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초기 생애 및 배경
압둘 하크는 낭가르하르주의 작은 마을인 세이단에서 파슈툰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의 본명은 후마윤 아르살라이다. 어린 시절 가족과 함께 헬만드주로 이주했으며, 그의 아버지 모하메드 아만은 낭가르하르 건설 회사의 헬만드 대표로, 아프가니스탄 기준으로는 상대적으로 부유한 편이었다.
1.1. 어린 시절과 교육
하크는 스스로를 다루기 힘든 아이였다고 회고했다. 그는 5세의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설득하여 학교에 등록했고, 한 번은 수업 중에 잠든 교사를 때리기도 했다. 그로부터 1년 뒤, 51세의 아버지가 신장병으로 사망하면서 딘 모하마드가 가족의 리더십을 맡게 되었고, 가족은 낭가르하르의 친척 집으로 돌아갔다.
파테하바드로 돌아온 하크는 지역 물라의 가르침 아래 마드라사에 다니기 시작했고, 8세가 되자 리세(Lycée)에서 공부했다. 그는 이곳에서 일부 교사들의 공산주의 이념에 도전하기 시작했다. 그는 파슈투어, 다리어,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할 수 있었다.
1.2. 가족 및 가문
하크의 가문은 아르살라 켈 가문으로, 토지를 소유한 아흐마드자이 부족의 하위 부족인 자바르 켈의 일부였다. 그의 가문은 사회적으로 잘 연결되어 있었다. 그의 친할아버지인 와지르 아르살라 칸은 한때 아프가니스탄의 외무장관을 역임했으며, 그의 사촌 헤다야트 아르살라는 세계은행 이사로 워싱턴 D.C.에서 근무하다가 후에 하미드 카르자이 행정부에서 아프가니스탄 부통령이 되었다.
하크에게는 두 명의 형과 한 명의 남동생이 있었다. 형으로는 하지 딘 모하마드와 압둘 카디르가 있었고, 남동생으로는 나스룰라 바리알라이 아르살라이가 있었다. 하미드 카르자이의 초기 후원자였던 압둘 카디르는 내각 직책을 보상받았으나 2002년에 암살되었다. 하지 딘 모하마드는 이슬람당 (할리스파)의 지도자이다.
2. 무자헤딘 활동
압둘 하크는 1978년 아프가니스탄 정부에 맞서 싸우기 시작했으며, 처음에는 외부 지원 없이 활동했다. 이후 그는 모하마드 유누스 할리스가 이끄는 이슬람당 (할리스파)에 합류했다. 이는 굴부딘 헤크마티아르의 이슬람당 (헤크마티아르파)와는 다른 파벌이었다.
2.1.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참여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동안 하크는 카불주에서 무자헤딘 활동을 조율했다. 그는 일련의 전투에서 큰 활약을 펼치며 지휘관으로서의 명성을 높였고, 아프가니스탄 전역에서 지도적인 위치에 오르게 되었다. 그는 12차례 전장에서 부상을 입었으며, 오른쪽 발뒤꿈치 일부를 잃기도 했다. 이 부상 때문에 그는 종종 말 위에서 소련군과 전투를 벌였다. 또한 그는 전상 치료를 위해 일본을 방문한 적도 있다.
하크는 카불에 대한 장거리 로켓 사용을 옹호했는데, 이로 인해 민간인 사상자가 발생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입장은 확고했다. 그는 "나는 내 나라를 해방시켜야 한다. 사람들에게 정부 가까이 머물지 말라고 조언한다. 만약 그렇게 한다면 그것은 당신들의 잘못이다. 우리는 조악한 로켓을 사용하기 때문에 통제할 수 없다. 때로는 빗나가기도 한다. 나는 소련 대사관 가까이에 사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않는다. 그들에게 유감스럽지만, 내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라고 말했다.
2.2. 파벌 및 동맹
하크는 모하마드 유누스 할리스의 이슬람당에 소속되어 활동했다. 그는 카불 지역의 무자헤딘 활동을 총괄하며 여러 무자헤딘 파벌과의 협력 관계를 구축했다.
2.3. 미국 및 파키스탄과의 관계
하크는 전쟁 초기 CIA의 몇 안 되는 아프가니스탄 연락책 중 한 명이었다. 스티브 콜은 그가 "하워드 하트에게 소련과의 전쟁에 대한 가장 중요한 아프가니스탄 안내자가 되었다"고 기록했다. 그러나 1980년대 후반에는 ISI와 (그들과의 관계가 끝난 후) CIA를 비판하는 목소리를 냈다. CIA는 그를 "할리우드 하크"라고 불렀는데, 이는 그의 행동이 과장되거나 보여주기식이라는 비판적인 의미를 담고 있었다.
3. 전쟁 후 활동
1992년 4월 공산주의 나지불라 정권이 붕괴된 후, 페샤와르 협정에 따라 설립된 이슬람 아프가니스탄국에서 내무장관을 역임했다. 그러나 총리직을 제안받았던 굴부딘 헤크마티아르가 다른 정당들과 권력을 공유하기를 거부하고 수도 카불에 대한 대규모 폭격을 시작하면서 아프가니스탄은 장기적인 내전에 돌입했다. 하크는 이러한 상황 속에서 내무장관직을 사임했으며, 특히 공산주의자였던 압둘 라시드 도스툼과의 협력을 강력히 반대했다. 그는 4일간만 재임했으며, 일부 야전 지휘관들을 맹렬히 비난하며 사임했다. 이후 그는 아프가니스탄을 떠나 두바이에 정착하여 성공적인 상인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3.1. 평화 중재자 활동
1998년, 압둘 하크는 유엔 평화 중재자로 활동하며 아프가니스탄의 평화 정착을 위해 노력했다.
1999년 1월, 파키스탄 페샤와르의 하야타바드에 있는 그의 집에서 미상의 괴한들이 하크의 경비원을 살해하고 침입하여 그의 아내와 아들을 살해하는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하크의 다른 아들 한 명은 습격에서 살아남았다.
4. 탈레반 반대 활동 및 연대
2001년 9.11 테러 이후, 압둘 하크는 탈레반 정권에 대항하기 위한 대중 봉기를 조직하려 했다. 그는 다양한 아프가니스탄 내 세력들과의 연대를 시도하며 탈레반 축출을 위한 공동 전선 구축에 힘썼다.

4.1. 파슈툰족 세력 재건 시도
1999년부터 아흐마드 샤 마수드와 하크는 탈레반 정권에 맞서 아프가니스탄 내 다양한 민족 집단을 통합하려는 과정을 시작했다. 마수드는 타지크족, 하자라족, 우즈베크족뿐만 아니라 여러 파슈툰 지휘관들을 통합했다. 하크는 파슈툰 부족 지도자들과 만나고 그들의 중심점 역할을 하는 것 외에도, 비밀리에 그에게 접근하는 파슈툰 탈레반 인사들과의 접촉을 늘려갔다. 탈레반이 파슈툰족 사이에서도 지지를 잃어가면서, 탈레반 군사 조직에서 일했던 일부 지휘관들도 탈레반 정권을 전복시키려는 계획에 동의했다.
4.2. 북부동맹 및 기타 세력과의 협력
고위 외교관이자 아프가니스탄 전문가인 피터 톰슨은 "'카불의 사자' [압둘 하크]와 '판지시르의 사자' [아흐마드 샤 마수드]가 힘을 합친다면 강력한 반탈레반 팀이 될 것"이라며 "하크, 마수드, 카르자이, 아프가니스탄의 세 주요 온건파는 파슈툰-비파슈툰, 북부-남부의 분열을 초월할 수 있었다"고 기대했다. 하미드 카르자이 전 아프가니스탄 대통령과 마찬가지로 하자라족 및 우즈베크족의 고위 지도자들도 이 과정에 참여했다. 이들은 이탈리아 로마에 거주하던 망명 중인 아프가니스탄 국왕 자히르 샤의 기치 아래 협력하기로 합의했다.
2000년 11월, 아프가니스탄 각지, 유럽, 미국, 파키스탄, 인도에서 온 모든 민족 집단의 지도자들이 아프가니스탄 문제 해결을 위한 로야 지르가와 탈레반 이후 정부 수립을 논의하기 위해 마수드의 북부 아프가니스탄 본부에 모였다. 2001년 9월, 이 동맹 대표들을 만난 한 국제 관계자는 "오늘날 이런 것이 있다는 것이 놀랍다... 파슈툰족, 타지크족, 우즈베크족, 하자라족... 그들 모두 이 과정에 참여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고 언급했다.
5. 사망
2001년 10월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이후, 압둘 하크는 탈레반에 대한 저항 계획을 실행하기 위해 파키스탄의 카이베르파크툰크와주에서 아프가니스탄 낭가르하르주로 잠입했다.
5.1. 체포 및 처형 경위
일부 소식통은 CIA가 이 계획을 지원했다고 추측했지만, 가족과 다른 증인들은 이를 부인하며 CIA가 오히려 그에게 아프가니스탄에 들어가지 말라고 촉구했다고 밝혔다. 조지 테닛 전 CIA 국장은 로버트 맥팔레인의 권고에 따라 CIA 관계자들이 파키스탄에서 하크를 만났고, 그의 능력을 평가한 후 아프가니스탄에 들어가지 말라고 촉구했다고 보고했다.
추격전 끝에 하크는 낭가르하르주의 히사라크와 아즈로 마을 사이에서 19명의 다른 사람들과 함께 탈레반에 의해 체포되었고, 2001년 10월 26일 처형되었다.
5.2. 사망 관련 논란
영국의 언론사 더 가디언은 그의 체포가 이중 간첩의 배신 때문이라고 추측했다. 그의 사망 직후, CIA가 아프가니스탄 민족 간의 통합을 원치 않았던 파키스탄 정보부(ISI)와 너무 밀접하게 협력하여 하크를 탈레반 포로들로부터 구출하지 못했다는 비판이 잇따랐다. 이러한 주장의 진위는 그가 "우리는 (미국의) 꼭두각시가 될 수 없다"고 말한 인터뷰 이후 하크와 미국 요원들 사이에 긴장이 있었다는 보도로 인해 더욱 강화되었다. 그는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개입에 반대했던 많은 아프가니스탄 반군 지도자 중 한 명이었다.
6. 평가 및 영향
압둘 하크는 아프가니스탄의 독립과 민주화를 위해 헌신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그의 활동은 소련 점령기와 탈레반 정권 시기에 아프가니스탄 저항 운동의 중요한 축을 형성했다.
6.1. 긍정적 평가
더 가디언은 압둘 하크의 부고 기사에서 그를 "기민한 지도자"이자 "범민족적 로야 지르가를 주도할 능력이 있는 몇 안 되는 지도자 중 한 명"이라고 칭송했다. 그는 무자헤딘에 대한 미국의 대규모 군사 원조를 결정하는 데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을 설득하는 데 기여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그의 리더십과 다양한 민족 세력을 통합하려는 노력은 아프가니스탄의 미래를 위한 중요한 발판을 마련하려 했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된다.
6.2. 비판 및 논란
6.2.1. "헐리우드 하크" 비판
CIA 근동국 출신으로 아프가니스탄 공작에 오랫동안 관여했으며, 9.11 테러 이후 탈레반 정권 전복을 위해 북부동맹과의 공동 전선 구축을 담당했던 게리 쇼로엔에 따르면, 말년의 하크는 실제 활동보다는 말로만 활동하는 경향이 강해 CIA 내부에서는 헐리우드 하크라는 비웃음을 샀다고 한다. 이는 그의 대외적인 명성과 실제 행동 사이의 괴리를 비판하는 시각이었다.
7. 관련 항목
-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 탈레반
- 무자헤딘
- 아흐마드 샤 마수드
- 북부동맹 (아프가니스탄)
- 하미드 카르자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