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초기 생애 및 배경
1.1. 출생과 가족
압둘라 아맛 바다위는 1939년 11월 26일, 말레이시아 페낭주 바얀 르파스의 캄풍 프를리스에서 독실하고 저명한 종교 및 정치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계 조상으로는 하드라미족 혈통의 할아버지 셰이크 압둘라 바다위 파힘이 있다. 셰이크 압둘라는 존경받는 종교 지도자이자 민족주의자였으며, 훗날 PAS로 알려진 히즈불 무슬리민의 창립 멤버 중 한 명이었다. 그는 독립 후 페낭의 초대 무프티가 되었다. 압둘라의 아버지 아맛 바다위는 저명한 종교인이자 UMNO의 창립 멤버 중 한 명이었다. 그의 어머니 카일란 하지 하산은 2004년 2월 2일 쿠알라룸푸르에서 8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외할아버지 하 수치앙(哈苏璋하수장중국어)은 하산 살레(Hassan Salleh)로도 알려져 있으며, 하이난섬 싼야시 출신의 우출족 무슬림이었다.
1.2. 교육
압둘라 아맛 바다위는 부킷 머르타잠 고등학교에서 중등 교육을 받았으며, 페낭의 메소디스트 남자 학교(MBS)에서 6학년 과정을 이수했다. 그는 원래 경제학을 전공하려 했으나 통계학 과목에서 낙제하여 경제학 학사 과정을 이수할 수 없게 되자, 이슬람 연구를 선택했다. 1964년, 그는 말라야 대학교에서 이슬람 연구 학사 학위를 취득했다.
2. 정치 경력
2.1. 정계 입문 및 초기 활동
1964년, 압둘라 아맛 바다위는 말라야 대학교를 졸업한 후 말레이시아 행정 및 외교단(공무원)에 합류하여 공직 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청소년 스포츠부의 청소년 국장과 국가운영위원회(MAGERAN) 비서관을 역임했다. 1969년 5월 인종 폭동 이후 설립된 행정 권한을 가진 기구인 국가운영위원회(MAGERAN)의 수석 보좌관으로 임명되어 1971년까지 재직했다. 이후 문화, 청소년 및 스포츠부의 사무총장으로 승진했으며, 1974년에는 같은 부처의 차관보가 되었다.
1978년, 그는 자신의 지역구인 프낭주 크팔라 바타스의 국회의원(MP)이 되기 위해 공직을 사임했다. 이 지역구는 그의 아버지가 이전에 대표했던 곳이기도 했다. 그는 1981년부터 UMNO 최고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다.
마하티르 모하마드 총리 재임 초기, 집권당인 UMNO 내에서 격렬한 분쟁이 발생하여 당은 마하티르 충성파인 '팀 A'와 전 재무부 장관 텅쿠 라자레이 함자 및 전 부총리 무사 히탐을 지지하는 '팀 B'로 나뉘었다. 압둘라는 그의 정치적 멘토인 무사 히탐의 강력한 지지자였으며 '팀 B'에 속해 있었다. 이로 인해 그는 내각에서 국방부 장관직에서 해임되었다. 그러나 그는 텅쿠 라자레이 함자가 설립한 스망앗 46 정당에 합류하지 않았다.
1988년 2월 UMNO (바루), 즉 신 UMNO가 창설되었을 때, 마하티르는 그를 UMNO (바루) 임시 위원회의 부총재로 다시 영입했다. 1990년 압둘라는 부총재직을 유지했다. 1991년 내각 개편 시, 마하티르는 그를 내각으로 복귀시켜 외무부 장관으로 임명했으며, 그는 1999년 11월 사이드 하미드 알바르가 후임이 될 때까지 이 직책을 유지했다. 비록 1993년 UMNO 선거에서 부총재직을 잃었지만, 그는 내각에 남아 외무부 장관으로 계속 활동했다. 1998년 이전에는 총리실 장관, 교육부 장관, 국방부 장관, 외무부 장관을 역임했다. 1999년 1월 7일, 마하티르 총리는 그를 부총리로 임명했으며, 압둘라는 2003년 마하티르의 뒤를 이어 총리가 되었다.
2.2. 장관 및 부총리 재임
압둘라 아맛 바다위는 말레이시아 정부에서 다양한 고위직을 역임하며 중요한 정책 결정과 외교 활동에 기여했다. 그는 1978년부터 1980년까지 연방 직할부의 의회 비서관을 지냈고, 1980년부터 1981년까지는 연방 직할부 차관을 역임했다.
이후 1981년부터 1984년까지 총리실 장관으로 재직했으며, 1984년부터 1986년까지 교육부 장관을 맡아 교육 정책 수립에 기여했다. 1986년부터 1987년까지는 국방부 장관으로 활동했다. 1991년 3월 15일부터 1999년 1월까지 외무부 장관을 역임하며 말레이시아의 외교 정책을 이끌었다.
1999년 1월, 안와르 이브라힘의 해임 이후, 압둘라는 부총리 겸 내무부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내무부 장관으로서 그는 이반족의 성경인 '이반 키탑'에 대한 금지 조치를 해제하기도 했다. 부총리 재임 기간 동안 그는 국가 경제 행동 위원회(MTEN)의 부의장직도 겸임했다. 2003년 10월 31일 총리로 임명될 때까지 그는 재무부 장관과 내부 안보부 장관직도 수행했다. 이처럼 그는 교육, 국방, 외교, 내무, 재무 등 핵심 부처의 장관직을 두루 거치며 말레이시아의 국내외 정치에 폭넓게 기여했다.
2.3. 총리 재임
2.3.1. 제1기 총리직 (2003-2008)
2003년 10월 31일, 압둘라 아맛 바다위는 말레이시아의 제5대 총리로 취임했다. 취임 직후 그는 부패 척결을 강력히 약속하며 반부패 기관에 권한을 부여하고 대중이 부패 행위를 폭로할 수 있는 더 많은 경로를 제공했다. 그는 이슬람과 경제 및 기술 발전 간의 상호 호환성을 주장하는 '이슬람 하다리'(Islam Hadhari말레이어)라는 이슬람 해석을 주창했다.
2004년 말레이시아 총선거에서 압둘라는 총리로서 첫 선거에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그가 이끄는 여당 연합 국민전선은 전체 220개 의석 중 198개 의석을 확보하며 의회에서 압승을 거두었고, PAS로부터 트렝가누주 주정부의 통제권을 되찾았으며, PAS의 전통적인 거점인 클란탄주를 거의 장악할 뻔했다. 이 승리는 그의 온건한 이슬람 비전과 반부패 정책에 대한 대중의 지지를 보여주는 것으로 널리 평가되었다.
2.3.2. 제2기 총리직 (2008-2009)
2008년 3월에 치러진 2008년 말레이시아 총선거에서 압둘라 아맛 바다위는 총리로서 두 번째 임기를 확보했지만, 의석수가 감소하며 과반수 의석을 줄였다. 국민전선은 의회에서 근소한 과반수 의석을 얻었으나, 말레이시아 독립 이래 최저치인 3분의 2 이상의 의석을 상실했고, 야권연합에 5개 주(州)를 내주었다. 특히 크다주, 페낭주, 페락주, 슬랑오르주 등 4개 주를 야당에 빼앗겼다.
비록 그의 소속 정당인 국민전선이 큰 타격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압둘라는 마하티르 모하마드 전 총리, 야당, 심지어 UMNO 내부 인사들의 사임 요구에도 불구하고 공약 이행을 다짐했다. 그러나 그의 부총리 나집 라작과 당내 다른 인사들은 그의 리더십에 대한 전폭적인 지지를 표명했다. 하지만 풀뿌리 차원에서는 그의 사임을 요구하는 청원과 캠페인이 시작되면서 공개적인 불만이 확산되기 시작했다.
2008년 3월 10일, 압둘라는 총리로서 두 번째 임기를 시작했다. 2008년 3월 18일, 그는 이전 행정부 장관의 절반을 교체하고 핵심 재무 포트폴리오를 직접 유지하는 등 68명으로 구성된 간소화된 내각을 발표했다. 압둘라는 야당의 공세뿐만 아니라 UMNO 당내에서도 커지는 불만으로 인해 정치적 위기에 직면했다. 전 총리 마하티르 모하마드의 아들인 무크리즈 마하티르는 공개적으로 그의 사임을 요구했지만, UMNO 청년단장 히샴무딘 후세인은 이를 개인적인 의견으로 일축했다.
2008년 5월 19일, 마하티르와 압둘라 간의 갈등은 마하티르가 압둘라 바다위의 리더십에 대한 신뢰를 잃었다며 22년간 UMNO 총재를 지냈던 당을 탈당하겠다고 발표하면서 절정에 달했다. 마하티르는 압둘라가 UMNO 총재와 총리직에서 물러난 후에야 당에 재가입하겠다고 밝혔다. 2008년 9월 15일, 압둘라 내각의 총리실 장관인 자이드 이브라힘 상원의원은 정부가 내부안보법에 따라 블로거, 국회의원, 기자를 구금한 것에 항의하며 총리에게 사직서를 제출했고, 압둘라는 이를 수락했다.
2.4. 정당 지도자
압둘라 아맛 바다위는 UMNO의 제6대 총재이자 당시 집권 연합인 국민전선의 의회 연합을 이끌었다. 그는 1984년, 1987년, 1990년에 UMNO 부총재로 선출되었고, 1996년에 재선되었다. 2000년 UMNO 총회에서 그는 2000년부터 2003년까지의 임기 동안 부총재로 임명되었다.
2004년 9월, 압둘라는 UMNO 총재직을 맡게 되었다. 그의 리더십 아래 국민전선은 2004년 말레이시아 총선거에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으나, 2008년 말레이시아 총선거에서는 의석수가 크게 감소하며 정치적 위기에 직면했다. 이로 인해 마하티르 모하마드 전 총리를 비롯한 당내외 인사들로부터 사임 압력을 받았다. 2008년 5월 19일, 마하티르는 압둘라의 리더십에 대한 신뢰를 잃었다며 UMNO를 탈당한다고 발표하기도 했다.
3. 총리직 사임 및 권력 이양
압둘라 아맛 바다위는 2008년 3월 제12차 총선거에서 국민전선이 저조한 성과를 보이자, 마하티르 모하마드 전 총리를 비롯한 UMNO 당내 많은 인사들로부터 총선 실패에 대한 전적인 책임을 지라는 강력한 압력을 받았다.
2008년 7월 10일, 압둘라는 2009년 중반에 UMNO 총재직과 총리직에서 물러날 것이라고 발표했다. 그는 2009년 4월 1일 열린 UMNO 총회에서 후임자인 나집 라작에게 권력을 이양하며 사임했다. 나집은 압둘라가 계속해서 국회의원으로 활동할 크팔라 바타스 지역구가 계속해서 개발 자금을 지원받을 것이라고 약속했다.
압둘라 바다위는 2009년 4월 2일 양 디-페르투안 아공에게 사직서를 제출했으며, 2009년 4월 3일 나집 라작이 그의 뒤를 이어 총리로 취임했다. 압둘라는 국가에 대한 봉사를 인정받아 미잔 자이날 아비딘 국왕으로부터 "툰" 칭호를 수여받았다.
4. 개인사
4.1. 결혼과 가족

압둘라 아맛 바다위는 1965년 엔돈 마흐무드와 결혼하여 두 자녀와 네 손주를 두었다. 엔돈은 2003년 유방암 진단을 받았으며, 그녀의 쌍둥이 자매 노라이니도 같은 병으로 2003년 1월에 사망했다. 엔돈은 미국에서 치료를 받았으나, 2005년 10월 20일 유방암으로 사망했다. 그녀는 푸트라자야의 타만 슬라탄에 있는 무슬림 묘지에 안장되었다.
2007년 6월 6일, 총리실은 압둘라 바다위가 잔 압둘라와 재혼한다고 발표했다. 6월 9일, 총리 관저인 스리 페르다나에서 가까운 친지들만 참석한 가운데 비공개 결혼식이 거행되었다. 잔은 압둘라의 전 부인 엔돈의 남동생과 이전에 결혼했었으며, 스리 페르다나 주거 단지의 관리자였고, 이전 결혼에서 두 자녀를 두었다.
압둘라는 사위인 카이리 자말루딘이 UMNO 정치에서 부당하게 영향력을 행사하도록 허용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또한 그의 형제인 파힘 이브라힘 바다위가 정부 통제 기업인 MAS 케이터링(MAS Catering Sdn Bhd)의 지분 51%를 매입한 후 루프트한자 LSG 스카이셰프에 막대한 이익을 남기고 매각한 것에 대해서도 비판을 받았다.
4.2. 기타 개인적인 면모
압둘라 아맛 바다위는 '인적 자본 개발의 아버지'(Bapa Pembangunan Modal Insan말레이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으며, 개인적으로 다양한 면모를 지닌 인물이다. 그는 시인으로도 알려져 있으며, 그의 시 "나는 영원한 평화를 찾는다"(Ku Cari Damai Abadi말레이어)는 80개 이상의 언어로 번역되어 책으로 출판될 정도로 큰 호응을 얻었다. 이 시는 말레이시아 문학계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는 가족과 함께 저녁 식사를 즐기고 일본 요리와 페낭의 다양한 음식을 좋아한다. 매일 마그리브 기도 후에는 꾸란을 읽는 경건한 생활을 하며, 자위 문자로 메모를 쓰는 습관이 있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셰익스피어 작품은 "율리우스 카이사르"이다. 가족 외에 그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인물은 툰 압둘 라작으로, 압둘라는 그를 자신의 멘토로 여겼다.
2001년 9·11 테러는 그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고, 이는 그가 온건한 이슬람 사상인 '이슬람 하다리'(Islam Hadhari말레이어)를 주창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또한 자동차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지만, 안전상의 이유로 직접 운전할 기회는 많지 않았다. 업무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해 골프를 치거나 운동을 하고 손주들과 시간을 보낸다. 그는 뮤지컬 "마이 페어 레이디"와 냇 킹 콜과 같은 고전 음악가를 좋아하며, 아이팟 나노를 소유하기도 했다. 말레이시아 예술을 존중하며 목각 예술과 라탄 직조품을 수집하는 취미도 가지고 있다.
2007년 5월에는 메이지 대학으로부터 명예 박사 학위를 수여받았으며, 2011년에는 킹 파이살 국제상 이슬람 봉사 부문을 수상했다. 그러나 2022년 9월 11일, 그의 사위 카이리 자말루딘은 압둘라가 치매를 앓고 있어 가족을 알아보지 못하며 휠체어를 사용해야 하는 상태라고 밝혔다.
5. 논란 및 비판
5.1. 부패 방지 노력 및 비판
압둘라 아맛 바다위 행정부는 부패 방지 노력을 제대로 이행하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에릭 치아와 당시 토지 및 협동조합 개발부 장관이었던 카시타 가담과 같은 저명인사들을 부패 혐의로 기소하려는 움직임 이후, 압둘라 바다위 행정부의 부패 척결 노력은 투명성이 떨어진다는 지적을 받았다. 이코노미스트지는 부패 억제에 거의 진전이 없었다고 언급했다. 그가 부패에 은밀히 계속 맞서 싸웠는지, 아니면 의도적으로 노력을 늦췄는지에 대한 논쟁이 있었다.
5.2. 마하티르 모하마드와의 갈등
압둘라 아맛 바다위와 전임 총리 마하티르 모하마드 사이에는 재임 기간 동안 여러 정치적, 정책적 갈등이 있었다.
2005년, 압둘라 바다위 행정부 하에서 외국산 차량 수입 허가(AP) 배분과 관련하여 정실주의 사례가 크게 증가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마하티르 전 총리는 이 문제에 대한 조사를 촉구했다. 이후 마하티르는 압둘라가 말레이시아와 싱가포르를 잇는 코즈웨이를 대체할 다리 건설과 같이 자신이 시작했던 여러 개발 프로젝트를 취소한 것에 대해 비판했다. 마하티르는 압둘라가 싱가포르 공군이 말레이시아 영공으로 비행하는 것을 허용하고 다리 건설 합의의 대가로 싱가포르에 모래를 판매했다고 주장하며, 이를 말레이시아의 주권을 "판매"하는 행위로 간주했다.
2006년, 마하티르는 압둘라에 대한 비판을 이어가며, 압둘라 행정부 하에서 언론의 자유가 감소했다고 비난했다. 마하티르는 언론이 자신의 발언을 보도하기를 꺼려한다고 덧붙였다. 마하티르는 압둘라가 정부 정책에 대해 자신에게 했던 약속을 어겼다고 비난하며, 압둘라가 자신의 신뢰를 배신했다고 강하게 비판했다. 마하티르는 압둘라를 후임자로 선택한 것을 후회하며, 원래는 당시 부총리였던 나집 라작이 자신을 계승하기를 원했다고 말했다. 당시 인도 공식 방문 중이던 나집은 즉시 압둘라에 대한 전폭적인 지지를 표명했다.
2006년 10월경, 마하티르는 압둘라가 기만적인 습관을 가지고 있다고 비난했다. 이는 압둘라가 효과적인 결정을 내리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는 비판에서 비롯되었으며, 그의 결정이 말레이시아 국민들 사이에서 논란을 일으킬 때마다 그는 항상 "국민"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모든 국민이 자신의 결정을 의심 없이 지지하는 것처럼 보이게 하려 했다는 것이다. 비평가들은 압둘라의 통치를 마하티르의 통치와 비교하며, 마하티르가 말레이시아의 민족 간 화합을 유지하는 데 더 성공적이었다고 주장했다.
2008년 5월 19일, 마하티르는 압둘라 바다위의 리더십에 대한 신뢰를 잃었다며 UMNO를 탈당한다고 발표했다. 그는 압둘라가 UMNO 총재와 총리직에서 물러난 후에야 당에 재가입할 것이라고 밝혔다.
5.3. 언론 자유 및 시위 관련
압둘라 아맛 바다위 행정부는 언론 자유와 시위 통제와 관련하여 여러 비판에 직면했다.
압둘라는 자신의 행정부를 개선하는 데 도움이 되는 비판이나 의견을 환영한다고 말했지만, 2006년 UMNO 총회에서 자신의 경제 정책을 비판한 무크리즈 마하티르에게 경고를 주었다. 그의 정부는 웹사이트, 포럼, 블로그와 같은 "지하" 정보원들을 통제하려 시도했으며, 이러한 매체를 통해 비판하는 사람들을 "신뢰성 없는 인물"로 간주했다. 말레이시아 정부는 멀티미디어 슈퍼 코리도어(MSC) 보증서에 따라 인터넷 자유를 보장했으므로, 인터넷상의 언론 자유를 억압하려는 시도는 무의미하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압둘라는 친민주주의 시위대에 대해 강경하게 대응하겠다고 맹세했으며, 경찰이 시위를 진압하고 참가자들을 체포하는 것을 지지했다. 이는 2007년 11월 10일 열린 버르시 2007 집회와 같은 여러 평화적인 친민주주의 집회에 대한 언론 금지로 이어졌다. 말레이시아 정부가 통제하는 현지 언론은 이러한 사건을 충분히 보도하지 않았지만, 알자지라, 로이터, BBC, CNN과 같은 해외 언론은 이를 상세히 보도했다. 압둘라는 이에 대해 자신이 "도전받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고 언급했다.
2008년 9월 15일, 압둘라 내각의 총리실 장관인 자이드 이브라힘 상원의원은 정부가 내부안보법에 따라 블로거, 국회의원, 기자를 구금한 것에 항의하며 총리에게 사직서를 제출했고, 압둘라는 이를 수락했다.
5.4. 기타 논란
압둘라 아맛 바다위의 재임 기간 동안 여러 다른 논란과 비판이 제기되었다.
2006년, 압둘라는 11건의 교통 법규 위반 혐의로 기소되었다고 보도되었다. 여기에는 5건의 과속, 4건의 교통 방해, 2건의 역주행 주차 위반이 포함되었다. 압둘라는 자신이 11건의 미납 교통 위반 딱지가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고 말했다.
2007년, 압둘라는 처음으로 말레이시아를 이슬람 국가라고 칭했다. 그러나 그 달 초에는 말레이시아가 신정 국가도 세속 국가도 아니라고 발언하기도 했다. 2009년 3월 12일에는 말레이시아가 "네가라 이슬람"(negara Islam말레이어, 이슬람 국가)이라고 재차 언급했다. 이에 대해 말레이시아 화교를 대표하는 정치 단체인 말레이시아 화교 협회(MCA)는 우려를 표명하며, 말레이시아는 완전한 세속 국가이며 법이 종교를 초월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라크 석유-식량 프로그램 남용에 연루된 친척들을 옹호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또한 그의 아들 회사 중 하나인 스코미 정밀 엔지니어링(Scomi Precision Engineering)이 리비아의 비밀 우라늄 농축 프로그램에 사용될 것으로 추정되는 원심분리기 부품을 생산한 사실이 밝혀진 후에도 비판을 받았다.
2008년 6월 18일, 집권 국민전선 연합의 일원인 사바 진보당(SAPP)은 연방 의회 내 두 명의 의원이 압둘라에 대한 불신임 동의안을 제출하거나 지지할 것이라고 밝혔다. 말레이시아에서는 심각한 불신임 투표가 전례가 없었으며, 압둘라가 투표에서 패할 경우 (가능성은 낮았지만) 조기 총선이 치러질지, 국왕이 의회를 해산할지, 아니면 새로운 지도자가 새 정부를 구성할 기회를 얻을지는 불분명했다. 말레이시아 총리가 자신의 연합 소속 의원으로부터 불신임 투표에 직면한 적은 없었다. 국민전선은 222석 중 140석을 확보하고 있어, UMNO 총재이기도 한 압둘라에 대한 어떤 투표도 부결시킬 수 있는 충분한 의석을 가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동의안은 발의될 근거가 없다는 이유로 의장에 의해 기각되었다. SAPP는 압둘라에 대한 신뢰를 잃었다며 국민전선을 탈퇴했다.
2008년 1월 28일, 압둘라 바다위는 말레이시아가 '2007년 세계 경쟁력 보고서'에 따르면 국가 경쟁력 부문에서 세계 8위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 주장은 인구 2천만 명 이상 국가 카테고리 내에서만 사실이었으며, 전체 순위에서는 말레이시아가 23위에 불과했다. 안와르 이브라힘 전 부총리는 압둘라의 이러한 발언이 말레이시아 경제 기반이 그의 통치 하에서 발전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숨기려는 매우 미약한 시도라고 비판했다. 안와르는 말레이시아의 경쟁력이 계속 하락하고 있으며, 과거 싱가포르 및 홍콩과 동등했던 말레이시아 경제가 이제 세계 23위인 반면 싱가포르는 2위, 홍콩은 3위라고 지적했다. 안와르는 말레이시아가 세계적 수준의 경제 강국으로 거듭나려면 더욱 유능한 리더십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2010년 4월 30일, 마하티르 모하마드 전 총리는 압둘라 바다위가 2008년 조기 퇴임하기 전에 브루나이에 해상 석유 생산 블록 L과 M 두 곳을 넘겨주었다고 주장했다. 이 블록은 석유가 풍부한 지역으로, 사라왁주 림방 지역과의 교환 조건이었다고 알려졌다. 그러나 압둘라는 이를 부인하며, 마하티르가 언급한 남중국해의 '블록 L과 M'의 출처에 대해 해명했다.
6. 수상 및 영예
압둘라 아맛 바다위는 국내외에서 수많은 훈장, 상, 명예 학위를 수여받으며 그의 공로를 인정받았다.
- 말레이시아:
왕국 수호 훈장 대사(SMN) - 툰 (2009년)
왕국 수호 훈장 장교(KMN) (1975년)
왕국 수호 훈장 단원(AMN) (1971년)
제10대 양 디-페르투안 아공 즉위 메달
제11대 양 디-페르투안 아공 즉위 메달
제12대 양 디-페르투안 아공 즉위 메달
제13대 양 디-페르투안 아공 즉위 메달
제14대 양 디-페르투안 아공 즉위 메달
- 연방 직할구:
영토 왕관 훈장 대기사(SUMW) - 다툭 스리 우타마 (2010년)
- 조호르주:
조호르 왕실 훈장 1등급(DK I) (2004년)
- 크다주:
크다 최고 공로 훈장(DUK) (2006년)
- 클란탄주:
클란탄 왕실 훈장(DK) (2006년)
- 믈라카주:
믈라카 최고 훈장 대기사(DUNM) - 다툭 스리 우타마 (2004년)
- 느그리슴빌란주:
느그리슴빌란 충성 훈장 대기사(SPNS) - 다토 스리 우타마 (2000년)
- 파항주:
파항 인드라 왕관 왕실 훈장 1등급(DK I) (2006년)
파항 술탄 아흐마드 샤 훈장 대기사(SSAP) - 다토 스리 (1999년)
- 페낭주:
주 수호 훈장 대기사(DUPN) - 다토 스리 우타마 (2004년)
주 수호 훈장 사령관(DGPN) - 다토 스리 (1997년)
주 수호 훈장 동료(DMPN) - 다토 (1981년)
주 수호 훈장 단원(DJN) (1979년)
- 페락주:
페락 술탄 아즐란 샤 왕실 훈장 일반 등급(SPSA) - 다토 스리 디라자 (2003년)
술탄 아즐란 샤 은혼 기념 메달 (2009년)
- 프를리스주:
용감한 왕자 사이드 시라주딘 자말룰라일 훈장 대기사 동료(SSSJ) - 다토 스리 디라자 (2001년)
투안쿠 사이드 시라주딘 자말룰라일 즉위 메달
- 사바주:
키나발루 훈장 대사(SPDK) - 다툭 스리 팡리마 (1999년)
- 사라왁주:
사라왁 코뿔새 별 훈장 대기사(DP) - 다툭 파팅기 (2003년)
- 슬랑오르주:
슬랑오르 왕관 훈장 대기사(SPMS) - 다토 스리 (2000년)
술탄 살라후딘 압둘 아지즈 샤 훈장 기사 동료(DSSA) - 다토 (1992년)
술탄 샤라푸딘 즉위 메달
- 트렝가누주:
트렝가누 술탄 미잔 자이날 아비딘 훈장 최고 등급(SUMZ) - 다토 스리 우타마 (2005년)
- 브루나이:
브루나이 왕실 훈장 1등급(DK) - 다토 라일라 우타마 (2010년)
- 인도네시아:
인도네시아 공화국 성 (2등급) (2007년)
투나스 켄차나 배지 (2007년)
- 대한민국:
수교훈장 광화대장 (1992년)
수교훈장 광화장 (1983년)
- 일본:
서보장 대수장 (1991년)
- 칠레:
칠레 공로 훈장 대십자 (1994년)
- 태국:
백상장 대기사 훈장 (1994년)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우의훈장 1급 (1997년)
- 쿠바:
호세 마르티 훈장 (2004년)
- 미시간 서부 대학교 명예 박사 (1987년)
- 자미아 밀리아 이슬라미아 대학교 명예 문학 박사 (인도, 뉴델리) (2004년)
- 샤리프 히다야툴라 자카르타 주립 이슬람 대학교 이슬람 사상 분야 명예 박사 (2006년 7월 24일)
- 메이지 대학 명예 박사 (2007년 5월)
- 말레이시아 공학 연구소 명예 펠로우십 (2001년)
- 런던 공인 마케팅 연구소 명예 펠로우십 (1999년)
7. 평가 및 영향
압둘라 아맛 바다위는 말레이시아의 정치 및 사회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인물로 평가된다. 그는 '미스터 클린' 또는 '팍 라'(Pak Lah말레이어, '압둘라 삼촌'이라는 뜻)라는 별명으로 불리며, 청렴하고 온화하며 국민에게 개방적인 태도로 높은 인기를 누렸다. 또한 그는 '인적 자본 개발의 아버지'(Bapa Pembangunan Modal Insan말레이어)로 불리며, 이슬람과 경제 및 기술 발전의 조화를 강조하는 '이슬람 하다리'(Islam Hadhari말레이어) 개념을 도입하여 국가 발전에 이슬람적 가치를 접목하려 했다. 이는 말레이시아의 정체성과 발전 방향에 대한 중요한 담론을 제시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의 총리 재임 초기인 2004년 말레이시아 총선거에서의 압도적인 승리는 그의 온건한 이슬람 비전과 반부패 정책에 대한 대중의 강력한 지지를 보여주었다. 그는 부패 척결을 약속하며 반부패 기관에 권한을 부여하는 등 투명한 거버넌스를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경제적으로는 제조업 기반을 유지하면서도 농업 분야의 잠재력을 개발하여 부가가치 경제로 전환하려는 정책을 추진했다.
그러나 그의 리더십은 후반기에 들어서면서 여러 도전에 직면했다. 2008년 말레이시아 총선거에서 집권 여당이 3분의 2 이상의 의석을 상실하고 여러 주를 야당에 내주면서 그의 정치적 입지는 약화되었다. 이는 경제 정책, 인플레이션, 생활비 상승 문제에 대한 비판과 맞물려 그의 지지율 하락으로 이어졌다. 특히 마하티르 모하마드 전 총리와의 갈등은 그의 리더십에 대한 공개적인 비판과 사임 요구를 촉발하는 주요 요인이 되었다. 언론 자유 통제 시도, 시위 진압 정책, 그리고 말레이시아의 정체성(이슬람 국가 선언)에 대한 논란 등도 그의 재임 기간 동안 제기된 주요 비판점이었다.
결과적으로 압둘라는 2009년 총리직에서 사임했지만, 그의 재임 기간 동안 추진된 이슬람 하다리 개념과 인적 자본 개발 노력은 말레이시아 사회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의 리더십은 온건함과 청렴함을 상징했지만, 동시에 정치적 압력과 변화하는 사회적 요구에 직면하며 권력 이양을 선택한 시기로 기억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