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어린 시절과 성장 배경
에나쓰 유타카는 복잡한 가정 환경 속에서 성장했으며, 어린 시절의 경험은 그의 야구 인생에 큰 영향을 미쳤다.
1.1. 출생과 가족사
에나쓰 유타카는 1948년 5월 15일 나라현 요시노군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는 가고시마현 출신으로, 오사카 대공습을 피해 나라현 요시노군으로 피난 와서 에나쓰의 아버지와 만나 그를 낳았다. 그러나 에나쓰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부모는 이혼했고, 아버지는 실종되었다. 에나쓰는 이 시기를 전혀 기억하지 못하며, 어머니로부터 "아버지는 이미 돌아가셨거나 헤어졌다"는 말을 들으며 자랐다.
그의 어머니에게 에나쓰는 세 번째 아들이었으며, 14세 위인 장남과 7세 위인 차남을 포함해 세 형제의 아버지가 모두 다른 복잡한 가정 환경이었다. '에나쓰'라는 성도 어머니 쪽의 성씨였으며, 미나미큐슈에 흔한 성씨로 알려져 있다. 어머니는 에나쓰에게 "선조를 거슬러 올라가면 사쓰마번의 가로에 이른다"고 말하기도 했다. 또한 기리시마 주조를 창업한 사람이 에나쓰의 조부라고 알려져 있다.
에나쓰는 생후 약 6개월 만에 어머니의 고향인 가고시마현 히오키군 이치키정(현 이치키쿠시키노시)으로 이사하여 5년간을 보냈다. 이후 어머니와 두 형과 함께 효고현 아마가사키시로 이사했으며, 아마가사키 시립 소노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 졸업 때까지 아마가사키에서 성장했다.
1.2. 학창 시절과 아마추어 야구
어린 시절 에나쓰는 동네 아이들과 허술한 도구로 야구를 즐겼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장남에게서 왼손잡이용 글러브를 선물 받으며 "너는 왼손으로 해라"는 말을 듣고, 오른손잡이였음에도 불구하고 왼손 투수로 전향하게 되었다.
아마가사키 시립 소노다 중학교에 입학하여 야구부에 들어갔지만, 입단 두 달이 지나도 공 줍기만 시키는 것에 불만을 품고 상급생에게 항의하다가 난투극으로 번져 야구부를 그만두게 되었다. 이때 야구부 감독이었던 교사로부터 "야구는 여러 스포츠의 결정체이니 다양한 스포츠를 경험하라"는 조언을 듣고 배구, 럭비, 스모 등을 경험했으며, 최종적으로 육상부에 정착했다. 육상부에서는 포환던지기 선수로 활약하여 현 대회에서 우승하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형이 다니는 회사의 사회인 야구팀에 용병으로 뛰며 야구를 계속했다.
중학교 졸업 후에는 취업할 생각이었으나, 중학교 시절 야구부와 육상부에서 도움을 주었던 교사의 강력한 권유로 진학을 결정했다. 호토쿠 학원, 나미쇼 등 야구 명문고를 방문한 후 오사카가쿠인 대학 고등학교로 진학하여 본격적으로 야구를 시작했다. 당시 야구부 감독이었던 시오가마 쓰요시는 학생 시절 럭비로 국체에 출전한 스포츠맨이었으나 야구 경험은 전혀 없었다. 에나쓰는 고등학교 3년간 시오가마 감독으로부터 기술적인 지도는 받지 못했지만, 그의 열정적인 지도에 매료되었다고 한다. 시오가마 감독은 맹렬한 스파르타식 훈련을 부원들에게 시켰고, 훈련이 끝나면 너무 지쳐 학교에서 도보로 10분 거리인 집까지 한 시간씩 걸리기도 했다.
1966년 여름 고시엔 오사카부 예선에서는 준결승까지 진출했으나, 훗날 한신 타이거스에서 동료가 되는 사쿠라즈카 고등학교의 오쿠다 도시테루와 맞붙어 아쉽게 패했다. 그러나 예선 6경기를 혼자 던지며 81탈삼진, 2실점이라는 뛰어난 성적을 남겼다. 또한 고등학교 시절에는 단 한 번도 펜스를 넘어가는 홈런을 맞은 적이 없었으며, 유일하게 메이세이 고등학교의 히라노 미쓰야스에게 런닝 홈런을 허용했을 뿐이었다.
에나쓰는 고등학교 시절을 회고하며 가장 충격적인 사건으로 스즈키 게이시와의 대결을 꼽았다. 2학년 때 스즈키가 소속된 이쿠에이 고등학교와의 연습 경기에서 연장 15회 접전 끝에 0대0 무승부를 기록했다. 이 경기에서 에나쓰는 사사구를 내주면서도 완투하며 15탈삼진을 기록하는 호투를 보였지만, 3학년 에이스였던 스즈키는 이를 훨씬 뛰어넘는 27탈삼진을 기록했다. 4번 타자로 타석에 선 에나쓰는 스즈키가 던지는 빠른 직구와 낙차가 큰 커브에 속수무책이었으며, "단 한 구도 스치지 못했다"고 회고했다. 이 경험을 계기로 에나쓰는 스즈키가 던지던 커브를 습득하고 싶다는 열망을 가지게 되었다.
2. 프로 야구 경력
에나쓰 유타카는 일본 프로 야구 역사상 가장 위대한 투수 중 한 명으로, 선발 투수와 구원 투수 양쪽에서 전설적인 기록을 세우며 여러 팀에서 활약했다.
2.1. 한신 타이거스 시절 (1967-1975)
1966년 제1차 드래프트 회의에서 한신 타이거스, 요미우리 자이언츠, 도에이 플라이어스, 한큐 브레이브스 등 4개 구단으로부터 1순위 지명을 받았다. 경합 추첨 결과 한신이 지명권을 획득했으나, 에나쓰 본인은 도카이 대학 총장인 마쓰마에 시게요시의 권유로 대학 진학을 결정한 상태여서 입단을 거부했다. 한신은 계속해서 협상을 시도했고, 담당 스카우트인 가와니시 도시로와 사가와 나오유키가 그를 설득했다. 사가와는 에나쓰에게 "너 같은 투수는 딱히 원하지 않는다. 입단하든 안 하든 상관없다"고 도발했고, 이에 화가 난 에나쓰는 "그럼 입단하겠다!"고 말하며 입단을 결정했다. 에나쓰는 훗날 사가와의 도발이 자신을 입단시키기 위한 전략이었음을 깨달았다고 회고했다. 그러나 에나쓰의 프로 입단으로 인해 함께 대학 진학을 내정했던 세 명의 동료는 진학 계획이 백지화되어 고등학교 계열의 오사카가쿠인 대학으로 진학하게 되었고, 에나쓰는 이에 대해 "미안한 일을 했다"고 말했다.
입단 초기 등번호는 '71'번이었으나, 구단으로부터 '1', '13', '28' 중 하나를 선택하라는 제안을 받았다. 에나쓰는 '1'번은 라이벌 스즈키 게이시와 같아 싫었고, '13'번은 불길한 느낌이 들어 꺼려 결국 '28'번을 선택했다. 그는 훗날 28번이 완전수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고 밝혔다. 28번은 에나쓰의 활약 이후 좌완 투수의 대표적인 등번호로 자리매김했다.
1967년 스프링 캠프에서 고교 시절 던지지 못했던 변화구를 배우기 위해 곤도 마사토시 등 선배 투수들에게 가르침을 청했으나, 완벽히 습득하지 못한 채 정규 시즌을 맞이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속구를 주무기로 삼아 신인임에도 불구하고 시즌 최다 탈삼진 225개를 기록했으며, 평균자책점 2.74(리그 10위)로 준수한 성적을 거두었다. 그러나 많은 볼넷과 피홈런을 허용했고, 타격력이 약했던 당시 팀 사정까지 겹쳐 12승 13패를 기록하며 신인왕 타이틀은 다케가미 시로에게 돌아갔다. 다만, 구단과 1승당 10.00 만 JPY의 인센티브 계약을 맺어 연봉에 상응하는 수입을 얻었다고 한다.
신인 시절 에나쓰는 당시 감독이었던 후지모토 사다요시에게 특별한 총애를 받았다. '귀신 감독'으로 불리며 수많은 명선수들을 길러냈던 후지모토는 야구인으로서 황혼기에 접어들며 온화한 노인의 모습이었고, 에나쓰와 함께 담배를 피우며 야구계의 옛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을 즐겼다. 에나쓰는 후지모토를 사적으로 '할아버지'라고 불렀다. 1967년 올스타전에서 에나쓰를 3연투시킨 가와카미 데쓰하루(요미우리 자이언츠 감독이자 후지모토의 제자)를 시즌 재개 후 요미우리전에서 한신 벤치로 불러세워 "야, 데쓰! 우리 유타카(에나쓰)를 함부로 굴리다니! 이 바보 자식!"이라고 평소와는 전혀 다른 험악한 태도로 꾸짖기도 했다. 에나쓰는 엄하기로 유명한 대감독 가와카미가 후지모토에게 혼나는 모습을 보며 후지모토의 옛 '귀신 감독' 시절이 되살아난 것에 크게 놀랐다고 한다. 후지모토와 에나쓰의 관계는 후지모토가 퇴단한 후에도 이어져, 에나쓰가 훗날 난카이 호크스로 트레이드될 때 후지모토는 충격에 눈물을 흘리며 건강이 나빠지기도 했다. 또한 히로시마 도요 카프 시절 에나쓰가 첫 우승을 경험했을 때, 이미 고령으로 거동이 불편했음에도 불구하고 히로시마 벤치 뒤까지 찾아와 "정말 잘 됐구나! 축하한다"며 눈물로 축하해주었다.
1968년 캠프에서는 새로 투수 코치로 부임한 하야시 기이치의 지도로 중학교 시절 포환던지기의 영향으로 생긴 '어깨에 짊어지고 던지는' 투구 습관을 교정하고 변화구를 철저히 익혔다. 이로 인해 제구력이 향상되고 구종이 다양해지면서 시즌 초부터 전년도를 뛰어넘는 승수와 탈삼진을 기록했다. 이 해를 기점으로 에나쓰는 혈행 장애로 고생하던 무라야마 미노루를 대신하여 한신의 에이스로 등극하며 일본 야구계를 대표하는 투수로 성장했다. 에나쓰는 온화하고 성실하게 지도해준 하야시를 '스승님'이라 부르며 따랐다. 무라야마에 대해서는 처음에는 그의 자기절제적인 야구관에 감명받아 '제자'가 되기를 자처하며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했으나, 에나쓰가 첫 해부터 좋은 성적을 내자 무라야마는 노골적으로 그를 멀리했다. 에나쓰는 처음에는 에이스 자리를 빼앗길까 봐 무라야마가 속 좁은 행동을 한다고 분개했으나, 훗날 무라야마가 자신을 어엿한 투수로 인정해 주었기 때문에 '제자 졸업'이라는 의사 표현을 한 것임을 깨닫고 "그것이 진정한 프로이자 승부사의 자세임을 배웠다"고 자서전에서 밝혔다.
1968년 9월 17일 한신 고시엔 구장에서 열린 요미우리 자이언츠전에서 왕정치에게 삼진을 빼앗아 이나오 가즈히사의 일본 기록을 경신하는 시즌 354탈삼진을 기록했다. 경기 전 에나쓰는 일본 기록 경신이 되는 354번째 탈삼진을 '왕정치로부터 빼앗겠다'고 공언했으며, 당일 신문에도 이 사실이 실렸다. 경기에서 일본 타이 기록인 353번째 탈삼진을 왕정치 타석에서 기록했으나, 에나쓰 본인은 이것으로 일본 기록을 경신했다고 착각했고, 벤치로 돌아와서야 포수 쓰지 야스히코의 지적으로 깨달았다. 이에 에나쓰는 후속 타자들을 모두 의도적으로 범타로 처리하여 다시 왕정치 타석이 돌아왔을 때, 공언한 대로 기록 경신이 되는 354번째 삼진을 빼앗는 기막힌 재주를 보여주었다. 에나쓰는 훗날 "모리(마사히코)와 다카하시 가즈미로부터 삼진을 잡지 않는 것이 오히려 더 힘들었다. 특히 다카하시를 2스트라이크까지 몰아붙였을 때가 가장 곤란했다"고 말했다. 게다가 이 경기에서 에나쓰는 연장 12회에 스스로 끝내기 안타를 때려내며 팀 승리에 기여했다. 그 해 에나쓰는 최종적으로 탈삼진 수를 401개까지 늘렸다. 이 기록은 2023년 현재까지도 일본 프로 야구 기록이며, 메이저 리그 기록(놀런 라이언의 383개)을 뛰어넘는 세계 기록이다.
에나쓰는 왕정치로부터 삼진을 빼앗는 것에 특별히 집착했다. 이는 무라야마가 주요 기록 달성 시 항상 나가시마 시게오로부터 삼진을 빼앗던 것을 모방한 것이며, 신인 시절 무라야마가 '네 상대는 저것(왕정치), 나는 이쪽(나가시마)이다'라며 좌타자인 왕정치를 라이벌로 삼도록 지시했다고도 전해진다. 그 이후에도 에나쓰는 왕정치와의 승부를 고집하여 통산 57탈삼진을 기록했지만, 직구로 승부했기 때문에 20개의 홈런을 허용하기도 했다. 왕정치에게 가장 많은 삼진을 빼앗은 투수가 에나쓰이지만, 에나쓰에게 가장 많은 홈런을 친 타자 또한 왕정치였다.
1970년 7월 19일 오사카 구장에서 열린 올스타전 2차전에 선발 등판한 에나쓰는 전날 1차전에서 일본 신기록인 13점을 뽑아낸 하리모토 이사오, 노무라 가쓰야, 오스기 가쓰오의 강력한 클린업 타선을 상대로 차례로 삼진을 잡아내며 사상 첫 8자 연속 탈삼진을 기록했다. 올스타전에서 투수는 규정상 3이닝까지만 등판할 수 있으므로, 이 기록은 한 경기에서 사실상 최다 탈삼진 수이다. 에나쓰는 "3회에는 모두 삼진을 노렸다"고 말했으며, 당시에는 일본 신기록인 줄 몰랐다고 한다.
1971년 7월 17일 한큐 니시노미야 스타디움에서 열린 올스타전 1차전에서 에나쓰는 강속구와 뛰어난 제구력으로 퍼시픽 리그 타자들을 상대로 차례로 삼진을 잡아내며 사상 첫 9자 연속 탈삼진을 기록했다. 이 기록은 현재까지도 올스타전 단독 기록으로 남아있다. 타자가 포수 플라이를 쳤을 때 포수 다부치 고이치가 공을 쫓아가자 "잡지 마!"라고 외쳐 제지했다고 알려져 있는데, 에나쓰는 실제로는 타구가 관중석으로 들어갈 것 같았고, 삼진을 잡는 도중이라 자신이 템포 있게 투구하고 싶어서 "쫓지 마!"라고 외쳤다고 자서전에서 밝혔다. 이 경기 후 센트럴 리그는 에나쓰에 이어 등판한 와타나베 히데타케, 다카하시 가즈미, 미즈타니 히사노부, 고타니 다다카쓰의 계투로 퍼시픽 리그를 무안타 1볼넷 1실책 16탈삼진으로 막아내며 계투에 의한 노히트 노런을 달성했다. 9연속 탈삼진을 기록한 공은 에나쓰의 손에 남아있지 않으며, 행방불명이다. 이는 포수 다부치가 에나쓰의 기록 달성을 알지 못하고, 심판의 삼진 콜을 듣자마자 무의식적으로 공을 관중석으로 던져버렸기 때문이라고 한다. 당시 영상에서도 다부치가 심판의 삼진 콜 확인 직후 일어나 벤치 방향으로 걸어가며 공을 뒤쪽 관중석으로 던지는 모습이 확인된다. 다만, 훗날 에나쓰가 방송에서 오 리에와 함께 출연했을 때 "다부치라는 포수는 공을 던져버렸지만, 당신의 아버지(왕정치)가 주워서 건네주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에나쓰는 전년도 올스타전에서도 5연속 삼진, 고라쿠엔 구장에서 열린 3차전에서는 1탈삼진을 기록하여, 이 세 경기를 합한 15연속 탈삼진도 올스타전 기록으로 남아있다. 또한 이 경기에서 에나쓰는 1960년 다쓰미 하지무에 이어 역대 두 번째로 '올스타전에서 투수의 홈런'을 기록했으며, 이를 마지막으로 올스타전에서 투수의 홈런은 나오지 않고 있다.
1973년 8월 30일 한신 고시엔 구장에서 열린 주니치 드래건스전에서는 일본 프로 야구 역대 59번째 노히트 노런을 달성했다. 상대 선발 마쓰모토 유키쓰라와 연장전까지 투수전을 벌이다가, 11회말 마쓰모토가 던진 초구를 받아쳐 우측 럭키 존으로 넘기는 끝내기 홈런을 터뜨리며 일본 프로 야구 사상 최초의 연장전 노히트 노런을 달성했다. 2023년 현재까지 일본 프로 야구에서 연장전 노히트 노런을 달성한 선수는 에나쓰가 유일하다. 이 경기 이후 에나쓰의 발언이 "야구는 혼자서도 할 수 있다"고 왜곡되어 보도되며 논란이 일었으나, 에나쓰 본인은 이를 부인하지 않고 오히려 비난을 부추겼다. 당시 이 경기를 중계하던 아사히 방송의 아나운서가 흥분하여 "만세! 에나쓰 만만세!"라고 외쳐 공정성을 잃었다는 이유로 주의를 받았다는 에피소드도 있다.
당시 요미우리 자이언츠가 전인미답의 9연속 리그 우승을 달성하던 시기여서, 한신은 우승 경쟁에 참여했음에도 불구하고 에나쓰는 우승을 경험하지 못했다. 특히 9연패를 허용한 1973년에는 한신의 리그 우승이 결정될 수 있었던 10월 20일 주니치 드래건스와의 최종전에 선발 등판했으나 5이닝 3실점으로 패전 투수가 되어 '우승을 놓친 원흉'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에나쓰는 훗날 이 경기 직전에 나가타 무쓰오 구단 대표와 스즈키 가즈오 상무로부터 "우승하면 돈이 많이 드니 남은 두 경기는 이기지 말아달라. 감독님도 승낙했다"는 말을 들었다고 밝혔다. 한편으로 자신의 투수 기용에 대해서는 "경기에 지려고 에이스를 던지게 할 리가 없고, 나중에 '주니치전은 우에다 지로로, 요미우리전은 에나쓰로 갔으면 좋았을 것'이라는 말도 있었지만 그건 결과론적인 이야기이다. 앞으로 1승만 더하면 되는 것이었기 때문에 승수가 많은 선수를 먼저 출전시키는 것이 당연하다. 안타까운 결과가 나왔지만, 나는 지금도 그게 정공법이었다고 생각한다. 내 힘이 미치지 못했기 때문에 진 것이다"라며 용병술에 대한 이해를 보였다. 그러나 주니치전 경기 후, 7회초 2사 무주자 상황에서 대타로 교체된 것에 대해 "그런 곳에서 교체되면 선발 등판한 의미가 없다. 사람을 바보로 안다. 최종전? 모른다!"고 발언하여 '벤치 내 불화'가 있었다고 전해지며, 22일 요미우리전에 선발 등판해 강판당한 우에다는 훗날 '벤치 내 불화'로 인해 요미우리전 직전에 '팽팽했던 긴장감이 끊어졌다'고 말했다.
1973년 시즌 중부터 감독 가네다 마사야스와의 불화가 시작되었다. 구단 사장 도자와 가즈타카가 에나쓰와 면담하여 진의를 파악했을 때, 에나쓰는 "이대로는 그 감독 밑에서 야구할 수 없다"고 말했다. 한신 전철 본사는 이미 가네다와 에나쓰 모두 잔류시키기로 결정했지만, 가네다는 도자와와의 면담에서 다른 선수들의 반발을 사고 있는 에나쓰의 언행을 문제 삼으며 "팀 전체에 마이너스"라고 주장했다. 11월 하순, 구단주 노다 주지로가 에나쓰에 대해 기자들에게 "야구는 9명이 하는 것이고, 한 명을 위해 나머지 8명을 희생할 수 없다", "소문으로만 들었으니, 12월 계약 갱신 자리에서 선수들에게 '진상'을 듣겠다. 만약 반감이 너무 강하다면 고려해 보겠다"고 답하면서, 스포츠 신문들이 '에나쓰 방출'을 보도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신문이 나온 날 구단 납회에서 에나쓰는 도자와에게 보도에 대해 따져 물었고, "네 마음은 변치 않았느냐"는 질문에 다시 가네다 밑에서는 플레이할 수 없다고 답하며, 트레이드된다면 은퇴하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도자와는 12월 초 방출 의사가 없음을 명확히 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가네다가 에나쓰 잔류 상태에서의 팀 운영은 "다른 방향"이라며 사의를 표명했다. 하지만 에나쓰는 유력 후원자로부터 "참고 사과하라"는 설득을 받아 가네다에게 사과할 의사를 도자와에게 전달했고, 이를 받아들인 가네다도 사의를 철회하고 유임하게 되었으나, 에나쓰를 '불문'에 부치면서 팀 내에는 여전히 내분의 불씨가 남아있다는 지적이 있었다.
1974년부터는 100구를 넘기면 반드시 오른쪽 팔꿈치가 저리는 등 노쇠화를 자각하게 되었고, 긴 이닝을 던지기 어려워졌다. 이 해는 12승 14패 8세이브로 승수가 전년도의 24승에서 반으로 줄었고, 팀도 4위로 B클래스에 머물렀으며, 이 해를 끝으로 가네다는 감독직에서 물러났다. 오프 시즌에는 결혼을 발표했다.
1975년부터는 요시다 요시오가 감독으로 취임했고, 에나쓰는 4월 5일 주니치 드래건스와의 개막전에 선발로 기용되어 4년 만에 주니치로부터 승리를 거두었다. 4월 20일 요미우리전에서는 통산 149승을 기록 중이던 호리우치 쓰네오와 맞대결하여 에나쓰가 승리하며 한 발 먼저 통산 150승을 달성했다. 경기 후 "부드럽게 던지는 것이 내 페이스다. 요미우리는 치려고만 해서 경직되어 내 페이스에 말려들었다"고 말했다. 투구에서는 슬로볼을 많이 던지기 시작하며 기존의 강속구 투수에서 모델 체인지를 본격적으로 모색했다. 혈행 장애가 더욱 심각해져 팔이 부어 캐치볼조차 어려운 경우가 많았다. 후반기부터는 요시다 감독의 의향에 따라 구원 등판 기회가 늘어났다.
에나쓰는 요시다 감독과 현역 시절부터 사이가 좋지 않았고, 친분이 있던 쓰지 요시노리 코치가 중간에 개입해야 겨우 소통이 가능한 상태였다. 요시다는 에나쓰가 긴 이닝에서 구위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에나쓰에게 구원 투수 전향을 은근히 타진했으나, 당시 에나쓰는 전혀 그럴 마음이 없었다고 말했다.
결국 에나쓰는 트레이드되었다. 1975년 12월 24일, 닛칸 스포츠는 "한신이 난카이와 에나쓰와 에모토 다케노리를 포함한 다자간 트레이드를 성사시킬 전망이다"라고 보도했다. 이 소식을 들은 에나쓰는 구단 사무실을 찾아 나가타 무쓰오 구단 사장에게 보도의 진위를 확인했으나, 사장은 "너를 트레이드할 생각이 없다"고 부인했다. 그러나 다음 달인 1976년 1월 19일, 구단으로부터 호출을 받아 나가타와 대화했고, 나가타는 "팀에 녹아들려는 자세가 보이지 않는다"며 트레이드를 통보했다. 에나쓰는 기자들에게 "서운하다. 무엇을 위해 지금까지 한신에서 열심히 해왔는지 모르겠다"며 구단에 대한 불만을 드러냈다. 1월 23일, 구단으로부터 난카이 호크스로의 다자간 트레이드를 통보받았고, "2, 3일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며 즉시 승낙하지 않았다. 그러나 1월 26일 나가타를 만나 난카이로의 트레이드를 수락하겠다고 전했고, 난카이와 한신은 즉시 에나쓰, 모치즈키 미쓰루와 에모토 다케노리, 이케우치 유타카, 하세가와 쓰토무, 시마노 이쿠오의 트레이드가 성사되었다고 발표했다. 에나쓰는 입단 이래 9년간 선수 생활을 보냈던 한신에 작별을 고했다.
요시다 감독은 에나쓰의 트레이드가 성사된 후 기자들에게 "트레이드는 프런트가 결정한 것이고 나는 몰랐다"고 답했다. 그러나 훗날 1975년 말에 에나쓰의 트레이드를 결단했음을 인정하며, 당시 나가타 구단 사장이 "자네는 트레이드 이야기를 몰랐던 것으로 해두자"고 제안하여 동의했고, 그러한 발언으로 이어졌다고 해명했다. 노무라 가쓰야 또한 1975년 여름에 요시다로부터 에나쓰의 트레이드를 타진받았음을 인정했다. 그러나 에나쓰에 따르면, 요시다는 자신의 어머니나 후원자 등 주변 관계자들에게 "에나쓰를 트레이드하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다"라고 명언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그 반대였기 때문에, 에나쓰는 요시다에게 "나를 트레이드하는 것은 괜찮지만, 부모님까지 속일 필요는 없지 않느냐"고 비판했다.
2.2. 난카이 호크스 시절 (1976-1977)
한신으로부터 트레이드 통보를 받은 직후 에나쓰는 인간 불신에 빠져 은퇴까지 생각했다. 그러나 닛칸 스포츠 기자의 권유로 오사카의 플라자 호텔에서 노무라 가쓰야와 만찬을 가졌다. 에나쓰가 노무라를 만나자마자 노무라는 "야, 너. 그때 의도적으로 볼을 던졌지?"라고 물었다. 노무라가 지적한 것은 1975년 10월 1일 히로시마전에서 1사 만루 상황에서 기누가사 사치오에게 의도적으로 볼을 던져 삼진으로 처리한 투구였다. 에나쓰는 이 지적에 "그런 것을 기억하고 있었나"라며 놀라움과 당혹감을 느꼈지만, 노무라는 이후 야구 이야기만 할 뿐 트레이드 이야기는 전혀 하지 않았다. 에나쓰는 노무라와 헤어진 후, 노무라와의 대화를 되새기며 "노무라라는 사람은 재미있는 사람이다"라고 느끼고 난카이로의 트레이드를 받아들이기로 결심했다.
에나쓰는 난카이 입단에 앞서 심기일전의 의미로 등번호를 한신 시절의 '28'번에서 '17'번으로 변경했다. 3월 13일 오사카 구장에서 열린 요미우리와의 시범경기에 선발 등판했다. 에나쓰의 높은 인지도와 인기 팀 요미우리전이라는 점이 겹쳐 3만 2천 명의 관중이 몰려들어 구단으로서는 12년 만에 시범경기 만원 관중을 기록하는 성황을 이루었다. 에나쓰는 5이닝 동안 96구를 던져 1실점을 기록했으나, 탈삼진은 없었다.
4월 4일 태평양 클럽 라이온스와의 개막전 9회에 구원 등판하며 첫 출전을 기록했고, 4월 7일 오사카 구장에서 열린 긴테쓰 버펄로스전에서 첫 선발 등판하여 9회 1사 1, 2루 상황에서 사토 미치히로와 교체되며 이적 후 첫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이후에는 선발로 호투하면서도 타선의 지원을 받지 못해 승리로 이어지지 않는 경기가 계속되었다. 6월 15일 태평양전에서는 4회까지 4개의 홈런을 허용하며 강판되어 일찍이 8패째를 기록했다. 6월 27일 닛폰햄 파이터스전에서는 이적 후 첫 완봉승을 거두었다. 전반기를 4승 8패로 마쳤고, 시즌 전체로는 6승 12패 9세이브를 기록하며 프로 데뷔 이래 처음으로 두 자릿수 승수를 달성하지 못했다.
1977년 1월, 왼쪽 팔꿈치 신경염 진단을 받아 스프링 캠프에서는 추운 날씨 속에서 천천히 몸을 만들었다. 4월 18일 긴테쓰전에서 첫 선발 등판하여 변화구를 위주로 6이닝 3실점을 기록했다. 개막 한 달 후인 5월 8일 닛폰햄전에서 완투로 시즌 첫 승리를 거두었다. 그리고 5월 31일 긴테쓰전에 선발 등판하여 5이닝 4실점으로 강판되었는데, 이것이 그의 현역 마지막 선발 등판이 되었다.
에나쓰는 5월 8일 닛세이 구장에서 열린 긴테쓰와의 경기 전, 외야에서 워밍업을 하던 중 감독 노무라로부터 "구원 투수를 해보지 않겠나"라는 제안을 받았다. 에나쓰는 이미 선발 투수로서 긴 이닝을 던지기 어려워진 상태였고, 노무라는 이미 전년부터 은근히 타진하고 있었다. 이때 처음으로 노무라로부터 명확하게 제안을 받았지만 에나쓰는 "무슨 소리냐.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답했다. 이후에도 노무라가 "구원 투수를 하라"고 설득하고 에나쓰가 이를 거부하는 '실랑이'가 계속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노무라는 "야구계에 혁명을 일으켜 보지 않겠나"라고 말했다. 에나쓰가 "혁명이라니 무엇입니까"라고 묻자 노무라는 "지금은 피칭 머신의 발달로 타자들은 얼마든지 연습할 수 있는 반면, 투수는 어깨가 소모품이라 연습에도 한계가 있다. 따라서 앞으로 프로 야구는 타격 위주의 경향이 더욱 강해질 것이다. 투수가 이에 대항하려면 선발과 구원으로 분업시키는 수밖에 없다"고 말하며, 앞으로 야구계에서 구원 투수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노무라의 "혁명을 일으키자"는 말에 이끌린 에나쓰는 마침내 구원 투수 전향에 동의했다.
에나쓰는 이후 구원 투수로 전향하여 당시 기록인 6경기 연속 세이브를 수립했다. 최종적으로 4승 2패 19세이브의 성적으로 퍼시픽 리그 최우수 구원 투수에 등극했다. 당시 일본에는 구원 전문 투수의 컨디션 조절법이 확립되어 있지 않았고, 허리 통증을 앓던 에나쓰에게 계속 벤치에 앉아 대기하는 것이 힘들었다. 이에 그는 아는 기자에게 메이저 리그 구원 투수들의 조절법 등을 물어보고 자신만의 조절법을 시작했다. 경기가 시작되어도 5회까지는 벤치에 들어가지 않고 라커룸에서 마사지를 받거나 잠을 자는 조절법은 당시 팀 내외와 야구계에서 비난을 받았지만, 현재는 모든 경기에서 대기해야 하는 구원 투수들의 컨디션 유지 방법으로 정착되었다. 노무라는 극심한 부진을 겪고 있는 선수들의 재기를 몇 번이나 지원해 주는 등 이른바 '노무라 재생 공장'으로 불리게 되면서, 선수들을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돕는 비법의 첫 사례로서 후세에까지 평가받게 되었다. 훗날 에나쓰는 "노무라의 '혁명'이라는 단어가 마음에 와 닿았다. 혁명이라고 말하지 않았으면 구원 투수 전향은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노무라에 대한 에나쓰의 존경심은 깊었다. 에나쓰가 노무라를 따르게 된 계기는 앞서 언급한 이적 협상 과정에서 히로시마전에서의 지적이었다고 말하곤 하지만, 노무라는 이 일은 어디까지나 난카이로의 이적을 결정한 요인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노무라에 의하면, 에나쓰가 자신을 따르게 된 것은 에나쓰의 의도로도 보여지는 제구상의 실수로 패한 경기 후에 검은 안개 사건을 예로 들어 "의혹을 품은 인간이 '자신은 결백하다'고 입으로 몇 번을 말해도 아무도 믿지 않는다. 마운드 위에서의 태도로 보여달라"며 엄하게 질책했는데, 이에 대해 "한신 시절은 이렇게 말로 하기 힘든 것을 말해주는 사람이 없었다"라고 감격했다고 한다. 에나쓰는 현재까지도 "야구에 대한 견식은 틀림없이 야구계 최고의 인물"이라고 노무라를 평가했고, 노무라도 생전에 에나쓰를 "자신이 접해본 투수 중에서 최고의 두뇌를 가진 친구였다", "사상 최고의 강속구 투수"라고 높게 평가했다.
2.3. 히로시마 도요 카프 시절 (1978-1980)
1977년 오프 시즌, 노무라가 공사 구분을 이유로 난카이 감독직에서 해임되고 퇴단이 결정되었다. 노무라를 따르던 에나쓰는 구단에 "노무라 씨가 그만두는 이상, 난카이를 떠나게 해달라"며 트레이드를 요청했다. 같은 해 12월 22일, 현금 트레이드로 히로시마 도요 카프로 이적했다. 이 이적에는 노무라가 히로시마 감독 고바 다케시에게 에나쓰를 추천한 것도 영향을 미쳤다.
히로시마 이적 후, 한신 시절 말기부터 약해졌던 직구의 위력이 회복되기 시작했고, 이로 인해 타자들에게 마음껏 던질 수 있게 되면서 투구의 폭이 넓어졌다. 자신감을 되찾은 에나쓰는 5승 4패 12세이브를 기록하며 부활했다. 그리고 1979년에는 9승 6패 25세이브를 기록하며 팀의 4년 만의 리그 우승에 기여했다. 프로 13년 만에 처음으로 우승을 경험했으며, 우승 결정전이었던 10월 6일 한신전에서 세이브를 기록하며 헹가래 투수가 되었다. 긴테쓰 버펄로스와의 1979년 일본 시리즈 최종 7차전에서는 7회말부터 등판하여 9회말 무사 만루의 위기를 맞았으나, 사사키 교스케를 삼진으로 잡고, 1사에서 이시와타 시게루의 스퀴즈 플레이를 간파하여 주자를 아웃시킨 후 이시와타를 삼진으로 처리하며 위기를 넘겼다. 이 해 두 번째 헹가래 투수가 되어 히로시마를 첫 일본 시리즈 우승으로 이끌었다. 이 투구는 이듬해 1980년 4월 스포츠 그래픽 넘버 창간호에서 야마기와 준지의 작품인 '에나쓰의 21구'로 알려지게 되었고, 프로 야구 역사상 최고의 명장면 중 하나로 회자되고 있다.
같은 해 오프 시즌, 센트럴 리그 MVP를 처음으로 수상했다. 또한 가수로 '나의 시'라는 음반을 발매하여 7.00 만 JPY장을 판매했다.
1980년 7월 22일 고라쿠엔 구장에서 열린 올스타전 3차전에서 센트럴 리그가 2대0으로 앞서고 있었으나, 9회말 1점 차까지 추격당하며 무사 만루의 위기에 처했다. 노무라 오사무(다이요 웨일스)를 구원하기 위해 등판한 에나쓰는 레론 리, 아리토 미치요(모두 롯데 오리온스), 야마우치 신이치(난카이 호크스)를 3자 연속 삼진으로 처리하며 위기를 넘겼다. 선제타를 때린 마유미 아키노부, 홈런을 친 가케후 마사유키를 억제하며 MVP를 획득했다. 전년에 이어 9승 6패 21세이브를 기록하며 팀의 2년 연속 일본 시리즈 우승에 기여했다. 11월 10일, 다카하시 나오키와의 트레이드로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스로 이적이 발표되었다.
히로시마 시절, 팀 동료였던 기누가사 사치오와는 둘도 없는 친구였으며, 현역 은퇴 후에도 기누가사가 사망할 때까지 교류를 이어갔다. 에나쓰의 저서에 따르면 "히로시마 시절에는 아내와 함께 있는 시간보다 사치(기누가사)와 함께 있는 시간이 더 길었다"고 한다. 또한 이 시기에 오노 유타카의 투구 폼을 교정해 주는 등 열정적인 개인 지도를 하며 오노가 발전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에나쓰는 자신의 저서를 통해 히로시마 구단 프런트의 선수 관리 방식에 매우 감동받았다고 밝혔으며, "가장 애착이 있는 팀은 최초로 유니폼을 입은 한신 시절이지만, 가장 즐거웠던 시절은 히로시마 시절이었다"고 말했다. 2018년 4월 기누가사가 암으로 사망하자, 에나쓰는 "좋은 친구를 두었다. 나의 보물이다. 나도 곧 따라갈 테니 저 세상에서 야구 이야기를 나누자"며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한편, 히로시마 재적 시절 친정팀인 한신 타이거스전에서는 단 한 번도 승리 투수가 되지 못하여, 현역 통산 전 구단 승리를 달성하지 못했다. 반면 구단 수뇌부로부터의 평가는 그리 좋지 않았다. 특히 고바 다케시 감독으로부터는 좋은 성적을 남겨도 특별한 격려의 말이 없었고, 에나쓰도 여러 상황에서의 기용법에 대해 갈등이 있어 이것이 히로시마를 퇴단한 이유 중 하나였다고 한다. 단지 고바 감독과의 갈등은 훗날 세이부 라이온스 시절 히로오카 다쓰로와의 갈등만큼 크지는 않았으며, 에나쓰도 고바 자체에 대해서는 그다지 부정적인 발언을 하지 않고 있다.
2.4. 닛폰햄 파이터스 시절 (1981-1983)
1980년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스는 퍼시픽 리그 후기 시즌에서 우승 경쟁을 벌이고 있었다. 팀 전력 강화의 필요성을 느낀 오사와 게이지 감독은 히로시마가 에나쓰를 오프 시즌에 방출할 것이라는 정보를 입수하자, 비밀리에 히로시마를 방문하여 마쓰다 고헤이 구단주에게 직접 담판을 지어 에이스 다카하시 나오키와의 맞트레이드를 성사시키며 에나쓰를 영입하는 데 성공했다. 고바 감독은 1980년 일본 시리즈 종료 후 에나쓰의 "또 다른 팀에서 우승하고 싶다"는 발언이 신문에 나오자, 오사와로부터 "에나쓰를 내보낼 거면 나에게 달라. 나는 아직 우승하지 못했다"는 전화를 받았다고 말했다. 오사와 감독의 '대부' 같은 기질은 에나쓰의 성격과 잘 맞았던 것으로 보이며, 오사와 또한 "에나쓰를 마지막(9회)에 쓰는 것이 우리 팀의 승리 패턴"이라며 에나쓰를 신뢰했다. 에나쓰도 이에 부응하듯 1981년 구원 에이스로 활약하며 닛폰햄의 19년 만의 퍼시픽 리그 우승에 기여했고, MVP에 선정되었다. 양대 리그 MVP 수상은 일본 프로 야구 사상 최초의 쾌거였다. 또한 히로시마 시절인 1979년부터 1983년까지 5년 연속으로 양대 리그에 걸쳐 최다 세이브 투수 타이틀을 획득했으며, 동시에 사상 최초로 일본 프로 야구 12개 구단 모두를 상대로 세이브를 기록하는 대기록을 달성했다.
1982년에는 통산 200승을 달성하며 일본 프로 야구 명구회에 가입했다. 팀은 후기 우승을 차지했고, 전기 우승팀이자 히로오카 다쓰로 감독이 이끄는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스와 플레이오프에서 맞붙었다. 사전 예상에서는 세이부 타선이 시즌 내내 에나쓰에게 억제되었기 때문에 닛폰햄이 우세할 것으로 전망되었으나, 히로오카는 에나쓰가 투구한 후 수비에 큰 약점이 있다는 것을 간파하고 에나쓰 주변에 집요한 푸시 번트를 시도하게 했다. 이 작전에 투구 리듬이 무너진 에나쓰는 세이부 타선에 공략당했고, 닛폰햄은 세이부에 패배하여 일본 시리즈 진출에 실패했다. 이 일을 계기로 에나쓰는 히로오카의 예리한 전략안에 존경심을 가지게 되었다.
전년도 일본 시리즈 우승팀인 히로시마에서 이적한 것도 있었지만, 당시 닛폰햄의 팀 전력은 형편없었다고 한다. 당시 팀 동료였던 오미야 다쓰오, 오카베 노리아키, 마시바 시게쿠니, 사카마키 아키라 등은 오사와 감독의 부탁으로 에나쓰가 지도했다고 알려져 있으며, 에나쓰 자신도 당시를 회고하며 "그들과 함께 야구를 하면서 나 자신도 공부가 되었다"고 말했다.
2.5. 세이부 라이온스 시절 (1984)
1983년 시즌 종료 후 오사와 감독이 용퇴했다. 에나쓰는 이에 따라 오사와 감독의 요청으로 닛폰햄으로 이적했던 경위가 있었기에 "오사와 씨가 물러나면 나도 거기까지"라고 생각하여 오사와에게 그 뜻을 전했고, 오사와는 "내가 없으면, 자네는 나가는 편이 좋을 것이다"라고 답했다. 이후 1군 투수 코치 우에무라 요시노부가 신임 감독으로 취임하자, 우에무라는 에나쓰를 전력 구상에서 제외했고, 에나쓰의 트레이드가 결정되었다. 이적에 앞서 에나쓰는 현장을 떠나 상무 이사로 구단 본부에 남은 오사와에게 희망 구단을 물었고, "히로시마나 한신, 혹은 요미우리를 무너뜨릴 수 있는 팀이라면 가도 좋다. 그러나 세이부는 싫다"고 답했다. 에나쓰 본인은 당시 닛폰햄과 같은 도쿄에 본거지를 둔 야쿠르트 스왈로스나 긴테쓰 정도를 이적처로 예상했다고 한다. 그러나 같은 해 12월 13일, 시바타 야스미쓰와 기무라 히로시와의 맞트레이드로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스로의 이적이 결정되었다. 세이부는 당시 마무리 투수로 2승 4패 34세이브를 기록한 모리 시게카즈가 있었음에도 에나쓰를 영입한 이유에 대해, 사카이 야스유키 구단 대표는 훗날 "요미우리가 에나쓰 영입에 나설 것으로 보고, 요미우리에게 빼앗기기 전에 우리 팀으로 데려오려는 의도였다"고 말했다. 오사와 또한 에나쓰에게 이적을 권했을 때 이미 세이부로부터 제안이 있었고, 엄격한 히로오카 야구를 경험하는 것이 에나쓰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밝혔다. 오사와는 훗날 에나쓰와의 대담에서 "결국 에나쓰의 야구 인생을 내가 단축시킨 꼴이 되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1984년 시즌 개막부터 에나쓰는 컨디션이 좀처럼 오르지 않아 고전하다가 시즌 도중 컨디션 난조를 호소했다. 히로오카 감독은 에나쓰의 건강 보고가 번번이 크게 엇갈리는 것에 불신감을 품고, 2군 강등과 입원을 명령했다. 한편 에나쓰 또한 2군 강등 결정을 히로오카 본인으로부터가 아닌 신문 보도를 통해 알게 되는 등, 히로오카 감독이 선수들과 소통하지 않는 것에 불만을 품었다. 팀도 그 해 우승 경쟁에서 일찌감치 멀어졌고, 시즌 도중부터 일찌감치 다음 시즌을 내다보고 젊은 선수 위주로 기용되면서, 7월 12일 등판을 마지막으로 에나쓰에게는 더 이상 출전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에나쓰는 사상 최초의 200세이브와 통산 3000탈삼진을 눈앞에 두고서도 그 해를 끝으로 세이부를 퇴단하고 현역 은퇴를 선언했다. 한신 시절 배터리를 이뤘고 세이부에서 다시 동료가 된 다부치 고이치와 달리, 구단 주최의 은퇴 경기는 열리지 않았다.
에나쓰가 세이부를 퇴단한 직접적인 원인은 히로오카 감독과의 불화였다. 에나쓰의 자서전에 따르면, 그는 사전에 노무라에게서 들은 대로 헤드 코치격인 모리 마사히코 배터리 코치의 말은 잘 들었으나(노무라와 모리는 팀을 초월한 오랜 친구이다) 히로오카와는 전혀 맞지 않았다. 결정적인 충돌 원인은 1984년 캠프 중 경영진도 참석한 조찬회 자리에서, 건강을 위해 현미나 두유 등을 선수들에게 평소에도 강제로 권하던 히로오카나 다른 코치, 선수들이 있는 가운데 "감독님, 이런 걸 드시는데 왜 통풍이세요?"라고 질문하여 히로오카의 분노를 샀고, 그 이후로 출전 기회가 줄어들었다고 한다. 에나쓰가 2군으로 내려간 것은 프로 18년 만에 처음이었다. 에나쓰는 훗날 히로오카에 대해 "인간적으로 용납할 수 없는 부분이 있었다"고 말했지만, 한편으로는 닛폰햄 시절 세이부로부터 받은 집요한 번트 공격 등을 통해 히로오카의 야구관을 높이 평가하며 "인간으로서는 문제가 있어도, 야구라는 면에서는 배울 점이 많았고 훌륭한 지도자였다"고 감독으로서의 히로오카를 높이 평가했다. 히로오카 또한 "에나쓰는 투구에 관해서는 훌륭했고, 무엇보다 머리가 매우 좋다"고 평가했다.
3. 메이저 리그 도전
현역 은퇴 경기가 열리지 않은 것에 대해, 과거 창간 당시 에나쓰를 광고 모델로 기용했던 잡지 'Sports Graphic Number'의 초대 편집장이자 당시 분게이슌주 편집장이었던 오카자키 미쓰요시 등의 주선으로 1985년 1월 19일 도쿄도 다마시의 다마시 잇폰스기 공원 야구장에서 넘버를 발행하는 분게이슌주사의 주최, 일본 프로 야구 명구회의 협력 하에 '단 한 사람의 은퇴식'이 거행되었다. 경기장 수용 인원 가득 찬 1만 5천 명의 관중이 운집했다. 지역 리틀 리그 팀들의 경기 도중 감독 역을 맡은 비트 다케시가 관중 앞에 나와 "저에게 1분만 시간을 주십시오"라고 선언하자, 한신 시절 유니폼을 입은 에나쓰가 등판했고, 과거 배터리를 이뤘던 쓰지 야스히코가 포수를 맡았다. 소년 야구 선수들부터 오치아이 히로미쓰, 야마모토 고지, 후쿠모토 유타카 등 구단의 벽을 넘어 모인 8명의 선수·OB들을 상대로 일본에서의 마지막 투구를 선보였다. 은퇴식 인사에서 에나쓰는 메이저 리그 도전을 천명하며 "에나쓰 유타카 36세, 정말 바보 같은 남자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일본에 돌아왔을 때에는 단 한마디, '수고했습니다', 그만큼 말해 주십시오"라고 말했다.
에나쓰는 1984년 12월 27일 로스앤젤레스에서 단 노무라의 입회 하에 밀워키 브루어스와 마이너 계약을 맺고, 1985년 2월 이 구단의 스프링 트레이닝에 논 로스터 선수 자격으로 참가했다. 등번호는 '68'번이었으며, 좌완 중간 계투 한 자리를 목표로 메이저 승격을 노렸다. 2월 21일 선 시티 캠프에 합류하여 28일 첫 프리 배팅에 등판했다. 3월 8일 백청전(紅白戦)에 첫 등판하여 1이닝을 무안타로 막았다.
3월 13일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와의 시범경기에 첫 등판하여 2이닝을 무안타 무실점으로 막으며 순조로운 출발을 보였다. 18일 시애틀 매리너스전은 2이닝 1안타 무실점으로 첫 승리를 거두었고, 23일 샌디에이고 파드리스전에서 홈런을 허용하며 첫 실점을 기록했으나 2이닝 3안타 1실점이었고, 2이닝째 2사 만루 위기에서 강타자 테리 케네디를 0볼 3스트라이크에서 삼진으로 처리하는 인상적인 모습을 보였다. 조지 밤버거 감독은 18일에 에나쓰의 메이저 승격 확률을 "70퍼센트", 25일에는 "75퍼센트"라고 말했다.
그러나 26일 시카고 컵스전에서 1이닝 4안타 4실점, 30일 오클랜드 애슬레틱스전에서 2이닝 4안타 3실점, 4월 2일 캘리포니아 에인절스전에서도 2이닝 4안타 2실점으로 첫 패전 투수가 되는 등 3경기 연속으로 난타당했다. 그리고 4월 4일, 구단은 최종 25인 로스터 선발을 진행했으나 에나쓰는 그 안에 들지 못했고, 해고 통보를 받았다. 투수 코치 하름 스타렛은 "솔직히 2주 전에는 로스터에 에나쓰를 넣었었다. 안 된 이유는 그가 2이닝밖에 던질 수 없었기 때문이다. 중간 계투는 3, 4이닝은 던질 수 있어야 한다"고 지적했으며, 후반기의 난타당한 투구로 인해 에나쓰는 코칭스태프로부터 중간 계투로 3이닝을 버티지 못한다고 판단되었다.
밤버거 감독은 "에나쓰는 잘했다. 젊고 유망한 선수들이 많기 때문에 36세의 에나쓰를 마이너 리그에 둘 수 없다. 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었지만 어쩔 수 없다. 다른 팀이 에나쓰에게 관심이 있는지 알아보는 것이 에나쓰에게 해줄 수 있는 전부다"라고 말했다. 결국 로스터 진입에는 실패하여, 공식 등번호 기록에는 에나쓰가 착용한 68번이 기재되어 있지 않다.
에나쓰는 선 시티에 머물며 다른 구단으로부터의 제안을 기다렸다. 그러나 에나쓰를 영입하는 구단은 나타나지 않았고, 4월 8일 브루어스 단장 해리 달턴으로부터 브루어스 산하 1A 스톡턴으로의 입단을 제안받았으나 이를 거절했다. 이로써 에나쓰의 메이저 도전은 완전히 막을 내렸다. 일부에서는 난카이로의 복귀가 보도되었으나, 에나쓰는 일본 야구계 복귀도 완전히 부정하며 야구 평론가로 재출발하겠다고 명언했다. 4월 16일, 도쿄 주니치 스포츠 지면을 통해 이 신문의 평론가로 취임한다고 밝혔다. 에나쓰는 4월 17일 미국에서 귀국했다.
에나쓰는 이때 메이저 리그에 도전한 이유에 대해 "메이저 리그 입성이 가장 큰 목적이었다면 절대로 남아있었을 것이다. 마이너 하위 리그에서 시작하거나 이듬해 재도전할 수도 있었다"고 말하며, "나는 불완전 연소를 일으켜 연기를 내뿜는 '투수 혼'의 '죽을 곳'이 필요했다. 나는 히로오카라는 남자에게서 '죽을 곳'(세이부)을 빼앗겼다. 다시 한번 납득할 만한 장소에서 던져보고 싶었다. 메이저 리그 캠프에 참가하며 납득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반면 브루어스 스카우트 부장이었던 레이 포이테빈트는 "좌완 구원 투수 밥 매클루어와 에나쓰를 비교하면 에나쓰가 조금 더 나았다. 하지만 팀 사정으로 에나쓰에게 일단 마이너행을 통보하게 되었고, 그에게 전화로 '기회는 있다. 당분간 마이너에 있어 달라'고 전했다. 에나쓰는 마이너행을 받아들일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기자회견을 열고 일본으로 돌아가 버렸다. 보름 뒤 매클루어는 골절상을 입었다. 에나쓰가 만약 남아있었더라면, 메이저리거가 될 수 있었다"고 증언했다. 에나쓰와 마지막까지 주전 경쟁을 했던 테디 히게라는 그 해에 투수로서 15승, 이듬해인 1986년에 20승을 올리는 대활약으로 일약 메이저 리그를 대표하는 투수로 군림했다. 훗날 히게라가 미일 야구 대회 참가차 일본에 왔을 때, 에나쓰는 활약 당시 맥주 살 돈조차 없었던 히게라의 생활 변화에 "이것이 아메리칸 드림?"이라고 놀란 반응을 보였는데, 히게라는 에나쓰를 보자마자 맨 먼저 악수를 청해왔다고 한다.
4. 선수로서의 특징 및 스타일
에나쓰 유타카는 1960년대부터 1980년대 초반에 걸쳐 선발 투수와 구원 투수 모두에서 가장 높은 평가를 받은 좌완 투수이다.
4.1. 投手として
한신 시절에는 선발 투수로서 탈삼진 기록 등 빛나는 성적을 남겼다. 일반적으로 강속구 투수라고 하면 제구가 좋지 않다는 인식이 있지만, 에나쓰는 당시를 대표하는 강속구 투수이면서도 제구력이 뛰어나 그것이 그의 실적으로 이어졌다. 한편, 노무라 가쓰야의 제안으로 구원 투수로 전향한 난카이 시절부터는 그 높은 제구력으로 새로운 빛을 발했다. 구원 투수로서는 당시에는 기록 채택 전이었지만 1967년부터 1973년까지 총 37세이브를 기록했다.
난카이에서는 혈행 장애나 심장 질환 등으로 긴 이닝을 던지기 어려워졌지만, 50구 정도의 짧은 이닝이라면 전력으로 활용할 수 있다고 판단한 노무라는 에나쓰에게 구원 투수 전향을 제안했다. "야구계에 혁명을 일으키자"는 노무라의 설득으로 1977년 6월 구원 투수로 전향을 결심했다. 당시 일본에는 구원 전문 투수의 컨디션 조절법이 확립되어 있지 않았고, 허리 통증을 앓던 에나쓰에게 계속 벤치에 앉아 대기하는 것이 힘들었다. 이에 그는 아는 기자에게 메이저 리그 구원 투수들의 조절법 등을 물어보고 자신만의 조절법을 시작했다. 경기가 시작되어도 5회까지는 벤치에 들어가지 않고 라커룸에서 마사지를 받거나 잠을 자는 조절법은 당시 팀 내외와 야구계에서 비난을 받았지만, 현재는 모든 경기에서 대기해야 하는 구원 투수들의 컨디션 유지 방법으로 정착되었다.
현역 시절 말기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스에서 포수로서 에나쓰의 투구를 받아본 이토 쓰토무는 에나쓰의 높은 제구력과, 투구 순간 손끝 조작만으로 순식간에 코스를 바꾸고 포수가 잡기 쉬운 곳으로 투구하는 비범한 기술, 심지어 3루 주자의 움직임을 보지 않고 사인 교환도 하지 않았음에도 스퀴즈 플레이를 간파하여 정확하게 처리하는 판단력에 경탄했다고 말했다. 이로 인해 에나쓰는 현재도 '20세기 최고의 투수 중 한 명'으로 불리며, 히로시마와 닛폰햄 시절 대활약으로 우승에 기여하여 '우승 청부사'라는 별명을 얻었다. 야후! 재팬이 기획한 '20세기 일본 프로 야구 베스트 나인' 투수 부문에서는 사와무라 에이지, 가네다 마사이치, 이나오 가즈히사 등 왕년의 명투수들을 제치고 1위에 선정되었다.
구종 선택에 망설일 때 최종적으로 던지는 공은 '아웃코스 직구'라고 발언한 적이 있다.
4.2. 打者との対戦
한신 시절 에나쓰는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왕정치로부터 삼진을 빼앗는 것에 특히 집착했다. 이는 무라야마 미노루가 주요 기록 달성 시 항상 나가시마 시게오로부터 삼진을 빼앗던 것을 모방한 것이며, 신인 시절 무라야마가 "네 상대는 저것(왕정치), 나는 이쪽(나가시마)이다"라며 좌타자인 왕정치를 라이벌로 삼도록 지시했다고도 전해진다. 그 이후에도 에나쓰는 왕정치와의 승부를 고집하여 통산 57탈삼진을 기록했지만, 직구로 승부했기 때문에 20개의 홈런을 허용하기도 했다. 왕정치에게 가장 많은 삼진을 빼앗은 투수가 에나쓰이지만, 에나쓰에게 가장 많은 홈런을 친 타자 또한 왕정치였다.
네지메 쇼이치의 저서 '오치아이 히로미쓰 괴짜 연구' 대담에서 에나쓰는 "가장 공략하기 어려운 타자는 특정 구종을 계속 기다리는 사람"이라고 말하며 그 전형으로 오치아이 히로미쓰를 꼽았다. 현역 시절 어느 날, 에나쓰가 오치아이와 마작을 즐기던 중 에나쓰는 "투수는 특정 구종을 기다리는 타자가 가장 싫어. 너처럼 계속 노리는 공을 바꾸면 평생 내 공은 칠 수 없다"고 오치아이에게 말했다. 그 후 1982년 롯데 오리온스전에서 오치아이와 상대하여 삼진을 잡았으나, 이 타석에서 오치아이가 커브 이외의 구종에는 눈길도 주지 않았음을 에나쓰가 깨달았고, 훗날 이 경기를 회고하며 "오치아이의 성장하는 모습을 보고 매우 감개무량했다"고 말했다. 그 커브는 신인 시절 왕정치에게서 "유타카(에나쓰)의 커브는 알고 있어도 칠 수 없다. 휘어지지 않으니까"라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5. 주요 기록 및 수상
에나쓰 유타카는 일본 프로 야구 역사에 길이 남을 수많은 기록과 수상 경력을 보유하고 있다.
5.1. 투수 기록
한신 시절에는 최다 승리 (1968년, 1973년), 최우수 평균자책점 (1969년), 최우수 투수 및 사와무라 에이지상 (모두 1968년) 타이틀을 획득했다. 시즌 20승 이상을 4차례 달성했으며, 6년 연속 리그 최다 탈삼진을 기록했다. 특히 프로 4년차인 1970년에는 통산 탈삼진 기록 보유자인 가네다 마사이치를 넘어 역대 최단 기간에 통산 1000탈삼진을 기록하는 등 명실상부한 센트럴 리그의 대표 투수가 되었다.
프로 2년차인 1968년에 기록한 시즌 401탈삼진은 2023년 현재까지도 일본 프로 야구 기록이며, 비록 세계 기록으로 공식 인정되지는 않았지만 MLB 기록(놀런 라이언의 383개)을 뛰어넘는다. 또한 에나쓰는 탈삼진 수뿐만 아니라 탈삼진율도 매우 높아, 통산 18년간의 현역 기간 중 탈삼진 수가 투구 이닝을 넘어선 해가 9차례나 된다. 이 중 4차례는 선발 투수였던 한신 시절에 기록했는데, 이는 선발 투수로서는 매우 드문 경우이다. 에나쓰의 라이벌이었던 호리우치 쓰네오는 단 한 번도 이를 달성하지 못했다.
히로시마 재적 시절 친정팀인 한신 타이거스전에서는 단 한 번도 승리 투수가 되지 못하여, 현역 통산 전 구단 승리를 놓쳤다.
연 도 | 소 속 | 등 판 | 선 발 | 완 투 | 완 봉 | 무 4 구 | 승 리 | 패 전 | 세 이 브 | 홀 드 | 승 률 | 타 자 | 이 닝 | 피 안 타 | 피 홈 런 | 볼 넷 | 고 4 | 몸 맞 | 탈 삼 진 | 폭 투 | 보 크 | 실 점 | 자 책 점 | 평 자 책 | WHIP |
---|---|---|---|---|---|---|---|---|---|---|---|---|---|---|---|---|---|---|---|---|---|---|---|---|---|
1967 | 한신 | 42 | 29 | 8 | 2 | 0 | 12 | 13 | -- | -- | .480 | 923 | 230.1 | 167 | 27 | 88 | 1 | 3 | 225 | 3 | 1 | 81 | 70 | 2.74 | 1.11 |
1968 | 49 | 37 | 26 | 8 | 3 | 25 | 12 | -- | -- | .676 | 1259 | 329.0 | 200 | 29 | 97 | 2 | 4 | 401 | 2 | 0 | 83 | 78 | 2.13 | 0.90 | |
1969 | 44 | 23 | 17 | 7 | 3 | 15 | 10 | -- | -- | .600 | 1000 | 258.1 | 172 | 17 | 78 | 1 | 3 | 262 | 3 | 0 | 56 | 52 | 1.81 | 0.97 | |
1970 | 52 | 37 | 25 | 8 | 3 | 21 | 17 | -- | -- | .553 | 1295 | 337.2 | 232 | 29 | 73 | 5 | 3 | 340 | 5 | 1 | 87 | 80 | 2.13 | 0.90 | |
1971 | 45 | 30 | 16 | 6 | 4 | 15 | 14 | -- | -- | .517 | 1006 | 263.2 | 182 | 25 | 66 | 3 | 2 | 267 | 5 | 2 | 77 | 70 | 2.39 | 0.94 | |
1972 | 49 | 31 | 16 | 3 | 3 | 23 | 8 | -- | -- | .742 | 1059 | 269.2 | 195 | 30 | 60 | 3 | 4 | 233 | 0 | 1 | 86 | 76 | 2.53 | 0.95 | |
1973 | 53 | 39 | 18 | 7 | 2 | 24 | 13 | -- | -- | .649 | 1228 | 307.0 | 258 | 23 | 82 | 6 | 4 | 215 | 4 | 0 | 95 | 88 | 2.58 | 1.11 | |
1974 | 41 | 23 | 12 | 2 | 1 | 12 | 14 | 8 | -- | .462 | 772 | 197.2 | 153 | 24 | 50 | 3 | 2 | 149 | 3 | 0 | 65 | 60 | 2.73 | 1.03 | |
1975 | 49 | 27 | 9 | 1 | 1 | 12 | 12 | 6 | -- | .500 | 852 | 208.1 | 169 | 24 | 72 | 7 | 2 | 132 | 2 | 0 | 92 | 71 | 3.07 | 1.16 | |
1976 | 난카이 | 36 | 20 | 6 | 1 | 1 | 6 | 12 | 9 | -- | .333 | 612 | 148.1 | 115 | 12 | 61 | 0 | 4 | 109 | 4 | 0 | 58 | 49 | 2.98 | 1.19 |
1977 | 41 | 3 | 1 | 0 | 0 | 4 | 2 | 19 | -- | .667 | 346 | 84.0 | 72 | 5 | 21 | 0 | 5 | 60 | 2 | 0 | 28 | 26 | 2.79 | 1.11 | |
1978 | 히로시마 | 49 | 0 | 0 | 0 | 0 | 5 | 4 | 12 | -- | .556 | 395 | 95.1 | 77 | 7 | 38 | 3 | 2 | 99 | 1 | 1 | 32 | 32 | 3.03 | 1.21 |
1979 | 55 | 0 | 0 | 0 | 0 | 9 | 5 | 22 | -- | .643 | 420 | 104.2 | 77 | 10 | 36 | 2 | 1 | 117 | 3 | 0 | 31 | 31 | 2.66 | 1.08 | |
1980 | 53 | 0 | 0 | 0 | 0 | 9 | 6 | 21 | -- | .600 | 334 | 86.0 | 61 | 12 | 20 | 4 | 1 | 86 | 1 | 0 | 27 | 25 | 2.62 | 0.94 | |
1981 | 닛폰햄 | 45 | 0 | 0 | 0 | 0 | 3 | 6 | 25 | -- | .333 | 339 | 83.0 | 69 | 10 | 24 | 0 | 1 | 75 | 1 | 0 | 30 | 26 | 2.82 | 1.12 |
1982 | 55 | 0 | 0 | 0 | 0 | 8 | 4 | 29 | -- | .667 | 354 | 91.0 | 56 | 8 | 31 | 1 | 2 | 107 | 0 | 0 | 22 | 20 | 1.98 | 0.96 | |
1983 | 51 | 0 | 0 | 0 | 0 | 2 | 4 | 34 | -- | .333 | 318 | 77.1 | 63 | 6 | 27 | 1 | 3 | 82 | 2 | 0 | 24 | 20 | 2.33 | 1.16 | |
1984 | 세이부 | 20 | 0 | 0 | 0 | 0 | 1 | 2 | 8 | -- | .333 | 106 | 24.2 | 22 | 1 | 12 | 1 | 0 | 28 | 2 | 0 | 11 | 10 | 3.65 | 1.38 |
통산 : 18년 | 829 | 299 | 154 | 45 | 21 | 206 | 158 | 193 | -- | .566 | 12618 | 3196.0 | 2340 | 299 | 936 | 43 | 46 | 2987 | 43 | 6 | 985 | 884 | 2.49 | 1.03 |
- 각 연도의 굵은 글씨는 리그 최고, 붉은색 글씨는 일본 프로 야구 역대 최고 기록을 의미한다.
타이틀
- 최다 승리 : 2회 (1968년, 1973년)
- 최우수 평균자책점 : 1회 (1969년)
- 최다 탈삼진 : 6회 (1967년 ~ 1972년)
- 당시에는 연맹 표창이 없었으나, 센트럴 리그에서는 1991년부터 표창이 제정되었다.
- 6년 연속 수상은 스즈키 게이시와 함께 최장 타이 기록이다.
- 6회 수상은 가네다 마사이치에 이어 센트럴 리그 2위 기록이다.
- 최우수 구원 투수 (현재의 최다 세이브 투수) : 6회 (1977년, 1979년 ~ 1983년)
- 최다 타이 기록 (아카호리 모토유키, 사사키 가즈히로, 이와세 히토키와 동률)
- 5년 연속 수상은 역대 최장 기록이다.
- 최우수 구원 투수와 최다 세이브 투수를 합한 획득 수는 역대 최다이다.
- 세이브 수만으로 표창하는 제도는 2005년부터 재개되었다.
표창
- 사와무라 에이지상 : 1회 (1968년)
- 20세 시즌에서의 수상은 좌완 투수 최연소 기록이다.
- 최우수 선수 : 2회 (1979년, 1981년)
- 양대 리그에서의 수상은 일본 프로 야구 사상 최초이다.
- 베스트 나인 : 1회 (1968년)
- 최우수 투수 : 1회 (1968년)
- 올스타전 MVP : 3회 (1970년 2차전, 1971년 1차전, 1980년 3차전)
- 월간 MVP : 1회 (1979년 8월)
- 파이어맨상 : 2회 (1981년, 1982년)
- 일본 프로 스포츠 대상 수훈상 : 1회 (1968년)
주요 기록
- 첫 기록
- 첫 등판 : 1967년 4월 13일, 대 다이요 웨일스 2차전(가와사키 구장), 2회말에 2번째 투수로서 구원 등판, 4이닝 무실점
- 첫 탈삼진 : 상동, 2회말에 이토 이사오로부터
- 첫 선발 : 1967년 4월 19일, 대 다이요 웨일스 3차전(한신 고시엔 구장), 2이닝 4실점(3자책점)에서 패전 투수
- 첫 승리·첫 완투 승리 : 1967년 4월 29일, 대 히로시마 카프 1차전(한신 고시엔 구장), 9이닝 1실점
- 첫 완봉 승리 : 1967년 5월 28일, 대 다이요 웨일스 6차전(가와사키 구장)
- 첫 세이브 : 1974년 4월 10일, 대 히로시마 도요 카프 2차전(히로시마 시민 구장), 7회말에 2번째 투수로서 구원 등판·마무리, 3이닝 무실점
- 이정표 기록
- 1000탈삼진 : 1970년 7월 2일, 대 다이요 웨일스 12차전(가와사키 구장), 7회말에 시게마쓰 쇼조로부터 (역대 38번째)
- 1500탈삼진 : 1972년 4월 12일, 대 요미우리 자이언츠 1차전(한신 고시엔 구장), 2회초에 호리우치 쓰네오로부터 (역대 18번째)
- 100승 : 1972년 6월 21일, 대 히로시마 도요 카프 12차전(한신 고시엔 구장), 9이닝 3실점 완투 승리 (역대 58번째)
- 2000탈삼진 : 1974년 6월 13일, 대 히로시마 도요 카프 11차전(한신 고시엔 구장), 7회초에 후카사와 슈이치로부터 (역대 8번째)
- 150승 : 1975년 4월 20일, 대 요미우리 자이언츠 3차전(고라쿠엔 구장), 9이닝 2실점 완투 승리 (역대 27번째)
- 500경기 등판 : 1977년 9월 25일, 대 닛폰햄 파이터스 후기 12차전(고라쿠엔 구장), 9회말 1사 2번째 투수로서 구원 등판·마무리, 2/3이닝 무실점
- 2500탈삼진 : 1979년 5월 11일, 대 요미우리 자이언츠 5차전(히로시마 시민 구장), 5회초에 왕정치로부터 (역대 7번째)
- 600경기 등판 : 1979년 9월 19일, 대 한신 타이거스 23차전(한신 고시엔 구장), 6회말 2사 3번째 투수로서 구원 등판·마무리, 3과 1/3이닝 1실점 (역대 18번째)
- 100세이브 : 1981년 5월 6일, 대 한큐 브레이브스 전기 3차전(고라쿠엔 구장), 8회초 1사 2번째 투수로서 구원 등판·마무리, 1과 2/3이닝 무실점 (사상 최초)
- 700경기 등판 : 1981년 9월 12일, 대 한큐 브레이브스 후기 10차전(한큐 니시노미야 구장), 10회말 1사 2번째 투수로서 구원 등판·마무리, 가토 히데지에게 좌전 끝내기 적시타를 허용하여 패전 투수 (역대 9번째)
- 200승 : 1982년 7월 2일, 대 긴테쓰 버펄로스 후기 1차전(고라쿠엔 구장), 7회초 2사 2번째 투수로서 구원 등판·마무리, 2와 1/3이닝 무실점 (역대 18번째)
- 800경기 등판 : 1983년 8월 30일, 대 세이부 라이온스 18차전(세이부 라이온스 구장), 7회말 2사 4번째 투수로서 구원 등판·마무리, 2와 1/3이닝을 던져 3실점에서 세이브 투수 (역대 5번째)
- 기타 기록
- 노히트 노런 : 1973년 8월 30일, 대 주니치 드래건스 20차전(한신 고시엔 구장) (역대 48번째, 연장전에서의 달성은 일본 프로 야구에서 유일하며, 자신의 끝내기 홈런으로 결정)
- 시즌 225탈삼진 : 1967년 (고졸 신인으로서의 센트럴 리그 기록)
- 시즌 401탈삼진 : 1968년 (20세기 이후 세계 기록)
- 1경기 16탈삼진 : 1968년 8월 8일, 대 주니치 드래건스 17차전(주니치 스타디움) (센트럴 리그 기록)
- 23이닝 연속 탈삼진 : 1968년 8월 8일 ~ 8월 21일
- 41이닝 연속 무실점 : 1969년 4월 12일 ~ 5월 15일
- 1경기에서의 34타자 연속 범퇴 : 1970년 9월 26일, 대 주니치 드래건스 22차전(한신 고시엔 구장), 2회초 3아웃 ~ 13회초 3아웃
- 시즌 11무승부 : 1978년, 1980년 (2회, 우시지마 가즈히코, 후지카와 규지와 함께 센트럴 리그 타이 기록)
- 100승 100세이브 (사상 최초)
- 이후 야마모토 가즈유키, 사이토 아키오, 오노 유타카, 궈위안즈, 사사오카 신지가 달성했다.
- 선발 100승 100세이브는 에나쓰와 사사오카 두 명뿐이다.
- 전 구단 세이브 : 1984년 5월 3일, 대 닛폰햄 파이터스 6차전(세이부 라이온스 구장), 8회초 1사 3번째 투수로서 구원 등판·마무리, 1과 2/3이닝 무실점 (사상 최초, 교류전 도입 전의 달성자는 에나쓰가 유일하다.)
- 전 구단 패전 : (사상 최초, 달성자는 에나쓰와 스기우치 도시야 (13구단 패전) 뿐이다.)
- 올스타전 출장 : 16회 (1967년 ~ 1976년, 1978년 ~ 1983년)
- 올스타전 15연속 탈삼진 (1970년 ~ 1971년) (올스타전 기록)
5.2. 타격 기록
에나쓰는 타자로서 노히트 노런 달성 경기와 올스타전 9자 연속 탈삼진 달성 경기에서 모두 홈런을 쳤다. 특히 노히트 노런은 자신의 끝내기 홈런으로 달성했다. 공식전에서의 통산 타격 성적은 852타수 128안타, 타율 0.150, 7홈런, 52타점을 기록했다.
6. 은퇴 후 활동
에나쓰 유타카는 현역 은퇴 후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며 대중적인 인지도를 쌓았다.
6.1. 방송 활동 및 평론
현역에서 은퇴한 이듬해인 1985년부터 1993년까지 닛폰 TV와 라디오닛폰의 야구 해설자, 도쿄 주니치 스포츠의 야구 평론가로 활동했다. 이와 더불어 영화, TV 드라마,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등 탤런트와 배우로서도 다방면에서 활동했다.
1995년 4월 가석방된 지 약 한 달 후인 6월에는 분카 방송 라디오에 출연하여 야구 관련 논평을 시작했다. 1996년부터 2010년까지는 데일리 스포츠의 야구 평론가로 활동했으며, TV 오사카의 야구 해설자도 맡아 알기 쉽고 명쾌한 기술론으로 높은 평가를 받았다. 선수들을 '자네'라고 부르는 야구 해설자의 선구자 격으로, 본인은 이 호칭이 야구 선수라는 직업에 대한 존경의 표현이라고 말한다. 또한 주간 플레이보이 (슈에이샤)에 '에나쓰 유타카의 무법자 야구론'을 연재하고 있으며, 2007년까지는 슈칸 베이스볼 (베이스볼 매거진사)에 '에나쓰 유타카의 야구계 인간 교유전 '구인장'(球人蔵일본어)'도 연재했다.
프로 야구 마스터스 리그 팀인 도쿄 드림스와 모르츠 구단에 소속되어 활동하고 있다. 한신 타이거스에서는 2015년 1군 춘계 스프링 캠프, 2016년 2군 춘계 스프링 캠프에서 각각 임시 코치를 맡기도 했다.
2024년 7월 15일 도쿄 돔에서 개최된 요미우리-한신 OB전에서는 휠체어를 타고 참석했으며, 산소통을 사용하는 모습이 언론에 포착되어 많은 이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산케이 스포츠의 이나미 마코토 기자는 그의 모습에 "충격을 받았다"고 말하며, "스스로 호흡할 수 없는 답답함... '인생의 21구'를 보고 싶다"고 언급했다.
6.2. 법적 문제 및 재기
1993년 3월 2일, 각성제 단속법 위반(소지·사용) 혐의로 현행범으로 체포되었다. 체포되기 불과 며칠 전까지 닛폰햄 파이터스의 임시 투수 코치를 맡고 있었기에, 이 소식은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기소된 범죄 사실은 각성제 수용액 약 0.25 ml을 왼팔에 주사한 각성제 사용과, 각성제 총 52.117 g 및 각성제 수용액 약 0.5 ml의 소지였다.
재판은 같은 해 진행되었으며, 정상 참작 증인으로 노무라 가쓰야와 에모토 다케노리가 출석했다. 또한 에나쓰의 절친한 친구였던 기누가사 사치오는 관대한 처분을 호소했다. 같은 해 7월 15일 요코하마 지방재판소의 1심 판결에서는 "대량의 각성제(약 100 g)를 입수하여 본 사건으로 검거될 때까지 수년간 사용을 계속했으며, 지난해 9월경부터는 동거하던 여성에게도 권유하여 함께 사용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또한 "각성제 소지량은 약 52 g으로, 자가 사용 목적의 물품으로는 매우 드물게 대량이었다"는 점과 "동거 여성은 각성제 사용죄로 유죄 판결을 받았으며, 그 계기를 에나쓰가 만들었다"는 점이 지적되며, "형의 집행유예를 상당하다고 인정할 수 있는 사안이라고는 도저히 볼 수 없다"며 징역 2년 4개월의 실형이 선고되었다. 에나쓰 측은 실형 판결에 불복하여 항소했으나, 같은 해 12월 24일 도쿄 고등재판소는 항소를 기각했다. 에나쓰는 상고하지 않아 형이 확정되었고, 그대로 시즈오카 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1995년 4월 가석방되었다.
가석방된 후 약 한 달 뒤인 6월에는 분카 방송 라디오에 출연하여 야구 평론을 진행했다. 형무소의 규칙적인 생활 덕분에 건강 상태가 크게 개선되었으며, 에나쓰 본인도 출소 후 법정 변호에 나선 노무라 가쓰야, 에모토 다케노리, 기누가사 사치오 등 지인들에게 감사의 말을 전하며 "만약 형무소에 가지 않았더라면 나는 벌써 죽었을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작가 아베 조지는 "그렇게 오만불손했던 사나이가 무지하게 배려심 넘치는 사람이 되어 돌아왔다", "형무소에 들어갔다가 제대로 된 인간으로 돌아온 것은 야마모토 조지와 에나쓰뿐"이라고 말하며 수감 전후 에나쓰의 변화를 높이 평가했다. 닛폰 TV의 '언제 봐도 파란만장'이라는 프로그램에 게스트로 출연했을 당시 에나쓰는 출소 후 자택에 돌아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겠다는 결심을 하고 현역 시절 받았던 수많은 상이나 트로피 등을 모두 버렸다고 밝혔다.
7. 개인적인 삶과 관계
에나쓰 유타카는 야구계 안팎의 다양한 인물들과 깊은 관계를 맺으며 그의 삶과 야구 철학에 영향을 주고받았다.
7.1. 교류 및 영향
에나쓰는 고등학교 시절 연습 경기에서 처음 맞붙은 이후로 스즈키 게이시와 깊은 친분을 이어왔다. 한편, 스즈키와 불화가 있었던 노모 히데오는 에나쓰를 스승으로 존경했다. 과거 긴테쓰 버펄로스에서 감독을 맡았던 스즈키와 에이스였던 노모 간의 충돌 소문이 돌았을 무렵, 에나쓰는 자신의 저서에서 이에 대해 "트레이닝에 관한 노모의 주장도 이해하지만, 나의 경험으로 볼 때 스즈키 감독의 말도 모두 틀린 것은 아니며, 이 건에 대해서만큼은 노모에게 동조할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난카이 이적 후 노무라 가쓰야에게 깊이 감명받아 그를 따르게 되었고, 자택이 이웃이었던 덕분에 가족끼리도 왕래가 잦았다. 에나쓰가 밤늦게 귀가할 때면 노무라가 아직 어렸던 에나쓰의 딸을 자기 집 욕실에서 씻겨주기도 하는 등 노무라의 배려가 있었다고 한다. 에나쓰가 노무라를 따르게 된 계기는 앞서 언급한 이적 협상 과정에서 히로시마전에서의 지적이었다고 말하곤 하지만, 노무라는 이 일은 어디까지나 난카이로의 이적을 결정한 요인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노무라에 의하면, 에나쓰가 자신을 따르게 된 것은 에나쓰의 의도로도 보여지는 제구상의 실수로 패한 경기 후에 검은 안개 사건을 예로 들어 "의혹을 품은 인간이 '자신은 결백하다'고 입으로 몇 번을 말해도 아무도 믿지 않는다. 마운드 위에서의 태도로 보여달라"며 엄하게 질책했는데, 이에 대해 에나쓰는 "한신 시절은 이렇게 말로 하기 힘든 것을 말해주는 사람이 없었다"라고 감격했다고 한다. 에나쓰는 현재까지도 "야구에 대한 견식은 틀림없이 야구계 최고의 인물"이라고 노무라를 평가했고, 노무라도 생전에 에나쓰를 "자신이 접해본 투수 중에서 최고의 두뇌를 가진 친구였다", "사상 최고의 강속구 투수"라고 높게 평가했다.
히로시마 시절 기누가사 사치오와는 둘도 없는 친구였으며, 은퇴 후에도 기누가사가 사망할 때까지 교류를 이어갔다. 에나쓰의 저서에 의하면 "히로시마 시절에는 아내와 함께 있는 시간보다 사치(기누가사)와 함께 있는 시간 쪽이 길었다"고 한다. 기누가사의 사망 후에는 "좋은 친구를 두었다. 나의 보물이다. 나도 곧 따라갈 테니 저 세상에서 야구 이야기를 나누자"며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닛폰햄 시절 히로오카 다쓰로 감독의 집요한 번트 공격에 당해 플레이오프에서 패배한 경험을 통해 에나쓰는 히로오카의 야구관에 존경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1984년 세이부 이적 후에는 히로오카의 엄격한 관리 야구에 염증을 느끼고 반발하게 되었다. 에나쓰의 세이부 퇴단 직접적인 원인은 히로오카와의 불화였다. 에나쓰의 자서전에 따르면, 그는 사전에 노무라에게서 들은 대로 헤드 코치격인 모리 마사히코 배터리 코치의 말은 잘 들었으나(노무라와 모리는 팀을 초월한 오랜 친구이다) 히로오카와는 전혀 맞지 않았다. 결정적인 충돌 원인은 1984년 캠프 중 경영진도 참석한 조찬회 자리에서, 건강을 위해 현미나 두유 등을 선수들에게 평소에도 강제로 권하던 히로오카나 다른 코치, 선수들이 있는 가운데 "감독님, 이런 걸 드시는데 왜 통풍이세요?"라고 질문하여 히로오카의 분노를 샀고, 그 이후로 출전 기회가 줄어들었다고 한다. 에나쓰가 2군으로 내려간 것은 프로 18년 만에 처음이었다. 에나쓰는 훗날 히로오카에 대해 "인간적으로 용납할 수 없는 부분이 있었다"고 말했지만, 한편으로는 닛폰햄 시절 세이부로부터 받은 집요한 번트 공격 등을 통해 히로오카의 야구관을 높이 평가하며 "인간으로서는 문제가 있어도, 야구라는 면에서는 배울 점이 많았고 훌륭한 지도자였다"고 감독으로서의 히로오카를 높이 평가했다. 히로오카 또한 "에나쓰는 투구에 관해서는 훌륭했고, 무엇보다 머리가 매우 좋다"고 평가했다.
8. 평가 및 영향력
에나쓰 유타카는 선수로서의 뛰어난 업적뿐만 아니라, 일본 야구계와 사회 문화 전반에 걸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8.1. 야구계에서의 평가
에나쓰는 196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 초반에 걸쳐 선발 투수와 구원 투수 양쪽에서 가장 높은 평가를 받은 좌완 투수이다. 한신 시절에는 선발 투수로서 탈삼진 기록 등 숱한 대기록을 남겼다. 일반적으로 강속구 투수라고 하면 제구가 좋지 않다는 인식이 깔려있었지만, 에나쓰는 동 시기를 대표하는 강속구 투수이면서 제구력도 뛰어나 이를 자신의 업적으로 이어갈 수 있었다. 노무라 가쓰야의 요청에 의해 구원 투수로 전향한 난카이 시절부터는 그 높은 제구력으로 새로운 빛을 보았다. 구원 투수로서 세이브 기록이 공식적으로 채택되기 전이었지만 1967년부터 1973년까지 도합 37세이브를 올렸다.
그는 현재도 '20세기 최고의 투수 중 한 명'으로 손꼽히며, 히로시마와 닛폰햄 시절 기대 이상의 활약을 보이면서 팀의 우승을 이끌었다는 이유로 '우승 청부사'(優勝請負人일본어)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야후! 재팬이 기획한 '20세기 일본 프로 야구 베스트 나인' 투수 부문에서는 사와무라 에이지, 가네다 마사이치, 이나오 가즈히사 등 왕년의 간판 투수들을 제치고 1위에 선정되었다.
8.2. 문화적 영향
한신의 열혈 팬인 작가 오가와 요코의 소설 '박사가 사랑한 수식'(일본서점대상 수상작)에서는 에나쓰의 한신 시절 등번호인 '28번'(완전수)이 가지는 의미를 소재로 삼아, 작가로부터 열렬한 오마주를 받았다. 에나쓰 본인도 이 작품이 영화화되었을 때 감사의 메시지를 전했다고 한다.
9. 기타
에나쓰 유타카는 야구 외적으로도 다양한 취미와 활동을 가지고 있었다.
시바 료타로의 작품을 즐겨 읽었으며, 그중에서도 특히 '타올라라 검'을 가장 좋아하는 작품으로 꼽았다. 그 이유는 칼 한 자루로 싸우는 신선조와 왼팔 하나로 맞서 싸우는 자신, 그리고 주인공 히지카타 토시조의 최후의 땅인 하코다테시와 자신이 현역 마지막 무렵 메이저 리그에 도전했던 애리조나주가 묘하게 겹쳐지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또한 작품 속 한 여성 등장인물이 매우 매력적으로 느껴졌다고 덧붙였다.
현재는 술을 마시지 않는다. 체질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한신 시절 1970년 7월 말부터 심장마비에 시달렸고, 주치의로부터 "지금과 같은 무리한 생활을 계속하면 틀림없이 수년 내에 목숨을 잃을 것이다. 술, 담배, 여자, 마작 중 하나를 끊어라"는 말을 들은 후 술을 끊기로 결심했고, 심장병을 극복한 이후 현재까지 금주를 이어오고 있다. 다만 담배만은 도저히 끊을 수 없다고 TV 아사히의 '뉴스 스테이션' 코너 '최후의 만찬'에서 밝힌 바 있으며, 한때는 하루에 최대 80개비까지 피웠다고 한다.
1980년에는 가수로도 활동했는데, '나의 시'라는 앨범을 발표하여 7.00 만 JPY장이 넘게 팔린 적도 있다.
등번호
- 71 (1967년 입단 초)
- 28 (1967년 ~ 1975년)
- 17 (1976년 ~ 1977년)
- 26 (1978년 ~ 1983년)
- 18 (1984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