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앨버트 윌리엄 "알" 칼라인 (Albert William "Al" Kaline앨버트 윌리엄 "앨" 케일라인영어, 1934년 12월 19일 ~ 2020년 4월 6일)은 미국 출신의 프로 야구 선수로, 22시즌 동안 메이저 리그의 디트로이트 타이거스에서만 활약한 우익수였다. "미스터 타이거"라는 별명으로 불릴 만큼 팀에 헌신적이었던 그는 경기장 안팎에서 모범적인 태도를 보이며 존경받았다. 칼라인은 현역 시절 18차례 올스타에 선정되었고, 10차례 골드 글러브를 수상했으며, 1955년에는 최연소 타격왕에 등극하는 등 뛰어난 올라운드 플레이어로서 명성을 떨쳤다. 특히 1968년 월드 시리즈 우승에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으며, 1974년에는 역사적인 3,000안타를 달성하고 은퇴했다. 은퇴 후에도 그는 텔레비전 해설자와 타이거스 구단의 프런트 오피스 특별 보좌관으로 활동하며 총 67년 동안 한 팀에 몸담아 야구계의 전설적인 인물로 남았다. 1980년에는 첫 자격 연도에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2. 어린 시절
알 칼라인은 메릴랜드주 볼티모어에서 니콜라스와 나오미 칼라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가족은 가난했으며, 친척 중에는 준프로 야구 선수들이 있었지만, 그 누구도 고등학교를 졸업한 사람은 없었다.
2.1. 유년기와 교육
어린 시절 칼라인의 아버지는 빗자루를 만드는 일을 했으며, 어린 알의 투수로서의 투구 능력을 개발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9살이 되기 전에 칼라인은 이미 직구, 커브, 체인지업을 익혔다. 웨스트포트 그래머 학교에서 투수로 뛰면서 10연속 경기에서 승리하기도 했다. 그의 전설적인 투구력은 어린 시절부터 힘과 정확성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한 번은 피크닉 축제에서 공을 53 m (173.5 ft) 던졌는데, 심판들이 측정 오류를 의심하여 다시 던지도록 요청하자 53 m (175 ft)를 던져 모두를 놀라게 했다.
칼라인은 8살 때 골수염에 걸려 왼쪽 발에서 뼈를 0.1 m (2 in) 제거하는 수술을 받았다. 이 수술로 인해 발에 흉터와 영구적인 변형이 남았고, 그는 신체적인 손상을 극복하기 위해 발의 옆면으로 걷는 법을 배워야 했다. 이러한 역경을 이겨내려는 그의 결심은 선수 경력 내내 그의 특징이 되었다.
2.2. 고등학교와 초기 야구 경력
1949년부터 1950년까지 볼티모어의 서던 고등학교에 다니며 미식축구와 야구팀에 지원했다. 미식축구 시즌 도중 턱뼈 부상으로 경기를 중단했지만, 농구에서는 신입생임에도 불구하고 모든 득점 기록을 이끌었다. 봄이 되어 야구팀에 들어갔을 때, 투수 자리가 부족했기 때문에 코치 빌 앤더슨의 지시에 따라 외야수로 전향했다. 처음에는 주니어 대표팀에서 뛰다가 2학년 때부터 정식 대표팀으로 합류할 계획이었으나, 연습 경기 중 그의 뛰어난 수비력과 공격력을 본 코치는 곧바로 그를 대표팀에 합류시켰다.
칼라인은 고등학교 시절을 "열등생"으로 회상했지만, 교사들과의 좋은 관계 덕분에 무사히 학업을 마칠 수 있었고, 결국 야구 선수가 될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4년 내내 야구에서 전미 주 대표팀의 영예를 얻었다. 신입생 시절 타율 .333, 2학년 시절 타율 .418을 기록하며 수비 실력도 향상시켰다. 2학년이 끝난 후에는 1951년 허스트 신문이 후원하는 올스타전에 선발되어 뉴욕의 폴로 그라운드에서 경기를 펼쳤다. 이 경기는 그에게 중요한 무대가 되었고, 그는 2개의 단타와 1개의 홈런을 치며 MVP로 선정되었다. 다음 날 칼라인은 뉴욕 양키스가 세인트루이스 브라운스에게 패하는 자신의 처음이자 마지막 메이저 리그 경기를 양키 스타디움에서 직접 관람했다.
고등학교 시절 2년간의 뛰어난 활약에도 불구하고, 어린 칼라인에게 최고의 순간은 아직 오지 않았다. 그는 주니어 시절 타율 .469, 시니어 시절 타율 .488을 기록하며 뛰어난 수비력을 선보였다. 이러한 활약은 브루클린 다저스,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필라델피아 필리스, 디트로이트 타이거스 등 메이저 리그 구단들의 큰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타이거스의 스카우트 에드 캐털리나스는 칼라인의 고등학교 경력을 면밀히 관찰하며 그를 타이거스의 차세대 위대한 선수로 만들기로 결심했다. 칼라인의 능력에 대해 질문을 받았을 때 캐털리나스는 "나에게 그는 스카우트가 마음속으로 그려내고 누군가가 그 패턴에 맞춰 나타나기를 기도하는 유망주였다"고 말했다. 캐털리나스는 볼티모어에서 열리는 모든 여름 오락 리그에서 칼라인이 뛰는 것을 보았고, 아메리칸 리전 볼에서는 한 해에 타율 .609를 기록하는 것을 목격했다. 타이거스는 프랜차이즈 역사상 처음으로 전 시즌 최하위로 마감한 후 이 성적을 되풀이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캐털리나스는 칼라인과 계약하기 위해 타이거스 회장 존 맥헤일 시니어를 설득하려 필사적으로 노력했지만, 맥헤일은 투수 톰 퀄터스에게 더 큰 관심을 보였다. 필라델피아가 퀄터스와 계약한 후, 타이거스가 칼라인과 계약할 기회가 열렸다. 캐털리나스는 맥헤일에게 직접 볼티모어로 날아가 칼라인을 만나보라고 설득했다. 맥헤일은 그곳에서 칼라인의 능력에 깊은 인상을 받고, 디트로이트로 돌아가 타이거스 회장 스파이크 브릭스로부터 보너스 계약으로 칼라인과 계약할 허락을 받았다.
당시 규정상 선수들은 고등학교 졸업 전까지 메이저 리그 구단과 접촉할 수 없었다. 칼라인이 졸업한 다음 날, 캐털리나스는 계약서를 들고 칼라인의 집으로 찾아갔다. 캐털리나스는 니콜라스와 알의 환영을 받았지만, 곧 어린 선수와 함께 자리를 떴다. 캐털리나스는 3년 동안 총 1.50 만 USD의 계약금과 2.00 만 USD의 연봉을 제안했다. 일본어 자료에 따르면 당시 계약금은 3.50 만 USD로 명시되어 있다. 칼라인은 부모님과 제안을 논의한 후 계약에 동의했다. 그는 나중에 계약금이 부모님의 주택담보대출을 갚고 어머니의 눈 수술 비용을 대는 데 도움이 되었다고 말했다. 니콜라스는 계약서에 서명했고, 알 칼라인은 정식으로 디트로이트 타이거스 선수가 되었다. 당시 메이저 리그에는 "보너스 룰"이 적용되고 있었는데, 4,000달러(현재 가치로 약 4000 USD에 해당하는 금액) 이상의 계약금을 받은 신인 선수는 2시즌 동안 메이저 리그 25인 로스터에 의무적으로 포함되어야 하는 규정이었다. 이 규칙을 지키지 않을 경우 구단은 해당 선수에 대한 권리를 잃게 된다. 칼라인의 계약금이 1.50 만 USD에 달했기 때문에, 그는 마이너 리그를 거치지 않고 고등학교에서 곧바로 타이거스에 합류했다.
3. 메이저 리그 경력
알 칼라인은 디트로이트 타이거스에서 22시즌 동안 프로 야구 경력을 이어갔다.
3.1. 데뷔와 초기 성공 (1953-1959)
1953년 6월 25일, 칼라인은 필라델피아의 쉬브 파크에서 필라델피아 애슬레틱스를 상대로 데뷔 경기를 치렀다. 당초 구단의 계획은 칼라인이 메이저 리그 팀에서 2년 동안 경험을 쌓은 후 2~3년 동안 마이너 리그 팀에서 뛰게 하는 것이었다. 이날 칼라인은 등번호 25번을 달고 6회말 중견수로 교체 출전하며 빠르게 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한 번도 우익수로 뛰어본 적이 없었지만, 글러브를 들고 우익수 자리를 차지했다. 그는 타석에서 해리 버드를 상대로 첫 메이저 리그 타수를 기록했고, 중앙으로 높이 뜬 직구를 쳤지만 아웃되었다. 7월 8일 시카고 화이트삭스의 루이스 알로마를 상대로 첫 메이저 리그 안타인 단타를 기록했다. 그는 워싱턴 세네이터스를 상대로 돈 룬드의 2루타로 1루로 돌아오면서 득점을 기록했고, 이 득점으로 "볼티모어 그레이하운드"라는 별명을 얻었다. 비록 30경기만을 뛰었지만, 그의 활약은 프레드 허친슨 감독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1953년 스포팅 뉴스의 기사에 따르면 타이거스는 칼라인을 2루수와 유격수로도 활용했지만, 결국 그를 외야수로 유지하기로 결정했다.
1953년 시즌 후 칼라인은 볼티모어로 돌아와 비시즌 동안 스포츠 용품점에서 일하며 테드 윌리엄스의 조언을 실천했다. 윌리엄스는 칼라인에게 낮은 공을 치는 방법과 더 무거운 방망이를 휘두르는 방법 등 비시즌 훈련에 대한 조언을 해주었다. 칼라인은 팔이 지칠 때까지 방망이를 휘두르는 등 훈련에 매진했다. 또한 고등학교 시절 연인이었던 매지 루이즈 해밀턴과 계속 데이트를 즐겼고, 그녀는 야구에 대한 이해심이 깊었다. 봄 훈련을 떠나기 직전, 칼라인은 루이즈에게 청혼했고 그녀는 받아들여 1954년 시즌 후에 결혼했다.
쿠바에서 열린 겨울 경기에서 매일 출전하던 외야수 스티브 수치콕이 손목 부상을 당하면서 칼라인은 우익수로서 귀중한 훈련 시간을 얻게 되었다. 칼라인은 19세의 나이로 주전 우익수가 되었다. 그는 그 시즌에 수비력으로 모두를 놀라게 했고, 그의 공격력도 곧 충분해졌다. 올스타 브레이크 전까지 시즌 대부분을 .250의 타율로 기록했다. 브레이크 후 칼라인은 타율을 .283으로 끌어올렸고, 한 달 뒤 홈경기에서 첫 메이저 부상을 입었다. 브릭스 스타디움에서 오른쪽으로 날아간 플라이 볼을 잡기 위해 칼라인이 파울 지역으로 돌진하다가 좌석을 보호하는 벽에 부딪혀 쓰러진 것이다. 이 사고 후 타이거스 회장 스파이크 브릭스는 칼라인이 다시 부상을 입을까 염려하여 좌석들을 제거하도록 지시했다. 칼라인은 .276의 타율로 첫 풀 시즌을 마쳤다. 그의 부족한 파워는 우려의 대상이었다. 그는 4개의 홈런과 43개의 타점을 포함해 단 25개의 장타만을 기록했다.
칼라인은 타석에서의 기량을 향상시켜야 한다는 것을 알고 비시즌에 돌입했다. 그는 팬들과 새 감독 버키 해리스를 실망시키지 않았고, 조 디마지오에 비견될 정도의 찬사를 받았다. 4월 17일, 그는 6회에 2개를 포함한 3개의 홈런을 터뜨렸다. 4월 말까지 칼라인은 14경기 연속 안타를 기록하며 .453의 타율을 자랑했다. 그는 올스타전에 아메리칸 리그의 주전 우익수로 팬들의 투표를 받아 선정되었다. 브레이크 후에도 칼라인은 꾸준히 안타를 이어갔다. 7월 말에는 타율, 득점, 타점, 안타, 홈런에서 리그 선두를 달리고 있었다. 칼라인은 9월 초까지 뜨거운 타격 감각을 이어갔지만, 이후 부진에 빠졌다. 그는 시즌을 200개의 안타로 마감하며 타이거스에서 12년 만에 200안타를 기록한 첫 외야수가 되었다. 그는 타율 .340으로 아메리칸 리그 타격왕을 차지했다. 20세의 나이로 타격왕을 차지한 칼라인은 타이 콥이 1907년 타격왕을 차지했을 때보다 1살 어려 최연소 타격 챔피언이 되었다. 1955년 최우수 선수상 투표에서는 요기 베라에 이어 2위를 차지했다. 칼라인은 이 첫 올스타 선정을 시작으로 1967년까지 연속으로 올스타에 선정되었다.
이듬해인 1956년에도 칼라인은 .314의 타율, 27홈런, 개인 최고 기록인 128타점을 기록하며 AL MVP 투표에서 3위에 올랐다. 그는 1956년 18개, 1958년 23개의 보살로 리그 외야수 부문에서 선두를 달렸다. 1957년에는 10개의 골드 글러브 중 첫 번째를 수상하며 향후 11시즌 동안 이 상을 거머쥐었다. 1958년에는 투구에 맞아 여러 경기를 결장했고, 1959년에는 공에 맞아 광대뼈가 부러지는 부상으로 잠시 결장했으나, 18경기만 놓치고 타율 .327, 27홈런으로 시즌을 마쳤다. 또한 아메리칸 리그에서 장타율(.530)과 OPS(.940)에서 선두를 차지했다. 26번째 생일 무렵까지 칼라인은 1,200개의 안타를 쌓았는데, 이는 타이 콥 (1,433개)과 멜 오트 (1,249개)에 이어 MLB 역사상 25세 선수가 기록한 세 번째로 높은 기록이었다.
1957년 비시즌 동안 칼라인은 자신과 디트로이트 레드윙스의 포워드 고디 호우를 위한 새로운 사업에 뛰어들었다. 그는 처음에는 내키지 않았지만, 아내 루이즈의 설득으로 참여했다. 칼라인, 호우, 그리고 사업가 프랭크 칼린은 미시간 자동차 생산 주식회사를 설립했고, 칼라인은 부회장으로 재직했다. 이 사업은 매우 성공적이었고, 세 사람은 호우-칼라인-칼린 주식회사를 추가로 설립했다. 그러나 비시즌 동안 계약 문제로 논쟁이 있었다. 칼라인은 승급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지만, 구단은 그가 원하는 만큼의 인상을 제시하지 않았다. 이로 인해 많은 팬들이 칼라인을 거만하다고 여겼고, 기자들도 적대적인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칼라인은 기자 회견을 피하며 더욱 내성적인 성격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57년 시즌은 그에게 성공적이었다. 그는 올스타전 주전 선수로 선정되었고, 8월 말에는 타율을 .300 가까이 끌어올렸다. 8월 21일에는 첫 아들 마크 앨버트가 태어나는 기쁨을 누렸다. 칼라인의 강한 타격과 뛰어난 수비력 덕분에 타이거스는 4위를 차지했고, 그는 10개의 골드 글러브 상 중 첫 번째를 받았다. 1958년에도 그는 .313의 타율과 뛰어난 수비력을 이어가며 2년 연속 골드 글러브를 수상했다.
1959년 시즌은 칼라인에게 변화와 발전의 시기였다. 주전 중견수 하비 퀸이 팔에 공을 맞은 후, 칼라인은 중견수로 자리를 옮겼다. 그는 우익수를 더 선호했지만 중견수에서도 잘 활약했다. 퀸이 부상에서 복귀하자 새 감독 지미 다이크스는 칼라인을 중견수에, 퀸을 우익수에 배치했다. 칼라인은 새 포지션에서 번성했고, 용감하고 끈기 있는 리더로서의 면모를 보이기 시작했다. 뺨에 공을 맞아 5경기 동안 벤치에 앉아 있었지만, 그는 참지 못하고 다이크 감독에게 경기에 뛰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칼라인은 올스타전 주전으로 선정되었고, 이번에는 동료 중견수 미키 맨틀보다 앞섰다. 그는 또한 화이트삭스의 빌리 피어스를 상대로 1,000번째 개인 통산 안타를 기록했다. 칼라인은 퀸의 .353에 이어 .327의 타율로 타격 순위 2위를 차지하며 시즌을 마쳤다.
3.2. 꾸준한 경기력과 부상 (1960-1967)
1960년 시즌 전, 빌 드윗이 타이거스의 회장 겸 단장으로 부임했다. 드윗은 즉시 놈 캐시를 영입하고, 타격 챔피언 하비 퀸을 홈런 선두 주자 록키 콜라비토와 맞바꿔 클리블랜드 인디언스로 보냈다. 5월에 타이거스와 칼라인은 모두 부침을 겪었다. 칼라인은 .250에 불과한 타율을 기록했는데, 많은 이들이 오프필드에서의 방해 때문이라고 추측했다. 세금을 줄이기 위해 칼라인과 고디 호우의 파트너였던 프랭크 칼린은 3년간의 세금 공제 조항을 이유로 칼라인과 호우에게 경주마를 구매하도록 설득했다. 경주마 소유는 야구 선수에게 금지된 부업으로 간주되었고, 이 이야기는 언론의 집중을 받았다. 칼라인은 HKC 마구간에 대한 자신의 지분을 신속히 매각하며 경마와 도박에서 자신을 멀리했다. 시즌은 타이거스와 칼라인에게 더욱 실망스러웠다. 평소 온화한 성격의 칼라인은 스트라이크 판정에 대해 심판과 언쟁을 벌이다 퇴장당했지만, 경기 후 심판에게 다가가 사과했다. 그는 더그아웃으로 걸어가면서 자신이 틀렸음을 인정했다. 올스타 경기에 후보 선수로 선정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칼라인은 오랜 부진 끝에 6년 연속 올스타 출전 기회를 얻었다. 드윗은 홈런 선두 주자와 타격 챔피언을 맞바꾸며 역사를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다이크스 감독을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의 감독 조 고든과 맞바꾸며 또 다른 역사를 만들었다. 시즌의 혼란 속에서 칼라인은 1954년 이후 가장 낮은 .278의 타율로 시즌을 마감했다.
1961년, 타이거스는 새 감독으로 밥 셰핑을 선임했다. 셰핑은 즉시 칼라인에게 더 리더가 되기를 요청했고, 스타 선수는 이에 응답했다. 칼라인은 목소리를 높이는 스타일은 아니었지만, 필요할 때마다 모범을 보이며 팀을 이끌었다. 그는 시즌 내내 좋은 활약을 펼쳤고, 7번째 올스타 경기에 선정되었다. 그는 .324의 타율로 시즌을 마쳐 타격 경쟁에서 2위를 차지했으며, "올해의 아메리칸 리그 컴백 선수"로 뽑혔다.
1962년 칼라인은 월드 시리즈에서 뛰고 20년간의 선수 경력을 가지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시즌을 시작했다. 그는 또한 지난 시즌의 낮은 삼진 수를 이유로 들며 타석에서 더 공격적으로 나서기로 결심했다. 칼라인은 5월 21일에는 .358의 타율을 기록했지만, 그 행운은 5일 후 양키 스타디움에서 끝났다. 9회말 2아웃 상황에서 타이거스가 2대1로 앞서고 있을 때, 엘스턴 하워드가 우익수 쪽으로 짧은 플라이 볼을 쳤다. 2루수 제이크 우드와 1루수 놈 캐시는 공에 도달하지 못했다. 유일한 희망은 칼라인이 공을 잡는 것이었다. 그는 땅으로 떨어지는 공을 향해 뛰어들어 오른쪽 어깨로 착지했다. 칼라인은 공을 잡았지만, 빗장뼈가 부러졌다. 그는 최소 2개월 동안 결장할 것으로 예상되었다. 경기가 열리기 전, 셰핑 감독은 기자들에게 "우리는 칼라인 때문에 지금 이 자리에 있다. 앞으로 우리가 어디로 갈지는 그에게 달렸다"고 말했다. 셰핑 감독은 자신이 얼마나 옳았는지 알지 못했다. 칼라인이 결장한 57일 동안 타이거스는 페넌트 경쟁에서 7.5경기 차로 뒤처졌고, 선두와의 격차는 10.5경기로 벌어졌다. 이 기간 동안 루이즈가 둘째 아들 마이클 키스를 낳으면서 칼라인에게는 좋은 소식도 있었다. 칼라인은 그 시즌에 두 번의 올스타 경기 중 첫 번째 경기에 주전으로 선정되었지만, 부상으로 인해 출전하지 못했다. 시즌이 끝날 무렵, 칼라인은 54경기를 결장했음에도 불구하고 29개의 홈런 (자신의 이전 최고 기록보다 2개 더 많음)과 .304의 타율을 기록했다. 타이거스는 1위 양키스에게 10.5경기 차로 뒤처졌지만, 칼라인은 5번째 골드 글러브를 수상하고 아메리칸 리그 MVP 투표에서 6위에 올랐다.
1963년 시즌이 시작되면서 칼라인은 다시금 자신의 타격 방식을 바꾸기로 결심했다. 그는 타석에 더 오래 머물며 장타 듀오인 캐시와 콜라비토가 주자들을 홈으로 불러들이도록 했다. 팀은 서서히 시작했지만, 칼라인의 타격은 그가 또 다른 올스타 경기에 선발될 만큼 충분히 좋았다. 칼라인은 시즌 내내 무릎 부상과 씨름했고, 결국 몇 경기를 결장하면서 타격왕 타이틀을 칼 야스트렘스키에게 내주었다. 그는 야스트렘스키의 .321에 이어 .312의 타율로 2위를 기록했으며, 27개의 홈런을 치고 101개의 타점을 올렸다. 그는 MVP 투표에서 2위를 차지했고 6번째 골드 글러브를 수상했다.
1964년 칼라인은 더 많은 부상을 겪었다. 그는 봄 훈련 경기에서 뛰던 중 어린 시절 수술을 받았던 왼쪽 발을 다쳤다. 칼라인은 처음에는 찰리 드레슨 감독에게 부상을 숨겼고, 스스로 부상을 극복할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4월 말까지 부상은 더욱 심해졌고, 칼라인은 몇 경기 동안 벤치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10년 연속으로 올스타 경기에 선발되었지만, 부상으로 인해 출전하지 못했다. 타이거스는 그 시즌에 4위를 차지했고, 칼라인은 .293의 존경할 만한 타율과 7번째 골드 글러브를 수상하며 시즌을 마쳤다.
1965년 칼라인은 특별한 운동화를 신었음에도 불구하고 타율이 .281로 떨어졌다. 그는 중견수와 우익수 포지션을 오가며 8번째 골드 글러브를 수상했다. 비시즌 동안 칼라인은 발 수술을 받았다. 이 수술은 타이거스에게 힘든 한 해가 되었던 1966년에 그가 더 나은 타격을 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심근경색으로 인해 지난 시즌을 결장했던 드레슨 감독은 5월 16일 다시 병이 났다. 그는 그해 암 진단을 받은 코치 밥 스위프트로 교체되었다. 드레슨과 스위프트는 둘 다 그 해에 사망했다. 프랭크 스캐프가 감독으로서 시즌을 마쳤다. 이러한 혼란에도 불구하고 칼라인은 12년 연속 올스타 경기에 선발되었고, 29개의 홈런과 .288의 타율을 기록하며 타이거스가 3위를 차지하는 데 기여했다. 그는 또한 9번째 골드 글러브를 수상했다.
타이거스는 새 감독 메이요 스미스의 지휘 아래 1967년 높은 희망을 가졌다. 스미스는 칼라인을 다시 우익수로 돌려놓았다. 칼라인은 13년 연속으로 올스타팀에 선정되었지만, 기이한 부상으로 26경기에 출전하지 못했다.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에게 좌절스러운 패배를 당한 후 삼진을 당하자, 칼라인은 방망이를 배트 걸이에 내리쳐 자신의 손이 부러졌다. 1962년과는 달리, 타이거스는 칼라인 없이도 경쟁력을 유지하며 15승 11패를 기록했다. 타이거스는 전 해에도 치열한 싸움을 벌였지만, 보스턴 레드삭스에 밀려 2위를 차지했다. 칼라인은 31경기를 결장했음에도 불구하고 25개의 홈런 (자신의 300번째 홈런 포함)과 78개의 타점으로 .308의 타율을 기록했다. 칼라인은 10번째이자 마지막 골드 글러브를 수상했다. 레드삭스는 1967년 월드 시리즈에서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에게 패했다.
3.3. 1968년 월드 시리즈 우승
1968년은 새로운 도전의 시즌이었다. 비시즌 동안, 33세의 칼라인은 야구에 전념하기 위해 미시간 자동차 생산 주식회사를 떠났다. 그는 4월 18일 인디언스에 5대0으로 승리한 경기에서 자신의 2,000번째 경기에 출전했다. 5월 19일 칼라인은 자신의 307번째 홈런을 쳐 타이거스 역사상 홈런 선두 주자였던 행크 그린버그를 넘어섰다.
하지만 성공은 오래가지 못했다. 6일 후, 칼라인의 팔은 루 크로스의 투구에 맞아 부러졌고, 그는 7월 1일까지 복귀하지 못했다. 칼라인이 자리를 비운 동안 짐 노스럽이 우익수를 차지하며 좋은 활약을 펼쳤다. 칼라인이 돌아왔을 때, 그는 주로 대타자로 기용되었고 1루수로 뛰었다. 출전 시간이 줄었음에도 불구하고 칼라인은 페넌트 레이스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9월 14일 그는 데니 매클레인의 30번째 승리에서 동점 득점을 기록했다. 9월 17일 칼라인은 놈 캐시를 위한 대타자로 나서 타이거스가 페넌트 우승을 확정하는 득점을 올렸다. 경기 후 칼라인은 스미스 감독에게 자신이 부상으로 결장하는 동안 다른 선수들이 활약했기 때문에 월드 시리즈에서 뛸 가치가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디트로이트 타이거스에게 칼라인이 어떤 의미였는지 잘 알던 스미스 감독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스타 선수를 출전시키기 위해 중견수 미키 스탠리를 유격수로, 짐 노스럽을 중견수로, 그리고 칼라인을 우익수로 배치하는 파격적인 전략을 감행했다. ESPN은 후에 스미스의 이 결정을 "세기의 10대 위대한 감독 결정" 중 하나로 평가했다. 이 전략은 성공적임이 입증되었고, 타이거스는 밥 깁슨을 상대로 한 7차전을 포함해 3연속 경기를 승리하며 3대1의 열세를 뒤집었다. 타이거스는 칼라인의 .379 타율과 2개의 홈런에 힘입어 1968년 월드 시리즈에서 우승하며 1945년 이후 첫 우승을 차지했다. 칼라인은 유일한 월드 시리즈 출전에서 7경기 동안 2개의 홈런과 8타점을 기록했다. 이 우승으로 칼라인과 그의 팀원들은 각각 1.00 만 USD의 보너스 수표를 받았다. 당시 칼라인의 연봉은 약 7.00 만 USD였다.
1969년 타이거스는 월드 시리즈 우승의 기적을 재현하지 못했다. 90승을 거두었지만, 새로 편성된 아메리칸 리그 동부 지구에서 볼티모어 오리올스에 19경기 차로 뒤졌다. 칼라인은 131경기에서 타율 .272, 21홈런을 기록했다. 이는 그의 경력에서 20홈런 이상을 기록한 마지막 시즌이었다.
3.4. 마지막 선수 생활과 은퇴 (1969-1974)
1970년, 칼라인은 외야 충돌로 인해 거의 치명적인 부상을 입는 기이한 사고를 당했다. 5월 30일 밀워키의 카운티 스타디움에서 밀워키 브루어스와의 경기 중, 칼라인은 중견수 짐 노스럽과 플라이 볼을 쫓다가 충돌했다. 칼라인은 경고 트랙에 쓰러져 곧바로 질식하기 시작했다. 충돌 충격으로 턱이 잠기고 혀가 기도를 막았기 때문이다. 기민하게 달려온 좌익수 윌리 호턴이 칼라인의 입을 강제로 벌려 기도를 확보했고, 이는 그의 생명을 구한 것으로 여겨진다. 칼라인은 들것에 실려 나갔고, 예방 차원에서 밤새 병원에 입원했다. 그는 나중에 당시 사고를 기억하지 못한다고 말했다.
1971년 타율 .294를 기록한 후, 칼라인은 타이거스 선수로는 처음으로 10.00 만 USD 계약을 맺었다. 그는 전 해에 1970년 타율 .278, 16홈런을 기록한 후 자신은 그럴 자격이 없다고 말하며 9.50 만 USD에서 10.00 만 USD로의 인상을 거절했었다. 디트로이트는 1972년 시즌 내내 페넌트 경쟁을 벌였고, 정규 시즌 마지막 경기에서 보스턴 레드삭스에 반 경기 차로 뒤졌다. 칼라인은 두 경기에서 8타석에 들어서 5안타 3득점을 기록했다. 디트로이트는 이 첫 두 경기를 이기며 아메리칸 리그 동부 지구 우승을 확정 지었다. 칼라인은 1972년에 106경기에서 타율 .313을 기록하며 1967년 이후 처음으로 3할 타율을 넘겼다. 타이거스는 그 해 오클랜드 애슬레틱스에게 아메리칸 리그 챔피언십 시리즈에서 패했는데, 레지 잭슨이 시리즈의 결정적인 5차전에서 홈스틸을 성공시켰기 때문이다. 1973년 3월, 칼라인은 경기장 안팎에서 야구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로베르토 클레멘테상을 수상했다.
1974년 9월 24일, 칼라인은 볼티모어 오리올스의 데이브 맥널리를 상대로 2루타를 치며 MLB 역사상 12번째로 3,000안타를 달성한 선수가 되었다. 이 이정표를 달성한 후, 칼라인은 시즌 종료와 함께 은퇴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칼라인은 1974년 10월 3일 마지막 경기 후 "끝나서 다행이다. 정말 그렇다. 그리워하지 않을 것 같다. 스프링캠프는 그리워할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마지막 메이저 리그 시즌에 그는 전적으로 지명타자로 활용되었고, 타율 .262, 13홈런을 기록했다.
칼라인은 통산 3,007안타 (당시 역대 11위, 현재 32위), 498개의 2루타, 75개의 3루타, 399개의 홈런 (2024년 현재 타이거스 기록이자 역대 58위), 1,622득점, 1,277개의 볼넷, 1,582타점 (현재 역대 44위)을 기록하며 선수 생활을 마쳤다. 그는 경력 동안 9번이나 3할 이상의 타율을 기록하여 통산 타율 .297을 남겼고, 7번이나 25개 이상의 홈런을 쳤다. 칼라인은 또한 타이거스 역사상 최다 출전 경기 (2,834경기), 최다 볼넷 (1,277개), 최다 희생 플라이 (104개)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그는 삼진 (1,020개)보다 더 많은 볼넷을 기록했다. 칼라인은 통산 대타 타율 .311 (119타석 37안타)에 2홈런, 23타점을 기록하며 좋은 대타자였다. 그의 시즌 최다 삼진 기록은 마지막 시즌에 기록한 75개였다. 그 이전에는 66개 이상 삼진을 당한 적이 없었다. 포지션 선수 중 칼라인은 통산 WAR 92.8로 역대 29위 (외야수 중 15위)에 랭크되어 있다.
수비적으로 칼라인은 통산 .987의 수비율을 기록했다. 그의 첫 풀 시즌 (1954년)에는 16개의 외야 보살을 기록했는데, 여기에는 7월 7일 시카고 화이트삭스와의 경기에서 3개의 보살이 포함되었다. 그는 1954년부터 1958년 사이에 84개의 외야 보살을 기록했으며, 1958년에는 개인 최고 기록인 23개를 기록했다. 그 시즌 이후로는 주자들이 그의 강한 어깨를 시험하는 일이 드물어 그의 보살 수는 줄어들었다.
4. 선수 특징
알 칼라인은 동시대 선수들에게 다재다능하고 균형 잡힌 선수로 평가받았다. 볼티모어 오리올스의 3루수 브룩스 로빈슨은 그에 대해 "수비가 훌륭한 선수들이 많았지만,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선수는 알 칼라인이었다. 그는 위대한 외야수가 갖춰야 할 모든 것을 갖춘 완벽한 선수였다. 뛰어난 스피드, 공을 잡는 능력, 그리고 강한 송구 능력까지"라고 말했다. 감독 빌리 마틴은 한때 "나는 항상 알 칼라인을 '미스터 퍼펙션'이라고 불렀다. 그는 타격, 수비, 주루, 송구 등 모든 것을 해내며, 그를 슈퍼 야구 선수로 만드는 특별한 탁월함을 더한다. 알은 어떤 포지션, 어떤 타선에도 잘 어울린다"고 말했다.
5. 은퇴 후 경력

선수 생활 은퇴 후, 칼라인은 디트로이트 지역에 거주하며 플로리다에도 집을 유지했다. 그는 타이거스 구단에서 활발히 활동하며, 1975년부터 2002년까지 주로 조지 켈과 함께 팀 텔레비전 중계의 컬러 코멘테이터로 활동했고, 이후에는 팀의 고문으로 일했다. 2003년부터 칼라인은 타이거스 사장/CEO/단장 데이브 돔브로스키의 특별 보좌관으로 재직했으며, 그의 임무에는 스프링 트레이닝 동안 외야수들을 코칭하고 멘토링하는 것이 포함되었다. 전 타이거스 팀 동료인 윌리 호턴도 같은 직책을 맡았고, 두 사람은 2006년 코메리카 파크에서 열린 월드 시리즈의 시구를 맡았다. 칼라인은 2020년 사망할 때까지 보좌관 직책을 계속 유지했다。 한 팀에서 67년 동안 근무한 그의 경력은 MLB 역사상 가장 긴 근무 기간 중 하나였다.
오랜 선수 생활과 타이거스 구단과의 오랜 관계 때문에 칼라인의 별명은 "미스터 타이거"였다. 1970년, 타이거 스타디움 좌익수 스탠드 뒤편에 있던 체리 스트리트는 그의 이름을 따서 "칼라인 드라이브"로 이름이 변경되었다. 1999년 9월 27일, 디트로이트가 타이거 스타디움에서 캔자스시티 로열스와의 마지막 경기를 치렀을 때, 칼라인은 유니폼을 입고 조지 브렛과 함께 심판들에게 마지막 라인업 카드를 제시하는 영광을 누렸다.
칼라인의 손자 콜린 칼라인은 2007년 MLB 드래프트에서 타이거스에 25라운드로 지명되었으나 계약하지 않고 플로리다 서던 칼리지에서 야구를 했다. 팀은 그를 2011년 MLB 드래프트에서 26라운드로 다시 지명했고, 그는 2011년부터 2012년까지 디트로이트 산하 마이너 리그에서 뛰었다.
6. 영예와 유산
6.1. 명예의 전당과 영구 결번
칼라인은 1980년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에 첫 자격 연도에 입성하여 역사상 10번째로 첫해에 헌액된 선수가 되었다. 그는 스포츠 기자들이 던진 385표 중 340표 (88.3%)를 얻었다. 칼라인과 듀크 스나이더만이 1980년에 스포츠 기자들에 의해 선출되었다. 칼라인은 나중에 "월드 시리즈와 같은 팀의 성취보다 나에게 일어난 개인적인 일을 선택할 것이라고는 결코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것이 내 인생에서 일어난 가장 큰 일이라고 말해야 할 것 같다"고 소감을 밝혔다.

칼라인은 타이거스 구단에서 처음으로 그의 등번호 6번이 영구 결번된 선수로 영예를 안았다.
6.2. 수상과 업적
다재다능하고 균형 잡힌 선수였던 그는 필드에서의 탁월함을 인정받아 10개의 골드 글러브 (1957~59년, 1961~67년)를 수상했으며, 15차례 올스타전 (1955~67년, 1971년, 1974년)에 출전했다.
1999년, 칼라인은 스포팅 뉴스의 '위대한 야구 선수 100인' 목록에서 76위에 올랐으며,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올센추리 팀의 최종 후보로 지명되었다. 2020년, 디 애슬레틱은 스포츠 작가 조 포스난스키가 선정한 "야구 100인" 목록에서 칼라인을 51위에 랭크시켰다.
2022년, 스포팅 뉴스는 그들의 'SN 러시모어'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칼라인을 디트로이트 레드윙스의 고디 호우, 디트로이트 라이온스의 배리 샌더스, 디트로이트 피스톤즈의 아이제아 토머스와 함께 "디트로이트 스포츠의 러시모어 산"에 선정했다. 그는 또한 루 게릭 메모리얼 어워드와 하치상도 수상했다.
1993년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올스타전은 그의 고향인 볼티모어에서 1958년 이후 유일하게 열린 올스타전의 35주년을 기념하여 칼라인에게 헌정되었다. 칼라인은 레온 데이와 전 볼티모어 오리올스의 스타 브룩스 로빈슨과 함께 경기 전 행사에서 시구를 했다. 칼라인의 시구는 미래의 디트로이트 타이거스 선수이자 올스타 데뷔를 한 이반 로드리게스가 받았다.
6.3. "미스터 타이거"와 영향력
칼라인은 타이거스와의 오랜 경력과 유대감으로 인해 "미스터 타이거"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의 통산 안타 3,007개 중 399개의 홈런 (400개에 1개 모자라는 아쉬움)은 타이거스 구단 기록으로 남아 있으며, 이는 타이 콥의 구단 기록(3,902개)에 이어 두 번째로 높은 기록이다. 그는 594경기를 부상으로 결장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인상적인 기록을 남겼다。 2001년 스포팅 뉴스의 기사에서 어니 하웰과 요기 베라는 칼라인이 외야수로서 최고의 능력을 가졌다고 평했다.
은퇴 후인 1976년부터 칼라인은 타이거스 텔레비전 중계의 해설자로서 두 번째 경력을 시작했다. 그는 또한 봄 훈련 강사로 참여하여 젊은 커크 깁슨에게 외야 수비법을 가르치기도 했다. 2001년 칼라인은 타이거스의 구단주 마이크 일리치의 특별 고문이 되기 위해 방송실을 떠났다. 2003년, 새 단장 데이브 돔브로스키는 칼라인과 그의 전 동료 선수 윌리 호턴을 단장의 특별 보좌관으로 임명했다. 방송인으로서와 특별 임명직으로서의 활동 덕분에 칼라인은 50년 이상 타이거스 구단과 관계를 유지했다. 이 때문에 그는 "미스터 타이거"로 알려져 있으며, 어떤 이들은 그를 단순히 등번호 6번으로 부르기도 한다.
7. 개인 생활
칼라인은 1954년 고등학교 시절부터 사귀었던 매지 루이즈 해밀턴과 결혼했다. 그에게는 마크 앨버트 칼라인 (1957년 8월 21일생)과 마이클 키스 칼라인 (1962년생)이라는 두 아들이 있었다. 마이클은 마이애미 대학교에서 대학 야구를 했고, 그의 아들인 콜린 칼라인은 짧은 마이너 리그 경력을 가졌으며 대학 코치로 활동했다.
8. 사망
칼라인은 2020년 4월 6일, 미시간주 블룸필드 힐스에 있는 자택에서 8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사인은 공식적으로 보고되지 않았다.
9. 관련 항목
- 골드 글러브상 수상자 명단 (외야수)
-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역대 타격왕 목록
-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개인 통산 2루타 리더 목록
-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개인 통산 안타 리더 목록
-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개인 통산 홈런 리더 목록
-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개인 통산 득점 리더 목록
-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개인 통산 타점 리더 목록
-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개인 통산 총 루타 리더 목록
-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에서 한 프랜차이즈에서만 뛴 선수 목록
-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의 영구 결번 목록
- 마이너 리그를 거치지 않고 메이저 리그에 직행한 선수 목록
-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의 선수 목록