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알레산드라 무솔리니(Alessandra Mussolini알레산드라 무솔리니이탈리아어, 1962년 12월 30일 ~ )는 이탈리아의 정치인이자 텔레비전 방송인, 모델, 배우, 가수 및 의사로 활동했던 다재다능한 인물이다. 그녀는 이탈리아 의회 양원과 유럽의회 의원을 역임했다. 특히 이탈리아의 파시스트 독재자이자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추축국의 전쟁 범죄자였던 베니토 무솔리니의 손녀이자 유명 배우 소피아 로렌의 외조카라는 혈통으로 대중의 큰 관심을 받았다. 2022년부터는 포르차 이탈리아 소속 유럽의회 의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무솔리니는 초기에는 연예계에서 배우와 모델로 이름을 알렸다. 1982년에는 일본에서 '아모레'라는 시티 팝 앨범을 발매하기도 했다. 1990년에 마지막 영화에 출연한 후, 한 제작자가 그녀에게 성을 바꿀 것을 요구하자 연예계를 떠났다. 2004년에는 사회행동당을 창당하여 이탈리아에서 여성으로는 최초로 정당을 이끌게 되었다. 이후 자유의 국민당 소속으로 이탈리아 하원과 이탈리아 상원 의원을 지냈으며, 2014년 유럽의회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2020년 12월에는 텔레비전 리얼리티 쇼 출연을 위해 일시적으로 정계를 떠났다가, 2022년 11월 다시 유럽의회 의원으로 복귀했다.
2. 생애 초기 및 배경
알레산드라 무솔리니의 기원은 그녀의 출생, 직계 가족, 그리고 유명한 친척들의 상당한 영향력을 포함한다.
2.1. 가족 및 양육
알레산드라 무솔리니는 1962년 12월 30일 로마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아버지 로마노 무솔리니는 1922년부터 1943년까지 이탈리아의 파시스트 독재자였던 베니토 무솔리니의 넷째 아들이자 음악가였다. 로마노는 정치와 거리를 두며 피아니스트로 생계를 유지했기 때문에 제2차 세계 대전 전후의 혼란에 휘말리지 않고 공화국으로 이행한 전후 이탈리아에서 조용히 지냈다. 그녀의 어머니는 마리안나 피아 빌라니 시콜로네(Marianna Pia Villani Scicolone마리안나 피아 빌라니 시콜로네이탈리아어)이며, 1938년 5월 11일 로마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외숙모는 아카데미상 여우주연상 수상에 빛나는 배우 소피아 로렌이다. 무솔리니는 또한 이탈리아의 형제들 당의 정치인인 라켈레 무솔리니(Rachele Mussolini라켈레 무솔리니이탈리아어)라는 이복 여동생이 있다.
한편, 어머니 마리안나 피아는 아카데미상 수상 배우로 알려진 소피아 로렌의 친여동생이며, 오히려 처음에는 이 외가 혈통이 그녀의 인생에 더 큰 영향을 주었다. 그녀는 베니토 무솔리니의 증손자인 카이오 줄리오 체사레 무솔리니(Caio Giulio Cesare Mussolini카이오 줄리오 체사레 무솔리니이탈리아어)와 촌수로 한 번 더 떨어져 있는 사촌 관계이다. 카이오 줄리오 체사레 무솔리니는 2019년 유럽의회 선거에서 이탈리아의 형제들 당 소속으로 출마하기도 했다.
2.2. 교육 및 초기 성인기
무솔리니는 1976년부터 1980년까지 로마 미국 해외 학교에서 고등학교 과정을 보냈다. 그녀는 1994년 사피엔차 로마 대학교를 졸업하고 의학 및 외과 과학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이후 그녀는 외과 의사로 근무했다.
3. 연예 활동
알레산드라 무솔리니는 본격적인 정치 경력을 시작하기 전 연예계에서 활동하며 대중에게 이름을 알렸다.
3.1. 배우 및 모델 활동
무솔리니는 1970년대에 외숙모 소피아 로렌의 후원을 받아 이탈리아 영화계에서 배우 경력을 시작했다. 그녀는 1977년 외숙모와 함께 출연한 영화 '특별한 하루'에서 '마리아 루이사'라는 조연으로 영화 데뷔를 했다. 이 영화는 골든 글로브 외국어 영화상을 수상하고 아카데미 외국어 영화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이후 "대여배우의 조카"로서 배우 외에 모델, 가수 등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또한 1980년대까지 배우로 활동하며 이탈리아 텔레비전용 영화에도 출연했다. 그녀는 1985년 영화 '아시시 지하조직'에서 수녀 역을 맡아 1943년 나치로부터 이탈리아계 유대인을 구출하는 로마 가톨릭교회의 역할을 다룬 작품에 출연하기도 했다.
무솔리니는 글래머 모델로도 활동했는데, 1983년 8월 이탈리아판과 1983년 11월 독일판 '플레이보이' 표지를 장식했다. 그녀는 이에 대해 "배우라면 몸을 다뤄야 한다. 모든 여배우는 토플리스 촬영 등을 한다. 그것은 당연한 일이다"라고 말했다. 그녀는 1990년 '하데레크 레인 하로드'에 리오라 역으로 마지막 영화에 출연했으며, 한 제작자가 그녀에게 성을 바꾸라고 요구한 후 영화계를 떠나 학업을 계속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3.2. 음악 활동
1982년, 무솔리니는 알파 레코드에서 낭만적인 노래들로 구성된 팝 음악 앨범 '아모레'를 발매했다. 이 앨범은 일본에서만 독점 발매되었으며, 이후 수집가들 사이에서 귀한 앨범이 되었다. 이 시기에 그녀는 일본 가수 사와다 켄지의 오리지널 앨범 'JULIE SONG CALENDAR'에 수록된 'CHI SEI (그대는 누구)'의 작사에도 참여했다.
4. 정치 경력
알레산드라 무솔리니의 이탈리아 및 유럽 정치 분야에서의 광범위한 경력을 연대순으로 자세히 설명하며, 그녀의 다양한 역할과 정당 소속을 강조한다.
4.1. 초기 정치 활동
1992년, 알레산드라 무솔리니는 공화 파시스트당의 후계 정당인 이탈리아 사회운동(Movimento Sociale Italiano, MSI이탈리아 사회운동이탈리아어) 소속으로 나폴리 선거구에서 의원에 당선되며 정계에 입문했다. 이로써 그녀는 하원 의원이 되었다. 1993년 11월, 그녀는 나폴리 시장 선거에 출마했으나 안토니오 바솔리노 후보에게 패배했다. 1994년에는 캄파니아주 제1선거구에서 하원 의원으로 재선되었다.
4.2. 국민동맹 및 탈당
1990년대부터 2000년대에 걸쳐 잔프란코 피니 총재의 온건화 개혁이 추진되면서 이탈리아 사회운동은 국민동맹으로 재편되었고, 2001년에는 오랜 염원이었던 정권 참여를 달성했다. 무솔리니는 1996년 국민동맹 소속으로 캄파니아주 제1선거구에서 하원 의원으로 3선에 성공했다.
이 무렵부터 그녀는 당의 방향성을 놓고 피니 총재와 정치적 갈등을 겪기 시작했지만, 한때는 화해하고 국민동맹에 남기도 했다. 2001년, 그녀는 캄파니아주 제1선거구에서 당선되어 하원 의원 4선에 성공했다. 같은 해 텔레비전 토크쇼에서 당시 기회균등부 장관이었던 카티아 벨릴로(Katia Bellillo카티아 벨릴로영어)에게 "추악한 코뮤니스트"이며 "쿠바에 가서 살라"고 폭언하며 육체적으로 공격하는 등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2002년, 무솔리니는 자신에 대한 찬사를 철회하는 언행을 반복하는 피니에게 "목적을 위해 역사를 왜곡하는 정치가는 바람직하지 않다"며 불쾌감을 표출하는 등 관계는 다시 악화되었다. 2003년, 피니가 외무장관으로서 이스라엘을 방문하여 홀로코스트와 관련하여 파시스트 이탈리아 정권을 "절대악"이라고 묘사하며 사과하자, 무솔리니는 격분하여 국민동맹을 탈당했다. 그러나 과거 이스라엘 영화에 출연하는 등 이스라엘에 우호적이었던 그녀는 이스라엘의 생존권을 지지하며, 피니의 언행에 대한 불신이 탈당의 원인이 되었음을 시사했다.
4.3. 사회행동당 설립 및 이념적 입장
2003년, 무솔리니는 개인 정당인 '자유 행동'(Libertà di Azione자유 행동이탈리아어)을 설립했으며, 이 정당은 이후 '사회행동'(Azione Sociale사회행동이탈리아어)으로 개칭되었다. 이로써 그녀는 이탈리아에서 여성 최초로 정치 정당을 이끌게 되었다. 무솔리니의 행보는 이탈리아 언론에서 놀라운 것으로 여겨졌는데, 이는 그녀가 파시스트적 뿌리에도 불구하고 낙태, 인공 수정, 동성애자 권리, 시민 결합 등 많은 사회 문제에 대해 '진보적' 입장을 취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페미니즘에 대한 목소리를 높여왔으며, 보수 평론가들로부터 "사회주의자" 또는 "좌익"으로 묘사되기도 했다. 이러한 그녀의 '진보적' 입장은 할아버지 베니토 무솔리니 역시 사회주의에서 파시즘으로 전향했으며, 복지 정책 등에서 진보적 정책을 채택하는 경우가 많았던 점을 상기시킨다.
4.4. 의회 역할 및 유럽 활동
2004년, 무솔리니는 하원 의원직을 사임하고 2004년 유럽의회 선거에서 '사회적 선택'(Alternativa Sociale사회적 선택이탈리아어)이라는 정치 연합을 조직하여 유럽의회 의원에 처음 당선되었다. 이 연합은 선거 득표율 1.2%를 얻었으며, 무솔리니는 133,000표의 선호표를 받았다.
같은 해 유럽의회에서 영국 독립당(UKIP) 소속 고드프리 블룸(Godfrey Bloom고드프리 블룸영어) 의원이 "정상적인 사고를 가진 사업가라면 출산 가능 연령의 여성을 고용하지 않을 것이다", "여성 인권이 많아질수록 오히려 여성 고용을 방해한다", "여성들은 냉장고 뒤편을 충분히 청소하지 않는다"는 발언을 했다. 이에 대해 무솔리니는 "영국인들은 자학적인 유머 감각이 있다는 것을 알지만, 나는 나폴리 사람이며 우리 여성들은 요리하고 냉장고를 청소할 줄 알며 심지어 정치인도 될 수 있지만, 고드프리 블룸은 냉장고 청소도 정치도 할 줄 모를 것"이라고 응수했다.
2005년 3월, 무솔리니는 지역 선거에서 유권자 서명 위조 문제로 지역 법원으로부터 출마를 금지당했다. 이에 대해 무솔리니는 "이는 민주주의에 대한 모욕이며, 사회적 선택당을 배제하려면 모든 정당을 배제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서명 목록이 가짜이기 때문이다"라고 로이터 통신에 말했다. 그녀는 이 결정에 항의하여 단식 투쟁을 벌였지만, 결국 이탈리아 최고 행정법원인 국무원이 해당 결정을 무효화하여 선거에 출마할 수 있게 되었다.
2006년, 참여 정당 간의 불일치가 심화되면서 '사회적 선택' 연합은 해산되었다. 같은 해 11월, 무솔리니의 발언은 유럽의회 내 극우 정당 그룹인 '정체성, 전통, 주권'(Identity, Tradition, Sovereignty정체성, 전통, 주권영어)의 해체를 촉발했다. 그녀는 이민 정책과 관련하여 "모든 루마니아인들은 범죄자"라고 발언했다. 이로 인해 대루마니아당 대표단이 해당 그룹을 탈퇴하면서 그룹은 최소 의원수 미만이 되어 의회 기금을 받을 자격을 상실했다.
2008년, 무솔리니는 '자유의 국민당' 선거 연합에 참여하여 하원 의원으로 5선에 성공했다. 2009년, 자유의 국민당이 결성되면서 사회행동당을 이끌고 이 합당에 참여했다. 2013년 2월 이탈리아 총선에서 그녀는 자유의 국민당 소속으로 이탈리아 상원에 당선되었다. 이 당은 2013년 11월 새로운 '포르차 이탈리아'로 개편되었다. 2014년 유럽의회 선거에서 무솔리니는 포르차 이탈리아 소속으로 유럽의회 의원에 재선되었다. 하지만 2019년 유럽의회 선거에서는 낙선하며 27년간의 정치 경력 중 처음으로 선거에서 패배했다.
4.5. 사회적 견해의 변화
2006년, 무솔리니는 성전환을 한 이탈리아 의회 후보 블라디미르 룩수리아(Vladimir Luxuria블라디미르 룩수리아영어)가 자신을 "파시스트"라고 비난하자 "게이인 것보다 파시스트인 것이 낫다"고 말하며 논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그녀의 동성애에 대한 입장은 2000년대 후반부터 일관되게 변화했다. 2010년, 무솔리니는 바티칸이 동성애를 아동성애와 연관시킨 것을 비난하며 "성적 지향을 아동성애와 연결할 수 없다. 이러한 연결은 아동 보호에 위험할 정도로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고 밝혔다. 2022년에는 동성애 혐오 반대 법안인 '알레산드로 잔(Alessandro Zan알레산드로 잔이탈리아어) 법안'을 지지했으며, 유럽의회에 복귀한 후 MEP 신분증에 성별 정보를 제공하기를 거부했다.
4.6. 이후의 정치적 소속 및 전환
2018년, 무솔리니는 콘테 정부에 대한 포르차 이탈리아의 야당 결정에 따라 포르차 이탈리아를 떠났다. 그녀는 짐 캐리와 셀틱 FC 팬들과의 논쟁에서 트위터를 통해 할아버지 베니토 무솔리니의 명예를 옹호하기도 했다.
2020년 12월, 그녀는 새로운 텔레비전 경력을 위해 정계를 일시적으로 떠났다. 그녀는 밀리 카를루치의 '발란도 콘 레 스텔레'와 카를로 콘티의 '탈레 에 콸레 쇼'에 출연자로 참여하여 성공을 거두었다. 2022년 11월, 안토니오 타야니가 하원 의원에 당선되면서 포르차 이탈리아 소속 유럽의회 의원직을 사임하자, 무솔리니는 그의 후임으로 다시 유럽의회 의원이 되면서 정계에 복귀했다. 그러나 2024년 유럽의회 선거에 포르차 이탈리아 소속 후보로 출마했으나 낙선하여 의석을 유지하지 못했다.
5. 개인 생활
알레산드라 무솔리니의 사생활, 즉 결혼, 가족, 기타 개인적인 활동을 다룬다.
5.1. 결혼 및 가족
무솔리니는 세관 경찰관 마우로 플로리아니(Mauro Floriani마우로 플로리아니이탈리아어)와 1989년 10월 28일에 결혼했다. 전통과는 달리 그녀가 그에게 청혼했다. 두 사람 사이에는 로마노를 포함해 카테리나(Caterina카테리나이탈리아어), 클라리사(Clarissa클라리사이탈리아어) 세 자녀가 있다. 자녀들은 나중에 어머니의 성을 따랐지만, 그녀는 자녀들이 그렇게 할 수 있도록 복잡한 법적 절차를 거쳤다. 이후 그녀는 모든 자녀가 원할 경우 어머니의 성을 사용할 수 있도록 이탈리아 법을 변경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캠페인을 벌였다.
5.2. 개인적인 논란
그녀의 남편 마우로 플로리아니는 2015년 아동 성매매 재판에 회부될 피고인 중 한 명이었다. 2013년, 플로리아니는 로마에서 14세와 15세의 두 십대 소녀들에게 성매매를 제공한 혐의로 기소된 약 50명의 남성들(유명인사, 전문가, 사제, 언론인, 정치인 등) 중 한 명이었다. 도청에 따르면 그는 소녀들에게 가장 자주 연락한 고객 중 한 명이었다. 2015년, 플로리아니는 미성년자 성매매 알선 혐의를 인정하고 1년의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 그녀는 당시 이탈리아 사회에 큰 파장을 일으켰던 가톨릭교회 성적 학대 스캔들을 비판하던 입장이었기에 이 사건은 더욱 주목받았다. 그녀는 남편과 이혼하지는 않았지만, 텔레비전 프로그램 인터뷰에서 아내이자 여성으로서 용서할 수 없다고 남편을 강하게 비난했다.
5.3. 기타 개인 활동
그녀는 2014년부터 화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2015년 로마에서 첫 개인전을 개최했다. 그녀는 자신을 로마 가톨릭 신자로 여기지만, 정기적으로 미사에 참석하지는 않는다고 밝혔다.
6. 대중적 이미지 및 논란
알레산드라 무솔리니에 대한 폭넓은 대중적 인식, 특히 그녀의 가족 유산과 경력 전반에 걸쳐 참여했던 공개적 논란들을 살펴본다.
6.1. 무솔리니 유산 옹호
알레산드라 무솔리니는 자신의 할아버지이자 이탈리아의 파시스트 독재자였던 베니토 무솔리니를 공개적으로 옹호해 왔다. 그녀는 특히 할아버지 베니토 무솔리니가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아돌프 히틀러와 함께 남유럽에서 수많은 유대인, 그리스인, 집시, 그리고 리비아와 에티오피아 주민들을 잔인하게 학살한 전쟁 범죄 행위를 옹호하는 망언들로 인해, 당시 무솔리니에게 상당한 피해를 입었던 이스라엘과 그리스 국가들로부터 극심한 불쾌감을 유발하는 인물로 지목된다.
그녀는 배우 짐 캐리와의 논쟁에서도 할아버지의 기억을 옹호했다. 2019년 짐 캐리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비판하는 의도로 무솔리니의 처형을 풍자하는 그림을 그리자, 그녀는 짐 캐리를 "재수 없는 놈"이라고 부르며 "어차피 그릴 거면 핵실험이나 흑인 차별에 대해 그려보지 그랬느냐"고 비꼬았다. 또한 셀틱 FC 축구팀 팬들과도 무솔리니의 명예를 놓고 설전을 벌이기도 했다.
6.2. 주목할 만한 공개적 다툼
2001년 무솔리니는 성희롱에 관한 '포르타 아 포르타'(Porta a Porta포르타 아 포르타이탈리아어) 토크쇼 녹화 중 충돌에 휘말렸다. 당시 기회균등부 장관이었던 카티아 벨릴로가 그녀에게 다가와 언쟁을 벌였고, 이에 무솔리니는 벨릴로를 "추악한 코뮤니스트"라고 부르며 "쿠바에 가서 살라"고 폭언하며 육체적으로 공격했다.
2005년 1월 7일, SS 라치오의 스트라이커 파올로 디 카니오가 AS 로마와의 경기에서 선제골을 터뜨린 뒤 팬들에게 오른팔을 들어 올리는 파시스트식 경례를 했다. 이에 대해 무솔리니와 보수주의자들은 "그의 로마식 경례가 얼마나 멋졌는지, 그것은 나를 기쁘게 했다"고 말하며 디 카니오의 행동을 옹호하여 또 다른 논란을 야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