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에리히 바우어(Hermann Erich Bauer, Hermann Erich Bauer헤르만 에리히 바우어독일어)는 나치 독일의 친위대(SS) 하급 지휘관이자 홀로코스트의 주요 가해자이다. 그는 T4 작전에 가담했으며, 이후 라인하르트 작전의 일환으로 소비보르 절멸 수용소에서 가스실 운영자("가스 마이스터")로 활동하며 수많은 사람을 학살하는 데 직접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제2차 세계 대전 후인 1950년 반인도적 범죄로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이후 종신형으로 감형되어 1980년 사망할 때까지 투옥되었다. 이 문서는 홀로코스트 가해자로서 그의 생애, 나치 잔혹 행위에서의 구체적인 역할, 그리고 그에 따른 법적 처벌 과정을 상세히 다룬다.
2. 초기 생애 및 활동
2.1. 성장 배경 및 초기 경력
에리히 바우어는 1900년 3월 26일 독일 제국의 베를린에서 태어났다. 그는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여 군인으로 복무했으며, 프랑스군에 의해 전쟁 포로로 붙잡히기도 했다. 독일로 돌아온 후, 바우어는 철모단(Der Stahlhelm)에 가입하여 활동했고, 이후 전차 차장으로 일하며 생계를 유지했다.
2.2. 나치당 및 SS 입당
1933년 나치당(NSDAP)이 정권을 장악한 후, 에리히 바우어는 나치당에 입당했으며, 동시에 돌격대(SA)의 대원이 되었다. 이후 그는 친위대(SS)에도 입대하며 나치 조직 내에서 활동을 시작했다.

3. 나치 잔혹 행위 가담
에리히 바우어는 나치 독일의 조직적인 절멸 프로그램에 직접적으로 가담하여 반인도적 범죄를 저질렀다. 그의 잔혹 행위는 특히 T4 작전과 소비보르 절멸 수용소에서의 역할에서 두드러진다.
3.1. T4 작전(안락사 프로그램)
1940년, 바우어는 나치의 T4 작전에 배정되었다. 이 작전은 기관에 수용된 신체 및 정신 장애인들을 가스 살해 및 치사 주사를 통해 살해하는 프로그램이었다. 초기에는 병원이나 가정에서 사람들을 수집하고 운송하는 운전사로 일했지만, 그는 빠르게 승진했다. 에리히 바우어는 자신의 첫 번째 대량 살인 중 하나에 대해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자동차 배기통이 수용소의 벽돌로 막힌 실험실과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몇몇 환자들이 방에 갇혔고, 저는 자동차 시동을 걸었습니다. 8분 만에 환자들은 사망했습니다."
3.2. 소비보르 절멸 수용소에서의 역할
1942년 초, 바우어는 폴란드 루블린의 친위대 및 경찰 지도자 오딜로 글로보츠니크의 사무실로 전임되었다. 그는 친위대 제복을 지급받고 친위대 상사(SS-Oberscharführer)로 승진했다. 1942년 4월, 그는 소비보르 절멸 수용소로 파견되었다. 그는 그곳에서 1943년 10월 죄수들의 봉기 이후 수용소가 해체되는 1943년 12월까지 근무했다.
소비보르에서 바우어는 수용소의 가스실을 담당했다. 당시 유대인들은 그를 "목욕탕 마이스터"(Badmeister바트마이스터독일어)라고 불렀다. 전쟁 후에는 생존자들에 의해 "가스 마이스터"(Gasmeister가스마이스터독일어)로 불리게 되었다. 그는 키가 작고 땅딸막한 체구였으며, 상습적인 음주가로 알려져 있었다. 방에는 개인 바(bar)를 가지고 있었다. 다른 친위대원들이 깔끔하게 옷을 입었던 것과 달리, 바우어는 항상 지저분하고 단정치 못했으며, 술과 염소 냄새를 풍겼다. 그의 방 벽에는 자신과 가족이 총통(Führer)과 함께 찍은 사진이 걸려 있었다고 한다. 희생자들이 사망하는 데는 최대 30분까지 걸렸으며, 친위대는 죽어가는 자들의 비명 소리를 덮기 위해 거위 무리를 길렀다.
3.3. 소비보르 봉기 발생
1943년 10월 14일, 소비보르 봉기가 일어난 날, 바우어는 예기치 않게 헤움으로 보급품을 구하러 나섰다. 봉기 지도자 알렉산드르 페체르스키가 작성한 친위대 암살 "사망자 명단"에서 바우어가 최우선 대상이었기 때문에, 저항 세력은 봉기를 거의 연기할 뻔했다. 그러나 바우어가 예상보다 일찍 헤움에서 돌아오면서 봉기는 계획보다 일찍 시작되어야 했다. 그가 친위대 상사 루돌프 베크만이 사망한 것을 발견했을 때, 바우어는 자신의 트럭에서 짐을 내리던 유대인 죄수 두 명에게 총격을 가했다. 이 총소리가 페체르스키로 하여금 봉기를 조기에 시작하게 만들었다.
4. 전후 체포 및 법적 절차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에리히 바우어는 연합군에 의해 체포되었고, 이후 뜻밖의 재인식으로 인해 재구금되어 법적 절차를 밟게 되었다.
4.1. 체포 및 재구금
전쟁이 끝난 후, 바우어는 오스트리아에서 미군에 의해 체포되어 1946년까지 포로수용소에 수용되었다. 얼마 후 그는 베를린으로 돌아와 전쟁 잔해를 치우는 노동자로 일했다. 1949년, 그는 베를린 크로이츠베르크의 한 박람회장에서 우연히 소비보르 생존자인 새뮤얼 레러와 에스더 라아프에게 발견되면서 체포되었다. 라아프가 바우어에게 대면했을 때, 전 친위대원이었던 바우어는 "당신이 아직도 살아있다니 믿을 수 없군!"이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그는 곧 체포되었고, 다음 해 그의 재판이 시작되었다.
4.2. 재판 및 유죄 판결
재판 과정에서 바우어는 자신이 소비보르에서 단지 트럭 운전사로 일했으며, 수용소 수감자와 독일 및 우크라이나인 경비대에게 필요한 물품을 수집했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소비보르에서의 대량 학살에 대해 알고 있었음을 인정했지만, 결코 그러한 행위에 참여하거나 잔혹 행위를 저지르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그의 주요 증인이었던 전 소비보르 경비원인 친위대 상사 후베르트 고메르스키와 친위대 하급돌격지도자 요한 클리어는 그의 변호에 증언했다.
그러나 법원은 소비보르에서 탈출한 네 명의 유대인 증인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바우어에게 유죄를 선고했다. 이 증인들은 바우어를 전 소비보르 "가스 마이스터"로 지목했으며, 그는 수용소 내 가스실을 운영했을 뿐만 아니라, 총격에 의한 대량 처형에도 가담했다고 증언했다. 또한 그들은 바우어가 수감자들과 가스실로 향하는 희생자들에게 특히 악랄하고 무작위적인 잔혹 행위를 저질렀다고 진술했다.
1950년 5월 8일, 베를린 모아비트의 지방 법원(Schwurgericht)은 바우어에게 반인도적 범죄 혐의로 사형을 선고했다. 그러나 당시 서독에서는 사형이 폐지된 상태였으므로, 바우어의 형량은 종신형으로 감형되었다.
5. 투옥 및 사망
바우어는 베를린의 알트모아비트 교도소에서 21년간 복역한 후, 테겔 교도소로 이감되었다. 그는 투옥 기간 동안 소비보르에서의 대량 학살 참여 사실을 인정했으며, 소비보르 재판과 같은 재판에서 전 친위대 동료들에게 불리한 증언을 하기도 했다. 에리히 바우어는 1980년 테겔 교도소에서 사망했다.
6. 역사적 평가 및 미디어 묘사
에리히 바우어는 홀로코스트의 핵심적인 가해자 중 한 명으로, 나치 절멸 기구 내에서 그의 역할은 비판적으로 평가되고 있다.
6.1. 가해자로서의 역할
에리히 바우어는 나치 독일의 체계적인 학살 정책을 직접적으로 실행하는 데 기여한 인물이다. 그의 T4 작전 가담은 장애인들을 대상으로 한 나치 정권의 첫 번째 조직적인 대량 살해 시도에 동참했음을 보여준다. 특히 소비보르 절멸 수용소에서 "가스 마이스터"로서 가스실 운영을 책임지고, 수많은 유대인과 롬인(집시)을 학살하는 데 직접적인 역할을 수행한 것은 그의 잔혹성과 반인도적 범죄에 대한 명백한 증거이다. 그의 행동은 당시 나치 정권이 인간의 존엄성을 얼마나 철저히 유린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로 남아있다.
6.2. 미디어에서의 묘사
에리히 바우어는 홀로코스트를 다룬 여러 작품에서 묘사되었다. 1987년에 제작된 영국 영화 "탈출전선 소보비르로부터의 탈출(Escape from Sobibor)"에서는 배우 클라우스 그륀베르크가 바우어 역을 연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