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알베르트 귄터 괴링(Albert Günther Göring알베르트 귄터 괴링독일어, 1895년 3월 9일 ~ 1966년 12월 20일)은 독일의 엔지니어이자 사업가이며, 나치 독일의 공군 총사령관이자 게슈타포 창설자였던 헤르만 괴링의 친동생이다. 형 헤르만이 나치당의 핵심 인물로서 잔혹한 정책을 주도했던 것과 대조적으로, 알베르트는 나치즘을 혐오하고 반대했으며, 나치 독일 치하에서 박해받던 유대인과 반체제 인사들을 적극적으로 도왔다.
그는 나치 정권에 대한 개인적인 반감을 넘어, 자신의 영향력을 활용하여 유대인 전 상사의 석방을 돕고 가족의 탈출을 지원했으며, 반체제 인사들을 구출하고 형의 서명을 위조하여 통행증을 만들어주는 등 구체적인 인도주의적 활동을 펼쳤다. 특히 체코슬로바키아의 슈코다 공장 수출 감독으로 재직하면서는 사보타주를 독려하고 체코 저항 세력을 지원하며 수용소 수감자들의 탈출을 돕는 등 위험을 무릅쓴 행동을 이어갔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그는 연합군과 체코슬로바키아 당국에 의해 심문을 받았으나, 그가 도왔던 수많은 사람들의 증언 덕분에 무사히 풀려날 수 있었다. 그러나 '괴링'이라는 가족 이름 때문에 전후 독일 사회에서 배척당하고 경제적 어려움을 겪으며 쓸쓸한 말년을 보냈다. 그의 인도주의적 행적은 사후 수십 년이 지나도록 제대로 조명받지 못했으며, 21세기에 들어서야 여러 서적과 다큐멘터리를 통해 대중에게 알려지고 재평가되기 시작했다.
2. 초기 생애 및 배경
알베르트 괴링은 1895년 3월 9일 베를린 교외의 프리데나우에서 태어났다. 그는 독일령 남서아프리카의 총독이자 아이티 주재 독일 총영사를 지낸 하인리히 에른스트 괴링과 바이에른 농민 출신의 프란치스카 "패니" 티펜브룬의 다섯 번째 자녀였다.
2.1. 가족 관계 및 출생 배경
알베르트의 형제로는 헤르만 괴링과 카를 에른스트 괴링이 있었고, 이복 누나로는 아버지의 첫 결혼에서 태어난 올가 테레제 소피아와 파울라 엘리자베트 로사가 있었다. 괴링 가문은 스위스와 독일의 에버를레/에버린 지역에 거주하는 수많은 친척들과 연관되어 있었는데, 여기에는 항공 개척자 페르디난트 폰 체펠린 백작, 독일 민족주의 미술사학자 헤르만 그림, 스위스 미술사학자이자 문화, 정치, 사회 사상가 야코프 부르크하르트, 스위스 외교관이자 역사학자이며 국제 적십자사 총재를 지낸 카를 J. 부르크하르트, 독일 제약 대기업 메르크의 소유주인 메르크 가문, 그리고 독일 가톨릭 작가이자 시인 게르트루트 폰 르 포르 등이 포함되었다.
괴링 가족은 자녀들의 대부이자 유대계 귀족인 헤르만 에펜슈타인 리터 폰 마우테른부르크와 그의 벨덴슈타인 성과 마우테른도르프 성에서 함께 살았다. 에펜슈타인은 저명한 의사였으며, 하인리히 괴링이 자주 집을 비웠기 때문에 자녀들에게 대리 아버지 역할을 했다. 알베르트가 태어나기 약 1년 전부터 에펜슈타인과 프란치스카 괴링 사이에 불륜 관계가 시작되었다. 알베르트 괴링과 에펜슈타인 사이의 강한 신체적 유사성 때문에 많은 이들은 알베르트가 에펜슈타인의 아들이라고 믿었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알베르트 괴링은 4분의 1 유대인 혈통을 가졌다는 의미가 된다. 에펜슈타인 자신은 가톨릭 신자였지만, 그의 한쪽 부모는 유대인이었다. 그러나 프란치스카 괴링이 1893년 3월부터 1894년 중반까지 남편과 함께 아이티의 포르토프랭스에 머물렀다는 사실은 이러한 주장이 극히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음을 시사한다.
2.2. 어린 시절 및 교육
알베르트는 유복한 환경에서 자랐으며, 그의 어린 시절은 귀족적인 화려함 속에서 보냈다. 그는 기계공학을 전공했으며, 훗날 영화계에서 일하기도 했다. 제1차 세계 대전 중에는 독일 제국 육군 소속으로 참호에서 통신 엔지니어로 복무했다. 형 헤르만 괴링이 독일 공군의 에이스이자 정치에 깊이 관여하여 아돌프 히틀러와 나치당 정권을 위해 헌신했던 것과 달리, 알베르트는 정치나 군사에는 큰 관심이 없었고, 조용하고 고독을 즐기는 평범한 삶을 추구했다.
3. 나치즘에 대한 반대와 인도주의적 활동
알베르트 괴링은 나치즘과 그 잔혹성에 대한 깊은 혐오감을 가지고 있었으며, 나치 정권의 반유대주의 정책과 폭력성을 경멸했다. 그는 형 헤르만이 나치당의 핵심 인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나치 이데올로기와 정권에 대한 자신의 반대 의사를 공개적, 비공개적으로 표현했다.
3.1. 나치즘에 대한 개인적 반대
나치당이 집권한 1933년 이후, 알베르트는 나치의 반유대주의 정책과 폭력성을 경멸하고 혐오하게 되었다. 그는 오스트리아의 안슐루스 이후 히틀러를 비판하는 언행으로 인해 여러 차례 게슈타포에 체포되었으나, 그때마다 형 헤르만의 영향력 덕분에 풀려날 수 있었다. 그는 정치적 견해는 달랐지만, 자신을 여러 번 위기에서 구해준 형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3.2. 반나치 활동 사례
알베르트 괴링은 자신의 영향력을 활용하여 나치즘에 저항하고 박해받는 사람들을 도왔다. 여러 일화들이 그의 반나치 활동을 증명한다.
한 일화에 따르면, 1962년 오스트리아의 시나리오 작가 에른스트 노이바흐가 한 주간지에 기고한 글에서, 당시 나치 독일의 지배를 받던 오스트리아 빈의 한 상점에서 그의 75세 노모가 독일군 병사에게 '더러운 유대인'이라는 팻말을 건 채 진열대에 앉아 수모를 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때 알베르트가 자신의 신분증에 기입된 '괴링'이라는 성을 보여주어 노모를 구해냈다. 또 다른 일화로는, 알베르트가 거리를 청소하도록 강요받던 유대인 여성들 무리에 합류하자, 이를 본 친위대 장교가 헤르만 괴링의 동생이 공개적으로 모욕당하는 상황에 대한 책임을 질 수 있음을 깨닫고 즉시 청소 활동을 중단시켰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는 자신의 유대인 전 상사인 오스카 필처가 나치에 체포되자 그의 석방을 위해 영향력을 행사했고, 필처와 그의 가족이 독일에서 탈출하는 것을 도왔다. 또한 수많은 다른 독일 반체제 인사들에게도 이와 유사한 도움을 주었다. 그는 반체제 인사들의 탈출을 돕기 위해 형 헤르만의 서명을 위조하여 통행증을 만들기도 했다. 이러한 위조 행위로 인해 체포되었을 때도, 그는 형의 영향력을 이용해 풀려날 수 있었다. 헤르만 괴링의 딸인 에다 괴링은 2010년 한 인터뷰에서 "삼촌 알베르트는 재정적으로나 개인적 영향력으로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도울 수 있었지만, 더 높은 권위나 공무원이 개입해야 할 때는 아버지의 지원이 필요했고, 그는 그 지원을 받았다"고 언급하며 알베르트의 활동에 형의 도움이 있었음을 시사했다.
3.3. 슈코다 공장 근무와 체코 저항 지원
알베르트 괴링은 체코슬로바키아의 보호령이 된 보헤미아-모라비아 보호령에 위치한 슈코다 공장의 수출 감독으로 부임하면서 반나치 활동을 더욱 강화했다. 그는 공장 내에서 사보타주를 독려했으며, 체코 저항 세력과 긴밀히 접촉하여 그들을 지원했다. 여러 차례에 걸쳐 그는 수용소로 향하는 트럭을 노동자 수송 명목으로 요청한 뒤, 인적이 드문 곳에서 트럭을 세워 유대인과 소련군 포로를 포함한 수감자들이 탈출할 수 있도록 도왔다.
4. 전후 생활과 사회적 평가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알베르트 괴링의 삶은 그의 인도주의적 행적에도 불구하고 순탄치 않았다. 그는 자신이 도왔던 많은 사람들의 증언 덕분에 재판에서 풀려났지만, '괴링'이라는 이름 때문에 사회적 낙인과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4.1. 전후 재판 및 사회적 낙인
전쟁 후 알베르트 괴링은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심문을 받았다. 그러나 그가 나치로부터 구해주었던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변호를 위해 증언했고, 그 덕분에 그는 석방될 수 있었다. 이후 체코슬로바키아 당국에 의해 다시 체포되었으나, 그의 반나치 활동의 전모가 밝혀지면서 또다시 풀려났다.
그는 형 헤르만 괴링을 비판하는 증언을 하면 자신의 입장이 유리해질 수 있음을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여러 차례 구해준 형에 대한 감사함 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러나 독일로 돌아온 그는 '괴링'이라는 가족 이름 때문에 사회적 배척당했다. 이 이름은 전후 독일에서 혐오의 대상으로 변모했고, 알베르트는 이로 인해 사회적 냉대와 경제적 어려움을 겪으며 유년기의 화려함과는 거리가 먼 소박한 아파트에서 생활해야 했다.

4.2. 말년과 죽음
알베르트 괴링은 말년에 독일 정부로부터 받는 연금으로 생계를 유지했다. 그는 가끔 작가나 번역가로 일하기도 했다. 그의 체코인 아내 밀라는 그의 불륜을 알고 이혼했으며, 딸 엘리자베스와 함께 페루의 리마로 이주했다.
그는 자신이 사망할 경우 연금 지급이 아내에게 이전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그는 자신의 가정부가 사후에 연금을 받을 수 있도록 1966년에 그녀와 결혼했다. 결혼 일주일 후인 1966년 12월 20일, 알베르트 괴링은 자신의 전시 인도주의적 활동이 대중적 인정받지 못한 채 바덴뷔르템베르크주 노이엔뷔르크의 한 병원에서 사망했다. 그는 말년을 바이에른주 뮌헨에서 보냈지만, 사망은 이웃 주에서 이루어졌다.
5. 형 헤르만 괴링과의 관계
형 헤르만 괴링은 뉘른베르크에서 동생 알베르트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알베르트는 항상 나보다 10살은 더 나이 들어 보였다. 아마도 모든 것을 너무 심각하게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 형제는 진정으로 좋은 관계를 맺은 적이 없다. 알베르트의 당에 대한 태도 때문에 우리는 12년 동안 전혀 대화하지 않았다. 서로에게 화를 낸 것은 아니었지만, 그런 상황 때문에 소원해졌다." 헤르만은 또한 "동생과 나는 항상 정반대였다. 동생은 정치에도 군사에도 관심이 없었지만, 나는 그것에 관심이 많았다. 동생은 물정 모르고 고독을 좋아했지만, 나는 교류와 많은 사람들과의 모임을 좋아한다. 동생은 우울하고 비관적이지만, 나는 낙관적이다. 하지만 알베르트는 나쁜 녀석이 아니다"라고 덧붙였다.
알베르트 역시 정치적 견해는 달랐지만, 자신을 여러 차례 게슈타포로부터 구해내고 직업을 얻을 수 있도록 도와준 형 헤르만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형이 자살하기 직전, 알베르트는 헤르만을 면회할 수 있었고, 그때 헤르만으로부터 가족들을 잘 부탁한다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6. 유산 및 대중 문화적 조명
알베르트 괴링의 이야기는 그의 사망 후 수십 년이 지나도록 대중에게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형 헤르만 괴링이 수많은 출판물의 주제가 된 것과 달리, 알베르트는 거의 주목받지 못했다.
6.1. 인도주의적 행적에 대한 평가
알베르트 괴링의 인도주의적 행적에 대한 평가는 그의 사후 한동안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2009년 윌리엄 헤이스팅스 버크의 저서 '서른네 명'에 대한 더 주이시 크로니클의 서평은 야드 바솀 기념관에서 알베르트 괴링을 기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야드 바솀은 이후 알베르트 괴링을 '열방의 의인'으로 등재하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야드 바솀은 "알베르트 괴링이 유대인에게 긍정적 태도를 보였고 일부 사람들을 도왔다는 징후는 있지만, 그가 유대인들을 추방과 죽음의 위험에서 구하기 위해 특별한 위험을 감수했음을 보여주는 충분한 증거, 즉 1차 자료가 없다"고 그 이유를 밝혔다.
6.2. 대중 매체에서의 조명
20세기 후반과 21세기 초에 들어서면서 알베르트 괴링과 그의 행적은 여러 서적과 다큐멘터리의 주제가 되면서 더 많은 새로운 출판물들을 촉발시켰다. 1960년대 초, 작가 에른스트 노이바흐가 독일 주간지 '악투엘'에 짧은 기사를 기고한 것이 그의 생전에 대한 몇 안 되는 예외적 조명이었다.
그의 삶과 행적을 다룬 책으로는 2006년 영국 작가 제임스 윌리의 쌍둥이 전기 '군벌과 배신자', 2011년 독일 역사가이자 홀로코스트 생존자인 아르노 루스티거의 '구원 저항', 그리고 2009년 윌리엄 헤이스팅스 버크의 '서른네 명' 등이 있다.
알베르트 괴링은 또한 여러 다큐멘터리 영화의 주제가 되었다. 가장 포괄적 작품은 1998년 영국에서 방영된 3BM TV의 '진짜 알베르트 괴링'이었다. 이 다큐멘터리는 히스토리 채널에 의해 해외 배급되었고, 2000년대 초반에는 미국을 비롯한 다른 국가들에도 소개되었다. 약 10년 후, 윌리엄 헤이스팅스 버크는 자신의 책을 바탕으로 한 다큐멘터리를 제작했으며, 2014년에는 베로니크 로름의 Le Dossier Albert Göring르 도시어 알베르트 괴링프랑스어이 프랑스 TV에서 방영되었다. 2016년 1월에는 독일 TV 채널 다스 에르스테에서 알베르트 괴링 역에 바너비 메추라트, 형 헤르만 역에 프랜시스 풀턴-스미스가 출연한 다큐드라마 Der gute Göring데어 구테 괴링독일어('선량한 괴링')이 방영되었다. 2018년에는 엠마누엘 아마라가 Toute L'Histoire투트 리스투아르프랑스어를 위해 La liste Goring라 리스트 괴링프랑스어('괴링의 명단')을 연출했다. 또한 2016년 1월에는 BBC 라디오 4에서 영국 언론인이자 방송인 개빈 에슬러가 알베르트 괴링의 삶을 탐구한 다큐멘터리 '선량한 괴링'이 방영되기도 했다.
7. 관련 항목
- 하인츠 하이드리히: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의 동생으로, 많은 유대인들이 나치로부터 탈출하는 것을 도왔다.
- 나치즘에 저항한 독일인 목록
8. 외부 링크
- [http://www.auschwitz.dk The Holocaust, Crimes, Heroes, and Victim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