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초기 생애 및 교육
얀 코하노프스키의 초기 생애에 대한 자세한 정보는 주로 그의 작품에서 얻을 수 있으며, 그의 출생과 교육은 폴란드 귀족 가문의 전형적인 경로를 따랐다.
1.1. 출생과 가족
얀 코하노프스키는 1530년 폴란드 왕국 라돔 근처의 시치나에서 코르빈 문장을 가진 폴란드 귀족 가문인 슈라흐타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의 정확한 생년월일은 불분명하지만, 즈볼렌에 있는 그의 묘비에 1584년 8월 22일 54세로 사망했다고 기록되어 있어 1530년 출생이 가장 유력하게 받아들여진다. 1612년에 출판된 그의 전기에서는 1532년 출생으로 기록하기도 했다.
그의 아버지 피오트르 코하노프스키는 산도미에시 지역의 재판관이자 부유한 지주였으며, 라돔의 초대 집달리를 지냈다. 어머니 안나 비아와초프스카는 오드로봉시 가문 출신이었다. 얀은 11명의 형제자매 중 둘째 아들이었으며, 동생 안제이 코하노프스키는 베르길리우스의 "아에네이스"를 폴란드어로 번역한 것으로 알려져 있고, 미코와이 코하노프스키 또한 시인이자 번역가로 활동했다. 그의 아버지 피오트르는 1547년에 사망했다. 코하노프스키 가문은 높은 지적 수준을 유지했으며, 이는 얀뿐만 아니라 미코와이와 안제이 등 그의 동생들까지 문학에 관심을 갖게 된 배경이 되었다. 이러한 지적인 환경은 당시 주변 슈라흐타 가문들과는 차별화되는 특징이었다.
1.2. 교육 및 해외 유학
얀 코하노프스키의 초등 교육에 대한 정보는 거의 남아 있지 않다. 그는 14세가 되던 1544년 크라쿠프 학원에 입학했으며, 늦어도 1547년에는 학위를 받지 않고 학예학부를 떠난 것으로 추정된다. 학업 중단에는 1547년 전염병으로 인한 강의 연기와 아버지의 건강 악화(같은 해 사망)가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1547년부터 1550년 사이에는 독일의 어느 대학에서 공부했거나 대귀족의 저택에 머물렀을 것으로 추정된다. 1551년부터 1552년까지는 폴란드 왕국의 봉토였던 프로이센 공국의 쾨니히스베르크 알베르투스 대학교에서 수학했다. 이곳에서 그는 세네카의 "비극집"에 라틴어 사행시와 서명을 남겼는데, 이는 그의 첫 시적 시도이자 친구 스타니스와프 그제프스키(후일 야기엘론스키 대학교 교수)에게 헌정한 것이었다.
1552년부터 1550년대 후반까지는 이탈리아 파도바 대학교에서 고전 문헌학을 공부하며 인문주의 학자 프란체스코 로보르텔로와 교류했다. 파도바 재학 중 그는 최소 두 번 이탈리아와 폴란드를 오갔는데, 주로 학비 조달과 어머니의 장례식 참석을 위함이었다. 이 시기 코하노프스키는 재정적 어려움을 겪으며 후원자를 찾아야 했다.
1555년부터 1556년까지는 다시 쾨니히스베르크에서 프로이센 공 알브레히트 호엔촐레른의 후원을 받았다. 알브레히트 공은 야기엘론 가문의 후손으로, 폴란드 시인의 후원자 역할을 했다. 1556년 4월 6일자 편지에서 코하노프스키는 알브레히트 공에게 안질 악화를 이유로 이탈리아 재여행을 간청했고, 공은 4월 15일 추가적인 재정 지원을 약속했다. 그는 라돔에서 친척에게 70 PLN을, 동생 피오트르에게 100 HUF를 빌리기도 했다.
코하노프스키는 피오트르 쿠워초프스키와 함께 이탈리아를 여행했으며, 파도바 근처의 온천 휴양지인 아르바노 테르메를 방문한 것으로 보인다. 이탈리아 체류는 1557년 2월까지 이어졌고, 어머니의 사망 소식에 귀국했다. 그의 마지막 이탈리아 여행은 1558년 겨울이었으며, 이 해 말에 프랑스로 떠났다. 프랑스에서는 마르세유와 파리를 방문했고, 시인 피에르 드 롱사르를 만났다. 플라망 인문주의자 카렐 우텐호페가 그의 프랑스 여행에 동행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1559년 5월, 그는 폴란드로 영구 귀환했다.
2. 왕실 봉사와 경력
폴란드로 귀국한 후 코하노프스키는 왕실과 귀족 가문에서 활동하며 중요한 직책을 맡았고,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주요 정치적 사건들과도 연관되었다.
2.1. 폴란드 귀환과 궁정 생활
1559년 코하노프스키는 폴란드로 영구 귀환하여 인문주의자이자 르네상스 시인으로 활동했다. 귀국 후 처음 몇 년간의 활동은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1559년부터 1562년 사이의 기간은 문서 기록이 부족하다. 이 시기에 그는 크라쿠프의 보이보드 얀 타르노프스키와 영향력 있는 라지비우 가문 등 유력 귀족 및 궁정 인사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1559년 7월 11일에는 부모의 유산을 형제들과 분할하여 차르놀라스 영지의 절반과 루다, 제분소 등을 물려받았고, 형제들에게 400 PLN의 보상금을 지불했다. 1560년 3월 25일에는 삼촌 필립과 협정을 맺어 상속받은 토지를 400 PLN에 임대하기도 했다.

2.2. 왕실 비서관으로서의 활동
1563년 중반, 코하노프스키는 왕실 부재상 겸 주교인 피오트르 미슈코프스키의 비서로 들어가 왕실 비서관 칭호를 받았다. 1562년에서 1563년경에는 주교 필리프 파드니에프스키와 보이보드 얀 피를레이의 궁정인이었다. 1563년 말 또는 1564년 초부터는 지그문트 2세 아우구스트 국왕의 왕실에 소속되어 왕실 비서관으로 봉사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여러 중요한 사건에 국왕과 동행했다. 1567년에는 리투아니아-모스크바 전쟁의 일환으로 라다슈코비치 근처에서 벌어진 무력 시위에 국왕과 함께 참여했다. 1569년에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을 공식적으로 수립한 루블린 연합을 제정한 루블린 의회에 참석했다. 이 중요한 사건을 그는 자신의 작품 "소기, 혹은 프로이센의 맹세"에서 기록했다.
지그문트 2세의 사망 후, 코하노프스키는 프랑스 국왕 앙리 3세의 폴란드 왕위 후보를 지지했으며(1573년 선거에 기명), 1574년 바벨 대성당에서 열린 그의 대관식에도 참석했다. 그러나 앙리 3세가 폴란드를 떠난 후, 코하노프스키는 궁정 생활을 중단했다. 이후 스테판 바토리를 지지했지만, 다시 왕실 궁정으로 돌아가지는 않았다. 그는 선거 의회에 참여했으며, 왕실 서기관 얀 자모이스키의 후원을 받았다. 1576년에는 오파투프에서 열린 지방 의회(세이미크)에 왕실 특사로 참여하기도 했다. 1579년 10월 9일, 폴란드 국왕 겸 리투아니아 대공 스테판 바토리는 코하노프스키를 산도미에시의 기수로 임명했다.
2.3. 성직록 및 공직
코하노프스키는 궁정에서 활동하는 동안 두 개의 성직록(교구에서 나오는 수입)을 받았다. 1564년 2월 7일, 그는 미슈코프스키 주교가 포기한 포즈난 대성당의 참사회원(provost) 직을 맡게 되었다. 또한 키친 교구와 즈볼렌의 사제관에서도 수입을 얻었다.
3. 차르놀라스에서의 만년과 사생활
코하노프스키는 만년에 차르놀라스 영지에 정착하여 전원생활을 영위하며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냈고, 그의 문학적 걸작들이 탄생한 시기이기도 하다.
3.1. 결혼과 가족
1571년부터 코하노프스키는 루블린 근처의 차르놀라스에 있는 가족 영지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기 시작했다. 1574년, 그는 폴란드의 새로 선출된 국왕 앙리 드 발루아가 폴란드를 떠난 후 차르놀라스에 영구 정착하여 시골 지주로서의 삶을 살았다. 1575년, 그는 의회 대표 스타니스와프 루파 포드로도프스키의 딸인 도로타 포드로도프스카와 결혼하여 여섯 명의 딸과 한 명의 아들을 두었다. 차르놀라스에서 그는 사랑하는 딸 우르슐라의 죽음으로 큰 슬픔에 잠겼고, 이는 그의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 중 하나인 "애가"를 쓰는 계기가 되었다.
3.2. 지주로서의 삶
차르놀라스에서 코하노프스키는 영지를 관리하며 전원생활을 즐겼다. 그는 궁정의 정치 생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기로 결정했지만, 지역 차원에서는 사회 활동을 활발히 이어갔으며, 그의 보이보드십 수도인 산도미에시를 자주 방문했다. 1575년 7월에는 스텐지차에서 열린 슈라흐타 대회에 참가하여 새로운 군주 선출에 대해 논의했고, 같은 해 11월 바르샤바에서 열린 선거 의회에서는 합스부르크가문의 막시밀리안 2세의 폴란드 왕위 후보를 지지하는 연설을 하기도 했다.
4. 주요 문학 작품
코하노프스키는 라틴어와 폴란드어로 다양한 장르의 작품을 창작했으며, 이는 폴란드 문학의 중요한 기둥이 되었다. 그의 작품들은 서정시, 비극, 서사시, 풍자 등 폭넓은 스펙트럼을 보여준다.
4.1. 초기 작품과 라틴어 시
코하노프스키의 가장 초기 작품으로 알려진 것은 폴란드어 시 "대홍수의 노래"로, 1550년에 작곡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의 첫 출판물은 1558년 라틴어로 쓰인 "크레트코프스키의 묘비명"으로, 최근 사망한 동료 에라즘 크레트코프스키에게 헌정된 묘비명이었다. 파도바에서 보낸 젊은 시절의 작품들은 주로 비가, 에피그램, 오드로 구성되었다.
1559년 폴란드로 돌아온 후 그의 작품들은 대체로 서사시 형태를 띠었으며, 기념 서사시인 "얀 타르노프스키의 죽음에 대하여"(1561년)와 "텐치나 백작 얀 밥티스트에게 바치는 모든 미덕으로 풍요롭게 축복받은 추모"(1562~1564년) 등이 있다. 또한 "수잔나"(1562년)와 "깃발, 혹은 프로이센의 맹세"(1564년) 같은 진지한 작품들도 있었다. 사회 및 정치 비평을 담은 풍자시로는 "조화"(1562년경)와 "사티로스, 혹은 야만인"(1564년)이 있으며, 가벼운 분위기의 "체스"(1562~1566년경)는 최초의 폴란드어 "유머러스한 서사시 또는 영웅 희극 시"로 평가된다. 그의 일부 작품은 1560년대와 1570년대 왕실의 견해를 의회 의원과 유권자들에게 전달하는 저널리즘적 논평의 역할을 하기도 했다.
그의 라틴어 작품으로는 "서정시집"(1580년), "네 권의 비가"(1584년), 그리고 수많은 기회 시들이 있다. 그의 라틴어 시들은 1829년 카지미에시 브로진스키와 1851년 브와디스와프 시로콤라에 의해 폴란드어로 번역되었다. 얀 코하노프스키의 유일한 친필 작품으로 알려진 시 "드리아스 잠차나"는 2024년 5월부터 바르샤바의 폴란드 국립 도서관에서 영구 전시되고 있다.
4.2. 《프라슈키》(Fraszki, 에피그램)
"프라슈키"(에피그램)는 1560년대와 1570년대에 쓰인 294편의 짧은 시들을 모은 것으로, 1584년에 세 권으로 출판되었다. 이 작품은 조반니 보카치오의 "데카메론"을 연상시키며, 코하노프스키의 가장 인기 있는 작품이 되어 폴란드에서 많은 모방작을 낳았다. 1980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폴란드 시인 체스와프 미워시는 "프라슈키"를 "매우 개인적인 일기이지만, 저자의 개성이 전면에 드러나지 않는" 작품이라고 평했다.
4.3. 《트레니》(Treny, 애가)

"트레니"(애가)는 1560년대와 1570년대에 완성된 비가 연작으로, 1584년에 세 권으로 출판되었다. 이 19편의 가슴 아픈 비가는 두 살 반 된 사랑스러운 딸 우르슐라의 죽음을 애도하며 쓰여졌다. 이 작품은 1920년 도로테아 프랄에 의해, 1995년에는 스타니스와프 바라인차크와 셰이머스 히니에 의해 영어로 번역되었다. "프라슈키"와 마찬가지로, "트레니"는 폴란드 문학에서 새로운 장르의 영원히 인기 있는 원천이 되었다. 미워시는 "코하노프스키의 시적 예술은 '애가'에서 최고의 성취를 이루었다"고 평하며, "전체 연작이 하나의 주요 주제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코하노프스키의 혁신은 "세계 문학에서 독특한 것"이었고, 고전적인 형식을 개인적인 슬픔, 그것도 "하찮은" 주제인 어린아이에게 적용한 것이 일부 당대인들을 경악시켰다고 언급했다.
4.4. 《그리스 사절의 사퇴》(Odprawa posłów greckich)

"그리스 사절의 사퇴"는 1565년에서 1566년경에 쓰여졌으며, 1578년에 처음 출판되고 공연되었다. 이는 호메로스에게서 영감을 받아 트로이 전쟁으로 이어진 사건을 다룬 무운시 비극이다. 폴란드어로 쓰인 최초의 비극으로, 국가 통치의 책임이라는 주제는 오늘날까지도 울림을 준다. 이 연극은 1578년 1월 12일 바르샤바의 우야즈도프 성에서 얀 자모이스키와 크리스티나 라지비우워의 결혼식에서 공연되었다. 미워시는 "그리스 사절의 사퇴"를 "폴란드 인문주의 드라마의 가장 훌륭한 표본"이라고 불렀다.
4.5. 《노래》(Pieśni)와 《다비드 시편》(Psalterz Dawidów)
"노래"는 코하노프스키의 평생에 걸쳐 쓰여졌으며, 1586년에 사후 출판되었다. 이 작품은 이탈리아 서정시와 특히 호라티우스에 대한 "고대에 대한 그의 애착"을 반영하며, 폴란드 시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1579년 코하노프스키는 시편 중 하나인 "다비드 시편"을 폴란드어로 번역했다. 18세기 중반까지 이 작품은 최소 25판이 출판되었다. 음악에 맞춰진 이 시편은 폴란드 교회 미사와 대중문화의 영구적인 요소가 되었다. 또한 시메온 폴로츠키에 의해 러시아어로, 루마니아어, 독일어, 리투아니아어, 체코어, 슬로바키아어로 번역되는 등 국제적으로도 그의 가장 영향력 있는 작품 중 하나가 되었다. 역사가 노먼 데이비스는 "코하노프스키의 시편이 폴란드어에 미친 영향은 루터의 성경이 독일어에 미친 영향과 같다"고 평했다.
4.6. 기타 폴란드 시와 산문
코하노프스키는 "수잔나", "깃발, 혹은 프로이센의 맹세"와 같은 작품 외에도 사회 풍자적인 시 "조화", "사티로스, 혹은 야만인", 그리고 유머러스한 서사시 "체스" 등 다양한 장르의 폴란드어 작품을 남겼다. 그의 비시적 정치 논평 대화록으로는 "점쟁이"가 있다. 사후 출판된 역사 논문 "체흐와 레흐의 비난받는 이야기"는 레흐, 체흐, 루스의 기원 신화에 초점을 맞춰 슬라브 신화에 대한 최초의 비판적 문학 분석을 제공했다.
4.7. 번역 작품과 라틴어 저작
코하노프스키는 고대 그리스 및 로마 고전 작품들을 폴란드어로 번역했다. 여기에는 아라토스의 "현상"과 호메로스의 "일리아스" 단편, 그리고 에우리피데스의 비극 "알케스티스" 단편이 포함된다. 그의 주요 라틴어 작품으로는 "서정시집"(1580년), "네 권의 비가"(1584년) 등이 있으며, 이 외에도 수많은 기회 시들을 라틴어로 썼다.
4.8. 시적 특징 및 예시
얀 코하노프스키의 작품에 사용된 언어는 기술적 완성도와 현대성, 그리고 의도적인 수사법 사용 면에서 16세기 다른 작가들의 작품을 능가한다는 평가를 받는다. 예를 들어, 코하노프스키보다 약간 앞선 세대의 시인인 미코와이 레이의 언어와 비교했을 때, 코하노프스키의 언어는 훨씬 더 현대적이며, 그의 많은 시와 소품, 비가가 오늘날에도 큰 어려움 없이 읽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는 옛 문법의 사용이 적고(예를 들어, 당시 새로운 문법이었던 어미 '-ach'를 남성·중성 단수 명사의 전치격에 사용), 쌍수형의 사용이 절제되어 있으며, 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는 고풍스러운 표현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코하노프스키는 문체를 작품의 종류나 주제에 따라 다르게 구사했다. 시와 비가에서는 고상한 스타일을 사용했지만, 소품에서는 당시의 구어적 요소를 포함하는 '알기 쉬운 스타일'을 지향했다.
다음은 그의 시 "아나크레온에게"의 일부이다.
폴란드어 원문 | 한국어 번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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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철학과 사상
코하노프스키의 사상은 당대의 인문주의적 흐름과 깊은 종교적 신념이 조화롭게 어우러진 특징을 보인다.
5.1. 종교적 및 철학적 입장
코하노프스키는 당대 많은 사람들처럼 깊은 신앙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의 여러 작품들은 종교에서 영감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가톨릭교회와 개신교 교파 간의 갈등에서 어느 한쪽 편을 들지 않았다. 그는 양 기독교 흐름의 인물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으며, 그의 시는 양측 모두에게 수용 가능한 것으로 여겨졌다.
그는 스토아주의, 에피쿠로스주의, 르네상스 시기의 신플라톤주의, 그리고 고대 사상과 기독교적 신앙심을 결합한 깊은 신앙의 융합을 추구하는 절충주의 철학의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이러한 사상적 배경은 그의 작품 전반에 걸쳐 종교적 관용과 인문주의적 가치관으로 나타난다.
6. 영향력과 유산
얀 코하노프스키는 폴란드 언어와 문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그의 위상은 유럽 문학사에서도 높게 평가된다.
6.1. 폴란드 언어 및 문학에 대한 영향
코하노프스키는 아담 미츠키에비치 이전에 가장 위대한 폴란드 시인으로 평가된다. 폴란드 문학사학자 타데우시 울레비치는 코하노프스키가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뿐만 아니라 모든 슬라브족 국가에서 최고의 르네상스 시인으로 일반적으로 간주된다고 기록했다. 그의 우위는 19세기 폴란드 낭만주의자들(미츠키에비치, 율리우시 스워바츠키)과 러시아의 알렉산드르 푸시킨이 등장하기 전까지 흔들리지 않았다.
울레비치에 따르면 코하노프스키는 현대 폴란드 시를 창조하고 이를 유럽에 소개했다. 미국의 슬라브학자인 오스카 E. 스완은 코하노프스키가 "유럽적 규모에서 탁월함을 달성한 최초의 슬라브 작가"라고 평가한다. 미워시 또한 "19세기 초까지 가장 저명한 슬라브 시인은 의심할 여지 없이 얀 코하노프스키였으며", 그가 "폴란드 시의 모든 후속 발전에 방향을 제시했다"고 기술했다. 영국의 역사가 노먼 데이비스는 코하노프스키를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 다음으로 폴란드 르네상스의 두 번째로 중요한 인물로 꼽았다. 폴란드 시인이자 문학 평론가인 예지 야르니에비치는 코하노프스키를 "폴란드 문학의 창시자"라고 불렀다.
코하노프스키는 라틴어로 계속 글을 썼지만, 그의 주요 업적 중 하나는 폴란드어 시 형식을 창조하여 그를 당대와 후대의 고전으로 만들었다는 점이다. 그는 외국 시 형식을 폴란드어에 자연스럽게 접목하고 이를 민족 정신으로 채워 넣어 폴란드 시를 크게 풍요롭게 했다. 데이비스는 코하노프스키가 "폴란드 토착 시의 창시자 [이며] 폴란드인들에게 그들의 언어의 아름다움을 보여주었다"고 말한다.
미국 역사가 래리 울프는 코하노프스키가 "폴란드어 토착 문화 창조에 기여했다"고 주장하며, 폴란드 문학사학자 엘비라 부셰비치는 그를 "우아한 인문주의 폴란드어 시의 '창시자'"라고 묘사한다. 미국의 슬라브학자이자 번역가인 데이비드 웰시는 코하노프스키의 가장 큰 업적이 "시의 매체로서 폴란드어의 변혁"이었다고 썼다. 울레비치는 코하노프스키의 "노래"가 이 점에서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하며, 데이비스는 "코하노프스키의 시편이 폴란드어에 미친 영향은 루터의 성경이 독일어에 미친 영향과 같다"고 평했다. 코하노프스키의 작품은 리투아니아 문학 발전에도 영향을 미쳤다. 그는 일부 작품에서 각 행이 13음절로 구성되고 7번째 음절 뒤에 휴지가 오는 폴란드 알렉산드랭을 사용하기도 했다.
6.2. 유럽에서의 평가와 예술적 영감

코하노프스키는 오랫동안 슬라브어권 국가 외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그의 시집 중 최초의 영어 번역본은 1928년 조지 R. 노이스 등에 의해 출판되었고, 그를 다룬 최초의 영어 모노그래프는 1974년 데이비드 웰시에 의해 출간되었다. 1980년대 초까지도 코하노프스키의 저작은 영어 참고 문헌에서 대체로 간과되거나 간략하게 언급되었다. 그러나 최근에는 스타니스와프 바라인차크와 셰이머스 히니가 번역한 "애가"(1995년)와 빌 존스턴이 번역한 "사절"(2007년) 등 더 많은 영어 번역본이 출판되었다. 1894년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은 코하노프스키를 "폴란드 시인들의 왕자"라고 칭했다.
코하노프스키의 작품은 현대 폴란드 문학, 음악, 시각 예술에 영감을 주었다. 얀 코하노프스키의 시 구절들은 1817년 바르샤바에서 공연된 오페라 "얀 코하노프스키"의 대본에 사용되기도 했다. 19세기에는 "애가"와 "시편"의 음악적 편곡이 인기를 얻었다. 스타니스와프 모니우슈코는 "애가" 3, 5, 6, 10편의 가사에 맞춰 베이스와 피아노 반주를 위한 곡을 작곡했다. 1862년 폴란드 역사 화가 얀 마테이코는 그의 그림 "얀 코하노프스키와 그의 죽은 딸 우르슐라"에서 그를 묘사했다.
6.3. 폴란드어 사용 및 문체
폴란드어 학자들은 얀 코하노프스키의 작품에서 사용된 언어가 기술적 완성도, 현대성, 그리고 의도적인 수사법 사용 면에서 16세기 다른 작가들의 작품을 능가한다고 강조한다. 예를 들어, 코하노프스키보다 약간 앞선 세대의 시인인 미코와이 레이의 언어와 비교했을 때, 코하노프스키의 언어는 훨씬 더 현대적이며, 그의 많은 시와 소품, 비가가 오늘날에도 큰 어려움 없이 읽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는 옛 문법의 사용이 적고(예를 들어, 당시 새로운 문법이었던 어미 '-ach'를 남성·중성 단수 명사의 전치격에 사용), 쌍수형의 사용이 절제되어 있으며, 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는 고풍스러운 표현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코하노프스키는 문체를 작품의 종류나 주제에 따라 다르게 구사했다. 시와 비가에서는 고상한 스타일을 사용했지만, 소품에서는 당시의 구어적 요소를 포함하는 '알기 쉬운 스타일'을 지향했다.
언어 연구자들은 코하노프스키의 언어와 문체가 폴란드 문어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고 강조한다. 18세기 말에 이르기까지 후대 작가들이 그를 모범으로 삼았다. 18세기 말에조차 이그나치 크라시츠키는 시 "포도스트리 씨"에서 자신의 서재를 코하노프스키의 작품이 차지하고 있는 것이 자랑이라고 썼다. 아담 나루셰비츠는 코하노프스키로부터 몇 가지 모티프, 주제, 그리고 어휘조차도 이어받았다. 작센 선제후 시대(아우구스트 2세와 3세가 통치하던 1697년부터 1763년까지의 기간)에는 소홀히 여겨져 왔던 폴란드어가, 계몽 시대가 되어 아름답고 올바른 것이 요구되었을 때에 코하노프스키의 말이 재조명되었다.
7. 죽음과 기념
코하노프스키는 갑작스럽게 사망했지만, 그의 유산은 후대에 다양한 방식으로 기념되고 있다.
7.1. 사망 및 매장
얀 코하노프스키는 1584년 8월 22일 루블린에서 54세의 나이로 사망했으며, 사인은 심근경색으로 추정된다. 그는 의동생 야쿠바 포드로도프스키의 살인 사건과 관련하여 국왕에게 고소장을 제출하려던 중이었다. 그는 즈볼렌의 교구 교회 지하 묘지에 안장되었다. 역사 기록에 따르면 코하노프스키를 위한 묘비가 최소 두 개 세워졌으나, 현재는 남아 있지 않다.
1830년 즈볼렌 교회 당국은 코하노프스키 일가의 관을 영안실에서 교회 건물 근처의 가족 공동 묘지로 옮겼다. 1983년에는 그의 유해가 교회 지하에 복원된 대리석 석관으로 다시 옮겨졌고, 1984년에는 시인을 위한 재장례식이 거행되었다.
1791년, 역사가 타데우시 차츠키는 코하노프스키의 것으로 알려진 두개골을 그의 무덤에서 꺼내 폴리츠코에 있는 자신의 영지에 보관했다. 그는 나중에 이 두개골을 이자벨라 차르토리스타 공작부인에게 주었고, 1874년까지 차르토리스타 미술관으로 옮겨져 현재 그곳에 보관되어 있다. 그러나 2010년 인류학 연구 결과, 이 두개골은 여성의 것으로 밝혀졌으며, 코하노프스키의 아내의 것일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7.2. 유산과 기념 사업
코하노프스키의 첫 출판 시집은 1579년 인쇄된 "다비드 시편"이었다. 그의 여러 작품들은 사후에 출판되었는데, 1584년부터 1590년까지 크라쿠프에서 일련의 책으로 나왔고, "단편, 혹은 남은 글들"로 끝을 맺었다. 이 시리즈에는 그의 파도바 시절 작품과 "프라슈키"(에피그램)가 포함되었다. 1884년에는 바르샤바에서 기념 출판물이 나왔다.
시인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그를 찬양하는 수많은 문학 작품의 출판을 촉발했다. 안제이 투셰체스키의 작품, 세바스티안 파비안 크로노비츠의 13편의 비가 연작, 스타니스와프 니에고셰프스키의 시 등 많은 이들이 그를 기렸다. 1584년 연대기 작가 요아힘 비엘스키는 "코르빈 문장의 얀 코하노프스키는 죽었다. 이런 폴란드 시인은 폴란드에 더 이상 없으며, 재림도 기대할 수 없다"고 기록하며 그의 위상을 높이 평가했다. 1961년에는 코하노프스키의 차르놀라스 영지에 얀 코하노프스키 박물관이 개관하여 그의 삶과 작품을 기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