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Overview

에르네스토 페레스바야다레스 곤살레스레비야(Ernesto Pérez Balladares González-Revilla스페인어, 1946년 6월 29일 출생), 별명 엘 토로(El Toro스페인어, "황소"라는 뜻)는 파나마의 정치인이자 전직 은행가로, 1994년부터 1999년까지 파나마의 대통령을 역임했습니다. 그는 미국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군부 통치자 오마르 토리호스 정권에서 경제재정부 장관을 지냈고, 1989년에는 마누엘 노리에가의 지원을 받은 대통령 후보인 카를로스 두케의 선거 운동 본부장을 맡기도 했습니다.
1994년 민주혁명당(PRD) 후보로 출마하여 아르눌피스타당 후보 미레야 모스코소 및 살사 가수 루벤 블레이즈와의 삼파전에서 승리하며 대통령에 당선되었습니다. 그의 재임 기간은 친자유시장 정책과 정부 서비스 민영화, 특히 전기 및 통신 회사 민영화로 특징지어집니다. 또한, 그는 노리에가 시대의 많은 인사들을 복권시키고, 기예르모 엔다라 전 행정부보다 미국과의 긴밀한 동맹을 모색했습니다. 재선을 위한 헌법 개정 국민투표가 부결된 후, 1999년 미레야 모스코소에게 자리를 넘겨주었습니다.
퇴임 후, 페레스바야다레스는 재임 중 발생한 부패 혐의로 2009년 검찰 조사를 받기 시작했습니다. 이듬해에는 파나마 전직 대통령으로는 처음으로 가택 연금되었으며, 2010년 10월에는 자금 세탁 혐의로 기소되었습니다. 하지만 2011년 4월 판사가 이 혐의를 기각했습니다. 2012년 2월에는 감사관 앨빈 위든을 마약 범죄자라고 비방한 혐의로 명예훼손 유죄 판결을 받아 벌금 또는 징역형을 선고받기도 했습니다.
2. Early Life and Education
에르네스토 페레스바야다레스는 1946년 6월 29일에 태어났으며, 미국에서 고등 교육을 받았습니다.
2.1. Birth and Childhood
에르네스토 페레스바야다레스는 1946년 6월 29일, 파나마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본명은 에르네스토 페레스바야다레스 곤살레스레비야이며, "황소"라는 뜻의 '엘 토로'라는 별명으로도 불렸습니다.
2.2. Education
그는 미국에서 학업을 계속하여 노터데임 대학교와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와튼 스쿨에서 각각 석사 학위를 취득했습니다. 이러한 교육 배경은 그의 이후 경력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3. Early Career and Political Beginners
페레스바야다레스는 대통령이 되기 전 은행가로서의 경력을 쌓았으며, 오마르 토리호스 군부 정권 하에서 공직을 시작하며 정치에 발을 들였습니다.
3.1. Banking Career
1971년부터 1975년까지 페레스바야다레스는 파나마 및 중앙아메리카 시티은행의 신용 담당관으로 일하며 은행가로서의 경력을 쌓았습니다.
3.2. Roles Under Omar Torrijos
은행가 경력을 마친 후, 그는 군부 통치자 오마르 토리호스 정권에서 경제재정부 장관을 역임하며 정부 내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3.3. Founding the Democratic Revolutionary Party and Early Roles
1979년 3월, 페레스바야다레스는 민주혁명당(Democratic Revolutionary Party, PRD영어)의 공동 창립자 중 한 명이었습니다. 그는 1982년에 당의 서기로 선출되며 당내에서 주요 직책을 맡았습니다. 그러나 1984년, 그는 새로운 군부 지도자인 마누엘 노리에가와 충돌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몇 달 동안 스페인에서 망명 생활을 보냈습니다.
3.4. 1989 Presidential Election Campaign
페레스바야다레스는 이후 노리에가가 지지한 1989년 대통령 선거 후보인 카를로스 두케의 선거 운동 본부장을 맡았습니다. 노리에가의 통치 기간 동안 파나마의 대통령직은 "일회용"이라는 의미로 "크리넥스 대통령"이라고 불리는 일련의 인물들에 의해 유지되었습니다. 국제 옵서버들은 야당 후보인 기예르모 엔다라가 3대 1의 차이로 앞서고 있다고 보고했으나, 노리에가 정부는 개표가 완료되기 전에 결과를 무효화했습니다.
1989년 12월 미국의 파나마 침공 중, 엔다라는 선거의 승자로 인정받고 파나마의 차기 대통령으로 취임했습니다. 침공 당시, 페레스바야다레스는 노리에가와의 연관성 때문에 미군에 의해 잠시 구금되고 심문을 받았으나, 이후 석방되었습니다.
4. Presidential Candidacy and Election
페레스바야다레스는 1994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며 파나마의 최고 지도자 자리에 올랐습니다.
4.1. 1994 Presidential Election
페레스바야다레스는 1994년 대통령 선거에 민주혁명당 후보로 출마했습니다. 그는 아르눌피스타당의 미레야 모스코소와 당시 파파 에고로 당의 당수였던 살사 가수 루벤 블레이즈와 경쟁했습니다. 그의 상대 후보들은 그와 노리에가의 관계를 강조하며 두 사람이 함께 찍은 사진을 방송에 내보냈습니다. 페레스바야다레스는 노리에가와의 연관성을 부인하며 현재의 민주혁명당이 노리에가의 정책과는 "정반대"라고 주장했습니다. 대신 그는 국민적 영웅으로 존경받던 오마르 토리호스의 후계자임을 자처하며 자신을 포지셔닝했습니다. 한편, 현직 아르눌피스타당은 엔다라 정부의 무능과 부패에 대한 불만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결국 그는 득표율 33%로 선거에서 승리했으며, 모스코소는 29%, 블레이즈는 17%를 득표했습니다.
5. Presidency (1994-1999)
페레스바야다레스는 1994년부터 1999년까지 파나마 대통령으로 재임하면서 친자유시장 정책을 추진하고 국내외적으로 여러 중요한 결정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그의 재임 기간 동안 논란과 비판에 직면하기도 했습니다.
5.1. Economic Policies and Reforms
페레스바야다레스 정부는 친자유시장 정책을 특징으로 했습니다. 그는 내각에 여러 자유시장 경제학자들을 포함시켰습니다. 그의 통치 하에 전력 회사와 통신 회사 모두 민영화되었고, 1997년에는 파나마가 세계무역기구(WTO)에 가입했습니다. 1995년, 그는 파나마의 노동법을 개혁했는데, 이 조치는 49개 노조의 반발을 샀고 그의 지지율 하락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5.2. Domestic Administration and Controversies
페레스바야다레스는 논란이 많았던 몇몇 국내 정책을 펼쳤습니다. 그는 마누엘 노리에가의 준군사 조직이었던 존엄대대에 미지급금 3500.00 만 USD를 지급했으며, 국가의 지속적인 빈곤에도 불구하고 내각 구성원들의 급여를 두 배로 인상했습니다.
또한 그는 노리에가 정권의 여러 전직 관리들을 정부에 복권시켰는데, 여기에는 노리에가 통치 기간 동안 정치범 고문을 도왔다는 혐의를 받았던 주택부 장관과 그의 제1부통령인 토마스 알타미라노 두케가 포함되었습니다. 페레스바야다레스는 궁극적으로 노리에가 시대에 저지른 범죄에 대해 200명 이상을 사면하며 이를 국가적 화해를 위한 조치라고 칭했습니다.
5.3. Foreign Relations
페레스바야다레스는 미국과의 관계를 더욱 긴밀히 구축했습니다. 그는 빌 클린턴 대통령과 합의하여 기예르모 엔다라 전 대통령이 수용을 거부했던 쿠바 보트 피플 1만 명을 미국 군사 기지에 수용하는 데 동의했습니다. 또한 협상된 합의의 일환으로 아이티의 전 군부 통치자 라울 세드라스에게 망명을 제공했습니다. 페레스바야다레스는 또한 미국의 마약 퇴치 노력에 동참하고 자금 세탁을 방지하기 위한 새로운 법안을 통과시키겠다고 약속했습니다.
5.4. Minera Petaquilla Concession Controversy
1997년, 에르네스토 페레스바야다레스 대통령 재임 기간 동안 파나마 국회는 국가와 미네라 페타키야 S.A. (이후 미네라 파나마 S.A.) 간의 논란이 많은 광산 채굴권 계약을 승인하는 법률 제9호를 통과시켰습니다. 이 30년 계약은 코클레 지방의 1.36 만 ha 토지 내에서 구리 및 기타 귀금속을 탐사, 채굴, 개발, 가공, 정제, 운송, 판매 및 마케팅할 수 있는 독점권을 미네라 파나마에 부여했습니다.
비판자들은 이 불균형한 계약이 파나마의 광물 자원 주권을 침해하고, 장기적인 영향에 대한 예측 없이 국유 자원에 대한 과도한 통제권을 민간 기업에 넘겨주었다고 주장했습니다. 계약 승인 과정에서 부적절한 영향력 행사나 부패가 있었다는 의혹도 제기되었습니다.
2017년 12월, 파나마 대법원은 이 1997년 법률과 계약이 위헌이라고 판결했습니다. 이는 법적 소송이 제기되어 계약의 합법성과 페레스바야다레스가 그러한 합의를 중개할 권한에 의문이 제기된 결과였습니다. 대법원의 판결은 2021년 6월 다양한 항소가 기각된 후 확정되었습니다.
2022년 12월, 파나마 관보 제29685호는 광물 자원국(National Directorate of Mineral Resources)의 결의안 제2022-234호를 게재하여 미네라 파나마에게 광산 활동을 중단하고 운영을 안전하게 보존하기 위한 계획을 제출할 것을 명령했습니다. 이는 2017년 판결 이후 미네라 파나마가 유효한 채굴권 계약을 더 이상 가지고 있지 않으므로, 광산 프로젝트, 근로자 또는 환경에 해를 끼칠 수 있는 손상을 피하고 조건을 시정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 결의안은 정부가 양측이 수용 가능한 새로운 계약을 협상하려는 노력이 실패했음을 강조합니다.
5.5. Media Freedom and Governance Issues
1996년 파나마 신문 "라 프렌사"에서 일하던 페루인 기자 구스타보 고리티는 콜롬비아의 칼리 카르텔 요원이 페레스바야다레스의 대통령 선거 운동에 5.10 만 USD를 기부했다고 보도했습니다. 페레스바야다레스는 처음에 명예훼손으로 고소하겠다고 위협하며 이 보도를 "언론 테러"라고 불렀지만, 나중에는 보도가 정확했음을 인정하며 "아마도 내 인생에서 처음으로 내 말을 삼켜야 했던 순간"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다음 해 고리티의 취업 비자가 만료되었을 때 파나마 정부는 비자 갱신을 거부했고, 이는 국제 언론 비정부기구와 국내 야당으로부터 거센 비난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압력에 못 이겨 페레스바야다레스 정부는 결국 물러섰고, 고리티의 비자는 갱신되었습니다.
1998년, 페레스바야다레스는 헌법을 개정하여 대통령이 연속해서 두 번째 임기를 수행할 수 있도록 하는 국민투표를 조직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개혁을 완료하기 위해 추가 임기가 필요하다고 주장했습니다. (파나마 헌법은 전직 대통령이 두 번의 연속 임기를 쉬고 난 후에야 재선에 도전할 수 있도록 허용합니다.) 민주혁명당의 막대한 선거 비용 지출에도 불구하고, 이 제안은 거의 2대 1의 차이로 부결되었습니다. "이코노미스트"지는 이 결과를 "파나마의 민주주의가 많은 이들이 감히 예상했던 것보다 더 회복력이 강함을 증명했다"고 평가했습니다. 페레스바야다레스는 또한 "폭력 시위를 선동하는" 국내외 언론인에 대한 처벌을 허용하고, 군복이나 부츠 착용을 금지하는 헌법 개정안을 제안하기도 했습니다.
5.6. End of Term and Transition
페레스바야다레스는 재선에 출마할 자격이 없었기 때문에, 민주혁명당은 결국 오마르 토리호스의 아들인 마르틴 토리호스를 1999년 대통령 선거 후보로 지명했습니다. 그러나 마르틴 토리호스는 아르눌피스타당 후보인 미레야 모스코소에게 패배했습니다.
페레스바야다레스의 대통령 임기 마지막 주에, 아르눌피스타당과 모스코소 당선인은 그의 행정부가 정부 자산 매각 대금을 불법적으로 사용하고, 정치적 동맹에게 막판 계약을 체결해주었으며, 미국에 불법 입국하려는 아시아인들에게 비자를 판매했다고 비난했습니다. 비판자들은 또한 페레스바야다레스가 2000년 1월 1일부터 파나마 운하를 감독하게 될 새로운 파나마 운하청의 직원들을 자신의 사업 동료들과 "측근"들로 채웠다고 비난했습니다.
6. Post-Presidency Legal Issues
대통령 퇴임 후, 에르네스토 페레스바야다레스는 다양한 부패 혐의와 법적 문제에 직면했습니다.
6.1. Corruption Allegations and Investigations
1999년 11월, 페레스바야다레스가 중국 이민자들에게 미국 비자를 불법적으로 판매한 혐의에 연루되었다는 주장이 제기된 후, 미국은 그의 관광 비자를 취소했습니다.
파나마 정부는 2009년 9월 전직 대통령에 대한 자금 세탁 혐의 수사를 시작했지만, 초기에는 이러한 주장을 증명할 충분한 증거가 확보되지 않았습니다.
2010년 1월 14일, 그는 럭키 게임스 S.A. 카지노로부터 돈을 받았다는 혐의로 가택 연금되었습니다. 이는 파나마 전직 대통령이 체포된 첫 사례였습니다. 4월에는 그의 회사인 셸프 홀딩스 주식회사(Shelf Holding Inc.)의 은행 계좌가 동결되었고, 페레스바야다레스는 페루 여행 후 여권을 반납해야 했습니다. 2010년 10월, 지방 검사 호세 아유 프라도는 페레스바야다레스를 자금 세탁 혐의로 기소할 충분한 증거가 있다고 발표했습니다. 2011년 4월 11일 이 사건에 대한 예비 심리가 열렸고, 2주 후 판사가 그에 대한 혐의를 기각했습니다. 2012년 12월, 아유 프라도는 대법관으로 지명되었고, 페레스바야다레스는 트위터를 통해 이 임명이 자신을 박해한 대가라고 주장했습니다.
6.2. Slander Conviction
페레스바야다레스는 감사관 앨빈 위든을 마약 범죄자라고 부르며 명예훼손한 혐의로 기소되었습니다. 2012년 2월 17일, 그는 유죄 판결을 받고 3000 USD의 벌금 또는 1년 징역형을 선고받았습니다.
7. Personal Life
에르네스토 페레스바야다레스는 도라 보이드와 결혼했으며, 그녀와의 사이에서 세 명의 딸을 두었습니다.
8. Legacy and Evaluation
에르네스토 페레스바야다레스의 대통령 재임 기간(1994-1999)은 파나마에 상당한 변화를 가져왔으며, 그의 유산은 긍정적인 평가와 함께 여러 논란에 휩싸여 있습니다. 경제적으로 그는 자유 시장 원칙을 적극적으로 도입하여 전기 및 통신 회사 민영화를 추진하고, 1997년 파나마의 세계무역기구(WTO) 가입을 이끌었습니다. 이러한 개혁은 파나마 경제의 현대화에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또한 그는 미국과의 관계 개선을 위해 노력하며 쿠바 난민 수용과 아이티 전 군부 통치자 망명 제공 등 외교적 협력을 강화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국내 행정은 여러 비판을 받았습니다. 특히 마누엘 노리에가 군부 독재 시절의 인사들을 복권시키고 사면한 조치는 "국가적 화해"라는 명목에도 불구하고 논란을 야기했습니다. 또한 노리에가의 준군사 조직인 존엄대대에 미지급금을 지급하고, 국가의 빈곤 상황에도 불구하고 내각 급여를 인상한 것은 공공의 비판에 직면했습니다.
언론의 자유 측면에서도 그의 행정부는 비판을 받았습니다. 콜롬비아 칼리 카르텔로부터 선거 자금을 받았다는 언론 보도를 처음에는 부정했으나 나중에 시인했으며, 관련 보도를 한 기자의 비자 갱신을 거부하려 했던 시도는 국제적인 비난을 받았습니다. 재선을 위해 헌법 개정을 추진했으나 국민투표에서 압도적으로 부결된 사건은 파나마 민주주의의 회복력을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되기도 했습니다.
퇴임 후에는 비자 불법 판매 의혹, 자금 세탁 혐의 등으로 법적 문제에 휘말렸으며, 이는 파나마 전직 대통령으로서는 처음으로 가택 연금되는 상황으로 이어졌습니다. 이러한 법적 문제는 그의 공적 이미지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전반적으로 페레스바야다레스는 경제 개혁을 통해 파나마의 국제적 위상을 높이려 했지만, 그의 권력 유지 시도와 과거 군부 정권과의 연결고리는 그의 역사적 평가에서 지속적인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9. Election History
에르네스토 페레스바야다레스가 출마했던 주요 선거 결과는 다음과 같습니다.
선거명 | 직책명 | 대수 | 정당 | 득표율 | 득표수 | 결과 | 당락 |
---|---|---|---|---|---|---|---|
1989년 선거 | 파나마 제1부통령 | -대 | 민주혁명당 | 28.38% | 188,914표 | 2위 | 낙선 |
1994년 선거 | 파나마의 대통령 | 28대 | 민주혁명당 | 33.30% | 355,307표 | 1위 | 당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