 당시 영국 위임통치령 팔레스타인의 키부츠 미슈마르 하샤론에서 에후드 브로그(Ehud Brog)라는 이름으로 태어났다.
1.1. 출생 및 가족
그는 에스더(본명 고딘, 1914년 6월 25일 ~ 2013년 8월 12일)와 이스라엘 멘델 브로그(1910년 8월 24일 ~ 2002년 2월 8일)의 네 아들 중 장남이다. 그의 친조부모인 프리다와 레우벤 브로그는 1912년 당시 러시아 제국의 지배를 받던 리투아니아 북부 푸셸라트(Pušalotas)에서 살해당하여, 그의 아버지는 두 살 때 고아가 되었다. 바라크의 외조부모인 엘카와 슈무엘 고딘은 홀로코스트 기간 중 트레블링카 절멸수용소에서 사망했다.
바라크는 군 복무 중이던 1972년에 미래의 아내인 나바(본명 코헨, 1947년 4월 8일 티베리아스 출생)를 만났다. 그들은 미할(1970년 8월 9일생), 야엘(1974년 10월 23일생), 아낫(1981년 10월 16일생) 세 딸을 두었으며, 손주들도 있다. 바라크는 2003년 8월 나바와 이혼했으며, 2007년 7월 30일 자신의 사저에서 닐리 프라이엘(1944년 4월 25일생)과 소규모 결혼식을 올렸다.
1.2. 교육
바라크는 1968년 히브리 대학교에서 물리학과 수학 학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1978년 미국 캘리포니아주 스탠퍼드 대학교에서 공학-경제 시스템 석사 학위를 받았다.
1.3. 이름 변경
에후드 브로그는 1972년 군 복무 중 그의 가족 이름인 "브로그"를 히브리어로 "빛나다" 또는 "번개"를 의미하는 "바라크"로 히브리어화했다.
2. 군 경력
에후드 바라크는 1959년 이스라엘 방위군(IDF)에 입대하여 35년간 복무했으며, 최고 계급인 라브 알루프(중장)와 참모총장의 지위에 올랐다.


2.1. 복무 및 계급
바라크는 1959년 이스라엘 방위군에 입대하여 35년간 복무했으며, 이스라엘 군 최고 계급인 라브 알루프(중장)에 올랐다. 그는 1991년 4월 1일부터 1995년 1월 1일까지 참모총장을 역임했다.
2.2. 주요 군사 작전
그는 엘리트 특수부대 사예렛 마트칼의 코만도 대원으로서 여러 고도로 평가받는 작전들을 지휘했다. 주요 작전으로는 1972년 로드 공항에서 납치된 사베나 항공 571편의 인질들을 구출한 "이소톱 작전", 1973년 베이루트에서 PLO 요원들을 암살하기 위해 여장하고 잠입한 비밀 작전인 "청춘의 샘 작전", 그리고 1976년 우간다 엔테베 국제공항에 강제 착륙한 에어 프랑스 항공기의 인질들을 구출한 "엔테베 작전" 등이 있다. 이 작전들은 "바요네트 작전"과 함께 팔레스타인 테러 조직 검은 9월단을 해체하는 데 기여했다. 또한, 1988년 4월 16일 PLO 지도자 아부 지하드가 살해된 "튀니스 기습"을 계획하고 지휘한 인물로도 알려져 있다.
욤 키푸르 전쟁 중 바라크는 임시 전차 연대를 지휘하여 중국 농장 전투에서 큰 손실을 입고 있던 이츠하크 모르데하이가 지휘하는 890 공수대대를 구출하는 데 기여했다. 이후 그는 제401 기갑 여단과 611 "불기둥" 사단, 그리고 제252 "시나이" 사단을 지휘했으며, 이후 IDF 기획본부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또한 베이루트 포위전에도 참여하여 베이루트 국제공항에서 작전을 감독했다.
2.3. 정보 및 기획
바라크는 1983년부터 1985년까지 이스라엘 방위군 정보국(아만) 국장을 역임했으며, 1986년부터 1987년까지 중부사령부 사령관, 1987년부터 1991년까지 참모총장 대행을 지냈다.
2.4. 참모총장 재임
1991년 4월 1일부터 1995년 1월 1일까지 참모총장을 역임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제1차 오슬로 협정을 이행하고 이스라엘-요르단 평화 조약 협상에 참여했다.
2.5. 수상 및 표창
바라크는 군 복무 중 특별 공로 훈장과 용맹 및 작전 우수성에 대한 네 차례의 참모총장 표창(צל"ש הרמטכ"ל찰라쉬 하라마트칼히브리어)을 받았다. 이 다섯 개의 훈장은 그를 네헤미야 코헨과 함께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많은 훈장을 받은 군인으로 만들었다. 1992년에는 미국으로부터 레지옹 오브 메리트(Legion of Merit) 훈장(사령관급)을 받았으며, 2012년에는 다시 미국으로부터 국방부 특별 공로 훈장을 받았다.
훈장 및 표창 | 훈장 및 표창 | 훈장 및 표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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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모총장 표창 | 참모총장 표창 | 참모총장 표창 |
참모총장 표창 | 특별 공로 훈장 | 레지옹 오브 메리트 (사령관) |
6일 전쟁 리본 | 소모전 리본 | 욤 키푸르 전쟁 리본 |
제1차 레바논 전쟁 리본 |
3. 정치 경력
바라크의 정치 경력은 1995년 내무장관으로 임명되면서 시작되었다.
3.1. 정계 입문
1995년 7월 7일, 이츠하크 라빈 총리에 의해 내무장관으로 임명되었다. 1995년 11월 라빈 총리 암살 후 시몬 페레스가 새 정부를 구성했을 때, 바라크는 외무장관으로 임명되어 1995년부터 1996년까지 재직했다. 그는 1996년 노동당 명단으로 크네세트에 선출되었고, 크네세트 외교국방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다.
3.2. 노동당 대표
1996년 총선에서 페레스가 패배한 후 당내 선거를 통해 노동당 당수로 선출되었다. 1997년부터 2001년까지 노동당 대표를 지냈으며, 2007년 아미르 페레츠의 뒤를 이어 다시 노동당 대표로 선출되어 2011년까지 재임했다.
3.2.1. 총리 재임 (1999-2001)
1999년 총리 선거에서 바라크는 베냐민 네타냐후를 큰 표차로 이겼다. 그러나 그는 120석의 크네세트에서 전례 없이 17석을 얻은 극정통파 정당 샤스와 연정을 구성하기로 결정하여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샤스는 유죄 판결을 받은 지도자 아리예 데리를 축출하고 당내 부패를 "정화"하기 위한 개혁을 시행하라는 바라크의 요구에 마지못해 동의했다. 결과적으로 좌파 정당 메레츠는 교육부의 샤스 부장관에게 부여될 권한에 대해 합의에 실패하자 연정에서 탈퇴했다.


3.3. 총리 퇴임 후 활동
총리직 퇴임 후 바라크는 이스라엘을 떠나 미국 기반의 일렉트로닉 데이터 시스템즈의 고문으로 일했다. 그는 또한 "보안 관련" 업무에 중점을 둔 사모펀드 회사와 파트너십을 맺었다. 2005년 노동당 대표직 유지에 실패한 후, 바라크는 펜실베이니아의 투자 회사 SCP 프라이빗 에쿼티 파트너스의 파트너가 되었다. 그는 또한 3000.00 만 NIS 이상을 벌어들인 것으로 알려진 "에후드 바라크 리미티드"라는 회사를 설립했다.
3.4. 정치 복귀
2005년 바라크는 이스라엘 정치 복귀를 선언하고 11월 노동당 대표 경선에 출마했다. 그러나 낮은 여론조사 지지율을 고려하여 일찍이 경선에서 물러나 원로 정치가 시몬 페레스에 대한 지지를 선언했다. 페레스가 아미르 페레츠에게 패배하고 노동당을 떠난 후, 바라크는 새로 선출된 당수와의 불안정한 관계에도 불구하고 당에 남겠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그는 2006년 3월 총선에서 노동당의 크네세트 명단에 이름을 올리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바라크의 이스라엘 정치에서 중요한 역할로의 복귀 시도는 실패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페레츠의 노동당 지도부 장악력은 예상외로 흔들렸는데, 2006년 레바논 전쟁에서 국방장관으로서의 그의 성과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로 인해 큰 타격을 입었기 때문이다.
2007년 1월, 바라크는 총리 재임 기간 동안의 "실수"와 "미숙함"을 인정하는 서한을 통해 노동당 대표직을 다시 차지하기 위한 출마를 선언했다. 2007년 3월 초, 노동당 예비 선거 유권자들을 대상으로 한 여론조사에서 바라크는 페레츠를 포함한 다른 모든 경쟁자들을 앞섰다. 5월 28일 1차 투표에서 그는 39%의 득표율을 얻어 두 경쟁자보다 많았지만, 당선에는 미치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바라크는 2007년 6월 12일 2위인 아미 아얄론과 결선 투표를 치렀고, 근소한 차이로 승리했다.

3.4.1. 국방장관 재임 (2007-2013)
노동당 대표직을 되찾은 후, 바라크는 에후드 올메르트 총리의 내각 개편의 일환으로 2007년 6월 18일 국방장관으로 취임했다. 그러나 2007년 7월 1일, 바라크는 노동당 중앙위원회에서 올메르트가 2007년 9월 또는 10월까지 사임하지 않으면 노동당이 연정에서 탈퇴해야 한다는 조건을 성공적으로 관철시켰다. 당시 위노그라드 위원회는 2006년 헤즈볼라와의 분쟁에서 이스라엘 방위군과 민간 지도부의 성과에 대한 최종 보고서를 발표할 예정이었다. 앞서 발표된 위노그라드 예비 보고서는 2006년 분쟁에서 전쟁 전략의 계획, 실행, 검토를 제대로 하지 못한 것에 대한 대부분의 책임을 올메르트에게 돌렸다.
2008년 12월부터 2009년 1월까지 바라크는 국방장관으로서 이스라엘 방위군을 이끌고 가자 전쟁(Operation Cast Lead)을 지휘했다.
2009년 총선에서 노동당은 120석의 크네세트 중 13석만을 얻어 네 번째로 큰 정당이 되었다. 바라크와 다른 노동당 관계자들은 처음에는 다음 정부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밝혔으나, 일부 노동당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2009년 3월 바라크는 베냐민 네타냐후가 이끄는 연정 참여에 합의했다. 바라크는 국방장관직을 유지했다.
3.5. 정당 활동 및 재기 시도
2011년 1월, 노동당 당수 바라크는 탈당하여 독립당을 창당했으며, 이를 통해 네타냐후 정부 내에서 노동당 소속 의원들의 충성파를 유지하고 노동당 전체가 네타냐후 연정에서 이탈하는 것을 막았다. 노동당은 이전에 바라크에게 그렇게 하도록 강요하겠다고 위협한 바 있다. 바라크의 움직임 이후, 네타냐후는 이전 74석에서 66석(크네세트 120석 중)의 과반수 연정을 유지할 수 있었다.
2011년 2월, 바라크는 유엔에서 열린 홀로코스트 희생자 추모 국제 기념식에 참석했다. 바라크는 유엔 총회에서 "독립적이고, 강하며, 번성하고, 평화로운 이스라엘 국가는 죽은 자들의 복수이다"라고 말했다.
바라크의 독립당은 총선에 출마할 예정이었으나, 2012년 출마하지 않기로 결정하고 정계에서 은퇴했다. 바라크는 기둥 방어 작전 이후부터 정계 은퇴를 계획했으나 그해 말까지 연기했다.
바라크는 미국 텔레비전 인터뷰에서 자신이 이란의 입장이었다면 핵무기를 "아마도" 추구했을 것이라고 말하며, "그들이 단지 이스라엘 때문에 그렇게 한다고 자신을 속이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이 발언은 비판을 받았으며, 1998년 텔레비전 인터뷰에서 그가 팔레스타인인이었다면 아마도 테러 조직 중 하나에 가입했을 것이라고 말한 것과 비교되었다.
2023년에는 바라크가 2013년부터 2017년까지 제프리 엡스타인을 약 30차례 방문했으며 그의 전용기도 이용했고, 엡스타인을 처음 만난 것은 2003년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바라크는 어떤 잘못도 부인했다.
2019년 6월 26일, 바라크는 정계 복귀를 선언하고 2019년 9월 이스라엘 총선에서 네타냐후에게 도전하기 위해 이스라엘 민주당이라는 새 정당을 창당할 의사를 밝혔다. 이 당은 메레츠 및 다른 정당들과 함께 민주연합이라는 동맹을 결성하여 5석을 얻었으나, 바라크 자신은 크네세트에 입성하지 못했다.
4. 이념 및 정치적 입장
바라크는 팔레스타인과의 평화에 비교적 적극적인 정치인으로 평가받는다.
4.1. 평화주의 및 사회적 이슈
그는 제3차 중동 전쟁 이래 계속된 동예루살렘 점령의 종식 등을 언급하기도 했다. 2000년 7월 캠프 데이비드에서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 수반 야세르 아라파트와 회담했을 때, "클린턴 파라미터"(기독교와 이슬람교의 성지를 포함한 동예루살렘의 일부에 더해 요르단강 서안 지구의 97%와 가자 지구 전체를 팔레스타인 국가로 인정하는 안)를 받아들였으나, 아라파트가 모호한 태도를 보여 실현되지 못했다. 이로 인해 바라크는 아라파트를 "평화를 거부하는 자"로 묘사하며 이스라엘의 평화 운동을 좌절시켰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는 국방장관으로서 정착촌 정책의 최고 권한자였으며, 동예루살렘의 길로 지구에서 유대인 정착촌 확대를 추진하기도 했다. 이는 명백한 국제법 위반으로 비판받는 지점이다. 2009년 11월, 바라크는 요르단강 서안 지구의 유대인 정착촌 건설을 일시적으로 동결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대해 바라크는 요르단강 서안 지구가 "신이 부여한 땅"이라고 믿는 극우 및 카하네주의자들로부터 "서안 정착촌을 철거하려 한다면 죽일 것이다", "가족도 표적으로 삼을 것이다"와 같은 협박 편지를 받았다.
그는 최근 일부 이스라엘 랍비와 레베친들이 표명한 인종차별적 정서에 대해 비판적이었으며, 이러한 발언들이 이스라엘의 단결을 위협하고 이스라엘 사회를 "어둡고 위험한 곳"으로 이끌 수 있다고 보았다.
2011년 11월 PBS와의 인터뷰에서 바라크는 긴장이 고조되는 이란 핵 문제에 대해 "내가 이란인이었다면 아마 핵무기 개발을 했을 것이다"라고 발언했다. 또한 "아마도... 나는 그들(이란)이 이스라엘 때문에 핵 개발을 한다고 착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400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주변을 둘러보면 인도의 핵무기, 중국의 핵무기, 파키스탄의 핵무기가 있으며, 알려진 바에 따르면 이스라엘도 그것(핵무기 보유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며 이스라엘의 핵무기 보유를 인정한 것으로 해석될 수 있는 발언을 했다.
5. 개인 생활
바라크는 여가 시간에 요한 볼프강 폰 괴테와 같은 작가들의 작품을 읽는 것을 즐기며, 수년간 공부한 클래식 피아노 연주자이기도 하다. 그는 또한 크라브 마가 전문가이다.
6. 재정 자산 및 사업 활동
2015년 1월 하레츠와의 인터뷰에서 바라크는 자신의 "큰" 자본의 출처에 대해 질문을 받았다. 그는 "5채의 아파트를 사서 연결했고", "고급 고층 아파트에서 거대한 임대 아파트에 살고 있다"고 언급되었다. 바라크는 현재 연간 100.00 만 USD 이상을 벌고 있으며, 2001년부터 2007년까지도 강연과 헤지 펀드 자문을 통해 매년 100.00 만 USD 이상을 벌었다고 밝혔다. 또한 이스라엘 부동산 투자로 수백만 달러를 더 벌었다고 말했다.
인터뷰에서 바라크는 "문을 열어주는" 것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로비스트인지 질문받았다. 인터뷰어는 "최근 카자흐스탄의 독재자 누르술탄 나자르바예프와 가나 대통령을 만났고, 즉시 영접받았다"고 언급했다. 바라크는 이들 국가 원수들을 만난 것은 인정했지만, 이스라엘 및 외국 기업을 위한 국제 사업 거래에서 문을 열어주는 대가로 돈을 벌었다는 것은 부인했으며, 자신의 사업 활동에 어떤 윤리적 또는 도덕적 문제도 없다고 말했다. 그는 "민주주의의 자연스러운 과정이 끝난" 후에도 자신의 경력에서 축적한 도구들을 재정적 미래를 확보하는 데 활용하지 말라고 요구하는 것은 논리가 없다고 덧붙였다. 그의 재산이 1000.00 만 USD에서 1500.00 만 USD 사이인지 묻는 질문에 바라크는 "거기서 멀지 않다"고 답했다.
7. 평가 및 논란
에후드 바라크는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많은 훈장을 받은 군인 중 한 명으로, 그의 군사적 업적과 정치적 리더십은 긍정적으로 평가되지만, 총리 재임 기간 중의 결정과 이후의 활동에 대해서는 여러 비판과 논란이 존재한다.
7.1. 긍정적 평가
군사적으로 그는 사예렛 마트칼 특수부대 지휘관으로서 이소톱 작전, 청춘의 샘 작전, 엔테베 작전 등 여러 대담하고 성공적인 인질 구출 및 대테러 작전을 지휘하여 뛰어난 작전 능력을 입증했다. 욤 키푸르 전쟁에서는 전차 연대를 지휘하여 위기에 처한 부대를 구출하는 데 기여했다. 참모총장 재임 중에는 오슬로 협정과 이스라엘-요르단 평화 조약 협상에 참여하며 평화 구축 노력에 기여했다.
총리 재임 기간 중에는 레바논 남부에서 이스라엘군을 철수시키는 중요한 결정을 내렸으며, 이는 이스라엘의 오랜 점령을 끝내는 조치로 평가받는다. 또한 그의 재임 기간(1999-2000년) 동안 이스라엘은 높은 GDP 성장률을 기록하며 경제적 안정에 기여했다.
7.2. 비판 및 논란
바라크의 총리 재임은 여러 논란에 휩싸였다. 그는 크네세트에서 전례 없이 많은 의석을 얻은 극정통파 정당 샤스와 연정을 구성하여 좌파 지지자들의 비판을 받았다. 특히, 교육부 장관직을 샤스에 넘겨주는 문제로 인해 좌파 정당 메레츠가 연정에서 탈퇴하는 결과를 낳았다.
2000년 캠프 데이비드 정상회담에서 야세르 아라파트와의 평화 협상이 실패한 후, 바라크는 아라파트를 "평화를 거부하는 자"로 비난했지만, 이로 인해 일부 이스라엘 좌파 정치인들로부터 평화 운동을 좌절시켰다는 비판을 받았다. 또한, 회담 실패 직후 발생한 2000년 10월 폭동 당시 이스라엘 경찰의 과잉 진압으로 12명의 이스라엘 아랍인과 1명의 팔레스타인인이 사망한 사건에 대한 책임론도 제기되었다.
국방장관 재임 중에는 정착촌 정책과 관련하여 이중적인 태도를 보인다는 비판을 받았다. 그는 평화 협상에서 동예루살렘 점령 종식을 언급했지만, 동시에 동예루살렘의 길로 지구에서 유대인 정착촌 확대를 추진하여 국제법 위반 논란을 일으켰다.
그의 개인적인 발언 또한 논란을 야기했다. 1998년에는 자신이 팔레스타인인이었다면 테러 조직에 가입했을 것이라고 말했으며, 2011년에는 이란의 핵무기 개발에 대해 "내가 이란인이었다면 아마 핵무기 개발을 했을 것"이라고 발언하여 비판을 받았다.
최근에는 2013년부터 2017년까지 수십 차례 제프리 엡스타인을 방문하고 그의 전용기를 이용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윤리적 논란에 휩싸였다. 비록 바라크는 어떤 잘못도 부인했지만, 그의 재정 자산 형성 과정과 관련하여 "문을 열어주는" 로비 활동 의혹 또한 제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