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초기 생애와 교육
에른스트 비버슈타인은 1899년 2월 15일, `Ernst Szymanowski에른스트 시마노프스키독일어`라는 이름으로 `베스트팔렌주`의 `힐첸바흐`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뮐하임`에서 초등 교육을 받았다. 그는 1917년 3월부터 1919년까지 `제1차 세계 대전`에 병사로 참전하였다. 전역 후에는 1919년 3월부터 1921년까지 `신학`을 공부했으며, 1924년 12월 28일 `개신교` `목사`가 되었다. 1935년에는 `Reichskirchenministerium국가교회부독일어`에 들어갔으며, 이후 `제국보안본부`(`Reichssicherheitshauptamt라이히스지헤르하이트하우프트암트독일어`)로 전근되었다.
2. 나치 정권 활동
비버슈타인은 1926년에 `나치당`에 입당하였고, 1936년 9월 13일에는 `SS`에 입대하였다. 그의 친위대 대원 번호는 272692였다. 친위대에 입대한 후 그는 `SD`에 배속되었다. 1940년 3월부터 그 해 10월까지는 다시 군인으로 복무했으며, 이 기간 동안 `서부 전선`에서 활동하기도 하였다. 1941년 6월 1일, 비버슈타인은 `폴란드`의 `오폴레`에 위치한 `게슈타포` 사무소의 국장이 되었다. 이곳에서 그는 `유대인`들의 `강제 이송`에 연루되어 공모하였다. 같은 해, 그는 자신의 성을 `시마노프스키`에서 이전의 성으로 알려진 `비버슈타인`으로 변경하였다.
2.1. 특수작전특공대 지휘 및 전쟁 범죄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의 암살 이후인 1942년 6월, 비버슈타인은 `특수작전집단 C`의 하위 부대인 `Einsatzkommando 6제6특수작전특공대독일어`의 지휘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1943년까지 이 부대를 지휘하였다. 비버슈타인의 지휘 아래 `제6특수작전특공대`는 약 2,000명에서 3,000명에 달하는 사람들을 살해했으며, 이 중에는 다수의 `유대인`이 포함되어 있었다.
특히, 그는 `로스토프나도누`에서 약 50명에서 60명의 사람들을 학살하는 과정을 직접 감독한 것으로 드러났다. 희생자들은 귀중품과 옷을 빼앗긴 채 `독가스`를 통해 살해되었고, 시신은 `집단 무덤`에 버려졌다. 또한 그는 희생자들이 구덩이 가장자리에 무릎을 꿇고 `기관단총`으로 살해되는 다른 형태의 학살 현장에도 직접 참석하였다.
3. 뉘른베르크 재판과 전후 삶
전후 비버슈타인은 `뉘른베르크 재판`의 일환으로 진행된 `특수작전집단 재판`의 피고인이 되었다. 그의 재판은 1947년 9월에 시작되어 1948년 4월 9일에 종결되었다. 기소 당시 그는 다른 모든 피고인들과 마찬가지로 모든 혐의에 대해 무죄를 주장하였다. `제6특수작전특공대`는 약 2,000명에서 3,000명을 처형한 혐의로 기소되었다. 재판 과정에서 비버슈타인이 `로스토프나도누`에서 약 50명에서 60명에 달하는 사람들의 처형을 직접 감독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희생자들은 귀중품을 빼앗기고 옷이 벗겨진 채 `독가스`로 살해되었으며, `대량 무덤`에 유기되었다. 또한 희생자들이 구덩이 가장자리에 무릎을 꿇고 `기관단총`으로 살해되는 처형에도 그가 입회한 사실이 드러났다.
비버슈타인은 결국 유죄 판결을 받고 `교수형`에 처하는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의 형은 `Peck Panel펙 패널영어`에 의해 재검토되었고, 1951년에는 `종신형`으로 감형되었다. 비버슈타인은 여러 차례 `가석방`을 거부당했다. 1958년, `독일 연방외무부`는 당시 `란츠베르크 교도소`에 수감 중이던 네 명의 재소자(비버슈타인 포함)를 대신하여 가석방 신청서를 제출했다. 비버슈타인에 대한 가석방은 거부되었지만, 이사회는 그와 다른 세 명의 종신형을 복역 기간으로 감형하는 데 만장일치로 찬성하였다. 감형은 1958년 5월 6일에 공식화되었고, 비버슈타인은 사흘 뒤인 5월 9일에 석방되었다. 그는 일시적으로 `성직자`로 복귀했으며, 1986년에 `노이뮌스터`에서 사망하였다.
4. 대중문화 속 묘사
에른스트 비버슈타인은 1978년 `NBC`에서 방영된 `홀로코스트` (`Holocaust영어`) `텔레비전 미니시리즈`에서 `에드워드 하드윅`에 의해 연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