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초기 생애
앨 시먼스는 1902년 5월 22일 위스콘신주 밀워키에서 앨로이스 시만스키(Alois Szymanski앨로이스 시만스키영어)라는 본명으로 태어났다. 그는 폴란드계 이민자 가정 출신으로, 어린 시절부터 필라델피아 애슬레틱스의 열렬한 팬이었다. 4학년 때 프로 야구 선수가 되겠다고 고집을 부려 아버지에게 꾸중을 들었지만, 야구 선수가 되겠다는 의지를 꺾지 않자 아버지는 "그럼 아주 좋은 선수가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그는 지역 마이너 리그 팀에서 뛰던 중 사람들이 자신의 본명인 시만스키(Szymanski)를 계속 잘못 발음하는 것에 지쳐 이름을 바꾸기로 결심했다. 마침 길을 가다 "시먼스 하드웨어"라는 회사의 광고를 보고 자신의 성을 시먼스(Simmons)로 바꾸게 되었다.
2. 선수 경력
앨 시먼스는 1924년부터 1944년까지 메이저 리그에서 활약하며 당대 최고의 타자 중 한 명으로 군림했다. 그의 선수 경력은 필라델피아 애슬레틱스에서의 전성기와 이후 여러 팀을 거치며 이어진 후반기 경력으로 나뉜다.
2.1. 필라델피아 애슬레틱스 (1924-1932)
앨 시먼스는 1923년 필라델피아 애슬레틱스와 계약한 뒤 1924년 메이저 리그에 데뷔했다. 그는 데뷔 시즌부터 타율 3할과 100 타점을 기록하며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1925년, 그는 아메리칸 리그에서 253 안타와 392 루타로 리그 선두를 차지했으며, 타율 .387, 24 홈런, 129 타점을 기록했다. 또한 122 득점과 43 2루타를 기록하며 장타율 .599를 달성했다. 시먼스의 한 시즌 85 멀티히트 경기는 아직까지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기록으로 남아있다. 1925년 그의 253안타는 당시 메이저 리그 역대 2위에 해당하는 기록이었다. 그 해 MVP 투표에서 2위를 차지하며 리그 정상급 선수로 도약했다. 이어진 1926년, 1927년, 1928년 시즌에는 각각 타율 .341, .392, .351을 기록했으며, 110, 108, 107 타점을 올렸다. MVP 투표에서는 1926년 5위, 1927년 4위에 올랐다.

시먼스는 1929년 애슬레틱스가 104승 46패로 뉴욕 양키스에 18경기 앞서 아메리칸 리그 페넌트레이스 우승을 차지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애슬레틱스는 시카고 컵스를 5경기 만에 꺾고 월드 시리즈에서 우승했다. 그 시즌 그는 타율 .365, 34 홈런, 그리고 아메리칸 리그를 이끄는 157 타점을 기록하며 타점왕에 올랐다. 또한 114 득점, 212 안타, 41 2루타, 장타율 .642를 달성했다. 1929년 월드 시리즈에서는 타율 .300, 2 홈런, 5 타점, 6 득점을 기록했다.
1930년은 시먼스에게 선수로서 최고의 해였다. 그는 타율 .381을 기록하며 첫 타격왕을 차지했고, 36 홈런, 211 안타, 41 2루타, 16 3루타를 기록했다. 장타율은 .708에 달했으며, 165 타점과 152 득점을 올렸다. 애슬레틱스는 다시 한번 아메리칸 리그 페넌트에서 102승 52패를 기록하며 우승했고,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를 물리치며 2년 연속 월드 시리즈 우승을 달성했다. 1930년 월드 시리즈에서 시먼스는 타율 .364, 2 홈런, 4 타점, 장타율 .727을 기록했다.
1931년, 애슬레틱스는 양키스에 13.5경기 앞서 107승 45패로 3년 연속 아메리칸 리그 페넌트 우승을 차지했다. 시먼스는 타율 .390으로 두 번째 타격왕을 거머쥐었다. 그는 22 홈런, 128 타점, 100 득점, 200 안타, 37 2루타, 13 3루타, 장타율 .641을 기록했는데, 단 128경기만 출전했음에도 이룬 성과였다. 그는 MVP 투표에서 팀 동료 레프티 그로브와 양키스의 루 게릭에 이어 3위에 올랐다. 하지만 애슬레틱스는 1931년 월드 시리즈에서 카디널스에게 7경기 만에 패하며 3년 연속 월드 시리즈 우승에는 실패했다. 이 시리즈에서 시먼스는 타율 .333, 2 홈런, 8 타점을 기록했다. 시즌 개막 전에는 계약 문제로 진통을 겪었지만, 당시 대공황 시기임에도 파격적인 3년 10.00 만 USD에 계약했고, 계약 당일에는 시브 파크 지붕을 직격하는 대형 홈런을 터뜨렸다.
필라델피아에서의 마지막 시즌인 1932년, 시먼스는 216 안타로 다시 한번 아메리칸 리그 최다 안타를 기록했다. 그는 타율 .322, 35 홈런, 151 타점, 144 득점을 올렸다. 애슬레틱스에서 총 1,290경기에 출전하여 타율 .356, 209 홈런, 1,179 타점, 969 득점을 기록했다. 그는 애슬레틱스에서 뛴 9시즌 동안 모두 100 타점 이상을 기록했으며, 5시즌에서 100 득점 이상을 달성했다. 세 번의 월드 시리즈에서 18경기 동안 타율 .333, 6 홈런, 17 타점, 15 득점의 뛰어난 활약을 펼쳤다. 애슬레틱스 감독 코니 맥은 시먼스를 매우 아꼈고, 시먼스가 팀을 떠난 뒤에도 감독실에 그의 사진을 걸어두었다고 한다.
2.2. 이후 경력 (1933-1944)
1932년 9월 말, 필라델피아 애슬레틱스는 뮬 하스, 지미 다이크스와 함께 앨 시먼스를 현금을 받고 시카고 화이트삭스로 트레이드했다. 당시 금액은 공개되지 않았으나, 화이트삭스 역사상 최대 규모의 현금 트레이드이자 아메리칸 리그 역사상 가장 큰 구매액으로 알려졌다. 이는 코니 맥 감독이 1929년에서 1931년 사이 성공을 거둔 애슬레틱스 팀을 해체하고 있다는 추측을 낳았다.
시카고에서의 첫 시즌인 1933년, 시먼스는 타율 .331, 14 홈런, 119 타점, 200 안타를 기록했다. 그 해 처음으로 개최된 MLB 올스타전에서는 팬 투표에서 최다 득표를 얻으며 출전했다. 그는 1934년과 1935년에도 올스타에 선정되며 총 세 차례 올스타전에 출전했다. 1934년에는 138경기에서 타율 .344, 18 홈런, 104 타점, 102 득점, 192 안타를 기록했다. 화이트삭스에서의 마지막 시즌인 1935년에는 타율 .267, 16 홈런, 79 타점에 그치며 11년간의 메이저 리그 경력 중 처음으로 타율 3할과 100 타점 기록을 달성하지 못했다.
하지만 1936년 디트로이트 타이거스로 이적하여 타율 .327, 13 홈런, 112 타점, 96 득점을 기록하며 기량을 회복했다. 1937년 워싱턴 세너터스에서는 다시 부진하여 103경기에서 타율 .279, 8 홈런, 84 타점을 기록했다. 하지만 1938년에는 125경기에서 타율 .302, 21 홈런, 95 타점을 기록하며 반등했고, 이는 세너터스 역사상 처음으로 한 시즌 20 홈런을 달성한 선수가 되는 기록이었다.
1938년 12월, 시먼스는 워싱턴 세너터스 구단주 클라크 그리피스와 불화를 겪다 보스턴 비스로 트레이드되었다. 1939년 8월 31일에는 신시내티 레즈로 트레이드되었고, 레즈는 그 해 내셔널 리그 페넌트 우승을 차지했다. 시먼스는 1939년 월드 시리즈에서 한 경기 출전하여 4타수 1안타(2루타 1개) 1득점을 기록하며 자신의 마지막 월드 시리즈 무대를 밟았다.
시먼스는 1944년까지 메이저 리그에서 뛰었으며, 은퇴 직전 자신의 원래 소속팀이었던 필라델피아 애슬레틱스로 돌아와 선수 생활을 마쳤다.
2.3. 경력 하이라이트 및 독특한 기록
앨 시먼스는 메이저 리그 역사상 가장 뛰어난 타자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 그는 통산 타율 .334를 기록했으며, 이는 20세기 이후의 우타자 중에서는 역대 5위에 해당하는 기록이다. 그는 8시즌에서 타율 .340 이상, 그 중 4시즌에서는 타율 .380 이상을 기록했다. 특히 1925년부터 1934년까지 10년간은 타율, 홈런, 타점 세 부문 모두에서 리그 10위권 이내를 유지하는 꾸준함을 보였다. 또한 메이저 리그 데뷔 후 첫 11시즌 동안 연속으로 타율 3할 이상과 100 타점 이상을 달성하는 꾸준함을 보였다.
그는 1,040경기 만에 통산 1,500 안타를 달성했고, 1,393경기 만에 통산 2,000 안타를 달성했는데, 이는 메이저 리그 역사상 이 두 기록을 가장 적은 경기 수로 달성한 기록으로 남아있다. 그는 6시즌에서 200 안타 이상을 기록했으며, 이 중 1929년부터 1933년까지 5년 연속 200 안타를 기록했다. 1926년에는 199 안타, 1934년에는 192 안타를 기록하기도 했다. 그는 아메리칸 리그 우타자로서 가장 많은 안타를 기록한 선수였으나, 이후 알 칼라인에 의해 기록이 경신되었다.
메이저 리그에서 5안타 경기를 8회, 4안타 경기를 52회 기록했다. 통산 307 홈런을 기록했으며, 1925년부터 1932년까지 7시즌 연속 아메리칸 리그 홈런 부문 상위 6위 안에 들었다. 월드 시리즈 19경기에서는 타율 .329, 6 홈런, 17 타점, 15 득점, 장타율 .658의 활약을 펼쳤다. 수비에서도 뛰어난 외야수였으며, 통산 수비율 .982를 기록했고, 정확히 5,000개의 자살을 기록했다.
그의 별명인 "버켓 풋 알"(Bucketfoot Al버켓 풋 알영어)은 독특한 타격 자세에서 유래했다. 그는 타격 시 왼발을 3루 방향으로 크게 내딛는 자세를 취했는데, 이러한 모습이 마치 양동이에 발을 집어넣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에 붙여진 별명이다.
2.3.1. 연도별 타격 성적
연도 | 팀 | 경기 | 타석 | 타수 | 득점 | 안타 | 2루타 | 3루타 | 홈런 | 루타 | 타점 | 도루 | 도루실패 | 볼넷 | 고의 사구 | 사구 | 희생 번트 | 희생 플라이 | 병살타 | 타율 | 출루율 | 장타율 | OPS | |
---|---|---|---|---|---|---|---|---|---|---|---|---|---|---|---|---|---|---|---|---|---|---|---|---|
1924 | PHA | 152 | 644 | 594 | 69 | 183 | 31 | 9 | 8 | 256 | 102 | 16 | 15 | 18 | - | 0 | - | 2 | 60 | .308 | .343 | .431 | .774 | |
1925 | PHA | 153 | 696 | 654 | 122 | 253 | 43 | 12 | 24 | 392 | 129 | 7 | 14 | 6 | - | 1 | - | 1 | 41 | .387 | .419 | .599 | 1.018 | |
1926 | PHA | 147 | 642 | 583 | 90 | 199 | 53 | 10 | 19 | 329 | 109 | 11 | 3 | 10 | - | 1 | - | 1 | 49 | .341 | .392 | .564 | .956 | |
1927 | PHA | 106 | 458 | 406 | 86 | 159 | 36 | 11 | 15 | 262 | 108 | 10 | 2 | 20 | - | 1 | - | 1 | 30 | .392 | .436 | .645 | 1.081 | |
1928 | PHA | 119 | 509 | 464 | 78 | 163 | 33 | 9 | 15 | 259 | 107 | 1 | 4 | 11 | - | 3 | - | 1 | 30 | .351 | .396 | .558 | .954 | |
1929 | PHA | 143 | 629 | 581 | 114 | 212 | 41 | 9 | 34 | 373 | 157 | 4 | 3 | 16 | - | 1 | - | 1 | 38 | .365 | .398 | .642 | 1.040 | |
1930 | PHA | 138 | 611 | 554 | 152 | 211 | 41 | 16 | 36 | 392 | 165 | 9 | 2 | 17 | - | 1 | - | 1 | 34 | .381 | .423 | .708 | 1.131 | |
1931 | PHA | 128 | 563 | 513 | 105 | 200 | 37 | 13 | 22 | 329 | 128 | 3 | 3 | 0 | - | 3 | - | 3 | 45 | .390 | .444 | .641 | 1.085 | |
1932 | PHA | 154 | 718 | 670 | 144 | 216 | 28 | 9 | 35 | 367 | 151 | 4 | 2 | 0 | - | 1 | - | 1 | 76 | .322 | .368 | .548 | .916 | |
1933 | CWS | 146 | 648 | 605 | 85 | 200 | 29 | 10 | 14 | 291 | 119 | 5 | 1 | 2 | - | 2 | - | 2 | 49 | .331 | .373 | .481 | .854 | |
1934 | CWS | 138 | 613 | 558 | 102 | 192 | 36 | 7 | 18 | 296 | 104 | 3 | 2 | 0 | - | 2 | - | 2 | 58 | .344 | .403 | .530 | .933 | |
1935 | CWS | 128 | 561 | 525 | 68 | 140 | 22 | 7 | 16 | 224 | 79 | 4 | 6 | 1 | - | 2 | - | 2 | 43 | .267 | .313 | .427 | .740 | |
1936 | DET | 143 | 620 | 568 | 96 | 186 | 38 | 6 | 13 | 275 | 112 | 6 | 4 | 1 | - | 2 | - | 2 | 35 | .327 | .383 | .484 | .867 | |
1937 | WAS | 103 | 453 | 419 | 60 | 117 | 21 | 10 | 8 | 182 | 84 | 3 | 2 | 3 | - | 4 | - | 4 | 35 | .279 | .329 | .434 | .763 | |
1938 | WAS | 125 | 512 | 470 | 79 | 142 | 23 | 6 | 21 | 240 | 95 | 2 | 1 | 2 | - | 2 | - | 2 | 40 | .302 | .357 | .511 | .868 | |
1939 | BSB | 93 | 358 | 330 | 39 | 93 | 17 | 5 | 7 | 141 | 43 | 0 | - | 4 | - | 2 | - | 13 | 40 | .282 | .331 | .427 | .758 | |
1939 | CIN | 9 | 23 | 21 | 0 | 3 | 0 | 0 | 0 | 3 | 1 | 0 | - | 0 | - | 0 | - | 0 | 3 | .143 | .217 | .143 | .360 | |
통산: 20년 | 2215 | 9515 | 8759 | 1507 | 2927 | 539 | 149 | 307 | 4685 | 1827 | 88 | 65 | 111 | - | 30 | - | 23 | 737 | 23 | .334 | .380 | .535 | .915 |
3. 말년 및 코치 경력
선수 생활을 마친 후 앨 시먼스는 야구 코치로 활동했다. 그는 코니 맥 감독이 이끄는 필라델피아 애슬레틱스에서 1945년부터 1949년까지 코치로 재직했으며, 1950년에는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의 코치로 활동했다.
1951년 4월 초, 시먼스는 미공개된 질병으로 인해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코치직에서 물러날 것임을 발표했다. 당시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감독이었던 알 로페스가 그의 결정을 재고해줄 것을 권유했지만, 시먼스는 더 이상 팀에 도움을 줄 수 없다고 말하며 코치직을 사임했다.
4. 사망
앨 시먼스는 1956년 5월 26일 밀워키에서 54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는 자신이 거주하던 밀워키 애슬레틱 클럽 근처 인도에서 쓰러졌고, 심근경색으로 추정되는 심장마비로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쓰러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병원에서 사망 선고를 받았다. 그의 유해는 밀워키의 성 아달베르트 묘지에 안장되었다.
5. 유산 및 영예
앨 시먼스는 그의 뛰어난 선수 경력과 업적으로 여러 기관으로부터 인정받았다.
5.1. 명예의 전당 헌액
그는 다음과 같은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 위스콘신 스포츠 명예의 전당: 1951년 헌액
-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 1953년 헌액
- 폴란드계 미국인 스포츠 명예의 전당: 1975년 헌액
5.2. 순위 및 평가
1999년, 미국의 유서 깊은 스포츠 매체인 더 스포팅 뉴스는 앨 시먼스를 '가장 위대한 야구 선수 100인' 중 43위로 선정했으며, 그는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올센추리 팀 후보에도 올랐다. 2001년, 저명한 야구 통계학자 빌 제임스는 자신의 저서 "더 뉴 빌 제임스 역사 야구 개요"에서 시먼스를 역대 71번째 위대한 야구 선수이자 역대 7번째 위대한 좌익수로 평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